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오면 인종과 국경을 초월해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에 얽힌 이야기
페어 올라 돌레어, 에밀리 돌레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인근 마을 오베른도르프에 있는 목조 가옥과 석조 가옥들 위로 함박눈이 부드럽게 내리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갓 베어온 가문비나무에다 양초와 과일과 견과를 달아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면서 1년 중 가장 성스러운 밤인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을 준비에 바빴다. 이제 곧 오베른도르프의 작은 성당에서 자정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질테고 그러면 신앙심 깊은 마을 사람들은 기도와 찬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할 것이었다. 하지만 1818년 크리스마스 전야의 성니콜라우스성당 안의 분위기는 기쁨에 충만한 것이 아니었다. 요제프 모어 보좌신부(26세)가 방금 오르간이 심하게 고장난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페달을 아무리 힘껏 밟아서 공기를 불어넣어도 낡은 오르간에서는 긁는 듯한 맥빠진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모어신부는 어쩔 줄을 몰랐다. 수리공을 불러봤자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에야 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 젊은 신부는 음악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모어는 음악에 대한 천부적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재봉사와 군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에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해서 돈을 벌었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도 그는 연주를 해서 번 돈으로 살았다. 그의 근면성과 재능에 주목한 한 신부가 신학교에 들어가라고 그를 설득했다. 모어는 1817년에 오베른도르프로 부임해 왔다. 이곳에서 그는 성경의 시편을 강론했을 뿐만 아니라 기타로 민요와 성가를 자유자제로 연주해서 교구민들을 놀라게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난처한 입장에 빠진 이 젊은 신부는 조용한 자기 서재로 갔다. 그는 당시 불리고 있던 캐롤들은 기타로는 연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노래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책상 위에 백지를 펼쳐 놓고 깃털펜을 든 채 최근에 갓난아기를 축복해주기 위해 찾아갔던 한 교구민 가족을 생각했다. 추위를 막아주기 위해 갓난아기를 포근히 감싸 안고 있던 그 어머니의 모습이 그에게 약 2,000년 전 아기예수가 태어나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노랫말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펜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이 움직였다. “교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는 불후의 첫 구절이 백지 위에 나타났다. 젊은 사제는 동시처럼 쉽고 간결한 언어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전하는 여섯 절의 노랫말을 완성했다.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하늘나라에서 곧장 내려온 것 같은 아름답고 경건한 가사였다. 그는 이렇게 노래말을 완성했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자정미사에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서둘러 곡을 붙여야 했다. 모어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로 이웃마을인 아른스도르프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프란츠 크사버 그루버(31세)를 찾아가기로 했다. 작곡에는 그가 자기보다 더 능했기 때문이었다. 모어와는 달리 그루버는 자신의 음악적 열정을 감추고 지내야 했던 사람이었다. 직조공이며 엄격한 성품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음악이 생계를 유지하기에 알맞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루버는 저녁이면 몰래 집을 빠져나와 그 고장의 학교선생님에게 가서 음악레슨을 받곤 했다. 그는 음악에 천부적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그의 아버지는 마음을 바꿔 그가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루버는 음악을 사랑했지만 교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 시절에는 학교선생님은 자신이 사는 고장의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 겸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른스도르프에 교사로 부임한 그루버는 이웃마을에 있는 성니콜라우스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겸 성가대 지휘자가 되었다. 모어는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집으로 그루버를 찾아갔다. 모어는 친구인 그루버에게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이야기했다. 모어는 자신이 금방 지은 노래말을 넘겨주면서 자정미사 때까지 기타의 반주에 맞춰 합창할 수 있는 곡을 붙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루버는 모어신부가 쓴 노랫말을 읽으면서 그 아름답고 경건한 가사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는 피아노에 앉아 작곡을 시작했고 모어는 성당으로 돌아갔다. 그루버는 기본적인 세 가지 화성을 바탕으로 하여 평범하면서도 성스럽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엮어냈다. 그는 그날 저녁에 모어신부에게 악보를 갖다 주었다. 성가대가 연습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모어가 기타를 치면서 테너 파트를 노래하고 그루버가 베이스 파트를 노래하기로 했다. 각 연이 끝날 때마다 성가대가 후렴을 부르기로 했다. 자정이 되자 교구민들이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오르간에서 흘러나오는 장중한 크리스마스 성가가 성당 안에 울려퍼질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무로 만든 비좁은 의자에 앉았을 때 성당 안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모어신부가 통로로 걸어나와서 그루버에게 나와서 자기 옆에 서라고 손짓했다. 기타를 들고 나온 모어신부는 성당에 모인 신자들에게 아마 이렇게 설명했을 것이다. “오르간이 고장났지만 음악이 없이 자정미사를 올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루버선생님과 제가 여러분을 위해 특별한 크리스마스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이어 모어신부의 기타 연주에 맞춰 두 사람의 부드럽고 성령이 풍부한 목소리가 성당 안에 울려퍼졌다. 연이 끝날 때마다 성가대가 후렴을 불렀다. 교구민들은 알프스의 시냇물처럼 신선하고 아름다운 캐럴에 경건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뒤이어 모어신부가 축하미사를 집전했고 신도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성니콜라우스성당의 성탄절미사는 성공리에 끝났다.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락되었다. 모어신부와 그루버는 일시적인 곤경을 면하려고 새로 캐럴을 만들었을 뿐 그 노래를 두고 두고 부를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듬해 봄에 수리공이 와서 성당의 오르간을 고쳤다. 모어신부는 곧 다른 교구로 전근되었다. 몇 년간 그가 만든 크리스마스 캐럴은 잊혀져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성니콜라우스성달의 오르간이 계속 심술을 부렸다. 1824년 또는 1825년에 이 성당은 오르간을 다시 제작하기 위해 카를 마우라허라는 장인을 고용했다. 마우라허는 성당의 다락방에서 일하다가 모어와 그루버가 작사 작곡한 노래의 악보를 발견했다. 이 노래의 간결성이 늙은 오르간 장인을 감동시켰던 것 같다. 성니콜라우스성당의 오르간 제작을 감독하고 있던 그루버는 마우라허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악보를 한 벌 달라고 하자 기꺼이 내주었다. 마우라허는 오베른도르프를 떠나면서 그 악보를 가지고 갔다. 그를 통해서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 노래의 가사와 곡조에 매료되었다. 곧 정기적으로 유럽 곳곳을 순회공연하던 티롤지방의 민속악단들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그들의 연주곡목에 추가하게 되었다. 이런 악단들 가운데 슈트라서가족악단이 있었다. 천사와 같은 목소리를 가진 슈트라서가(家)의 네 남매는 박람회장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면서 가족이 만든 장갑을 팔았다. 1831년 또는 1832년에 슈트라서남매는 독일 라이프치히의 박람회장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아주 좋아했다. 그후 라이프치히의 한 출판업자가 그 악보를 처음 출판하면서 그 노래를 티롤지방의 민요라고 소개했다. 그는 요제프 모어나 프란츠 그루버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이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미국을 여행하면서 공연하는 민요가수 가족인 라이너가족에 의해 대서양을 넘어 미국에까지 전해졌다. 1839년 또는 1840년에 뉴욕에서 라이너가족은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처음으로 이 노래를 소개했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단순한 민요 이상의 노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노래를 하이든이 작곡한 곡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 사는 그루버와 모어는 자기네들이 만든 노래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848년 55세의 모어신부는 폐렴에 걸려 무일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만든 노래가 세계 곳곳에서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루버도 프러시아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궁정악장이 1854년에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가를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이 노래가 널리 불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노래의 작곡, 작사자를 찾는다는 소문에 접한 67세의 노인 그루버는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경위를 알리는 편지를 베를린으로 보냈다. 처음에는 평범한 두 사람이 그토록 인기있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는 학자들이 별로 없었다. 그루버가 세상을 떠난 1863년까지도 그가 이 노래의 작곡자라는 사실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었다. 같은 해, 나중에 미국 플로리다주 감독교회 주교가 된 존 프리먼 영이 이 캐럴의 세 연을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영어 가사로 번역했다.
이제는 이 노래의 원작자가 누구냐에 대한 논쟁은 끝났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모어와 그루버를 기리는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고 그들이 남긴 유산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크리스마스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노던일리노이대학교 교수이자 크리스마스 캐럴 전문가인 윌리엄 E. 스터드웰은 이렇게 말한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크리스마스의 음악적 상징입니다. 실제로 이 크리스마스 캐럴은 세계의 모든 대륙에서 원래 가사가 쓰여진 독일어는 물론이고 웨일스어, 스와힐리어, 아프리칸스어, 한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 수십개 언어로 불려지고 있다. 이 노래는 또한 빙 크로스비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르는 수많은 가수들의 목소리로 취입되어 왔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 단순한 캐럴은 하늘의 평화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힘을 보여 주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인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때 서부전선의 참호 속에서 독일군인들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기 시작하자 비무장지대 건너편에서 영국군 장병들이 따라 불렀다. 역시 제1차세계대전 당시 시베리아의 어느 포로수용소에서 독일군, 오스트리아군, 헝거리군 포로들이 일제히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합창했다.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장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서툰 독일어로 포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밤 나는 전쟁이 일어한 후 처음으로 당신네들과 내가 적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1944년 나치 독일에 점령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어느 고아원을 방문한 독일군 장교가 어린이들에게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독일어 가사를 알고 있는냐고 물었다. 한 소녀와 한 소년이 멈칫거리면서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슈틸레 나흐트, 하일리게 나흐트” 하고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독일군 장교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두 어린이는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슬로바키아의 그 지역에서 독일어를 아는 사람들은 주로 유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공포에 질리는 것을 본 독일군 장교는 그애들을 안심시켰다. “겁내지 말아라” 그는 이 노래의 마력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7년 뒤 한국전쟁 당시 크리스마스 이브에 보초를 서고 있던 존 도스네스라는 젊은 미군 병사는 적군이 접근해보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긴장한 채 소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던 그는 어둠 속에서 한 떼의 한국인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젊은 병사가 놀란 얼굴로 서 있는 동안 그들은 한국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노래했다. 바로 그를 위해 불러주는 노래였다. 노래를 마치자 한국인 성가대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우리 부부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얽힌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코네티것주 레딩에 있는 조합교회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던 밤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자 집사가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그만 흰 양초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한 시간에 걸친 캐럴과 성경 낭송이 끝나자 교회의 조명이 희미해졌다. 목사가 작은 양초를 제단에 켜져 있는 촛불에 갖다대고 불을 붙였다. 목사는 맨 앞줄에 있는 두 사람에게로 걸어가서 그들이 들고 있는 양초에 불을 붙여주었다. 두 사람은 차례로 옆에 앉은 사람에게 촛불을 붙여주었다. 우리는 뒷줄에 앉아서 흔들리는 촛불의 불빛이 한줄 한줄 뒤로 번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파이프오르간이 울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10여 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머나먼 곳에서 태어난 캐럴을 따라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주의 부모 앉아서“ 노래가 끝났을 때 모든 사람들은 촛불의 불빛 속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젊은 신부와 학교 교사인 그의 친구가 176년 전에 처음 이 노래를 부른 이후로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온 그 감동적인 노래말과 단순한 멜로디가 우리들의 가슴속에 울리고 있었다.
첫댓글 고요한밤 거룩한밤 어둠에 묻힌밤 주에 부모 앉아서 기뻐노래 부를때
티롤 지방은 오스트리아 알프스산 아래 조그만 도시 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겅건한 마음으로 가족끼리 오붓하게 보내는
유럽의 전통 명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