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효종 때의 일이다.
명의이자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과 학자이며 정치가이기도 한
송시열(宋時烈)의 이야기다.
당시에 이 두 사람은 아쉽게도 소속한 다른 당파로 인해 서로가
숙적과도 같은 사이였다.
그러던 중 송시열이 큰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지금의 당뇨병으로 추정되는 병이었다.
허목이 의술에 정통함을 알고 있던 송시열은 그의 아들을 불렀다.
"내 병이 아무래도 심상찮으니 허목선생에게 가거라.
비록 그가 정적일 망정 내 병세를 상세히 이르고 정중히
약방문(처방전)을 청해 받아 오도록 하여라..."
사실 다른 당파에 있는 영수, 허목에게서 약 방문을 구한다는 건
죽음을 자청하는 격이었다.
송시열의 아들이 찾아오자 허목은 빙그레 웃으며 약방문을 써 주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약 방문을 살펴보니, 비상을 비롯한 몇 가지
극약들을 섞어 달여 먹으라는 약방문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송시열의 아들은 허목의 못된 인간성을 원망하면서도 아버지
송시열에게 약방문을 전하였다.
약방문(처방전)을 살펴 본 송시열은 아무 말 않고 그대로 약을
달여오라 하여 약을 그대로 여러 날 복용하였다.
병은 깨끗이 완쾌되었다.
허목은
"송시열의 병은 이 약을 써야만 나을 텐데 그가 이 약을 먹을 담력이
없을 테니 송시열은 결국 죽을 것이라" 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허목이 비록 정적이긴 하나 적의 병을 이용하여 자신을 죽일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송시열이 완쾌했다는 소식을 듣자 허목은 무릎을 치며 송시열의
대담성을 찬탄했고, 송시열은 허목의 도량에 감탄했다고 한다.
서로 당파 싸움으로 대적을 하는 사이이지만, 상대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의 예송 논쟁 - 참고 (네이버 백과)
조선 시대 효종, 현종, 숙종, 그리고 경종 연간에는 권력을 잡기 위한
남인과 서인의 싸움이 치열했다.
양쪽의 대표적인 인물은 허목(1595~1682년)과 송시열(1607~1689년)이었다.
허목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선조 28년부터 숙종 8년까지 살았으며
그림과 글씨, 문장에 능했고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의 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척주동해비가 있으며, 광명시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벼슬에 올랐으나 남인의 영수로서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들(송시열이 영수)과 예송 논쟁을 벌여 삼척 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 대사헌, 이조판서까지 올랐으나, 1678년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옛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등용하였다.
송시열보다 연배가 위인 허목은 일찍이 제자백가와 예학에 일가를 이룬 학자로.
효종이 내린 벼슬을 여러 번 고사하다가 1657년 나이 환갑이 넘었을 때
지평(持平)이라는 언관의 벼슬을 받았다.
그리하여 허목과 송시열 두 사람은 한 조정에 몸을 담게 되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효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회오리를 몰고 왔다.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가 살아 있었는데, 과연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이것을 두고 남인과 서인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서인 계열인 송시열(당시 이조판서) 등은 1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 계열인 허목 등은
3년복을 주장하였다.
효종은 맏아들이 아니었다. 그의 형인 소현세자가 죽자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계모라도 맏아들이 죽으면 3년의 상복을 입어야 하지만 맏아들이 아니니 1년의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서인의 주장이었고, 어엿한 임금으로서 종통(宗統)을
이었으니 효종을 맏아들로 여겨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남인의 주장이었다.
가통으로 보면 1년 상복, 왕통으로 보면 3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 까닭에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의 이면에는 왕위 계승 원칙인 종법(宗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이념 논쟁에다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자격 문제에 대한 시비가 깔려 있었다.
어쨌든 송시열의 주장대로 조대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송 논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어 효종의 아내요,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죽자 또다시 문제가 일어났다.
이때에도 조대비가 살아 있어서 서인들은 9월복으로 결정했다.
이에 남인들은 지난번의 경우와 맞지 않는다고 들고 일어났고, 현종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남인의 주장대로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당시 삼척 부사로 좌천당해 있던 허목은 다시 조정에 나와 대사헌,
이조판서가 되었고, 송시열은 유배의 몸이 되었다(1675년).
이것이 2차 예송논쟁이다.
남인이 권력을 쥐자 또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송시열의 처벌을 놓고 강경론과 온건론으로 나뉘었고,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은
남인들이 너무 설친다고 생각하여 남인 일파를 견제하였다.
다시 조정은 서인들의 세상이 되어 송시열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허목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었으므로 제거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송시열이 등장하자 남인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감정이 대립하여
서인은 노론(송시열이 영수)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남인과 노론은 이후 허목과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서로 상종도 하지 않고
사사건건 적대 관계를 이루어왔다.
그 뒤의 임금인 영조나 정조가 탕평책 등으로 화해를 도모했음에도 그 화해는
결코 쉽지 않았다. 너무나 성격이 강한 두 사람의 견해차로 일어난 오랜 정치적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