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대승사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국보321호)
🎋삼국시대의 불상양식
불교가 처음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의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와 불상·경문(經文)을 보냄으로써 비롯되었다. 삼국시대의 불상은 대체로 중국 남북조 시대의 영향을 받아 작은 금동불과 소조불을 주로 만들었으나, 6세기 후반 부터는 본격적인 조형활동이 이루어져 화강암을 재료로 한 석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불상 중에는 삼존 형식이 많으며 특히 반가사유상이 크게 유행 하였다.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의 불상을 말하는데, 7세기 중엽부터는 불상에 입체감이 강조되고 법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진다.
금동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고구려 불상
고구려 불상은 남아 있는 수와 관련 기록이 적어, 불상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375년 소수림왕은 초문사 (肖門寺)와 이불란사 (伊佛蘭寺)를 세웠고, 광개토대왕은 393년 천도예정인 평양에다 9개의 사원을 창건하였다. 가장 오래된 연대를 지니는 불상은 국보 제 119호 연가칠년 (延嘉七年)이 새겨진 금동불입상 인데, 이불상의 광배(光背) 뒷면에는 연가(延嘉) 연간의 일곱 번째 해인 기미년(己未年)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있던 동사(東寺)라는 절에서 만든 1,000구의 불상 중 29번째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생동감이 느껴지는 두툼한 법의를 입고 커다란 연꽃잎 모양의 광배를 배경으로 다리를 살짝 벌린 채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늘씬한 모습이다. 미소를 지은 부드러운 얼굴 표정과 도톰한 대좌 연판에서 이미 고구려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연가7년명여래입상 (국보119호)
🎋백제 불상
백제의 불상 조성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들은 사비(부여)로 천도한 538년 이후에 나타난다. 국가적인 후원 속에서 발전한 백제의 불교는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6세기 백제에서 석가모니불상, 미륵불상, 아미타불등 다양한 불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중반이 되면,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과 같이 늘씬한 신체 비례와 자연스런 자세를 갖추게 된다. 세련된 자태와 생동감 넘치는 얼굴표정,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천의 자락, 보주와 천의를 살포시 잡고 있는 양 손가락의 표현 등 백제 조각의 완숙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백제불상은 특히 그 표정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세련된 조형성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활발하고 역동적인 감각이나, 신라의 경직되고 둔중한 조형 감각과는 다른 뚜렷한 특징이다.
부여규암리금동관음입상 (국보293호)
🎋신라 불상
신라는 이차돈(異次頓)의 희생을 계기로 법흥왕 527년에 불교를 공인했다.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중엽쯤엔 불상의 입체감이 강조되고 법의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졌으며, 불상의 전면뿐만 아니라 측면이나 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는 등 그야말로입체 조각으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국보 83호 반가 사유상은 세 개의 반원으로 구성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상체는 사유의 이미지와 어울리게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정적인 모습으로, 하체는 치마 자락이 다리의 굴곡을 따라 활발하게 처리되는 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사유에 잠긴듯한 얼굴표정, 가늘고 긴 눈과 눈썹, 유려하고 자연스런 오른손 손가락, 오른발 발목을 팽팽하게 감고 있는 법의 주름등에서섬세한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
금동미륵반가상 (국보83호)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던 불교는 사원건축이나 불상 조성에 국가가 앞장섰던 불교문화의 전성기였다. 이 시대의 불상은 고구려·백제·신라 불상이 통합되는 한편,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종래의 인간미 넘치는 얼굴에 위엄이 서리고, 신체는 적절한 비례로 조화를 이루었으며, 몸과 밀착된 얇은 옷자락으로 인하여 몸의 굴곡과 양감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8세기 중엽 조성된 석굴암 조각에서 완벽한 절정에 이른 모습을 보인다. 대체로 불상의 제작기법에서 세련되면서도 세밀하고 자연스러운 면이 크게 좋아진 반면, 고구려 불상에서 보여주었던 생동감 넘치고, 힘있는 모습은 다소 줄어들고 후대에 들어서는 정형화된 느낌을 주는 경향도 보이는데, 중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통일신라만의 독특한 경향이 부각되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갖춤을 한 불상, 약사불, 비로자나불이 크게 유행하고, 철을 사용하여 만든 철불도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 하였다.
경주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제28호)
🎋고려시대 불상
고려시대 들어 선종이 전파되면서 경전이나 불상 등의 조형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같은 각종 불교의식이 성행 하였다. 전반적으로 사실적인 묘사 보다는 단순하고 육중한 느낌을 강조하였고,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적인 조형을 완성한 시기이다. 후기에는 전기보다는 세련되고 온화한 모습이 유행하여, 민간의 생동감 넘치는 투박하고 거대한 석불들과 철불상들이 전국 곳곳에 많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불상의 특징은 눈꼬리가 길게 옆으로 돌아가고 입은 괴상하게 표현 하는 것인데, 몽골 침입이후 원나라 문화가 유입되면서 티베트계 라마교 영향을 받은 화려한 불상이나 도교의 영향으로 경천사지 석탑 같은 불교 미술작품을 남겨놓고 있다.
🎋조선시대 불상
조선시대의 불교는 유교를 숭상하는 지도 이념으로 인해 불교가 위축되고 불상제작이 전반적으로 침체되었다. 조선 초 까지 고려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던 불상은 차츰 민간신앙과 결합하면서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지고, 국가차원이 아닌 개인의 행복이나 내세를 위한 소규모의 불상 제작과 개인용 불감(佛龕), 목각탱등이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불상은 조선 초기 불상에 비해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세부 묘사를 적게 한 소박한 모습이다. 이 시기 불상의 비사실적이고 추상적인 묘사는 종교적 권위와 초월적인 분위기 전달에 있어서는 더 효과적이어서, 비록 불상이 미적인 기준이나 기술적인 면에서는 이전 시기 불상에 못 미치지만, 여전히 개인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의 종교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덕 10년명석조지장보살좌상 (보물 1327호)
석굴암 Seokguram
석굴암 (국보 제 24호)
국보 제24호 석굴암은 불국사(佛國寺)의 부속암자이다.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에 만들어진 석굴암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본존불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40구의 불상을 조각하였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원형 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서도 유례가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의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 신장을 두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 석주를 세웠고 이곳을 지나면 평면원형의 주실로, 본존은 중심에서 약간 뒤로 안치되어 있으며, 입구 좌우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로주벽을 채우고 본존 정후면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조각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사실적인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 내 보살들의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 적인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것이다. 특히, 주실 내에 봉안되어 있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은 석가모니가 정각 즉,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것인데, 인위적인 기교나 부자연스러움 없이 원숙한 조법과 탁월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석굴암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동양 불교미술의 대표적 작품이며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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