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 유라시아 대륙을 일주하는 버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장 루이 볼프,최미애씨 부부.딸 릴라,개 ‘꼬꼿 ’과 함께,지난 11개월 동안 동고동락한 버스에서 얼굴을 내민 채 활짝 웃고있다.이들의 다음 목표는 전국을 버스로 도는 것이다.
/이기원기자
“미애의 고향(서울)에서 내 고향(파리)까지 여행을 하면서 지구촌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 한 번 둘러볼까?”(루이), “그게 가능하겠어?”(미애), “시도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말도 안돼, 우리 버스를 타고 그냥 떠나 보자.”(루이).
장 루이 볼프(프랑스인·40), 최미애(37)씨 부부는 두 자녀와 함께 지난해 여름 유라시아 대륙 일주 여행길에 올랐다. 즉흥적으로 던진 루이의 말이 ‘불씨’가 돼 11개월을 꼬박 채운 4가족의 화려한 ‘유랑생활’이 시작된 것. 도시 생활에 찌든 이들로선 결코 느낄 수 없는 삶의 짙은 향내를 이들은 경험했다. 아들 구름(9)과 딸 릴라(3)에게도 평생을 지배할 소중한 추억의 순간들이었다.
프랑스인 패션 사진작가 루이와 모델 출신 메이크업 아티스트 미애는 지난 89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셔터’를 누르는 사람과 ‘피사체’로 인연을 맺은 이들은 일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분방한 사고를 지닌 서로에게 무작정 끌리면서 92년 결혼했다. 그 후 6년간 홍콩, 일본을 전전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다 지난 98년 한국에 정착했다.
서울 이태원에 ‘아뜰리에 고구려’라는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착실’하게 살아온 이들은 지난해 1월 스튜디오 겸용 버스를 구입하면서 ‘방랑기질’이 슬슬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루이의 여행 제안을 미애가 주저없이 받아들였던 것은 이미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살기 좋은 곳에 정착하고 싶었어요. 결국은 한국이 최고라는 것을 깨달았지만…”(미애), “두 사람의 고향을 왕복하는 여행은 언젠가 꼭 한 번 다녀와야하는 우리의 숙명 같은 것이었어요.”(루이).
▲사진설명 : 루이 ·미애부부가 카메라에 담은 여행 중의 표정들.위로부터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가고 있는 루이 가족의 버스(2001년 9월),티벳 라사의 초원에 주차한 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한 미애와 두 자녀 구름,릴라(2002년 6월),인도 라자스탄에서 촬영한 현지의 아이들(2002년 4월).
‘방랑’을 결심한 루이 가족은 우선 스튜디오의 각종 장비를 팔아치워 버스를 변신시켰다. 1000만원을 주고 산 중고버스는 두 달만에 냉장고, 에어컨, 컴퓨터, 침대, 목욕탕, 부엌을 겸비한 훌륭한 캠핑카로 새로 태어났다. 그리고 지난해 8월 30일 인천항에서 중국 대련항으로 향하는 훼리호에 버스를 실으면서 이들의 장도는 시작됐다. 가족 같은 개 ‘꼬꼿’(그레이트 데인 종)도 함께였다. 중국, 몽고, 러시아, 이탈리아 등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것은 12월. 돌아올 때는 이란, 인도, 네팔 등을 경유해 지난 13일 서울에 돌아왔다.
만만치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예상 외의 난관은 언제나 이들을 따라다녔다. 카자흐스탄에서는 6m 낭떠러지에서 차가 굴러 떨어질 뻔했고, 키르기스탄에서는 술에 취해 쇠파이프를 든 사람들이 탄 5대의 지프차가 뒤를 쫓아와 필사적으로 탈출해야 했다. 고산병으로 생겨나는 극심한 두통이나 한겨울에 물탱크가 얼어 10여일씩 몸을 씻을 수 없었던 것은 너털 웃음으로 털어버린 ‘별 것 아닌’ 일이었다. ‘까르네’(Carnet·버스로 육로여행을 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파키스탄 국경에서 15일간 꼼짝 못하고 묶여있었던 적도 있었다.
가슴 아픈 일도 적지 않았다. 카자흐스탄 악토베의 시장바닥에서 만난 칠순이 넘은 고려인 할머니가 털어놓는 가슴 아픈 개인사에 미애는 10일이 넘도록 잠자리에서 혼자 눈물 흘려야 했다. 버스를 멈출 때마다 몰려들어 구걸하는 수백명 인파의 가여운 모습을 보는 것도 마음이 아팠다.
여행중 루이는 매일 아침 8시 30분부터 3시간 동안 아들 구름이에게 산수와 불어를 가르쳤고, 운전과 차 수리를 도맡아 든든한 가족의 ‘수호자’가 됐다. 구름이는 가는 동네마다 여기저기 쏘다니며 현지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기어다니던 릴라는 몇 개월새 자연의 자양분을 듬뿍 내려받아 두 발로 세상을 딛고 섰다. 미애는 온갖 잡다한 일을 꼼꼼하게 챙기며, 두 아이와 ‘꼬꼿’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일을 책임졌다.
중국 툰황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뒤집힌 경운기에 깔려 머리를 심하게 다친 농부를 버스에 태워 2시간 거리에 있는 시내 병원에 데려갔던 것. 오지인데다 다른 차량도 없어 사고를 당한 농부는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가 이들 때문에 생명을 건졌다.
한 화장품 업체의 지원을 받아 ‘뷰티 프로젝트’란 사진 작업도 병행했다. 중앙아시아 지역 다양한 여인들의 ‘메이크업’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작업이다. 루이는 디지털 카메라로 현지인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곧바로 프린터로 현상해주면서 그들의 삶에 조그만 희열을 안겨주기도 했다. 문명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삶을 일궈가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루이와 미애에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었다.
중국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훼리에서 미애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다. 단지 사는 방식이 다를 뿐. 빈부의 차이를 빼고는 지구촌 어느 곳이나…. 내가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불쌍하다’고 느꼈던 사람들은 정작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루이와 미애는 잠시 ‘정상적’인 생활을 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전국일주를 할 계획이다. 이번에는 각지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 튼튼한 액자에 넣어주고 싶단다. 중앙아시아의 대평원만큼 탁 트인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루이 가족의 여행 코스. 지난 2001년 8월 29일 인천항에서 훼리호를 타고 중국 다롄항에 도착했다. 물론 버스도 배에 함께 실었다. 중국 베이징을 거쳐 키르기스탄 비슈케크, 카자흐스탄 악토베, 러시아 볼고그라드, 터키 이스탄불, 그리스 테살로니키, 이탈리아 나폴리, 로마를 경유한 끝에 같은 해 12월 5일 루이의 고향인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루이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이들은 해를 넘긴 2002년 2월 2일 다시 서울을 향해 떠났다. 터키까지 온 뒤, 이란 테헤란,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인도 델리, 봄베이, 뉴델리, 네팔 카트만두, 중국 칭다오, 시안을 돌며 모험을 계속했다. 톈진에서 떠나는 훼리호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7월 13일.
이들이 충고하는 여행 수칙은 이렇다. 오지를 지날 때는 화려한 복장을 삼가고 그 지역 사람들과 비슷한 차림새로 융화될 것, 각 나라의 국경을 지날 때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말고 항상 당당할 것, 비상약은 반드시 챙기고 물은 정화제를 뿌려서 마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