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중구 내동 151 번지 일대 좁은 골목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옥고를 치렀던 백범 김구선생과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 관한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시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인천 감리서에 수감되자 인천 중구 물상객주집에 기거하며 옥바라지를 했다. 지금 중구 내동 월아천(月牙泉)과 경인면옥 일대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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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내동 월아천과 경인면옥 주변 골목. 이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기거하며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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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감리서에 두 번 투옥, 곽낙원 여사 객주집 살며 옥바라지
김구 선생이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세인 1896년 이었다. 일본 군사 간첩을 죽인 ‘치하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 중구 내동에 있는 감리서에 수감되어 2년간 옥살이를 했다. 백범은 이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후 탈옥에 성공한다. 감리서(監理署)는 조선 말기 개항장(開港場), 개시장(開市場)의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였다.
백범은 다시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인천 감리서에 투옥됐다. ‘105인 사건’은 일본 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미시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해 독립운동가 105인을 감옥에 가둔 사건이다.
백범 김구선생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옥바라지를 도맡았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곽낙원 여사는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감리서 삼문 밖에 있는 개성사람 박영문의 집에 들어가 아들을 따라 여기까지 온 사연을 얘기한 후 그 집 식모가 되어 집안일을 도왔다"고 적고 있다.
개성사람 박영문은 당시 인천의 유명한 물상객주로서 그의 집은 객주집답게 외지에서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래서 밥을 짓거나 바느질 등 할 일이 아주 많았다. 곽낙원 여사는 그 집에서 일하면서 하루 세끼의 밥을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갖다 주는 조건을 붙였다. 당시는 수감자들에게 밥이 제공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수감자들은 밥값을 벌기위해 감옥에서 짚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백범 김구 해방후 지방순회 첫 방문 도시가 인천
곽낙원 여사가 일했던 월아천 주변 내동 골목에는 물상객주집들이 몰려 있었다. 이곳 집들은 객주집 답게 작은 방들이 여럿 있고 마당이 있는 구조였다. 지금도 옛 집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집들이 여럿 남아 있다. 당시 경인면옥 주변은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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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감리서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한진이 아파트를 지었고, 현재는 비석만 남아있다.
백범은 해방 후 지방순회를 했는데 인천과의 오랜인연으로 첫 번째로 방문했다. 중구 내동에 있는 내리교회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46년 3월이었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과 교인들이 기념촬영 한 사진이 내동교회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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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선생은 내리교회를 방문해 당시 교인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1946년 3월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백범 김구선생과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남동구에 있는 인천대공원에서 볼 수 있다. 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오른손에 밥그릇이 들려있고 허리띠로 치맛자락을 동여맨 정말 가난하고 고달픈 어머니상을 보여주고 있다. 위대한 아들 뒤에는 언제나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음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인천은 김구선생에게는 의미심장한 역사지대이자 애국청년 김창수(김구선생 본명)를 민족의 지도자로 이끈 고장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글 이용남 'i-view'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