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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님, 봄이어라
노경아
김승웅 방장님께~
봄날이어라.
개나리 산수유가 노란 웃음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햇살 좋은 날, 방장님께선 어떤 곳을 산책하실까 궁금합니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긴 하나, 그래도 걸으시는 게 혈액순환,
근육 강화 등에 좋을 듯하옵니다.
얼굴 뵈옵고 인사드릴 날을 고대합니다.
환절기 밥 잘 잡수시고 잠 잘 주무시며 건강하게 봄을 나십시오~
삼월 스무날에
노경아 올림
행복해지는 슬픈 노래
사람, 위스키, 전축과 레코드판. 방송사 프로듀서인 친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소식을 알릴 때마다 올라오는 세 가지입니다.
그날 만난 사람과의 인연, 함께 마신 위스키에 담긴 사연,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 짓는 음악 이야기를 영화처럼 풀어냅니다.
전엔 늘 삶에 찌들어 보이던 친구인데,
아날로그 선율의 레코드판이 등장하면서 표정부터 몹시 편안해졌습니다.
누구나 행복의 조건이 있겠지요.
최근 지인들에게 가족을 제외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뭐냐고
묻자 다양한 단어들이 쏟아졌습니다.
책, 햇빛, 술, 숲, 바다, 영화, 작약, 바람, 커피…. 그중 가장 많이 나온 건
음악입니다. 좋아하는 곡을 들으며 뭔가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면
이보다 더 편안하고 좋은 삶은 없다고들 말했습니다.
전문지 편집국장인 한 선배는 쉬는 날, 아내와 함께 책을 읽으며
음악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날 듣고 싶은 곡을 정해
반복 재생하면서 책을 읽다 보면
서너 시간이 봄바람처럼 따스하게 지나간다고 합니다.
특히 요즘엔 삼월의 화사함과 잘 어울리는 사라 브라이트만(63·영국)의
노래를 듣는데, 그의 목소리에 설레는 순간순간엔 책장을 덮고
선율에만 집중한다고도 했습니다. 브라이트만은 ‘타임 투 세이 굿바이’
‘넬라판타지아’ 등을 부른 팝페라의 여왕입니다.
음악은 나의 행복 조건이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화장실 청소, 옷 개기, 설거지 등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집안일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듣는 노래는 ‘봄날은 간다’입니다.
지난달 점심 식사 자리에서 서울 모대학 교수로부터 선물받은
유에스비(USB)에는 무려 쉰일곱 개의 ‘봄날은 간다’가 담겨 있습니다.
1953년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른 백설희부터 배호, 한영애, 심수봉,
조용필, 장사익, 개그맨 김보화에 이르기까지
누구 것을 들어도 다 몸에 감겨듭니다.
같은 노래를 계속 들으면 지겨울 것 같다고요?
노랫말만 같을 뿐 부른 이마다 장르, 음색, 리듬이 달라
같은 노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노랫말이 가슴으로 절절하게 스며들 뿐이죠. 희대(稀代)의 절창이니까요.
같은 선물을 받은 언론 선배는 스산한 목소리로 신들린 듯 주절대는
한영애의 창법이 최고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는 감정을 추스르지 않고
절규하듯 토해낸 장사익의 노래가 봄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줘 자주 듣는다고 말합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1절)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2절)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3절)
작사가 손로원(1911~1973)의 노랫말은 화가 출신답게
풍경화를 펼쳐놓은 것 같습니다. 옷고름, 산제비, 성황당,
꽃편지, 청노새, 역마차, 신작로 등 한(恨)의 정서를 담은 토속적인 단어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입고 그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구절에선
이유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흐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긴장감 등이 해소되면서 편안해집니다.
<(신임)한국일보 뉴스룸 교열부장/이투데이 교열팀 부장,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역임>
정오의 햇살
이우근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 C’est à cause du soleil.
“태양 때문이었다.” 살인의 동기를 추궁하는 법정에서 뫼르소가 불쑥 내뱉은 말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태양은 뫼르소의 길을 가로막는
관습‧전통‧법률‧제도 따위의 장애물로 나타난다.
뫼르소(Meursault)라는 이름 자체가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의 합성어처럼 느껴지듯,
그의 살인은 한낮의 태양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엮여있다.
그는 칼을 든 아랍인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아니었다.
햇살에 번쩍이는 칼날을,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장애물을 향해 무심결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태양은 그러나 카뮈에게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사르트르와의 1952년 논쟁에서
스탈린을 옹호하는 사르트르를 ‘심야(深夜)의 사상’으로, 스탈린을 비판하는 자신을
‘정오(正午)의 사상’으로 대비했다.
“햇살이 직각으로 내리쬐는 한낮의 투명함으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무제한의 권력에 반항하는 인간은 무제한의 자유에도 반대한다.
자유에도, 반항에도 한계가 있다.
반항이 순수성을 잃고 폭력을 찬양하거나 살인을 옹호하는 순간, 반항은 그 정신을 배반한다.
“스스로 심오한 리듬을 찾아가는 반항은 광란의 진폭으로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추(錘)와 같지만,
이 불규칙한 상태가 절도(節度)를 벗어나는 일은 없다.”
정오는 카뮈에게 절도 있는 반항의 시간, 새벽과 심야의 균형추였다.
이성과 절대지(絕對知)의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저녁 하늘에 날렸고,
혁명의 사상가 마르크스는 ‘갈리아의 수탉’으로 새벽을 일깨웠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려던 마르크스는 혁명의 역사가 하루의 끝인 저녁의 과제가 아니라
하루의 시작인 새벽의 과제라고 믿었다.
갈리아는 시민혁명이 성공한 프랑스의 옛 이름이고, 수탉은 프랑스의 상징동물이다.
수탉의 새벽 울음이 세상을 깨우듯 철학도 현실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신념이었다.
카뮈가 정오의 햇살을 찬양했다면, 니체는 정오의 그림자에 주목했다.
정오는 인간과 사물의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순간이다.
니체에게 정오는 새벽에서 저녁으로, 짐승에서 인간을 넘어 초인(超人)으로 나아가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니체는 혁명의 새벽이나 이성의 저녁이 아니라 초인이 탄생하는 정오의 시간을 사랑했다.
성서는 공의(公義)를 정오의 빛에 비유한다. “주께서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정오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시리라.”(시편 37:6)
사도바울은 정오의 시간에 메시아를 만난다.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더라.”(사도행전 26:13)
정치철학자 마르크스가 새벽의 수탉을, <법철학강요>를 쓴 헤겔이 황혼의 올빼미를
사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치는 새벽처럼 현실을 앞에서 이끌고,
법치는 저녁처럼 현실을 뒤에서 성찰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혁명을 바라는 것도, 이성의 절대지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햇살이 직각으로 내리쬐는 정오의 투명함으로 현실과 냉정하게 마주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혁명의 새벽과 성찰의 저녁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정오의 인식이 아쉬운 시절이다.
혁명의 수탉도, 이성의 올빼미도 정오의 태양을 가릴 수 없다.
정오는 시계추처럼 정치와 법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중용의 시간이다.
정치의 문제는 정치의 영역에, 사법의 문제는 사법의 영역에 맡겨야 한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기업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판결로
국내외에 큰 정치적 파문이 일어나자, 주심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쓴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건국은 새벽 수탉의 사명이지 저녁 올빼미의 몫이 아니다. 새벽에 날갯짓을 하는 올빼미도,
저녁에 울어대는 수탉도 모두 자연을 거스르는 괴이쩍은 변고(變故)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새벽과 황혼을 분간하지 못하는 극심한 혼돈에 빠져있다.
정치권에서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정치적 사안은 고소·고발로 사법의 영역에 떠넘기고,
사법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안은 거꾸로 정치권에서 제멋대로 주무른다.
정책판단의 당부(當否)를 법정에 묻는가 하면, 법정 앞에서는 정치적 시위꾼들이
범죄혐의자의 무죄를 목청껏 외쳐댄다.
‘허위사실을 말했어도 적극적·일방적인 공표 의도가 없다면 무죄’라는 취지의 대법원판결이나
‘출국금지조치가 위법하더라도 재수사의 목적이 정당하다면 무죄’라고 판단한 하급심판결에서는
엄정한 법리가 아니라 짙은 정치색이 묻어난다.
저녁의 성찰에 충실해야 할 법률가들이 새벽의 첫걸음을 이끄는 정치‧행정의 요직에
무리 지어 들어앉는 모습도 적잖이 곤혹스럽다.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그 괴이한 그림자가
정오의 햇살 아래 말끔히 사라지기를 고대하는 이유다.
미네르바의 올빼미 / 갈리아의 수탉
<변호사/숙명여대 석좌교수/(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서울중앙지법원장, 국회공직자 윤리위원장 역임/서울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인권위원장)/경기고~서울대 법대 졸>
“태양 때문이었다.” 살인의 동기를 추궁하는 법정에서 뫼르소가 불쑥 내뱉은 말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태양은 뫼르소의 길을 가로막는
관습‧전통‧법률‧제도 따위의 장애물로 나타난다.
뫼르소(Meursault)라는 이름 자체가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의 합성어처럼 느껴지듯,
그의 살인은 한낮의 태양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엮여있다.
그는 칼을 든 아랍인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아니었다.
햇살에 번쩍이는 칼날을,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장애물을 향해 무심결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태양은 그러나 카뮈에게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사르트르와의 1952년 논쟁에서
스탈린을 옹호하는 사르트르를 ‘심야(深夜)의 사상’으로, 스탈린을 비판하는 자신을
‘정오(正午)의 사상’으로 대비했다.
“햇살이 직각으로 내리쬐는 한낮의 투명함으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무제한의 권력에 반항하는 인간은 무제한의 자유에도 반대한다.
자유에도, 반항에도 한계가 있다.
반항이 순수성을 잃고 폭력을 찬양하거나 살인을 옹호하는 순간, 반항은 그 정신을 배반한다.
“스스로 심오한 리듬을 찾아가는 반항은 광란의 진폭으로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추(錘)와 같지만,
이 불규칙한 상태가 절도(節度)를 벗어나는 일은 없다.”
정오는 카뮈에게 절도 있는 반항의 시간, 새벽과 심야의 균형추였다.
이성과 절대지(絕對知)의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저녁 하늘에 날렸고,
혁명의 사상가 마르크스는 ‘갈리아의 수탉’으로 새벽을 일깨웠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려던 마르크스는 혁명의 역사가 하루의 끝인 저녁의 과제가 아니라
하루의 시작인 새벽의 과제라고 믿었다.
갈리아는 시민혁명이 성공한 프랑스의 옛 이름이고, 수탉은 프랑스의 상징동물이다.
수탉의 새벽 울음이 세상을 깨우듯 철학도 현실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신념이었다.
카뮈가 정오의 햇살을 찬양했다면, 니체는 정오의 그림자에 주목했다.
정오는 인간과 사물의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순간이다.
니체에게 정오는 새벽에서 저녁으로, 짐승에서 인간을 넘어 초인(超人)으로 나아가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니체는 혁명의 새벽이나 이성의 저녁이 아니라 초인이 탄생하는 정오의 시간을 사랑했다.
성서는 공의(公義)를 정오의 빛에 비유한다. “주께서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정오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시리라.”(시편 37:6)
사도바울은 정오의 시간에 메시아를 만난다.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더라.”(사도행전 26:13)
정치철학자 마르크스가 새벽의 수탉을, <법철학강요>를 쓴 헤겔이 황혼의 올빼미를
사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치는 새벽처럼 현실을 앞에서 이끌고,
법치는 저녁처럼 현실을 뒤에서 성찰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혁명을 바라는 것도, 이성의 절대지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햇살이 직각으로 내리쬐는 정오의 투명함으로 현실과 냉정하게 마주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혁명의 새벽과 성찰의 저녁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정오의 인식이 아쉬운 시절이다.
혁명의 수탉도, 이성의 올빼미도 정오의 태양을 가릴 수 없다.
정오는 시계추처럼 정치와 법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중용의 시간이다.
정치의 문제는 정치의 영역에, 사법의 문제는 사법의 영역에 맡겨야 한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기업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판결로
국내외에 큰 정치적 파문이 일어나자, 주심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쓴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건국은 새벽 수탉의 사명이지 저녁 올빼미의 몫이 아니다. 새벽에 날갯짓을 하는 올빼미도,
저녁에 울어대는 수탉도 모두 자연을 거스르는 괴이쩍은 변고(變故)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새벽과 황혼을 분간하지 못하는 극심한 혼돈에 빠져있다.
정치권에서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정치적 사안은 고소·고발로 사법의 영역에 떠넘기고,
사법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안은 거꾸로 정치권에서 제멋대로 주무른다.
정책판단의 당부(當否)를 법정에 묻는가 하면, 법정 앞에서는 정치적 시위꾼들이
범죄혐의자의 무죄를 목청껏 외쳐댄다.
‘허위사실을 말했어도 적극적·일방적인 공표 의도가 없다면 무죄’라는 취지의 대법원판결이나
‘출국금지조치가 위법하더라도 재수사의 목적이 정당하다면 무죄’라고 판단한 하급심판결에서는
엄정한 법리가 아니라 짙은 정치색이 묻어난다.
저녁의 성찰에 충실해야 할 법률가들이 새벽의 첫걸음을 이끄는 정치‧행정의 요직에
무리 지어 들어앉는 모습도 적잖이 곤혹스럽다.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그 괴이한 그림자가
정오의 햇살 아래 말끔히 사라지기를 고대하는 이유다.
미네르바의 올빼미 / 갈리아의 수탉
<변호사/숙명여대 석좌교수/(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서울중앙지법원장, 국회공직자 윤리위원장 역임/서울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인권위원장)/경기고~서울대 법대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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