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의 관점
1. 시의 분류
이제 '무엇이 시인가?'에 대해서 얘기해 보기로 하자.
누구를 막론하고 내가 쓴 글이 과연 시인가? 하는 망설임을 가지고 있다.
작품 하나 하나를 쓸 때마다 그런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그 의문이 발생하는 순간에 '시는 어떤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시적(詩的)인 수필(隨筆), 시적(詩的)인 소설(小說), 시적(詩的)인 음악(音樂)...
아마도 이런 이야기들은 한 두 번 들어보았을 것이다.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의 구별이 제대로 된다면 그런 의문은 해소가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정형시가 아닌 자유시의 영역이다.
시의 형식에 제한을 가하고 언어사용에 압운(押韻), 각운(脚韻) 등의 규칙(規則)성을 부여하는 것이 정형시라면 자유시에는 그런 제한이 없기 때문에 '과연 이것이 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겨날 수 있다. 시적인 것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산문의 특성을 살펴보면 시(詩)(적)의 특성이 잘 드러날 수도 있다.
<예문 1>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 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의 新婦
위의 시는 산문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시이다. 근래에 들어 산문시 더 나아가서 이야기 시에 대한 실험과 관심을 가진 시인들이 많은데 아직 산문시에 대한 정확한 이론 정립은 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 하나의 산문시를 읽어보자.
<예문 2> 나는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붉은 닭들이 몰려온다. 그렇게 고이는 시간의 연기 꿈의 힘 때문에 나는 다시 내려온다. 내려오면 난파하는 귀 하나가 맴돌고 맴돌다 죽는다. 그래서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의 안개, 하얀 식물의 등불, 나는 무서워 곧장 또 뛰어 내려온다. 내 정신의 폐가 바람 속에 맴돌고 맴돌다 죽으면 또 죽은 기억이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아아 더럽다 오르지 못하고 곧장 올라간 것처럼 생각하면서 굴러 떨어지는 내 두개골은 아마 내일 아침엔 다시 맨발로 계단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 이승훈, 권태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점에서 위의 시들은 산문이다. 산문은 의미의 전달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시에서 항용 되는 리듬감이 배제되어 있다.
<예문 1,2>의 시에는 분명한 리듬감이 살아 있다.
<예문 1>은 민담을 채용하여 판소리 가락조로 "...습니다"를 반복 배치함으로서 노래의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
<예문 2>는 "....다"로 마감되는 리듬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서 어떤 급박하고 절실한 정황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위의 시들을 산문과 구분하게 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산문의 문장 서술은 계기적 즉 사건의 시작부터 종결까지 원인- 결과의 고리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예문들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함으로서 사실의 전달이 아닌 聯想의 심층을 고려하고 있다.
<예문 1>은 여필종부의 전통적 관습과 기다림의 승화, 또 다른 면에서는 인간들의 오해에서 비롯되는 비극적 삶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면서 결국 우리에게 슬픔의 정조를 환기시켜 주고 있다.
<예문 2>는 현실화 될 수 없는 현대인의 단절된 내면 심리를 산문형식을 취함으로서 기계화된 행동과 사고의 매커니즘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맨발', '계단', '붉은 닭', '난파하는 귀', '하얀 식물의 등불' 등은 몽환적이면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어하면서도 횃대에서 떨어지는 행위를 반복하는 중첩된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시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을 일상적인 층위에서 해석하면 이 시는 난해지경에 빠지고 만다. 그러면 우리가 연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잠깐 길을 돌려서 철학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겠다.
영국의 근세 철학자 흄 (D.Hume, 1711~1776)은 우리가 지각하는 내용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누고 있다. 인상이란 우리의 내적 감정이나 외적 감각에 최초로 나타나는 생생한 표현이고, 관념은 이 인상들을 마음속에 재현시킬 때 의식되는 덜 생생한 지각을 말한다. 우리의 지식은 관념들의 연합에서 비롯하게 되는데 단순관념에서 복합관념으로, 복합관념에서 체계화된 지식으로 연관 지워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관념연합의 법칙(연상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유사, 시공에서의 인접 및 인과의 법칙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그림을 보면 그 실물을 연상하게 되고, 유사한 관념끼리, 인접한 관념끼리 결합되어 가는 과정이 우리의 관념을 형성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시를 읽을 때 단어나 문장이 지시하는 표면에서 발생하는 2차적인 정조와 분위기 그리고 비유에 의해서 새로운 연상을 탄생시킨다.
다시 한 번 시와 산문의 차이점을 요약 설명해 볼까 한다.
이승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사고의 단위가 산문은 문장이고 시의 경우에는 행 line이다. (시에는 리듬감이 있다)
2. 산문은 객관적 정보전달과 실용적 가치에 우선을 두지만 시는 심리적 반응을 요구한다.
3. 산문은 사고의 단위가 연대기적이며 시는 연상적 기법을 따른다.
4. 산문에는 리듬이 없지만 시는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5. 산문은 의미의 확산을 시는 압축을 생명으로 한다.
시에서 요구되는 형식에 대한 개념이 아직도 부족하다면 예를 더 들어보자.
<예문 3>
① 지난여름 폭우가 쓸고 지나간 산골짜기 계곡에
② 허옇게 뿌리를 드러낸 몇 그루 나무들이
③ 바람 속에서 실 뿌리들이 필사적으로 흙을 찾아
④ 몸을 기대고 있다.
⑤ 검은흙이 실 뿌리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고 있다.
⑥ 위태롭지만 아, 따스한 저 손길!
①과 ②는 사태의 진술, ③과 ④는 사태에 대한 진술과 주관적 표현의 경계,
⑤는 사태에 대한 주관적 인식 표현, ⑥은 주관적 의지 표현
위의 시는 산사태로 절개된 산기슭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실 뿌리들과 흙이 닿아있는 그 순간을 경이롭게 바라본 시다. 이 시는 어려운 비유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이야기하고자하는 의도를 마지막 연에 귀착시키고 있으며 그 다음에 일어날 그 어떤 정보도 들려주지 않고 있다.
<예문 4> ① 그 여자가 걸어오고 있다.
② 머리에는 커다란 짐을 이고
③ 이 쪽으로 이 쪽으로
④ 천천히 천천히 아다지오로 천천히
⑤ 구월의 햇볕이
⑥ 그 여자를 짓누른다.
⑦ 그러나 그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⑧ 이윽고 나를 지나친다.
⑨ 나는 뒤를 돌아본다.
⑩ 그 여자는 아직도 느린 걸음처럼 걷고 있다.
⑪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본다.
⑫ 길게 나 있는 그 여자의 발자국
⑬ 다시 뒤를 돌아보는 짧은 순간
⑭ 그 여자의 머리에서 커다란 짐이 내려온다.
⑮ 그 여자가 사라진다.
⑮-1 그의 이름은 슬픔이다.
위의 시는 문장 끝에 구두점이 찍혀 있다.
독립적인 한 문장은 장면의 컷트 효과를 노리면서 움직임의 생생한 심상을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문4>에서처럼 사실(동작)의 묘사가 주를 이루고 시인 자신의 주관적 표현은 ⑭, ⑮, ⑮-1 에 국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문 5> ① 나무들이 울창한 생각 끝에 어두워진다
② 김 서린 거울을 닦듯 나는 손으로
③ 나뭇가지를 걷으며 나아간다
④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등을 내보이며
⑤ 멀어지기만 한다 저 너머에
⑥ 내가 길을 잃고서야 닿을 수 있는
⑦ 집이라도 한 채 숨어 있다는 말인가
⑧ 문 열면 바다로 통하는
⑨ 집을 저 숲은 품에 안고 성큼
⑩ 성큼 앞서 가는 것인가 마른 잎이
⑪ 힘 다한 바람을 슬며시
⑫ 내려놓는다 길 잃은 마음이
⑬ 숲에 들어 더 깊은 숲을 본다
이 시는 앞에 인용된 예문과는 달리 현상에 대한 묘사가 보다 주관적이다.
객관적인 사물을 주관적인 관찰로 뒤집음으로서 비유의 깊이를 느끼게 하지 않을까?
숲이 울창하다는 묘사를 '나무들이 울창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어두워진다'라고 진술한다든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떨구는 모습을 '마른 잎이 힘 다한 바람을 슬며시 내려놓는다' 라고 표현한다든지 하는 것은 시만이 가질 수 있는 미학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라고 보여지지는 않은가?
위의 시들을 통해서 시인들은 각자 행 갈이의 기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시는 사실적 묘사와 주관적 묘사의 배합에 의해서 하나의 이미지를 생성하는 것이며, 그 이미지는 연상의 법칙에 따라서 수행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 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재구성함으로서 새로운 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 시의 형식은 시인에 의해서 자유롭게 만들어지는 것이지 정형화된 법칙은 없다
3. 시에서 압축이 의미하는 것은 연상과 상상력의 확대와 관련이 있다.
시는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분류할 수 있다.
우리 시가는 일반적으로 향가․속요․경기체가․시조․신체시 등으로 구분한다.
중국에서는 고시(古詩)․악부(樂府)․근체시(近體詩) 등으로 나눈다.
또 사조별로는 고전시․낭만시․상징시로도 나눌 수 있으며, 형식적인 면에서는 정형(定型)시․산문시․자유시로 나눌 수도 있다.
특이한 예로는 에즈라 파운드 같은 시인은 청각적․음악적인 시, 영상적인 시, 논리적인 시로 분류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詩學)』에서부터 나온 서사시․서정시․극시의 3분법이 통례로 되어 있다.
(1) 장르의 일반론(형식상의 분류)
우리나라의 현대시조는 고대시조가 지니고 있는 기본 틀인 3장6구(三章六句)라는 정형성과 3․4조라는 음수율을 잘 지키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대시조는 파격을 서슴지 않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시조 시형을 신문학적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실제로 창작을 시작한 최초의 시인이다. 그 첫 작품은 [국풍사수]로서 이는 최남선이 일본에 유학하고 있을 무렵에 [대한유학생회보]에 실린 것이다.
최남선이 시조를 창작하게 된 동기는 시조를 우리의 "정신적 전통의 가장 오랜 실재"로 보 고 "한 문학 유희의 구렁에서 건져내어 엄숙한 사상의 일용기(一容器)를 만들어 보려"는 것이었다.
그 후 이론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창작 면에서도 많은 활약을 한 시조 시인으로는 가람 이 병기와 노산 이은상을 들 수 있다. 이 두 시조 시인은 최남선이 부응시킨 시조를 현대적으로 참신하고 사실적인 작품으로 일신하여 중흥을 이룩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① 정형시(定型詩)
정형시라 함은 전통적으로 시의 구조나 시구, 또는 리듬에 있어서 일정한 형식적 제약을 받는 시를 말한다.
동양의 정형시는 보통 음수율․음위율․압운(押韻)․음성률(음의 고저장단)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의 시어는 자수율에 의해서 지배되는 정형시다.
그 정형성에 따라서는 학자마다 제각기 조금씩 다르나 초장 3.4, 3(4).4, 중장 3.4, 3.4, 종장 3.5, 4.3을 가락으로 삼는다. 이런 정형시는 각 나라마다 제 나름대로의 언어적 특성이나 양식에 따라 고유한 형식을 갖는 것이 특성이다. 이런 정형시는 19세기까지는 자주 씌어져 왔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점 쇠퇴해 갔다.
② 자유시(自由詩)
자유시는 불규칙한 운율의 반복이나 변화에 근거하고 있으며, 압운은 없고 혹시 있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시의 압운에 비하여 훨씬 더 자유롭게 이용되고 있는 시이다. 이것은 구속 없이 흐르는 복잡한 정서의 흐름을 그대로 중요시해서 표현한 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자유시가 리듬에 있어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리듬에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내재율을 형성해야 하는, 자기 규제를 안고 있는 시이다. 그래서 자유시는 시의 호흡이요 질서인 이 내재율을 어떻게 肉化시켜 쓰느냐에 따라서 소월과 영랑, 목월 처럼 정형시에 가까운 자 유시가 나오기도 하고, 만해, 상화처럼 산문시에 가까운 자유시가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서정주의 설명에 따르면 "자유시는 일정한 형식을 가지지 않고 내재적 운율과 내재적 諧調 만을 중요시하는 순 서양적 개념에 의한 시의 형식"이라고 했다. 또한 조지훈도 자유시의 특질에 대하여 요컨대 자유시는 규격을 벗어남으로써 시정신을 자유롭게 확장 활용한 것이요, 산문에 시적 운율을 배정함으로써 산문의 고삽성(苦澁性)을 해소한 자이다.
다시 말하면 형식에 있어서 산문적 자유성을 얻고 내용에 있어서 운문적 율조를 얻어 이 양자를 조화하는 곳에 자유가 위치하는 것이다.
자유시는 매우 다양한 운율을 지니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휘트먼(W.Whitman)은 그의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에서 반복적인 운율, 음보 대신에 그 리듬 효과를 억양 단위와 단어, 구, 절, 시행 등의 반복, 균형, 변이에 의존하는 다양한 길이의 시행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자유시가 되는 것이다.
자유시는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현대시의 형태를 말한다.
정형시가 지니는 리듬의 형식을 벗어난 연상률(聯想律)에 뿌리를 둔 시라 할 수 있다.
자유시의 시원(詩源)을 그리스나 로마의 산문예술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현대에서는 19세기에 일어난 시의 한 형태로 그 의미를 주고 있다.
자유시는 이미지 중심의 시를 쓰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룩되었다고 보겠다.
우리나라에서의 자유시는 최남선(崔南善)의 신체시「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이후로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를 그 형식이나 작품의 문학성으로 보아 자유시의 효시로 삼고 있다. 자유시의 몇 가지 패턴을 살펴보면 우선 행과 연의 구분을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을 문
한 가치 성냥에
치마끈 푸는
거푸거푸
치마끈 풀어 던지는……
이
단풍(丹楓) 숲. ―金南祚 「빛과 고요」에서
‘이’와 ‘단풍 숲’을 끊어서 완전 독립된 한 행으로 하고 있다.
산문에서 사용되지 않는 수법이다. ‘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단풍 숲’이라는 반복되어 져야 할 색감에 대한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주고 있다.
또 ‘단풍 숲’이라는 하나의 복합명사가 하나의 행으로 처리되어진 것도 유의할 만하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金素月 「가는 길」에서
7. 5조를 기조로 한 자유시이다. 정형시의 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지만 행을 달리함으로 해서 정형시가 갖는 단조로움을 벗어나고 있다. 자유시라고 하여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정형시의 번형으로서도 자유시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③ 산문시
산문시(prose poem)는 영어로 poem in prose라고도 한다.
이것을 풀이하면 산문으로 된 시(詩)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적 내용을 산문으로 표현한 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서정시의 모든 양상을 지닐 수 있는 창작물이 산문시인 것이다.
조지훈은 그의 [시의 원리]에서 산문시는 자유시의 일부분으로서 거기서 출발하여 자립한 것이니 표현력이 왕성한 시인에 있어서만 걸작이 기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산문시는 그 형식에서보다 내용에서 시가 되느냐, 하나의 평범한 산문이 되느냐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묘한 음 악의 미는 발휘되지 않더라도 내용의 조리는 산문과는 달리 시 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야 비로소 산문시가 되는 것이다.
이 말로 미루어서 볼 때, 산문시가 일반 산문과 다른 것은 어디까지나 서정시의 일종으로서 그 내용에 있어서 시적 요소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울턴(R.G. Moulton)은 산문이라고 불려지는 문학은 그러한 창조의 행위는 보여주지 않는다. 산문은 이미 존재하는 것의 논의에 한정되어 있다. 만약 철학자 또는 역사가가 현실의 세계를 논하는 저작에 있어서 사실 존재하지 않았던 일쇄사(日鎖事)까지도 존재하는 것으로서 말했다고 하면, 그는 그 점에서는 역사가 또는 철학자인 것을 그만 두고 시적 창조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 된 다.
이러한 산문시는 시적 산문(poetic prose)보다 짧고 간결하며, 자유시와 같은 행의 끊어짐 (line breaks)이 없고 내재율(inner rhyme)과 운율적 흐름을 지닌다. 길이는 일반적으로 보 통 서정시의 길이와 같은 1,2페이지에서부터 3,4페이지 정도이다. 만약 길이가 더 길게 된다 면 다소 시적인 산문이 되어 버리고 만다.
동양(東洋)에 있어서는 일찍이 산문시가 발달하여 부(賦)나 사(辭)의 이름으로 불리는 명문들이 있다. 소동파의 [적벽부], 한무제의 [추풍사], 도연명의 [귀거래사] 등. 서양에서도 보들레르(Baudelaire)의 [파리의 우울], 뚜르게네프(Turgenev)의 산문시 등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상이 많은 시, 그리고 김구용의 시가 알려져 있다.
산문시의 생성 동기는 대개 그 시인 개인의 독특한 사정과 시적 방법의 문제에 달렸다고 하겠으나, 그 시인으로 하여금 처해있는 그 사회가 치열한 시 정신을 부여할 때 흔히 쓰여진다.
시의 발달 형태로 보아서는 산문시가 가장 늦게 발생한 것인데, 이는 보다 철저한 산문 화의 과정에서 생긴 현상이라 볼 수 있다.
‘형식에서 산문적 자유성을 얻고 내용에 있어서 운문적 율조를 얻어 이 양자를 조화하는 곳에 자유시가 위치하는 것’이라는 조지훈(趙芝熏)의 설을 들 수 있다.
가을이 되자 동사무소 앞 쓰레기 荷置場에는 애를 밴 거지 부부가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모습이 보이곤 하였다.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일이지만, 神이 숨겨놓은 陽地 쪽에는 골라낸 옷가지를 조용히 깁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일이지만 햇빛의 은 조각을 깔고 앉아. ―조정권 「陽地 쪽」에서
이 시를 읽고 시의 산문체 문장과 소설이나 기타 수필 등에서 사용되고 있는 산문체 문장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일이다. 같은 사실성의 문장이라도 시에서 표현하는 산문은 왜 다른가를 우리는 체득해야 한다.
사실 정형시는 어떤 일정한 틀이 있어 그곳에 맞추어 언어를 넣으면 하나의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시에는 이런 틀이 전혀 없다. 틀이 없다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창조를 의미하고 또한 새로운 리듬의 흐름을 말하는 뜻이기도 하다.
보들레르는 ‘리듬이나 운이 없어도 마음속의 서정의 움직임이나 몽상의 물결, 의식의 비약에 순응할 수 있는 유연하고 강직하고 시적인 산문’이 산문시라고 밝히고 있다.
산문시란 말 그대로 산문의 형태로 된 시이다.
산문이라 하면 두 가지 개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창조적 문학(시)과 비창조적 문학(산문)으로서의 산문이요,
두 번 째는 운문이나 율문(律文)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산문이다.
모울톤은 운문과 산문의 차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처럼 산문의 정의가 내려진다면 산문시는 정형시처럼 외형적 운율이 없고, 자유시처럼 다양한 리듬의 변화나 행, 또는 연의 구분이 분명치 않으면서도 산문체로서 서정적인 내용을 가진 것을 말한다.
(2) 장르의 일반론(내용상의 분류)
장르의 기본형은 서정양식, 서사양식, 극양식을 말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의 시학에서부터 규정지어진 것이다. 근대 이후에는 서정양식이 서로 변화되었고, 서사양식 이 서사시에서 소설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극양식은 시극에서 희곡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장르의 세 가지 기본형이 변형되어 각 나라마다 독특한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① 서정시(抒情詩)
시문학의 일반적 범주는 서정시, 서사시, 극시로 나뉘는데, 그 중에서도 서정시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고대 희랍에 있어서 시라고 하면 모든 창작문학을 포괄하는 용어였으나, 근대에 들어서 서 사시는 소설로, 극시는 희곡으로 분화되었으므로 오늘날에 와서는 시라는 용어는 곧 서정시를 의미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정시, lyric의 어원은 칠현금을 뜻하는 lyre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적 성질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러나 서정시가 지닌 음의 높낮이(pitch), 하모니, 그 밖의 기계적 특징들과 결부시켜 서정주의(lyricism)를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서정시를 구조적 체계 속에만 국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전적 비평가나 그 추종자들이 취급해 오던 방식이다. 서정주의는 보다 폭넓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슈타이거(E. Steiger)는 [시학(詩學)의 근본개념]이란 책에서 서정시의 특질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다.
- 서정시의 세계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에게만 고요하게 내재하는 개성적인 세계를 탐구한다. 진정한 서정시는 그와 동일한 세계가 되풀이 될 수 없는 특수한 것으로서 그 이전에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정조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 서정시는 원칙적으로 무목적인 시라고 할 수 있는데, 서정시의 작가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창작한 까닭에 독자들의 반응에 크게 사로잡히지 않는다.
- 서정시의 세계는 대체로 고독의 공간을 다룬다. 서정시인은 개성적인 정조를 표출하기 때문에 외로운 생활 속에서 느끼는 삶의 고독과 근원적인 외로움을 다루게 된다. - 서정시는 정감을 주로 표출한다. 영혼 깊숙이 속에 자리잡은 슬픔과 기쁨 등을 미묘한 가락으로 잡아내는 것이다.
- 서정시는 음악성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서정시의 기원이 악기 lyre에서 유래 되었다는 점, 즉 노래하는 정신에서 비롯된다는 말고 통한다.
사실 서정시는 단순한 개인의 순수감정으로부터 철학적인 사상시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고 대상이 많다.
고래로 서양에서는 서정시의 장르로 부(賦, ode), 소네트(sonnet), 만가(輓歌 elegy), 목가(牧歌, pastoral), 풍류시(諷刺詩, satire), 경구(警句, epigram) 등이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향가(鄕歌)를 위시하여 고려가요, 시조 등 서정시의 장르가 발달되어 왔다.
서정시의 종류를 그 성격에 따라 나누어 보면 대체로 주정적(主情的)인 것, 주지적(主知的)인 것, 주의적(主意的)인 것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감각적인 시, 정서적인 시, 정조 적인 시, 기지적인 시 등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서정시(Lyric)는 그리이스의 칠현금(lyre)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든 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서정시란 순수한 감정 체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언어의 의미 전달기능보다는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순수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서정시란 시인의 눈을 통하여 관찰되는 사물, 시인의 영감에 의하여 감지되는 순간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 서정시이다.
워즈워드는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발생적 표현이다’라고 했다. 물론 이 말에는 시의 형식화에 따른 언어의 장애 같은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지만, 감정의 중요성이 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아에 의한 주관적인 것이 서정시라고는 하지만, 서정시를 그렇게 단순히 정의할 수는 없다. 오늘날 현대시에서의 다양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가다가 만나서/길동무되지요
날 싫다 말아라/家長님만 님이랴
오다가다 만나도/정붙이면 님이지 ―김소월 「팔베개 노래」에서
민요풍의 서정시이다. 민요풍의 작품은 노래 부르거나 읊기에 좋은 리듬을 가지고 있다. 간결하여서 외기도 쉽다.
대개 이런 가요는 집단적인 가요와 개인적인 가요로 나누어지기도 하며, 또 종교적인 가요와 세속적인 가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김소월의 작품은 세속적인 가요로서 사랑노래라고 하겠다.
내 마음/주름살 많은 늙은 山의 冥想하는 얼굴을 사랑하노니
오늘은/잊고 살든 山을 찾아 내 마음 머언 길을 떠나네
山에는/그 고요한 품안에 高山植物들이 자라거니
마음이여/너는 해가 저물어 이윽고 밤이 올 때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좋다.
山에서/그렇게 고요한 품안을 떠나와서야 쓰겠니 ―辛夕汀「山으로 가는 마음」에서
목가(牧歌)풍의 시다. 일정한 짧은 시형(詩型)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의 에이디률리온(小形)에서 유래했다 한다. 서구에서는 한때 지나친 감상에 빠지는 흠을 낳았으나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민중적인 힘을 회복했다.
우리나라에도 자연을 읊은 시들은 옛 부터 많이 있었다.
이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연과 나의 합일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 시인인지 모른다.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하고, 관직에 있다가도 그만두면 자연에 귀의하는 것은 정신을 맑게 세척하고자 하는 우리 선인들의 슬기요 요량이었다.
‘시인은 자연의 사랑을 인생의 괴로움에 통하게 하고 인생의 괴로움을 자연의 사랑에 통하게 하는 창조적 계기를 찾는 사람’이라는 조지훈의 말을 음미해 볼 만하다.
돈 없으면 서울 가선/용변도 못 본다
오줌통이 퉁퉁 뿔어가지고/시골로 내려오자마자
아무도 없는 들판에 서서/그걸 냅다 꺼내들고/서울 쪽에다 한바탕 싸댔다.
이런 일로 해서/들판의 잡초들은 썩 잘 자란다.
서울 가서 오줌 못 눈 시골 사람의/오줌통 뿔리는 그 힘 덕분으로
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밥통만 탱탱 뿔린다.
가끔씩 밥통이 터져나 가는 소리에/들판의 온갖 잡초들이 귀를 곤두세우곤 했다.
―金大圭 「野草」에서
풍자(諷刺)시이다. 라틴어의(Satura-混淆)에서 온 이 말은 여러 가지 제재를 마음대로 뒤섞은 시문을 일컬었는데 특히 세속적일 뿐더러 풍속에 대한 비판이 강했으므로 풍자시가 되었다.「야초」에 나타난 시 세계도 ‘돈 없으면 서울 가서 용변도 못 보는’ 비정한 도시 문명을 풍자하고 있다.
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물먹은 별이, 반짝, 寶石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琉璃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肺血管이 찢어진 채로/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러 갔구나
―鄭芝溶 「유리창」에서
엘리지이다. 우리가 만가(挽歌), 또는 애가라고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인생의 허무 등을 슬퍼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엘리지의 형태는 애도, 철학적 논고, 위무 단락을 가진다. 정지용의 「유리창」은 어린 것을 잃고 그 슬픔을 읊은 시다. 그러나 슬픔을 슬픔자체로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안을 삭여서 한 장의 유리창으로 만들고 있다.
밤은 아시아의 감각이오 성욕이다./아시아는 밤에 萬有愛를 느끼고 임을 포옹한다.
밤은 아시아의 식욕이다. 아시아의 봄은 밤을 먹고 생성한다.
아시아는 밤에 그 영혼의 양식을 구한다. 맹수 모양으로--밤은 아시아의 술이다.
아시아는 밤에 노래하고 춤춘다. ―오상순 「아시아의 마지막 밤의 풍경」에서
사상시이다. 사상시란 ‘시는 철학의 정수다’ ‘철학은 시를 원리에까지 높인다’는 노발리스의 말처럼 심원한 사상을 시에 담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것이다. 정서나 감정의 표현보다는 사상을 시로 표현하는 것을 주로 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사상시의 출발은 18세기말의 고전주의시대부터 보고 있다.
오상순의 시에서도 보듯이 사상시는 자칫하면 관념에 떨어지기 쉽다. 이런 결점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사상시의 한 영역도 우리 시단에서는 개척해 볼 만하다.
대체로 우리 시(詩)는 너무 주정(主情)적인 경향이 많아서 나약한 데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서정시의 많은 종류 가운데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쓰이는 것만 열거해 보았다. 서정시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정서나 낭만이 깃 든 시만을 말하지 않고 시 전체로서 쓰이는 것이다.
아랫목에 모인/아홉 마리의 강아지야/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내가 왔다./아버지가 왔다.
아니 19문 반의 신발이 왔다./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존재한다.
미소하는/내 얼굴을 보아라. ―朴木月 「家庭」에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생활시의 한 패턴이다. 시인에 따라 의식을 중요시할 수도 있고, 상징이나 이미지에 비중을 더 두기도 하는 것이 현대시이다.
② 서사시(敍事詩)
서사시는 이야기를 하는 시이다. 기본적인 두 타입에 epic(영웅의 모험업적 또는 민족의 역사 등을 읊은 시)와 ballad(감상적인 연가)가 있다.
율문으로 된 romance(전기적인 분위기의 공상, 가공적인 이야기)가 이들과 더불어 세 번째 타입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epic 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epic의 어원은 희랍어 epos에서 나왔는데 이는 '이야기' 혹은 '말'을 뜻한다.
서사시는 주로 역사적 사건을 많이 취급하여 담고 있는 긴 시를 말한다.
역사적 사건이란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주요한 역할의 일부분이 되는 인물들의 행동이다. 그래서 우 리는 서사시를 흔히 영웅적 시라고 부른다. 국가적인 의미를 지닌 중차대하고 진지한 주인공의 업적을 다루기에 서사시의 문체는 장중하다.
서사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 1차적인 서사시(전통적 서사시, 민속 서사시)
구전해 오면서 발전했던 역사적, 전설적 자료들로 꾸며진 것인데, 전쟁과 영토확장이라는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때에 나라를 위해 일어나서 승리로 이끄는 영웅들의 업적을 이야기 (예 :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
- 2차적인 서사시
세련된 시인들이 의도적으로 전통적인 일차적 서사시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에 문학적 서사시라고도 한다. (예 : 버질[이니드], 밀턴[실락원])
서사시의 두 기본 유형인 epic과 ballad는 모두 구비문학으로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들이 운문의 형태로 이야기되는 이유는 산문의 형태를 띤 것보다 운문의 형태를 띤 것이 기억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서사시의 특징은
- 서정시가 개인적인 정서나 사상을 노래하는 데 비해 서사시는 객관적인 사건과 집단적인 사상과 감정을 주로 다루고 있다.
- 주인공은 대개 그 시대 그 민족의 운명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 서사시가 이루고 있는 사건과 배경은 광대하다고 할 수 있다.
-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신분은 보통 인간보다 뛰어난 거의 신에 가까운 인물이나 그 런 능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 서사시의 구성요소는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과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과 한 시대의 운명이 그려지고 있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 김용호의 [남해찬가], 신동엽[금강] 등이 있다.
신들이나 영웅들의 일화를 운문체로 장중하고 웅대하게 서술한 장시(長詩)를 서사시라 한다. 서정시가 주관적인 데 반해 서사시는 객관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시를 일컬어 희곡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희곡보다 그 영역이 넓고, 많은 사건을 구성할 수 있으며, 시간상으로는 과거에 속하는 일이나 사건을 다루는 것이 서사시이다.
서사시는 원시적 서사시와 문학적 서사시로 나눈다.
원시적 서사시를 민족 서사시, 영웅적 서사시라 말하기도 하는데 원시적 서사시는 대개 영웅들의 일화나 전설이 구전되어 오다가 마지막에 하나의 서사시 형태로 굳어 버린 것이 많다.
거의가 민족 집단적인 배경 아래서 만들어 졌으므로 작자미상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호머의『일리아드』와『오딧세이』라 하겠다. 이들 서사시는 오래도록 전승되어 오던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지, 호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창작적 독창성이 없다는 게 평론가들의 이야기이다.
중세의 서사시『니벨룽겐의 노래』『롤랑의 노래』도 같은 성격의 것이다.
문학적 서사시는 창작적 서사시, 예술적 서사시라 일컫는데 작가가 분명하고, 같은 영웅들의 생애를 읊었다 할지라도 예술의식이 뚜렷하고 창작성이 깃든 것이라고 하겠다.
밀턴의 『실락원』 단테의 『신곡』,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사시의 형성은 12, 13세기에 되었다.
오세문(吳世文)의 『역대가(歷代歌)』,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東明王)』,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가 모두 이 시대에 창작된 것이다.
③ 극시
극시(dramatic poetry)란 연극을 할 수 있는 희곡의 대본을 시적인 대사와 표현 즉, 운문으로 바꾸어 놓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연극적인 내용을 시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극시가 개개 인물의 대사로 형성되고, 어떠한 사건이 이 대사와 행동에 의해서 진전되는 것은 오늘날의 희곡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 대사가 일종의 서정시를 이루면서 전편을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분명히 구별된다.
서사시는 인간의 행동을 운문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극시는 무대에서 표출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점에 있어서 서사시와 극시는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극시가 객관적이라 것은 서정시와 서사시의 두 가지 요소가 연극적으로 뭉쳐진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정시는 시인이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고, 서사시는 시인이 객관적인 사실을 묘사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극시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시학]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르네상스 (Renaissance) 때, 이탈리아 문학에 오면 그 시론에 극시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극시의 전통은 고대 그리스 극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오래도 록 발전했으며, 특히 셰익스피어 시대에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운문극의 부활운동이 다시 일어나 극시의 형태를 지닌 것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극시가 아니라 시극(詩劇)이라는 이름이 옳다고 해서 그것을 쓰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극시가 연극적임에 반하여 시극이라면 시적이라는 뜻이 강조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극시라 하면 연극이 중심이 되고 시적인 요소는 부수적으로 따르는 인상이 있지만, 시극이라 하면 시적인 요소에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시킨, 즉 시의 정신이나 분위기를 앞세운 작품을 지칭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엘리어트(T.S. Eliot)의 [성당의 살인(murder in cathedral)](1935), [칵테일 파티(the cocktail party)](1950), [비서](1953), 작스의 [옐리](1962) 등은 모두 현대적인 시극으로서, 특히 엘리어트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시를 현대적으로 변용 시키는 시극의 부활을 크게 주장하였다. 예이츠(W.B.Yeats)가 일본의 노에서 영향 받은 신비스러운 시극을 쓰고, 호프만슈탈 (H.von Hofmannstall)이 슈트라우스(R.Straus)의 오페라에서 영향받은 시극을 쓴 것도 운문 극 부활의 한 실례이다.
우리나라에서 장호, 홍윤숙, 신동엽, 이인석 등이 한때 시극운동을 벌인 일이 있었고 또 실제로 작품을 무대에서 공연한 일도 있지만 이것도 실험적 성과에 머물고 말았다.
시극은 다른 시와 달라서 여러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 서정시로서의 주관적인 것
- 서사시로서의 객관적인 것
시제를 보더라도 서사시가 과거법을 쓰고 서정시가 현재법을 쓰고 있다면 시극은 과거를 현 재로 재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사시적 플롯을 기초로 하고 있으면서 그 주인공들은 각기 자기고백을 한다.
여기에 시극의 주관성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만큼 시극은 행동을 중시하고 있다.
시극의 형식은 연극을 의식하는 만큼 엄격하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밝힌 삼일치법 (三一致法; 시간, 장소, 사건의 일치)같은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구성에 있어서도 희곡과 같은 발단, 전개, 위기, 해결, 파국 등 프라이타크(Freytag)의 5 단계설을 따랐다.
극시는 그 내용에 따라서 비극 시, 희극 시와 비 희극 시로 나뉜다.
비극은 플롯이 슬픈 결말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부정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가 있다. 반면에 희극은 그 줄거리가 익살과 웃음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긍정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희극은 갈등이 마침내 행복스럽게 해결되는 것을 말한다.
극시는 서정시․서사시와 더불어 시의 3대 장르의 하나이다.
극시란 사전적 의미로 보면 극의 형식을 따오거나 극적인 수법을 사용하여 만든 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극시란 희곡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겠다.
극시는 무대에서 상연해서 극적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하고 글로서 읽기에 적합한 것이 있다. 전자는 시극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처럼 글로서 읽기에 적당한 극시를 일명 클로셋 드라마(Closet dram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대개 너무나 정교한 시적 요소가 강해서 무대에서 상연하기에 곤란한 것이다.
극시와 시극의 차이점은 무대 상연과 상관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시극이나 극시를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또 우리들에게 극시보다 시극이란 말이 더 자주 쓰이고 친근하다.
극시의 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극시를 비극․희극․희비극으로 나누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에 운문으로 쓴 극들이 다 극시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를 시인이라고 부른 것도 그가 운문으로 희곡을 썼기 때문이다.
문학이 운문과 산문으로 갈라지고, 근대에 와서는 산문 위주의 문학이 됨에 따라 극시도 희곡이란 이름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시극 운동은 「시극 동인회(詩劇 同人會)」로부터 시작된다.
2. 시의 네 가지 유형
(1) 유형의 이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문학작품들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 몇 가지 유형 genre으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들에게 낯익은 문학의 유형은 서정시, 서사시, 극시 혹시 시, 소설, 희곡 세 가지이다. 문학 작품들은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 것은 고대 그리스시대부터이다. 문학작품들을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기준은 주로 말하는 방식과 관계가 있지만, 유형의 이론을 살펴보면 그 기준은 이론가 들마다 다양하다. 화울러는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문학의 유형에 대해 연구하면서 그 기준을 무려 열다섯 가지나 열거한다. 그에 의하면 문학의 유형이란 일정한 길이를 소유하는 문학작품의 한 전형으로서 실체적이고 형식적 자질들의 복합물로 언제나 분별적인 외적구조를 포함한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이론가들마다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문학작품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소위 유형의 이론을 다시 체계적으로 다루는 이론도 나온 바 있다. 유형의 이론에 대한 또 하나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도 널리 알려진 헤르나디의 이론이 그렇다.
그에 의하면 이제까지 나온 유형의 이론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렇게 나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 유형은 작가와 독자를 기준으로 하며, 둘째 유형은 작품과 세계를 기준으로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 이론은 다시 세분되는데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작가와 독자 1. 표현적 개념
2. 실용적 개념
작품과 세계 3. 구조적 개념
4. 모방적 개념
첫째로 표현적 개념은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기준으로 하지만 독자보다는 작가를 중시하면서 문학작품들의 유형을 나눈다. 이를테면 스타이거에 따르면, 시간개념을 중심으로 한 작가의 태도에 의해 서정적 양식, 서사적 양식, 극적 양식으로 나뉘어진다. 서정적 양식은 과거를 지향하며, 서사적 양식은 현재를 지향하며, 극적 양식은 미래를 지향한다.
둘째로 실용적 개념은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기준으로 하지만 작가보다는 독자를 중시한다. 이를테면 사르트르에 따르면, 문학이란 독서공간이며, 독서공간이란 독자가 지향적으로 창조하는 공간이다. 문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시인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를 구별한다. 전자는 대상 자체인 사물의 세계, 후자는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의 세계이다. 전자는 현실 초월적이며 후자는 현실 참여적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문학작품은 시와 산문으로 나뉘어지며, 후자가 높이 평가된다.
셋째로 구조적 개념은 작품과 세계의 관계를 기준으로 하지만 세계보다는 작품 자체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엘리엇에 따르면 말하는 양식을 기준으로 모든 문학작품은 독백의 양식, 서술의 양식, 행위의 양식으로 나뉘어진다. 독백의 양식은 화자가 자신에게 말하는 제1의 목소리, 서술의 양식은 화자가 청중에게 말하는 제 2의 목소리, 행위의 양식은 화자가 청중에게 행위를 제시하는 제3의 목소리가 지배한다. 제1의 목소리는 시, 제2의 목소리는 소설, 제3의 목소리는 희곡에 나타난다.
넷째로 모방적 개념은 작품과 세계의 관계를 기준으로 하지만 작품보다는 세계를 중시한다. 이를테면 클라이너에 따르면 모든 문학은 삶에 대한 지각과 관련된다. 또한 삶이란 시간이라는 흐름의 체계 없이는 제대로 기술될 수 없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모든 문학작품은 시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Ⅰ. 공간적 시 혹은 묘사시
Ⅱ. 제한적 시간의 시
1. 과거의 시 혹은 서사시
2. 현재의 시 혹은 서정시
3. 미래의 시 혹은 희곡
Ⅲ. 보편적 시간의 시 혹은 교훈시
Ⅳ. 외부적 시간의 시 혹은 이야기
처럼 유형화된다. 제한적 시간'이란 시간의 거대한 흐름이 일정하게 제한되는 것을 뜻한다. 시간의 흐름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어 지는 것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제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문제와 관련시킨다면, 우리들의 삶의 흐름을 과거의 삶, 현재의 삶․미래의 삶으로 나누는 것과 같다.
우리들의 삶이란 이렇게 과거․현재․미래로 나뉘어진다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 곧 과거․현재․미래가 뒤얽히며 흘러가는 복합적 양상을 띤다. 다음 '보편적 시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교훈시가 암시하듯이, 모든 교훈이나 논증의 양식은 과거, 현재, 미래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시간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이상의 세 가지 시간에 두루 적용되기 때문이다. 삶의 문제와 관련시키면, 그것은 보편적 삶의 세계와 관련된다. 끝으로 '시간 외적'이라는 말을 '외부적 시간'이라고 한 것은,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간 밖의'라고 읽을 수도 있고, 따라서 이렇게 읽으면 이 개념은 공간적인 것, 초시간적인 것으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부적 시간’이란 ‘내부적 시간’과 대립된다. ‘내부적 시간’이란, 러시아 형식주의나 구조주의의 이론에 따르면, 작품내적 시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간은 작품외적 시간이 작가의 의도에 따라 새롭게 구성된 시간이다.
시의 유형은 문학의 유형을 어떻게 나누는가에 따라 여러가지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상에서 간단히 살핀 표현적 개념, 실용적 개념, 구조적 개념, 모방적 개념 가운데 어느 개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시의 유형은 다르게 드러난다.
이 책에서 필자는 이상 네 가지 개념을 자세히 따지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시 그 기준에 의하여 시의 유형을 필자 나름대로 나눌 여유가 없고 또 그럴 자리도 아니기 때문에, 흔히 원용할 수 있는 소박한 기준에 따라 시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기로 한다. 흔히 원용되는 기준으로는 '이야기하는 법'을 들 수 있다. 문학의 유형을 이 방법에 따라 나누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구조적 개념에 포함된다. 시의 경우에도 이러한 방법은 적용될 수 있다. 이야기하는 방법으로는 흔히 설명, 논증, 서사, 묘사의 네 가지 방법을 들 수 있다.
맥로글린은 이 네 가지 방법 가운데 세 가지를 선택하여 시를 설명시, 논증시, 경험시로 나눈다. 유형의 이론으로서는 비판받을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 클라이너의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세 가지 유형에 묘사시의 유형을 첨가할 수 있다. 유형의 이론으로는 그런 점에서 구조적 개념과 모방적 개념이 얽히는 체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의 초보자들에게는 이러한 유형에 대한공부도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2) 설명시
시는 하나의 언술(utterance)이며, 언술은 반드시 어떤 문맥 속에서 수행된다.
시의 의미는 이러한 문맥과 관련되어 드러난다. 시적 언술이 어떤 문맥 속에 놓이는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시적 언술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시인이나 시(詩) 속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직접 독자에게 알려주는 방식이다. 대체로 그것은 시인이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설명하거나 논증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형식의 시가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시의 세계, 곧 시적 언술의 공간에 시인이나 화자가 참여치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대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대상을 시적으로 설명하거나 논증한다. 이러한 유형의 시는 따라서 설명시와 논증시의 범주에 든다. 그러나 이렇게 시적 언술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에서는 비슷하지만 이두 가지 유형은 좀더 찬찬히 살펴보면 서로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설명시의 경우 시인이나 화자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논증시의 경우에는 그러한 서술의 논리적 타당성이 드러난다.
시적 언술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다른 하나의 방식은 시인이나 화자가 시적 언술의 세계에 참여하고 따라서 특수한 인간경험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간접적으로 독자에게 알려주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이나 화자는 대상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술한다기보다 그 대상의 세계에 직접 참여하고, 그 대상의 세계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러한 유형의 시는 경험시의 범주에 든다.
경험시의 범주에 드는 시들은 주어와 서술어, 가설과 증명과 결론의 과정보다는 시적 언술이 성취되는 극적 환경을 중시한다. 그것은 시의 화자 혹은 주인공이 놓이는 특수한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화자 혹은 주인공의 반응을 중시한다.
이상의 세 가지 유형의 시에 필자가 첨가하는 소위 묘사시는 시적 언술의 공간에 시인이나 화자가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첫째 방식에 속한다. 묘사시에서는 시인이나 화자가 대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사시의 경우 중시되는 것은 시인이나 화자의 관념보다는 대상의 구체성이다.
먼저 설명시를 쓰는 방법부터 살피기로 한다.
설명시란, 물론 맥로글린이 말하듯이, 말하는 이의 주장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쉽게 간추려 말하면 설명은 '주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때 주어에 해당되는 것이 소위 소재이며, 서술어에 해당되는 것이 그 소재에 대한시인의 관념이다. 이러한 소재에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이 있다.
특수한 것으로는 특수한 장소, 사건, 대상, 인물, 혹은 자신의 특성 등을 들 수 있고, 일반적인 것으로는 일반적인 관념이나 진리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먼저 특수한 대상을 소재로 한 설명시의 보기로 유치환의 「깃발」을 살펴보기로 한다. 시의 전문을 옮기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과 같다. 이 시의 소재는 '깃발'이다. 언어적 형식으로는 '깃발'이 주어에 해당된다. 시인은 이 깃발을 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이 시의 언어적 형식이 계속 '주어 + 서술어'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서술내용이 일상적인 차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主語)를 s 서술어를 p.v 라는 기호로 표시하고 이 시가 구성(構成)된 방식을 도표로 나타내면
행 │ s │ p . v
──┼──┼───────────
1 │깃발│소리없는 아우성
──┼──┼───────────
2 │깃발│노스탈쟈의 손수건
──┼──┼───────────
3 │깃발│순정
──┼──┼───────────
4 │깃발│애수
──┼──┼───────────
5 │깃발│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과 같다. 전체시는 s + p. v 의 형식이 반복되는 구성양식으로 드러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무엇이고, 무엇이며, 무엇이다'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특이하다. 특이하다는 것은,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깃발'이라는 대상을 일상적이거나 과학적 설명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시적 인식을 토대로 하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의 「山有花」,이상의 「거울」「오감도 시제1호」는 모두 설명시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시인이 이렇게 특수한 소재가 아니라 소위 일반적인 소재를 설명하는 시의 보기로는 그러니까 하나의 일반적 관념(觀念)이나 진리를 소재로 하는 시의 보기로는 김현승의「견고한 고독」을 들 수 있다. 시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히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또 하나의 손발
거대한 신들의 정의 앞엔
이 가는 창 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제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그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도
더 휘지 못한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슬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제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이 시의 소재는 '견고한 고독'이라는 관념이다. 다시 말하면 고독의견고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설명시의 형식에 따르면 '견고한 고독'이 주어가 된다. 이 주어에 대한 서술이 3연을 빼고 각 연을 형성한다. 이 시의 구성양식은 그렇기 때문에 각 연이 S + P. V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P.V 을 형성하는 각 연의 중심 낱말은 '흰 얼굴'(1연), '단 하나의 손발'(2연), '피와 살'(4연), '굳은 열매'(5연),'제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6연)이다.
특수한 대상을 소재로 하든 일반적인 대상을 소재로 하든, 설명시의 기본형식은 S + P.V 이며, 이러한 기본형식을 전제로 좀더 다양한 설명방법이 나타난다. 그 방법으로는 (1) 정의법, (2) 대상의 세부들을 벽돌 쌓는 식으로 축적하며 설명하는 축적법,
(3) 분석법, (4) 분류법, (5) 비교법, (6) 대조법, (7) 유추법, (8) 예시법 등이 있다.
(3) 논증시
논증(論證)시란 시인이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나 주장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그 서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보여주는 시이다. 논증이란 그런 점에서 설명과는 다른 서술양식이다. 설명이 단순히 대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논증은 그러한 기능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관념이나 주장을 설득시키고 동조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명제로 설정되어야 한다. 명제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나 판단을 서술한 문장을 뜻한다. 주어진 명제는 하나의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이 공감을 얻으려면 충분한 뒷받침이 필요하게 된다.
명제의 유형으로는 사실명제, 가치명제, 당위명제가 있다. 사실명제는 '한글은 훌륭한 문자이다'처럼 어떤 사실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것, 가치명제는 '진달래는 아름답다'처럼 제도, 사물, 사상에 대해 판단한 것, 당위명제는 '지나친 음주는 피해야 한다'처럼 대상에 대한당위성을 내세운 것이다. 논증시의 경우에도 이러한 세 가지 명제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명제를 뒷받침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연역적 방법, 귀납적 방법, 유추적 방법이 있다.
유추적 방법은 연역적 방법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에는 이러한 서술방법이 말 그대로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대체로 논리적 형식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흔히 어떤 사실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는 인과율의 논리를 따른다. 그러나 시에서는 어디까지나 시적 인과율로 나타난다. 시적 인과율이란 일상적으로 수용되는 자연법칙을 낯설게 만들면서 시적 공간을 빚는다. 그렇긴 해도 형식의 측면에서는 원인 → 결과 혹은 결과 → 원인의 형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적 인과율에 따라 구성된 논증시의 보기로는 서정주의「국화 옆에서」를 들 수 있다. 시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꽃닢이 피려고
간 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실명제이다. 그것은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고, 천둥이 쳤고,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에겐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국화가 피었다는 명제이다.
국화가 피었다는 사실에 대한 시인의 판단이 시 속에서는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의 구성양식을 간단히 도표로 나타내면
연 │ 원인 │ 결과
──┼──────────────┼───────────
1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
2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
4 │간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 │국화가 피었다
│에겐 잠이 오지 않았다 │
와 같다. 3연이 결과의 요약 혹은 부연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빼면, 이 시의 구성양식은 각 연이 모두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간추리면 그것은
1연 │ 결과 → 원인
──┼───────
2연 │ 결과 → 원인
──┼───────
3연 │ 결과
──┼───────
4연 │ 결과 → 원인
처럼 나타난다. 문제는 이 시가 인과율의 논리에 따르고는 있지만, 그 논리는 일상적 논리나 자연법칙의 인과율에서 이탈된다는 점에 있고, 시를 쓰려는 분들은 이러한 시적 논리에 대해 항상 유념해야 한다.
시적 인과율 혹은 시적 논리란, 비록 언어형식 혹은 언어구조라는 면에서는 일상적 논리의 틀을 따르지만, 그 내용은 상상력의 세계로 드러나는 그러한 논리를 말한다.
그런가 하면 사실명제가 아니라 가치명제를 노래하면서 그 논증의 방식이 유추법을 따르고 있는 시도 있다. 김춘수의「꽃」을 보기로 들 수 있다. 시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 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물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가치판단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국화가 핀다는 사실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었음에 비해, 여기서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 따라서 가치명제가 노래된다. 사물이 존재하다는 것은, 이 시의 논리에 따르면, 이름 부르는 것, 곧 명명행위와 관계된다.
이 시가 암시하는 가치판단은 따라서 '언어에 의해 명명될 때 사물은 존재한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이 시에서 '꽃'은 사물의 세계를 표상한다.
그러나 시의 구성양식을 살펴보면 이러한 명제가 시간적 질서와 유추의 논리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연과 2연의 연결은 시간적 질서를 따르고 있다.
1연에서는 명명이전의 세계, 2연에서는 명명이후의 세계가 노래된다. 명명이전의 세계에서 '꽃'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명명이후의 세계에서 '꽃'은 비로소 '꽃'이 된다. 꽃이 비로소 '꽃'이 된다는 말은, 그것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존재론적 용어로는 비로소 '존재'가 됨을 뜻한다. 3연과 4연이 나올 수 있는 것은 1연을 전제로 한다. 또 3․4연은 1․2연을 미루어 판단하는 유추에 의해 가능하다.
그 유추는 3연에서는 '꽃 : 이름 = 나 : 이름'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4연에서는 '나:이름 = 우리 : 이름'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 시의 구성양식을 간단히 나타내면
1연 ───→ 2연 ───→ 3연 ───→ 4연
시간적 유추 유추
순서와 같다. 이 시는 사물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일종의 철학시의 범주에 든다. 그러나 철학시라고 해서 어떤 철학의 개념, 이 시의 경우에는 실존철학 혹은 언어철학의 개념이 철학논문에서처럼 드러나지는 않는다. 언어가 모든 사물의 존재의 근거라는 하이데거적 개념 혹은 즉자와 대자라는 사르트르의 개념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 시인만의 독특한 언술이 전경으로 드러난다.
(4) 경험시
경험시란 특수한 인간경험을 서술하는 시로서 극적 환경의 제시를 강조한다.
또한 앞에서 말한 설명시나 논증시의 경우 시인이나 화자가시 속에 참여치 않고 어디까지나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대상을 서술함에 비해, 경험시의 경우에는 시인이나 화자가 시 속에 참여한다. 시인이나 화자는 시의 주인공이 되거나 시의 다른 인물로 드러난다. 이것은 시인이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간접적으로 독자에게 알려주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소설의 경우처럼 시 속에서 노래되는 것은 하나의 극적 상황 및 그 상황에 반응하는 인간경험 뿐이기 때문이다. 경험시의 범주에 드는 이러한 유형의 시들에서는 따라서 주어와 서술어, 가설과 증명과 결론같은 논리적 체계보다는 시적 언술이 성취되는 주변 환경이 중시된다. 그것은 시의 화자 혹은 시 속의 주인공이 놓이는 특수한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화자 혹은 주인공의 반응을 중시한다.
경험시의 문맥은 첫째로 시적 상황, 둘째로 상황에 대한 화자의 반응, 셋째로 화자의 특징, 넷째로 화자의 사고, 감정, 행동을 기본개념으로 한다.
시적 상황을 설정함에 있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된다. 하나는 공간을 고정시키는 방법, 다른 하나는 공간을 이동시키는 방법이다.
경험시에서는 대체로 후자의 방법이 사용된다. 보기로는 이육사의「절정」을 들 수 있다. 시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매운 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시의 배경은 일제의 압정을 표상하는 '매운 계절의 채찍'에 견디다 못해 쫓겨온 '북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배경이 이 시의 상황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크게 1․2 연에서는 외적 행동, 3․4연에서는 내적 반응으로 제시된다. 1 연에서는'북방'으로 휩쓸려오며, 2연에서는 '서릿발 칼날진' 북방의 고원 위에 선다. 그러나 3연에서는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는 사고, 4연은'겨울'에 대한 사고가 나타난다. 쉽게 말하면 이 시는 추운 계절, 혹은 참담한 일제 식민지의 압정에 견디다 못해 북방으로 쫓겨간 우리민족의 고통스럽던 삶에 대한 경험을 노래하되, 그것을
1연 ───→ 2연 ───→ 3연 ───→ 4연
행동 행동 사고 사고
처럼 상황에 대한 외적 행동과 내적 반응의 체계로 노래한다. 이 시는1 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되어 있고, 시제는 순수현재의 시제 혹은 무시간의 시제로 되어 있다.
'오다''서다''없다''보다'같은 낱말에는 과거․현재․미래 가운데 어떤 시간개념도 드러나지 않는다.
시에서 자주 사용되는 시제는 아니지만, 이런 무시간의 시제는 대체로 시인이 첫째로 '지구는 둥글다'처럼 일반적 사실에 대해 지시하거나, 둘째로 '1+1 = 2'처럼 추상적 논리적 관계를 지시하거나 셋째로 '그녀의 미소는 아름답다'처럼 어떤 행동에 대한 인상을 창조할 때 사용된다. 가장 순수한 현재는, 랭거에 의하면, 무시간의 시제를 지향한다.
무시간의 시제 속에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상관성이 탈락된다. 이때 우리가 읽는 것은 (1) 추상적 실체들의 관계, (2) 일반적 진리, (3) 몽상의 개념, (4) 순수관념들의 연상 등이다. 이 시에서 무시간의 시제가 사용된 것은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혹은 그 상황에 대한 순수한 감각적 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이 시의 구성양식에 대해서 문덕수 교수와 김용직 교수는 기(起)․승(承)․전(轉)․결(結)의 구성으로 보며, 오세영 교수 역시 비슷하나, 각 연에서 상황과 주체의 대응구조를
내용 1연 2연 3연 4연
상황 북방 고원 상실 무지개
주체자의 행동 정지 침몰 초월
행위 (휩쓸려오다) (서다) (무릎꿇다) (눈감다)
처럼 밝힌 점이 다르다.16) 그러나 상황과 주체자의 행위가 보여주는 이러한 대응구조에 있어서 3연과 4연에 대한 해석은 필자와 다르다. 3연에 나오는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는 주체자의 행동, 그의 표현에 따르면 주체자가 침몰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주체자의 사고를 표상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적 행동이라기보다는 내적 반응 혹은 사고의 세계에 속하며, 상황 역시 '상실'이라기보다는 2연에 나오는 상황인 '서릿발 칼날 진 고원' 위로 봄이 어떨까 싶다.
또한 4연에서 노래되는 '눈감아'는 표면적으로는 주체자가 눈을 감는다는 점에서 행동의 세계에 들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강조되는 부분은 눈을 감는다는 점보다는 생각한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라는 말의 중심은 '생각해 보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4연 역시 상황에 대한 심리적 반응 혹은 사고로 정의한다. 필자가 행동/사고를 나누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험의 구조를 새롭게 보기 위해서이다.
하기야 사고하는 것도 크게는 행위의 세계에 든다.
위 도표에 제시된 4연의 상황 역시 '무지개'라기보다는 삶의 위기, 곧 '서릿발 칼날진 고원 위'가 표상하는 그러한 상황이다.'무지개'는 그러한 상황, 이를테면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상황에서 주체자가 꿈꾸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경험시에서는 주인공의 행동․사고․감정이 드러나는 게 일반적 특성이지만 이 시에서는 감정이 극도로 억제되고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매운 계절','재겨 디딜 곳' 등이 암시한다.'재겨'는 '한쪽 발을 살짝 떼어 피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같은 경험시지만 주인공의 행동․사고․감정이 두루 드러나는 시가 있다. 보기로는 신경림의「파장」을 들 수 있다.
시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 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차 길을 절뚝이는 파장
이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파장에 대한 경험이다. 파장 罷場이란 어떤 모임, 주로 시장 같은 것이 파함을 뜻한다. 이 시에서는 시골 장날이 섰다가 파할 무렵에 시골 사람들이 경험하는 세계가 노래된다.
첫째로 시점은,「절정」이 1인칭 단수 화자시점으로 되어 있음에 비해, 여기서는1인칭 복수화자 시점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나'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노래한다. 둘째로 시간은 여름날 시골장이 섰다가 파할 때까지로 되어 있고, 시제는 현재시제이다. 셋째로 공간은 이발소 앞→목로→학교마당→ 마차 길로 이동한다. 넷째로 주인공, 곧 '우리들'의 행동은 이러한 공간의 이동에 대응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발소 앞에서는 참외를 깎고, 목로에서는 막걸리를 마시며 빚 얘기를 하고, 약장사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고, 학교마당에서는 소주를 마시다가 해가 지면 달이 환한 마차 길을 절뚝이며 떠난다.
다섯째로 주인공의 이러한 행동은 이 시에서 대상에 대한 사고나 자신들에 대한 사고를 곁들이며 전개된다.
이때의 사고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감정과 결합된 그러한 사고이며, 대체로 시적 사고는 그런 특성을 드러낸다. 행동을 A, 사고 ─ 감정을 T로 표시하면, 이 시의 구성양식은
행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
내용│T A A T A A T T T A (T) A A
와 같다. 이 시는 주인공의 행동과 사고 ─감정이 교체되면서 시간적 질서에 따라 발전하는 유형의 구조를 보여준다.
위 도표에서 11행의 T를 괄호로 묶은 것은, 이 시행은, 좀더 엄격하게 말하면, 주인공의 사고라기보다는 시간적 배경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인식하는 것도 사고양식에 들기 때문에 T라고 했다.
(5) 묘사시
묘사시는 경험시와 대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경험시의 두드러진 특성으로는 앞에서 말했듯이 시적 상황, 화자 혹은 주인공의 행동과 사고와 감정, 시간과 공간의 변화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경험시의 경우 화자나 시인은 시적 언술의 세계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진술한다. 그러나 묘사시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경험시가 서사의 양식을 지향한다면, 묘사시는 묘사의 양식을 지향한다. 묘사란 사물의 감각적 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이다. 따라서 묘사시란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시라고 할 수 있다. 화가의 경우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쉽지만, 시인의 경우에는, 비록 언어로 그린다고 해도, 이런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시인의 매체인 언어는 화가의 색이나 선과는 다른 특성를 소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보다도 개념을 소유한다. 그만큼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다. 이를테면 푸른 하늘을 보고 '하늘은 푸르다'고 해도, 이 때의 '푸르다'는 말은 개념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우리가 푸른 하늘을 보고 느끼는 감각적 특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들은, 언어로 그림을 그릴 때, 언어의 이러한 특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특수한 기법을 사용한다.
언어가 사물의 감각성을 그대로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을 흔히 심상 혹은 이미지라고 부른다. 이미지의 문제는 위에 가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이 글에서는 언어로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한 가장 일반적인 방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언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대한 감각,'호동고란 고양이의 눈'에 대한 감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알 수 있듯이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처럼 시인이 보는 사물을 다른 사물에 비유하는 방법이 사용된다. 이 시에서는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은 '꽃가루'에 비유되며,'호동그란 고양의 눈은'은 '금방울'에 비유된다. 전자는 촉각, 후자는 시각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어떤 사물을 묘사하는 방법으로는 이렇게 직유에 따르는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직유는 대체로 사물의 감각적 묘사보다는 사물을 산문적으로 설명하게되는 폐단이 있다. 따라서 같은 비유의 방법이라 하더라도 은유의 방법이 시로서는 더욱 적절하다.
은유의 방법에 따라 하나의 사물을 묘사하는 시의 보기로는, 특히 시각적 이미지만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전봉건의「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를 들 수 있다. 시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
흩날리는
눈발을 본다.
흩날리는
눈발에 섞여
흩날리는
작은 나비들을 본다.
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
흩날리는
눈발은
이내 그치고
작은 나비들도
꿈처럼
사라진다.
이 시에서 시인이 보는 것은 겨울 저녁의 눈발이다.
1 연에서 시인은 '흩날리는 눈발'을 본다.
이 눈발이 2연에서는 '작은 나비들'로 변용 된다. 시인은 ‘눈발’을 ‘나비들'에 비유함으로써 눈발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보여준다.
은유는 소박하게 정의하면 표면적으로는 다른 두 사물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가 하면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으로는 이렇게 비유의 방법에 기대지 않고 사물의 구체적 감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이 있다.
김춘수에 의하면 사물을 비유적으로 묘사할 때는 비유적 이미지, 사물을 어떤 비유에도 기대지 않고 묘사할 때는 묘사적 이미지가 드러난다.
전자는 이미지가 어떤 관념을 말하기 위한 도구가 되며, 후자는 이미지 자체를 위한 이미지가 된다. 이런 유형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로는 김춘수의 「忍冬잎」을 들 수 있다. 시의 전문을 옮기면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越冬하는 忍冬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와 같다. 시인 자신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만, 어떤 관념도 드러내지 않고 사물을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이 시의 경우에는 3행과 6,7,8행에서는 사물의 감각적 특성이 아니라 시인의 관념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긴 해도 나머지 시행들에서는 초겨울의 붉은 인동초의 열매에 대한 감각적 특성, 특히 시각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각적 특성은, 앞의「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에서 읽을 수 있었던 비유의 방법에 기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사물의 사물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시, 그러니까 사물의 사물성을 드러내는 유형의 시를 랜섬은 사물시 physical poetry라고 부른다. 사물의 사물성을 획득하는 데에는 몇 단계의 방법을 거치는 것이 좋다. 시에 있어서의 구체성 확보의 단계로는 다음과 같은 단계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어령 교수의 견해를 중심으로 '개구리'에 한정하여 살펴보면, 첫째로 기성관념을 설명하는 단계가 있다. 설명시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우는 개구리 피어있는 竹挑花'같은 하이꾸를 보기로 들 수 있다. 이 시행에서 시인은 개구리가 울고, 죽도화가 피어 있다고 설명할 뿐이다.
둘째로 대상을 의인화하거나 알레고리의 방법으로 표현되는 단계가 있다.
보기로는 '두 손 받치고 노래불러 바치는 개구리런가'와 '의젓하게 먼 산 바라보는 개구리런가'를 들 수 있다. 전자는 의인화의 방법, 후자는 의인화의 방법이긴 하나, 은둔시인 도연명의 후예로 노래되기에 알레고리가 된다.
셋째로는 설명과 알레고리를 극복하는 단계로서 개구리를 개구리로 노래하는 단계가 있다.
묘사의 단계이다. 보기로는 '하나가 뛰는 소리에 모두가 뛰는 개구리런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극단적인 묘사는 소위 사생의 아이러니를 낳기도 한다.
따라서 넷째로 두 세계가 동심원적 구조를 형성하며 동시에 아이러니의 관계에 놓이는 묘사의 단계가 있다. 보기로는 '어스름 달빛 개구리 흐려놓는 물이며 하늘','해묵은 연못이어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혹은 개구리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울음','재 속의 식은 숲 눈 내리는 오두막'같은 시행들을 들 수 있다. 이상의 시행들은 두 사물이 대립되면서, 따라서 아이러니의 관계를 드러내면서, 마침내 하나의 동심원적 구조로 번져나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삼소 님, 시 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