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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명문 경주이씨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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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이야기 스크랩 독살된 왕? :8예종(1년2개월)/절반의 성공 : 9성종(인수대비/폐비윤씨//진성대군)
元炯(상서공파 찬성공下 기봉공문중) 추천 0 조회 1,070 20.01.14 08:0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제8대 예종 가계도 

세조 - 정희왕후 파평윤씨 윤번의 딸

제 8대 예종

차남 : 해양대군 (1450-1469)

재위기간 : 1468.9-1469.11(1년 2개월)

부인 : 2명 / 자녀 : 2남 1녀

1부인

장순왕후

청주한씨

(한명회)

1남

2부인

안순왕후

청주한씨

(한백륜)

1남1녀

인성대군

 

제안대군

현숙공주

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의 특권층을 남기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2호 | 20090920 입력

 

같은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태종과 세조는 공신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태종은 공신집단을 해체해 깨끗한 조정을 세종에게 물려준 반면 세조는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 집단을 그대로 예종에게 물려주었다.

 

예종은 이 공신 집단을 해체하지 않는 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예종이 왕 노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양자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육신 묘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성삼문·이개·박팽년·유응부의 시신을 몰래 이장하면서 조성되었다. 세자 예종은 공신들의 노리개로 떨어진 사육신 가족들을 석방시켜야 세조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① 쿠데타의 업보

 

조선 중기의 역관 조신(曺伸)이 쓴 『소문쇄록(소聞<7463>錄)』에는 세조와 한명회·신숙주가 함께한 술자리 이야기가 나온다. 술에 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잡으면서 자신의 팔도 잡으라고 말했는데 신숙주가 힘껏 잡는 바람에 세조는 “아프다. 아프다(疼疼)”라고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를 본 세자의 낯빛이 변하자 세조는 세자의 이름(晃:황)을 부르며 “나는 괜찮지만 너는 이러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밤이 늦어 귀가한 한명회는 청지기를 신숙주의 집으로 보내면서 “범옹(泛翁:신숙주)이 평일에 많이 취했어도 술이 조금 깨면 반드시 일어나 등불을 켜고 책을 본 후 다시 취침하는데 오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즉시 잠을 자라고 전하게 시켰다. 청지기가 보니 과연 신숙주는 책을 보고 있기에 한명회의 말을 전했다.


소문쇄록은 “임금이 술이 깨자 내시를 보내 신숙주의 집을 살펴보았더니 과연 잠을 자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술이 취했는지 일부러 그랬는지 의심해 내시를 보낸 것이다. 이 일화는 세조 정권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쿠데타로 즉위한 세조는 권력을 공신 집단과 나눌 수밖에 없는 모순에 처해 있었다. 더구나 상왕 단종 복위 기도 사건(사육신 사건)이 발생하자 세조는 공신 집단과 더욱 강하게 결탁할 수밖에 없었다.


사육신의 사당인 의절사 숙종 7년(1681)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으며, 정조 6년(1782)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사육신은 정조 때 국가 제사 대상인 배식단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급기야 세조는 ‘공신은 사형죄를 범해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세조실록』 8년 2월 30일)’면서 공신들을 법 위에 있는 특권층으로 만들었다.

 

왕조 국가의 기본질서인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이로써 무너졌다. 세조는 사망 1년 전인 재위 13년(1467)에 원상제(院相制)를 실시했다. 백옹(白<9852>) 등의 명나라 사신이 오자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집무하게 한 것이 원상제의 시초인데, 사신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을 실세 공신들이 장악하게 한 것이니 왕권이 둘로 나뉜 셈이었다.

세조 후반으로 갈수록 공신들의 권한은 더욱 강해져 재위 14년(1468) 3월에는 “분경(奔競)을 금한 것은 본시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 때문이었다”면서 분경까지 허용했다. 분경은 인사청탁인데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라고 호도하며 공신들에게 관직 매매를 허용한 것이다.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은 이렇게 국가의 기본적인 공적 체제마저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세조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한명회가 세웠다는 한강가의 압구정.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은 현실의 권력을 누렸으나 조선시대 내내 시비에 휘말렸다. 간송미술관 제공
재위 14년 7월 19일. 세조는 고령군(高靈君) 신숙주, 능성군(綾城君) 구치관, 상당군(上黨君) 한명회 등 공신들을 불렀다. 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변 직후 책봉한 정난(靖難)공신, 단종을 쫓아내고 즉위한 직후 책봉한 좌익(佐翼)공신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병석의 세조가 “내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모든 공신이 “전하께서는 곧 병을 떨치고 일어나실 수 있습니다”라고 반대했다. 국왕이 전위하고자 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관례지만 반대의 또 다른 요인은 세자와 권력 분점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점이었다.

 

세조와 공신들이 함께 다스리는 집단 지도체제를 세조 사후에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했다. 공신들은 세자 즉위 후 자신들의 권력이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을 왕권 강화 지시로 해석한 세자의 생각은 달랐다.

 

공신들이 전위에 반대하자 세조는 대신 대리청정을 시켰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리청정과는 달리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행랑)에서 고령군 고령신씨 신숙주, 영의정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등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제한적 대리청정이었다.

고령신씨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계기로 형성된 구공신(舊功臣:정난·좌익공신)의 대표이고 이준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공신(新功臣:적개공신)의 대표였다.

 

청주한씨 한명회·고령신씨 신숙주· 하동정씨 정인지 등이 구공신의 핵심이고, 이준· 의령남씨 남이 등이 신공신의 핵심이었다
.

 

대리청정을 맡게 된 세자는 부왕의 간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예종의 「지장(誌狀)」에는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이 나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에 있어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국왕의 병을 낫게 하려면 하늘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대사령(大赦令)이었다. 세자는 대리청정 다음 날 대사령을 내려 7월 20일 이전의 죄는 대역(大逆)·모반(謀叛), 조부모·부모 살해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했다. 그러나 세조의 병은 차도가 없었고 세조는 8월 1일 호조판서 교하노씨 노사신(盧思愼)에게 수릉(壽陵)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준비해두는 무덤이 수릉인데 『세조실록』은 이때 “세조가 눈물을 뿌렸고, 이 사실을 들은 여러 재추(宰樞:재상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고 있다
.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권력무상의 회한인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생의 애착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대사령을 내린 지 한 달여 만인 8월 27일 다시 대사령을 내렸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세자는 납부하지 못한 세금을 탕감하거나 깎아주고 내전(內殿)에 불상을 모셔놓고 기도도 올렸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여서 9월 들자 병세가 악화되는 가운데 황충(蝗蟲)이 추수를 앞둔 들판을 습격하고 혜성까지 나타났다.

드디어 세자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세조가 만든 업보(業報)를 푸는 것이었다. 계유정변과 상왕 복위 기도 사건(사육신 사건) 때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석방하는 문제였다. 16년 전인 단종 1년(1453)의 계유정변 때는 황보인·김종서 등의 가족들을 공신들이 나누어 가졌고, 13년 전인 세조 2년(1456)의 사육신 사건 때는 성삼문·유응부 등의 가족들을 나누어 가졌다.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 집의 여종이 되고 성 노리개가 된 이들의 원한을 풀지 않고서는 대사령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자는 그해 9월 3일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하동정씨 정인지·동래정씨 정창손·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 회인홍씨 홍윤성· 안동김씨 김질 등의 공신들은 계유정변 관련자 친족들의 방면(放免)은 찬성했으나 사육신 사건 관련자 친족들에 대해서는 “병자년(丙子年:세조 2년)의 난신(亂臣)의 일은 세월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급히 논(論)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세자는 “만약 난신에 연좌된 자를 모두 방면한다고 하면 어찌 세월의 오래되고 가까운 것을 논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사육신 사건 관련자의 친족들도 모두 방면하자는 뜻이었다. 세자는 “공노비가 된 자는 석방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공신에게 나누어준 자도 방면한다면 대신들이 싫어할까 염려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다.(『세조실록』 14년 9월 3일)”라고 덧붙였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는 괜찮지만 공신들의 재산으로 전락한 사육신의 친족들을 석방하려고 하면 공신들이 싫어할 것이란 뜻이었다. 그러자 사위 안동김씨 김질에게 사육신 사건을 고변시켰던 봉원군(蓬原君) 동래정씨 정창손(鄭昌孫)이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방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세자는 계유정변과 사육신 사건 피해자의 친족 일부를 석방했는데 그 수가 200여 명에 달했다.

이때 좌익 3등 공신 좌의정 죽산박씨 박원형(朴元亨)은 동부승지 온빈한씨 한계순에게 계유정변 때 사형당한 양옥(梁玉)의 누이 의비(義非) 대신 다른 여종을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세자는 “일이 이미 의논하여 정해졌는데 되돌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거절했다. 9월 7일 세조는 다시 세자에게 전위하겠다고 발표했고 두 달 전처럼 공신들이 반대했으나 세조는 “운이 간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데 너희들이 내 뜻을 어기려고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라며 꾸짖었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세조는 이날 면복(冕服)을 직접 세자에게 내려주며 “오늘 당장 수강궁(壽康宮:창경궁)에서 즉위하라”고 명했다. 세조 14년(1468) 9월 7일 세자가 수강궁에서 즉위하니 피로 점철되었던 세조 시대가 가고 예종 시대가 막이 열렸다. 다음 날 세조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전 세자의 후궁이었던 한백륜(韓伯倫)의 딸 소훈(昭訓) 한씨를 왕비로 삼으라고 명했으니 그가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예종은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왕위에 올랐으나 세종과는 전혀 다른 정국이었다. 태종은 숱한 비난을 들어가며 대부분의 공신을 대거 제거해 깨끗한 조정을 물려준 반면 세조는 거대한 공신 집단이란 짐을 고스란히 예종에게 넘겨주었다. 이 짐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예종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린 ‘의령남씨 남이의 죽음’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3호 | 20090926 입력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에게 공신은 필요악이었다. 재위 후반 세조는 신(新)공신, 구(舊)공신과 삼각 축을 형성했다. 세조는 공신들과 권력을 나눌 수밖에 없는 숙명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종은 이를 거부했다. 예종은 신구 공신을 상호 견제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공신들을 직접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그 첫 번째 사건이 남이의 옥사였다.
남이 장군 부부 묘와 남이 장군 초상 남이 장군 부부 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왼쪽 사진). 남이의 부인은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한 권람의 딸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서울 용산구 용문동 사당에 걸린 남이 장군 초상화다(오른쪽 사진). 매년 10월 1일 사당에서는 남이 장군 대제를 연다. 남이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모셨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② 新-舊 공신 권력투쟁

세조는 사망 넉 달 전인 재위 14년(1468) 5월 공신들과 술을 마시면서 “누가 원훈(元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구훈(舊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신훈(新勳)인가? 귀성군(龜城君)이로다”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구훈은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의 구공신이고, 신훈은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공신이었다. 진압 사령관이었던 귀성군 이준(李浚)과 대장이었던 신천강씨 강순(康純)·의령남씨 남이(南怡) 등이 신공신의 핵심이었다. 국왕과 구공신, 신공신은 권력의 삼각 축이었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 때 청주한씨 한명회와 고령신씨 신숙주가 모반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나오자 둘을 가둔 적이 있었다.

세조는 구공신과 신공신을 적절하게 대립시켜 왕권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예종은 현실을 무시하고 ‘모든 권력은 국왕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원칙에 집착했다. 예종은 즉위 직후 “정사(政事:인사권)는 나라의 큰 권한인데, 사사로운 곳으로 돌아가 공(公)을 폐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공신들의 인사 관여를 금지시켰다. 그는 백관의 감찰을 맡는 사헌부 관리를 정청(政廳:인사관청)에 참여시켜 인사 청탁을 뿌리 뽑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자광의 글씨 ‘봄이 오니 강촌에는 일마다 새롭다’며 자연을 노래했던 유자광은 남이를 모함했다는 혐의에다 서자에 대한 질시까지 겹쳐 대대로 간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앞으로 위장(衛將)이 2부(部)를 거느리고 인사에 대한 모든 분란을 금지하라. 정청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비록 종친·재추(宰樞:재상)·공신일지라도 즉시 목에 칼을 씌워 구속하고 나중에 보고하라. 만약 숨기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족주(族誅)하겠다.”

인사에 관여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구속할 것이며 이를 숨기면 족주(온 집안을 죽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의정 귀성군 이준과 우의정 김질이 함께 나서 “족주하는 법은 너무 과합니다”고 항의했고, 예종은 “족주를 극형(極刑)으로 바꾸어라”고 한발 물러섰다.

 

신공신 이준과 구공신 김질이 공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공동 대응한 것이다.

 

그런데 예종은 구공신보다 신공신, 그중에서도 의령남씨 남이를 싫어했다. 세조는 죽기 한 달 전인 재위 14년(1468) 8월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는데,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李廷馨)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세조가 벼슬을 뛰어넘어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더니 당시 세자였던 예종이 그를 몹시 꺼렸다”고 전하고 있다.

예종은 “남이는 병조판서에 적당하지 못하다”는 청주한씨 한명회의 재종형인 중추부지사 한계희(韓繼禧)의 말을 듣고 즉위 당일 남이를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좌천시켰다. 예종 즉위 당일부터 남이에 대한 구공신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본격적인 공세는 예종 즉위년 10월 24일에 발생했다. 병조참지(兵曹參知:정3품) 영광유씨 유자광(柳子光)이 밤늦게 승정원에 나타나 ‘급히 성상께 계달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입직승지였던 한계희의 동생 한계순(韓繼純)은 즉시 예종과 만남을 주선했다. 영광유씨 유자광은 예종을 만나 의령남씨 남이를 고변했지만 모호한 고변이었다. 이날 저녁 남이가 유자광의 집을 방문해 “혜성(彗星)이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는데 너도 보았느냐?”고 묻기에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세조 와병 때 생긴 혜성은 예종 즉위년에도 사라지지 않아 장안의 화제였으므로 유자광이 보지 못했다는 답변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신(유자광)이 『강목(綱目)』을 가져와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석에 ‘광망(光芒)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걸친 큰 병란(兵亂)이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남이가 탄식하면서 ‘이 또한 반드시 응함이 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혜성의 의미를 『강목』에서 찾아 ‘장군이 반역한다’고 해석한 인물은 의령남씨 남이가 아니라 영광유씨 유자광이었다. 유자광은 “조금 후에 남이가 ‘내가 거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남이가 기다렸다는 듯 ‘거사’를 말했다는 것인데, 유자광은 “신이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이미 취했다’면서 마시지 않고 갔습니다”고 말했다. 기껏해야 술기운에 이 말 저 말 했다는 뜻이다.

 

유자광의 고변은 의문투성이였으나 예종은 이를 따져 보지 않았다. 한밤중에 자신을 불러낸 거대한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못했다. 예종은 남이가 군사라도 몰고 쳐들어 오는 듯 군사를 동원해 도성을 지키게 하고 청주한씨 한계순에게 의령남씨 남이를 체포하게 했다.

시간은 이미 삼경(三更:밤 11시~새벽 1시)에 접어들었지만 주요 종친들과 대신들을 수강궁 후원 별전(別殿)으로 급히 모이게 했다. 종친과 대신들이 도열한 가운데 끌려 나온 남이는 왜 끌려왔는지 영문을 몰랐다. “근래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느냐?”는 예종의 질문에 남이는 “‘신정보(辛井保), 이지정(李之楨)과 만나 북방(北方)에 여진족이 준동하면 내가 진압하러 가게 될 것’이라는 등의 얘기를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또 유자광의 집에 가 이야기하다가 곁의 책상에 『강목』이 있기에 혜성이 나타나는 구절 하나를 보았을 뿐 다른 것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강목』에서 ‘장군이 반역한다’는 주석을 뽑은 유자광이 남이를 반역으로 꾄 혐의가 있었다.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 없자 예종은 유자광을 불렀는데 그제야 유자광이 고변자란 사실을 알게 된 남이는 머리로 땅을 치면서 “유자광이 본래 신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무고한 것입니다.

 

신은 충의지사(忠義之士)로 평생 남송(南宋)의 악비(岳飛)를 자처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부르짖었다. 악비는 금나라에 맞서 끝까지 싸운 남송 장수로서 한족(漢族)에겐 충의의 대명사였다
. 남이가 부인하자 예종은 남이의 측근 무장들을 신문했다.

순장(巡將) 민서(閔敍)는 “남이가 ‘천변(天變:혜성의 출현)이 이와 같으니 간신이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나는 먼저 주륙(誅戮)을 받을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간신이 누구냐’고 묻자 ‘상당군 한명회’라고 답했다. 남이는 세조 사후 구공신 세력이 자신을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의령남씨 남이는 ‘왜 청주한씨 한명회를 언급했느냐’는 질문에 “한명회가 일찍이 신의 집에 와 적자(嫡子)를 세우는 일을 말하기에 그가 난(亂)을 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고 답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백이었다. 한명회가 말한 적자는 예종이 아니라 고(故)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예종은 한마디로 일축하고 남이의 측근 장수들을 계속 고문했다. 그들 대부분이 역모를 부인하는 가운데 기껏 남이의 첩 탁문아(卓文兒)가 심한 고문 끝에 ‘남이가 국상 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자백한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여진족 출신의 무장 문효량(文孝良)이 혹독한 매를 이기지 못하고 “남이가 ‘산릉에 나아갈 때 중로에서 먼저 한명회 등을 없애고, 다음으로 영순군(永順君)·귀성군에게 미치며, 다음에는 승여(乘輿:임금)에 미쳐서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자백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심한 고문 끝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의령남씨 남이는 혐의를 시인하고 같은 신공신인 신천강씨 강순을 당류(黨類)로 끌어들였다. 인조 때 박동량(朴東亮)이 쓴 『기재잡기(寄齋雜記)』나 광해군 때 김시양(金時讓)이 쓴 『부계문기(<6DAA>溪聞記)』에는 강순이 ‘왜 나를 끌어들였느냐’고 따지자 ‘당신이 수상(首相)이 되어 나의 원통함을 알면서도 한마디도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 원통히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당여(黨與)를 대라고 심한 매질을 당하던 79세의 노인 강순이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당여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라고 항의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무리수가 많은 옥사였다. 『부계문기』는 아직도 남이가 죽은 죄명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결국 예종은 남이·강순·문효량 등을 능지처사에 처하고 남이 계열의 무장들에게 수사를 확대했다. 남이가 여진족 건주위를 칠 때 종사관이었던 조숙(趙淑)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한 충신이 죽는다”고 소리 지르다 죽어갔다. 예종은 “참형된 사람의 부자는 모두 사형으로 연좌하라”고 지시해 그 부친과 자식들도 모두 죽였다.

 

그리고 37명의 익대(翊戴)공신을 책봉했다
. 1등공신 다섯 명은 영광유씨 유자광· 고령신씨 신숙주·청주한씨 한명회·신운(환관)·한계순이었다. 아무런 관련 없어 보이는 한명회·신숙주가 1등 공신에 책봉된 것은 이 옥사의 배경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한명회는 남이·강순 등의 재산과 처첩들을 내려 달라고 주청했고 그 재산과 70여 명의 처첩을 익대공신이 나누어 가졌다. 옥사의 배후가 자신임을 드러낸 셈이었다.

 

의령남씨 남이의 옥사는 구공신의 신공신 토벌작전이었다. 예종은 신공신을 몰락시킴으로써 훗날 구공신이 자신에게 칼을 겨눌 때 견제할 세력을 스스로 제거한 셈이 되었다
. 이런 상황에서 예종이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자 구공신은 반발했다.

 

 

힘보다 뜻이 컸던 군주의 운명은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4호 | 20091001 입력

 

개혁은 당위성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명분뿐만 아니라 개혁 대상의 저항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갖고 있어야 성공하는 것이다. 예종은 공신 집단의 해체라는 분명한 개혁 목표와 실천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현실적 힘을 확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집단을 제거한 것은 구공신에 맞설 세력을 제거한 결정적 하자였다.

 

신숙주의 영정 이상(理想)을 택한 사육신에 비해 현실을 택한 신숙주의 여유롭고 부귀한 모습이 잘 드러난 영정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조선시대 내내 사육신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② 개혁 능력의 한계

수양대군과 함께 쿠데타로 집권한 공신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보장하는 각종의 정치·경제·사회적 제도를 갖고 있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관직을 매매하는 분경(奔競)과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면죄(免罪) 특권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공신전(功臣田)과 세금 납부 대행권인 대납권(代納權)이 있었다.

 

예종은 공신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이런 제도적 장치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종은 즉위 초 이런 특권에 손을 댔다. 즉위 직후 종친·공신들의 분경을 금지시키고, 위반하면 온 집안을 족주(族誅)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귀성군 이준과 김질의 항의를 받고 본인만 극형(極刑)시키는 것으로 물러섰으나 이후에도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는 사헌부의 서리(胥吏)와 조례(<7681>隷: 관청 소속의 하인)들을 보내고, 무신들의 집에는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드나드는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사헌부 관리들은 예종보다 공신들이 더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몸을 사렸다.

 

반면 무인들은 우직하게 국왕의 명령을 수행했다. 예종 즉위년(1468) 10월 19일 공신들의 집에 드나드는 분경자들을 대거 체포한 것은 무인인 선전관들이었다. 고령군 신숙주의 집에서는 함길도 관찰사 박서창(朴徐昌)이 보낸 김미를 체포하고, 우의정 김질의 집에서는 경상도 관찰사 김겸광(金謙光)이 보낸 주산(周山)을 체포했다. 귀성군 이준과 병조판서 박중선(朴仲善), 이조판서 성임(成任)의 집을 드나드는 인물들도 체포했다.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 분경하는 것도 선전관이 체포한 것을 지적하면서 “분경을 금하지 못한 것은 사헌부의 책임”이라면서 사헌부 지평(持平) 최경지(崔敬止)를 의금부에 하옥했다. 사헌부가 공신들의 눈치를 봤다는 뜻이었다.

①김홍도의 밭갈이 백성들은 1년 내내 힘겹게 농사를 지어도 공신들의 대납권 때문에 몇 배의 세금을 더 내고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②정인지의 詩句 정인지는 공신이자 왕가의 사돈(아들 현조가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으로서 그 위세가 국왕을 웃돌았다. 사진가 권태균
신숙주는 ‘박서창이 글을 보내 위문하면서 표피(豹皮) 한 장을 보내기에 받지 않았으나 김미가 체포된 것’이라면서 예종에게 사과 겸 해명을 했다. 예종은 “경은 무엇을 혐의하는가? 다만 박서창의 과오이다”라고 달랬으나 신숙주는 큰 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더구나 예종은 이 사건을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김미를 비롯한 분경자들을 친국(親鞫)했다. 김미는 박서창의 반인(伴人: 수행원)이었으며 주산은 지방 관청의 서울 사무소에 근무하는 경저인(京邸人)으로서 기껏해야 이서(吏胥) 아니면 서인(庶人)에 불과했다. 나머지 인물들은 천인들에 불과했는데 국왕이 직접 친국한 것이다.

예종은 특히 함길도 관찰사가 신숙주에게 뇌물을 보낸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함길도는 1년 전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던 곳이다. 이때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가 이시애와 연결되었다는 증언이 나와 두 사람이 투옥되었던 적이 있었다. 예종은 함길도의 이런 특수성을 거론하며 김미를 꾸짖었다.

“네가 임금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알고 진상물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또 무슨 물건을 가지고 권문(權門)을 섬기느냐? 작년에 그 도(道: 함길도) 사람들이 신숙주·한명회 등이 몰래 불궤를 꾀한다고 말해 여러 사람들이 의혹해 관찰사·절도사 및 수령들을 다 죽여서 인심이 편하지 못한데, 네가 이를 알면서도 지금 다시 이렇게 해서 인심을 흉흉하게 하느냐?(『예종실록』, 즉위년 10월 19일)”

형식은 김미를 꾸짖는 것이지만 내용은 고령신씨 신숙주와 청주한씨 한명회를 꾸짖는 것이었다. 예종은 관찰사 박서창을 체포해 국문하고 그 자리를 한치형(韓致亨)으로 교체했다. 병조판서 박중선의 집에서 체포된 김산이 깨진 그릇을 고치는 칠장이(漆工)라는 사실을 알고 석방시켰으며, 이조판서 성임(成任) 집에서 잡힌 여종 소비(小非)는 수륙재(水陸齋: 불가의 제사)에 쓸 과실을 빌리러 갔다는 말을 듣고 석방시켰다.

 

예종이 이들을 직접 국문한 것은 사헌부나 의금부에서 공신들의 위세 때문에 부실 수사를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예종이 천인들을 친국했다는 사실에 공신들은 경악했다. 공신을 직접 벌하지는 않았지만 국왕이 천인까지 직접 국문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분경하기는 어려웠다.

예종은 공신들의 대납권에도 손을 댔다.

 

세금을 선납(先納)한 후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인데, 적은 경우가 배징(倍徵), 곧 두 배였고 보통이 서너 배였다. 개인의 세금을 대납하는 것이 아니라 『예종실록』에 “대납하는 무리들이 먼저 권세가에 의탁하여 그 고을 수령에게 청하게 하면서 후한 뇌물을 주면, 수령들은 위세도 두렵고 이익도 생각나 억지로 대납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백성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군현 단위로 대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액수가 막대했다.

예종은 즉위년 10월 16일, “대납은 백성들에게 심하게 해로우니, 이제부터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친·재추를 물론하고 곧 극형(極刑)에 처하고, 가산은 관에 몰수한다. 공사(公私) 모두 대납을 금한다”라고 선언했다. 『예종실록』은 “대납(代納)하여 쌀로 바꾸는 것은 모두 거실(巨室)에서 하는 짓이었으므로, 능히 혁파할 수가 없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세조가 공신과 종친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보장함으로써 자신을 지지하게 한 제도였다. 대납의 폐해는 막대했다.

대납으로 말미암아 (권세가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 여염(閭閻: 민간)에서 고통스럽게 여기고,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예종실록』 1년 1월 27일)”

 


몇 배의 세금을 내야 하는 백성들에게는 악정 중의 악정이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런 대납을 금지시켰으니 『예종실록』이 “임금이 즉위 초에 먼저 대납의 폐단을 제거하니, 선정으로서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라고 평가한 것이 과언이 아니었다. 예종은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대납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10월 21일에는, “이제 대납을 금했는데도 수령이 전과 같이 수렴(收斂: 받아들임)한다면 더욱 가혹한 것으로서 능지(凌遲)함이 가하다”라고 선포했다. 수령이 전처럼 대납을 허용하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납이 없어지지 않자 예종은 방을 붙여서 대납 금지의 뜻을 널리 알렸다.
지금부터 대납하는 자는 즉시 극형에 처해서 민생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입법의 본뜻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다고 진달하는 자가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하는 자는 마땅히 목을 베겠다.(『예종실록』즉위년 12월 9일)”

대납 금지에 대한 예종의 뜻은 확고했다. 그러나 공신들의 반발도 거셌다. 이들은 선납했으나 아직 받지 못한 대금이 있다고 주장했다. 호조에서는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예종 1년 1월 27일 ‘이미 대납하고도 값을 다 거두지 못한 자는 기한을 정해 거두도록 하자’고 요청했다. 예종은 윤2월 그믐까지 한시적으로 받으라고 허용했다. 『예종실록』은 “임금이 즉위 초에 특별히 대납을 없애게 했으므로 중외(中外)에서 매우 기뻐했는데, 이때에 이런 명령이 있자 백성들의 바람이 조금 이지러졌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윤2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연장한 것이었다. 대납을 매년 저절로 막대한 이득이 보장되는 가업처럼 여기던 종친·공신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런 상황에서 예종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재위 1년 4월에는, “금후로는 무릇 군무(軍務)를 잘못 조치한 데에 관련된 자는 공신이나 의친(議親: 임금의 친척)을 물론하고 죄를 주게 하라”고 명하고,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이 되게 한 자는 종친·재신·공신이라도 본율(本律)에 의거하여 처벌하라고 명했다.

 

공신들의 면죄권에도 손을 댄 것이다. 양민을 천민으로 만든 자는 교형(絞刑: 교수형)이었다. 재위 1년 5월에도 예종은 “관찰사의 소임은 본래 1도(道)를 통찰하는 것인데, 지금은 공신·의친·당상관에 구애된다. 앞으로 민생에 해를 미치는 자는 공신·의친·당상관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직단(直斷)하여 가두고 국문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분경은 근절되지 않았다.

예종 1년(1469) 11월 사헌부 조례들이 하동군 정인지의 집을 드나드는 자를 체포하려 하자 정인지의 가동(家<50EE>: 종)이 사헌부 조례의 옷고름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헌부의 정인지 국문 요청에 대해 예종은 “공함(公緘: 서면질의)으로 탄핵하라”고 명령했다. 예종과 공신 세력은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구공신의 견제 세력을 스스로 무너뜨린 예종으로서는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급서 미리 안 듯, 일사천리로 구체제 복귀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5호 | 20091010 입력

 

국왕 독살 여부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후 체제를 살펴봐야 한다. 거대 정파와 대립하던 국왕이 급서하는 것으로 갈등이 해소되고 거대 정파가 권력을 독차지할 경우 독살설의 신빙성은 높아진다.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탄생한 공신집단들은 예종이 자신들의 특권을 제한하려 하자 크게 반발했다. 예종과 공신집단 간의 갈등은 예종의 급서로 해소되고 구체제로 회귀했다.
예종의 창릉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다. 계비 안순 왕후 한씨(한백륜의 딸)와 합장묘다. 원부인이었던 장순 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생존했다면 예종도 더 오래 왕위에 있었을지 모른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④ 거대한 음모

예종이 분경(奔競: 인사청탁)을 금지시키라고 보낸 사헌부의 서리(書吏)와 조례(<7681>隷)가 정인지의 가동과 몸싸움을 벌인 날짜가 재위 1년(1469) 11월 4일이었다.

 

다음 날 예종은 “금년 겨울이 아주 추우니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면서 의금부와 형조에 전지를 내려 11월 5일 새벽을 기준으로 중대 범죄 이외의 죄수는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공신들을 압박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임금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개혁 대상으로 몰린 공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반발할 명분이 없었다. 백성들은 즉위 초부터 시작된 분경 금지, 대납 금지, 공신 특권 제한에 크게 환호하고 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예종은 재위 1년 11월을 넘기지 못하고 급서했기 때문이다.

 

 

『예종실록』에 그의 병명이 처음 등장하는 날은 예종 1년 11월 18일이다.

내가 족질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체된 일이 없느냐? 내가 무사는 활쏘기를 시험하고, 문사는 문예(文藝)를 시험하되,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책문(策文)하려고 하는데, 경 등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종은 자신이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이틀 전(16일)에는 후원에서 입직한 군사들을 직접 열병했다. 사흘 전(15일)에는 전라·경상·충청도의 관찰사와 절도사 등에게 어찰(御札)을 내려 “근자에 무뢰배들이 휘파람을 불며 산야에 모여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부도한 일을 자행한다. 빨리 계책을 내어 체포해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자. 네 번째 줄에 “왕이 훙서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왕의 옥체가 이미 변색되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예종의 급서와 자을산군의 즉위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족질로 정사를 오래 보지 못했다고 말한 다음 날(19일)에는 교태전으로 환어했고, 20일에는 기인(其人)제도에 대해서 한명회·신숙주와 의견을 나누었다. 21일에는 도승지 안동권씨 권감이 속미면(粟未<9EAA>)을 올리자 음식을 내려주었고, 22일에는 간부(奸婦)와 짜고 본 남편을 죽인 정금(鄭金)을 사형시켰다.

 

24일에는 호조에서 경기도 양주 고을의 미곡(米穀)을 채워달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랐고, 25일 예조에서 누각(漏刻: 물시계)을 제조해 관상감에 내려달라고 청한 것도 그대로 따랐다
.

 

이처럼 예종은 정사를 놓은 적이 없음에도 18일자에는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다.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 삭녕최씨 최항 등의 공신들이 편찬한 『예종실록』의 수수께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 26일자에 비로소 “임금이 불예(不豫: 임금의 병환을 뜻하는 말)하니 새벽에 서평군(西平君) 청주한씨 한계희와 좌참찬 풍천임씨 임원준 등을 불러 입시하게 했다”는
기사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의학에 정통한 문신이었다.

 

이날에야 예종이 아픈 줄 알았다는 듯이 백관들과 정희 왕후의 족친들이 문안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다음 날인 27일 예종은 귀화한 여진족 낭장가로(浪將家老)가 다른 여진족 마금파로(馬金波老)를 접대할 음식을 적게 준비했다는 이유로 예조 정랑(正郞) 신숙정(申叔楨)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북평관(北平館) 동구(洞口)에서 낭장가로를 기다렸다가 체포해 가두되 마금파로에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라”는 구체적인 명을 내렸다.

 

비록 같은 날짜에 “임금이 불예(不豫)하므로 승지 등이 모여서 직숙하겠다고 하자 그대로 따랐다”는 기사가 있지만 위독한 상태의 사람이 이런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종은 그 다음 날(28일) 세상을 떠났다. 사망한 날의 『예종실록』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일이 착착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①임금의 병이 위급하므로, 한계순과 정효상을 내불당에 보내 기도하게 하다→②승지 및 증경 정승과 의정부·육조의 당상이 문안하다→③죄인을 사면하고 여러 도의 명산대천에 기도하다→④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임금이 자미당에서 훙(薨)하다→⑤승정원에서 장례의 모든 일에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쉬운 물품을 쓰게 하다→⑥권감이 여러 재상과 의논해 당일에 (신왕이)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할 것을 의논하다→⑦미시(未時: 오후 1~3시)에 거애하다→⑧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임금(성종)이 면복을 입고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다(『예종실록』 1년 11월 28일)」

예종이 급서했으므로 조정은 발칵 뒤집혀야 했다. 그러나 조정은 정해진 일정표가 있는 것처럼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당일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켰다.

 

번 기사의 세부 사항은 도승지 권감이 “대저 제복(除服)하고 널(柩) 앞에서 즉위하는 것이 전례지만 지금은 이런 전례를 따를 수 없으니 마땅히 당일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여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라며 사왕(嗣王)이 당일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문종은 세종 승하 엿새 후에 즉위했고, 단종은 문종 승하 나흘 후에 즉위했다.

문종과 단종은 세자였음에도 즉위까지 여러 날 걸렸는데 예종에게는 세자가 없었다.

『예종실록』은 예종 사망일 새벽 승정원에 8명의 원상(院相)이 모여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 능성구씨 구치관· 삭녕최씨 최항· 회인홍씨 홍윤성· 창년조씨 조석문·무송윤씨 윤자운· 광산김씨 김국광’이 그들이다. 이들이 사정전(思政殿)으로 가자 미리 짠 듯 승전(承傳: 왕명을 전함) 환관 안중경(安仲敬)이 예종 사망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원상들과 도승지 안동권씨 권감은 하동정씨 정인지의 아들이자 세조의 딸 의숙 공주의 남편인 정현조(鄭顯祖)로 하여금 태비 정희 왕후 파평윤씨에게 “주상(主喪: 차기 국왕)을 빨리 정해야 한다”고 아뢰게 했다.

 

느닷없이 정인지의 아들이 등장해 원상들의 의견을 대비에게 전하고 명을 받는 승지나 환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정희 왕후 파평윤씨원상들에게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고 묻자 원상들은 정희 왕후에게 공을 넘겼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이나 세조의 장손인 월산군 중 한 명이 후사가 되어야 했다. 네 살의 제안대군이 불가하다면 16세의 월산군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희 왕후는 뜻밖에도 월산군의 동생 자을산군을 거명하면서 “그를 주상(主喪)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당연히 큰 술렁임이 일어야 하는데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 “진실로 마땅합니다(允當)”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속 조치를 논의할 때 신숙주는 대비 정희 왕후에게 “외간(外間)은 보고 듣는 것(視聽)이 번거로우니, 사정전 뒤뜰로 나가서 일을 의논하고자 합니다”고 말했다. 사정전에서 보고 들을 사람은 승지나 사관(史官)밖에는 없었으니 이는 기록으로 남으면 안 되는 의논이란 뜻이었다.

 

이 날짜 『성종실록』은 “위사(衛士)를 보내어 자을산군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을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고 전하고 있다. 정희 왕후와 공신세력 사이에 사전 조율이 있었다는 뜻이다. 정희 왕후와 공신들은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을 세우기로 미리 합의했던 것이다.

의문은 계속된다. 이틀 후인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신숙주·한명회·홍윤성 등 9명의 원상(院相)과 승지 등은 염습을 마친 후 빈청에서 대왕대비에게 “어제 염습할 때 대행왕(大行王: 예종)의 옥체가 이미 변색된 것을 보았습니다. 훙서(薨逝: 국왕의 죽음)한 지 겨우 이틀인데도 이와 같은 것은 반드시 병환이 오래되었는데도 외인(外人)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라면서 어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시신의 변색은 약물 중독 때 생기는 현상임에도 정희 왕후는 어의 안동권씨 권찬(權<6505>) 등을 옹호하고 나섰다. 원상들의 어의 처벌 주청은 형식에 불과해서 다시는 어의 처벌을 주청하지 않았으나 사헌부에서 계속 어의 권찬 등의 처벌을 요청했다.

 

정희 왕후 파평윤씨는 모든 책임을 죽은 예종에게 돌렸다.
대행왕이 일찍이 발병을 앓고 있어서 의원이 뜸질로써 치료하기 위해 ‘두 발을 함께 뜸질을 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대행왕은 ‘병 나지 않은 발까지 함께 뜸질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의원이 또 약을 드시라고 청했으나 대행왕이 굳이 거절한 것이니 안동권씨 권찬(權<6505>: 어의) 등은 실상 죄가 없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3일).”

사헌부에서 거듭 올린 처벌 요청을 정희 왕후는 묵살했다. 놀라운 것은 불과 두 달 후인 성종 1년(1470) 2월 7일 권찬을 가선대부 현복군(玄福君)으로 승진시켰다는 점이다.

 

이때는 성종이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정희 왕후 파평윤씨가 원상들과 상의해 정사를 처리하던 섭정 때였다. 권찬의 파격 승진은 예종 급서의 배후를 말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조가 만든 공신 지배구조를 해체하려던 예종은 이처럼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고 조선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공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가계도 

 

세종 - 소헌왕후 청송심씨 심온(沈溫)의 딸

 

제 7대 세조

차남 : 수양대군 (1417-1468)

재위기간 : 1455.윤6-1468.9(13년 3개월)

부인 : 2명 / 자녀 : 4남 1녀

1부인

정희왕후

파평윤씨

(윤번의 딸)

2남1녀

2부인

근빈 박씨

2남

덕종(의경세자)

제8대 예종

(해양대군)

숙의공주

덕원군

창원군

 

세조 - 정희왕후 파평윤씨

제 8대 예종

차남 : 해양대군 (1450-1469)

재위기간 : 1468.9-1469.11(1년 2개월)

부인 : 2명 / 자녀 : 2남 1녀

1부인

장순왕후

청주한씨

(한명회 딸)

1남

2부인

안순왕후

청주한씨

(한백륜 딸)

1남1녀

인성대군

 

제안대군

현숙공주


 

 

 

세조의 장남 (덕종) 의경세자

덕종- 소혜왕후 청주한씨 (한확의 딸)=인수대비

제 9대 성종

차남 : 자을산군(1457-1494)

재위기간 : 1469.1-1494.12(25년 1개월)

부인 : 12명 / 자녀 : 16남 12녀

1부인

공혜왕후

청주한씨

한명회의 딸

자식없음

2부인

정현왕후

파평윤씨

1남1녀

3부인

폐비

함안윤씨

1남

4부인

명빈 김씨

1남

5부인

귀인정씨

2남1녀

6부인

귀인 권씨

1남

 

제11대 중종

(진성대군)

신숙공주

제10대

연산군

 

무산군

 

안양군

봉안군

정혜옹주

진성군

 

 

 

* 7대 세조 정희왕후 파평윤씨

 -장남: (추존:덕종)의경세자+소혜왕후(=인수대비) 청주한씨(한확)

                         - 장남 : 월산대군
                         - 차남(자산대군)9대성종 + 1부인 공예왕후 청주한씨(한명회)

                                                          + 3부인 제헌왕후 함안윤씨(폐비)- 10대연산군
                                                          + 2부인 정현왕후 파평윤씨- 11대중종(진성대군)
                                                                                                                                                                       

* 차남 (해양대군)8대예종 + 장순왕후 청주한씨(한명회) - 인성대군(조기사망)

                                         + 안순왕후 청주한씨(한백륜)- 제안대군

제9대 성종 가계도 

덕종- 소혜왕후 청주한씨 한확의 딸(인수대비, 월산대군/자을산군의 어머니) 

제 9대 성종

차남 : 자을산군(1457-1494)

재위기간 : 1469.1-1494.12(25년 1개월)

부인 : 12명 / 자녀 : 16남 12녀

1부인

공혜왕후

청주한씨

(한명회)

자식없음

2부인

정현왕후

파평윤씨

(윤호)

1남1녀

3부인

폐비

함안윤씨

(윤기견)

1남

4부인

명빈 김씨

1남

5부인

귀인정씨

2남1녀

6부인

귀인 권씨

1남

 

제11대 중종

(진성대군)

신숙공주

제10대

연산군

 

무산군

 

안양군

봉안군

정혜옹주

진성군

 

 

7부인

귀인 엄씨

1녀

8부인

숙의 하씨

1남

9부인

숙의 홍씨

7남3녀

10부인

숙의 김씨

3녀

11부인

숙용 심씨

2남2녀

12부인

숙용 권씨

1녀

공신옹주

 

계성군

 

완원군

회산군

와성군

익앙군

경명군

운천군

양원군

혜숙옹주

정순옹주

정숙옹주

휘숙옹주

경숙옹주

휘정옹주

이성군

영산군

경순옹주

숙혜옹주

경휘옹주

 

기다렸다는 듯 … 예종 승하한 날에 성종 즉위식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52호 | 20100207 입력
 
정치가는 냉철한 현실인식 위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직업이다. 예종은 공신 집단이 권력을 장악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만 추구하다가 역습을 당했다. 반면 뜻하지 않게 왕이 된 어린 성종은 현실을 거스르면서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 없었다. 예종이 왕위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면 성종은 공신들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큰 차이였다.
 
경기도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 정희왕후 윤씨는 장손 월산군을 제치고 한명회의 사위 자산군을 예종의 후사로 결정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① 밀실 담합

부왕 세조로부터 공신 집단이란 부채를 물려받은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공신들의 특권을 타파한 정상적인 왕조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예종은 즉위 초부터 분경 금지, 대납 금지, 면책특권 제한 등 공신들을 겨냥한 각종 개혁 조치를 쏟아 냈다. 공신들의 불법·전횡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신왕의 개혁 정치에 환호를 보냈다.

정인지가 몽유도원도에 쓴 발문. 정희왕후의 사위였던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는 성종을 추대한 공으로 좌리 1등 공신에 책봉됐다.
예종의 개혁 정치는 방향은 옳았지만 공신들의 권력이 왕권을 능가한다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어서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예종이 재위 1년2개월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급서한 것은 반발의 강도를 말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급서하기 전날에도 예종은 여진족 추장 낭장가로(浪將家老)가 예조 정랑 신숙정(申叔楨)을 구타한 사건을 처리했다. 다음 날 예종이 죽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예종은 재위 1년(1469) 11월 28일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사망했다. 그 날짜 『예종실록』은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능성구씨 구치관· 삭녕최씨 최항· 창녕조씨 조석문과 영의정 회인홍씨 홍윤성, 좌의정 무송윤씨 윤자운, 우의정 김국광(광산김씨) 등이 승정원에 모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는 예종의 사망 사실이 공표되기 전으로 좌의정 무송윤씨 윤자운을 제외하고 모두 원상(院相)들이었다. 원상이란 세조가 죽기 1년 전인 재위 13년(1467)에 백옹(白<9852>) 등의 명나라 사신이 오자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업무를 보게 한 것이 시초인데, 나중에 9명으로 늘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공신들이 승정원 업무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승정원에 모이기 전에 『예종실록』은 ‘승지 및 전·현직 정승과 의정부·육조의 당상관이 (예종에게) 문안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들 중 여덟 명만 선별적으로 승정원에 모인 것이었다. 무언가 다른 경로의 연락을 받고 모였음을 뜻한다. 이들이 사알(司謁:내시)에 의해 사정전(思政殿)으로 안내된 직후 승전(承傳) 환관 안중경(安仲敬)이 울면서 “성상께서 훙(薨)하셨다”고 예종의 죽음을 알렸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망원정. 효령 대군의 별장으로 지어져 희우정(喜雨亭)이라고 불렀으나

훗날 성종의 친형 월산군의 별장이 되면서 망원정이라고 불렀다. 사진가 권태균

『예종실록』은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재상들도 실성(失聲)하며 통곡하였다”고 전하지만 형식에 불과했다. 신숙주는 곧 “국가의 큰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주상(主喪)은 불가불 일찍 결정해야 한다”고 차기 임금 결정 문제를 거론했다.

 

차기 국왕 결정의 열쇠는 세조 비 정희 왕후 파평윤씨(세조비, 성종 할머니)가 쥐고 있었다. 『예종실록』은 이때 정희 왕후의 사위 ‘하동정씨 정현조(鄭顯祖)가 들어가 직접 아뢴 다음 서너 번 왕복하면서 출납(出納)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동정씨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가 태비 파평윤씨와 여덟 명의 대신들 사이의 의견 조정 창구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 후 태비 정희 왕후 윤씨가 강녕전(康寧殿) 동북쪽 편방(便房)에 나타나자 신숙주는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의 옥체가 미령(未寧)하다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고 말했다. 정희 왕후도 “주상이 앓을 때에도 매일 내게 조근(朝覲:아침 문안)하였으므로, 내가 ‘병이 중하면 어찌 이렇게 하겠느냐?’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예종의 죽음이 뜻밖이란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뜻밖의 죽음에 놀라지 않았다. 정희 왕후는 사위 하동정씨 정현조와 도승지 권감(權<744A>)을 시켜 대신들에게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라고 물어 이미 관심사는 예종의 후사임을 나타냈다. 대신들은 “원컨대 전교를 듣고자 합니다”고 정희 왕후에게 발표를 미뤘고 정희 왕후는 사위 정현조를 통해 차기 국왕을 발표했다.

이제 원자(元子:제안대군)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月山君)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 자을산군(者乙山君=자산군)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께서 일찍이 그 기국과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에 비했으니 그를 주상(主喪)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 말과 동시에 큰 소동이 벌어져야 했다. 그러나 이는 윤씨와 대신들 사이의 합의 사안을 발표한 것에 불과했다
. 원래는 예종의 장자 제안 대군이나 세조의 장손 월산군이 후사가 돼야 했다. 세 살짜리 제안 대군이 불가하다면 고(故) 의경 세자의 장남이자 세조의 장손인 열다섯의 월산군이 돼야 했다.

그러나 예종의 장남도, 세조의 장손도 아닌 열두 살짜리 자을산군이 지명된 것이었다
. 뜻밖의 조치였으나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진실로 마땅합니다(允當)”고 찬동했다. 그러더니 고령신씨 신숙주는 “외간(外間)은 보고 듣는 것(視聽)이 번거로우니, 사정전 뒤뜰로 나가 일을 의논하고자 합니다”고 청했다. 사관(史官)의 붓을 피해 뒤뜰로 나가 후속 조처를 의논하겠다는 말이었다.

 

정희 왕후는 월산군이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고 말했지만 세조 10년(1464) 월산군은 임금과 사장(射場)에 가서 활을 쏜 기록이 있고, 세조 12년(1466)에도 세자였던 예종과 동교(東郊)에서 사냥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거짓이었다.

 

세조가 자을산군을 더 사랑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세조는 장손 월산군의 혼인 행차 때는 사복시(司僕寺) 담 밑에 높은 비루(飛樓)를 만들어 정희 왕후와 함께 구경했으나 자을산군의 혼인 때는 그러지 않았다. 세조가 자을산군을 태조와 비교했다는 말도 『세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다가 100년 정도 후대의 인물인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등에 나올 뿐이다.

월산군과 자을산군의 운명을 가른 것은 장인들이었다.

 

월산군의 장인 순천박씨 박중선은 신공신인 적개공신 출신으로, 청주한씨 한명회를 주축으로 하는 구공신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구공신은 신공신 세력의 사위를 왕으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고령신씨 신숙주가 사관의 눈을 피해 뒤뜰에 나가 후속 대책을 논의했던 것 자체가 무리한 후사 책봉임을 말해 준다. 후속 대책은 무엇이었을까? 도승지 권감은 대신들과 의논한 뒤 “당일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해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계달했다. 문종은 세종 사후 엿새 후, 단종은 문종 사후 나흘 후 즉위했는데 성종은 당일 즉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관의 눈을 피해 결정한 후속 조치의 핵심이었다.

 

성종의 즉위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놓아야 했을 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국왕의 즉위식은 간단한 절차가 아니었다. 뜻밖에 급서한 예종의 장례식 준비만 해도 조정은 날벼락 맞은 것처럼 경황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승정원에 모인 대신들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후속 절차를 진행했다. 하지만 자을산군을 모셔 오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다. 『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자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자산군(者山君)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다. 조정에서 국왕으로 결정됐음을 통보하기 전 자신이 국왕으로 결정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궁중 세력의 대표인 정희 왕후 파평윤씨와 공신 세력의 대표인 청주한씨 한명회· 고령신씨 신숙주·하동정씨 정인지 사이의 사전 합의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예종이 죽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당일 아침 승정원에 모였고, 정희 왕후와 새 국왕에 대해 의논하고 새 국왕 즉위 절차를 주도했다. 그래서 얼마 전만 해도 국왕이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자산군이 예종 사망 당일 신시(申時:오후 3~5시)에 면복을 입고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즉위한 성종은 재위 2년(1471) 3월, 75명의 좌리(佐理:임금이 되는 것을 도움) 공신을 책봉해 보답했다.
성종이 좌리 공신 책봉을 명하자 사헌부에서 “금번의 좌리 공신은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면서 “만약 태조·태종 때라면 공신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종의 태평한 조정에서는 공신이 없었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공을 보답하려고 하십니까?”라고 거듭 반대했다.

 

성종은 “대역복(大歷服:왕위)을 이어서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 공이 없겠는가?”라고 솔직히 자신을 즉위시킨 공로라고 고백했다. 좌리 1등 공신 9명은 고령신씨 신숙주·청주한씨 한명회· 삭녕최씨 최항· 회인홍씨 홍윤성· 창녕조씨 조석문· 무송윤씨 윤자운· 광산김씨 김국광· 하동정씨 정현조·안동권씨 권감 등으로서 예종 사망 당일 승정원에 모였던 명단에 정희 왕후 파평윤씨의 사위 하동정씨 정현조와 도승지 안동권씨 권감이 추가된 것이었다.

 

능성구씨 구치관만 2등 공신으로 떨어졌다. 그는 공신 중 특이하게 청백리(淸白吏) 출신으로서 원래는 승정원에 모이는 명단에 없었는데, 우연히 만나 합류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종이 뒤늦게 좌리 공신을 책봉한 것은 공신들이 대가를 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종은 “우리 자성(慈聖) 대왕 대비 파평윤씨 께서 세조 대왕을 추념하시고 나 소자를 돌아보시고 이에 큰 책명(策命)을 정하시니, 내가 들어와 큰 왕업을 잇게 되었다”며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 준 데 대한 보답임을 분명히 했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성종은 조선의 진정한 권력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숙부 예종의 전철에서 서글픈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권력은 공신들 손에 … 열두 살 임금은 때를 기다렸다

절반의 성공: 성종② 귀성군 제거 사건

이덕일 | 제153호 | 20100212 입력

 

현실에 참여해 활동하는 것 못지않게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다. 때가 아닌데도 섣불리 나섰다가 불행한 종말을 맞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갓 즉위한 성종은 어리지만 ‘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실이 공신집단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성종은 공신집단에 맞서는 대신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 또한 정치의 일부라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터득했던 것이다

압구정 한명회는 속세에 뜻이 없음을 표하기 위해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었으나 훗날 많은 문인들의 조롱을 받았다. 사진가 권태균
예종의 급서에 의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회인홍씨 홍윤성 등의 원상(院相)들과 승지 등이 대왕대비에게 예종의 시신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어제 염습할 때 대행왕(大行王:예종)의 옥체가 이미 변색된 것을 보았습니다. 훙서(薨逝)한 지 겨우 이틀인데도 이와 같았습니다”라는 보고였다. 시신 변색은 약물에 중독사했을 때 생기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음력 11월 말은 가장 시신이 변색될 때가 아니었다.

 

국왕의 염습 때 원상들뿐만 아니라 왕실의 내외척들도 다수 참석해 보았기 때문에 옥체의 변색을 무작정 무시한 채 넘길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예종의 병은 족질(足疾)이었다. 그런데 ‘내의(內醫)와 내시(內侍)를 국문해 처벌하라’는 주청에 정희왕후는 “대행왕은 술만 들고 음식을 들지 않았다”며 책임을 죽은 예종에게 돌렸다. 그러면서 “내의 등은 일찍이 내게 병세를 아뢰었으니 어찌 처벌할 수 있겠는가?”라고 어의를 옹호했다.

신숙주 시고 신숙주는 한명회·정인지와 함께 공신집단의 리더가 돼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의혹의 초점은 어의 안동권씨 권찬이었다. 세조가 총애하던 후궁 윤소훈(尹昭訓)의 오촌숙(五寸叔)인데 '예종실록'은 ‘권찬은 의술로써 세조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은혜와 사랑이 보통과 달랐다’고 전할 정도로 세조는 물론 예종도 총애하던 어의였다.

 

그렇기에 더욱 의혹이 일었으나 권찬 처벌 주장에 대해 정희왕후는 “대행왕의 발병은 뜸으로써 치료해야 하는데도 이를 꺼려했으니 권찬이 비록 시좌(侍坐)했더라도 진맥을 할 수 없었는데 어찌 병의 증상을 알았겠는가?”라면서 거듭 예종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정희왕후는 나아가 “내가 이미 상심하고 있는데 또 허물이 없는 사람에게 죄를 받게 한다면 하늘이 나를 어떻게 여기겠는가?”라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권찬을 옹호했다.

사헌부의 수사 주장에 대해서도 “의원이 또 약을 드시라고 청했으나 대행왕이 굳이 거절한 것이니, 권찬 등은 실상 죄가 없다('성종실록'즉위년 12월 3일)”라고 옹호했다.

 

정희왕후는 성종 1년(1470) 2월 7일에는 안동권씨 권찬을 종2품 가선대부 현복군(玄福君)으로 승진시켰다.

 

이때는 성종이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정희왕후 파평윤씨가 섭정하면서 청주한씨 한명회 등 원상들과 정사를 처리하던 때로서 권찬의 승진은 정희왕후와 원상들의 합의의 결과였다. 시신이 변색돼 죽은 예종이 땅에 묻히기도 전에 의혹의 당사자를 승진시킨 것이다. 당연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순릉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에 있는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

한명회의 딸로서 남편을 국왕으로 만드는 괴력을 발휘했으나

성종 5년 후사 없이 죽는 바람에 아들을 즉위시키지는 못했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것이 전주이씨 귀성군(龜城君, 이준) 사건이었다. 예종 사인과 성종 즉위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던 성종 1년(1470) 1월 2일 초저녁. 생원 김윤생(金允生)과 별시위(別侍衛) 윤경의(尹敬義)가 승정원에 나타나 전 직장(直長) 최세호(崔世豪)를 역모로 고변했다.

 

최세호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가문을 멸시할 수 없다. 우리 귀성군은 왕손이 아닌가? 숙부 안동권씨 길창군(吉昌君:권람)은 나에게 ‘귀성군은 건장하고 또 지혜가 있으니 신기(神器:왕위)를 주관할 만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지금 어린 임금을 세웠으니 나라의 복은 아니다. 어째서 왕위를 잘못 결정했을까? 내가 했다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성종실록' 1년 1월 2일)”

최세호는 귀성군(이준)의 부친인 임영대군(臨瀛大君:세종의 4남) 부인의 친족이었다.

 

세조 12년(1466)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귀성군은 이듬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발생하자 세조에 의해 만 17세의 나이로 진압 총사령관인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에 임명됐다. 종친들을 키워 공신들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귀성군과 의령남씨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적개공신 1등에 책봉돼 청주한씨 한명회· 고령신씨 신숙주· 하동정씨 정인지 등의 구공신에 맞서는 신공신을 형성했다.

 

세조는 14년(1468) 귀성군을 영의정, 의령남씨 남이를 병조판서로 임명해 구공신을 견제시켰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고위직에 오른 귀성군과 남이는 구공신에 맞서는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대신 분열했다
. 남이는 세조 14년(1468) 5월 귀성군의 중용을 비판하다 하옥됐다.

 

귀성군 전주이씨 이준은 5개월 후인 예종 즉위년(1468) 10월 발생한 남이의 옥사 때 한명회 편에 서서 남이를 제거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올랐다.

 

남이 청주한씨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한 안동권씨 권람의 사위였으므로 결국 권람은 사위를 죽일 인물을 키운 셈이 되었다.

생원 김윤생 등이 귀성군을 겨냥해 고변한 최세호는 심한 고문을 참으며 혐의를 부인했다
.

 

그러자 1월 13일에는 청주한씨 한명회의 조카들인 한계미·한계희·한계순이 일제히 전 감사 안동권씨 권맹희(權孟禧)를 공격하고 나섰다. 이 역시 목표는 귀성군 이준이었다. 권맹희가 한계희 등에게 “무엇 때문에 형을 버리고 아우를 세우는가” “귀성군도 물망(物望)이 있는 사람이다” “최세호를 힘써 도모해주기 바란다”는 등의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귀성군과 최세호를 한번에 엮어 재차 공세를 취한 것인데, 한명회를 비롯한 구공신들의 계획된 정치공작이었다.

바로 그날 고령신씨 신숙주는 정희왕후 파평윤씨에게 면담을 요청해 청주한씨 한명회· 능성구씨 구치관·회인홍씨 홍윤성 등 원상들과 고변 당사자인 청주한시 한계미·계희 등을 대동하고 대비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신숙주는 “전주이씨 이준(李浚:귀성군)이 세조 때도 나인(內人)과 통정했으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 느닷없이 세조 때의 일을 폭로하면서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전주이씨 이준이 비록 작은 공이 있지만 돌볼 것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선왕(先王) 때의 죄를 다스려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외방(外方)에 유배(流配)시키소서. 이것은 사실 그를 보전하려는 것입니다.('성종실록'1년 1월 13일)”

귀성군은 아무 죄도 없지만 이제 사라져줘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정희왕후 파평윤씨가 난색을 표명하자 같은 날 봉원군(蓬原君) 동래정씨 정창손(鄭昌孫) 등 공신(功臣)들이 합동으로 상소를 올려 귀성군 공격에 가세했다.

 

공신들에 맞서던 예종이 사라진 지금 권력은 이미 정희왕후 파평윤씨가 아니라 공신들이 갖고 있었다. 다음날 문무(文武) 2품 이상의 관원이 대궐 뜰에 모인 가운데 하동군(河東君) 하동정씨 정인지(鄭麟趾)가 “귀성군이 선왕 때에 득죄했으며 지금 또 군소배들이 지적해서 말하는 바가 되었으니 마땅히 서울에 있을 수 없습니다”고 다시 공격했다.

정희왕후 파평윤씨는 “귀성(龜城)은 세조께서 돌보아 사랑했는데 지금 지방으로 내쫓는다면 세조의 뜻에 어긋날까 두렵다”고 반대했으나 고령신씨 신숙주가 “세조께서 만약 오늘 계신다면 역시 용서하지 않으셨을 것이니 빨리 법으로 속단하소서”라고 일축했다. 정희왕후 파평윤씨는 공신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공신들은 귀성군의 처리 방침을 문서로 작성했다.

귀성군(이준)은 공신 명부에서 삭제하고 직첩(職牒)을 회수하며 경상도 영해(寧海)에 안치(安置)하고 가산을 적몰한다.”
정희왕후 파평윤씨는 ‘적몰가산(籍沒家産)’이란 넉자를 지워버려 재산은 빼앗지 않는 것으로 타협했다. 아무 죄도 없이 서인으로 강등된 귀성군은 성종 10년(1479) 1월 죽을 때까지 영해에서 울분에 찬 채 지내야 했다.

 

안동권씨 권맹희와 최세호는 능지처사되고 집안이 멸족된 지 오래였다.

 

귀성군 제거 사건은 공신들의 권력이 왕실 위에 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었다.
세조가 말년에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종친세력은 성종 즉위와 동시에 쑥대밭이 됐다
.

 

성종 5년(1474)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종친사환금지(宗親仕宦禁止)를 규정해 종친은 법적으로 정치에서 배제시켰다. 그러자 종친의 지위는 크게 낮아져 성종 8년(1477) 6월 “종친과 혼인하지 않기 위해 그 자녀의 나이를 숨기는 자를 논죄(論罪)하는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아뢰라”는 명을 내려야 할 정도가 됐다.

열두 살에 임금이 된 성종은 즉위 초 공신집단에 맞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왕권 행사가 아니라 국왕 수업을 받는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권력은 공신들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즉위한 국왕을 수업시키는 경연(經筵)의 주체 역시 원상(院相)들이었다.

 

정희왕후는 성종 즉위년 12월 8일 원상들을 영경연(領經筵)으로 겸임시켜 성종의 교육을 맡겼다. 다음날 신숙주는 '논어(論語)'부터 진강하고, 하루에 두 번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을 실시한다는 국왕의 경연 사목(事目)을 만들었다.

 

정희왕후 파평윤씨가 성종 1년(1470) 1월 “주상(主上)께서 처음 학습하면서 문리(文理)에 통하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성종은 학문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은 이후 하루 두 번의 경연에 성실히 임하면서 학문이 일취월장했다. 성종은 학문에 전념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현실은 공신들의 것이지만 미래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비 윤씨 ‘권력남용’ 벽서 나붙자 권력이양 결심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54호 | 20100220 입력
 
한 체제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패했더라도 당위성만으로 그 체제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과 그 이념을 실천할 세력이 존재해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세조 때 비대해진 공신집단을 대체하려면 왕권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왕권을 보좌하며 공신집단과 맞서 싸울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재야에서 그런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성종 어진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공신집단보다 왕권이 미약한 현실을 인정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때를 기다렸다. 우승우 화백
절반의 성공 성종③ 승정원 벽서 사건

성종 즉위 초는 공신들의 천국이었다.

 

성종 1년(1470) 1월 11일 청주한씨 한명회와 고령신씨 신숙주는 분경(奔競: 엽관운동) 금지령을 철폐해 달라고 요구했다.

 

“분경 금령(禁令)이 너무 엄해서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사람과도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태평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라는 주장이었다
.

 

성종은 “세조조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하라”고 전교했다. 세조는 재위 14년(1468) 3월 “금후로 재상가에는 종적을 비밀히 속이는 자 외에는 금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면서 사실상 재상가의 분경을 허용했다.

 

예종은 즉위 직후 분경을 엄금해 공신들의 반발을 샀는데 ‘세조조의 고사에 의거한다’는 것은 분경을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원상들에게 관직 매매를 허용하는 것이어서 사헌부는 “원상의 권세가 무거운데, 그 집에 분경을 금지시키지 않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니 이를 금지시키소서”라고 주청했다.

성종은 사헌부의 청을 좇는 형식으로 다시 원상가의 분경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래갈 수 없었다. 성종은 재위 2년(1471) 12월 사헌부에 전교를 내려 “이조·병조의 당상관과 여러 장수 외에는 분경을 금하지 말고, 이조·병조 겸판서(兼判書)의 집도 금하지 말라”고 명했다.

 

이조·병조의 당상관과 여러 장수만 분경 금지 대상이지 원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조·병조 겸판서를 분경 금지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원상들을 위한 것이었다.

 

세조 때 활성화된 겸판서는 공신들에게 행정권까지 주기 위한 것으로서 원상들이 겸판서를 맡으면 실제 판서는 허수아비가 되게 마련이었다.

 

예종은 즉위 다음 달 좌찬성 겸 병조 겸판서 광산김씨 김국광(金國光)의 겸판서 지위를 해임했다. 그러나 예종이 의문사하자마자 대왕대비는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전교를 내려 겸판서 재설치를 지시했다.

“세조조(世祖朝)에 특별히 겸판서를 설치했으나 대행왕(大行王: 예종)이 자신이 모두 장악하기 위해 없애 버렸다
. 지금 사왕(嗣王)의 나이가 어리니 겸판서를 없앨 수가 없다. 청주한씨 한명회를 병조 겸판서로, 한계미를 이조 겸판서로 삼으라.(『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

성종 1년 이조 겸판서는 원상 창녕조씨 조석문으로 대치되고 능성구씨 구치관이 호조 겸판서, 고령신씨 신숙주가 예조 겸판서가 되어 주요 부서의 행정권을 원상들이 모두 장악했다.

 

나라는 겸판서까지 장악한 원상들의 것이었다.

성종 5년(1474) 1월 사헌부에서 ‘원상의 권력이 막강한데도 분경을 금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원상의 집에도 분경을 금하여 사알(私謁: 사적으로 만남)의 길을 막으소서”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성종은 “원상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니 그것을 말하지 말라”는 궁색한 논리로 거부했다. 대비 윤씨와 원상들의 연합권력에 맞서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무력화된 왕권은 청주한씨 한명회의 차지였다.

성종 5년(1474) 윤6월 대사헌 동래정씨 정창손의 아들 정괄(鄭括)은 병조판서가 이조판서의 권한인 ‘여러 도의 연변(沿邊) 수령직도 제수한다’병조 겸판서 한명회가 이조판서의 업무까지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이때 성종의 나이 만 17세의 성인으로 친정할 때가 지난 지 오래였다. 대비와 원상 연합권력은 성종에게 정권을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 문제를 제기할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생각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성종 6년(1475) 11월 18일 승정원에 익명서(匿名書)가 붙은 것이다. 승정원에선 익명서 가운데 ‘강자평(姜子平)이 진주 목사가 된 것은 대왕대비 파평윤씨의 특명이다’라는 내용과 ‘대왕대비 동생 윤사흔(尹士昕)·윤계겸(尹繼謙)·이철견(李鐵堅) 등 여러 대신들에 대한 악한 말이 쓰여 있었다’고 보고했다. 승정원은 “익명서는 국사(國事)에 관계되는 일이어도 부자 사이에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불태워버렸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성종도 “보아서 쓸데없는 것은 불태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칭찬했다.

윤사흔·윤계겸은 대비 윤씨의 동생 부자이고, 경주이씨 이철견의 모친은 대비의 동생이란 점에서 익명서는 대비 파평윤씨를 겨냥한 것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익명서는 비록 국사에 관계된다 해도 옮겨 말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리고 『대명률(大明律)』에는 ‘익명서를 발견한 자는 즉시 소각하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익명서를 불태운 승정원의 처리는 적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익명서의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해졌다. 익명서에 거론된 우의정 파평윤씨 윤사흔, 대사헌 윤계겸, 월성군(月城君) 경주이씨 이철견 등은 조정에 나와, “익명서는 비록 국문할 수 없는 법이지만 만약 현상(懸賞)하여 체포하려 하면 혹 고발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라면서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하자고 주장했다.

 

성종은 불문에 부치려 했으나 이들이 계속 범인 색출을 주장하자 성종은 할 수 없이 형조에 전지를 내려 ‘익명서의 범인을 고발하는 자는 천인이면 양인(良人)으로, 양인이면 실직(實職: 실제 벼슬)에 임명하고 면포(綿布) 400필과 범인의 재산을 주겠다’는 전지를 내렸다.

그러자 친군위(親軍衛) 권즙(權緝)이 최개지(崔蓋地)가 의심스럽다고 고발했다. 최개지가 노비 소유권을 두고 소송을 했는데 대비 윤씨 집안이 개입해서 졌다고 말했다는 혐의였다. 윤사흔은 최개지를 국문하자고 주장했으나 성종은 ‘익명서를 불살랐기 때문에 (글씨체를) 고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익명서의 내용에 동조하는 듯한 행위였다.

 

익명서로 직접적인 비난을 받은 대비 윤씨는 성종 7년(1476) 1월 13일 내시 안중경(安仲敬)을 시켜 한글(諺文) 편지를 원상에게 전했다. 대비는 “내가 본래 지식이 없는데도 여러 대신들이 굳게 청하고 주상께서 어리시기 때문에 마지못해 정사를 청단했는데, 지금 주상이 장성하고 학문도 성취되어 모든 정무를 재결하는 것이 합당하게 되었다”면서 성종에게 정사를 넘기겠다고 말했다.

 

대비는 익명서에 대해서 변명했다.

“지금 익명서의 말은 모두 내 몸을 지칭했는데 최개지에 대한 말을 듣고는 마음이 실로 편안하지 못하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내가 끊임없이 형제들을 보고 싶어 했지만 서로 만날 때는 옛날 친정에 있을 때 희롱한 일을 말한데 불과하니 비록 사적인 청이 있더라도 내가 어찌 감히 주상에게 알리겠는가?(『성종실록』 7년 1월 13일)”

이외에도 대비는 여러 말로 자신을 변명했지만 성인이 된 성종에게 정사를 넘기지 않은 자체가 불러온 비방이었다. 다급해진 것은 원상들이었다. 원상 청주한씨 한명회와 광산김씨 김국광은 대비가 물러나는 데 반대하며 “동방의 종묘·사직과 억만 창생(蒼生: 백성)이 어찌되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성종도 기다렸다는 듯이 받을 수는 없었기에 승지 등을 불러 정권을 받을 수 없다고 아뢰게 했다.

 

한명회는 여러 차례 ‘친정 불가’를 주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상천외한 논리까지 등장했다.

“만약 지금 정사를 사양하신다면 이는 동방의 창생(蒼生)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 신 등이 항상 대궐에 나와서 안심하고 술을 마시는데,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는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성종실록』 7년 1월 13일)”

권력이 극도에 달하다 보니 군신 사이의 분별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성종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일 의정부에 전지를 내려 자신이 여러 번 사양했음을 상기시킨 후 정권을 받겠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온 나라의 번거로운 사무로 성체(聖體: 대비의 몸)를 수고스럽게 하는 것도 편안히 봉양하는 도리는 아니므로 부득이 지금부터 국가의 모든 정사는 내 뜻으로 결단하고 대왕대비에게 아뢰어 처결(處決)하지 않을 것이다.(『성종실록』 7년 1월 13일)”

성종의 결단에 다들 놀랐다. 대비가 물러나겠다고 한 그날 정권을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성종 친정 시대의 개막이었다. 다음 날부터 한명회에 대한 대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성종의 친정을 반대한 행위를 국문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국문 요청을 거부하고 한명회에게 음식을 내렸다. 한명회는 무사했지만 이제 권력은 자신의 손을 떠나 성종에게로 돌아가고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미래를 기약한 성종의 ‘기다림의 정치’가 결실을 거두는 것이었다. 성종은 서두르지 않았다. 재위 7년째지만 그의 나이 겨우 만 19세였다.

 

공신들은 속속 관(棺)으로 들어갔다.

성종 원년에 능성구씨 구치관이 사망한 것을 필두로 성종 5년에는 삭녕최씨 최항·청주한씨 한백륜·창녕성씨 성봉조(세조의 동서, 성삼문의 재종숙)가, 성종 6년에는 권신 고령신씨 신숙주와 회인홍씨 홍윤성이 떠났다. 친정 이듬해인 재위 8년(1477)에는 창녕조씨 조석문이, 이듬해에는 하동정씨 정인지가 사망했다. 청주한씨 한명회와 동래정씨 정창손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신들이 죽은 것이다
.

 

그 공백을 성종은 자신의 왕권과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메우려 했다. 바로 신진 사림이었다.

 

 

신진 사림에 탄핵·언론권 주며 시대의 금기와 맞서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55호 | 20100228 입력

 

역사는 모든 시대적 금기가 언젠가는 깨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금기는 혼자만의 단독행동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금기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과 이를 실천할 조직이 등장해 깨트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세조 시대에 만들어진 시대적 금기에 도전하는 세력이 재야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사림이라 불리는 신진 정치세력이었다. ?

예림서원 김종직은 훈구 공신들에 맞서는 사림이란 신진 정치세력을 최초로 형성했다.

김종직을 배향하고 있는 예림서원. 경남 밀양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④ 홍문관 설치

남효온의 육신전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의 복위를 주장했던 남효온은 훗날 『육신전』을 써서 상왕복위기도 사건이 정당하다고 역설했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성종 6년(1475) 11월 승정원에 붙은 익명의 벽서 사건으로 이듬해 초 대왕대비 윤씨가 물러나고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왕권은 아직 미약했다.

 

권력은 계유정난(1453)부터 시작해 성종 친정 때까지 장장 23년간에 걸쳐 형성된 공신 집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공신 집단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경제력도 막강했다.

 

세조가 공신들에게 준 대납권(代納權: 세금을 대신 납부해주고 두 배 이상을 받는 권리)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만들었다. 어떠한 불법을 범해도 처벌 받지 않는 면죄부까지 갖고 있는 공신들은 공신전(功臣田), 별사전(別賜田: 공신에게 내려준 토지), 과전(科田: 관원에게 내려준 토지) 등에서 규정 이상의 막대한 전세(田稅)를 받아 치부했다.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고 많은 물의가 일었다.

급기야 세금 담당부서인 호조에서는 성종 6년(1475) 11월 사헌부에 이를 막을 수사권을 주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전주(田主: 땅주인)가 전세(田稅)를 거둘 때 함부로 거두는 자가 있으면 전부(佃夫: 경작자)가 사헌부에 고소할 수 있으나 초야(草野)의 백성들이 어찌 일일이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마음대로 거두는 자가 많으니 분경(奔競)의 경우처럼 사헌부에 무시로 적발해 범법자는 법에 의거해 처벌하도록 하소서.(『성종실록』 6년 11월 1일)”

현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문종비)의 친척들이 상왕복위기도 사건에 가담하자 무덤을 파헤쳤다.

불법으로 더 많은 전세를 빼앗긴 백성들은 사헌부에 고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신들을 상대로 시골 백성이 서울의 사헌부까지 올라와 고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성종은 이 문제를 원상에게 의논하라고 시켰다.

 

원상 청주한씨 한명회· 동래정씨 정창손은 그런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같이 탐욕스러운 자는 얼마 안 됩니다. 지금 전지(田地)가 있어서 수세(收稅)하는 자는 대개 대신들입니다. 그들이 함부로 거둔다고 의심하여 사헌부의 대졸(臺卒: 하급관리)들에게 규찰하게 한다면 전부(佃夫)를 침해하는 것보다 더 큰 폐단이 될 것 같습니다. 청컨대 (앞으로도) 전부로 하여금 사헌부에 고발하게 하여 그 전지(田地)를 빼앗고 무거운 벌로 다스리도록 하소서.(『성종실록』 6년 11월 1일)”

앞으로도 계속 규정 이상의 전세를 강탈하겠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었지만 성종은 원상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직후 친정이 시작되어 대비 파평윤씨의 수렴청정은 끝났지만 원상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원상제는 왕권을 강하게 제약했지만 누구도 이 문제를 거론하기를 꺼려 했다.

 

드디어 성종 7년(1476) 5월 15일 대사헌 파평윤씨 윤계겸(尹繼謙) 등은 시무책 9개조를 올려 원상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원상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는 없던 것으로서 세조 때 일시적인 권의(權宜: 임시적인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지 영구토록 지속할 제도는 못 되는 것입니다…삼가 바라건대 빨리 원상을 파하시어 관직을 서로 침노하는 폐단을 제거하고, 대신을 예의로 대접하는 도리를 펴게 하소서.(『성종실록』 7년 5월 15일)”

윤계겸은 그러나 같은 상소에서 의정부 서사제(署事制)의 부활도 요구했다. 원상제 폐지와 맞바꾸자는 절충안이었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에서 집행부서인 육조(六曹)의 보고를 받아 먼저 심사하고 국왕에게 보고하는 반면 그때까지 시행하던 육조(六曹) 직계제는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 정승들이 육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였다. 원상들은 성종이 원상제를 폐지하는 대신 의정부 서사제를 부활시키는 절충안을 택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종의 생각은 달랐다.

“의정부 서사제는 복설(復設)하기 어려운 것이다. 원상제 폐지는 앞에서도 말한 자가 많았고, 또 예로 대신을 대접하는 도리에도 어긋나므로 부득이해서 따르겠다.” 의정부 서사제는 부활시키지 않고 원상제만 폐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성종이 허수아비 왕 노릇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성종은 아직 왕권이 공신들과 맞설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종은 훈구 공신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신진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위 9년(1478) 설치한 기관이 홍문관(弘文館)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홍문관이 궁중의 서적을 관리하고 문한(文翰)을 처리하며, 국왕의 자문 기능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사실상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의 부활이었다.

홍문관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렸는데, 탄핵권과 언론권을 갖고 있는 언관(言官)이었다. 성종은 재야 사림(士林) 출신의 과거급제자들을 주로 삼사에 배치해 공신들을 견제했다
.

 

조선 후기 반남박씨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연암집(燕巖集)』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도(道)를 논하는 사람들을 사림이라 한다”라고 정의한 것처럼 학문하는 선비를 뜻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태조~세종실록 등에 ‘사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士林惜之)’ ‘사림이 비루하게 여겼다(士林鄙之)’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처럼 ‘학문하는 재야의 양반 사대부’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세조 때 등장한 부패한 훈구(勳舊) 공신 세력과 자신들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성종 무렵 사림은 훈구 공신에 반대하는 신진 정치세력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정치적 사림의 선구 격이 점필재(?畢齋) 선산김씨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다
.

김종직 의제문(弔義帝文)
출생 1431년 6월
조선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제대리
사망 1492년 8월 19일
조선 경상남도 밀양군 명발와
사인 병사 (중풍)
거주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군경상북도 선산군한성부경상남도 밀양군
국적 조선
별칭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 호는 점필재(?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학력 김숙자에게서 성리학 수학
직업 문신, 학자, 정치인, 작가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조씨, 남평 문씨
자녀 5남 3녀
부모 아버지 김숙자, 어머니 밀양박씨
친척 외할아버지 박홍신

 

 

 

김종직은 성종 8년(1477)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로 올라가는 자신의 문인(門人)들에게 ‘우리 당에는 뛰어난 선비가 많다(自多吾黨多奇士)’고 말한 것처럼 자주 ‘우리 당[吾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

 

함양군수 시절 경내 누각에 걸린 영광유씨 유자광의 친필 액자를 불살라버렸다고도 전해지는 김종직은 사림의 초대 당수였다. 하지만 세조 2년(1456) 회시(會試)에서 낙방했다가 세조 5년(1459) 식년문과에 급제해 세조 때 벼슬을 했다. 그 점 때문에 훗날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인 것을 비판했을 때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림이 훈구 공신들과 대립한 것은 순수한 학문적 세계관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양자는 토지를 두고 격렬하게 충돌했다. 사림들은 지방에 상당한 규모의 토지와 노비를 갖고 있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는데 훈구 세력이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양자가 충돌했던 것이다.

 

성종 23년(1492) 2월 사림들이 고향에 돌아간 선산김씨 김종직을 위해 “집안에 한 섬의 저축도 없다”며 특별히 늠록(鹿祿): 관리의 녹봉)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대사헌 광산김씨 김려석(金礪石)은 “선산김씨 김종직은 경상도 세 고을에 노비[臧獲]와 전장(田莊)이 있는데, 집안에 한 섬의 저축도 없다고 일컫는 것이 옳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김려석이 말한 경상도 세 읍은 김종직의 고향인 선산과 어머니의 고향인 밀양, 처의 고향인 금산을 지칭한 것이었다.

김종직뿐만 아니라 하동정씨 정여창· 서흥김씨 김굉필 등도 대부분 농장과 노비를 가진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었다. 이처럼 사림도 조선의 지배층이자 지주였다

 

토지를 둘러싼 싸움도 양자 사이의 정치적 대립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드디어 성종 9년(1478) 4월 양측이 충돌했다. 흙비[土雨]가 내리자 성종은 널리 구언(求言: 난국을 타개할 의견을 구하는 것)했는데, 사육신의 전기인 『육신전(六臣傳)』의 저자가 되는 유학(幼學) 의령남씨 남효온(南孝溫)이 응지(應旨) 상소를 올려 여러 방안을 건의했다.

 

그중에 “하늘에 계시는 문종의 영(靈)이 홀로 제사를 받기를 즐겨 하시겠습니까?”라면서 ‘소릉(昭陵) 추복(追復)’을 주장해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소릉은 단종의 모후 권씨의 능인데 파헤친 장본인이 세조라는 점에서 시대의 금기를 거론한 것이었다.

당연히 훈구 세력들이 발끈했다
. 도승지 풍천임씨 임사홍이 ‘신자(臣子)로서 의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나섰고 심지어 국문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구언(求言)에 응한 응지(應旨)상소는 처벌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이를 깨자는 주장이었다.

 

성종이 응지상소는 처벌하지 않는다며 처벌에 반대하자 청주한씨 한명회까지 나서 국문을 주장했다.

그러나 성종은 갓 성장하고 있는 사림의 싹을 잘라 조정을 훈구 공신 일색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기에 “구언(求言)하고서 또 국문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반대했다.

 

생육신인 강릉김씨 김시습은 의령남씨 남효온에게 ‘자네는 나와 다르다’면서 과거 응시를 권했다고 전해진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남효온이 이 상소를 올려 자신의 출처(出處)를 점쳤는데 소릉 복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때부터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방랑하다가 생을 마쳤다”라고 전하고 있다. 소릉 복위는 무산되었지만 무소불위의 공신 세력에 정면에서 맞설 수 있는 신진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조용히 힘 키운 성종, 왕명 거스른 한명회 축출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56호 | 20100307 입력

 

때로는 이념이 총칼보다 강하다. 사회의 불신이 팽배한 주류 집단을 공격하는 세력은 중간파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공신 집단은 정치·경제적 권력을 독점했지만 전횡과 부패 때문에 명분과 인심을 잃었고 그 공간을 사림이 차지했다. 성리학적 명분론의 사림이 공신 집단과의 투쟁을 선악의 싸움으로 생각하면서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이목 사당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있다.

김종직의 문인인 이목은 성종 때 사림의 선봉장이었으나 연산군 때 사형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⑤ 압구정 사건

사림들은 성리학의 대의(大義)와 의리(義理) 같은 명분론을 중시했다. 수양의 즉위를 찬(簒: 신하가 왕위를 빼앗는 것)으로, 단종의 죽음을 시(弑: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로 보았으니 공신 집단은 당연히 극복 대상이었다. 이념 지향성을 갖고 있던 사림에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인물도 적지 않았다. 효령대군의 증손자인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이 그런 인물이었다. 효령대군(세종의 아들,문종,세조의 형제)은 세조의 즉위를 지지한 대가로 막대한 이권을 챙겼는데 증손자는 거꾸로 사림이 된 것이다.

성종 9년(1478) 4월 전주이씨 이심원‘세조조의 훈신(勳臣)을 쓰지 말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세조 때 형성된 공신 집단을 벼슬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대담한 상소였다.

 

도승지 풍천임씨 임사홍(任士洪)은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데에는 모름지기 옛 신하[耆舊]를 써야 한다고 여겨집니다”라고 반박했다. 이 무렵 도승지 임사홍은 사림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었는데, 전주이씨 이심원과는 사돈 사이였다.

 

임사홍효령대군의 아들이자 이심원의 할아버지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였다.


<1> 이심원 정려(旌閭)현판 충남 계룡시 금암면에 있다. 효령대군의 증손자였던 이심원은 사돈인 임사홍을 강하게 비판했다가 연산군 때 사형당했으나 사림이 집권하면서 신원되었다.

<2> 이심원에게 내린 시호 조선 후기 고종 때의 것이다.

그 무렵 흙비(土雨)가 내렸는데 천재지변이 있을 경우 군주는 하늘의 견책으로 생각하며 수성(修省)해야 했다. 그러나 도승지 풍천임씨 임사홍예로부터 천지의 재변은 운수(運數)에 있으니 운성(隕星: 별똥)도 역시 운수며 지금의 흙비도 때의 운수가 마침 그렇게 된 것이지 어찌 재변이겠습니까?”라면서 하늘의 경고가 아니라고 말했다.

 

양관(兩館: 홍문관·사간원)의 관원 20여 명풍천임씨 임사홍이 말한 바는 모두 옛 간신의 말”이라고 공격해 큰 소동이 벌어졌다.

 

성종은 풍천임씨 임사홍의 고신(告身: 관직임명장)을 거두고 양관(兩館)의 관원 20여 명도 파직시키는 절충안을 택했다.

그러자 전주이씨 이심원이 성종에게 친계(親啓: 직접 만나 아룀)를 요구해, “풍천임씨 임사홍은 신의 숙모부(叔母夫)이기 때문에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아는데 참으로 소인입니다···양관의 선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성종실록』 9년 4월 29일)”라고 사림의 편을 들었다.

 

성종은 당초 “네가 이를 위해 왔느냐?”라며 크게 화를 냈다. 조선 같은 사회에서 사돈을 공격하는 것이 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천임씨 임사홍 부자가 치부(致富)한 정상이 드러나면서 전주이씨 이심원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전주이씨 이심원은 자신의 부친이 이 일을 알면 자신을 보지 않으려 할 것이라면서 “신이 나라를 위해 어버이를 잊었으니 진실로 낭패입니다”고 통곡했다. 풍천임씨 임사홍 부자는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이심원도 부친에게 불효죄로 고발당해 제사권과 장자권을 동생에게 빼앗기고 강원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성종 12년(1481)에는 압구정(鴨鷗亭)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6월 24일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청주한씨 한명회는 성종에게 “명나라 사신이 신의 압구정을 보려고 하는데 정자가 매우 좁으니 만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성종은 승지를 사신에게 보내 “압구정은 좁아서 유관(遊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명 사신은 “압구정이 비록 좁더라도 가보겠다”라고 우겼다. 세조가 쿠데타를 추인받기 위해 명에 저자세 외교를 하고 난 후 명 사신의 위세는 더욱 커졌던 것이다. 공신 집단은 명 사신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심지어 한명회는 명 황제에게도 뇌물을 바쳤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때 가뭄에 우박이 겹쳐 조정은 그 대책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성종은 기우제를 지내고 사면령을 논의하는 한편 명 사신 접대를 위해 경복궁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거나 소주(燒酒)와 어육(魚肉)을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太平館)으로 보내야 했다.

 

청주한씨 한명회는 압구정이 좁아서 잔치할 수 없다고 말한 다음날인 6월 25일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명회가 아침에 명 사신을 찾아갔더니 자꾸 권유해 주반(晝飯: 점심)을 함께했다면서 압구정 잔치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

「명 사신이 “얼굴에 난 종기가 낫지 않았으므로 (내일 압구정에) 갈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말하기에 신이 “나가 놀면서 구경하면 병도 나을 텐데 하필 답답하게 객관(客館: 태평관)에 오래 있겠습니까?”라고 청했더니 상사(上使)가 “마땅히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성종실록』 12년 6월 25일)」

명 사신이 안 가겠다는 것을 자신이 권유해 오도록 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한명회는 “신의 정자가 본래 좁은데 지금 더울 때를 맞이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해사(該司: 해당 부서)에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대만(大<5E54>: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다. 오지 않겠다는 사신을 억지로 초청해 놓고 정부에서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

 

성종은 “경(卿)이 이미 명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해 놓고 이제 다시 무엇을 혐(嫌)하는가? 정자가 좁다면 당연히 제천정(濟川亭)에 차려야 할 것이다”고 전교했다. 성종은 하지 않아도 될 잔치를 하게 만든 청주한씨 한명회에게 화가 나서 압구정이 아닌 제천정에서 치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청주한씨 한명회는 성종의 전교를 무시하고 왕실의 보첨만(補<7C37><5E54>: 처마를 잇대는 장막)을 내려 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

 

성종은 “지금 큰 가뭄을 당하였으므로 뜻대로 유관(遊觀)할 수 없다”면서 “내 뜻은 이 정자는 마땅히 헐어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사신이 귀국해 정자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말하면 뒤의 사신이 모두 다 유관하려 할 것이니 폐단을 여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성종은 “또 강가에 정자를 꾸며서 유관하는 곳으로 삼은 자가 많다 하는데 나는 아름다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도 비판했다. 성종은 명 사신들이 이미 아는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겠다고 덧붙였다.

 

성종의 결정에 반발한 청주한씨 한명회는 자제를 보내서 항의했다.

“신은 정자는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아뢴 것뿐입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가 본래 숙질(宿疾)이 있는데 지금 병이 더하므로 그 병세를 보아서 심하면 비록 제천정일지라도 신은 갈 수 없을 듯합니다
.” 압구정이 아닌 잔치에는 가지 않겠다는 항변이었다.

 

승지들은 신하의 예가 없다면서 국문(鞠問)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명회는 변명에 나섰다.

성종은 “정승의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정승이 잘못했다”라고 단정지었다. 성종은 곧 사헌부에 한명회의 “무례가 막심하다”면서 “추국(推鞫)해서 아뢰라”고 추가 조치를 내렸다.

 

그런데 사헌부는 불러서 묻지 않고 서면으로 질문하는 공함(公緘)으로 조사했다. 사간원에서는 “마땅히 조옥(詔獄: 의금부 감옥)에 내려 그 사유를 취조해야 하는데 지금 편안히 집에 앉아 공함으로만 물으니 매우 미편(未便)합니다”고 항의했다. 성종은 “이미 사헌부에 추국을 명했으니 의금부로 옮길 수 없다”라며 투옥까지 시키지는 않았다.

7월 1일 사헌부에서 한명회의 죄상을 보고하자 성종은 “죄는 크지만 여러 조정의 원훈(元勳)이고 나에게도 구은(舊恩)이 있으니 다만 직첩(職牒)을 거두고 성 밖에 부처(付處: 주거지 한정)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면서 의정부의 견해를 물으라고 말했다. 구은(舊恩)이란 자신을 왕으로 만든 은혜를 뜻한 것이다. 의정부는 ‘대체로 직첩은 거두되 부처는 면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고 성종은 그대로 따랐다.

 

비록 부처는 면했지만 한명회의 시대가 서서히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드디어 성종 18년 청주한씨 한명회와 동래정씨 정창손이 세상을 뜨면서 세조 때의 원상들이 모두 사망했다.

그러자 적개 1등공신이자 좌리 4등공신인 영의정 파평윤씨 윤필상(尹弼商)이 공신 집단의 대표로 부상했다.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인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가 윤필상의 당숙(堂叔)이므로 국왕의 인척이기도 했다
.

 

성종 23년 12월 전주이씨 이목(李穆) 등 성균관 유생들이 나라 사람들이 파평윤씨 윤필상을 ‘간사한 귀신(奸鬼)’이라고 지목하는데 전하께서만 홀로 충성스럽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라면서 윤필상 공격에 나섰다. 이 무렵 모후 인수대비가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완화할 것을 요구했는데 윤필상 등이 동조한 것이 원인이었다.

 

성종은 화를 내면서 “수상은 내가 존경하는 바이니 간사한 귀신이라는 정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말하라”고 꾸짖었다.

이 무렵 사림은 구체적인 증거보다는 유학에 비추어 간신이라는 식으로 대신들을 공격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성종은 전주이씨 이목 등 8명을 옥에 가두었다가 이목을 제외하고 석방했으나 언로(言路)가 막힌다는 대간의 간쟁이 잇따르면서 이목도 석방시켰다.

 

성종은 훈구와 사림 중 어느 한쪽을 붕괴시킬 생각은 없었다.

 

성종이 보기에 훈구세력은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 반면
사림은 일체의 부정을 용납 않는 도덕성이 있었다. 성종은 양자를 적절히 활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양자의 이런 역학관계를 이용하는 것이 왕권 강화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연산군이 즉위한 후 공신들이 사림을 공격한 것이 사화(士禍)다. 그 과정에서 전주이씨 이목이심원이 사형당한다

 

애정 다툼을 투기로 몬 임금, 참극의 씨를 뿌리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57호 | 20100314 입력
 
현안을 바라보는 정치가와 일반 국민들의 시각이 서로 다를 때 비극이 온다. 국민들은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만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릇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 성종은 사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아내를 내쫓고 죽여버렸지만, 백성들은 왕비가 아무 죄 없이 쫓겨나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훗날 큰 화를 낳을 것도 알고 있었다.
 

왕비 폐비 윤씨를 상상해 그린 초상화.

종과 세 명의 대비는 사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죽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죄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절반의 성공 성종⑥ 낮과 밤의 두 얼굴

 

제9대 성종 가계도 

덕종- 소혜왕후 청주한씨 (한확의 딸)=인수대비

제 9대 성종

차남 : 자을산군(1457-1494)

재위기간 : 1469.1-1494.12(25년 1개월)

부인 : 12명 / 자녀 : 16남 12녀

1부인

공혜왕후

청주한씨

한명회의 딸

자식없음

2부인

정현왕후

파평윤씨

1남1녀

3부인

폐비

함안윤씨

1남

4부인

명빈 김씨

1남

5부인

귀인정씨

2남1녀

6부인

귀인 권씨

1남

 

제11대 중종

(진성대군)

신숙공주

제10대 연산군

 

무산군

 

안양군

봉안군

정혜옹주

진성군

 

 

7부인

귀인 엄씨

1녀

8부인

숙의 하씨

1남

9부인

숙의 홍씨

7남3녀

10부인

숙의 김씨

3녀

11부인

숙용 심씨

2남2녀

12부인

숙용 권씨

1녀

공신옹주

 

계성군

 

완원군

회산군

와성군

익앙군

경명군

운천군

양원군

혜숙옹주

정순옹주

정숙옹주

휘숙옹주

경숙옹주

휘정옹주

이성군

영산군

경순옹주

숙혜옹주

경휘옹주

 

 


성종은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무너진 헌정 체제의 복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재위 16년(1485)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는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야사는 성종을 ‘낮에는 요순이지만 밤에는 걸주(晝堯舜 夜桀紂)’라고 묘사한다. 낮에는 요·순 임금처럼 선정을 베풀었지만 밤에는 걸·주 임금처럼 여성 편력에 빠졌다는 뜻이다.

 

성종은 4명의 왕후와 8명의 후궁 등 12명의 부인에게서 16명의 왕자와 12명의 공주·옹주를 낳았다. 만 열 살 때인 세조 13년(1467) 청주한씨 한명회의 딸(공혜왕후)과 혼인성종은 재위 4년(1473) 16세의 나이로 판봉상시사 함안윤씨  윤기견(尹起<754E>)과 윤호(尹壕)의 딸을 동시에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이듬해 공혜왕후 한씨가 후사 없이 죽고 윤기견의 딸이 왕자(연산군)를 낳자 성종은 재위 7년(1476)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러나 친정이 막강했던 한씨와는 달리 부친까지 사망한 한미한 가문 출신의 함안윤씨에게는 도전하는 후궁들이 많았다.

 

성종 8년(1477) 숙의(淑儀) 권씨 집에, ‘소용(昭容) 엄씨와 정씨가 왕비(함안윤씨)와 원자(元子: 연산군)를 해치려 한다’는 내용의 투서가 날아든 것도 애정 다툼의 일종이었다.

 

당시 대궐에는 세조비 정희왕후 파평윤씨(대왕대비), 성종의 모친 덕종비 인수대비 청주한씨(한확의 딸), 예종비 안순왕후(=인혜대비) 청주한씨(한백륜의 딸)의 세 대비(大妃)가 있어서 삼전(三殿)이라고 불렀다.

왕비 함안 윤씨의 방에서 독약의 일종인 비상(砒霜)과 굿하는 방법이 담긴 방양서(方禳書)를 발견한 성종은 투기의 증거라고 대비에게 보고했다.

 

세조비 정희왕후 파평윤씨(대왕대비)는 대신들을 모아 “세상에 오래 살게 되면 보지 못할 일이 없다” “투기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제후(諸侯)는 아홉 여자를 거느리는 것인데 지금은 그 수가 차지 않았다”라는 등의 말로 왕비를 비난했다. 그러면서 중궁(中宮)이 이미 국모가 되었고 또 원자도 있는데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성종실록』 8년 3월 29일)”라고 물었다.

회묘(懷墓)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무덤이다. 연산군이 회릉으로 추숭했다가 중종반정 이후 회묘로 강등됐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서삼릉 경내로 이장했다. 사진가 권태균
이것이 연산군 시절 큰 비극의 시작이었다. 아들에 불과한 신하들에게 어머니인 왕비의 죄를 의논하라는 무리한 요구였다. ‘좌우에서 서로 돌아보고 실색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처럼 신하들은 크게 놀랐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아녀자의 투기는 상정(常情)이니 잘 훈계하소서’ 정도로 덮어야 했다.

그러나 영의정 동래정씨 정창손(鄭昌孫)이 “주상의 뜻은 폐(廢)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무리수가 두어졌다.

 

예조판서 양천허씨 허종(許琮)만이 ‘선갑이 3일, 후갑이 3일(先甲三日,後甲三日: 주역에 나오는 말로 일을 신중히 처리하라는 뜻)’이라는 신중론을 제기했을 뿐

 

하동정씨 정인지· 동래정씨 정창손· 청송심씨 심회 등의 대신들은 왕비의 친정 식구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종은 비상과 방양서 등을 바쳤다는 여종 삼월이를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대신들이 강경 처벌을 주청해 장모 신씨의 작첩을 빼앗았다.

 

한미한 가문 출신의 함안윤씨 왕비는 공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겨우 왕비 자리를 보존했으나 성종의 총애를 잃고 대비의 미움을 산 왕비 함안윤씨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성종의 모친 인수대비 청주한씨(한확의 띨)가 가장 강경했다.

 

한씨는 성종 6년(1475) 편찬한 『내훈(內訓)』에서 “나는 일찍이 책을 읽다가 달기(<59B2>己: 은나라 주왕의 비)의 웃음과 포사(褒<59D2>: 주나라 유왕의 총희)의 아양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한씨는 『내훈』에서 남편에게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적었으나 일찍이 미망인이 된 청주 한씨와 달리 왕비 함안윤씨는 호문(好文)만큼 호색(好色)이었던 성종의 여성 편력에 속을 썩었다.야사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고 있으나 『성종실록』은 왕비가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의 방에 뛰어들었다가 뺨을 맞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끝내 왕비를 폐출하기로 결심한 성종은 재위 10년(1479) 6월 2일 상당부원군 청주한씨 한명회, 영의정 동래정씨 정창손(8년 후 사망), 우의정 파평윤씨 윤필상 등 정승들을 일찍 입궐시킨 후 왕비 문제를 거론했다.

성종은 “지금 중궁(中宮)의 행위는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라면서 “내간(內間)에는 시첩(侍妾)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라고 비난했다.

 

성종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읊은 후 “이제 마땅히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려 하는데, 경들은 어떻게 여기는가?”라고 말했다. 큰 죄가 있는 것처럼 과장했지만 구체적 비난은 ‘투기’라는 것뿐이었다.

 

도승지 부계홍씨 홍귀달(洪貴達)을 비롯한 승지들이 ‘원자(元子)를 낳았으니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하자 이들을 모두 의금부에 투옥시킨 성종은 당일 왕비 폐출 교서를 반포했다.

 

이때 성종은 “내가 만약 후궁의 참소를 듣고 그릇되게 이러한 거조(擧措)를 한다면 천지와 조종(祖宗)이 위에서 밝게 질정(質正)해 줄 것”이라거나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있겠는가?”라는 등의 말을 반복했다. 후궁의 참소에 놀아난 결과가 아니라는 자기 변명이었다.

승지들이 대비에게 아뢰기를 청하자 ‘윤씨를 구제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한 성종은 자신이 이미 두 번이나 아뢰었더니, 대비는 “내가 항상 화가 주상의 몸에 미칠까 두려웠는데 이제 이렇게 하니 내 마음이 안심된다”고 말했다고 전해주었다. 왕비 함안윤씨는 당일로 폐출되어 사가(私家)로 쫓겨났다.

그러나 이 조치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은 부정적이었다
. 성균관 유생들이 함안윤씨를 민가가 아닌 별궁으로 옮기라고 상소하자서생들은 국사에 관여하지 않는 법”이라며 옥에 가둔 사실에서 드러나듯 젊은 사림들도 윤씨를 동정했다.

 

성종 13년(1482) 8월 시독관(侍讀官) 안동권씨 권경우(權景祐)는 “국모가 되었던 분을 무람없이 여염(閭閻)에 살게 하니 일국의 신민이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라는 동정론을 펼쳤다.

 

대사헌 인천채씨 채수(蔡壽)는 “윤씨가 (옛날) 입궐한 후에 길거리의 아이들과 동네 아낙네들이, ‘윤씨가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반포(斑布: 무명)를 짜서 팔아가지고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이제 팔자가 좋아진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성종실록』 13년 8월 11일)”라고 윤씨에 대한 백성들의 동정을 전했다.

그러자 성종과 대비들은 되레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

 

덕종비 인수대비 청주한씨는 세조비 정희왕후 파평윤씨와 상의한 후 “우리들이 바른 말로 책망을 하면, 저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니, 우리들의 명색이 어버이인데도 이러하였다. 하물며 주상에게는 패역(悖逆)한 말까지 많이 했고, ····늘 ‘내가 오래 살게 되면 후일(=연산군 대)에 볼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함안윤씨를 비난했다. ‘후일’은 아들이 왕이 되는 때를 뜻한다.

 

성종은 재위 13년(1482) 8월 주요 대신들을 불러 함안윤씨가 흉험(凶險)하고 악역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사직을 위한 대책’을 물었다.

 

아들(연산군)이 왕이 되기 전에 죽이는 것이 사직을 위한 대책이었다.

동래정씨 정창손과 청주한씨 한명회는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고
좌익공신(佐翼功臣)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인 동지사(同知事) 이파(李坡)는 “옛날 구익부인(鉤<5F0B>夫人)이 죄가 없는데도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죽인 것은 만세를 위한 계책이었습니다”라고 가세했다.

 

한나라 무제는 구익부인 조첩여(趙<5A55><59A4>)의 아들 유불릉(劉弗陵: 훗날의 소제)을 태자로 세우고 모친을 죽여버렸다.

 

여러 대신들은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라고 동의했다. 윤씨의 죄가 무엇인지 따지는 대신들은 없었다.

 

성종은 좌승지 광주이씨 이세좌(李世佐)를 보내 윤씨를 사사(賜死)시켰는데 그때 성종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사림들이 편찬한 『기묘록(己卯錄)』은 윤씨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윤씨는 피눈물을 닦아서 얼룩진 수건을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전하면서 ‘내 아이가 다행히 보전되거든 나의 슬프고 원통한 사연을 알려 주오…’라고 부탁했다
.(『기묘록 보유』, 『이청전(李淸傳)』)”

야사에는 양천허씨 허종(許 )이 지의금부사, 동생 허침(許 )이 형방승지로서 이 임무를 맡아야 했는데 형제의 누이인 신영석(申永錫)의 부인 허씨가 훗날 큰 화를 입을 것이라며 입궐하다 다리에서 떨어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두 형제는 다리에서 떨어져 훗날 화를 면했는데, 그후 종로구 사직동의 다리종침교(琮琛橋)라고 불렀다.

 

광주이씨 이세좌의 부인은 남편이 사약을 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어찌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 어머니의 마음이 곧 예언이 된 셈이다.

 

 

남의 힘으로 왕이 된 성종, 현실과의 타협은 숙명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58호 | 20100321 입력

 

목숨 걸고 권력 쟁취에 나섰다가 불행해진 정객이 많은 반면 권력이 그냥 굴러 들어오는 행운아도 없지 않다. 권력을 줍는 행운을 누릴 수는 있지만 성공한 정치가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치가로 성공하려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하 는데 성종은 현상적 처방에 만족했다. 성종이 외면한 시대의 문제는 고스란히 연산군의 어깨에 지워졌다.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 국왕이 서총대에 친히 나가서 활쏘기 우승자에게 말 두 필을 하사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고려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⑦ 무예 장려

성종 때 사림들이 조정에 진출하면서 두 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사림들이 공신집단들의 불법과 전횡을 비판해 조정의 도덕성을 높인 반면 문치(文治) 편향에 따른 국가의 문약화(文弱化)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국왕에게 국가의 문약화 방지는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다.

 

성종은 사례(射禮)와 강무(講武)를 직접 주관하는 것으로 ‘무인 군주’의 모습도 보이려 했다.

사례는 서울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활을 쏘는 대사례(大射禮)와 지방에서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사례(鄕射禮)로 나뉜다.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서 공자는 “군자는 다투지 않으나 반드시 활쏘기는 그렇지 않다. 서로 읍하고 사양하며 단에 올라 활을 쏘고 내려와서 마시니 그 다툼이 군자답도다(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98F2>,其爭也君子)”라고 말했다. 대사례는 『의례(儀禮)』의 한 편명(篇名)일 정도로 국왕의 주요 의식 중 하나였다.

성종은 재위 8년(1477) 8월 성균관 문묘(文廟)에서 공자 및 선현들을 제사하는 석전(釋奠)을 거행하고 명륜당에 나가 특별 과거를 보았다
. 1400여 명의 거자(擧子:응시생) 중 권건(權建)4명의 급제자를 선발했는데, 내구마(內廐馬:임금의 말)를 타고 유가(遊街:급제자의 가두행진)하는 행렬에 구경꾼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성종은 이때 사단(射壇)에 나가 함께 모여 활을 쏘는 대사례를 행했는데 화살 넉 대를 쏘아 1시(矢)를 맞혔고 월산대군과 영의정 동래정씨 정창손 이하 68명이 짝을 지어 쏘았는데 맞힌 자는 상을 주고 못 맞힌 자는 벌주를 내렸다.

선릉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지방의 함께 모여 활을 쏘는 향사례『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주석에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개성부와 주부군현(州府郡縣)에서 향사례를 행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지방에서 실제로 행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향사례를 향촌 사회 장악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인물이 사림 영수 선산김씨  김종직(金宗直)이었다.

 

성종 14년(1483) 8월 시강관(侍講官) 김종직은 성종에게 자신이 지방관(선산 부사)으로 있을 때 “향사례를 마련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자를 가장 앞세우고, 재예(才藝)가 있는 자를 다음으로 하고 불초(不肖)한 자를 참여시키지 않았더니 이때부터 온 고을 사람들이 교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함께 모여 활을 쏘는 향사례를 이용해 사림은 향촌 사회를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사림은 국왕이 대사례 외에도 관사(觀射) 등을 통해 무예를 권장하려 하면 그것을 비판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 관사는 임금이 신하들의 활쏘기를 구경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임금도 직접 쏘았다. 세조도 자주 관사를 즐겼으나 이때만 해도 국왕의 관사를 비판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림이 성종의 관사를 비판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무예를 천한 것으로 여겼던 사림들의 내심이 있었다.

 

성종 9년(1478) 4월 사헌부 대사헌 유지(柳<8F0A>) 등이 ‘지진과 흙비가 내렸는데 임금이 후원에서 종친(宗親)들과 관사하면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비판한 것이 이런 유형이었다.

 

임금은 수성(修省: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함) 같은 문적(文的) 수양에 힘써야지 관사 같은 무적(武的)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무예를 천시하는 고질병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종은 “내가 종친과 더불어 관사하는 것은 친친(親親:친척을 친애함)을 돈독히 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려는 것”이라면서 “송나라의 정치를 논할 때 ‘문치(文治)는 성했으나 무략(武略)은 강하지 못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사림들이 이상으로 삼는 송나라가 무예를 천시하다가 망하지 않았느냐는 반문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사림들의 무예 천시에 대해 사상적·제도적으로 대응하는 본질적 대책보다는 관사를 계속하고 강무를 강행하는 현상적 대응에 만족했다.

 

성종 10년(1479) 3월 시강관 권건(權健) 등은 “근래 들으니 여러 도에 교서를 내려 사냥개를 구했다고 합니다”라고 비판했다. 성종은 “강무(講武)에는 반드시 사냥(田獵)을 해야 하는데 사냥하려면 개가 없을 수 없다”고 변명했다. 성종은 공신 집단들의 불법 전횡에 적당히 타협한 것처럼 사림들의 무예 천시에도 적당히 타협했다.

 

성종은 재위 10년(1479) 10월 2일 융복(戎服:군복)을 입고 경기도로 사냥하러 나갔는데 명분은 종묘에 바칠 제물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이때 성종은 거차산(巨次山)·조곡산(早谷山)·묘적산(妙積山)·저적산(猪積山)·청송산(靑松山)·보장산(寶藏山)·왕방산(王方山)·주엽산(注葉山) 등지를 돌며 보름 동안 사냥하다가 17일 환궁했다.

사냥은 국왕의 놀이이기도 했지만 강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평화시의 군사 훈련이기도 했다. 국왕의 사냥은 임금이 전쟁에 나갔을 때를 가정해 진행되었다. 어가(御駕) 앞 교룡기(交龍旗) 밑에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는데도 달려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수들이 곤장을 맞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성종은 강무에서 신하들을 죄준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평일에는 대신을 예로 대우하여 죄를 주지 않으려 했지만 군문(軍門)의 일은 크므로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원에게 치료해 주도록 하라.(『성종실록』 10년 10월 6일)” 성종은 이처럼 강무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도 사용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종이 두 차례 북벌을 단행한 이유 중에는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성종 10년(1479) 윤10월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건주여진(建州女眞:남만주 일대의 여진족)이 명나라 국경을 침범했다면서 출병을 요구했다.

성종은 “지금 겨울철을 만났으니 군사를 보내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라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으나 결국 파병에 동의했다
.

 

성종은 세조 때 여진 정벌에 참전했던 우찬성 충주어씨 어유소를 서정대장으로 삼아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라고 명했다. 서정군은 만포진(滿浦鎭)에서 이산진(理山鎭)까지 도강 지역을 물색했으나 그해 따라 얼음이 얼지 않아 도강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이대로 그칠 수 없다고 생각한 성종은 좌의정 파평윤씨 윤필상과 평안도 절도사 김교(金嶠) 등에게 4000군사를 주어 다시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그러나 여진족이 주로 흩어져 퇴각하는 전술로 맞서는 바람에 조선군이 올린 전과는 여진족의 머리 16급(級)과 남녀(男女) 합계 15명을 사로잡은 것에 불과했다.

성종 22년(1491) 정월 여진족 올적합(兀狄哈) 1000여 명이 영안도(永安道:함경도) 조산보(造山堡)를 공격해 군사 3명 사살, 26명 부상의 인명 피해를 주고 물자를 노략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경흥(慶興)부사 나사종(羅嗣宗)이 두만강을 건너 추격하다가 되레 전사하자 파병론이 등장했다.

 

찬반 양론이 대립했으나 성종은 파병을 결정하고 허종(許琮)을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로 삼아 두만강을 건너게 했다. 여진족은 이때도 흩어져 도주하는 작전으로 맞서 조선군은 9명의 여진족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하는 작은 전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만주 강역을 영구히 점령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응징 차원의 파병은 효과가 클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다. 군사 문제에 있어서도 성종은 근본적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 현상 타개책에 만족했다.

 

그 결과 25년이란 짧지 않은 재위 동안 성종이 남긴 구체적 업적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군(聖君)의 칭호를 받았던 것은 그 앞의 세조·예종이나 그 뒤의 연산군과 비교된 데 따른 반사이익에 불과한 것이었다.

재위 25년(1494) 11월 성종은 천증(喘證:기침)과 설사(痢證)에 목이 마르는 복합병세가 발생했다. 12월에는 얼굴빛이 위황(<75FF>黃:마르고 노래짐)해지고 허리 밑에 붉은 적취(積聚:배 속 덩어리)까지 나타났다. 배꼽 밑 종기를 오래 앓았다는 이세좌(李世佐)를 불러 치료 방법을 물어보자 “이 병을 앓은 지 15년인데 별다른 치료 방법은 없고 단지 수철(水鐵)과 천년와(千年瓦)를 불에 구워 아픈 부위에 문질렀습니다”라고 답했다.

 

광주이씨 이세좌는 그 후에도 연산군의 생모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다는 혐의로 연산군 10년(1504) 사형당할 때까지 10년을 더 살지만 성종은 달랐다.

 

12월 24일에 종기(腫氣) 치료 경험이 많은 의원(醫員) 전명춘(全明春)을 불러 치료하게 했으나 그날 오시(午時:오전 11시~ 오후 1시) 대조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1494년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였다.

 

국왕이 될 수 없었던 성종은 대비 윤씨와 공신집단의 합의로 왕위에 올라 현실과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타협했다.

성종이 타협을 거부했던 거의 유일한 사건이 왕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賜死)였다.

그렇게 죽인 여인의 아들 연산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 또한 그로 인해 불거질 문제에 눈 감은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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