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영역 넓힌 박중훈
박중훈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고등학교 때부터 불씨를 틔우기 시작했다. 용산고 시절 절친한 동창이었던 허재가 농구부장으로 대선수의 꿈을 키웠다면, 그는 연극부장으로 3년 내내 연극부 활동에 매진하며 배우를 꿈꾸었다. 행정고시 출신 고위공무원으로 보수적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외교관을 지망하길 바랐지만 박중훈은 배우의 길을 고집했고,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떨어진 후 재수를 해서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가서도 좀 암담했다. 그 해 동계 취업률이 5%인 거다.”(씨네 21 2009년 1월 16일) 기다리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 박중훈은 단편영화에 열심히 출연하는가 하면, 명함을 뽑아다 말단 스태프에게까지 돌리는 등 영화배우로 충무로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중훈의 데뷔작 '깜보'.
◇ 바닥 닦던 열혈 영화청년
KBS 11기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으나 2차에서 떨어지는가 하면, MBC 강변가요제 출전은 곡을 받지 못해 무산되는 등 실패의 쓴 잔을 들이키는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박중훈은 저녁마다 가라오케와 스탠드바 밤무대 두 군데를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하면,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충무로 거리를 기웃거리며 기회를 찾았다.
마침 합동영화사에서 이황림 감독의 ‘깜보’(1986)에 출연할 신인배우를 물색하고 있던 차였다. ‘아침마다 꽃병도 갈아드리고, 걸레로 청소도 하고, 동대문지점에 가서 감독님 돈도 찾아드리면서’ 매일 같이 영화사로 출근한 끝에 감독의 눈도장을 받은 박중훈은 소매치기 제비 역을 꿰차며 데뷔하게 된다.
성인관람가 등급을 받은 영화는 2주만에 극장에서 내려갔지만 재기발랄한 신인의 등장을 알렸고, 박중훈은 김혜수와 함께 제23회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때 박중훈은 ‘제2의 안성기가 될 재목’(김종원 영화평론가)라는 평을 듣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로 인연이 되어,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2006)에 이르기까지 네 편의 영화에서 선배 안성기와 환상의 콤비를 이루게 된다.
‘젊음의 행진’과 ‘가족오락관’ 같은 방송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조금씩 인지도를 얻었지만, ‘됴화’(1987) 때는 유지형 감독으로부터 ‘똥배우’라는 혹평을 듣는 등, 신인 배우의 앞길은 험난했다. 그러나 청량감 있는 청춘스타를 발굴하고자 한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에 캐스팅되면서 박중훈의 경력은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개봉날인 7월 4일 ‘종로3가 서울극장의 표를 사려는 관객 줄이 종로2가까지, 그것도 블록에서 한번 꺾여서 더 이어’졌고, 영화는 서울 관객 26만명을 기록하는 큰 성공을 거둔다. 산울림의 주제곡 ‘안녕’이 큰 인기를 모았고, 극 중 철수의 인사말인 ‘미미, 안뇽’은 한 시절을 풍미한 유행어가 되었다.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영화의 성공이 발판이 되어 박중훈은 광고만 해도 청바지 뱅뱅, 롯데 하비스트 비스킷, DJ콘, 에티켓 치약, 삼립 샤우면, 밀키스 등 10개 가량을 동시다발적으로 찍는 톱스타의 반열로 뛰어올랐다. ‘고교얄개’(1976)로 유명한 석래명 감독의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1988), ‘내 사랑 동키호테’(1989)에선 최재성과 더불어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한창이던 암울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박중훈은 고민에 빠진다. “사실 그땐 우울한 시대였는데, 제가 참 가볍다는 생각을 했어요.” 의식 있고 진중한 연기자로의 변신을 모색하던 그에게 때마침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광수 감독으로부터 출연 제안이 들어왔다. 만남을 가진 후 박 감독과의 작업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 직감한 박중훈은 다른 영화 일정을 모두 제쳐두고 13개월간을 온전히 ‘칠수와 만수’에 매달리게 된다.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1988)를 하느라 배역을 거절했던 안성기는 친분이 있던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사장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꿔 촬영이 진행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합류한다. 평소 존경해온 안성기와 합을 맞추게 된 박중훈은 심혈을 기울이며 작품에 임했는데, 가난하고 배고픈 페인트공의 심정에 동화되기 위해 촬영 기간 내내 양말을 빨지 않는가 하면, 리허설에 완벽을 기하느라 정작 본 촬영 때는 맥이 풀려버린 일도 있을 정도였다. 칠수(박중훈)와 만수(안성기)가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장면을 촬영할 땐 예산부족으로 세트제작비가 나오지 않아 안성기와 함께 옥상 철탑 위에 올라가 연기해야 했는데, 이때 현장을 구경하러 온 임권택 감독이 위험천만한 촬영 상황을 보고는 “다들 미쳤구먼” 했다고 한다.
‘칠수와 만수’의 서울 관객수는 7만3,000명에 그쳤지만, 이 작품에서의 연기로 박중훈은 제9회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자연기상을 받으며 면모를 일신했다. 그 뒤로도 박중훈은 박광수 감독과는 ‘그들도 우리처럼’(1990), 장선우 감독과는 ‘우묵배미의 사랑’(1990)을 함께 하며,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영화에도 과감히 얼굴을 내미는 ‘용기 있는 배우’,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민중 배우’로 관객의 사랑을 받게 된다.
당시의 심경을 두고 박중훈은 “평범한 농부가 졸지에 유대인이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또 갑자기 영웅 대접을 받게 되는 ‘25시’(1967)의 앤서니 퀸이 된 듯한 기분”(씨네 21 2009년 4월 17일)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박중훈은 코리안 뉴웨이브의 시대를 열어젖히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영화 '칠수와 만수'.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명세 감독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를 마친 후 박중훈은 ‘귀국하면 세 편의 영화를 함께 한다’는 조건으로 동아수출공사의 후원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테렌스 영 감독의 한국전쟁 영화 ‘오! 인천’(1981)을 보면서 이낙훈 배우의 능숙한 영어 연기에 자극 받았던 그는 언젠가 있을 미국과의 합작에 대비해 영어 연기가 가능한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이는 훗날 ‘양들의 침묵’(1991)의 명장 조너선 드미의 스릴러 ‘찰리의 진실’(2002)에 기용되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뉴욕대 석사를 취득하고 탄탄대로를 내달릴 것 같았던 그의 장래는 복귀작으로 준비하던 ‘들소’를 비롯해 5편의 기획이 연거푸 엎어지면서 뒤엉키게 된다.
SBS 창사특집 드라마 ‘머나먼 쏭바강’(1993~94)의 현지 로케이션 촬영을 마치고 기진맥진한 채 도쿄에서 쉬고 있던 박중훈은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바로 ‘투캅스’(1993)의 출연 제안이었다. 미국 유학의 막바지에 강우석 감독과 추진하던 ‘익스큐즈 미 뉴욕’이 무산되면서 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코미디를 만들려던 감독의 생각과 달리 누아르로 방향을 틀길 원했던 최민수가 이탈하면서 배역은 박중훈에게 돌아갔다.
남산에서 가진 언론 시사회 때부터 폭소를 유발하며 심상찮은 조짐을 예고했던 ‘투캅스’는 피카디리 극장 단관 개봉으로만 87만5,000명이 드는 대박을 찍었다. 박중훈의 유쾌한 코미디 연기는 ‘마누라 죽이기’(1994)와 ‘투캅스 2’(1996)를 거쳐 ‘똑바로 살아라’(1997)와 ‘할렐루야’(1997)까지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이른바 ‘박중훈표 코미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장현수 감독의 누아르 ‘게임의 법칙’(1994)에서 비장미 넘치는 열연을 선보인 바 있지만, 한 해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코미디 연기는 차츰 그를 테크닉에 의존하는 매너리즘의 위기로 몰고 갔다. 그러던 중 1998년, 일본에 체류 중이던 박중훈을 찾아온 이명세 감독은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하며 한 편의 시나리오를 건넸다. 살인범을 추적하는 형사의 이야기로 시나리오가 담고 있는 생생한 묘사에 반한 박중훈은 출연을 승낙했고, 상대인 장성민 역으로 안성기의 캐스팅을 제안한다.
이명세 감독에게서 소개받은 강력반 형사를 따라 한 달간 숙직실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박중훈은 형사들의 생리를 몸으로 익혀나갔다. 신창원이 탈주했을 때 허위신고가 들어오자 스스럼없이 각목과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 출동하거나 직접 범인을 체포했을 만큼. 실제와 연기의 경계가 사라지는 메소드 연기의 나날이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범인을 추적하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우 형사 캐릭터는 그렇게 탄생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