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00회 산행을 자축하기 위해 오랫만에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여 모처럼 성황을 이루었다.
일곱명이 산행에 참여하고 다섯명이 회식에 참석하여 모두 열두명이 모였다.
이시영 선생은1868년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17세부터 여러 관직을 역임하시다 국권이 일제에게 피탈되는 과정을 보시고
도산 안창호 선생과 친형인 이회영선생 등과 함께 1907년 신민회를 조직하고, 1910년에는 만주로 망명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자금을 마련을 위해 선생과 그의 6형제가 대대손손 물려받은 명동 일대의 어머어마한 땅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이시영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도 힘썼는데,
이들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의 역할을 담당하시고 자금조달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지만,
정작 이시영선생과 그 가족들은 모든 돈을 독립운동에 투자하게 되며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 안동 임청각의 주인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1945년 광복이 이루어진 후 이시영 선생은 고국으로 돌아와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정부의 부통령을 하게 되는데
이승만의 독재 정권에 실망하여 부통령직을 사임하시고 1953년 4월 19일 서거하셨다.
백범 김구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후반기를 이끌었다.
해방 이후에는 우익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과 경쟁구도를 형성해 1948년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
38선을 무너뜨리고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호 백범(白凡)은 가진것 없는(白) 평범한(凡) 사람이라는 의미란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에는 의사의 어록을 새긴 돌들이 많이 서 있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 해주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점이 가슴에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할아버지 안인수가
응칠(應七)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자임(子任)이란 아명을 지어 주기도 했다.
안중근 일대기는 여기서 보세요(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05XX79100064)
소월詩碑를 돌아 남산순환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순환도로를 따라가다 오른쪽 남측둘레길로 들어선다.
오문효 회원이 준비한 오이와 커피로 요기를 하며 잠시 쉬어간다.
식물원옆 연못을 지나며 인증샷을 남긴다.
비비추가 꽃을 피우고 있다.
북미가 원산지인 로밸리아 꽃이다.
팔도 소나무단지를 지나며 첫 번째 충청도 소나무 중 정이품송 장자목 앞에서 기념촬영
예보대로 비가 내린다. 국립극장 옆길을 지난다
석호정을 가기전 남산 소나무 힐링숲길을 돌아본다. 500m 정도라 얼른 돌아 나온다.
석호정을 지나 장충단공원으로 하산하는데 계단길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다.
장충단공원으로 들어가는 길 익숙치 않은 하얀꽃이 반겨준다.
찾아보니 북미 원산의 "실유카"라는 용설란과 식물이다.
수표교를 지나고 장충체육관 교차로를 건너면 족발집이다. 기다리고 있던 박박사가 연락이 왔다.
족발집에서 포식하고 추가로 맥주집에서 마무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