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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택은 급하게 말하고 사라졌다. 우희는 순간 그을 따라가고 싶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일본에 있는 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껏 어미로서 잘해주지 못한 감정 때문인지 애들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은택 오빠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아쉬움보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피할 수 없는 책무, 그 무게를 견디고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꿈틀거렸다.
잠시 은택 오빠의 생각에 잠겨있던 우희는 멀리서 비행기의 굉음을 듣고는 현실로 돌아왔다.
“곧 미군과 국군의 대규모 반격이 있대요. 여기에 남아있으면… 부역자로 몰려 처단당한단 말이에요.”
우희의 말은 은연중 경주가 느끼던 공포였다. 비로소 이번 연합군의 반격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껏 크고 작은 공습에 익숙했지만, 이번은 그 규모부터 달랐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문과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미군의 위력이 이번에는 제대로 발휘될 것 같았다.
만약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다면 자신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다. 직장 방어전에 살아남는다 해도 연합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과거 전력과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력으로 부역자라는 혐의에 꼼짝없이 걸려들 게 틀림없었다. 위험을 벗어나는 길은 서울을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트럭은 인적이 끊어진 거리를 거칠게 달렸다. 트럭 뒤편에서 바라본 서쪽 하늘에 거대한 섬광이 비치는 바람에 막 저물어가는 하늘이 대낮처럼 밝았다. 그 빛은 붉은 노을 속으로 가물거리며 사라졌다. 야간 공습을 위한 미군의 조명탄 불빛이었다. 소문대로 대규모 부대가 인천에서 서울로 진격해 오는 게 틀림없었다. 인민군 차량 몇대가 빠르게 돌아다닐 뿐 거리를 오가는 행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트럭이 종로를 돌아 막 창경원 방향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경주가 급한 듯 말했다.
“잠깐만요. 또 한 사람 있어요. 장혜린씨…”
불안감 속에서 은연중 떠오른 인물이었다. 이에 동조하듯 상희도 맞장구쳤다.
“아, 혜린이 언니를 생각 못했네…”
상희는 운전석 뒤에 뚫린 창에서 인민 군복을 입은 운전수에게 말했다. 성북동으로 가자는 다급한 소리에 운전수는 약간 짜증섞인 얼굴을 하고는 옆에 앉은 우희의 눈치를 살폈다. 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따르라고 했다. 차량은 명륜동 로타리를 끼고 왼쪽으로 난 길을 달렸다. 대련각으로 가는 길이 어느 때보다 음산했다. 거리는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사방에서 쿵쾅거리는 폭음과 번쩍거리는 섬광 때문인지 현실 세계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경주와 상희는 급하게 대련각 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경주가 대문을 밀치니 대문은 쉽게 열렸다. 아무도 없는 것일까. 방안에 불빛이 어른거리는 걸로 보아 누군가 있을 것 같았다. 경주는 계단을 오르며 누구 없냐고 소리 질렀다. 난간 뒤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땅거미가 짙어가는 시각이었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길자영이었다. 그녀는 한복을 입은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혜린 언니를 데리러 왔어요. 피난 가야 한다구요…”
상희의 다급한 목소리에 길자영은 미소를 지었다. 담담한 미소, 평시 그녀가 보이던 태연한 모습 그대로였다.
“혜린인 지금 없어요. 곧 들어올 겁니다…”
“어디 갔는지 아세요?”
“글쎄, 두어 시간 전에 소산 언니가 데리고 나갔는데…”
다시 비행편대가 하늘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기총소사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저 멀리 비행기가 지나간 하늘에 섬광이 번득였고, 공포스러운 폭발음이 뒤따랐다. 모두들 잠시 움찔하며 하늘을 보았지만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강해진 걸까. 서로 안색을 살피며 무사함을 확인했다. 공포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희의 얼굴은 초조했다. 이렇게 무한정 혜린을 기다릴 수도 없는 일. 망설이다 경주를 보았다.
“한 선생, 일단 먼저 집에 가서 기다려 주세요. 아무래도 집에서 피난 갈 준비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가 혜린씨 데리고 집으로 갈께요.”
상희는 잠시 망설이다 백에서 수첩을 꺼냈다. 주소를 적고 약도를 그렸다. 경주는 이곳에서 머지 않은 거리이니 혜린이 데리고 곧 가겠다고 했다. 다시 상희가 수첩에 무언가 긁쩍거리고는 경주의 손에 건냈다.
“이것 혜린 언니께 쓴 편지예요. 꼭 같이 와야 해요…”
어둠이 깊어 갈수록 적막 대신 포성이 점점 크게 들렸다. 상희가 떠나고 두어 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혜린은 오지 않았다. 경주의 머릿속에 온갖 불길한 상상이 감돌았다. 혜린이 돌아오기나 하는 건지, 혹시 바깥에서 어떤 불상사가 났는지, 온통 혜린의 얼굴로 가득했다.
혜린을 만날수록 그녀가 변해가는 걸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여려서 조금만 바람이 불면 꺾일 것 같았다. 대련각 같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청초한 여인이라 호기심이 앞섰다. 하지만 그녀가 경찰서에 잡혀가고 구치소에 수감된 후 상희와 면회 갔을 때 본 그녀는 많이 달라 있었다. 청초함은 그대로였지만 세파에 단련된 강인한 모습이 읽혔다.
막상 전란 속에 세상이 끝날 것처럼 폭풍이 몰아치니 그녀가 천애고아라는 사실이 눈에 밟혔다. 상희와 자신이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감정이 꿈틀거렸다. 이런 마음은 상희도 마찬가지 같았다. 그것보다 더 위태로운 사실은 곧 전장으로 변할 서울에 그녀를 남겨 둔다면 생사를 기약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자신처럼 과거 전력이 있기에 국군이 서울을 탈환한다면 부역자 명단에 올라 처참한 운명에 빠질 것이라 짐작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동안 밤은 깊어 갔고, 포성은 점점 더 우렁차게 들렸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스스로 답 내리기도 쉽지 않았다. 불안이 가중되는 사이 급하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뛰어나갔다.
어둠 속에 들어오는 사람이 혜린임을 한눈에 알았다. 그녀는 어깨에 커다란 백을 걸치고 한 손에 묵직한 보따리를 들고 내렸다. 경주는 인사도 생략한 채 그녀로부터 무거운 짐을 빼앗아 들었다.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는 보따리였다. 혜린도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만 했다.
“초저녁부터 혜린 씨를 기다렸습니다…”
왜요? 라는 의문이 달린 혜린의 커다란 눈동자가 어두침침한 등불에 반짝하고 빛났다. 경주는 대답 대신 상희가 쓴 편지를 혜린이에게 건냈다. 혜린은 몸을 움직여 불빛 가까이 가서 읽었다.
“언니, 이 전란 속에 중요한 건 목숨이에요. 우리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요. 제 고향 정읍은 여기보다 훨씬 안전한 곳이에요. 친척분의 도움으로 통행증도 마련했으니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언니, 꼭꼭 우리 함께 살아남아요. 항상 언니를 좋아하는 동생 상희 올림,”
편지를 읽던 혜린의 눈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시 감정을 절제하던 그녀의 모습에서 급작스런 감정의 변화를 보니 경주가 당황해서 살짝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느 순간 기관총 소리나 포성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혜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절 내려준 사람이 누군 줄 아세요?”
“………”
“성낙준씨, 당신 친구분 성낙준씨…”
“네?”
그전에 그녀로부터 성낙준이 살아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가끔 이 집에 온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바로 직전에 그녀를 차에서 내려준 사람이 성낙준이라니. 경주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작년 겨울 이후 대면한 적이 없었던 친구. 그가 여전히 무사하다는 소식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은 사실에 의아했다.
“혜린씨, 어쨌든 갑시다. 한 선생이 목이 빠지게 기다릴 겁니다.”
다급한 경주는 빨리 떠날 것을 재촉했다. 혜린은 서둘러 눈물을 훔치며 민망한 표정으로 경주를 보았다. 그녀는 결심한 듯 단단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첫댓글 다음회가 기다려지네요^^
혜린과 낙준은 무슨일이..머리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봅니다.
전란 속..
남주 여주 운명의 갈림길
그 엇갈리는 교차로의 혼잡함이 마음에 걸립니다
부디 포성 속에서도 무고하길
바라보는 제 눈길이 흐릿해집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