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64호(법주사 석연지)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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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경내 전경 |
법주사(法住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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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과 원통보전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 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 곳에 근대 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
법주사 일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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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2km 가까이 걸어야 합니다. 조금 먼 편입니다. 일주문과 일주문 안쪽의 현판 모습 |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시대적용 기타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
속리산사실기비(충북 유형문화재 16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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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리산사실기비 전경 |
법주사 입구 수정교(水晶橋) 앞에 있는 비로서 비각 안에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이다. 1666년(현종 7)에 송시열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속리산은 매우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으며 그 이름이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중국 사람들도 한번쯤 구경하기를 원하는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 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고 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효종4년(1653)에 옥천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는데, 그 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일러 탑을 헐어버렸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이 매우 흥미롭고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
법주사 벽암대사비(충북 유형문화재 7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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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벽암대사비 정면과 후면 전경(속리산사실기비 앞에 위치) |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 조선 중기의 스님. 승병장. 자는 징원(澄圓), 호는 벽암(碧巖), 성은 김(金). 1575년(선조 8) 12월23일 보은에서 태어났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화산암(華山庵)의 설묵(雪黙)에게 공부했으며, 1588년(선조 21) 스님이 되었다. 부휴 선수(浮休善修)를 만난 후 줄곧 선수를 따라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을 유력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중에는 산중에 피란해서도 공부를 쉬지 않다가, 이듬해 사명 유정(四溟 惟政)이 선수를 천거하여 전장의 진두에 나서게 하자 그는 선수를 대신해서 전장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함께 해전(海戰)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승려들에게 남한산성을 쌓게 했을 때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3년만에 완성했다. 이 공으로 보은천교원조 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 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그 뒤 화엄사를 수리하고 교화 활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만났다.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는 소식을 듣고 3천명의 승병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한 뒤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북상했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했다. 그 후 법주사에 주석하며 전쟁 중에 의병의 본거지라고 불태워버린 법주사의 대웅보전, 팔상전, 원통전 등을 복원하여 법주사를 중창하였다.
송광사· 해인사·백운사(白雲寺)·상선암(上仙庵)·보개산(寶蓋山)·묘향산 등으로 옮겨다니며 교화 활동을 펴다가 화엄사로 돌아가서 1660년(현종 1) 1월12일 나이 86세, 법랍 72년으로 입적했다. 법주사 입구 수정교 앞에 벽암대사비가 남아있어 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 비는 조선 현종(1664) 때 건립된 벽암대사의 비로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오가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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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교를 지나 금강문을 통해서 법주사 경내로 들어 갑니다. 법주사 입구 주변 전경 |
속리산 법주사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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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금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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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인 금강문 |
일주문을 지나 수정교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법주사 가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첫 입구가 금강문(金剛門)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는 돌담이 늘어서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문은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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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문 좌우로 배치된 금강역사와 문수보살/보현보살 모습 |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阿金剛力士)라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金剛力士)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
철당간지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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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문을 지나서 바라본 좌측편의 철당간지주 모습 |
▲ 안쪽에서 바라 본 금강문 방향의 철당간지주 모습 |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과 지주가 합쳐진 말이다. 당간은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고도 부른다.지주는 이 당간을 세울 수 있도록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버팀돌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은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남겨진 예가 거의 없고 지주만 남아 흔히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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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던 것이다. 1910년 무렵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
법주사 석조(충북 유형문화재 7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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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과 측면에서 바라 본 석조 모습 |
신라 성덕왕(聖德王) 19년(720)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조(石槽)는 당시에 법주사의 3천 승려들의 음료수 용기로 사용되었던 것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규모는 높이 94cm, 길이 446cm, 폭 240cm, 두께 21cm로 장방형(長方形)의 대형 화강암 석조이다. |
법주사 석연지(국보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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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연지 전경(철당간지주 좌측에 위치) |
능인전 앞에 국보 제64호로 지정된 석연지(石蓮池)가 있다. 높이는 200㎝, 전체 둘레는 665㎝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이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연꽃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는 뜻에서 연지라고 부른다. 전체 구조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전체 석조물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과 팔각 기단부, 그 위의 구름과 연꽃의 형상이 조각된 원통형의 중대석, 석연지의 몸체, 그리고 상단의 난간이 그것이다. 기단은 외곽에 장방형의 부재로 사각의 테를 두르고 안에 지대석을 두었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안상과 우주를 새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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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면 가까이서 바라 본 석연지 모습 |
위에는 3단의 층단으로 체감을 줄여 올라 가다가 복련으로 살짝 덮었다. 중대석은 전체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둥글게 피어나는 구름문양이 사방을 감쌌다. 위의 거대한 상대석을 받치기 위해 윗면을 아래보다 넓게 하여 안정감 있어 보인다. 상대석인 연지는 반구형(半球形)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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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석인 연지와 중하대석을 따로 본 모습 |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3단의 커다란 앙련을 새겼고 다시 그 연꽃 속에는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나타냈다. 연지의 가장 윗부분은 일종의 난간처럼 보인다. 즉 연지 위에 동자 기둥을 세우고 난간이 올라섰는데, 둥근 원형 면마다 천인상(天人像)을 새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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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 가까이서 바라 본 석연지 모습 |
일부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상단에 놓인 이 난간의 형상으로 미루어 혹 향로(香爐)를 조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한 송이 연꽃을 염두에 두고 조성했으면서도 섬세하게 조각하여 재질이 화강암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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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연지와 철당간지주 원경 |
▲ 좌측 안쪽 수정암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바로 본 경내 원경 |
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2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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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애여래의상 전경 |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은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현재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 높이는 5m로서 머리에 불룩한 나발이 있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상호는 치켜 올라간 눈 꼬리, 정면을 향한 도식적 귀, 작은 입과 더불어 군살이 보이는 턱의 모습으로 인해 정교함이 부족하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였다. 다리는 연화대좌 위에 걸쳤는데 한껏 벌리고 않은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로부터 어깨·팔·무릎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면적이고 거칠게 조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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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애불은 큰 바위 안쪽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 마애여래의상 앞에서 바라 본 경내 원경 |
이렇듯 현실성이 부족한 조각이지만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추상적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한다. 마애여래의상 왼쪽 아래에 2개의 또 다른 조각이 있다. 그 하나는 짐을 싣고 있는 말(馬)과 그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 음각되어 있다. 이는 창건주 의신 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를 도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소(牛)의 모습이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한 소가 진표 율사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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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애여래의상 좌측 바위 측면에도 다른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희미하게(위 우측 사진 좌측 바위) 보입니다. |
즉 석가불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시대(無佛時代)를 주재하면서 미륵불에게 석가불의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암각의 지장 보살은 바로 마애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모습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표 율사의 수행과정에서 보면 이 마애미륵불과 지장 보살과의 관계는 달리 이해할 수도 있다. |
금오 태전선사 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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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애물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큰 바위가 있고 그 옆에 금오 태전선사 부도(위 우측 사진 우측 부도)가 있습니다. |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스님은 법주사의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나아가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기까지 스님이 이룩한 업적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스님은 1896년 7월 23일 전라남도 강진에서 동래 정씨로 태어났다. 속명은 태선(太先), 호는 금오, 그리고 이름이 태전이다.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태어난 금오 선사는 어려서 서당교육을 받았는데 천성이 영민하고 기질이 출중하여 학동 가운데 공부가 늘 앞섰다고 합니다. '금오집(金烏集)'에는 가형(家兄)으로부터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꾸지람과 매를 맞고는 "그까짓 글공부만 해서 무엇을 하느냐"며 집을 나와 그 길로 출가를 하였다고 한다.
1912년 3월 마침내 스님은 15세로 금강산 마하연사에 출가하여 도암 긍현(道庵亘玄)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안변 석왕사 등지에서 불교의 기초교육을 습득하고 192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 수행하였다. 이해 8월에는 통도사에서 일봉(一峰) 율사를 계사(戒師)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남달리 참선수행에 정진하였다. 그 뒤 수 년 간 통도사 보광선원과 천성사 미타암 등지에서 수행하다가 충청남도 예산 보덕사의 보월(寶月) 선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 갔다. 그러나 보월 선사는 스님의 그릇됨을 보기 위해 쉽게 제자로 거두어 주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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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금오 스님은, “시방세계를 투철히 오르니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하나하나가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 보아도 역시 없고 없을 뿐이네.” 라는 오도송을 올리자 그제야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건당식(建幢式)을 치루지 못한 채 보월 선사가 1924년에 입적하고 말았다. 이듬해 보월 선사의 스승인 만공(滿空) 선사에게서 건당식을 받고 전법계까지 수지하였다. 스님의 수행은 계속되었다.
10여 년 간 각지의 선방을 유력하였고, 심지어는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2년씩이나 거지생활도 하였다. 1935년에는 경상북도 김천 직지사의 조실을 지냈고, 이후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지리산 칠불사, 서울 선학원 등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
스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는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며 투철한 수행자세를 강조하였고, 스스로 그런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출가자의 모범적 자세가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1954년에는 불교정화를 위한 전국비구승대회의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스님은, “정화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불량한 때를 씻어 버리는 것이 정화요, 몸의 일체비행을 고치는 것이 정화이다.” 라고 하여 대처승을 축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5년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 이듬해 서울 봉은사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그리고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다. 스님이 법주사에 주석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으로서 당시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젊은 수좌들에게 열정적으로 불도를 가르쳤다. 이듬해 1968년 음력 8월 17일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다(無念爲宗).’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1975년 법주사에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세수 73세, 법랍 57년을 살다간 스님의 생애는 한국불교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참선을 하지 않는 납자는 승려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선수행에 몰입하였다. 스님의 선풍(禪風)은 한국 정통선을 계승하였고, 다시 제자들에게 전해져 오늘날 조계종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스님의 법을 이은 상좌로는 월산, 범행, 탄성, 혜정, 월주 스님 등 한국불교 현대사의 큰획을 그으신 분들이 많이 있고, 손상좌까지 포함하면 무려 6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스님이 일군 한국불교의 튼튼한 뿌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꽃을 피워나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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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수정암 담장 부근에 부도 1기와 자연석 위에 비석도 1기가 서 있습니다. |
법주사-1 동선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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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지점이 일주문이고, 빨간선을 따라서 경내로 들어가서 수정암 입구까지 돌아봅니다. 소재지: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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