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우리 아버지 (1)
순야 이선자
이제 이틀만 있으면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설이다.
어릴 때는 엄마가 해 주시는 고운 설빔을 입는다는 마음에
얼마나 설레는 맘으로 그날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십수년이 지났는데도 설날이 돌아오면,
기쁘고 설렘 보다는 가슴이 싸하고 아픔이 더 크다.
1979년, 설날을 하루 앞둔 즉, 작은 설날 아침에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나셨기 때문이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칠 남매나 되는 자녀들의 앞날의 걱정과 양육( 養育)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다가 고생만 하시고, 그렇게 바라고 원하든 자녀들의
성공을 보지못하고 돌아가셨기에 우리 형제들은 지금도 눈물이 없이는
아무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평소에 감기 한번 걸린 적 없던 59세의 건강하신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생을 마감하셨다는 사실은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에겐 믿을
수 없는 정말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 시청 공무원인 오빠와 이곳 독일에 사는 필자만 결혼했지만,
남은 다섯 동생 중, 취업 준비 중인 동생도 있었고, 아직 학업 중인 동생들도
셋이나 있었다.
손재주가 많은 선친(先親)께서는 큰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다년간 기계기술을 배웠고,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3살 된
오빠를 데리고 귀국하셨다고 한다.
나의 외가는 해주 오씨들의 집성촌인 산청군 생비량면, 한 작은 동네인 하능(下能)인데,
상능(上能)이란 동네도 吳씨들의 집성촌이었다.
고국에 나와 삶의 터를 하필이면 처갓 동네인 하능(下能)에 둥지를 틀고,
일본에서 배웠던 기술로 정미업(精米業)을 시작, 우리 동네와 윗동네인 상능(上能),
또 재 하나를 넘으면 작은 마을인‘관동'이란 동네에도 우리 정미소가 있었다.
그 당시에 더 큰 마을에도 정미소가 귀하던 시절이라, 더 넓은 들이 있는 큰 마을로
가서 정착을 했더라면, 훗날 해주오씨(吳氏)들 한테 받았던 수모를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처음의 시작이 잘못되었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옛말에 ‘갱피 서말이면 처가살이 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는지도..
우리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일본에서 귀국하실때, 시계(벽장시계)만 3개
들고 나와서 우선 외갓집의 도움으로 거쳐할 집과 작은 논이 달린 밭을 받았기
때문에 타지에 가서 살 생각을 못하셨다고 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가 면의원과 제보리의 리장직과 제보리 산림계장,
또 초등학교의 학부형대표이사직을 맡아서 생비량면 사람이라면 아버지의
성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우리 아버지를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우리 아버지의 기술 또한 소문이 나서, 인근의 다른 면사람들, 즉 의령군 대의면,
진양군 안간면, 합천군 삼가면 까지도 기계를 고치는 일로 출장원정을 가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아버지는 머슴을 데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상능과 관동에 있는 우리 정미소에도
다녀오셔야 했는데, 다른 타지역에 출장원정을 가시면 사나흘이 걸리는 수도 있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며칠이고 아버지의 소식을 모르면 어머니가 한숨으로 긴
밤을 지새곤 하셨다.
여러 날 동안 기다리다 못한 상능과 관동사람들이 벼를 지고 우리 집 정미소에
오는 날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당신 자신의 일보다 남을 도우는 일에 더 앞장섰기 때문에 어머니의
잔소리가 간혹 부부간의 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있었다.
아마도 선천적인 헬프신드롬’을 갖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동네의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알루미늄 냄비꼭지 하나만 떨어져도
곧장 우리집으로 달려오는 여인들에게 아버지는 당장 그 자리에서 납으로 땜질을
해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에겐 규칙하나가 있었는데, 설명절에 가래떡을 만들때 삯을 받지 않았다.
여인들이 그냥 가기가 미안해서 한 가래 아니면 두 가래씩 두고 가기도 했다.
우리 동네뿐 아니고, 이웃 마을인 상능, 관동, 법평, 제보에서도 생쌀을 가져와서는
우리 집 가마솥에 장작불로 고두밥을 쪄서 가래떡을 만들어갔다.
그믐날 하루 전부터 하루종일 정미소의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면, 한두 가래의
떡이 모여서 저녁에는 소쿠리에 한가득 차, 우리 집은 따로 가래떡을 하는 일도
없었다.
또 농부들의 첫 수확 중 쌀과 보리라도 채 한말이(열되) 되지 않으면 절대로
삯을 받지 않았다. 가난했던 농부들은 추수하기 전에 아직 익지도 않은
나락(벼)을 베어서 삶아 말렸다가 찐쌀을 만들려 오면 겨우 네댓 되 정도라,
그냥 두라고 해도 미안해서 라며, 손으로 한 줌 찐쌀을 대접에 두고 가기도 했다.
여러 집이 모두 그렇게 했으니 저녁에는 한두 되나 되는 찐쌀을 우리도 맛볼 수 있었다.
우리 동네는 앞산이 뒷산보다 높아서 지리학 적으로 큰 사람이 나올 수 없다는
어른들의 말들이 있었지만, 모두 ‘아지매’, ‘아재’로 통하는 친척들이라
사람들은 선(善)했고, 인심이 좋아서 어느 집에 경조사(慶弔事)가 있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달려가 허드렛일을 도왔던 시절이었다.
어느 누구 집에 제사라도 드는 날이면, 남은 제사음식을 다른 집은 제처 두고
우리 집을 제일 먼저 챙기던 인정 많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선(善)하고, 할매나, 할배, 아재, 아지매로 통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해였더라?(1964년?) 장마철에 보리 수확을 못한 이웃들에게 수제비라도
해 먹으라고 밀가루를 나눠준 일에 그렇게도 고맙다고 칭찬하던 사람들이
한 사람의 간계에 빠져 들었고, 모의작당에 휘말려들 줄이야 뉘 알았으랴?
배고플 때 받았던 도움들은 잊어버리고,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일이 있었니,
사람이란 그렇게 간사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 말이다.
우리 아버지를 평소부터 시기해 온, 남도 아닌 어머니의 당숙이 우리 집 바로
뒷집 다음에 살고 있었는데, 욕심뿐 아니라 간섭도 심했다.
그는 상능에 살던 부면장을 지낸 '오 판 X 씨'에게 가서, 이서방을 이대로 두면
언젠가는 하능, 상능의 모든 땅들이 이서방의 소유가 될지도 모른다며,
어떻게 하면 이서방을 쫓아낼지를 상능에서 모의를 했다고 한다.
그날 그 모의에 참석했던 대산아재가 한밤중에 우리 집에 찾아와 귀띰해 주셨다.
앞으로는 상능, 하능의 모든 농부들이 우리집 정미소에 가지 말라는 모의였다.
어떤 누구라도 이서방네 방앗간에 가는 사람은 소정기(오 씨 선조들 토지) 소작을
끊어버린다는 협박이 있었다고 한다.
대산아재는 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씩 상능에서 정미소를 운영할 때,
그 댁 아지매는 아버지의 점심을 해주셨던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래서 남의눈이 무서워 한밤중(아마 새벽 1시쯤)에 우리 집에 오신 거였다.
(다음번에 계속)
지난 주 토요일, 마리아 막텐탈(Maria Machtental)이라는 수도원에 가서 찍은 영상입니다.
야곱의 순례길에 속하는 수도원이기도 합니다.
성탄이 지난지 2주가 넘었는데도 아름다운 성가족들 모형과 동방박사들과 양치기들 모형들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첫댓글 반백년이 지난 오래된 애기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네요.
과거의 아픈 기억도 세월이 지나고 나니
추억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네요.
어려운 시기에 장남으로,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 건사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즐거운 설명절 보내시기 바라며
건강을 기원 드립니다.
당시의 생활상을 떠올리는 한편의 다큐멘터리 입니다.
가슴이 찡해옵니다.
나는 아버지와함께
상능 관동마을 을 출장정미소 를 운영하면서 그당시는 인근 마을에서는 부자로 통하는 집이였습니다.
엄동설한 겨울이면
먼동이트기전 관동상능 제보마을에서 벼가마니를 짊머지고 오는데 발동기를 돌리기 위해서 기름뭉치에불을 지펴 헤드에 열을 가해야 되는 과정을 격여야 했다.
발동기를 돌리는 연료가 경유도아닌 중유로 겨울이면 굳어진 것을 열로데워야합니다.
그뒤 군복무를 마치고 정미소일을 돕다가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된후는 아버지 혼자서 정미소일을 운영해온 것입니다.
아버지 네일모래면 설날입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 ! 함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