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수영구 수영동 229에 소재한 경상 좌수영지에 다녀왔습니다.
♤ 수영성 남문
(부산시 유형문화재 17호).
수영성 4대문중 하나로 홍예(성문등을 무지게 모양으로 축조한 구조물)와 조선개 박견 한쌍과 좌우 성곽이 남아있다. 숙종 18년경에 축조하여 1960년에 이전하여 보존되고 있는데 현제 앞뒤에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으며, 좌우 10여미터의 성벽도 남아있다. 전면 홍예기석 앞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중돌 기둥위에 박견(拍犬-조선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있다. 박견을 성문앞에 둔것은 좌수영의 왜구 움직임을 감시하고 지켜주는 역활을 하였다고 추정된다. 이형태의 돌조각상이 성문옆에 있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수없는 독특한 구조물이다.
♤ 수사 선정비.
경상좌수영의 역대 수사들의 공덕을 세긴 비석들 (33개)이 성지내에 보관되어 있다. 그 모양과 크기는 각양각색의 공덕비였다.
♤ 수영고당.
우측은 독신묘(경상좌수영 병영의 군기를 모시는 신당)와 촤측은 수영 산신당(송씨 할매당-일제때 왜병에 항거한 정신을 숭배하는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의 안정과 평온을 기원하는 전통 제례가 매년 음력 1월 15일 거행된다.
♤ 푸조나무와 곰솔나무.
푸조나무는 500년이 넘는 마을의 수호 당산목로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으며, 기도하면 부부가 백년해로 한다고 한다.
곰솔나무는 450여년이된 나무로 줄기와 껍질의 색이 일반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 흑송 " 이라고도 하며 조선수군들이 군식목으로 신성히 여겼다고 한다.
♤. 25 의용단.
임진왜란시 수영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저항하다가 죽은 성민 25인 의용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수사가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왜군은 약탈과 살육을 일 삼았다. 남은 수군과 성민 25명은 성문밖에 모여 { 싸우면 이겨서 살것이며 싸우지 않으면 망하리로다. 나라의 흥망이 경각에 있거늘 어찌 삶을 구할까 단 한번의 죽음으로서 나라에 보답하리다 } 라고 결의하고 분연히 일어나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모두 죽었다.
1609년 동래부사 이안술이 지방민들의 청원으로 그 사적을 모아 정방록에 싣고 집문에 "의용"의 패를 달았다. 순조때 동래부사 오한원은 후손들에게 부역을 면제하고 포상하였다. 철종(1853년)때 경상좌수사 장인석이 비석을 세우고 매년 2회 제향했다. 헌제는 음럭9월말 정일에 제향한다.
♤ 수강사(독도는 우리땅 - 안용복 장군 사당).
숙종때 수영출신 어민으로 좌수영 수군인 능로군이 였다. 당시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죽도"라고 하며 자주 침범하자 장군이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땅임을 확인시키고 "에도막부"에게 다시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 오기도 했다. 울릉도와 독도 수호에 큰 업적을 세워 장군칭호를 받았다. 1967년 장군의 업적을 후세에 기리고자 사당과 충혼탑 및 동상을 건립하였다.
이외에 수영성의 옛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한 수영사적원이 있다. 경상 좌수영은 성지만 이곳에 남아있으니 아쉽기만 할 뿐이다. 조속히 복원사업이 이루어 지길 고대해 본다.
첫댓글 고생많으셨습니다.
수영성 아래 맛있고 가성비 좋은 식당도 하나 있는뎅?..ㅎㅎ
고맙습니다.
가성비 좋은 식당 저에게도 알려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좋은 답사지 소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영복 장군은 안용복의 오자이겠지요?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는 안용복 생가터 안내판을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문안은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하네요.
<안용복은 수군 군졸출신의 평범한 어부였으나 숙종 19년과 22년 2차례에 걸쳐 울릉도와 독도를 침탈한 일본인들을 몰아내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막부로부터 ‘독도가 조선땅’이라는 공식 외교문서를 받아왔다>
예.
안용복을 오기했읍니다.
지적해주시어 고맙습니다.
생가터에 꼭 다녀오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