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품고 기도할 자 누구인가? /시67:1-7
2017-11-16 20:13:02
시 67:1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어서, (셀라)
2 온 세상이 주님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3 하나님,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시오. 4 주님께서 온 백성을 공의로 심판하시며, 세상의 온 나라를 인도하시니, 온 나라가 기뻐하며, 큰소리로 외치면서 노래합니다. (셀라) 5 하나님,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시오.
6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니, 땅 끝까지 온 누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여라.
시편 기자는 복을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시 67:1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도 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67:2-7을 보니 이 기도는 자신 뿐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을 위하여 기도였습니다.
:2 온 세상이 주님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3 하나님,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시오. 4 주님께서 온 백성을 공의로 심판하시며, 세상의 온 나라를 인도하시니, 온 나라가 기뻐하며, 큰소리로 외치면서 노래합니다. (셀라) 5 하나님,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시오.
저희 교회에 세계 열방기도 센타가 있습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기를 매일 24시간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갈렙교회 선교팀은 태국으로 내일 여선교회 선교팀이 인도로 갑니다. 오늘부터 일 년 동안 형제교회 선교사로 파송 받을 교인들의 접수를 받게 됩니다. 다음 주 여재우목사님은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세상과 열방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여대 교목실장 장경철교수님이 [흔적신학]이란 책을 쓰셨는데, 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담당하여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서울여대에 부임한 초기에 학생들에게 어떤 내용을 수업 시간에 듣기를 원하는가를 물은 적이 있었답니다. 학생들은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냥 일찍 끝내 주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주제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이제 지겹다는 것이었습니다. 교목인 목사님이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나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격이 필요합니다. 정말 복을 받은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은 사람이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자기와 같이 복을 받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셨다고 감격스럽게 고백했습니다.
67:6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인은 어떤 복을 받은 것입니까? 67:6에서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풍요한 복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에 많이 소유하였기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며 기도하고, 인도도 가고 인도네시아도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인이 복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시 67:1에서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는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어서” 라고 간구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곧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온 세상 모든 민족도 환한 얼굴로 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방이 주를 바라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는 세 가지 고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 복음을 믿음입니다. 둘째는 실제로 그 복음을 누리며 사는 삶입니다. 셋째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된 복음도 먼저는 하나님과 화목케 된 십자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실제로 누리며 친밀히 교제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가정과 교회, 세상에서 화목케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자신을 사랑하셨음을 믿어야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누리며 기쁨과 감사 찬양으로 살아야 하며 그 다음 원수도 용서하고 모든 이들을 사랑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공의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자신이 거룩한 자로 살아야 하고 그 다음 불의한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먼저는 믿어야 하고 두 번째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고리 중 어느 하나도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둘째 고리가 빠져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화목케 된 복음이나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공의나 하나님의 나라나 다 교리적인 지식일 뿐이지 실제로 경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나가 사명감으로 그것을 전하려니 힘만 들고 열매는 없고 지치고 온갖 시험이 들고 마음이 메마르고 좌절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박국 2:14에서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 이니라" 라고 노랬습니다. 사 11:9에서도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날이 올 것이라 믿어지십니까?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확신이 없습니다. 영적 자신감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누구인가? 손을 번쩍 들지 못합니다.
정말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 하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 할 날이 올까요? 가정도 힘들어 보입니다. 아파트 단지는 가능할까요? 가정도 안 되고, 아파트 단지도 안 되는데, 직장, 학교, 사회에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가득하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날이 과연 올까,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전도를 열심히 해서, 선교사님을 많이 보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히 아는 이들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없는 사람,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 은밀한 죄가 사라진 사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자기 아파트 단지 안에 살고, 직장이나 학교가 있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런 사람이 1,000만 명이나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대한 선교사들은 선교를 해야겠다는 것이 사명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환한 얼굴빛을 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18세기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17l7-1747) 선교사는 미국독립 전,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2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난 250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된 헨리 마틴(1781-1812)은 영국 캠브리지 출신으로 천재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이었는데 1805년 인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건강 때문에 오래 사역하지 못하고 31세의 젊은 나이에 인도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지극히 복된 하나님을 보았고 또한 하나님께서 하신 일 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탁월하심이 얼마나 위대한지요! 하나님의 탁월하신 위대하심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픕니다.
나의 열렬한 기도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을 더 깊이, 그리고 계속적으로 확신하며 나의 영혼 전체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그러한 열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것이 되기를, 그의 영원한 팔에 안기고 그의 충만하심 안에 완전히 잠기기를 진정 원합니다. 오, 나의 구주이시여. 주님이신 하나님,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바라지 않고 사람들이 나의 경험을 알기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과 함께 있고 주를 위하여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20세기의 순교자 짐 엘리엇(1927-1956)은 자기가 아는 하나님을 알려주기를 그토록 원했던 에콰도르의 아우카 족에게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29살 때입니다. 그의 대학생 때 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시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저를 채우소서..... 하나님, 마른 막대기 같은 제 삶에 불을 붙이사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멸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 제 삶은 주님의 것이오니 다 태워주소서. 저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주 예수님처럼 꽉 찬 삶을 원합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헨리 마틴, 그리고 짐 엘리엇이 위대한 선교사가 된 열쇠가 무엇입니까? 탁월한 선교사 훈련입니까? 사명감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전도를 하고 교회에 봉사를 하려고 합니다. 다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환한 얼굴 빛을 보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의 흘러나오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믿고 파송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뢰가 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복음 설교가 폴 워셔목사가 한 말입니다.
어떤 목사가 중요한 집회에 설교하기로 약속하고 한 시간 늦게 나타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너무 늦었다며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변명했다. “여러분, 정확한 시간에 호텔에서 출발했지만 오는 도중에 대형 화물차가 시속 100킬로미터로 내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늦었습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 설명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설교자의 단정한 옷차림과 잘 벗겨 진 머리를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 목사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거짓말쟁이구나!’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사고를 당했음을 보여주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우리 이야기인 것을 아십니까?여러분, 무엇이 더 큽니까? 대형 화물차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입니까? 경차와 충돌해도 큰 상처를 입는 법인데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마주 쳤는데도 인격에 조금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 과연 기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하나님의 종이라면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교인들과 교회를 보면서 냉소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탠리 죤스 선교사님이 [순례자의 노래]라는 책에서 6개월간 전도 여행을 떠날 때, 이야기를 했습니다. 매리 웹스터라는 자매가 쪽지 한 장을 주더랍니다, 펴보니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전도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는 말로는 너무 경박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의 말이 진리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누리고 있는 것을 정확히 꼬집은 것이다. 나는 재미를 누리고 있다. 예수와 함께하는 재미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도 되고 선교도 되고 교회도 부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헌신해야 하는 영역은 봉사도 선교도 전도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이 우리 안에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선교나 전도나 봉사나 복음의 흘러넘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저는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라!” 외칩니다. 저만 이런 은혜를 받는 것은 너무나 아쉽기 때문입니다. 제 주위에 이들이 다 주님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갈망으로 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위 사람 정도가 아니라 열방이 그리 하다면 황홀한 상상일 것입니다.
시 67편을 보니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임을 깨달았습니다.
시 67:5 하나님,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체험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만나야하겠다고 갈망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사렛 예수여” 자기는 예수님께 갈 수 없지만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 알릴 수는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유기성목사, 유목사는 특별한 사람이잖아!” 라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예수님이 마음이 계시다는 설교를 듣고 믿는 척 했던 사람입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날 제 마음에 갈망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안에 계시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갈망은 교회에 대한 실망,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두려움, 그모든 것을 능히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만 내 안에 오실 수 있다면 그동안의 모든 교회에 대한 상처, 목사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그 갈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40년을 살아온 것뿐입니다.
필립 얀시 집회 중에 저희 집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특별한 친밀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부러우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부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필립 얀시와 비교가 안 되는 주 예수님께서 항상 마음에 계십니다! 그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장경철 교수 “우리는 흔히 ‘내게 하나님을 보여 다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닙니다.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렸지만 그 그림 속에 화가가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그림 속에 화가가 없으니 화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화가의 존재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다양한 흔적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함께 계신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그 주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만나고 친밀히 교제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67: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니, 땅 끝까지 온 누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여라.
시 67편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는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한 민족까지도 /시67:4~5
2008-02-04 22:00:56
‘별을 파는 세일즈맨’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세일즈맨이 진주로 된 천국 문에 들어갔습니다. 성 베드로가 반기며 “환영합니다. 천국에서 하루를, 지옥에서 하루를 보낸 후에 어느 곳에 남을지 결정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첫날을 지옥에서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지옥에는 고통에 찬 비명과 통곡소리 대신 아름다운 환경에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멋진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나머지 영원히 지옥에 머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천국에는 하프 소리가 들리고, 폭신한 하얀 구름들이 떠다니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결정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옥에 있기로 결정하고 다시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가 지옥에 도착하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습니다. 한 풀 기가 꺾인 사람들이 뜨거운 사막을 절망적으로 걸어 다니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는 악마에게 소리쳤습니다. “이틀 전까지만 하더라도 멋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환상적인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참을 수 없는 상태군요”. 악마는 교활한 미소를 던지며 “아, 그날은 회원모집일이었고, 이제 자네는 여기 직원이잖나”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에는 링컨과 워싱턴만 살기 때문에 재미가 없답니다. 천국에는 재미있는 사람은 없고 재미없는 사람들만 있어서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것도 못하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얄팍한 재미 때문에 영원한 즐거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선택은 평생을 좌우 합니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선택은 영원을 좌우합니다”.
세계의 인종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크게 구분하면 백인, 황인, 흑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다양한 인종의 수는 수만 인종이 넘을 것입니다. 인종, 문화, 언어와 종교는 지방화의 요인입니다. 인종 때문에 세계는 작게 나누어집니다.
마태복음 28:19에서 20절상반절에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대 명령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멀고 가까운 모든 곳, 그 곳으로 가서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 생명의 길로 훈련시켜라”. 주님의 대 명령은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7-8절에 있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대답은 복음 전파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디가 땅 끝입니까? 모든 사람이 가기 싫어하는 곳입니다. 가장 가기 힘든 곳입니다. 가장 열악한 곳이 땅 끝입니다.
교회의 존재가치는 선교입니다. 교회는 선교로 말미암아 교회가 됩니다. 선교가 없으면 교회도 없습니다(No mission, no church). 빌 이섬과 탐 밴디는 크리스천을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대 명령을 들으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대합시다.
첫째, 복음은 마지막 한 민족에게까지 전파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14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합니다. 복음이 전 민족에게 전파되게 하려고 지금도 주님의 영은 활동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이 아끼는 소중한 소유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선교사 바울의 고통을 보십시오.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롬 16:26)라고 합니다. “내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라고 합니다.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빌 1:18)라고 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합니다. 이런 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죽을 때까지 식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후 30여년을 복음 전파에 투신하였습니다. 바울의 여정이 몇 킬로미터나 될까요? 그 당시로는 엄청난 거리를 누빈 것입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습니다. 반면에 가톨릭은 급성장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불교의 성장률이 3.9%이며, 천주교의 성장률이 74.4%인데 비해 개신교는 1.6%가 감소하였습니다. 얼마 전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의 성장”이란 세미나에서 가톨릭의 성장 요인을 첫째로 결속력, 둘째로 청렴성, 셋째로 정의와 인권 활동, 넷째로 타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를 꼽았습니다.
개신교가 교인을 밀어내는 요인으로는 첫째는 표현을 중시하는 것, 둘째는 외형에 치중하고 교인끼리 자리싸움하는 것, 넷째는 가족 같고 시댁 같은 교회를 들었습니다. 반면에 천주교가 교인을 끌어들이는 요인으로는 첫째는 성스러움, 둘째는 자유로움, 셋째는 조상제사, 장례예식, 타종교 등에 대한 융통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이런 요건들도 개신교의 퇴조를 한 몫을 했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전도에 관한 어느 설문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내가 해본 가장 좋았던 전도방법은?”이란 설문에서 만날 때마다 전하고 힘들 때 기도해주기, 맛있는 음식 함께 먹기, 성경 등 문자 메시지로 보내주기, 전도훈련 때 배운 방법으로 전하기, 일단 교회에 데리고 오기, 전도용품 선물 주기, 두 세 명이 집중 공략하기 등이 있었습니다. 전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권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세계에는 미전도 종족이 많이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 가운데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종족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의 ‘세계 선교에 관한 통계표’에 의하면 세계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16억4568만5천명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세계 인구의 26.5%입니다. 복음전도를 받지 못하고 토착 교회가 없는 종족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약 95%는 ‘10/40 창’(10/40 windows)이라 불리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의 경도 10도에서 40도 사이에는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복음 전도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 복음을 받지 못한 종족은 6,900여 종족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입니다. 전 국민 가운데 복음을 들은 사람이 0.02%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이 예멘, 소말리아, 모로코, 몰리타니아, 튀니지, 알제리, 터키, 이란, 니제르의 순으로 복음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죄다 이슬람 국가들입니다. 이슬람 국가들이 여전히 가장 복음을 전하기 힘든 나라들입니다.
니느웨는 요나를 통하여 복음을 듣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못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을 그분을 전할 최초의 선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녀는 자기 마을로 들어가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후에 많은 선교사들이 나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해 말 현재 우리나라에서 파송한 해외 선교사의 수는 14,012명입니다. 지금 세계 수 많은 나라에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 선교사가 가장 많이 파송된 나라는 중국입니다. 그 다음이 미국, 필리핀, 일본, 러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독일, 인도, 터키의 순입니다. 현재 우리 총회가 파송한 선교사만 하더라도 굉장히 많습니다. 84개국에 523가정, 941명의 선교사가 복음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총회는 올해 안으로 1,000명의 선교사가 파송될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까지 선교사의 파송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 성가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 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이 찬양을 할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이 하나님의 복음이,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까지 쉬지 않고 우리를 통해 주의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둘째,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해야 합니다.
시편 67:5에는 “하나님이여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면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고대하십니다.
찬송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찬송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찬송하지 못하는 입을 책망하십니다. 찬송하지 못하는 마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며, 우리가 기뻐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 향하는 진정한 길은 세 가지를 포함해야 합니다. 첫째, 그 길은 아가페를 포함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살아가면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혜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죠. 써보지 못한 검이 녹슬어버리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구라도 갈 수 있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가 말하는 지혜는 복음입니다. 복음 외에 아가페를 포함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복음 외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복음 외에 누구라도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지혜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믿음도 구체적이고 쓸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머리에서만 맴돌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구원도 실제로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생활에서 쓰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름 손님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을 아십니까? 왜 그런 말이 나왔겠습니까? 더운 여름에 옷도 편하게 입고 있는데 불쑥 들이닥치는 손님이 싫다는 것이지요. 편안함을 빼앗기기 싫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세상의 편안함, 안일함, 재미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믿고 착해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좋은 술친구가 멀어질까봐 염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이 없어질까봐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찬송합니다. “예수보다 더 좋은 친구 없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전도에 필요한 지혜는 두 단어입니다. 실천과 인내입니다. 오늘날 불신자 한 사람이 신앙을 갖기까지 전도하는 데는 4년이 걸린다고 추산합니다. 우리는 2분 동안 멈추라는 빨간 신호등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10억분의 1초의 정보에 반응을 못하는 컴퓨터에 쉽게 불편해합니다. 4년을 끈기 있게 인도할 수 있는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불신에서 믿음까지는 멀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찬송은 더 멉니다. 찬송에서 증거하기까지는 조금 더 멉니다.
로마서 15:11에는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고 합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옵션이 아닙니다. 찬송은 반드시 해야 할 명령입니다.
탐 밴디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교회로 부르셨다. 하나님은 당신을 선교지로 부르셨다”. 우리의 모든 삶이 소명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이 선교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예수 믿게 하셨습니까? 아직도 믿지 않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지만 왜 아직도 이 땅에 있습니까? 구원받아야 할 사람을 위해 이 땅에 남겨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군대에 간 아들 가운데 첫 휴가를 오면 격려하고 첫 휴가비를 줍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합니까? 왜 첫 휴가 나온 군인에게 격려합니까? 그 때가 대개 제일 힘들 때입니다. 훈련과정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되어 졸병으로 군무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군대는 남자들에게 좋은 것도 많지만 나쁜 것도 많습니다. 아들들에게 선교사의 마음을 가지고 남은 군대 생활을 잘 하라고 소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교회가 군대에 파송한 선교사입니다. 우리 모두가 삶의 현장으로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모든 민족에게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주를 알게 하고,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결론
레너드 스윗은 그의 책에서 “오늘날 교회 가장 커다란 죄는 커미션(commission)도, 오미션(ommission)도 아닙니다. 그것은 노 미션(no mission) 즉 선교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범하는 죄도, 하지 않는 죄도, 전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아닙니다. 이미 믿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죄는 선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교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가장 큰 명령이기에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 3째 주일입니다. 첫 번 성탄과 두 번째 성탄을 함께 생각하는 대강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10에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볼 수 있을 때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생전에 땅 끝까지 전도하려고 화급한 마음으로 전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인사는 “마라나타” 였습니다.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하는 말입니다. 박해 가운데 있던 그들에게 소망은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왜 이렇게 더딥니까?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원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더디 오십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더디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하였을 때 느린 거북이와 달팽이가 제일 마지막에 도착하였답니다. 거북이와 달팽이는 끈기로 방주에 도달하였답니다. 이들이 들어오자 방주의 문을 하나님이 직접 “쾅”하고 닫으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첫째 성탄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둘째 성탄을 대망하는 우리가 됩시다.
둘째 성탄 대망하면서 주님이 오시기 전, 마지막 한 민족까지도 복음을 받아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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