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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서 태어나 바다서 살다 간 작은 龍"
- 國卒 학력의 고등고시 출신 崔在洙 이야기
1961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 지면 보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자 명단 72명 중에는
훗날 7, 80대 시니어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전직(이하 같음) 고건(高建) 총리, 장덕진(張德鎭) 농림부장관,
최동섭(崔同燮) 건설부장관, 이상희(李相熙) 건설부장관, 정영의(鄭永儀) 재무부장관, 허남훈(許南薰) 환경처장관,
송언종(宋彦鐘) 체신부장관, 임인택(林寅澤) 교통부장관, 이진설(李鎭卨) 건설부장관, 서영택(徐榮澤) 건설부장관,
이동호(李同浩) 내무부장관, 이상배(李相培) 총무처장관 및 앞서 사법고시에도 패스한 박찬종(朴燦鐘) 의원 등과
함께 72명 중 72등 꼴찌로 합격한 해운항만청 재무국장 최재수(崔在洙)란 이름 석자도 끼어 있었다.
그후 30년이 지난 1991년 10월 19일 경향신문 18면을 보면 당시 이들 72명은 일반행정에 42명, 경제분야 15명,
외교분야 15명이 포진해 있었고 차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은 무려 20명에 달해 장관급이 9명, 차관급이
11명이나 됐으며 사법과 행정과, 양과에 합격한 사람도 20명에 달했으며 외교를 택한 합격자 중 11명이 대사로
승진했었다. 그는 내로라 하는 명문대 출신들 틈에 끼어 국졸 학력으로 그리도 어렵고 힘든 고시에 합격하여 비록
이사관급, 국장직을 끝으로 공직에서 중도 하차했지만 7세 연하인 필자와는 조직과 업무를 통해 또는 친교상 다른
그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인연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앞으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머나먼
세상으로 떠나 보내게 되었다.
2019년 8월16일 20시 17분 해운항만청 부산항무국장과 본청 재무국장을 지내고 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를 거쳐
두양상선 부사장, 한국해양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낸 최재수(崔在洙) 박사가 향년
85세를 일기로 타계한 것이다. 필자가 한때 직장 상사로 모시기도 했고 부산서 각기 다른 조직 근무시절 한 방을
쓰며 홀아비 생활도 함께 했으며 공직 퇴임 후에도 각자 다른 일터를 나가긴 했지만 같은 건물서 자주 만나 소담을
나누며 반(半) 백수로 자주 어울려 노후를 함께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후 두어 해를 병상에서 지내다
홀연히 떠나버려 다시 한번 삶의 무상함을 실감하며 문득 손 위 큰 형이나 친구를 잃은 듯 애석함이 떠나질 않고
뇌리를 맴돈다.
그리도 총명한 그도 강남 한곳 재활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후임 박창홍(朴昌弘) 전무와 병문안을 가서 "최박사님!
서대남과 박창홍인데 저희들을 모르겠어요?" 하고 소리를 질러도 휠체어를 탄 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모습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으니 필자가 대변인으로 절친들에게 그의 문안을 전하던 일도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수없이 즐비한 조화도, 먹고 남을 정도는 되게 모은 재산도, 부인과 서울대학을
나온 아들 딸의 애통에도 아랑곳 없이 물끄러미 미소만 짓는 영정사진을 보고 필자가 "최박사님 만년에 서대남에게
술 사주는 재미로 사신다 해 놓고 그냥 가시면 술은 이제 누가 사지요?" 하며 큰 소리를 지른 게 최후의 작별인사였다.
생전에 최박사는 글 쓰기를 좋아 해서 해운 전반에 걸쳐 특정 분야에 관계없이 이것 저것 여러 내용의 저서와 글을
남겼다. 특히 관직이나 교수 시절 담당 전문 분야가 있었지만 퇴임 후 활자나 출판 매체를 통해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하며 숱한 논단과 이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해운 전번에 걸친 해운의 역사나 선박회사의 사사 등 그가 대표
집필한 간행물이나 자료는 수없이 많지만 수십년은 더 살 것으로 믿고 미뤄 왔는지 몰라도 쌈바디급이면 흔히들
자필이건 타필이건 자기의 삶을 되돌아 보고 자서전 성격의 자신에 관한 글을 남기는데 그는 정작 본인에 관해서는
필자가 현대사기록연구원(원장:송철원) 수석연구원 시절 국가기록원에 영구 보관용으로 대담한 영상 구술자료
외에는 필자가 본 일이 없다.
그래서 어렵고 가난하게 극빈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그래도 꿈을 키워 고등고시를 패스하여 중앙정부 기관의
고급 관리를 지내고 선주단체를 거쳐 대학 교단에서 강의를 하고 해운분야의 정책을 다루며 연구와 집필에도
몰두했던 그를 오랜 기간 가까이서 지켜본 인연과 눈여김을 통해 객관적으로 한 지인의 생애를 돌아보며 추모와
석별의 정을 담아 여기 좁은 지면이지만 2회에 걸쳐 필자의 단상으로 '최재수 박사'의 일대기를 집약 정리해 본다.
한마디로 그는 머리 좋고 똑똑하며 분별력 있고 순간적 판단력이 빠르며 무슨 일이고 간에 열심히 하고 또 깊이
파고들어 결과를 끌어내는 외우기에 능한 천재적인 인물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술을 많이는 안 해도 애주가란 호칭을 받을 정도로 필자를 비롯 함께 일했던 지인들과 마주할 때는 늘 술잔이
오갔다. 그리고 해운계에서도 워낙 여러 분야의 직책을 맡았었기 때문에 필자가 한번은 그간 불리어 온 호칭,
"선배님, 국장님, 전무님, 교수님, 소장님, 위원님, 박사님, 그밖에 무슨님 무슨님 중에서 제가 무엇으로 불러
드릴까요?"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야 부르는 사람 마음에 달렸지만 '최박사'라고 불리는 게 무난할 것 같다"고
해서 그 이후는 필자가 앞장서 그를 아는 지인들에게 "최박사님"으로 부르자고 통일안을 제시하여 타계하기
전까지 통상 그렇게 불러 왔다.
그는 충남 홍성군 은하면 목현리 본적의 1891년생 아버지와, 그리고 아예 이름이 없이 평생을 살다 간, 같은
고향의 1900년생 어머니와의 4남 6녀 중 3남으로 1935년 9월 20일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
편입하여 수학박사란 별명을 얻고 천재란 소리를 들으며 보통학교를 졸업 후 고향서 10여 명이 국립교통학교에
응시, 혼자 합격했으나 입학금을 내지 못 해 결국은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배움과 출세의 길을
택해 1차 관문으로 어렵게 1955년 48명 모집에 48등으로 보통고시에 합격했다. 이어 예비고시를 거쳐 보통고시
합격 6년만에 1961년 합격자 72명 중 "꼴찌면 어떠냐, 합격이면 됐지"라며 또 꼴찌로 드디어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을 한 의지의 사나이요 입지전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고등고시에 합격한 최재수는 '교통학교'에는 못 갔지만 1962년 6월 '교통부'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발령을 받아
수습을 마친 뒤 첫 보직으로 법무관실 법무계장을 맡아 그간 익힌 실력을 발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어 옮긴 자리는 육운국 자동차 운송사업면허를 다루는 보직이었다. 업무 처리 중에 난생 처음으로 돈 봉투가
주머니에 들어오게 되고 쓰고도 남을 만큼의 용돈이 생겼다고 솔직히 당시를 고백했다.
한번은 "홍성 촌놈이 퇴근길 어느 음식점에 초대돼 접대라는 걸 받는데 한겨울인데도 쇠고기 구이에 싱싱한
상추가 밥상에 오른 걸 보고 너무나 신기했다"고 언젠가 술자리서 이를 토로하며 함께 파안대소한 적이 있다.
헌 책방에서 힘들게 구한 교재로 혼자 공부를 해서 최종학력 초등학교 졸업생이 보통고시와 고등고시 예비고사를
거쳐 고등고시에 최종 합격을 한 후 물 좋은 자리, 돈 방석(?)에 안고 보니 당장은 좋으나 승진을 위한 경력 평가를
받기 위해 건국대학교에 입학, 학사를 따고 다시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하여 회계학도 공부했다.
아는 게 죄랄까, 회계를 배운 게 화근이 되어 한번은 일개 사무관이 장관 판공비 내역을 조사한 것으로 밉보여 곤혹을
치렀고 심지어 중앙정보부에 불려간 에피소드도 털어놨다. 얼마 후 해운국의 항정계장을 맡은 게 최재수가 해운과
인연을 맺게된 계기가 됐고 '항만의 공기업화(Port Authority)'란 석사논문이 그를 항만전문 행정가라는 타이틀을
안겨주게 되고 대외적으로 전문 행정가로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관직 10년 째인 1971년에 서기관으로선 최고 직위로 국장급 대우를 받는 교통부 총무과장으로 입신, 우쭐한다.
당시는 국장급에게 지급되던 승용차와 기사를 중앙부서 총무과장은 이와 유사한 대우를 받는 게 일반적 관례였다.
총무과장은 장관의 신임이 두텁고 승진 연한이 찬 사람이 발탁되는 게 관례인데 벼락출세를 한 최재수는 인사청탁과
보직청탁 등 당시 공무원 사회에서 인사문제와 그 난맥상이 공직사회의 분위기를 흐리게 하던 때라 힘들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래 있지 않고 별 볼 일 없는 한직, 법무담당관으로 좌천된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당시 업계와
함께 숙원사업이던 선원법과 선박직원법 등을 정비한 일과 당시 1주에 국무회의와 경제장관회의가 각 두 번씩이라
매번 회의에 앞서 장관에게 안건 설명을 미리 하는 일이 주요 일과였다고 했다.
드디어 최재수는 1973년 8월에 해운국의 꽃이라 불리며 누구나 한번 앉고 싶어하는 외항과장으로 전보되는 영광을
안게 되고 뒷날 그는 이때를 본인의 일생 중 가장 보람있었던 황금기였다고 술회했다. 당시 교통부 출입기자로 활동했던
필자도 그때사 그를 겨우 알게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해운발전이 우리나라 빈곤추방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난을 물리치는 것을 혁명공약으로 내세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뜻을 알만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때 중고선 도입의 신속처리, 각종 규제 복마전의 혁파, 한일해운협정의 지연작전, 해운발전을 위한 대통령과의
정책 교감, 해외 해무관제도의 신설 등을 큰 보람으로 간직한다고 추억했다.
공조직을 비롯한 직장에서 일단 취업이 되면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가 중요하게 마련이다. 승승장구하던
최재수에게 어느날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대형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되돌릴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운명과 마주친
것이다. 1976년 해운항만청 출범으로 강창성(姜昌成) 초대청장이 부임하자 부산지방항만청 항무국장으로 부임,
대망의 국장급으로 승진은 했으나 그는 관복을 벗는다. 옳다고 생각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밀어부치는 자신의
고집불통 때문이라며 뇌물수수 등의 부정이 아니라 떳떳하게 상급자와의 정책견해 차이로 그만 뒀기에 섭섭하긴
했지만 불명예는 아니라며 언젠가 뒤에 밝히겠다고 한 뒤 끝내 밝히지 않고 부산청 항무국장에서 본청 재무국장으로
소환성 전보로 자리를 옮긴 뒤에 관직을 떠난 확실한 이유는 두분이 다 타계한 지금에는 더욱 오리무중이다.
부산근무 시절에는 하역업체 통폐합과 부산항컨테이너터미널운영공사 창립 및 부산항운노조와의 분쟁 해결이란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함께 일을 한 일부 업계 총수들로부터 "당신 같은 사람이 최고 행정책임자가 돼야 한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고 필자도 공감했던 그는 1979년 8월, 제17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용무(龍舞) 김용배(金容培)
예비역 육군대장'이 사무국의 총수로 집무하는 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로 낙하산을 타고 내렸다.
"어디서 날아온 철새냐?"고 비아냥대는 출입기자들의 가십을 막느라고 조사부장으로 홍보업무를 맡고 있던 필자는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낙하산 타고 내려온 철새 치고는 능력과 전문성과 의욕을 갖춘 사무국 책임자로
인정을 받은 쓸만한 철새였다.
최재수(崔在洙) 국장은 중도에 관복을 벗고 공직에서 물러나 낙하산을 타고 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 자리로 안착을
했다. 그러나 사무국에는 군번 1번 이형근(李亨根) 대장과 함께 별 넷 단 대장 '폼 잡기'로 쌍벽을 이뤘던,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제17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용배(金容培) 예비역 대장이 비록 해운에는 비전문가였지만 역시
낙하산을 타고 먼저 내려와 직속 상위직에 버티고 있으니 크게 불편한 일은 뻔한 일이었다.
특히 김이사장은 단순 '장군'이란 호칭은 별이 한개나 두개도 장군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를 때는 꼭 '대장'을 붙여
별이 4개, 4성장군임을 강조하여 "김대장님"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협회 업무 관계 요로에 연말 선물을
보내는데 새로 부임 인사를 겸해 '최재수 전무이사'가 본인 명함으로 이를 보낸 게 들통이 나서 '김 대장' 이사장이
사무실 집기를 집어던지며 대발노발한 사건이 생각난다.
그러나 조직관리에 능한 최 전무는 이듬해 정기총회에서 그간 이사장이나 상근부회장으로 차관급 이상이 맡아오던 협회
사무국을 김대장의 퇴임을 찬스로 정관을 개정하여 사무국 최 상위직을 전무이사가 총괄 관장하는 체제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본인이 수장 직위에 올라 외항해운업계 업무 전반을 맡아 순발력과 두뇌회전이 빠른 엘리트 공무원의 경험과
산하 선사와의 유대 도모 등에 능한 재능을 살려 그간 노쇠현상을 보이며 매너리즘에 빠졌단 지탄을 받기도 했던 사무국의
손보기에 착수, 우선 기능의 활성화를 위해 발빠른 추진력을 보였다. 사무국의 혁신적인 활성화를 위해 우선 회장과
전무이사의 주례 회동과 업무보고, 회장단회의 최고 의결기구화와 이의 정례화, 이사회 및 회원사 간담회를 정기화하고
가시적인 활성화 행보를 시작했다.
그간 극도로 사업비 지출을 억제하여 좀비화된 협회의 적극적인 대내외 활동과 국제업무의 활성화를 위해 애쓰는
모습도 역력했다. 퇴물(?) 공무원 출신이나 청탁인사로 채웠던 사무국 직원의 점차적 교체, 외국어 공부의 강제 시행,
실제 승선을 통한 해운관련 업무 체험 등등 별로 크지 않은 체구에 가재미 눈(?)으로 감시를 하고 방울소리를 내며
직원들을 다그치고 독려했다. 외국인의 영어 전화가 오면 이를 받아 제대로 답변하는 직원이 드물다며 외국어 공부를
비롯한 직원들의 자질향상을 강제화 했다. 사무국의 모든 임직원은 무조건 일과 시작전 아침에는 영어반, 퇴근 시간
후의 저녁엔 일본어 공부를 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반기별로 LATT나 TOEIC 시험을 통해 취득한 점수에 따라
여직원은 물론 운전기사일지라도 일정 기준으로 해당이 되면 외국어 수당을 지급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영문학을 전공한 영문과 출신 필자가 자연히 영어공부 주무를 맡아 네이티브 영어강사를 섭외
결정하고 매일 출석을 체크해서 벌금을 받아내고 이를 재원으로 술이 취해 간이 커야 영어가 잘 된다는 통설에 따라
퇴근 후 밤이되면 남녀 외국인 강사를 데리고 신촌 연세대 근처의 프리 안주 호프집을 자주 찾았다.
신촌 로타리 일원의 호프집에는 연세대 FLI(외국어학당)에서 외국어나 한국어를 배우는 원어민 학생이나 강사가 많아
섭외가 용이했고 그 중 선주협회 간부 출신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남선생 '콜린스(Collins)'와 여선생 '리자(Lisa)'가
협회 소속 직원처럼 가까이 지내던 모습이 지금도 추억으로 새롭다.
또 하나 최 전무가 강행한 획기적인 업적(?)은 당시 자동차 운전면허가 없는 전 임직원들에게 운전면허를 예외없이 무조건
취득케 한 일이었다. 차량 운전만 생각하면 머릿속에 대형 교통사고가 연상돼 엄두를 못 내던 필자도 그 때를 놓쳤더라면
평생 무면허로 이 나이를 맞았을 것을 상상하면 최전무의 파쇼적인 당시 직원 통솔과 운영 방침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일이고 독려하는 상급자나 책임자가 지시나 주문만 쏟아내면 저항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함께 하고 같이 뛰었기 때문에 외국어 향상이나 업무 수행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었다.
그밖에도 과장 이상 간부들은 자기가 수행하는 직무 관련 분야를 주제로 테마를 정해 심층적으로 조사 연구 한 결과를
매주 한번씩 돌아가며 전 임직원을 모은 가운데 강의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이를 강력 시행했다.
비록 각자가 수행하는 업무일지라도 이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여 남들 앞에서 강의 형태로 발표를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자기 차례를 맞은 직원들은 죽을 맛으로 특강 홍역을 치뤄야 했다. 또 각 부장을 중심으로 부서별로 관장
하는 업무를 대상으로 고료를 지급하며 원고를 쓰게 해서 '한국해운의 현황과 실제'라는 제하의 단행본 책자를 출판,
해운계에 배포했고 이를 해양계 교육기관에서 교재로 쓰일 정도로 해운입문서로 인기를 얻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놀라운 성과는 차치하고 협회라는 경제단체에서 이같이 면학정신을 북돋우는 조직 운영은 참으로
본받을만한 일로 여겨져 유익했던 기억으로 남는다. 그는 적어도 선주협회에 와서는 추진 업무뿐만 아니라 한잔 마시고
노는 회식 문화에도 앞장섰다. 철따라 임직원의 부인들도 동행시켜 회식을 함께 하거나 나이트 클럽에 가서 디스코를
함께 추며 친목을 도모하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매년 개최되던 '해운의 날' 행사가 끝나면 뒷풀이 담당
필자가 주관하여 사무국 임직원과 가족까지 함께 격의 없이 어울려 노래방이라도 가서 마이크를 잡던 여흥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가끔 직원들이 "그때 그시절, 최정권 시절이 좋았었다"는 향수는 지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또 한가지, 능력위주의 적재적소 인사 방침과 진급 원칙을 위주로 하는 그는 가끔 연공서열을 뒤엎는 파격을 보이기도
했다. 그 중 필자에 대해서도 인간적 비호감이 원인이었는지 아님 관리 시절 기자실에 유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너무나
파격적인 보직 변경 인사를 단행했었다. 그간 여러번 밝혔듯이 기자 출신의 필자를 어느날 갑자기 황당하게도 해양계
출신 해기사, 마도로스가 적격인 해무부장으로 전보를 시켰던 것. 지금 생각하면 결론적으로 이왕 해운계로 진로를 바꾼
마당에 일반 업무 외에 전공을 바꿔 평생 짝퉁 해기사로서 해상업무를 맡아 주특기를 바꾸게 한 건 어쩌면 업계 경력을
두배로 넓히는 계기를 준 셈이라 다행이란 생각이지만 최재수적(?) 발상은 지금도 의아하다.
최초로 한국해대의 한바다호를 타고 원양실습에 참여시켜 본선을 익히고 선원들의 해상생활을 몸소 견학하게 했고
이후 계속 바톤을 이어가며 직원들을 바다로 내보내 본선의 현장 메커니즘을 익히게 한 일 등 역발상적인 아이디어
연출을 계속했다. 선박을 구심점으로 사업의 주체 삼아 해상운송을 통해 돈을 버는 업종이 해운이라면 당연히 본선에
대한 메카니즘을 익혀야 마땅하다는 직원 통솔에 대한 그의 발상 전환은 조직을 업그레이드 시킨 대표적 케이스다.
필자가 실습선 한바다호를 타고 대만의 키룽, 인도의 갠지스와 캘카타, 버마의 랭군, 일본의 나가사키 등을 한국해대
실습생과 함께 승선 견학을 다닐 때에는 이들 실습선을 후원하는 실무책임을 필자가 맡고 있어 사관식당 식사때마다
선기장 앞자리 연습감과 동급 좌석에 배치된 까닭을 학생들은 물론 교관 사관들도 몰랐던 게 에피소드로 남는다.
때마침 해운의 동서문제 못지 않게 남북문제가 국제해운의 현안으로 대두되자 UN이 IMO 전신 '정부간해사자문기구
(IMCO:Inter-Governmental Maritime Consultative Organization)'란 국제해사협의기구를 발족 SOLAS(해상인명안전조약), MALPOL(해상오염방지조약) 등 각종 국제조약이 제정되고 이를 시행을 앞두고 이를 국내법으로 수용해야 하는 문제
가 업계 현안으로 대두 되자 이의 팔로우잉을 주관하는 각종 기구의 국제 회의에 담당 직원을 참석시키는 등 협회 사무국은
최 전무를 비롯 온 간부들이 머리띠 매고 공부를 해야했고 비해기사 출신 필자를 보좌하기 위해 회원 선사 소속의 엘리트
해기사들을 파견형식으로 상근시켜 함께 일하게 조치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한해대 출신 성용경(成龍慶/23N), 박찬재(朴燦在/27N), 문병일(文炳日/34N) 등 뭍에 오른
육근 해기사들과 함께 근무한 기억도 새롭다. 또 최 전무는 정부 당국의 지시에 따라 필자를 실무 책임자로 별도의
작업을 지시, 지금의 해양수산개발원(KDI)의 모태가 된 해운정보센터란 이름의 조직을 만들어 독립기구로 발전시키거나
해양오염문제가 해운의 핫 이슈로 부각하자 현재의 해양환경공단(KOEM)의 효시가 된 해양오염방제실이란 부서를
신설하여 이를 조합형태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한 업적은 당시 최 전무의 아이디어와 행정력이 크게 발휘한 덕택이란
찬사를 보내며 고인의 당시 업무 추진력을 추억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해운이 급격한 불황으로 집단 도산사태에 이르러 1983년 말부터 일대 변혁기를 맞은 해운산업합리와 과정을
거쳐 업계가 집약되는 시점에서 겪어야 했던 사무국의 산더미 같았던 일들을 처리하던 모습과 합리화 자구책 문제로
범양상선의 박건석(朴健碩) 회장과 한상연(韓相淵) 사장이 극심한 갈등을 빚을 때 중재역할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는 세 임기 6년 근무를 끝내고 협회를 떠난다. 1986년 후임 낙하산으로 해운항만청에서 퇴임한 이종순(李種洵)
운영국장 출신에게 바톤을 넘기고 두양상선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통폐합 과정에서 발생한 운영자금 부족으로
압류된 선박을 고철로 매각하여 회사를 살린 노력과 경매로 나온 원목선을 유리한 조건으로 경락받아 사세에 도움이 됐던
현업 선사 근무 무용담을 가끔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던 최재수 부사장은 어느날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대학교수로 늦깍이 변신을 하여 대학
강단에 서게 된다. 유비무환으로 협회 재직시 소리 소문내지 않고 중앙대학 무역학과 박사과정을 거쳐 학위를 취득했던
게 주효했다. 보통고시와 고등고시 공부 경력을 십분 발휘하여 남들은 직장 수장이라면 다른 데 눈 돌릴 사이에 그는
박사과정 학업을 착실히 밟았던 것이다. 마침 학위담당 주임교수가 필자의 대학 동기동창 절친 교우, 사회과학대학장을
지낸 장치순(張致順) 박사라 이쪽 저쪽 얘기를 전해 들으며 웃을 일도 참 많았다. 그것도 최 교수는초빙 케이스가 아닌
1988년 교수 모집 신문공고를 보고 지원하여 공채를 통해 당당히 대학 강의를 맡는 영광을 안게 됐으니 더욱 값졌다.
그는 훗날 여건상 서둘러 완성하여 취득한 학위 논문이라 부실하단 죄책감을 가져 왔으나 몇 년 후 일본에서 해운
관련 저명 교수들이 찾아와 본인 논문이 자주 인용된다는 말과 한국해운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칭찬을
듣고 너무나 기뻤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서슴치 않고 실토하길 "일반적으로 교수는 전문 지식을 충분히 습득한 후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나는 거꾸로 교수가 된 뒤 교수에게 필요한 전문 지식을 습득해가며 가르쳤다"고 술회했다.
여하간 관리를 거치면서 정책을 익혔고 선주단체에서 업계 전체를 리뷰하고 이어 현업에서 실무를 익힌 현장 경험이
시너지 효과롤 보여 학생들에게 산 지식을 전달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고 자평을 했다.
2001년 2월 정년퇴직까지 14년에 걸쳐 해운경영학부 교수로 재직 중 기억에 남는 강의가 뭐냐는 생시 필자 질문에
인류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해운의 역할을 중심으로한 세계해운사 분야의 강의였다고 회고했다.
대학 퇴임 후 그는 한국해대 학장과 선주협회 이사장을 거쳐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동경상선 출신의 윤상송
(尹常松) 박사의 후임으로 한국해대 제1기 졸업 후, 고려해운과 KCTC 대표이사 및 국제로타리클럽 3640지구 총재를
거쳐 동 연구소의 바톤을 이어 받아 오늘에 이른 박현규(朴鉉奎) 이사장으로부터 연구소장이란 직함을 얻어 외주 받은
연구과제를 이원철(李源哲) 전무이사와 주축이 되어 대표 집필을 하는 일에도 몰두했다.
개별 선사의 숱한 사사(社史)나 해운관련 업종별 단체의 연사(年史) 출판물 발간 대행은 물론 선주협회 이규만(李奎萬)
상무이사도 참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한해운공사의 전말을 남긴 3인 공저, '잃어버린 항적' 을 비롯하여 기록의
사각에 묻혀 소외됐던 본선 운항의 주역 해상직원의 전반에 관한 체계적 고찰, '우리 선원의 역사' 발간 등이 결과물이다.
특히 획기적으로 한국 해운의 역사를 방대하게 집대성한 역작 '한국 해운 60년사'는 필자의 상투어 "역사는 관심 갖고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만 기록되어 남는다" 는 어록(?) 마따나 기록의 불모지 우리 해운업계에 큰 역사 전과 교과서로 남아
필자에게도 해운 큰사전이나 백과사전으로 유용하다. 그리고 60년사 참고자료로 별책 발행된 '해운사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월간 해양한국의 연재를 모은 에세이 성격의 야사를 담아 흥미로운 해운 캔터베리 테일스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 최 박사 85년 생애에 관한 자서전적 서술은 필자가 알고 있는 것들만 모아도 필설로 다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심경은 비록 적은 나이는 아니었고 어쩌면 알맞게 살다 갔단 생각도 들지만그래도 지금은 서운하고 아쉽단
말 밖엔 더 이을 말이 없다. 며칠전, 한때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재직했던 코리아쉬핑가제트(KSG)의 초창기 취재부장
출신, 조선 전문지 '선박뉴스(The ShipNewsKorea)'의 정호인(鄭鎬仁)발행인을 만난 자리에서 최 박사를 화제로
얘기 중,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 해운전문 기자들의 잊을 수 없는 멘토는 공직과 선주단체 및 교수 출신의 최재수
박사와 그리고 대리점과 포워딩 및 하역업계의 해기사 출신 이윤수(李允洙) 회장 두 분이 현장의 투톱으로, 문무
(文武) 양대 산맥의 대표격이었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파안 대소하며 오래 기억하자고 다짐도 했다.
자주 한국해대 2기졸업 KCTC 신태범(愼泰範) 회장 사무실에 모여 해운 원로들끼리 바둑을 즐기시던 모습은 물론,
늘 필자더러 "이 세상에서 부러운 사람은 오직 서대남 너뿐"이라거나 "만년에 서대남 술 사 주는 재미로 산다"며
유난히 지갑을 자주 열던 모습이 왠지 짠하다. 또 필자의 부산지부 귀양(?) 근무 시절, 가끔 중앙동서 한해대 1기 졸업의
천성이 학자, 고 이준수(李俊秀) 학장과 최 박사를 모시고 전설적 연습선 선장 출신 15기 허일(許逸) 교수와 필자가
기쁨조가 되어 도토리묵 안주로 유쾌하게 막걸리를 마시던 추억이 이제는 머나 먼 전설이 되고 보니 유행 가사처럼
가을 타는 남자가 되어 치맛바람 감싸는 한줄기 바람에도 깊어가는 가을의 센치를 더하듯 최 박사가 떠오른다.
"보고 싶은 최재수 박사님, 40년 전 김선모(金善模) 상무 별세 때는 제가 정성껏 조사를 썼었는데 최 박사님 마지막
길에는 이 졸고가 조사를 대신하오니 부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편히 쉬시며 한국 해운 잘 발전하게 도와 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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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신 해운계 대선배 최재수박사를 추모하며 / 샌드페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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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리얼하게 서술해서 올린글
잘 읽고 갑니다.가신 선배님도
대단 하시지만 이글을 쓰신
샌드님도 대단 하십니다요 ㅎ
누구나 가는 길이지만 같이 밥벌이를 하다가
먼저 가시는 선배님들을 보면 머잖아 우리도 저 길을
가야할텐데 하는 생각이 앞서 서글프답니다, 좋은날님!
@샌드페블(일산)
맞습니다
맞고여~
한표 더드립니다 ㅎ
@좋은날(송파) 한표가 문제가 아니라 주인공을 기리며
그저께 저녁은 술을 마시며 원혼을 달랬답니다. 좋은날님!
@샌드페블(일산)
에궁
욕보셨습니당
좋은분 추억의 책장에 담으셔서 그 여운이 오래가나 봅니다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모름지기 날품팔이
월급쟁이로 살다보니 겪는 애환입니다, 영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