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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아니하리라!
참고말씀: 창24:12~14; 출12:12; 7:14~12:30; 민33:4; 왕상16:31~33; 왕하5:3~5; 마5:3; 눅4:25~27; 요6:9; 13:1; 히13:5
읽을말씀: 왕상17:1~16,24
주제말씀: 왕상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왕상17:8,9)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命)을 받들어 이스라엘 땅에 큰 가뭄을 선포한 후,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절) 동쪽 요단 앞 그릿 시냇가로 도망하여 거기서 그 시냇물이 다 마르기까지 숨어 지냈습니다.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받으면서 말입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리사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3,4절)
그러나 하나님이 명하신 바와 같이,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결국 어디까지 말라버렸습니까? 그릿 시내입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7절)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말씀으로 임하사, 어디로 갈 것을 명하셨구요? 시돈에 속한 사르밧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8,9절)
어째서입니까? 사실 사르밧은 북(北)이스라엘 땅도 남(南)유대 땅도 아닌, 이방(異邦) 땅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참고로 사르밧(사렙다)는 지중해(地中海) 동안(東岸)의 두로와 시돈 사이에 있는 성읍으로, 두로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으며, 지중해 해변을 따라 시돈 남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땅은 시돈에 속해 있었는데,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9절 상) 이 시돈이 어떤 곳입니까? 아합의 아내 왕비 이세벨의 고향이자,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왕상16:31상) 바알(Baal) 숭배의 원산지(原産地)입니다.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왕상16:31~33)
참고로, 여기서 엣바알(Ethbaal)은 ‘바알이 그와 함께 있다’라는 뜻으로, 원래는 아스다롯(아세라) 신전의 제사장으로 있다가 두로 왕 펠레스(Pheles)를 죽이고 왕좌에 올라 32년 동안(주전 891~859년) 통치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에 극성(極盛)이었겠습니까? 그의 딸 이세벨은 더더욱 그러했구요(사실 이세벨은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의 국교로 삼고 토착화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었음).
그런데 다른 곳도 많은데, 하필이면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니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아합의 통치력이 미치는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나, 이 역시 설득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남(南)유다로 가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굳이 사르밧까지 가게 하신 것일까요?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절 하) 이유인 즉은 그곳의 한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供饋)하도록 명해놓으셨다는군요.
이 부분을 우리는 어찌 해석해야 합니까? 명령하여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는 구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으로 그 과부에게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찾아올 것이므로 그를 공궤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오히려 (선지자 엘리야와 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그녀의 마음 밭을 준비하셨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 심령이 가난하여지게 하심으로써 말입니다.
마치 나병(癩病)에 걸린 아람의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 어린 소녀의 말에) ‘마음을 열고’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아 이스라엘 땅에까지 오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에게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하더이다 하니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 새...”(왕하5:3~5)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사르밧(사렙다) 과부의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오히려 완고하고 강퍅했었다면,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낯선 이의 말에 귀 기울였겠습니까? 더군다나 마지막 남은 떡을 그에게 먼저 드릴 수 있었겠느냔 말입니다. 또한 나아만의 심령이 열리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땅에서 잡혀온 어린 하녀의 말만 듣고서 이스라엘 땅에까지 자신의 병을 고치러 올 수 있었겠습니까? 명심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이야말로 천국 백성이 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사르밧에까지 가서 공궤를 받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붙드시되 끝까지 책임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하)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하)
하나님은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찾으시고, 때가 되면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가난한 심령이야말로 천국 백성이 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교훈하시면서 말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년 육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4:25~27)
* 엘리야, 사르밧 과부를 만나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10절 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엘리야는 사르밧에 도착, 그 성문에 이를 때에 누구를 만났습니까? 그곳의 한 과부입니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10절 상) (그녀는) 무엇을 하던 중이었습니까?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10절 중) 어째서입니까? 나뭇가지 둘을 주어다가 마지막으로 자신과 아들이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기 위함입니다.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절 하)
사실 하나님께서는 만연한 바알숭배의 죄를 물어 이스라엘 땅뿐만 아니라 바울숭배의 본산지였던 시돈 지역에까지 긴 흉년(凶年)으로 벌(罰)하셨으며, 사르밧의 이 과부의 가정 역시 이 재앙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엘리야를 만났을 당시, 가루 한 움큼만 남았을 뿐 생존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왜 ‘가뭄으로’ 이 두 나라에 벌을 하셨느냐는 점입니다. 이유인 즉은 이 두 나라가 공통적으로 숭배하고 있는 바알(Baal)의 허구성(虛構性)을 여실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실 바알은 폭풍우(暴風雨)의 신으로, 땅의 풍요(豊饒)를 가져다주는 비와 폭풍우를 주관(主管)하는 신으로 인식(認識)되어 왔는데, 하나님께서 수년째 하늘을 꽁꽁 닫아버리셨으니,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절 하) 얼마나 그 허구성이 만천하에 명백(明白)하게 드러났겠느냔 말입니다. 할렐루야!
마치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실 때 10가지 재앙으로 그들의 우상들을 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출12:12) /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민33:4)
참고로, 출애굽 당시의 10가지 재앙은 애굽의 우상 종교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즉 피 재앙은 나일 강의 수호신 ‘크눔’과 나일 강을 주관하는 신 ‘하피’를, 개구리 재앙은 개구리 형상을 한 부활과 다산의 신 ‘헤크트’를, 이(모기) 재앙은 흙의 신 ‘셉’을, 파리 재앙은 ‘하트곡’을, 가축의 심한 돌림병은 황소의 신 ‘아피스’와 ‘므네비스’ 그리고 암소의 수호신 ‘하도르’를, 악성 종기 재앙은 의술의 신 ‘임호텝’과 ‘타이폰’을, 우박 재앙은 하늘의 여신 ‘누트’와 대기의 신 ‘수’를, 메뚜기 재앙은 메뚜기의 재앙을 막는 신 ‘세라피아’를, 흑암 재앙은 태양의 신 ‘라’와 태양의 여신 ‘세케트’를, 초태생의 죽음은 생명을 부여하는 ‘오시리스’와 생명을 수호하는 신 ‘이시스’를 쳐서 각각 그 허구성을 드러냈던 것입니다(출7:14~12:30).
한편, 이 같은 가뭄은 사르밧의 이 과부의 심령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오직 바알(Baal)만이 비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알고 숭배해왔는데, 이처럼 기나긴 가뭄에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바알의 존재에 의구심(疑懼心)이 든 것입니다. 회의(懷疑)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혹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이 땅에 수년간의 가뭄을 내리셨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접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은 바알 종교의 본산지 시돈 땅이 지척인 사르밧에서 누구를 예비하셨습니까? 한 과부입니다. 어떻게 준비시켰습니까? 그 심령이 가난하여지게 하심으로써, 그녀의 마음 밭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야와 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말입니다. 할렐루야!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예기치 못한 인생의 고난들로 우리의 심령이 상하고 깨져 있습니까? 뜻하지 않은 문제들로 우리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있지는 않느냔 말입니다. 무턱대고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는 계기로 삼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고난처럼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기 좋은 쟁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떻습니까? 혹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어째서입니까? 지금 하나님의 일하시기 딱 좋은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결국 하나님은 (그녀로 하여금) 이런 상태에서 누구를 만나게 하셨습니까?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10절 상)
*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10,11절)
엘리야는 그녀에게 무엇을 청했습니까? 마실 물을 조금 가져달라고 입니다.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10절 하) 어째서입니까? 물론 먼 길 오느라 목도 많이 말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과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여인인지 ‘확인’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이삭의 신붓감을 찾아 메소보다미나의 나홀의 성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인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나님께 그 징표를 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창24:12~14)
과부는 엘리야의 이 같은 청에 어찌 반응했습니까? 번거롭고 귀찮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물을 가지러 가고자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가지러 갈 때에...”(11절 상) 어떻습니까? 일단은 합격이 아닙니까? 이 가뭄 통에 생명 같은 물을 주고자 했으니 말입니다.
엘리야는 옳다 싶어서 주저함 없이 다시 두 번째 청을 했습니다.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11절 하) 마지막 관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어찌 반응했습니까? 정말 드리고 싶은데 자신과 아들 단 두 사람이 오늘 딱 하루 먹을 것 밖에 없다고 답변한 것입니다(참고로 엘리야는 대화 과정에서 과부에게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그분의 선지자라고 소개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절)
엘리야는 무엇이라고 재차 요구했구요?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자신의 말대로 하라고 입니다. “엘리야가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13절)
사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엘리야의 말이 참 매정하게 들립니다. 몰인정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확신 말입니까? 이 땅에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 과부의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으며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는 확신입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4절)
그럼 그렇지, 엘리야는 그리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리기까지 그곳의 한 과부를 통해 계속 공급하리라. 즉 그 집안의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며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미리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일련의 청들은 단순한 청이 아닌, 오히려 그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여인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함이요, 또한 거기에 맞는 합당한 믿음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13절)
결국 어찌 되었습니까? 그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행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또한 결과는 어찌 되었구요? 정말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했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5,16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을 맛볼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우리의 믿음을 보일 수 있기 바랍니다. 사르밧(사렙다) 과부의 마지막 음식을 가져왔던 것처럼, 또한 뱃새다의 한 광야에서 한 소년이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놓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요6:9 상)
사실 이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와의 만남을 통해 기나긴 가뭄을 잘 넘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일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는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24절)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복 받을 가정을 찾고 있습니다. 은혜 받을 성도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 나와 우리 가정이 그 주인공이 되시지 않으시렵니까?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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