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방랑기 345-미국 Atlanta
United Airline 편으로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갔다 거기서 4시간 다시 애틀랜타 로 갔습니다.
4월16일 오전 11시30분에 인천공항에서 떠나 약10시간30분 걸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4시간 기다렸다가 San francisco에서 Atlanta까지 4시간 비행하였는데 약 2시간 연착하여 Atlanta에 저녁8시에 도착하여 인천공항에서 Atlanta 까지 약20시간 걸렸어요.
애틀랜타 하이웨이입니다. 이곳은 Traffic이 심한곳인데 비교적 들 막히네요. Mercedes Benz Stadium 가는 안내가 보입니다. 한국에서는 벤츠라고하는데 미국에서누 멀세데스 라고 말합니다.
다음날 19일에 김성기를 만나 성기동생 병문안을 갔습니다. 캐돌릭 병원에 예쁜꽃이 피어있네요.
이꽃도 아름답게 피웠습니다.
캐톨릭 계통의 병원입니다. 출입구를 들어서니 수녀들이 안내를 합니다.
환자용 침대에서 환자 상태를 라이트로 비춰줍니다.
104호실에 김성기 동생 병실입니다.
벽에 "God is at work in you"(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정구봉과 김성기
애틀랜타 한인타인의 일식집 미송으로 가서 점심식사로 스시 정식을 시켰습니다
이곳 메뉴입니다.
푸짐한 스시를 점심메뉴를 시키지 않고 정식 콤보를 시켜서 너무많아 반정도 먹고 나머지는 To go로 싸갔습니다.
김성기, 정구봉과 같이 식사합니다. 이번 여행 주제는 "With Nature(자연과 함께)"즐기자 입니다.
천천히 자연을 보고 먹을꺼 먹어가며 다니자 입니다.
정구봉 집의 뒤뜰.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한잔들고 뒷마당에 가니 새소리가 들리고 fresh한 공기가 폐부를 찔릅니다. 하룻밤 자는데 마치 호텔 Suite룸에서 지낸것 같은 느낌
정구봉네 집입니다
옛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나오는 집이 생각납니다. 그소설의 작가가 이곳 아틀란타 출신입니다.
뒷마당 의자에 않아 뒤숲을 바라보며 커피한잔을 먹습니다
노고지리의 "찻잔"노래가 들리는듯..."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애틀랜타(Atlanta, 문화어: 애틀란타)는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의 주도이자 2021년 미국 센서스국의 ACS 설문조사 결과 기준 도시 내 인구 498,715명, 광역권 인구 6,144,050명으로 미국 내에서 9번째로 규모가 큰 광역도시권의 중심 도시이다.애틀랜타(Atlanta, 문화어: 애틀란타)는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의 주도이자 2021년 미국 센서스국의 ACS 설문조사 결과 기준 도시 내 인구 498,715명, 광역권 인구 6,144,050명으로 미국 내에서 9번째로 규모가 큰 광역도시권의 중심 도시 입니다.
흑인 애틀랜타 시민들은 1973년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장의 선거와 함께 자라나는 정치적 영향력을 논증하였습니다. 그들은 20세기 후반 동안 도시에서 대다수 민족이 되었으나 교외화, 가격 상승, 겅제 급등과 새로운 이주자들이 도시에서 그들의 퍼센티지를 1990년 66.8 퍼센트에서 2004년 대략 54 퍼센트로 줄였습니다. 백인 거주민들의 유입에 추가로 히스패닉과 아시아인 이민자들도 또한 도시의 인구 통계를 변경하고 있습니다.
1990년 애틀랜타는 1996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지로서 선발되었다. 공고에 이어 애틀랜타는 도시의 공원들, 스포츠 시설들과 교통을 향상시키는 데 몇몇의 주요 건설 계획들을 착수하였습니다. 애틀랜타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미국의 3번째 도시가 되었습니다. 경기 자신들은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 폭발 사건에 의하여 훼손되었습니다.
현대의 애틀랜타는 어쩌다 재빠른 번창과 도시의 스프롤 현상을 경험한 도시들을 위하여 포스터 어린이로 숙고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시는 그 친환경 정책들로 미국 환경보호청 같은 기관들에 의하여 위탁되어 왔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을 알리는 도움을 준 미국 대법원의 현저한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결정이 일어나 애틀랜타에서 인종적 긴장들은 폭력의 행위로 자신들을 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애틀랜타는 침례교 목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도시의 역사적 흑인 대학들에서 온 학생들이 운동의 리더십에서 주요 역할을 하면서 민권 운동의 주요 결성 중심지였습니다. 2개의 가장 중요한 민권 조직들 -남부기독교지도회의와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가 애틀랜타에 자신들의 본부를 두었습니다.
민권 운동 시대 동안 어떤 인종 항의들에 불구하고, 애틀랜타의 정치와 비지니스 지도자들은 "미워하는 데 너무 바쁜 도시"로서 애틀랜타의 이미지를 육성하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1961년 아이번 앨린 주니어는 애틀랜타의 공공 학교들의 인종 차별 대우 폐지를 지지하는 데 몇몇의 남부 백인 시장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난 동안 애틀랜타는 중요한 철도와 군사 공급지로 지냈습니다. 1864년 도시는 북군의 주요 침입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제 애틀랜타에 의하여 덮어진 지역은 몇몇 전투들의 장면이었습니다. 북군의 윌리엄 T. 셔먼 장군은 교회와 병원들을 살려두었어도 자신의 남부로 행렬을 위한 준비에 애틀랜타가 땅으로 불에 타도록 명령을 내렸 습니다. 도시의 재건은 단계적이었습니다. 1868년 애틀랜타는 주도로 지내는 데 5번째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가 번창하면서 민족과 인종의 긴장들이 쌓였습니다. 1906년 애틀랜타 인종 폭동은 최소한 27명의 사망과 70명의 부상을 남겼 습니다.
1939년 12월 15일 도시는 본고장 출신 마거릿 미첼의 베스트셀링 소설에 기초를 둔 영화 <바람과 함께 사
라지다> 의 개봉을 개최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매리에타 외곽에서 벨 에어크래프트 공장 같은 제조업이 도시의 인구의 경제를 자랑하는 도움을 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난지 짧은 후에 애틀랜타에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창립되었습니다.
애틀랜타와 그 외곽들이 건설된 지방은 원래 크리크족과 체로키족 인디언들의 영토였습니다. 1813년 미영 전쟁에서 영국군들을 보조하는 데 그들에 의하여 보충된 크리크족은 앨라배마주 남서부에 있는 포크밈스를 공격하여 불태웠습니다. 갈등이 확대되었고 크리크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응답에 미국은 오늘날 조지아주 더큘라에서 호그산의 정상에 포트대니얼과 포트길머를 포함한 오크멀지강과 채터후치강을 따라 요새들을 건설하였습니다. 포트길머는 소나무로 믿어진 큰 나무를 따서 이름이 지어진 "피치트리 스탠딩"으로 불린 중요한 인디언 현장의 옆으로 위치하였습니다. "Pitch"란 단어가 "peach"로 오해되어 현장의 이름이 되었다. 현장은 전통적으로 피치트리 지류가 채터후치강으로 들어가 흐르는 절정에 크리크족과 체로키족 대지들 사이의 경계에 인디언들의 회의 장소로 특정을 지었다. 요새는 곧 포트피치트리로 다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디케이터를 포함한 메트로 지역의 동부에 있는 크리크족의 대지는 1823년 백인들의 정착지로 개장되었다.
1835년 체로키족 국가의 지도자들은 결국적으로 "눈물의 길"로 이끈 결의서 뉴에코타 조약 아래 서부로 외부의 대지를 위한 교환에서 정부에게 자신들의 대지를 양도하였습니다
1836년 조지아주 총회는 중서부로 향하는 통상로를 마련하는 데 웨스턴 철도와 애틀랜틱 철도를 건설하는
데 투표하였습니다. 1838년과 1839년 사이에 체로키족들의 강제 퇴거에 이어 새롭게 인구가 줄어든 지역은 철도의 건설을 위하여 개장되었습니다. 그 일은 지역이 "애틀랜타"로 빠르게 짧아진 "애틀랜티카-퍼시피카"로 새로 이름이 지어지는 데 제안되었습니다. 타운은 1847년 12월 29일 애틀랜타로 합병되었습니다. 인구는 1860년까지 9,544명으로 자라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