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
재 직 기 간 |
이 름 |
원 명 |
생 몰 년 도 |
비 고 | ||
제 1대 |
1831. 9. 9. ~1835.11.21. |
소 蘇 |
Barthelemy, Bruguiere |
1792. 2.12. ~1835.11.21.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병사 | ||
제 2대 |
1836. 4.26. ~1839. 9.21. |
범세형 笵世亨 |
Laurent, Imbert |
1796. 3.23. ~1839. 9.21.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순교 | ||
제 3대 |
1843.12.31. ~1853. 2. 3. |
고 高 |
Joannes, Ferreol |
1808.12.27. ~1853. 2. 3.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병사 | ||
제 4대 |
1854. 8. 5. ~1866. 3. 7. |
장경일 張敬一 |
Simeon, Berneux |
1814. 5.14. ~1866. 3. 7.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순교 | ||
제 5대 |
1866. 3. 9. ~1866. 3.30. |
안돈이 安敦伊 |
Antoine, Daveluy |
1818. 2.16. ~1866. 3.30.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순교 | ||
제 6대 |
1869. 4. 27. ~1884. 6.20. |
이복명 李福明 |
Felix, Ridel |
1830. 7. 7. ~1884. 6.20.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 ||
제 7대 |
1884. 6.20. ~1890. 2.21. |
백규삼 白圭三 |
Jean, Blang |
1884. 5. 6. ~1890. 2.21.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 ||
제 8대 |
1890. 9. 2. ~1933. 1.23. |
민덕효 閔德孝 |
Gustave, Mutel |
1854. 3. 8. ~1933. 1.23.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 ||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대구대목구로 분할 | |||||||
서울 초대 |
1933. 1. ~1942. 1.12. |
원형근 元亨根 |
Adrianus, Larribeau |
1883. 2. 4. ~1874. 8.12.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 ||
서울2대 |
1942. 1.12. ~1967. 3.24. |
노기남 盧基南 |
Paul, Ro |
1902. 1.22. ~1984. 6.25. |
서울대주교, | ||
1962. 3. 10. 서울대목구․대구대목구․광주대목구를 대교구로 승격 | |||||||
서울3대 |
1967. 3.24. ~1968. 4.27. |
윤공희 尹恭熙 |
Victorius, Youn |
1924.11. 8. ~ |
교구장서리 | ||
서울4대 |
1968. 4.27. ~1998. 5.29 |
김수환 金壽煥 |
Stephen, Kim |
1922. 5. 8. ~ |
서울대주교, 추기경 은퇴 | ||
서울5대 |
1998. 5.29. ~현제 |
정진석 鄭鎭奭 |
Nicholas, Cheung |
1931.12. 7. ~ |
메리놀회 서울대주교 |
성지순례 전례시작
◉ 성지순례 전례
◉ 103위 한국 성인 호칭 기도
◐ 오늘 순례 할 성지와 관련된 한국 교회사 설명
◉ 제 2차 단내성지, 어농, 천진암 강학터, 남한산성성지.
어농성지는 윤유일 바오로 가문의 묘역으로 동료 순교자들의 가묘를 조성하여 성역화 되어있다. 윤유일은 평신도들에 의해 창설된 한국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첫 번째 밀사로 두 번이나 북경교회에 파견되었고, 또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두 번째로 의주 변문에 가서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에 본당이 설정된 것이다. 그러나 5개월만에 진사 한영익에 의해 주문모 신부 입국이 밀고되었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 나무 광으로 급히 피신하였다. 이 고발에 따라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인도하였다는 죄목으로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1795년 6월 28일 잡히던 그 날로 매를 맞아 장살로 순교하여 강물에 던져졌다.
어농성지에는 주문모 야고버 신부와 윤유일 바오로의 동상이 건립되었고, 윤유일 바오로의 순교 200주년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리고 윤유일의 묘와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강완숙 골롬바와 주문모 야고보 신부 등 순교자들의 가묘를 비롯하여 유소사, 정광수, 윤운혜, 윤점혜 등 윤유일 가문의 순교자 가묘가 조성되어 있고, 다만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 순교자의 묘만 시신이 묻혀있다.
단내성지는 1866년 11월 13일 남한 산성에서 백지사로 순교한, 정은(鄭溵) 바오로의 묘가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 단내에 있다. 정은 바오로의 가족들은 남한산성 동문 옆 수구문에서 밤에 등창을 앓은 흔적을 확인하고 시신을 찾아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바오로의 재종손 정 베드로의 시신도 찾으려 했으나, 어두운 밤이라 많은 시신들 가운데서 그의 시신은 찾지 못하여 1995년에 가묘를 조성하였다. 정은 바오로의 후손들 중에는 4명의 신부가 배출되었다.
천진암에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그스티노 성인의 묘역이 주차장 오른편 골짜기에 모셔져있다.
실학운동의 선구자 성호 이익(星湖李瀷) 선생은 권일신을 사위로 맞아, 그에게 실학사상과 천주실의라는 책을 전해 주었다. 권일신과 형 권철신은 개국공신 권근(権近)의 후손으로 명문대가의 자손이며 남인의 대학자이다. 정약용(丁若鏞)의 형제들과 이익 선생의 손자인 이가환(李家煥)과 이벽(李檗=李徳祚) 권상학(権相学), 권상문(権相問), 김원성(金源星), 이총억(李寵億) 이승훈(李承薫), 권일신(権日身) 등은 1779년까지 권철신이 주관하던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였고, 이들은 학문적 지식에서 종교적 교리를 연구하여 1779년 정약전은 십계명가를 지었고, 이벽은 천주 공경가를 지었다. 천진암 강학회가 주춧돌이 되어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게 된다. 천진암에서 열린 강학회는 서울 명례방에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데 산실 역할을 한곳이다.
남한산성성지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 한가지 때문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병인양요 이후 그 당시 광주, 양주, 용인, 이천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이 치명 당한 곳이다. 남한산성은 성남과 광주를 잇는 길 하나밖에 없다. 여기에는 동문과 남문이 있는데 동문으로 들어가 몇 발짝 걸어가면 순교지가 있다.
이곳에서 1791년, 1801년, 1839년, 1866년에 천주교 신자들이 네 차례 큰 박해 때마다 처형당하였다. 한덕운, 김덕심, 정은 바오로, 정 베드로 등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44위이고 무명 순교자는 350여명으로 추산된다.
제 2차 코스
어농 성지
성지 설명 |
소재지 :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
어농성지는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가문의 묘역으로, 윤유일 동료 순교자들의 가묘를 조성하여 성역화 되어 있다.
이 어농성지를 찾아가려면 신갈 을 경유해 양지 톨게이트에서 죽산 방향으로 가다가 백암을 지나 방초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이천방향으로 십리쯤 가다가 모가면 어농리 입구에 성지 표지가 있다.
수학을 연구하던 이승훈은, 서장관인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가게된 기회를 이용하여, 수학에 박식한 그라몽 신부를 만나 필담(筆談)으로 교리를 배우고 조선에 반석이 되라는 베드로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1784년 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측근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주었고, 세례 받은 사람들은 명례방에 모여 신앙공동체 집회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조선에 교회가 창설되어 북경교구 관할인 조선에 첫 공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을사 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 집주인 김범우는 귀양가서 죽고 명례방 신앙공동체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얼마 후 명례방 사건이 잠잠해지자 이승훈은 북경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1786년 교회를 재건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10명의 신자를 신부로 임명하고 각 지방에 파견하여 성사와 미사를 집전 하였다.
그런데 전라도의 유항검은 교회 서적에서 자기들이 행하고 있던 성직 행위가 독성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성사 집행을 중지시키는 한편 권일신의 제자였던 윤유일을 밀사로 북경에 파견하여 평신도의 성직 행위 등을 문의하게 된 것이다.
윤유일 바오로는 여주지방의 양반 집 후손으로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제자였다. 성격이 온순하고 친절하며 비밀을 잘 지키므로 이 사업의 적임자였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락하여 주교께 드리는 편지를 지니고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1789년 10월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전념하였고 여행경험이 없는 그는, 낯모르는 동행인들 가운데 외로운 존재로 작은 어려움도 훨씬 더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직업을 가진 것처럼 꾸미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걸어서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주교를 찾아가 자기가 가지고 온 편지와 조선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자세하게 전해 주었다. 그의 도착은 북경교회에 큰 기쁨을 주었다. 윤유일은 북경에서 구베아 주교를 만나 필담(筆談)으로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이라는 조상 제사에 대하여 문의했다. 사사여사생이란 말은 죽은 조상 섬기기를 산사람과 똑같이 한다는 뜻인데 정성껏 제사 지내는 것이 천주 공경의 위반되는 행위는 아니었지만 이 말을 잘못 이해한 주교는 “그러면 죽은 사람에게 밥을 주면 먹느냐? 술을 따라 주면 마시느냐?” 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니 그런 제사는 지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서 필담의 미흡으로 생긴 일이다. 주교가 회신으로 보낸 사목교서에는 가성직제도(仮聖職制度)의 책망과 미신 행위 근절, 유교 제사 금지 등에 대해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1790 봄에 윤유일 바오로는 사신 행차를 따라 귀국 길에 올랐다. 그는 북경에서 영세와 성체와 견진 성사를 받았고 아무 어려움도 당하지 않고 서울에 무사히 돌아왔다.
윤유일은 명주 조각에 쓴 8.000자에 달하는 사목교서를 옷 속에 감추고 온 편지를 내 놓았다. 그 내용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함부로 사제직에 개입한데 대한 책망이 있었다. 신품성사를 받지 않았으므로 영세를 제외한 모든 성사는 절대로 행할 수 없다고 설명하면서,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미신자를 입교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계속하라고 격려하였다.
신자들은 이 편지의 내용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가성직 수행을 중단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더욱 사제에게 성사 받을 마음이 간절하였다.
마침 1790년 9월에 80회 탄신을 맞는 건륭 황제를 축하하기 위한 별사 일행이 또 떠날 참이었다. 그래서 윤유일 바오로는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두 번째 여행에는 우(禹) 라는 예비 신자를 동반하고 북경에 가서 주교께 편지를 전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학식 있고 열성 있는 선교사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조선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그들에게 신부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 어떤 모양으로 신부가 국경에 나타날 것인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마침내 윤유일은 두 번째로 의주에 가서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에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에 본당이 설정된 것이다. 그러나 5개월만에 진사 한영익에 의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것이 밀고되었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 나무 광으로 급히 피신하였다. 이 고발에 따라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인도하였다는 죄목으로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1795년 6월 28일 잡히던 그 날로 매를 맞아 장살로 순교하여 강물에 던져졌다.
어농리에는 주문모 야고버 신부와 윤유일 바오로의 동상이 건립되었고, 윤유일 바오로의 순교 200주년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리고 윤유일의 묘와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강완숙 골롬바와 주문모 야고보 신부 등 순교자들의 가묘를 비롯하여 유소사 정광수 윤운혜 윤점혜 등 윤유일 가문의 순교자 가묘가 조성되어 있고, 다만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 순교자의 묘만 시신이 묻혀있다.
이때 구베아 주교가 보낸 사목교서로 인해 제사 문제가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일부에선 천주교를 배척하는가 하면, 더욱 깊은 신앙으로 믿음을 증거하는 순교자까지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1791년에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権尚然)이 순교한 신해박해이다.
성가 419. 밀알 하나가
이천 땅에서 출생한 성인 성녀
○ 이문우 요한 성인님. (이천. 당고개. 1840. 2. 1. 31세. 회장)
○ 이 아가타 성녀님. (이천. 서소문. 1839. 5.24. 55세. 과부)
○ 조증이 바르바라 성녀님. (이천. 서소문. 1839.12.29. 57세. )
○ 이호영 베드로 성인님. (이천. 형조옥. 1838.11.25. 35세. 회장)
수원교구 시복시성 선정 제출자,(18명)
윤유일(바오로), 최인길(마티아), 지황(사바), 주문모(야고보)신부, 윤유오(야고보), 윤점혜(아가타), 윤운혜(루치아), 정광수(바르나바) 강완숙(골롬바), 심아기(바르바라), 원경도(요한), 이중배(마르티노), 정순매(바르바라),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조용삼(베드로), 최창주(마르첼리노), 한덕운(토마스), 홍필주(필립보).
성가 68. 기쁨과 평화 넘치는 곳
북경교회에 윤유일 파견 |
說明 |
서울에서는 최관천(崔貫泉) 요한이 집 한 채를 세내어 성사를 거행케 하였다. 그는 활동적이고 몹시 총명하여 신부들을 영접하고 교우들을 준비시키는 등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그는 귀찮음과 피곤함도 꺼리지 않고 밤낮으로 이 직분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교회의 총회장 격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았으나, 자기 집에서 행하여지는 많은 집회를 반대하기는커녕 도리어 할 수 있는 대로 그 일을 두둔하고 보호하였다.
임기 응변의 이 조선 성직자들은 1786년부터 많은 성과를 거두며 완전한 선의로 거의 2년 동안 이렇게 그 직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기유(1789)년에, 교회 서적의 어떤 구절을 더 자세히 연구한 결과, 주교와 신부들은 자기들이 선출하여 행하는 그 직품(職品)의 유효성에 대한 중대한 의혹이 생겨났다. 그들은 일체의 성직 수행을 경솔한 처사로 생각하여 즉시 중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문제에 대하여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의하였다. 모든 신자들 앞에서 그런 직위에 올랐다가 일반의 웃음거리가 될 염려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즉시 그 직위를 버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올바르고 진실한 신앙이었으므로, 어떠한 구실로도 거룩한 것을 모독할 위험을 당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즉시 평신도 자리로 돌아갔고, 그때부터 신입 교우들을 가르치고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는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썼고, 그것을 확실히 전달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때 조선의 연례 사신행차가 자연스러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중국 천주교회와 필연적으로 비밀을 지키며 연락을 취하는 위험한 사명을 맡고자 하는 유능하고 헌신적인 인물을 찾아내야만 하였다. 사신 일행에는 천주교 신자가 없었으므로 외교인들 모르게 신자 한사람을 거기에 드려보내도록 해야만 하였다. 이 중요한 사명을 위하여 예비신자 윤유일 바오로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여주(麗州)지방의 양반집 후손으로 권씨 집의 제자였고,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그에게 교리를 가르쳤었다. 그의 성격이 온순하고 친절하며 비밀을 잘 지키므로 계획된 이 사업의 적임자였다. 그는 그에게 맡기는 사명을 수락하여 주교께 드리는 편지를 지니고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1789년 10월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서울서 북경까지는 3천리 길이다. 겨울 동안에 외국 땅에서의 긴 여행은 매우 고생스럽고 위험이 동반된다. 사신 일행 중에 여러 사람이 여행 도중 걸린 병으로 인하여 쓰러지는 것을 보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전념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기만 하였던 사람으로써 여행 경험도 없고, 또 낯모르는 동행들 가운데서 인간의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이 외로운 존재인 윤유일 바오로에게는 작은 어려움도 훨씬 더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직업을 가진 것처럼 꾸미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걸어서 길을 가야 하였다. 마침내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전능하신 은총으로 지탱되어 다행스럽게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곧 주교를 찾아가 자기가 가져온 편지를 전해 드리고, 조선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과 새로 태어나는 천주교인 집단의 기쁨과 고민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뜻하지 않은 윤유일 바오로의 도착은 북경교회에 큰 기쁨을 주었다. 어떤 선교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한 일이 없는 나라에, 신앙이 얼마나 기묘하게 보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 예비신자의 존재는, 선교사들과 특히 구베아(Gouvea)주교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었다. 주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이 새로운 양들에게 서둘러 사목교서를 썼다.
1790 경술년 봄에 윤유일 바오로는 사신 행차를 따라 귀국 길에 올랐다. 그는 북경에서 영세와 성체와 견진 성사를 받았다. 이 천상의 도움으로 힘을 얻은 그는 모든 어려운 고비를 교묘하게 벗어날 수 있었고, 의심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어떤 어려움도 당하지 않고 서울에 무사히 돌아왔다.
주교의 회답은 윤유일 바오로가 그것을 옷 속에 감추어서 확실하고 쉽게 조선에 들여올 수 있도록 명주 조각에 쓰여졌다. 편지를 받을 사람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사베리오로 되어 있었다.
주교는 우선 신앙에 불러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대하여, 지극히 착하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천주께 감사를 드리라고 신입 교우들을 권면 하였다. 그는 또한 복음의 은총을 보존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을 쓸 것과 항구한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하였다. 믿을 교리와 천주교 윤리의 간단한 설명이 있었고,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함부로 사제직에 개입한데 대한 책망이 있었다. 주교는 그들이 신품 성사를 받지 않았으므로 미사 성제를 거행할 수 없고, 영세를 제외한 성사를 절대로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미신자들을 입교시킴으로써 하느님께 대단히 기쁜 일을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동을 꾸준히 계속하라고 격려하였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이 답장에서 아무런 의심도 남겨 놓지 않았다. 이 편지는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려졌고, 각자는 성직 수행을 중단하는 슬기를 가졌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조선 교우들은 성사 받을 마음이 간절하였다. 윤유일 바오로가 북경에서 본 성당과, 복음을 전하러 땅의 극변에서 온 서양 선교사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그가 받은 성사에 대하여 말하는 이야기에 흥분한 신자들은 북경 주교께 새로운 편지를 보내고, 전교를 받아드린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성사를 거행함으로 그들을 힘있게 해줄 수 있는 신부를 보내달라고 간청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기회가 좋았었다. 1790년 9월에 80회 탄신을 맞는 건륭 황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별사(別使) 일행이 떠날 참이었다.
그래서 윤유일 바오로는 다시 중국 길을 떠났다. 이 두 번째 여행에는 우(禹)라는 예비 신자가 동반하였는데, 이 사람은 조선왕의 관리로서 왕의 명령을 받고 북경에서 몇 가지 물건을 사 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아무 사고도 없이 북경에 도착하여 동포들의 편지를 주교께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목자를 얻기 위한 신입 교우들의 간청 외에, 자기들끼리의 계약 관계와 미신과 조상숭배와 그밖에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대한 여러 질문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주교는 학식 있고 열성 있는 선교사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조선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그들에게 신부를 보내 주겠다는 언약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신부의 입국을 준비하고 도울 수 있도록 했다. 어느 시기에 어떤 모양으로 그 신부가 국경에 나타날 것인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예비 신자 우(禹)는 성세를 받고 본명을 요한 세자라고 하였다. 그는 성작 한 개, 미사 경본 한 권, 성인 유해가 들어 있는 성석(聖石) 한 개, 제의 등 미사 성제 거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다. 그는 또 선교사가 도착할 때 모든 준비를 갖추기 위해 포도로 술 만드는 법까지 배워 왔다.
윤유일 바오로와 우 요한 세자는 10월에 북경을 떠났다. 그들은 무사히 귀국하여 주교의 편지와 그들이 받아 가지고 온 물건들을 전하였다. 새로 나는 교회는 머지 않아 신부를 모시게 된다는 희망으로 기뻐 용약 하였다. 그러나 미신과 조상숭배에 대한 제사문제는 여러 사람에 있어서 걸려 넘어지는 꼴이 되고 배교의 원인이 되었다.
성가 61. 주 예수와 바꿀 수 없네
이호영과 이 아가다의 고문 |
說明 |
내가 알기로는 서울 밖에서 신앙을 위하여 붙잡힌 신자들이 아무런 학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양식과 옷이 없어 고생합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내가 작년에 마카오로 보낸 세 학생 중 하나의 형인데, 관장이 마음대로 나가 거닐며 옥 밖에서 일하되, 다만 저녁에 옥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는 허락을 받았었는데 탈출하였습니다. 이 탈옥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무슨 화가 미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갇혀 있는 다른 교우들을 더 엄중히 감시한다는 말도 못 들었습니다. 지난 12월 13일 서울에서 옥에 갇힌 교우들이 신문을 받고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중 한사람이 그 상황을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11월 6일 일상 신문하는 시간인 오후 2시에 나와 내 누님(이호영 베드로와 그의 누님 이 아가다)은 옥에서 끌려나가 관아에 출두하였습니다. 좌우에 몽둥이를 든 포졸들을 많이 거느린 당상관이 앉아 있었습니다. 관장이 내 이름을 묻고 덧붙였습니다.
“사교는 부모께 대한 효도에 어긋날 뿐 아니라, 조선 조정에서 금하고 있는데 너는 어째서 그 도를 받들고 있느냐?”
“천주교는 결코 사교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천주교 신자들은 임금님을 공경하고, 부모님도 정이 들어 사랑하고 남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도리를 가지고 누가 부모께 대한 효도에 어긋난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한문을 읽을 줄 아느냐?”
“모릅니다.”
“글도 읽을 줄 모르면서 어떻게 그 교리를 배웠느냐?”
“이 교를 받들기 위해서는 한문 글자를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언문으로 번역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것을 배우는 것이 무엇이 어려웠겠습니까?”
“너 몇 살이냐? 너는 부모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데, 누가 보든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는 개나 도야지 보다도 더 못한 것이니 죽어야 마땅하다. 네가 믿는 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죽기가 원이란 말이냐?”
“그 제사는 헛되고 쓸데없는 것이 확실하고, 또 헛된 것과 그릇된 것을 버리고 진리를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위하여 상을 차려 놓고, 그 분들이 주무시면서 잡수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 분들이 돌아가신 뒤에 잡수시기를 바라는 것은 그보다 더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영혼은 제 자리로 돌아가고 육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시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혼은 신령 체이니, 육체처럼 음식을 먹고살지 못합니다. 천주의 계명은 좋은 것이고 그것을 지키면 공로가 됩니다. 자기 임금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반역자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과 천신과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왕 중의 왕이시며 인류의 공통된 아버지로서 비와 이슬을 마음대로 내리시고, 아주 작은 풀에서부터 아주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라게 하시며, 그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그 분을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는 자는 더구나 반역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천주를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관장은 다시 말했다.
“그래 분명히 네가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 교를 사형으로 금하고 있다. 그리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째서 헛되고 쓸데없단 말이냐. 천주의 그림 앞에서 무릎을 끓는 것 역시 헛되고 쓸데없는 것이 아니냐. 어째서 부모의 화상에도 마찬가지로 절을 하지 않느냐.”
“천주는 전능하시고 무한히 착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천주를 흠숭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특별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너는 혼자서 말하고 있으니 네 말을 믿는 자가 누구이며, 네 말을 옳다고 할 자가 누가 있겠느냐. 누가 이 교리를 네게 가르쳤느냐?”
“제 집에 책이 있어서 그것을 배웠습니다.”
“누가 네 선생이었는지 말 못 하겠느냐?”
“서소문 밖에 살던 이 모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느냐?”
“아닙니다. 전라도의 수부 전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어째서 네 결심을 바꾸지 않느냐?”
“어떻게 거룩한 결심을 나쁜 결심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내 책이 들어 있는 작은 봇짐을 묶어서 관장에게로 가져갔습니다. 다음에 신문을 받은 누님도 진리에 대하여 같은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관장은 우리들을 몹시 매질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포졸들이 그의 명을 집행하는 동안 소리쳤습니다.
“결심을 바꾸겠느냐. 네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겠느냐 매가 아프지 않으냐?”
“매가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결심을 바꾸어라.”
“못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천주교 책을 읽었을 적에 결심을 바꾸었으니 이제는 다시 바꾸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다시 결심을 바꾸지 않겠단 말이냐?”
“무지 속에서 진리를 보았으니, 그것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포졸들은 쉴 사이 없이 매를 때리고 우리들은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줄곧 부르고 있었습니다. 관장은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죽기로 결심했단 말이냐?”
“저희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신 없는 놈들이로구나. 너희는 이내 죽었으면 하겠지만, 죽기 전에 매를 한없이 맞아야 한다.”
마침내 그들은 매를 멈추었다. 그러나 기진맥진하여 칼을 씌운 머리가 축 늘어진 누님은 여전히 순교를 갈망하여 끊임없이 주님의 도우심을 청했습니다. 이 위에 쓴 것은 모두 많은 사람이 보고들은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더 길게 쓸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 가득한 수 없는 생각을 펼쳐 놓을 수가 없습니다. 몹시 찢어진 내 다리는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천주의 은혜로 아직까지는 많은 고통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교우 여러분이 평안하시기를 빌며 소식 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11월 29일 이호영 베드로.
성가 436. 주 날개 밑
이문우 성인이 양친께 드리는 편지 |
說明 |
저는 형조로 옮겨졌습니다. 거기서 남녀 교우 10여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저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거기 갇혀 있으면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형제 자매와 같이 이렇게 서로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이며 이런 은혜를 어떻게 넉넉히 천주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관원이 아무 신문도 하지 안은 채 2․3개월이 지나므로 저는 슬프고 불안했습니다. 순전히 악의로 천주의 마음을 그렇게도 자주 상해 드린 제 평생의 죄들이, 마치 산더미 같이 제 앞에 나타나므로 저는 혼자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가.’ 그렇지만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12월 10일에 형관 앞에 출두하여 기막힌 곤장을 맞았습니다. 제 힘만 가지고는 어떻게 그것을 견디어 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의 힘과 성모 마리아와 천신, 성인들과 우리 모든 순교자들의 전구 하심으로 지탱되어, 거의 괴로움을 당하지 않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은혜를 도저히 갚을 길이 없으니 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제 행동이 극히 불규칙적이고, 제 힘이라고는 아주 없으므로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천주 앞에서 왜 불안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주께서는 그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사람이 되신 천주 성자는 33년 동안 수많은 괴로움을 당하시고, 세세 만대에 모든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불행하게도 일생 동안에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에게 감사드릴 줄을 몰랐습니다. 저는 천주를 위하여 털끝 만한 덕행도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보다도 변덕스럽게 천주의 마음을 상해 드리고 그분을 배반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허송 세월만 보낼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다지도 어리석고 배은망덕할 수가 있었는지요.
이 세상 생명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육신은 아주 허무한 물건입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난 다음 10일쯤 지났을 때에 그 시체를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하고 애처로운 물건입니까. 코는 그 썩은 냄새를 견딜 수가 없고, 눈, 귀, 코, 입을 구별할 수가 없게 되며, 온 육체가 분해되는 과정에 있어 뼈 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찔해집니다. 아 아! 그런데도 이런 육체를 위해 무슨 짓을 해서든지 잘 먹이고 곱게 입히려고 하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정욕과 옳지 못한 경향을 어루만져 주고, 야심과 재산과 안락과 쾌락에 대한 그 욕망을 모두 쫓아갑니다. 육신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마귀의 종이 되고, 참다운 고향의 영원한 행복을 잊어버리며, 온 마음과 온 힘을 기울여 버러지의 밥이 될 이 물건을 떠받들고, 죽지 않는 영혼이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불에 타게 된다는 것에는 떨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짐승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그보다도 짐승은 구해야 할 영혼이 없지만, 영혼이 있는 인간이 이렇게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어떻게 뒤에 따라올 무서운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습니까.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니, 이 생명이 다한 뒤에는 무서운 후회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미친 듯한 마음으로 천당을 하직하고 슬픔을 한아름 안고 지옥으로 내려갈 때는 거기에서 빠져 나올 무슨 방법이 있는 것입니까. 그 다음에는 누구에게 살려 달라고 하겠습니까. 보기 흉한 마귀의 종이 되어 집어삼킬 듯한 불 속에 끊임없이 있게 되니 얼마나 무서운 처지입니까. 저는 제가 지은 죄로 인하여 오래 전부터 이 영원한 벌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지금까지 목숨을 보존하여 주신 이상, 저는 죄를 미워하여 사하심을 얻도록 할 생각입니다.
기해박해는 일찍이 이 나라에 있었던 것 중에 가장 심한 것입니다. 죽음으로 천주를 증명하고 천주교의 영광을 높이 드러낸 분들의 수효가 어떻게나 많은지, 성교회가 틀림없이 보존되겠지마는 남아 있는 교우들의 신앙은 얼마나 나약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기운은 다하고 마치 힘이 꺾인 것 같아 흔들리고 배교하고 쓰러집니다.
이제는 아무 약도 없다고 그들은 말하며 냉담과 심약으로 밀려나 도로 외교인이 될 지경에 있는 것 같습니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천주교인이라고 말했으며, 무슨 희망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같은 이교 나라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까?
그러니 제발 노력을 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써서 육신, 세속, 마귀, 이 세 가지 원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 육신입니다. 열심히 독서를 하고 기도 드리십시오. 적당한 시간을 골라 묵상에 전념하고 그것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성로 신공(십자가의 길)에 취미를 붙이십시오. 매 처마다 열심히 묵상하시면 거기에서 크나큰 영신적 이익을 얻으실 것입니다. 사람은 묵상과 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모든 욕정과 애정과 악습과 습관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알지 못하면 지옥의 영원한 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눈을 흐리게 합과 동시에 영혼의 힘을 결박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가령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일이 너무 많다. 지금은 나와 남 사이에 말썽이 있다. 또한 성사 받는 것을 멀리하게 하는 다른 여러 가지 핑계를 생각해 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미루다가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습니까. 제발 조심하시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특히 우리의 말을 모두 합쳐도 그 가엾은 덕을 찬양할 수 없는 동정 성모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여 당신은 천주 성자의 어머니십니다. 모든 복과 모든 덕을 갖추어 가지고 계시어 성모는 비할데 없는 광채로 빛나시며, 하늘과 땅의 모후이시어,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두 아시고 그 인자하심으로 우리와 관계되는 것은 아무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아름다우십니다. 고래로부터 얼마나 많은 성인 성녀들이 성모를 공경함으로써 천국을 얻었습니까. 그러니 끊임없이 성모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구하시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만의 한사람도 거절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벌써 너무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제 마음은 초조하고 몸이 떨려 드리고 싶은 말씀을 다 할 수가 없고, 또 드리는 말씀도 두서가 없고 대단히 정확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교우가 몇 분이나 남아 있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늘 조심하도록 힘쓰시고, 모여서 힘을 다하여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래서 성신께 애덕의 불꽃을 얻게 되시면 양친께는 어려운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위험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예수의 도우심으로 이 삶의 거친 바다를 건너가 다행히 우리가 모두 함께 무궁세에 영원한 기쁨을 누릴 하늘나라 선창가에 배를 댈 수 있으실 것입니다.
데레사와 아가다에게는 따로 편지를 쓰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상과 인연을 끊었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아가다는 외교인들과 같이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이겨 나가야 될 것입니다. 그는 괴팍스러운 성격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마음속에 예수의 오상을 깊이 새겨 두십시오. 천주님께 사랑으로 사랑을 갚고 목숨으로 목숨을 갚으십시오. 그렇더라도 아버지 어머니께서 의무를 다 하였다고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천가지 괴로움과 천가지 고난을 기꺼이 받으신 까닭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큰 은혜를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드릴 말씀은 수없이 많으나 모두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글월은 제 손이 이 세상에서 쓸 수 있을 마지막 글줄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읽으시고 선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기해년 12월 22일
그로부터 6일 후 그리스도의 이 용맹한 군사는 이 편지를 피로 봉인하였다.
성가 286. 순교자의 믿음
조선의 교역, 조공, 천주교의 자랑 |
說明 |
1. 조선에서 외국에 왕래할 수 있는 통로
박해 당시 우리나라는 쇄국 정치를 했다. 중국이나 일본 사람은 아무도 조선에 거주할 수 없고, 조선 사람은 다른 나라에 나갈 수가 없었다. 중국 사신이라 해도 수행원들은 국경에 남겨 두고 사신에게 딸린 하인들만 데리고 서울에 올 수가 있었다. 사신이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그들은 거처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그와 반대로 조선 사신들은 모든 수행원을 데리고 중국 북경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거기에 체류하는 동안 북경의 거리를 마음대로 다닐 수가 있었다. 변문에는 사신들이 통과하는 동안에 계속 장이 섰다.
또 함경도 북쪽 끝 부분에 훈춘과 가까운 경원과의 사이에 2년마다 3일 동안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장이 섰다. 마감 신호가 나면 서둘러 국경을 다시 넘어가고 넘어와야 한다.
국경에는 포교 중에 가장 경험이 많은 자를 뽑아 주재하며 주야로 감시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훈련 잘된 개들을 배치하여 지키고 있으니 사람들이 국경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육로로는 두만강 끝 부분인 훈춘과 경원을 통과하는 길과, 압록강 끝 부분인 변문과 의주를 통과하는 길 밖에는 없었다. 이 두 군데 중 어느 곳도 법적으로 인정된 장날 외에는 통행을 시도할 수가 없다. 다른 때 통과하려고 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그런데 이 두 곳을 몰래 통과하자면 가장 곤란한 것은 머리 모양이었다. 중국 사람은 머리를 빡빡 깎고 머리 꼭대기 한줌만 남겨 그것을 땋아서 등뒤로 늘어트렸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머리칼 전부를 땋거나 상투를 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식으로 하면 조선에 들어오다 잡힐 것이고, 조선 식으로 하면 중국에서 붙잡힐 것이다.
또 부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병사들과 조선 사람들 사이에 매 달 한 번씩 장이 서고 있었다. 이 세 곳이 육지에서 외국과 맺고 있는 관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서해 해상에선 중국과 일본 배들이 해삼과 청어를 잡게 허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해상에서 조선 사람과 만나지 못하고, 상륙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배를 몰수하고 선원은 투옥된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상권 269-270)
2. 중국과 조선은 군신 관계로(1637~1638 3월 30일) 체결한 조약
조선은 매년 중국에 바칠 물품은 다음과 같다. 金 百온스, 銀 千온스, 쌀 정곡 万섬, 명주 二千필, 모시(亜麻類) 三百필, 보통 포목 万필, 삼베 四百필, 고운 삼베 百필, 큰 종이(20장짜리) 千권, 작은 종이 千권, 좋은 칼 二千개, 수우각(水牛角) 千개, 화문석 四十장, 물감나무 二百근, 후추 十말, 호랑이 가죽 百장, 사슴 가죽 百장, 수달피 四百장, 서피(鼠皮) 二百장 등등 이 상납은 기묘년(己卯年1639) 가을부터 시작할 것이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상권 43)
3. 한국에서 천주교가 자랑할 수 있는 자랑거리
우리나라는 젊은 유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다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 들였고, 선교사의 전도를 받지 않고 스스로 배워서 신앙을 받아들인 나라다. 그것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랑할 만한 일이다.
평신도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였고, 평신도들이 이끌어 오던 평신도만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거룩한 순교자(殉教者)까지 낸 교회이다. 더욱이 사제 한사람 없는 가운데 교구가 설정된 나라도 우리나라밖엔 없다. 평신도의 힘으로 교회가 창설 된지 53년 만에 처음으로 주교, 신부, 평신도들로 구성하는 교계 제도가 이룩된 나라다.
첫 번째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6년 동안 사목하다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사제 한사람 없는 가운데 1831년 9월 9일 조선 교구가 설정되었다는 것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다. 조선은 중국을 상국이라 하여 조공을 바치고 있을 때 천주교회에선 조선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서 교구가 설정된 것이다. 그 당시 한 교구는 한 국가로 인정했던 것이다. 또 조선왕조는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정부에서까지 괄시하던 때에 천주교에서는 한글을 널리 가르쳤고 문법을 체계화했으며 선교사들이 한글에 대한 문법책과 사전을 제일 먼저 발간했다. 그리고 중국의 종속국인 조선을 일개 독립 국가가 될 것을 생각하고 조선국에 한자(韓字)를 붙여 한(韓)나라라 하였다.
또 우리나라는 103위의 성인을 모시고 있다. 한국이 성인 성녀를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이 모시고 있으며, 서소문 한곳에서 44위의 성인이 탄생되었다. 한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성인 성녀들이 탄생한 곳은 서소문뿐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사람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자랑거리는 천주교회에서 이룩한 것들뿐이다.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는 성인 성녀가 천주교에서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써 다른 나라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존경을 받는 위인이 누구인가? 천주교의 성인밖에 없다. 우리는 성지를 순례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성가 61. 주 예수와 바꿀 수 없네
단내 성지
성지 설명 |
☏ 031-633-9531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
백지사(白紙死)란, 죄인을 등뒤로 나무 말뚝에 묶어 놓고 얼굴에 물을 뿌린 다음 창호지를 붙여 놓는다. 그러면 체온으로 종이가 마르면서 숨이 막혀 질식사 시켜 죽이는 사형 방법이다. 사형 중에서 그래도 제일 고통이 적고 죽이기 쉬운 방법이라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 사형 방법을 많이 썼다.
‘도모지(塗模紙=도무지)’란 말은 이 백지사에서 생긴 말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죄수로 잡아오고, 죄인들을 조사하고 무서운 고문을 해 보아도 잘못한 일이 없는 사람을 얼굴에 종이로 도배를 해서 죽인다. 그래도 그들은 반항하지 않는다. 왜 죽이는지, 왜 죽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모지 모를 일이다. 얼굴에 도배를 해서 죽이는 이유도 모르고 죽일 만한 이유도 없이 죽인다는 뜻으로 도모지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 말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집 사랑방 손님들 입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때부터 도저히 알 수 없고, 무슨 뜻인지, 무슨 이유인지 모를 때,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손을 좌우로 흔들거나 머리를 좌우로 갸웃거리며 모른다고 할 때 ‘도모지 모르겠다‘ 라고 말한다.
또 아이들이 모여 질서 없이 어수선하고 부산하게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며 소란을 피우거나 많은 사람이 모여서 난장판같이 시끄러울 때 야단법석(野壇法席) 떤다고 한다. 이「야단법석」이라는 말은, 옛날 어느 종교에서 넓은 들판에 제단을 쌓고 설법(法会)을 하는 자리에서 생긴 말이다. 우왕좌왕 무질서하게 소란을 피웠을 때, 어수선하게 싸우는 것 같은 난장판 같은 광경이 벌어질 때 야단법석 떤다고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선교사 사형 집행 |
說明 |
베르뇌 주교는 흥선대원군이 불러 주기를 조용히 가다리고 있었는데, 2월 14일 포졸들이 두 차례에 걸쳐 베르뇌 주교 집에 나타났다. 포졸들의 핑계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기 위한 추렴을 거두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두 번에 걸친 이 조사에 집주인 홍봉주 도마는 겁이 나서, 포교지의 재산과 가장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해 둘 은밀한 장소를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하였다. 주교는 자신을 위해 더 안전한 은신처를 고르기를 거절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왕이 나를 찾고 있으니 만일 내가 숨으면 사방을 수색할 것이고, 따라서 전반적인 박해가 또 일어날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2월 22일부터 이틀에 걸쳐 밤에 포졸들이 또 와서, 사다리를 놓고 담 위에 올라가 주교 집 내부 구조를 샅샅이 살폈다. 그 사다리는 베르뇌 주교의 하인인 배신자 이선이가 제공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기 주인을 넘겨주는데 그치지 않고 어디 머무르고 있는지를 알고 있던 다른 선교사들도 밀고하였다. 2월 23일 하오 4시에 많은 포졸 떼가 베르뇌 주교 집에 침입하여 곧바로 주교의 방으로 달려가 오라로 묶었다. 그러다가 주교가 도무지 저항할 생각을 안하는 것을 보고, 즉시 포송을 풀고, 각기 그의 옷소매를 붙잡은 두 병정이 좌우에서 호송하는 가운데 포청으로 압송하였다. 집에 있던 신자 6명도 동시에 체포되었고, 이 소란 통에 2, 3명은 빠져나가는데 성공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포졸들을 따라나서기에 앞서 포졸 두목에게 자기 집에 있는 돈에 대하여 대원군 앞에서 그의 책임을 묻겠노라고 엄명하였다. 과연 꽤 많은 돈이 있었으니, 신앙의 자유가 그렇게도 가까운 것같이 보이던 자유의 날이 오자마자, 성당과 학교 등등을 세우기 위하여 얼마 전부터 저축하던 것말고도, 포교성성(布教聖省)과 성영회(聖嬰会)에서 해마다 주는 보조금을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포교는 모든 문에 봉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4일 후에 대원군은 사람들을 보내 그 집을 약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주교 집은 부서져서 네 벽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 오른편에 있기 때문에, 우포도청이라고 불리는 관청 포도대장 앞에 출두한 뒤에, 구류간 즉 형사범들의 옥으로 끌려갔다. 그 곳에는 하층계급에 속하는 도둑들과 살인자들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지체가 높은 양반들과 국사범들을 가두게 되어 있는 금부 옥으로 이송되었다. 이 옥은 먼젓번 옥보다 덜 더럽고 덜 어두우며 마루청 같은 곳이 있었다. 감금된 사람은 각기 다른 감방들과는 일체 연락이 되지 않는 작은 방에 갇혀 있게 되었다. 수인들이 칸막이를 통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사방에 달려 있는 방울을 끊임없이 흔들어 일체의 통화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옥은 세 개의 큰 칸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간(東間)과 서간(西間)은 유배형이나 종신 금고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들어 있는 곳이고, 남간(南間)은 사형 선고받은 사람들을 가두는 곳이다. 베르뇌 주교는 이 남간에 갇혔다. 왕의 유모 박 마르타가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임금의 어머니는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심한 비통함을 나타냈고, 장남 앞에서 강력한 항의를 터뜨렸다고 한다.그래 내 나라의 관리들이 내 남편을 반대해서 내 어린 아들의 왕권을 뒤엎으려고 했다니, 서양 신부들이 저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며 내 아들이 저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틀림없이 서양 군사들이 저 신부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리로 와서 내 아들을 죽일 것이다.” 하고 외쳤다. 그러나 대신들은 왕의 어머니에 눈물과 한탄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고, 베르뇌 주교는 26일 관청에 끌려나갔는데 거기에는 모든 대신들이 모여 있었다.
네모 반듯한 넓은 뜰 한 쪽에는 재판관들과 다른 관장들이 자리잡고 있는 여러 개의 단이 세워져 있었다. 이 마당 한가운데에 단단히 고정시킨 의자가 있고 거기에는 피의자가 재판관들을 향하여 앉아 있다. 주교의 발은 발목 위쪽에 결박되었고, 바지 가랑이를 치켜올려 다리가 드러나 있으며, 다른 밧줄 하나가 무릎 위쪽에서 두 다리를 꽁꽁 묶어 놓았다. 끝으로 팔과 어깨는 의자 등에 매어져 있어 꼼짝 못하게 되어 있어 형벌을 받는 사람은 아무리 고문을 당하여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양옆에는 넷, 여섯 혹은 여덟 명의 형리(刑吏)가 형구(形具)를 들고 두 줄로 늘어서 있다. 답변과 진술을 받아쓰는 일을 맡은 서기는 약간 뒤쪽 휘장 뒤에 앉아 있다. 병졸 1개 중대 약 80명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재판관 석을 향하여 반원형으로 빙 둘러 서 있다. 더 많은 다른 군졸들은 구경꾼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 신문이 계속되는 동안 줄곧 형벌 받는 사람 곁에 있는 병졸들은 그의 말과 비명이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박자를 맞춘 은은한 소리를 낸다. 베르뇌 주교가 당해야 할 여러 가지 신문을 받을 때 신자 포졸인 서인겸 야고보와 그의 친척 서신겸이 당번이 되어 주교와 가까이 있게 되었다. 이들과 또 다른 신자 병졸이나 관속을 통하여 증거자들의 주요한 답변과 그들이 당한 고통을 어느 정도 상세히 알게 된 것이다.
“당신 이름이 무엇이요하고 관장이 물었습니다.장(張)이오.(베르뇌 주교의 조선 성).조선에 무엇 하러 왔소.영혼들을 구하러 왔소.이 나라에 온지 몇 해나 돼요.10년이 되었소.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내가 가지고 온 돈으로 살았고 여기서 거저 받은 것은 아무 것도 없소. 물이나 나무까지도 거저 얻지 않았소.주교는 선교사들이 자기 나라에서는 생활 필수품이 없어서 순전히 돈을 모으려고 조선에 왔다고 주장하는 외교인들의 모함을 빗대 놓고 말한 것이었다.만약 당신을 석방하고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면 복종하겠소.?”당신이 직접 나를 강제로 데리고 간다면 가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가겠소.”하지만 우리는 당신의 나라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그리로 데려갈 수가 있겠소. 당신들은 조선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구려.좋으실 대로 해석하시오. 나는 당신 손안에 있으며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
이튿날 27일 또 신문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대원군도 그의 장남인 고종 왕과 함께 나와 있었다.당신 나라는 어떤 곳이요.불란서요.조선에 어떻게 왔소.배로 왔소.“누가 데려왔소.홍봉주요.”(홍봉주 자신이 그것을 자백하였던 것이다)조선에 신부가 몇 명이나 있소.아홉 명이요.(선교사가 12명이 있었지만 아홉 명은 배신자 이선이가 고발한 숫자였다)당신의 집주인은 누구요.홍봉주요.몇 사람이나 가르쳤소.많이 가르쳤소.그 사람들이 어디 있소.사방에 있소.신부 아홉 명은 어디에 있소.나는 모르오.당신더러 떠나가라고 하면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겠소?“나를 강제로 데려가지 않는다면 안가겠소.배교하시오!천만의 말씀이요. 내가 영혼들을 구원하는 종교를 전하려고 왔는데 나더러 그 종교를 배반하라고 하다니요!복종하지 않으면 당신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할 것이요.마음대로 하시오. 이제 쓸데없는 질문을 그만 두시오위협에 이어 과연 고문이 뒤따랐다. 그들은 공경하올 주교에게 다른 고문 중에서도 다리를 때리는 고문과 옆구리를 몽둥이로 찌르는 주장질까지 하였다. 오래지 않아 다리의 살이 떨어져 나가 뼈가 드러나고 무섭게 으스러졌다. 형벌이 끝난 후 유지와 헝겊 몇 조각으로 다리를 싸매 주고 옥으로 다시 데려갔다.
그 다음 여러 날 동안 몇 차례에 걸쳐 같은 고문이 다시 벌어졌다. 베르뇌 주교는 힘이 다하여 목소리가 하도 작아져서 신자 병졸들이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역시 옥에 갇혀 있던 홍봉주 도마가 아래와 같은 내용의 쪽지를 다블뤼 주교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베르뇌 주교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의젓하시고 성덕이 충만하십니다.마침내 사형 선고는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피고 장은 임금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배교도 원치 않을 뿐 아니라, 그에게 요구하는 정보를 주기를 원치 않으며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원치 않으므로, 여러 가지 형벌을 당한 후 참수될 것이다.” 그 형벌들이 어떤 것이었는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시기에 순교한 모든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천주교인들 중에서 제일 높은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금부의 옥에서 4일을 지낸 뒤 증거자는 다시 구류간 즉 보통 형사범들의 옥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젊은 세 동료가 차례로 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들은, 주교가 여기 있는지 알지 못하였지마는 며칠 전부터 금부 옥의 이웃 감방에 들어 있었다. 그들도 같은 관장 앞에서 비슷한 심문과 고통을 당하였다. 그들은 브르트니애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이었다.
성가 29. 주 예수 따르기로
천진암 강학터
성지 설명 |
성지 031-762-5958
☏ 031-764-5953~4
소재지 : 경기 광주 퇴촌면 우산리 500
천진암 강학회 자리는 1970년 말부터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고, 1980년 6월에는 12만평의 땅을 매입하고 가르멜 수녀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국의 첫 방인 주교인 노기남(盧基南) 주교의 이름으로, 1980년 6월 24일 제막된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천진암에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그스티노 성인의 묘역은 주차장 오른편 골짜기에 모셔져있다.
천주교회가 우리나라에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顕世子)가 북경에서 아담 살 신부와 사귀게 되었고, 그가 귀국할 때 서양실학 천문(天文), 역산(曆算), 지리(地理)등 서적과 서양 문명의 산물인 천리경 자명종 같은 기계와 천주실의 등 서적들을 가기고 들어왔다.
이러한 서적들이 학자들 손에 들어오자, 실학운동의 선구자 성호 이익(星湖李瀷) 선생은 권일신을 사위로 맞아, 그에게 실학사상과 천주실의라는 책을 전해 주었다. 권일신과 형 권철신은 개국공신 권근(権近)의 후손으로 명문대가의 자손이며 남인의 대학자(피묻은쌍백합18)이다. 정약용(丁若鏞)의 형제들과 이익 선생의 손자인 이가환(李家煥)과 이벽(李檗=李徳祚) 권상학(権相学), 권상문(権相問), 김원성(金源星), 이총억(李寵億) 이승훈(李承薫), 권일신(権日身) 등은 1779년까지 권철신이 주재하던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였고, 이들은 학문적 지식에서 종교적 교리를 연구하여 1779년 정약전은 십계명가를 지었고, 이벽은 천주 공경가를 지었다. 천진암 강학회가 주춧돌이 되어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게 된다. 이 강학회에서 만족하지 못한 이벽은 그의 지우(知友) 이승훈이 북경에서 참 신앙의 실체를 파악하고 돌아오도록 부탁한다.
그래서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1784년 9월에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마재에 정약용 형제들과 양근 권일신(権日身) 형제에게 세례를 주고, 또 내포의 이존창 루도비꼬 곤자가와 전라도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중인 지식층인 최창현, 최인길 지황도 입교하였고, 그 해 겨울에는 명례방에 살던 역관 김범우(金範禹)도 입교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 모여 전례를 시작하였다. 그래서 1784년 겨울에 서울 한복판인 명례방에서 천주교회의 전례 행사를 시작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의 신앙 공동체가 창설되었고 한국에 첫 공소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천진암에서 열린 강학회는 이 땅에 천주교를 세우는데 산실 역할을 하였고, 명례방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것이다.
성가 199. 예수 마음
교황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
說明 |
이들은 편지 두 통을 준비하였는데 한 통은 지난 박해 소식을 소상히 밝히고, 북경 주교에게 신부 한 분을 요청하는 편지이고, 또 한 통은 교황에게 올리는 첫 번째 편지였다. 이 편지는 영적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는 만여 명의 신자들이 성사 받기를 애원하는 글이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중권 30-37)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다른 교우들은 땅에 엎디어 가슴을 치며,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성교회 으뜸께 이 글월을 올리나이다.
지극히 간절하고 열절한 마음으로 성하께 간구 하오니.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성하의 마음에 가득 찬 자비로 어떤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憑據=빙거)를 보여주시며,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구속의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저희들은 조그마한 나라에 사는 자들로 처음에는 책으로 10년 후에는 강론과 칠성사에 참여함으로써 거룩한 교리를 배우는 행복을 얻었나이다. 7년 뒤에는 박해가 일어나 저희들에게 왔던 선교사는 많은 교우들과 함께 사형을 당하셨으며, 다른 교우들은 모두 근심과 겁에 억눌려 차츰 흩어지고 말았나이다. 저희들에게는 오직 지극히 크신 천주의 자비와 성하의 크신 동정밖에는 바랄 것이 없게 되었사오니, 지체 없이 저희들을 도와주시고 구원하여 주심을 바라나이다. 오직 이것만이 저희들이 울부짖어 비는 바이옵니다. 10년 전부터 저희들은 간난신고(艱難辛苦)에 눌려 있으며, 늙고 병들어 죽는 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사옵고, 살아남아 있는 자들은 어느 때에나 거룩한 교훈을 받을 수 있게 될지 모르나이다. 교우들은 이 은혜를 마치 목이 타는 자가 물을 갈망하듯 하오며, 그 은혜 바라기를 마치 가뭄에 비를 빌 듯 하나이다. 그러하오나 하늘은 너무 높아 붙잡을 수 없으며, 바다는 너무 넓어서 구원을 청하러 건너갈 만한 다리도 없나이다. 저희들이 성서에서 읽은 것이 있는데, 성교회는 온 세계에 전파되었사오며, 오직 저희 동방 나라에만 선교사에 의하지 않고 다만 책으로 전하여졌나이다. 그러하온데 선교사가 오기 전후에 수백 명의 순교자들이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사오며, 지금 있는 신입 교우의 수효도 1만 명이 넘나이다.
저희들 죄인이 교황 성하의 도우심 받기를 얼마나 진실히, 얼마나 열절히 원하는지 형언할 수가 없나이다. 그러하오나 저희들의 나라는 원래 소국이며 대양 한구석에 멀리 떨어져 있어, 이러한 결핍의 원인은 저희들의 열심 하지 못함과 죄 많음에 있지 않고 어디에 있겠나이까. 그러므로 저희들은 지금 지극한 두려움과 진실한 통회로 가슴을 치며, 일찍이 지상에 강생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의인들보다 오히려 죄인들을 더 걱정해 주시는 크신 천주와, 또한 천주를 대리하시고 모든 사람을 보살피시며 진실로 죄인들을 구해 주시는 성하께 지극히 겸손 되이 비옵니다. 저희들은 구속(救贖)되어 암흑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하오나 세속은 저희 육신을 괴롭히고 죄악과 악의는 저희 영혼을 압박합니다. 저희들은 성세와 고백의 은혜를 받을 길이 없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미사 성제에 참여하지 못하옵니다. 저희들의 소원은 크지마는 언제쯤이나 그것을 충족이 되겠습니까. 저희들의 눈물과 탄식과 고뇌는 하찮은 것이오나, 성하의 자비는 끝이 없고 한이 없는 줄로 생각하오며, 따라서 목자를 잃은 이 나라의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선교사들을 보내시어, 구세주 예수의 은혜와 공로가 전파되고, 저희들의 영혼이 도움과 구원을 받고,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이 어디서나 항상 찬양되게 하실 줄로 생각하옵니다.
1. 전에는 저희들이 다른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도 듣지 못하였으나, 몇 해 전부터 성교가 전파됨에 따라 서양 문물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그것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즐거웠습니다. 저의나라 전체가 서양 사람들의 수학 지식과 그 예술가들의 재주를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얼마 전부터 인구가 증가하였음에 따라서 가난과 기아와 곤궁도 더해졌습니다. 성교를 미워하는 몇몇 완고한 학자와 불교를 믿는 몇몇 고집쟁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이가 많은 환난 때문에 기진하고 탄식하며, 거룩한 도를 배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본성이 약하고 또한 방법이 없으므로 인하여, 성교가 많은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갑자기 대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중 가장 학식 있고 덕 있는 분들은 모두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거기에서 얻게 된 근심은 이들의 마음이 변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오나, 법의 금지와 형벌과 죽음의 위협을 받고, 무서운 본을 보았으므로 그들은 겁을 내고 있습니다. 용맹한 사람이 나타나 저희들의 용기를 북돋아 준다면, 기꺼이 수계를 할 것이 확실하며, 마치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들이 골짜기로 쏟아져 내려오듯 열심히 달려들 것입니다.
2. 중국과 접경하여 있고, 그 속국이 된 저의 나라는 세계의 한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특유한 풍속이 있어 거기에 몹시 집착되어 있습니다. 출입국이 엄히 금지되어 있사온데 박해가 있은 뒤로는 더욱 심하고 파수꾼들이 전보다 백 배나 더 조심스럽게 감시합니다. 한편 저희들은 북경에도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하오니 저희 영혼을 구하기를 원하신다면 구원은 바닷길로 보내야 될 것입니다. 다른 길은 믿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저의 나라에 육로로 들어오는 길은 북쪽 밖에 없사옵고 다른 삼면은 바다로 둘러 있습니다. 저의나라의 연안에서 중국 산동성까지 천리도 되지 못하여 바람이 그쪽에서 불어오면 닭 우는소리라도 들려올 듯 합니다. 남쪽지방은 남경성에서 불과 수 천리 거리에 있으며, 따라서 성교가 공인된 마카오에서도 3, 4천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만일 배를 마카오에서 보내면, 그 배가 남경성과 류구(琉球) 섬 사이를 지나 북쪽을 향한다면, 며칠 안으로 저의 나라 해안에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서울까지는 불과 백 리밖에 안됩니다. 비록 이 서해가 얕기는 하나, 작은 배는 항해 할 수가 있사오니, 저희들을 이쪽으로 밖에는 구원받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청하는 바를 속히 마련하여 주시기를 성하께 겸손 되이 간청합니다.
3. 풍랑이 심하여 어떤 외국배가 저의나라 연안에 닿게 되어도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배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끊임없이 감시하오며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떠나 보냅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청하는 배에는 슬기롭고 유능하고 경험 있고 한문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어, 글로 저희들과 의논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교황 성하와 포루투갈 임금님께서 저희 상감께 선물과 정중한 편지를 보내심이 바람직하겠습니다. 이 편지에는 성하와 임금님의 의향은 오직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고, 성교가 전파되면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나라들이 보존되고, 여러 국민들 사이에 평화가 깃드는데 있다는 말씀을 쓰심이 좋겠습니다. 또한 천주교의 도리를 명백히 설명하시고, 온갖 성의와 예의를 갖추고 신부들은 조금도 나라를 정복하러 들지 않고, 다만 박애의 정신으로 일을 하러 온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할 줄로 압니다. 이렇게 하면 혹시 저의 동포들이 눈을 뜨고 의심이 스스로 풀려 진리를 알아듣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은 서양인들이 예술과 학식과 슬기와 그밖에 재주가 뛰어남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서양인들과 대적하거나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저희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온 세계를 두루 다니되, 그들 중의 아무도 외국을 탈취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조그마한 저의 나라는 의심과 겁이 많사온지라, 단독으로 결정을 짓지 못하고 필경 북경에 사신을 보내어 천자께 아뢰고, 그 명령을 받아 천자의 보호를 확보하고 벌받는 것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하온데 천자께서 어떻게 저희 조정에 경의를 표하고 선물을 주려고 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온즉 저희 임금님과 조정 대신들은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옵고, 따라서 이 사신들을 환영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4. 남경성에서 가깝고 마카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조선 남해에는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주인 없는 섬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저의 나라 육로도, 해로로도, 다른 나라와 왕래가 없으므로 저희들은 교양이 없고 약하옵니다. 재주와 지식이 별로 없으므로 배를 타고 먼 나라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더러 ‘뱃놈이 되라’하는 것은 저의 나라에서는 속담에 쓰이는 저주의 말이기도 하옵니다. 그러므로 마카오에서 배를 한 척 보내어 이 무인도들을 조사하여 보고, 그중 가장 적당한 몇몇 섬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혹시 거기에 주민이 있으면 그들을 입교시켜 천주교인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저희들이 이 불쌍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하오나 그렇게 하자면 시일이 많이 걸릴 것이므로 이 방법은 여의치 않을 경우에 쓸 방법이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저희들에게 직접으로 신속히 배를 보내 주시는 것이옵니다.
5. 저의 나라 사람들은 능력과 지혜가 별로 없습니다. 저희들은 다른 나라 백성들의 재주에 멀리 미치지 못 하오며, 농사나 길 삼에 쓰는 기구 등 생존하기에 가장 필요한 물건도 보잘것없으며, 저희들의 가난은 비할 데 없습니다. 가뭄이나 장마로 말미암아 흉년이 들면,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먹고 입을 것을 장만할 재원이 없습니다. 교우들로 말씀드리면, 박해 때문에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한군데 편안히 머물러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교우들은 거의 모두가 빌어먹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보통으로는 영혼이 육신을 다스리고 육신이 영혼을 도와주며, 서로의 관계는 자연적인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지금 저희들의 육신은 목숨을 보존하기에 필요한 방도가 없고 영혼의 덕을 일으킬 수단이 없습니다. 학식이 있고 언변이 좋던 교우들은 모두 박해 중에 순교하였고, 그들을 대신할 만한 사람들의 입교가 없었습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오직 부녀와 어린아이들과 너무 무식하여 ‘우’와 ‘유’ 두 글자도 구별하지 못하는 남자들뿐이옵니다. 아무리 교우의 수가 많다 하여도, 그들은 넉넉히 배우지를 못하여 한 천주 계시고 영혼과 상벌이 있음을 아오나, 다른 신조는 거의 알지 못하여 그것을 가르치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박해의 공포와 세속 체면에 붙잡혀 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로 고통을 받고 일에 시달리어 그들은 서로 돕지 못하며, 목자를 잃은 양같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서 수계를 하기 위하여 모이지도 못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천주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버리지 않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6. 저희들은 어떤 곳에 교우 천명 이상이 있을 때에는 신부 한 분을 보내야 하고, 만 명 이상이 있을 때에는 주교 한 분을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기는 저희들은 성교에 대하여 별로 배운 것이 없사옵고, 다만 재계나 지키고 경문을 외울 줄 밖에 모르는지라, 정말이지 신자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저희들은 천주님을 아는 사람이 만 명이 넘는데, 아직 주교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바라옵는 것이 그다지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옵고 저희들은 고통에 찍어 눌려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자비에 의지하여 지극히 간절히 구하오니, 교황성하께서는 저희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영신의 스승을 보내 주시옵소서.
7. 저희들이 입교 한지가 20년이 채 못되고 선교사가 오신 지도 7년이 못 되었사온데 대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전 박해 때에는 순교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1801년에 시작된 박해는 매우 소란을 피워 성교회가 더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 박해 때에는 순교자가 2백 명이 넘었으며, 귀양간 이도 약 4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성사의 신은과 은총을 더 많이 받음으로써 그들은 용기를 얻었던 것이옵니다. 붙잡힌 교우들 중에는 별로 학식도 없고, 경문도 잘 외우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사온데, 이들은 대개 투박한 서민들이었으므로, 그 사람들은 교우거나 아니거나 큰 상관이 없으리라 생각하여 석방하여 주었습니다. 이들은 고기떼 모양으로 차례차례 옥에서 흘러 나왔는데 그 수효를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선교사와 개인적인 접촉을 하지 않아 고발되지 않은 자들도 도망하여 숨어서 아직까지 집도 없고 가정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들의 수효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구원의 길을 모두 잃고 죽음 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는 이 많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만일 서양에서 저희들을 동정하지 않고 북경에도 아무런 기대를 걸 수가 없다면, 저희들은 무서운 절망에 빠져 들어가 만사가 끝이 나고 말 것입니다. 구원이 하루 늦으면 저희는 하루를 고생할 것이고, 이틀이 늦으면 이틀을 괴로워할 것입니다. 만약 서양에서 배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만민을 가르치고 세를 주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도, 이웃을 사랑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하라는 복음의 말씀도, 모두 낡은 모자나 입지 못할 누더기 옷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처음에는 사람이 건지러 오려니 하는 생각에서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그 기대가 어그러졌음을 알게된 사람같이 저희들은 모든 희망을 잃을 것입니다. 성하께서는 저희들의 위험이 닥쳐옴을 보고 울부짖는 이 온당치 못한 부르짖음과 두서 없는 말씀으로 횡설수설함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이나 불 속에 뛰어든 사람 모양으로 이미 자제력을 잃었으며 정신마저 혼미해졌습니다.
8. 지속적인 박해 상태로 인하여, 저희들은 신자가 옷 속에 감추기 쉽도록 이 글을 비단에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밀사는 십중팔구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하께 두꺼운 책들을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선교사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여회장과 그밖에 순교 기록과 특히 뛰어난 일을 한 45명의 성명을 보내드리는 것에만 그칩니다. 그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여러 권이 되는데, 기회가 오는 대로 성하께 보내드릴까 합니다. 왜냐하면 저희 동포 순교자들은 비록 불쌍한 외국 신민이라 할지라도, 성교회에 들어가는 행복을 누렸사오며, 그들의 이름과 공로와 행적은 의를 위하여 죽은 이들의 책에 쓰여졌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천주께 의합한 자들이요, 동정 성모와 천사들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오니, 천주께 의합한 만큼은 성하께도 의합할 것이옵니다. 저희 순교자들의 공로를 의지하여 저희들은 천만 줄기 피눈물로 영신적 구원을 하루빨리 받기를 바랍니다.
1811(신미)년 10월 24일(12월 9일)
성가 18. 주님을 부르던 날
조선왕이 중국 황제에게 보낸 편지 |
說明 |
그리고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지 6년 5개월 만인 1801년에 주 신부를 사형시킨 조선 순조 왕은, 중국 황제에게 사과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 문서에는 주문모 신부가 조선 사람인 줄 알고 처형했는데, 나중에 중국 사람인 것이 밝혀졌다는 엉뚱한 말이 나온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상권 576-584)
조선왕은, 소방(小邦)이 강도단으로부터 불행을 겪게 될 것 같아서 그들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법을 시행한 바 있는 소란스러웠던 자초지종을 폐하께 겸손 되이 보고하나이다.
폐하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은나라 군대의 잔여 병력이 동방으로 건너온 뒤로부터, 소국은 예절과 정의와 법도가 명하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지키고, 일반적으로 본분에 충실함으로써 항상 뛰어났으며, 이 사실은 중국 조정에서도 항상 그 공적을 인정한바 입니다. 항상 깨끗한 풍속을 보존하여온 이 나라는, 유교 외에는 아무 것도 존중하지 아니하나이다. 주자나, 맹자나, 노자의 책이 아닌 다른 모든 책은 이 나라의 선비들과 관헌들이 결코 인정하지 아니하였으며, 더구나 그들 사이에서 유통된 일은 절대로 없었나이다. 네거리와 초가의 여자들과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받침대가 되는 오륜과 삼강과 친숙하지 않은 자 없으며, 그것을 처신의 일상 법규로 삼지 않는 자 없나이다. 다른 도는 어떤 것이나 소방에는 생소한 것이며 오류가 거기에 침입한 적이 일찍이 없었나이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흉측하고 더러운 오랑캐 도당이 나타나 서양에서 가져왔다는 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며, 하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성현들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들은 국왕에게 반역하고, 효성의 감정을 억누르고 조상들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르며, 천당과 지옥을 설교하여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케 하여 따르게 하였나이다. 또한 영세라는 것을 통하여 그들 도당의 흉악한 죄를 없앤다 하며, 퇴폐적인 책을 감추고 중들의 것과 같은 요술을 써서 사방에서 여자들을 모아 금수처럼 살고 있나이다. 어떤 자들은 신부라 자청하고 또 어떤 자들은 교우라고 하나이다. 그들은 백연(白蓮)과 황건(黄巾) 강도들의 본을 따서 이름을 바꾸어 칭호와 별명을 지어 가지나이다. 그들은 점을 치며 오류와 혼란을 서울에서 충청,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퍼뜨리고 있나이다. 그들의 도리는 불과 같이 빨리 번져 나가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수효는 무섭게 불어나나이다.
선왕인 공선 왕(正宗大王)이 모든 무질서를 정확히 알고 그 결과를 미리 내다보시고, 그 악의 흐름을 막기 위하여 가장 엄한 명령을 내리시고, 가장 효과적인 조처를 취하였나이다. 건륭(乾隆) 신해(辛亥) 1791년에 윤지충과 권상연과 그밖에 자들이 제사를 폐지하고, 거기에 소용되는 모든 물건을 부수었으므로 모두 사형의 벌을 받았나이다. 비록 아주 어리기는 하나 저는 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나이다. 저 부패한 강도들은 존경과 예의에 감정을 일체 눌러 버리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나이다. 그때부터 그들 사이에는 더욱 활발하고 더욱 계속적인 연락과 더욱 긴밀한 합심이 어우러졌으며, 오래지 않아 넘치는 도랑물 같이 되고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불과 같이 되었나이다. 그들의 공범자들은 마치 새싹이 나무에서 돋아나 여러 개의 싹을 또 내고, 그것들이 같은 모양으로 다른 싹을 내게 하여, 잠깐 사이에 무한히 퍼져 나가는 것처럼 매일 같이 수효가 늘어나나이다.
금년 3월에 수도 한성에서 이 부패시키는 강도들의 편지 여러 장과 그들의 사악한 도리를 담은 책들을 압수하여, 그것을 가지고 그들의 재판을 시작하였나이다.
그때 저는 이 사건을 의논하기 위하여 의정 대신들과 의금부, 사헌부, 사간원(司諫院)의 고관들을 소집하고 먼저 책들을 조사하였나이다. 그것들은 정약종(丁若鍾)이 저술한(주교요지) 것으로 들어 났는데 이자의 진술에 의하면, 이승훈이 자기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사신 행차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양 도리를 담은 책들을 가져왔다 하옵는데, 그 책들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머무르는 동안 교제하였던 그곳의 서양인들에게 받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승훈은 우선 그 책들을 이벽에게 전하였고, 다음에는 윤지충과 형제인 정약종과 정약용, 이가환 및 그밖에 사람들에게 주었나이다. 이들은 그 책들을 연구하고 같이 토론하여 그것을 자기들의 처신 규범으로 삼았나이다. 그로부터 그들은 자기 친부모들을 버리고, 도당들과 제자들을 모아 이 나라의 풍습을 고치겠다고 생각하였나이다. 그러나 법이 지극히 엄하므로 그들의 원한이 불평으로 발산되어, 악담하고 저주하고 정면으로 대항하여 반역 외에 다른 것은 생각지 않나이다. 이벽이 죽은 지는 꽤 오래되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가환 및 이승훈의 공술은 모두 완전히 일치하나이다.
그런데 이가환은 학문과 육예(六芸)에 매우 능하여 2품 관직을 얻었었나이다. 그러므로 이 도당들은 그를 지주로 삼고 모든 일에서 그에게 복종하나이다. 그는 이승훈이 가져온 퇴폐적인 책들을 언문으로 옮겼으며, 그 도당들이 앞장을 서서 멀리까지 그것을 전파하였나이다. 정약종의 중요한 공범들은 홍낙민, 김건순, 최창현, 이희영, 홍필주, 최필공 도마,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지황 사바, 윤지충 바오로 등이 있나이다. 그들의 모든 공술이 명백하고 일치하나이다. 지식 있고 대가 출신인 이자들 밖에도 낮은 계급의 장사치와 서민 중에서 수 백 명 이상이 합세하였나이다. 모두가 뱀처럼 감기고 또 감기고 엉켜서 노끈과 같이 매어져 있나이다. 한편 그들에게 유혹되어 그 도당에 끌려 들어간 여자들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와 그의 아들 홍필주를 두목으로 하고 있나이다.
예전에 왕족 이인이 모반과 역적의 죄를 지었었나이다. 선왕은 친족에 대한 인정과 너그러움으로 그를 죽일 결심을 못하고 섬으로 귀양보내었나이다. 그런데 이인의 가족과 하인배가 모두 강완숙(姜完淑)과 비밀히 내통하여, 이 사도(邪道)를 전파하고 그들의 흉악한 계획을 함께 꾸몄나이다. 동시에 이인은 밤을 타 섬에서 도망하였나이다. 그 사건이 고발당할 단계에 이르렀던 건륭 병신년(1776년)에 왕족과 인척이 되고 배반과 역적과 강도의 죄를 지은 홍인한(洪獜漢)의 조카 되는 홍락임이 홍계능과 몇몇 다른 자들과 함께 역적을 음모하였으나 왕은 그들을 길 잃은 왕족으로만 생각하여 모르는 체하고 사하여 주었나이다. 그러나 홍락임은 그 흉악한 계획을 추진하는 데에 더 열중하여, 이가환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긴밀히 결탁하여 두 사람은 같은 목적을 세웠나이다. 대신 윤행임(尹行恁)은 그의 권력을 다하여 홍락임의 죄악을 도우며 재판을 오래 끌게 하고, 국법을 정면으로 어겨 가면서 모든 것을 혼란케 하고 대중을 속이려고 힘썼나이다. 그 타락한 강도들이 일체의 인륜을 짓밟고, 공공연하게 국가에 반기를 들려던 것이 확실한 것 같사옵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폭발하게 될 무서운 오인이 비밀리에 준비되었사온데, 겉으로는 사도를 내세우는 것으로 만족하고 속으로는 끔찍한 계획을 품고, 훌륭한 행동 규칙을 따르는 체 하고 있으나 그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방법에 지나지 아니 하였사온데, 이인은 그들의 재주꾼이요 보배였사옵니다.
이 도당이 공론하여 신부라는 칭호로 부르는 주문모를 맞아들인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나이다. 강완숙의 집이 그의 은신처로 쓰여졌나이다. 성명과 거처를 물으니 그녀는 모호한 말로 대답하여 천가지 모양으로 자기 죄를 숨겼나이다. 비록 여러 차례 매를 맞았으나 숨기는 말로만 대답하는 고집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문모는 이 무리의 모든 계획의 주모자였고 그들의 연락의 중심이어서, 그자들은 모두가 그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어서 오직 그만을 위하여 모두가 함께 죽음을 당했을 것이옵나이다. 이와 같이 멸망 일보 전에 놓여 오직 마지막 숨 한 가닥 밖에 남지 않았던 이 나라가 처하여 있던 위협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끼치나이다.
이 해독을 막고 그 뿌리를 뽑는데 시각을 지체할 수가 없었나이다. 이인과 홍락임과 윤행임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을 허락을 받았사옵고, 주문모는 정약종, 이승훈, 홍락민 등과 함께 참수 당하였나이다. 이가환은 매를 맞아 죽었고, 정약전, 정약용 그 밖의 자들은 범죄에 가담한 정도에 따라 벌을 받았나이다.
이 강도들이 꾸민 계획과 음모는 그들 중의 하나인 황사영(黄嗣永) 알렉시오가 조종하였나이다. 그는 폭풍우를 미리 내다보고 도망하여 관헌들의 탐색을 피하였나이다. 그리하여 9월이 되어서야 붙잡혀 처음으로 신문을 당하였나이다. 그런데 그의 공술에 의하면, 이승훈이 서양 도를 들여온 뒤에 그 강도들은 북경의 서양인들과 통신을 계속하였다 하옵니다. 김유산, 황심, 옥천희 등 사신 일행이 북경에 갈 때마다 이 심부름을 하였나이다. 이 도당들은 거기에서 부패시키는 계획과 저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방법을 꾸며냈나이다.
주문모라고 불리는 자는 서민의 옷을 입고 국경선의 밀회 장소로 와서 밤낮으로 걸어 1795년 봄에 이 나라에 몰래 들어왔나이다. 그는 이 도당의 스승과 두목으로 여러 해 동안 숨어 있었나이다. 주문모는 강남성의 대도시 소주 사람이옵니다. 그가 비단에 쓴 편지 중의 하나로, 황심과 옥천희가 자기들 옷에 꿰매 가지고 가서 서양인들에게 비밀히 전하기로 약속되었던 것을 압수하였사온데, 그것은 떠나기 전에 압수한 것입니다. 그 편지를 전하는 임무를 맡았던 황심은 제 이름을 도마라고도 하였나이다. 이 편지에는 소방을 전복하기 위하여 서양인들에게 제안하는 두 가지 끔찍한 계획이 들어 있었나이다. 첫째는 서양 여러 나라에 수백 척의 배에 5, 6만의 군사와 대포와 그 밖의 다른 무서운 무기를 싣고 와서, 해로를 통하여 소방을 정복하고 파괴하라고 제안하기 위해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나이다.
둘째는 국경 지대에 자기들 교를 믿는 사람 하나를 데려다가 장사한다는 구실로 자리를 잡고 편지를 전하고, 그 도당의 계획과 의논한 결과를 안전하게 통보하게 하려는 것이었나이다. 김유산, 황심, 옥천희 및 그 밖의 자들의 공술이 이 두 가지 점에 일치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유항검과 윤지헌 및 이 사도(邪道)의 다른 무리들의 공술에 의하면 서양 함대를 청하여 올 음모도 있었다 하나이다. 그것은 확정된 결정이었으며, 이가환과 그 밖의 자들이 비밀리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기로 되어 있었나이다. 이것은 또한 황사영도 공술한 바입니다. 아아,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소방과 아무런 은원(恩怨)의 관계도 없나이다. 이성과 사리를 따른다면, 그들이 소방을 전복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만리나 떨어져 있는 곳에 올 마음을 가질 수 있겠나이까.
그러므로 이 결정은 그 강도들이 힘이 다하여 절망한 나머지 세상 끝에까지 구원을 청할 수밖에 없게 되어, 서양 군대를 청하여 들여다가 그들 자신이 문을 열어 주고, 나라를 그들에게 넘겨주려는 계획을 세운 데에서만 오는 것이 틀림없나이다. 저와 관헌과 백성이 겁에 질리고 몸이 떨리며 분한 마음이 뼈에 사무쳐, 저는 황심, 김유산, 옥천희, 황사영, 유항검 등을 즉시 참수시켰나이다.
그러하오나 바다 한 구석에 자리잡고, 폐하의 은혜를 두텁게 입는 하찮은 이 작은 나라가 마치 제국의 영토 안에 있듯이 해마다 조공 바치는 것을 생각하고, 어떤 나라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즉시 사자들을 보내어 폐하께 그 일을 소상히 보고 드려야 함을 알고, 이 나라를 멸망의 한 걸음 앞에까지 이끌어 갔던 그 강도의 무리를 소탕하여, 그 무서운 위험에서 벗어나 이제는 평화와 안전을 누리게 되었음을 생각하고, 더욱이 폐하의 정령이 모든 것을 통찰하시며, 용납하심을 생각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폐하께 보고 드리는 바이옵니다.
비록 그 강도들이 모두 뿌리가 뽑혔사오나, 다른 자들이 그 쓰러진 도당을 다시 일으키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그자들이 숨어서 관헌의 탐색을 피할 것을 염려하여, 장래를 위한 대비책을 취하지 아니 할 수 없나이다. 만약에 이 타락시키는 강도들 중에 몇 명이 비밀히 국경의 변문을 넘어가면, 관헌들에게 명하시어 그들을 잡아 돌려보내 주시기를 폐하께 간청하나이다. 이러한 은혜를 내려 주시면, 그렇지 아니하여도 두려움과 공경의 정을 일으키시는 폐하께서는 제국의 제후들 사이에 평화와 안정을 굳게 하시게 될 것이옵니다. 폐하의 소방으로 자처하는 저는 폐하의 지극히 크신 관용을 믿는 마음이 가득하여, 이런 하찮은 일로 감히 귀찮게 구나이다. 도망간 자들을 돌려보내 주시기를 이렇게 간청하는 것은 폐하를 귀찮게 하고 폐하께 드려야 할 존경에 어긋나는 것이 오며, 폐하께 무례한 짓을 하는 것이 되오나, 지나친 두려움과 놀람으로 드리는 것이옵니다.
주문모로 말씀하오면, 그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를 외국인으로 알아보게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의복, 언어, 외양 할 것 없이 그를 이 나라 사람들과 구별하게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나이다. 그러므로 그를 오직 백성을 부패하게 하는 도당의 두목으로 밖에는 보지 아니하였고, 또 그러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아 처형되었나이다.
황사영의 공술로 말씀하오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참된 것과 거짓 것을 구별하는 데에 필요한 통찰력과 총명이 모자랐는지도 모를 일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상국(上国)인, 중국인 신부란 말과 모든 강도들의 공술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이 작은 나라가 염려할 이유가 있음을 생각 하올 때, 슬기의 법칙을 따라 그 도당들을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는 위험을 무릅쓸 수가 없었사오며, 아울러 제국의 신하가 되는 왕으로 천자께 그 사정을 보고 아니 드릴 수가 없었나이다.
이렇게 하여 여러 말씀 사뢰는 것이 무례하고 무엄한 것으로 보이겠사오나 이것은 더없이 정직하고 솔직한 말씀이옵니다. 저는 북쪽을 향하여 구름에 쌓인 하늘을 우러러보며, 바라옵건데 하늘은 땅위에 있는 것을 굽어살피소서. 세상을 부패시키다가 사형으로 벌을 받은 강도의 무리로 인하여, 소방에 생겼던 불행한 혼란의 시초와 그 말(末)이 이러하옵나이다.
항예를 따라 판중추부사(判中枢府事)의 직을 가진 조윤대(曺允大)라는 고관을 보내드리오며 부사는 이조판서의 직을 가진 서미수(徐美修) 이옵나이다. 이들은 이 진문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서 조정에 전달하여 천자께 전하여 올리도록 청하는 것이옵나이다.
가경 6년 10월 27일 예부 드림
남한산성 성지
성지 설명 |
☏031-749-8522~3
소재지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이곳에서 1791년, 1801년, 1839년, 1866년에 천주교 신자들이 네 차례 큰 박해 때마다 처형당하였다. 한덕운(韓徳運), 김덕심(金徳深), 정은(鄭殷) 바오로, 정 베드로 등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44위이고 무명 순교자는 70명 이상 350명으로 추산된다.
1868년 3월 15일 김남집, 김문집 김성희, 김차희, 김경학, 김윤희, 최지현(崔址鉉) 심칠녀 등이 오라 줄에 묶여 동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에 시체가 되어 물이 빠지는 구멍으로(수구문) 던져졌다. 그래서 수구문을 시구문(屍口門)이라 불렀다. 지금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 천주교도들을 수감했던 옥 터가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7년 동안 수천 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하기 위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척화비)를 여기에도 세웠다.
성가 236. 사랑하올 어머니
강완숙의 활동 |
說明 |
주문모(周文模) 신부가 입국했다고 밀고한 진사 한영익(韓永益)은 그의 배반에서 아무러한 이익도 얻지 못하였다. 그 해 가을 그는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나라에선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인도하여 들였던 세 사람을 장살로 사형하고, 신부를 잡으려고 사방에 수사망을 펴고 있을 때 주문모 신부는 어떤 집 장작광에 숨어 있었다. 신부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은 이 신입 여 교우는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역사에 큰 역할을 하였으므로 골롬바의 생애를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강완숙은 내포지방 외교인 향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향반이란 양반이 지체 낮은 집안과의 결혼해서 나온 후손을 이렇게 부른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통찰력과 곧고 단단하고 용감한 마음을 아울러 보여 주었다. 그는 나쁜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으며 자기 시어머니의 까다로운 성격을 잘 참아 받았다. 고결한 그의 마음은 벌써 위대한 무엇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불교의 격언을 실천하기에 노력하였으며, 이 종파의 도를 닦는데 전념하기 위하여 속세를 버릴 결심을 가졌었다는 말도 있다.
강완숙은 덕산 고을에 사는 홍지영(洪芝榮)이라는 상처한 향반에게 시집을 갔다. 그 사람은 극도로 순박하고 조금도 총명한 데가 없어, 그와 화합하여 살기가 매우 힘들었고 많은 근심을 겪게 되었다. 강완숙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고, 또 그의 친절과 상냥함으로 꽤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남편의 친척 바오로라는 사람에게서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말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강완숙은 ‘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은 옳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책을 청하여 그것을 읽는 중에 그의 마음은 복음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진리를 깨달았다. 그녀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모든 능력을 기울여 천주교에 열중하였고, 신자 생활의 첫걸음부터 영웅적인 덕행을 갈망하였다.
그녀는 모든 본분을 다하는데 있어서 부지런함과 그의 열심과 극기는 감탄할 만 하였다. 그는 자기 가족과 진척과 친구들을 입교시키는 데 골몰하였고, 그의 열성은 이웃 동네까지 퍼졌다. 그녀는 남편에게 큰 관심을 가졌다. 강완숙이 남편에게 천주교인이 되라고 권하면 그는옳소, 옳아하고 말하였지만, 그 다음 천주교의 적들이 그 교를 비방하면 그렇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물을 흘리며 자기 잘못을 뉘우치다가 나쁜 친구들이 다시 그에게 오면 전과 마찬가지로 행동하였다. 강완숙은 그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 성과도 올리지 못하였으며, 자기는 도저히 남편에게 천주교를 진실한 마음으로 실천하게 만들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완숙은 시어머니를 입교시키는 데에도 전념하였다. 시어머니는 하느님을 섬기고 천주교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상 숭배를 버릴 결심은 하지 못하였다. 끊임없이 시어머니에게 권하고 특히 그의 완전한 회개를 얻기 위하여 하느님께 열렬한 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는 마침내 이루어졌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가묘(家廟)를 쓰고 있는데 별안간 물건 깨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 오고 방의 들보가 흔들렸다. 원인을 찾아낼 수가 없는 그 괴상한 소리에 겁이 나서 그 여인은 며느리에게 달려가 그 품에 안기며 자기의 헛된 미신을 끊어 버렸다. 이 승리를 거둔 뒤 강완숙은 자기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도 입교시켜, 이들 부부는 모두 모범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음식을 만들어 옥바라지를 함으로써 옥에 갇힌 신자들을 도왔다. 그녀는 붙잡혀 홍주 목사 앞에 끌려갔다. 그의 신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무 형벌도 당하지 않고,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석방된 모양이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전답을 남편에게 맡기고 남편과 헤어져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기 딸과 남편의 전실 아들 홍필주 필립보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살았다. 그가 무슨 동기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금욕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저 열심한 천주교인들 가운데에서 살고자 해서 그랬다는 사람들도 있다. 나중에 그에게 내려진 결안에 따르면 남편에게 쫓겨났다고 한다. 과연 그의 남편은 천주교 박해에 놀라기도 하고 또 천주교 도리를 실천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강완숙을 집에서 나가라고 하였는지 모른다.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에 강완숙은 이미 서울에 와 있었다. 그는 지황(池璜) 사바와 그 동료들의 위험한 계획을 돕기까지 하였었다. 신부가 볼 수 있는 모든 여 교우들 중에서 강완숙이 그의 눈에 띄었다. 신부가 도착하자마자 그렇게도 헌신적인 보조자를 만난 것이 매우 기뻐서 주문모 신부는 그에게 성세를 주고 여자들을 가르치는 여회장 직책을 맡겼다. 강완숙은 그 직책을 활발하고 총명하게 수행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고발되어 포졸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 정보를 사전에 알게 된 강완숙은 그를 구할 용감한 생각을 가졌다. 그는 자기 집 장작광에 신부를 숨기고,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까지도 모르게 3개월 동안 주문모 신부에게 음식과 필요한 모든 것을 갖다 드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신부에게 좀더 편한 피신처를 마련하여 드릴 수 없는 것을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러나 자기 시어머니는 자기의 용감한 성격과는 딴판인 것을 보고 그에게 감히 마음속을 털어놓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볼 계획을 세워 거의 계속하여 매일 울고 탄식하기 시작하였으며,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를 잃을까 봐 겁이 나서 그렇게 근심하는 까닭을 물었다. 강완숙은 그의 시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신부님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려고 여기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한일이 없고, 신부님은 지금 피신하실 곳도 없으십니다. 제가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이 생각을 할 때에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남장을 하고 사방을 두루 다녀 신부님을 찾아내어 구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시어머니는 울면서 대답하였다.네가 그렇게 하고 나가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 그러니 나도 너를 따라가서 너와 함께 죽겠다.”
강완숙은 다시 말하였다.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덕행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보고 매우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물론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서 제 목숨을 내놓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는 우리가 신부님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공연히 위험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천주께서 우리의 착한 뜻을 보시고 신부님이 우리가 있는 집으로 오시게 허락하실 지도 모릅니다. 신부님이 나타나시면 어머님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이 거기에 동의하신다는 확약만 주시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저는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시어머니는너하고 떨어지기는 싫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하여라.하고 대답하였다.
강완숙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신부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안사랑에 모셔들였다. 주문모 신부는 거기서 외부 사람들이 양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조선 관습의 보호로 3년 동안 계속해서 머물렀다.
1796년 9월에 주문모 신부는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처지와 조선 천주교회의 현황을 보고하였다. 포졸의 끊임없는 사찰과 특히 국경은 더 엄중하여진 감시로 인하여 그전 해에는 주문모 신부가 편지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덕산 고을 용머리에서 출생한 황심 도마는, 1795년 국경에서 신부를 기다렸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 사람이 밀사로 뽑혔다. 그는 사신 일행 중 한 사람의 하인 자리를 돈을 주고 사야 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라틴어 편지와 교우들의 한문 편지가 쓰여진 명주 두 조각을 주의 깊게 옷 속에 감추어 가지고 길을 떠나 1797년 1월 28일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구베아(Govea) 주교는 주문모 신부와 신자들의 편지를 읽는 동안 극도의 불안에서 가장 생생한 기쁨으로 옮아갔다.
주 신부는 자기 편지에서 조선교회에 평화를 마련하여 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말을 하였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포르투갈 조정에서 사절 한사람을 보내서 조선왕에게 인사를 드리게 하고 그와 동맹을 맺게 한다는 것이었고, 그 사절과 함께 수학과 의학에 조예가 깊은 신부들을 보내면 그들이 이 나라에 자리를 잡을 수 있고, 포르투갈 왕에 대한 경의로 그들을 조선 정부가 호의적으로 대하여 줄 것이라고 하였다.
북경교회에서 포루투갈에 사절 파견을 요청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조선에 아무도 파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말과 이 나라의 풍속을 넉넉히 알게 되자 이내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그러나 한영익의 고발 후부터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신부가 나갈 때에는 강완숙만이 어디에 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모든 거동은 조심스럽게 감추어졌다. 그는 가장 확실한 교우들만 접촉을 가졌고, 특히 지방에서는 조선에 신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까말까 할 정도였다.
신부는 그를 맞아들이는 집안의 식구라도 아무에게나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가 와 있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교우 하인들까지도 그것을 그저 짐작만 하는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 시대의 어떤 교우가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은 발췌 문을 보면 얼마나 비밀이 엄중하게 지켜졌는지를 알게 하여 준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1839년에 순교한 김대보 베드로이다. 그는 이 편지를 조선 천주교 초창기에 관한 모든 기록을 샤스탕 정 신부의 명령에 따라 정성 드려 1838년에 옥에서 썼다. 이 편지에 나오는 이여진 요한은 나중에 북경과 연락을 취하는 것을 보게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내 친척 이여진 요한과 나는 5년 전부터 교우였으나 별로 열심 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우리는 신부 보기를 간절히 원하여, 공직에 있는 내 친구 중 한 교우에게 오래 전부터 진이 빠지도록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룻밤은 내가 그의 집에서 잤는데 아침에 내가 조르는 데에 대한 대답으로 일어나서 장롱에서 버선 한 켤레를 꺼내 주며 신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버선을 내려다보니 어린이조차도 신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장난도 심하구먼. 왜 어른에게 아이 버선을 신으라는 거야.”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천주교는 아주 공평하여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없네. 그것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서 큰 발에나 작은 발에나 다 맞는 이 버선과 비슷한 것일세. 천주교에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만 하면 신부를 볼 수 있네. 그것은 조금만 애를 쓰면 큰 발에도 얼마든지 신을 수 있는 이 버선과 같은 것일세. 나는 과연 그것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질문을 거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도 더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디를 가나 절대적인 침묵뿐이었습니다. 요컨대 이여진 요한과 나는 우리 집에서 140리 떨어진 서울을 차례차례 여덟 번을 왕래하였으나 언제나 허사였습니다. 이여진 요한은 좋은 기회를 더 쉽게 잡기 위하여 가족을 버리고 서울에 와서 살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부를 보는 위안을 결코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신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게 되니 우리의 후회는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강완숙 골롬바는 겁을 내지 않고 폐궁에 사는 왕족인 이인의 아내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에게 전교 하였다. 그들은 둘 다 매우 열심하여 그들의 종 여러 명을 입교시켰으며 명도회(明道會)에도 입회하였다. 그들은 신부를 궁중에 모셔들이는 것을 기뻐했다.
신부를 헌신적으로 보좌하여 드린 강완숙 골롬바가 잡힌 후 관리들은 그에게서 신부가 숨어 있는 곳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무서운 주리를 틀었다. 그러나 그 흑형 가운데에서도 강완숙은 입을 열지 않고 마치 감각이 없는 사람 같아 형리들은 자기들끼리저건 여자가 아니고 귀신이다.”하고 말할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나약한 표를 보이기는 고사하고, 옥중 관리들 앞에서까지 그의 사도직을 계속하여, 천주교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끊임없이 주장하며, 공자와 그 밖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들의 글에서 증거를 끌어내어, 자기 말을 뒷받침하였다. 관리들도 감탄하며 강완숙을유식한 여인, 비길 데 없는 여인이라는 말로만 그녀를 표현하고 기막힌 여인이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비상한 놀라움으로 생기는 아연자실을 뜻하는 조선식 표현이다. 그들은 그때문에 더욱 그녀를 배교 시키려고 가장 심하고 잔인하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벌을 썼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녀의 초자연적인 인내에 지고 말았다.
강완숙의 신앙은 그의 모성애에도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이겼다. 그와 같이 잡혔으나 다른 옥에 갇혀 있던 그의 전실아들 홍필주(洪弼周) 필립보는 형벌 중 마음이 약하여지는 것 같았다. 강완숙은 그 말을 듣고 그가 옥에서 법정으로 가던 어느 날 먼발치로 아들을 보고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예수께서 네 머리 위에서 너를 보고 계시다. 네가 그렇게 눈이 어두워 스스로 멸망할 수 있느냐? 내 아들아, 용기를 내고 천당 복을 생각하여라.그녀의 이 용감한 격려가 젊은이의 영혼을 구하였으니, 그는 어머니 강완숙의 말에 힘을 얻어 몇 달 후에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강완숙은 옥에서 주문모 신부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그는 자기 옷자락을 찢어서 거기에 선교사의 사도적 업적을 썼다. 그렇게도 잘 알려졌던 여인에 의하여 옥에서 쓰여진 주문모 순교자의 행적은, 그 비단 조각을 맡았던 여 교우의 소홀함으로 불행하게 없어지고 말았다.
강완숙과 함께 갇혀 있었던 그 고통스럽던 옥을 동료들과 같이 열심한 기도의 장소로 바꾸어 놓았었다. 신심 행사에 충실하면서 그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들이 합당하게 천상 배필이 되려는 생각뿐이었다. 천상 배필은 그 갚음으로 그들을 명백히 보호하여 주었다. 제헌의 시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더욱 기뻐하였고, 특히 그들이 죽기 전날은 기쁨에 취한 것 같았다.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리고 그렇게도 열렬히 바라던 승리의 날이 밝았다. 5월 23일(양력 7월 3일), 강완숙과 동료 4명이 수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그치지 않았다. 군중은 그들의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형장에 이르러 강완숙 골롬바는 사형을 주재하던 관리에게로 몸을 돌려 말하였다.
‘법에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고 명하였으나, 여자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을 것이니,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게 알리시오.하였다. 그의 뜻대로 허락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배필들은 크게 만족하였다. 그때 강완숙은 십자성호를 긋고 맨 먼저 머리를 형리에게 내밀었다.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녀와 같이 참수 당한 부인들은 강경복,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였다.
홍필주는 강완숙의 남편인 홍지영의 전처 소생이었다. 그는 언제나 강완숙 골롬바의 아들로 불리었다. 그는 늘 강완숙과 같이 있었고, 그를 따라 서울에 왔으며 언제나 자기 친어머니처럼 대접하였다. 그들이 신부를 집에 모셔들였을 때 홍필주 필립보는, 신부의 복사가 되어 모든 도움을 드렸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성가 59. 주께선 나의 피난처
군란 중에 헤어진 부부 |
줄거리설명 |
육모방망이를 손에 든 포졸 몇 명이 건너편 집으로 들어서며 그 집주인을 느닷없이 후려치는 소리가 들리고 또 저 아래편에서는 다른 포졸패가 올라오는 모습이 울타리 사이로 확실하게 보였다.
비리버는 황급히 자기 집으로 달려가 보니 데레사가 무심코 부엌에서 저녁상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부엌을 통하여 뒤꼍으로 빠지면서
“포졸이 동네에 들어왔으니 얼른 몸만 빠져 나를 따르오.
라고 독촉을 하면서 울타리를 뚫고 나섰다.
데레사가 그 길로 자기를 따라 나서는 것을 보았고, 뒤에 따라오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뒷산으로 치달아 도망칠까 하다가 아내가 너무 힘들까 해서 산등성이를 엇비슷하게 기어올랐다. 아내는 삼십여 보 떨어져서 자기를 따르는 모양이 나무 사이로 희끗희끗 보였다. 얼마쯤 이렇게 달아나다가 조용한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런데 자기 뒤를 따라온 여자는 데레사가 아니고 이웃집 여 교우였다. 조금 떨어져서 그의 장부 박 서방도 따라왔다.
우리 내자는 어디쯤 따라오는가요?
하고 비리버가 물어 보니 그들은 뜻밖이라는 듯 데레사를 본 일이 없고, 자기들은 데레사가 앞에 먼저 가는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비리버는 앞길이 막막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간다. 자기가 부엌을 지나 울타리를 뚫고 나설 때까지는 분명히 데레사가 자기 뒤를 따랐다. 이제 생각하니 데레사가 그때 아들 바오로를 둥에 업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내가 자기를 따라오다가 바오로를 업고 가려고 다시 집으로 뛰어들어간 동안에 이웃집 내외가 자기 뒤를 따라 온 것을 자기는 데레사가 따라오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니, 십중팔구 다시 집으로 들어가 방에 있는 바오로를 업고 나오다가 포졸에게 잡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리버는 데레사가 포졸에게 결박당하여 갖은 고생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린다.
두 주먹을 꼭 쥐고 마지막 등성이에 올라가 동네를 바라보니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비리버는 이제 포졸도 겁날 것 없다고 딱 버티고 있자니까 저편에서
아, 이거 성철이 아닌가!
하고 말문을 여는데 가만히 보니 한동네 사는 김군서라는 교우다.
아, 군서인가. 자네는 왜 도망가지 않고 여기서 벙벙 돌고 있나?
말 말게. 나 혼자만 살아 무엇한담!
자네도, 그럼 처자를 잃은 모양일세 그려.
나는 나무를 한 짐 해 가지고 오니까 복돌이가 그러는데 동네에 포졸이 들어와 천주학쟁이들을 잡아가니 당신도 천주학 하거든 동네로 들어가지 말고 얼른 도망가라고 그렇겠지.
그래서…….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하고 그놈 보는데서 도망 갈 수야 있나? 그래, 시치미를 떼고 별 소리를 다한다고 그놈에게 핀잔을 주고 그대로 나뭇짐을 지고 동네로 들어서다 쇠명이네 집 모퉁이를 돌자니까 아닌게 아니라 사람 패는 소리가 들리고 온 동네가 떠들썩한걸 보니 사실이거든.
그럼, 자네 처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 모르겠네 그려.
그래서 곧장 우리 집으로 쫓아가 볼까 하다가 생각하니 그게 쓸데없는 일이거든. 그쯤 되었으면 벌써 잡혔든지 어디로 도망했을 테니 들어가면 무엇해. 그래서 거기다 나뭇짐을 내려놓고 작대기를 들고, 나도 산으로 한참 돌아다니다가 철석이를 만나 소식을 들어 보니 우리 집 사람도 잡혀갔다네.”
비리버는 그의 손을 잡고 좀더 높은 데로 올라가 솔포기 뒤에 앉아서 사방을 둘러보며 자기의 경우를 이야기하였다. 자초지종을 듣던 군서는
그러면 십중팔구 잡히셨지. 포졸들이 자네 뒤를 그대로 쫓아왔을 텐데 달아나다가 다시 들어가서 바오로를 업고 나설 때는 그놈들이 벌써 자네 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테니까…….”
그러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자네는 자네 혼자 살고 싶은가?
그러기에 나도 다시 돌아가서 곧장 동네로 뛰어 갈까 하고 생각하는 판에.”
안돼, 지금 거기는 여러 놈들이 있을 테니까……. 이제 저놈들 한패는 동네에 처져 있고 한패는 잡은 사람들을 끌고 내려갈 테니까 그때 어떻게 손을 써보세. 이렇게 의논만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겠네. 그래도 자네를 만났으니 다행일세. 자 나를 따라서게.”
하고 군서가 성큼 일어섰다. 비리버도 그 뒤를 따라 서니 마음이 한결 든든하다. 군서가 산비탈로 내려가다가 팔뚝만한 참나무 가지를 잡아채어 분질렀다.
빌어먹을 것 있는 기운 이런 때 안 쓰면 언제 쓴단 말이냐!
그는 몽둥이 두 개를 손쉽게 만들어 비리버에게 하나 주고 자기도 하나 들었다. 두 청년은 아무 말 없이 산비탈을 내리달려 평지에 내려와 동네에서 두 마장쯤 되는 산모퉁이에서 우뚝 섰다. 서로 무슨 귀엣말을 주고받더니 길 양편으로 갈라서서 덤불 뒤에 몸을 감추었다. 사방은 고요하고 두 청년의 가슴은 극도로 긴장되었다.
얼마를 지난 후 동네 쪽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온다. 담뱃불도 반짝거린다.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포졸들이 분명하다. 남자 하나와 여자 몇 명을 끌고 가는 것이다. 그 뒤로 좀 떨어져 짐꾼 두 명이 따라온다. 동네에서 노략질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다.
군서와 비리버는 각각 저 여인들 중에 자기 아내가 묶여서 가고있다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에 피가 꿇어 오른다. 포졸들의 일행이 점점 가까이 와 덤불사이를 막 지날 때 돌연 군서가 벽력같은 소리로
이 도적놈들, 여기 있다!
하고 외치며 비호처럼 달려들어 포졸 몇 놈을 후려갈겼다. 참나무 몽둥이에 얻어맞은 그들은
에쿠!
하고 비명을 지르며 자빠지고 그 다음 놈이 군서에게 덤벼들 때 뒤에서
이놈들 내 칼 받아라!
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비리버의 몽둥이가 그들의 어깨를 후려쳤다. 이 불의의 습격을 당한 포졸들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달아나는 놈에, 엉덩방아를 찧는 놈에, 머리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는 놈에 수라장이 되었다.
비리버는 날래게 교우들의 결박을 풀어주고 그들을 인솔하여 산 위로 치달았다. 군서는 뒷일을 막느라고 아직 몽둥이를 휘두르며 엄포 하다가 비리버가 얼마쯤 달아난 다음에 자기도 그 뒤를 따랐다.
포졸들이 정신을 수습하여 보니 청년 두 놈에게 당했으니 분하기 짝이 없다. 달아났던 자들이 하나씩 둘씩 돌아와 다시 그들을 추격하자고 의논했다. 몽둥이로 얻어맞은 자들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엄살만 떨고 있다.
비리버와 군서는 산 아래가 조용하다가 차차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므로 혹시 포졸들이 다시 추격하여 올라오는가 하여 농짝 만한 돌덩이를 굴리면서 달아난다.
우지끈 뚝딱.”
불똥을 튀기며 기세 좋게 내리구르는 돌덩이는 다시 추격하자는 포졸들의 공론을 깨뜨려 버렸다.
여보게, 저놈들 쫓아가다가는 우리가 먼저 죽겠네!
어이구! 이놈들아. 우리 원수 안 갚고 그만둘 테냐?
몽둥이로 대가리를 얻어맞은 자가 이렇게 부르짖는다.
이놈아,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사실 그놈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이렇게 그들은 뒤통수를 치고 돌아서 버렸다. 비리버 일행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숨을 돌리려고 한자리에 모였다. 크나큰 모험을 치러 가면서 빼내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서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자기 아내도 그 중에 있으리라고 믿었던 희망은 여지없이 깨어진 비리버는 그만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그들 역시 데레사에 대한 소식은 천연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서 두 차례나 남녀 교우들이 잡혀갔으니 혹 그 중에 끼어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군서는 자기 아내를 만나 만족해할수록 비리버의 가슴은 허전하고 쓸쓸하다. 군서 내외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비리버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데레사 생각으로 꽉 차 있을 뿐이다. 그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앉아서 이따금 한숨을 내쉬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홀연히 벌떡 일어서며
이제 나는 나대로 데레사를 찾아 나서겠네.”
하며 그들에게 작별을 선언했다.
☞전국 성지 순례 코스☜
1. 전국성지 순례의 의미
전국의 주요 성지와 유적지를 15개 코스로 나누어 성지 안내 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관련된 행적들을 묵상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의 박해 상황, 서간이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겨 보는 1일 성지순례 피정입니다.
2. 순례코스
제 1차 명동성당,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성지.
제 2차 단내성지, 어농, 천진암 강학터, 남한산성성지.
제 3차 치명자산성지, 전동성당․풍납문, 전주숲정이성지.
제 4차 배론성지, 묘재, 부엉골신학당, 세종대왕 능.
제 5차 갈매못성지, 다락골줄무덤성지, 홍성읍성성지.
제 6차 마원 성지, 최양업선종지, 연풍 성지, 감곡성당.
제 7차 황새바위성지, 수리치골, 여사울, 신리성지.
제 8차 풍수원 성당, 마재성지, 구산 성지
제 9차 여산숲정이성지, 천호산성지, 성거산성지
제10차 삼성산 성지, 수리산 성지, 미리내 성지,
제11차 배티 성지, 죽산 성지, 골배마실.
제12차 초남이 유항검 생가, 나바위 성당.
제13차 해미성지, 솔뫼성지, 공세리 성당.
제14차 갑곶돈대성지, 이승훈묘성지, 남양성지.
제15차 대구 관덕정성지, 한티성지, 신나무골성지,
3. 준비 사항
◉ 안 내 : 한국순교자 현양회 성지안내 봉사자회
◉ 출발 및 도착 : 아침 8시 신청한 성당에서 출발 오후 8시 도착예정
◉ 신 청 : 본당 또는 단체별로 버스 1대 40명 기준
◎ 순교자현양회 주소 : 서울 중구 저동 1가 2-3 평화빌딩 3층
◎ 안 내 전 화 : 순교자현양회 사무국 02-2269-0413~4 F 02-226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