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장 여인(女人)의 길
마침내 이 땅 위에 위대한 여신(女神)처럼 군림하던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씩 망각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한백의 위대한 무공만능인간도 아니었으며, 정파의 위대한 우상인 빙녀(氷
女)도 아니었다.
오직 여자!
그것도 뜨거운 여자였다.
그녀는 하복부로부터 사지까지 꿰뚫는 거대함에 이따금씩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
다.
이십팔 년인가?
그렇다.
정확히 이십팔 년 동안 그리도 소중히 아껴온 그녀의 비궁은 그녀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희열과 고통에 전율하고 있는 것이다.
신월빙작의 신음성은 점점 더 고조되었고, 그녀의 몸은 활처럼 휘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그녀의 귀로 철류향의 억양없는 음성이 이어졌다.
"움직이지 못하는 여자를 상대하는 것은 역시 재미가 없다."
찰나 절정의 쾌락에 신음하던 신월빙작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극히 순간적이나마 철류향의 억양없는 음성에 마비되었던 그녀의 이성이 되살아난 탓이었
다.
탁탁탁!
바로 그때 철류향의 손이 그녀의 천지, 대거, 장문의 세 혈도를 쳤다.
더불어 막혔던 혈이 타동되고 그녀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았다.
그와 함께 그녀의 마비된 이성을 더욱 일깨우는 철류향의 차가운 음성이 그녀의 귀를 파고
들었다.
"움직여!"
"……!"
"움직여서 나를 기쁘게 해봐!"
찰나 그녀의 눈빛이 싸늘한 살기로 번뜩였다.
그녀의 손이 바르게 펴지고 그것은 곧바로 예리한 수검으로 변했다.
'더러운 놈! 너는 내 손에 죽는다!'
그녀의 손은 수직으로 철류향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혔다.
그러나 그 손이 막 철류향의 머리를 박살내버릴 찰나 그녀의 손은 힘없이 내려졌고, 그 손
은 오히려 철류향의 등과 머리를, 마침내는 얼굴까지 소중히 어루만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
가?
설추화여…….
무공만능인간이여!
너는 마침내 운명처럼 여자가 되어버린 것인가?
드디어 그녀의 몸은 사내를 향해 적극적으로 열렸다.
그녀는 되도록이면 사내를 깊숙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으며, 전신은 활처럼 휘어졌다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절정의 폭발을 경험했으며 죽음보다 진한 아득한 나락의 쾌락에 불덩이
같은 신음을 내쏟았다.
"그렇지, 그렇게 나를 즐겁게 하는 거야."
"음……."
"그리고 너는 잘 생각했어! 만일 너의 손이 나의 머리를 내려쳤다면 그 순간 죽는 자는 내
가 아니라 너였을 게야."
신월빙작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엄청난 쾌락 속에서…….
그때 철류향의 음성이 이어졌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고 이토록 관대한 것은 그래도 네가 나의 볼모시절 중 내게 가장 진실
했기 때문이야."
마침내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말이 흐르지 않았다.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두 개의 육체는 오직 절정의 폭발을 한 번이라도 더 경험하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를 계속했을 뿐이다.
* * *
"이놈이…… 내 여인을……."
미청년의 입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분노음이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백의에 흰빛의 섭선.
그리고 절세의 미안을 지닌 이십팔구 세 가량의 청년.
그는 다름 아닌 신월천작 연세군이었다.
어둠 속에서 불빛과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는 방을 향한 그의 시선에서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주공을 사랑하고, 주공의 여인이라고 생각해서 본 작도 그녀의 사랑을 구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수목의 가지를 우두둑 꺾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내 마음 속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네놈이 내 여인을 겁탈……."
툭!
또 하나의 나뭇가지가 절단되어 가는 그의 마음처럼 꺾여졌다.
"죽일 것이다. 네놈을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죽일 것이다."
투툭!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진 천라지망을 네놈이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두고 볼 것이다. 그
리고 최후의 잔인한 죽음은 우리 무공만능인간들이 내릴 것이다."
동시에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섭선에 중후한 내공을 실어 허공으로 날렸다.
슈우욱!
섭선이 허공 백여 장을 치솟았을까?
그것이 돌연 현란한 흰빛의 광채를 천지사방에 순간적으로 흩뿌려내는 것이 아닌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아주 순간적으로…….
슈우욱!
다음 순간 허공에서 엄청난 조화를 부렸던 섭선은 신월천작 연세군의 손으로 거짓말처럼 빨
려들었다.
연세군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것으로 천라지망은 발동되었고 너는 죽는다. 아주 잔인하게……."
* * *
"지금까지 사내의 손이 내 몸을 스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죽기를 바라
지 않는 것이다."
긴 폭발의 열정이 지나가고 신월빙작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서 말했다.
철류향은 대답대신 그녀의 나신에서 떨어져 무표정하게 옷을 걸치고 있었다.
"너는 보았을 것이다. 비록 네 한 몸에 지닌 무예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는 하
나……."
"……."
"둘 이상의 무공만능인간들이 너를 죽이려 한다면 결단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철류향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말을 내뱉고 있는 신월빙작을 바라보았
다.
신월빙작은 입술을 깨물듯 쉬임없이 말을 흘려냈다.
"이미 이곳에는 나를 제외한 네 명의 무공만능인간들이 와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이
백 리 이내에는 본 벽의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다."
"……."
"네가 이 죽음의 사역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너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 무공만능인간들은 대번에 너의 정체를 파악했다. 너를 이 호구로 끌어들
인 무공만능인간들의 능력을……."
순간 철류향이 다소 차가운 음성을 흘려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떻다는 것이오?"
신월빙작은 이불을 목까지 덮은 채 여전히 두 눈을 감고 뜰 줄을 모른다.
부끄러움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의 고귀한 자존심을 지키려 함인가?
그러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어 철류향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는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
"네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너는 즉시 이곳을 빠져나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
다."
"……."
"동쪽에는 황야와 호수와 천연의 자연적인 험지가 즐비하게 놓여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본
벽의 천라지망이 가장 약하게 펼쳐진 곳이다."
"……."
"너의 무공, 너의 지혜, 그 모든 것을 최고로 이용한다면 어쩌면 너는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철류향이 그녀를 싸늘히 내려보며 말했다.
"나는 그보다 훨씬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들어보겠소?"
신월빙작은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인질로 하여 이 호구를 벗어나는 것이오."
순간 신월빙작의 차가운 안면이 일순간 석고처럼 굳어졌다.
피를 나누었고, 살을 섞었으며, 서로의 숨결을 진하도록 느꼈기에 그래도 그녀는 조금이나마
이 사내의 불행한 운명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한 올의 인정도 찾아볼 수 없는 사내의 싸늘한 냉정함!
철류향은 그 냉정이 흐르는 음성을 다시 흘려냈다.
"나는 애초에 나를 향해 좁혀드는 거대한 천라지망을 느끼고 있었소."
"……."
"바로 그것이 당신을 찾아 도박을 청한 이유였소."
"……?"
"나는 당신을 인질로 하여 시시각각으로 좁혀오는 천라지망을 벗어나고 싶었으므로……."
신월빙작의 몸은 싸늘히 굳은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냉혈인!
아무리 불행과 한(恨)을 업보처럼 짊어지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미 서로가 서로를 진하게 느
낀 후인 지금에도 타인의 냉정만이 몸서리치게 남아있다니…….
그녀는 울컥 치미는 분노의 음성을 터뜨렸다.
"과연 그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다. 어서 나를 개처럼 끌고 이 천라지망을 빠져나가라."
신월빙작 설추화는 여전히 두 눈을 질끈 감고 어떻게 분노를 삼켜야 할지 모른 채 얼굴을
석고처럼 굳히고 있었다.
그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철류향의 음성이 그녀의 귀에 부서졌다.
"빙작, 그러나 지금은 아니오."
"……!"
"왜냐하면 나는 빙작의 진실을 알았고, 또한 빙작은 내게 있어 최초로 특별한 여인이 되었
기 때문이오."
오오…… 이 음성!
그녀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 부드러운 음성.
그녀의 차가운 가슴은, 그녀의 얼음처럼 차가운 영혼은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아름다운 감동
으로 녹아내리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녀도 결국은 그저 여자일 뿐이었다.
그녀의 석고처럼 굳은 눈썹을 밀어올리며 한줄기 눈물이 맺혀나올 때, 또다시 뜨겁고 촉촉
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신월빙작은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입을 열기만 하면 그대로 눈물이 솟구쳐 목메임으로 끝나버릴 것 같아서…….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헤집고 들어온 사내의 설육을 그저 아름다운 감동으로 받아들일 뿐이
었다.
그때 철류향은 그녀의 달콤한 입술에서 설육을 빼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우리는…… 나는 당신을 오래 전부터 용서하고 있었으니까. 안
녕…… 설추화……."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온몸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마침내 철류향은 떠난 것이다.
호흡도, 체온도, 숨결도 남겨놓지 않은 채…….
그러나 그녀는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녀는 위대한 사랑의 광휘에 젖어 그가 남기고 간 말들을 일일이 기억해내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특별한 여인이 되었다. 내가 그에게…….
그는 다시 만나게 됨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는 내게 마지막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여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완전한 그의 여인이…….
아아…… 류향!
나의 사람…….
* * *
금릉성 외곽 십여 리.
황야.
그곳은 저 너머 거대한 호수와 연하여 있는 탓으로 진흙빛의 무성한 갈대가 바람에 스산히
울고 있었다.
아침의 여명이 희미하게 움터올 때, 눈부신 자태의 백의미청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청년의 아름다움을 따를 수 없는 천하제일의 미장부였다.
그는 바로 완전한 자신의 얼굴로 되돌아온 철류향의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지금 그의 마음은 긴장으로 바싹 굳어 있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살인대(殺人隊)가 바로 이 황야의 갈대밭에 도사리고 있음을!
한 걸음, 또 한 걸음…….
저벅 저벅
철류향의 걸음걸이조차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로 그때 하나의 구릉을 이루고 있는 동쪽의 언덕에 금의(金衣)과 흑의(黑衣)를 걸친 두
인영이 나타났다.
감정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색인간의 검수(劍手)들.
바로 그들을 기점으로 육칠십여 명의 무색검수(無色劍手)들이 환상처럼 솟아났다.
스스스스
츠츠츠츠
동시에 그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철류향을 가운데 두고 포진해왔다.
드디어 무색검수들은 우뚝 걸음을 멈춘 철류향을 가운데 두고 원진을 이루었다.
그들 중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금의와 흑의의 무색인간이 합창하듯 입을 열었다.
"너를 기다렸다!"
"나 또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이 필요없었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아 남느냐, 그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철류향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자신의 앞에 솟아있는 갈대 하나를 꺾어 손에 쥐었다.
"후후후……."
철류향의 행동을 지켜보던 무색검수의 입에서 가소로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스르릉
일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아든 무색검수들!
검빛만 보아도 그 검들이 보검임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갈대와 보검의 대결!
그것도 일대 칠십의 대결!
무색검수의 입에서 가소로운 웃음이 터지는 것도 당연했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의 무공(武功)을 지닌 신월천벽의 용병(勇兵)들이 아닌가?
스으읏
바람이 밀려오듯 포위망은 좁혀졌다.
이제 상대의 검기를 전신에 느낄 수 있는 지척의 거리!
바로 그때 무표정하던 철류향의 얼굴에 한줄기 냉혹한 웃음이 흘렀다.
"나는 오래 전에 황야를 방황하며 한 초(招)의 무공을 창안했지. 아주 오랫동안 그 무공을
펼쳐볼 기회가 없더니 오늘 그 무공을 시험할 기회가 생겼군."
"……."
"……."
"나는 그 무예를 야혼파천황(野魂破天荒)이라 칭했는데 구경해 보겠나?"
"후후후……."
"후후후……."
무색검수들은 음산한 웃음으로 철류향의 음성을 묵살했다.
스으읏
접근!
일 장의 거리가 반 장으로, 다시 칠 척으로…….
"하앗!"
검수들의 입에서 일제히 황야를 뒤흔드는 기합성이 터져나왔다.
철류향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그는 손에 쥔 갈대를 수직으로 세웠다.
돌연 그 갈대가 예리한 핏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오오…… 그것은 철류향의 기가 그 갈대에 어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우우웅
동시에 갈대가 천고의 신병(神兵)처럼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흠칫!
무색검수들은 놀란 표정을 띠었다.
"크큿!"
"크훗!"
그러나 그들은 차갑게 웃으며 벼락처럼 수중의 검을 펼쳐냈다.
콰아아아
콰아아앙
검빛은 천지(天地)를 광휘로 뒤덮으며 우주를 박살낼 듯 펼쳐졌다.
그 엄청난 검광(劍光)과 검기(劍氣)와 검강(劍 )의 소용돌이!
그 구심점에서 갈대 하나에 내력을 실어내고 있던 철류향의 눈빛에서 싸늘한 냉기가 폭출되
었다.
스르릉!
다음 순간 천고의 신병이 허공을 가르며 용트림을 하듯 그의 갈대가 수평으로 변화를 일으
키고 그의 몸이 찬란히 허공으로 솟구쳤다.
슈아앙!
"야혼파천황!"
* * *
퓨퓨풋!
수십 줄기의 혈광(血光).
그것은 바로 예리한 신병으로 변한 갈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침의 여명을 일시에 차단하는 빛이었으며, 그 빛은 철류향이 갈대를 휘두
름에 따라 더욱 가공하게 폭출되었다.
꽝! 꽈르르!
쿠쿠쿵!
지축이 뒤흔들렸으며 갈대는 뿌리째 뽑혀 허공을 자욱이 메웠다.
그리고 비명이 울려퍼졌다.
"크아악!"
"으악!"
"크으윽!"
천지는 또다시 비명과 더불어 피와 몸통이 분리된 인육과 머리통으로 가득 메워졌다.
후두두둑!
우박이 떨어지듯 그 모든 것들이 떨어지고 장내는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오오…… 보라!
칠십 명에 이르는 무색검수들의 몸체는 형체도 없이 짓이겨져 바닥에 나뒹굴었으며 그들의
손에 쥔 검(劍)들 또한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널려 있었다.
하나의 갈대로 수십 개의 신병을 베었으며 수십 명의 절정고수들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실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이 가사의 신기!
철류향은 아침의 여명을 등에 받으며 이미 저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동서(東西)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광활한 호수(湖水)가 자리잡고 있었다.
몇 개의 섬[島]과, 그 섬에 우거진 수목과 아침의 햇살은 이 호수를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게 했다.
<대금릉호(大金陵湖)>
이 호수는 어떤 면에서는 금릉의 젖줄과도 같은 곳이었다.
바로 이 호수의 저편 갈대숲에서 하나의 인영이 불쑥 솟아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철류향이었다.
그는 배 한 척 떠 있지 않은 이 광활한 호수를 건너려는 듯 성큼 호변으로 걸음을 옮겨오고
있었다.
"끼끼끼……."
"끄끄끅……."
한데 돌연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한 괴성(怪聲)이 천지사방을 메우며 터져나왔다.
펑! 펑!
소리와 함께 지면이 터지며 그 속에서 불쑥불쑥 기이한 사람들이 솟아나왔다.
그들의 뻣뻣한 전신은 청동빛을 띠고 있었으며, 두 눈은 움푹 꺼져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몸에서는 구토를 치밀어 오르게 하는 심한 악취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일시에 호면을 가득 메우며 철류향을 가로막았다.
어림잡아도 이백 명이 넘어 보이는 괴인(怪人)들.
흠칫!
걸음을 멈춘 철류향의 동공에 빠른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저것은 바로 불사(不死)의 신력(神力)을 지녔다는 천년강시(千年 屍)가 아닌가! 이미 죽은
시신들을 끌어내 백 일 동안 생혈(生血)에 몸을 담그고…… 사파의 사악한 대법(大法)으로
십 년 동안 사혼령(死魂靈)을 불어넣어야 만들어진다는…….'
철류향의 얼굴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소위, 정(正)을 표명하는 네놈들이 이토록 사악한 수법을 사용하여 천하를 노리고 있었다
니…… 대천오비와 아버님의 추측이 들어맞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철류향은 더욱 싸늘한 냉기를 피워내며 성큼 천년강시들을 향해 다가섰다.
"키키……."
"끄으으……."
때를 같이하여 천년강시들도 소름이 돋는 괴성을 지르며 껑충껑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앗!"
철류향의 입에서 호변을 짜르릉 울리는 기합성이 터졌다.
퓨슈슈슉!
그의 열 손가락에서 가공할 금빛 지력(指力)이 폭출되었다.
그것은 바로 대천오비 중 옥면천군의 성명절기인 천파금강탄지였으며, 일시에 철판을 뚫고
수천 근의 바윗덩이를 재로 만드는 위력이 있는 가공무예였다.
펑펑펑!
천파금강탄지는 그를 향해 덮쳐오는 천년강시들의 몸을 사정없이 격타했다.
그러나 그 가공할 천파금강탄지를 맞고도 천년강시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것이 아닌
가!
일순간 철류향의 안색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왜냐하면 공격을 한 자신의 팔이 도리어 거대한 반탄력에 의해 시큰거렸으며, 지풍(指風)을
맞은 강시들은 더 흉맹한 괴성을 지르며 질풍처럼 덮쳐들었기 때문이다.
"크크……."
쉬익
그 찰나 푸른 인광이 번뜩이는 한 강시의 손이 철류향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헉!"
찌 익!
철류향은 간신히 옷자락을 찢기며 피해냈다.
그러나 왼편 옆구리가 화끈거렸다.
'이 천년강시들은 이미 금강불괴지신이 되었단 말인가?'
철류향은 경악과 함께 재빨리 하나의 갈대잎을 꺾어 들었다.
이어 갈대잎에 극맹한 내력을 실어내며 그의 몸이 빛처럼 허공을 날았다.
"하앗!"
번 쩍
그의 갈대잎은 예리한 신병으로 변하여 한 강시의 가슴을 격타했다.
차앙!
마치 두꺼운 철판을 두드린 망치가 튀어나오듯 그의 신병은 퉁겨져 나왔다.
"음!"
철류향의 입에서 다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그가 갈대잎에 실은 극맹한 내력은 일시에 천지(天地)를 박살내고도 남을 신력(神力)이 깃
들어 있었으나 천년강시의 몸은 흠집 하나없이 멀쩡했다.
'아…… 신병으로도, 내력으로도 통하지 않는다면…….'
철류향은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이 전신에 소용돌이침을 느꼈다.
그리고 천하를 움켜쥐고 피의 증오를 뿌리려 하는 신월천벽의 무서운 힘을 다시 한 번 절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피리소리가 주위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삘삐리 삘피리
지하(地下)인가, 허공인가?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피리소리가 대지를 질타했다.
동시에 강시들의 몸이 허공에 붕붕 뜨는가 싶더니 피리소리를 쫓아 춤을 추다가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닌가!
"키키키……."
"끄끄끄……."
"끄으으……."
필피리 피릴리
음산한 피리소리에 맞추어 완전한 배열을 갖춘 천년강시들!
그들은 철류향을 가운데 두고 기이한 진(陣)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느새 땀방울이 맺힌 얼굴로 강시들을 휘둘러보던 철류향의 얼굴이 다시 석고처럼 굳어졌
다.
"저…… 저것은…… 바로…… 천년강시대진(千年 屍大陣)!"
그때 괴적음은 갈수록 드세어지고 있었으며, 그 괴적음에 따라 천년강시들은 일정한 법칙으
로 혹은 셋, 때로는 다섯이 철류향을 향해 한꺼번에 덮쳐 들었다.
그는 그들의 공격을 모황의 무허광풍영의 신법을 사용하여 피하고는 있었으나 어느덧 호흡
이 거칠어지고 진력이 고갈되어감을 느꼈다.
만일 그가 일찍이 일월상화에 의해 완벽한 벌모세수와 탈태환골을 이루지 못했다면 진작 그
는 강시들의 손에 의해 형체도 없이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리라.
쉬 익!
슈 악!
"끼끼끼……."
"크크크……."
천년강시들은 괴적음에 따라 마치 뇌전이 일듯 빠른 움직임으로 공격했다.
"으윽……."
철류향은 어떻게 대처해 볼 방도도 구하지 못한 채 전신 여기저기가 살코기처럼 베어져 나
가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신형은 비틀거리기 시작했으며, 촌각만 지나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 절대절
명의 위기에 놓였다.
사아악!
예리한 경풍이 그의 가슴을 스치고 그곳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강시들이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에 의해 뿌연 투명체에 휩싸이듯 흐려지
기 시작했다.
바로 이 필사절명의 순간!
갑자기 철류향의 귓전으로 가느다란 전음이 흘러들었다.
"너는 인간이 아닌 괴물(怪物)을 어리석게도 힘으로 상대하려는 것이냐?"
"……."
"저 천년강시들을 상대할 인간은 이 땅에 없다. 저 강시들의 단 한 곳의 약점을 알지 못하
는 바에는……."
"키키키……."
"끄끄끄……."
쉬악
슈우
"윽……."
철류향은 다시 그의 몸 한 곳에서 치미는 고통을 참으며 전음을 들었다.
"저들의 약점은 단 한 곳…… 천령개(天靈蓋)이다. 그리고 저들을 조정하는 괴적음의 강시천
군( 屍天君)은 강시들의 구심점인 땅 속 두 자 깊이에 있다."
"끼끼끼……."
"크크크……."
"그가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 전에 너는 일시에 그곳의 강시들과 강시천군을 처단해 괴적음
을 멎게 해야 한다."
전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완전한 혈인(血人)이 된 철류향의 얼굴에 예리한 예기가 피어올랐다.
'신월빙작…… 당신의 이 전음 또한 잊지 않겠다.'
오오…… 그렇다면 그의 귀로 전음을 흘려보낸 이가 신월빙작 설추화였단 말인가?
각설하고 철류향의 손에 또 하나의 갈대잎이 꺾여졌다.
슈파앗!
동시에 그의 몸이 빛처럼 허공으로 도약했다.
번쩍!
그의 손에 든 갈대잎이 중앙에 위치한 여섯 명의 천년강시의 천령개에 일시에 작렬했다.
퍽퍽퍽퍽!
그것이 천령개에 적중하자 흡사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듯한 둔탁한 음향이 사방을 때렸다.
"끄아악!"
"끼악!"
"끄윽!"
천년강시들은 소름이 끼치는 괴성을 지르며 두개골이 박살난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나 철류향의 동작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콰스스슷
그의 손에 든 갈대잎이 지축을 반으로 가르듯 지면을 가르고 지날 때 지면의 한 곳이 폭파
되듯 터지며 하나의 인영이 땅 속에서 솟구쳤다.
콰아앙!
푸른빛의 얼굴에 푸른 동공의 음침한 인상의 노인.
"으아아악!"
노인의 입에서 참혹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지고 하나의 푸른빛 피리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노인의 몸은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단말마 끝에 노인의 입에서 이 세상에 마지막 두고 가는 음성이 마디를 이루며 터져나왔다.
"으으…… 네놈이 어떻게 천년강시의 비…… 비밀을……."
쩌어억!
수직으로 이등분되어 나가떨어진 노인.
그 노인이 바로 강시천군이었다.
그 순간 철류향의 몸은 행동방침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천년강시들의 사이를 빛처럼 누비기
시작했다.
츠츠츠 츳
번 쩍
그의 우수에서 이 세상 어떤 신병보다 예리하게 변한 갈대잎이 천년강시들의 천령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강타했다.
퍽! 퍼억!
퍽! 퍽! 퍽!
"끄아악!"
"끼끼끽!"
천년강시들은 두개골이 부서진 채 무더기로 나뒹굴었다.
이 참혹한 도륙은 무려 반 각 동안 계속되었다.
위위윙
번쩍
"끄악!"
"끼아악!"
마침내 호변에는 하나같이 두개골이 짓이겨진 천년강시의 시신이 가득 메워졌다.
천년강시들을 완전히 처치한 철류향은 한 곳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 역시 완전한 혈인(血人)이었으며, 그의 옷과 베어진 육신은 걸레짝처럼 너덜거리고 있었
다.
"생사(生死)를 건 일전이었다. 이토록 사이한 수법까지 망라하고 있는 신월천벽…… 초지가
문의 원한과 증오가 한꺼번에 터진다면…… 맹세코! 이 땅은 더 이상 살아남아야 할 존재가
치조차도 잃고 말 것이다."
철류향은 맑은 물결로 넘실거리는 금릉대호를 향해 언뜻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중원평화와…… 중원정의는 내 손으로……."
동시에 그는 한웅큼의 갈대잎을 꺾어 들었다.
슈아아앙
이어 그는 그대로 호수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호수는 안전하다!"
슈슈슈슉
그는 손에 쥔 갈대잎을 그가 향하는 곳으로 오십여 장의 간격을 두고 날리는가 싶더니, 그
의 몸은 물을 타고 흐르는 바람처럼 갈대잎을 밟으며 유유히 호수를 미끄러지듯 건너는 것
이 아닌가!
실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등평도수의 신기요, 수지비행술(水地飛行術)의 극이었
고, 초상비(草上飛)의 대환상 절기였다.
순식간에 철류향의 몸은 호수의 반대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철류향의 생각처럼 호수는 안전하지 못했다.
그 호수 속에는 신월천벽의 가공할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었으므로.
멀리서나마 반대편의 호변이 보이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에 철류향이 다다랐을 때, 돌연
그는 바람처럼 흐르던 몸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로 그를 중심으로 한 사면으로부터 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슈우욱!
동시에 예리한 검날 하나가 철류향의 밑에서부터 불쑥 튀어나왔다.
싸늘한 냉기가 피어올랐다.
"하앗!"
기합성이 터지고 밟고 있는 갈대잎을 차며 철류향의 몸은 바람처럼 허공에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호면을 향해 내리쏟는 날카로운 안광!
그의 안광은 검푸른 물 속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헤아렸다.
지금 물 속에는 희끗희끗한 사람의 그림자가 고기떼처럼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을 입에 물고 있거나, 손에 쥐고 있었으며 물 속에서도 마치 평지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가공할 수공을 익힌 자들이 분명했다.
철류향은 그의 손에 남은 하나의 갈대잎을 쥐었다.
갈대잎.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의 풀잎에 불과한 것!
그러나 그 풀잎이 철류향의 손에 들려진 이상 그 의미를 달리했다.
검(劍).
그것도 예리한 신병(神兵).
진기를 받은 풀잎이 처절한 혈광을 사방에 뿌려냈다.
무도(武道)의 긴 행업(行業)을 해오고 스스로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자기만의 무공을 창안
한 이 광세의 기재!
그가 일단 이것을 자신의 애병(愛兵)으로 한 이상 그는 이 애병과 함께 나도 잊고 너도 잊
으며 세상의 온갖 번뇌와 고뇌마저 깡그리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애병과 자신의 무혼(武魂)은 하나가 되어 대자연을 베고, 대우주를 베며 억겁의 세월
과 억겁의 고요와 억겁의 힘과 침묵을 베는 것이었다.
"하앗!"
엄청난 기합성이 그의 입을 꿰뚫고 천지를 강타했다.
동시에 그의 애병과 그가 완전한 일체가 되어 거꾸로 내려꽂혔다.
콰아아앙
콰스콰콰콰
오오…… 태양이 일시에 정지된 그 순간 이 거대한 호수가 통째로 베어지고 있는 것이 아
닌가!
그의 애병은 태양력(太陽力)과 수력(水力)을 일시에 흡수하고, 천지만물의 우력(宇力)을 일
시에 흡수하는 용트림을 보이며 호수를 호면에서 호수의 밑부분까지, 동쪽에서 광활한 서쪽
까지 완전히 베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착각과도 같은 것이었으나, 그것은 현실이었으며 그것은 맹
세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파아악!
콰아앙!
거대한 물기둥이 화약이 터지듯 솟구쳤다.
"으아악!"
"크아악!"
처참한 비명과 함께 조각난 사람의 팔다리와 그 몸에서 흘러나온 흥건한 핏물이 일시에 호
수를 혈수(血水)로 만들어 버렸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