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논평
지구를 생각하며 산다는 것
오늘 이 지구를 공유하는 우리가 기후위기, 생태위기라는 공동의 운명을 타고났다면, 그것의 해결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일 것이다. 우리는 문제의식을 갖는 직시 이 세상을 아우르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듭나며, 참여하는 과정 자체가 ㄴ보상으로 주어지는 마법과도 같은 일을 겪게 된다. 『원각경』에는 '한 세계가 청정하면 여러 세계가 청정해지고, 온 법계가 두루 청정해진다' 고 하였다. 모든 것은 이 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문제의식을 느끼고 행동하는 이들이 많아 질수록 이 세계는 불국토로 장엄할 것이다.
공동체에서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사용이 편리하고 가격도 합리적인 다양한 용도의 기물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특히 모두가 같은 시간표를 따라 의식주를 함께하며 사는 절집의 공용물품은 어딜 가나 엇비슷하다. 그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은, 공동의 생활에 필수적인 이러한 물건의 다수가 지속 가능한 삶과는 반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단연 돋보이는 소재는 플라스틱과 비닐이다. 울퉁불통한 돌 수과과 타일을 청소하는 솔과 빗자루도, 풀을 뽑을 때 쓰는 의자도, 세숫대야와 바가지도 전부 플라스틱이다. 음식을 담거나 쓰레기를 모아서 버릴 때 여전히 비닐봉지만큼 편리한 것도 없으며, 삭발염의한 출가수행자의 모습을 정의하는 승복조차 대부분 함성 섬유가 섞인 천으로 만들어진다. 실로 우리의 의식주는 미세플라스틱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플라스틱 프리' , '제로 웨이스트' , 불과 몇 년 사이에 다양한 광고 켐페인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키워드다. 플라스틱을 쓰지 말고 쓰레기로 배출되는 자원을 줄이자는 개념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케팅 용어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환경보호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작년 SNS상에서 전개도니 대규모 소비자 운동에 대한 답변으로 대기업이 일회용 빨대나 비닐 라벨이 붙지 않는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불가능해 보였던 멋진 성과다.
이에 우리의 의식도 보조를 맞추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수행을 위해 세속적인 삶의 방식으로부터 자발적으로 거리를 둔 이들은 환경문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는 분명 모든 수행자가 직면해야 할 화두다. 인간의 뇌는 눈앞의 가시적인 위협에 비해 오랜 기간 서서히 진행되는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문제를 감지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절집에서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담장 너무 먼 나라이 이야기로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출가하여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사는 데 주력하다 보면 타성에 젖기가 쉽다. 자잘한 불편은 우선 적응하고 볼 일로 간주하고, 모든 것을 내적인 수행의 문제로 돌리고자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곳만큼 세상의 온갖 '문제' 를 사유하기에 안성맞춤인 곳도 없다. 출가자로서 보시를 받고 수행으로써 그것을 회향하고자 마음을 다스리다 보면 한데 엉켜 있던 고마움, 의무감, 막연한 부채의식 등이 서서히 정리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출가자의 삶은 애초에 돌고 도는 인과因果와 증여의 순환속에서 '나' 라고 고집할 존재란 없다는 사실을 주지하여 살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 존재가 인간답게 거듭나는 순간은 바로 아무런 내가 없이 주어진 수많은 것들 덕분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묻기 시작할 때라고 한다. 신선한 공기와 햇살, 젓눈과 봄비, 도반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이리도 단순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적절히 대처하기' 다(물론 이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너무 늦었든 늦지 않았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습관처럼 해 오던 일을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조금 더 불편함을 느끼고, 부단히 스스로를 독려하며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바꾸려 노력하는 것이 수행자의 삶이다.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 행동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 번 더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불이不二를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이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환경문제에서 희망과 낙관을 논한다는 것은 수행의 차원에서 지극히 실용적인 자세일지도 모른다.
오늘 이 지구를 공유하는 우리가 기후위기, 생태위기라는 공동의 운명을 타고났다면, 그것의 해결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일 것이다. 우리는 문제의식을 갖는 즉시 이 세상을 아우르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듭나며, 참여하는 과정 자체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마법과도 같은 일을 겪게 된다. 『원각경』에는 '한 세계가 청정하면 여러 세계가 청정해지고, 온 법계가 두루 청정해진다' 고 하였다. 모든 것은 이 한 마음에서 시작한다. 문제의식을 느끼고 행동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이 세계가 불국토로 장엄될 것이다. 우리를 살리는 수많은 것들이 대지와 강을 지나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다시 구름을 이루고 빗물에 섞임을 생각하며, 우리도 그 순환의 일부임을 매 순간 자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불기2566년 雲門지 겨울호에 있는 글을 퍼왔습니다.
그리고 운문사 홈폐이지 계관운문에서 더 자세히 볼수 있습니다.
운문사 사리암 도반 법우 여러분 나반존자님의 가호 가피 많이 많이 받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_()_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님 ()()()
일요일 선정릉에서 첫 진달래꽃을 보았어요. 너무 반가웠죠!!
운문사의 봄꽃들도 기기재를 활짝 펼치고 있네요^^
자연과의 공존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화이팅 합니다.
https://futurechosun.com/archives/7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