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지명 유래
浦項이란 향호는 포항의 대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형산강의 하류이자 지류로서 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칠성강의
중요지점을 나타내는 우리말 지명인 갯매기(갯미기:표준말은 갯목)의 한자화로 이루워졌다.
갯목은 구 驛前橋(1980년대 초에 복개)지역이며, 포항진은 오늘날 포항시네마(구.포항극장) 지역이다.
포항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된 것은 131년(영조7년) 포항창진(浦項倉鎭)을 설치하면서 창진이 설치된 마을
이름을 기존의 영일현 북면의 대흥리(大興理)를 포항리(捕項里)로 개칭하고, 창진의 이름을 포항창진(浦項倉鎭)으로
등재한데서 비롯되었다. 대흥동은 1731년 이후 사라졌다가 (자료:1693년 영일현감이 발행한「북면 대흥리 13통 9호
金聲重의 호적부」) 1945년 광복후 포항동을 대흥동으로 회복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로부터 형산강의 북하구의 중심지류 연변인 포항리가 조운과 물화교역의 요충지로서 주목을 받아 오다가 포항창진
(흉년시 함경북도지방의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때로는 여타지방의 백성진휼(賑恤)의 운송을 담당하는 전국 굴지의
제민창)이 설치되면서부터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다. 이들에 의 도내(島內)리를 비롯한 5도 등의 섬마을이 개척되어,
바야흐르 포항은 동해안 물화교역의 중심항구로서 잠재적 역활을 발휘하게 됨으로 포항발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
하게 되었다.
따라서 포항 지명은 특유한 자연환경(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중요지점:갯목)과 역사환경(포항창진 설치)에 의해서
유래되었으며, 이로부터 포항의 지명은 중앙에서부터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포항시 대표적 산업
1970년대부터 포항종합제철의 건설로 농업과 어업 중심에서 공업도시로서 비약적 발전을 이룬 포항시는 공업도시
면모다운 각종 기업을 유치하고 있는데,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POSCO의 모태는 1968년 3월 세워진 포항종합
제철이고, 포항의 포스코를 비롯해 전국의 여러 철강소를 포함한 철강산업은 세계 소수국가만이 이 산업을 독점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또한 그 소수의 나라 중 생산량이 가장 선두에 위치한 나라이며 그 기술또한 현재는 세계적인 수준
이기도 하다.
포항의 포스코는 철강산업의 메카로 불리워질 만큼의 우리나라 철과 관련된 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고 이로 인한
포항시는 거듭된 성장으로 현재 약 52만명의 인구이며, 잘사는 알찬 도시로 탈바꿈 했다.
포항시 연혁
1914년 4월 1일 흥해군 동상면과 연일군 북면을 영일군 포항면으로 합면하였다.
1931년 4월 1일 포항면을 포항읍으로 승격하였다.
1938년 10월 1일 형산면 등을 포항읍에 편입하였다.
1949년 8월 14일 포항읍을 포항부로 승격하였다. (1부, 1읍, 13면, 1출장소)
1949년 8월 15일 포항부를 포항시로 개칭하였다. (1시, 1읍, 13면, 1출장소)
1995년 1월 1일 통합 포항시로 출범하였다.
포항시의 동쪽은 동해, 서쪽은 영천시, 남쪽은 경주시, 북쪽은 영덕군·청송군에 접한다.
동경 128°59′∼129°35′, 북위 35°50′∼36°20′에 위치한다.
면적은 1,128.08㎢이고, 인구는 52만 2,767명(2012년 10월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구, 4개 읍, 10개 면, 15개 동, 375개 리가 있다.
시청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시청로1(대잠동)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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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포항의 변천사" 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등 격동기와 60, 70, 80년대를 거치며 발전한
포항의 모습이다. 200여개의 이미지를 편집하며 주제별로 작성하기 보다 년도순으로 올리기로 한점을 이해 바라며,
사진 내용은 일강점기, 6.25 전쟁, 동빈내항과 해안풍경, 농어촌지역, 시가지와 도심뒷골목, 새마을운동, 포스코탄생 등
포항인들의 삶이 그대로 기록된 사진들이다. 대부분의 사진은 포항시 홈피에서 가져온 것들이라 시의 입장에서 보는
기록물로 보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 북구, 남구의 구명은 현재를 표시한것.
여천시장(중앙동에 위치) - 구한말
내항에 정박중인 황포돛배 - 1920년
현 동빈사거리부근의 칠성천하구(형산강 지류)의 섭다리 - 1920년
청하면 청계리 모습 - 1920년대
일강점기의 포항
구룡포항 모습 - 1930년
포항 송도해수욕장 (엽서의 희미한 한자는 상도로 표기...) 일강점기의 기록물이라 기모노 입은 여인 모습이...
경북 8경 중 포항. 일강점기 동빈내항과 송도해수욕장 (이 사진을 눈여겨 보시길,, 다음에 올릴 사진이 있기에...)
조선 경북 포항 전경 이라고 쓰인 일,강점기 엽서
일,강점기의 포항 본정통. 현 북구 상원동
포항 번화가, 본정통. 다른시기에 바로위의 장소보다 조금 뒤쪽에서 촬영된듯 하다.
아래 포항읍사무소 / 위 포항경찰서
강점기 때의 동빈내항
포항은 과거에서 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동해에서 수산업이 가장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구룡포항 방파제
칠성천 승개교(남빈사거리)-1940년. 다리 규모는 작지만 부산 영도다리 처럼 들어 올리는 기능이...
포항 동빈항
경북 8경 포항해수욕장
포항 동빈내항
▽ 90년 전 포항의 옛모습 담긴 사료 발견 - 포항뉴스 2009. 2. 2
90년 전인 1920년대 옛 포항면과 구룡포(창주면) 시가지의 모습, 주요건물, 사회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발견됐다.
이 사료는 1929년도(소화4년)에 당시 구룡포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河合淸治)이 조선정보협회로부터 의뢰받아 제작한
2절지 규격의 2도 컬러인쇄물로서 도시단위별 상황을 소상히 알리는 시가지종합안내서다.
사료의 전면에는 주요 간선도로와 지어진 건물명칭, 상호, 소유주, 전화번호까지 소상히 기록돼 있으며, 주요건물과 시설
장면을 사진으로 배치돼 있다.
이면에는 당시 시가지(도시) 개황을 비롯해 연도별 인구동태, 가구 수, 교육기관 및 재정상황, 산업별 구조와 생산량, 기관
단체명과 현황, 음식점, 운송수단, 직업별 현황 등 당시 사회 세세한 분야까지 소상히 담아져 있으며, 각 시설과 건물은 시
가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위치색인까지 나타내고 있다.
포항시는 이 사료를 자세히 분석하여 당시 포항사회를 연구하는 사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강점기 당시의 포항면 현황
○ 학교 1928년도
- 공립 포항심상고등소학교(1909년 설립) 학생수 895명
- 공립 포항보통학교(1916년 설립) 학생수 1,717명
- 사립 영흥학교(1912년 설립) 학생수 822명
- 사립 보명학교(1922년 설립) 학생수 582명
- 사립 노동야학교(1924년 설립) 학생수 246명
- 사립 포항유치원(1922년 설립) 학생수 200명
○ 인구 (1919년~1927년도)
○ 어업인 : 1,446명 (조선인 516, 일본인 903명)
○ 선박: 275척 (어업용 203, 발동기선 6, 어획물운반선 66)
○ 기타 산업체
사진업, 무역상, 미곡정비업, 의료기관, 양조업, 여 관, 음식점, 고물상, 금은방,
정육점, 목재상, 어업중개인, 위탁업, 제과점, 자전차점, 신문지 국, 대서업소 등
○ 창주면(구룡포지역) 인구현황 - 1929년도 기준
- 구룡포지역 9,058명 (조선인 8,166, 일본인 692명)
- 창주면 농업인 6,831명
이 뉴스클리핑은 http://pohangnews.co.kr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
이상 일제강점기때의 포항 이며, 해방과 한국전 발발 이전의 포항에 관한 자료는 아직 수집된게 없어
아래는 1950년 한국전쟁 전후의 포항부터의 사진을 수집해 년도순으로 정리 해 봅니다.
↑ 출처 : 포항시
영일만에 정박중인 미해군 함정 - 1950년
송도해변에 상륙한 상륙정 - 1950년
동빈동, 대신동 일대 - 1950년
월포만에 정박한 미군함 - 1950년
포항에서 하역 작업중인 LST 모습 - 1950.7.22
항만청 앞 방파제를 통해 들어오는 국군
북부해수욕장으로 들어오는 외국지원병 - 1950년
동빈부두 상륙정 - 1950년
동빈내항을 경계중인 장병 - 1950년
항구동의 해군포항경비부 - 1950년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있다 - 1950년 8월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길을 안내하는 부녀자와 학도의용군 - 1950년
6.25 -포항지역 학도의용군
한국전쟁 당시 안동지역으로 침공한 북한군 제12사단이 동남진하여 1950년 8월 10일 포항 북쪽의 흥해를 점령함으로써,
국군 제3사단의 퇴로는 차단되고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은 계속되어 포항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포항에는
제3사단 후방사령부가 포항여자중학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학도병 71명이 제3사단에 입대하기 위하여 사령부로 찾아
왔으나 자체방위능력은 없던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1950년 8월 11일 소티재를 넘어
포항시내로 진격하였다. 점령을 당한 포항은 포항지구전투라 불리는 학도병들과 국군 제3사단의 후방사령부 행정요원들
이 참여한 전투결과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번 민부대(민기식 대령 지휘하에 제7사단 창설을 위한 기간요원)에 의해 포항을
탈환했다.
백병전을 벌이고 있는 학도병과 국군을 상상으로 그린 모습. 뒤의 배경이 포항여자중학교 건물이다.
사진으로 보는 포항의 변천사 - 4 http://cafe.daum.net/wpdlfgktkrhks/O1yx/418 아랫쪽 사진에
<포항여중 1972년 > 그 모습이 보인다.
1950년 8월에 촬영한 학도병들의 모습 (다른 지역의 학도병)
용산 전쟁기념관의 포항여자중학교에서 학도병 전투 장면
낙동강 방어전투 당시 학도병들의포항여중 전투 상황을 재현한 것으로 한국군 제3보병사단 후방사령부를
차린 포항여중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학도병들이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백병전(白兵戰)'을치루는
모습을 모형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것.
포항관련 사진을 수집하다 보니 실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개런트 M1소총과 실탄 250발, 수류탄을 지급받은 71명의 학도병 이야긴데, 포항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사단
사령부 행정병과 진을 치고 있다가 이들의 11시간에 걸친 첫번째 전투는 새벽녘에 정찰대로 온 소수의 인민군을
섬멸했고, 두번째도 선제공격을 해서 물리쳤고, 세번째는 국군정규부대의 잔존 병력들이 있어기에 버텄고,
마지막 네번째는 날이 밝아오자 다시 밀려오는 인민군에게는 학도병만 남은 상태에서 인민군에 포위되어 이미
총알도 떨어져 수류탄과 빈총으로 치열한 육박전을 치루다 일부는포로로 잡히고 대부분 전사했으며 장시간
버터준 학도병들에 의해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은 인민군에 점령 당했던 곳을 재탈환 했다는 실화와 이중 인터넷
상에 많이 알려진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일기) 입니다.
다음의 일기는 1950년 8월 11일 포항에서 숨진 소년병(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의 일기 입니다.
이우근은 국군 제3사단 (소속?) 소년병으로 북한 정예군을 맞아 싸우다 포항여중 앞 벌판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 일기는 그의 죽엄을 수습하던 중 주머니 속에서 피와 범벅이 된 채로 발견된 수첩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0 년 8월 10일 목요일 날씨 쾌청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읍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읍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마음이 가라 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71명 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청결한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사람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 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그러나 71명의 학도병은 대부분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학도병은 시신 훼손이 심했고, 수첩 역시 피에 잔뜩 젖어 알아 볼수가 없었다...
이 글을 옮겨 적으며 눈물이 나네요 (__) ...
(영화 '포화 속으로' 에서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로 영화 관람객을 울리기도...)
치열한 공방전 후의 초토화된 포항 시가지모습 - 1950년
6.25전쟁 당시 포항은 치열한 공방전으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고 말았다. 원형으로 파인 자리는 폭격 탄흔자리로 보인다.
폐허가 된 포항시가지 - 1950년
낙동강 방어선은 북의 남침으로 전개된 한국전쟁의 승패가 달린 최후의 저지선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되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없는 상황이라 낙동강 일대에 전개된 치열한 전투들을 꼽을때 '외관전투' 외에 포항 '형산강(兄山江)도하작전'이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50년 9월 중순, 형산강 북쪽 포항을 점령한 인민군 제2군단 제12사단이 남쪽 F-51 전폭기 출격기지인 영일비행
장과 경주시 점령을 시도하자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이를 저지하고 포항을 탈환하려는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 사이에 전개
된 공방전이다.
이렇게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한달 반 동안 펼친 공방전은 결국 인민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으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반격을 개시함으로써 전쟁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 때 포항을 단기간에 탈환하지 못했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되어 피난정부가 있던 부산도 위기에 처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 낙동 방어선 상황도 / 초토화 되었어도 온전한 그대로 남은 건물이라는 노컷뉴스... ▲
낙동강 방어선 상황도. (1950. 9. 1 ~ 9. 15. ①국군 제3사단, ②국군 수도사단, ③국군 제8사단, ④국군 제6사단,
⑤국군 제1사단, ⑥미 제1기병사단, ⑦미 제2사단, ⑧미 제25사단, ⑨미 제 24사단.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중앙동 제일교회 부근)
치열한 공방전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중앙동) - 1950년 9월
6.25-유강 외팔교 부근 격전지
6.2 5-포항여고 교정에서의 전몰학도병 유골봉안식
6.25 직후의 구룡포항 1951년
여남동 미역채취 - 1956년
시의회 의사당 낙성식 -1958년 9년 18일
남빈동 사거리-부두방향 도로 1959년
호미곶 등대 - 196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