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는 濟로 제원 帶方 등 고구려는 구려로 "산서성"일대가 芬河 의 句麗로 산서성으로 海는 황하로 "산서성"이고 "낙랑조선= 황하북부 하남성"으로 百濟는 태생 자체가 대륙 황하를 건너 "마한 54국을 정복한 '에맥족"으로 삼한족을 정복 즉 지배계층언어는 "현 몽고족"인 에맥족어로 피지배계층어는 삼한족 신라어와 유사한 것으로 본 바탕이 다른 구한중 "중화 오월 응유 탁라"로 백제의 22 담로를 제외하고 '중화와 오월"이 백제외 변한백제=남부여=사비성'으로 현 충청북도 청주/상당 충주 등이 중원 = 중화 지명이고 변한[卞山의 韓]은 절강성 吳와 복건성 越로 왜족은 海 즉 양자강 이남의 대륙남단에 폴리네시안계 왜족이 살고 있었다는 것으로 오월족이 '백제왜족'으로 백제음=오음으로 '한국어" = 신라어인 韓語와는 극명하게 다른 것으로 한국어는 "음절언어'가 아닙니다. 즉 전라도 충청도 방언은 '음절언어"가 절대로 아니다.
韓- 맥도날드
倭-백제어로 '마구도나루도'로 100% 음절로 된 조가발이 쪽발이 음절언어입니다.
한국어 신라어는 고어로 '고조선어"로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로 된 음운언어로 고유수사로 다양한 모음가 음운 = 종성받침을 발음하는 언어로 한자어로 한자음=일자음으로 음운 즉 초중종성합음 동국정운 정운법으로 "일이삼사오육칠팔구십'이 고어고 한어로 신라어의 특징입니다. 백제음으로 백제왕인의 오믐 백제음=구다라온으로 이찌 니 산 시 고우 로꾸 하찌 시찌 구우 주우"는 음절언어로 이는 한자음=일자음 초중종성합음 一字音이 아님은 너무나도 자명한 것으로 신라어=韓語와 백제어=현 왜어와는 100% 언어계통에서 다른 음운언어 알타이어족과 음절언어 즉 폴리네시안계 언어와 구분이 됩니다.
백제는 "한반도 =강동주"내에 없던 나라로 "고구려 句麗"는 산서성을 기준으로 한 사방 2000리 삼만호에서 백제족은 해모수 天帝의 후손 해부루 동부여=가섭원 현토/임둔=옥저/동옥저 하북성에서 대방 고지를 따라서 내려온 것으로 혹은 고구려 고추모의 아들로 삼한족 신라족이 아닌 몽고리 토착민 험윤족 예맥족의 '삼한족" 번한 부여=변한 조선의 삼한족을 정복하고 세운 대륙 백제로 절대로 '한반도"내 서울/경기 충청도/천라도의 남한내 서부에는 "백제족 즉 扶餘씨와 백제 8대성"이 산 적도 없는 대륙의 漢族의 골수 성씨로 주로 중원과 남부여 변한 백제라는 '절강성 오흥군" 현 절강성 호주시로 일본은 지명으로 扶桑이라고 扶餘의 상전벽해는 현 上海로 양자강 이남 절강성이 吳로 변한 백제 남부여로 越은 복건성으로 왜족의 본거지입니다.
馬韓[한]으로 사방 4000리로 이는 한반도 사방 3000리를 훌쩍 넘는 사방 4000리인데 어째서 한반도 남한이 사방 1500여리에 삼한설로 집어넣을 수 있는지? 이상한 쪽발이 유기견 이 병도 개새끼 족발이 정신이상자의 개고기 먹고 질엘염병떠는 5000년래 최악의 쥐성인 이 어녕등 저 우봉이가는 문학 어학 역사에 수학은 전혀 할 줄 모르는게 개쌍놈의 쥐새끼 유태무좀 탈무드 탈세 수리학인지 정말 한심한 노릇이다.
馬韓[韓]으로 이는 마한 54국 하는 것으로 총 78국 해도 소읍으로 말하는 것으로 번한 부여 진번 조선 왕 기준이 위만에게 정권을 찬탈당하고 海=황하를 건너 南下 남으로 아래로 간 곳으로 국명이 마한으로 총 사방 4000여리로 각 국은 소읍으로 각 사방 50리-100리로 각 국 소읍은 만호 혹은 작계는 수천호로 마한 50국 소읍은 총 10만호로 고구려 사방 2000리 삼만호의 3배이상 인구가 많은 것으로 결코 작지 않았다 신한은 12 소읍으로 각 1만호로 12만호로 이를 작게 잡아도 10만호로 역시 고구려 삼만호의 3배의 인구로 "대륙 백제// 海=발해 남대방군 澣海// 로 산동성 대야택의 재서와 재동이 백제와 대륙신라로 변한은 초기 신라에 항복한 곳으 후에 백제가 마한 54국 을 정복하고 백제왜가 변한 백제로 남부여=사비성이 된 곳으로 전부 대륙이지 한반도 이야기가 될 수가 없는 것이 백제입니다.
韓(馬韓)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한다.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사방 사천리이다.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고, 셋은 '번한'이다. '진한'은 고조선의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백성들은 토착을 하며 씨를 뿌리며 양잠을 알고, 갈포를 짓는다. 각각 장사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를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말도 안되는 쪽발이 丙申 질엘자 사이코패스 우봉이가 찟어죽여버렸어야 대역천자가문의 이이 병신도로 정말 저게 사방 4000리냐고? 海가 경게로 '渤海"로 고구려 아래 海=황하가 "한강"인가요?
마한(馬韓)[편집]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衛[83]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준왕(準王)은 궁인과 좌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韓)나라 땅으로 남하하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이름지었다
낙랑조선 즉 주무왕이 은국을 패망시키고 "기자"를 조선에 봉함 즉 그곳은 은국지로 낙랑 조선으로 고려=고죽국 [고려시대 海州]로 평양성 등 산서성 임분시로 "고리적부터" 平壤한 곳은 산서성 임분시로 나오는데도 뭘 보고 말하는지 이해가 전혀 안되는 쪽발이 미친 우봉이가 병신도네 정말 보기싦은 쪽어쪽문학자 이 어녕 미친 사이코패스놈에게 이게 뭐냐고?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본기에도 나오는 진장성은? 황하를 따라서 천리장성정도인데 이게 최북방 "경계'가 黃河인데도 무슨 산해관 명나라에서 말한 산해관? 그것도 모지라서 한반도다 이게 미친 찟어서 부관참시하여 똥물에 튀겨서 빻아버린 개똥 木子씨지 이런 개새끼가문을 아직도 부동산 재별 120조원을 보유한 한국의 대재벌가냐? 이런 미친 改宗者엘을 닮아 좃같다.
浿水 서에서 동으로 "흘러서" 海로 황해란 황하지 무슨 개소리냐고???
이곳 번한 - 진번 조선에서 海를 건너 南下 남으로 내려오면 어디냐고? 이게 사방 4000리 남한이야? 진/한 위/ 수양제 당태종이 남에서 북으로 高麗 구려를 쳤다는 북방 경계 황하북부 패수가 대동강? 그럼 전부 진/한 위/ 수.당나라가 한반도 남단이란 소니냐고?? 상식으로 방위 남에서 북이지 어디서 전 멋대로 말한다고 표현의 자유냐???
史料로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인정할 수 없다 不信이다 그럼 그리도 좋아하는 사마천의 사기의 진시황 본기는 북방경계가 황하라는데 무슨 개소리냐고? 일일이 뭘 따져야 하냐고? 사방 4000리로 정말 이게 사방 3000리 한반도보다 크냐 안크냐? 그게 머리에 안들어오는 유기견 유기독교 수리학 수학으로 아니 사방 4000리가 사방 3000리에 들어가니 안가니?? 78국 각각 소읍으로 사방 100리면 사방 7800리인데 이를 사방 50리-100리로 크고 작음이 있을 것이니 이는 주군현중 현으로 읍/소읍으로 대략 사방 4000리면 그대로 사방 4000리 남으로 왜와 접한 변한은 양자강 이남 절강성 吳지역이구나 卞山의 한으로 변한 백제로 오월 하는 오는 절강성이고 월은 왜족 왜국 하는 복건성이다고 나오는 이야기도 몰라 몰라 몰라냐:???
일일이 다 50여국 즉 소읍 들을이 일일이 국가로 군왕이 있다고 했는가?
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 國>․<臣 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 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 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酸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 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 報安邪 支 臣離兒不例拘邪 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속로불사국>․<일화국>․<고탄자국>․<고리국>․<노람국>․<월지국>․<자리모로국>․<소위건국>․<고원국>․<막로국>․<비리국>․<점리비국>․<신흔국>․<지침국>․<구로국>․<비미국>․<감해비리국>․<고포국>․<치리국국>․<염로국>․<아림국>․<사로국>․<내비리국>․<감해국>․<만로국>․<벽비리국>․<구사오단국>․<일리국>․<불미국>․<지반국>․<구소국>․<첩로국>․<모로비리국>․<신소도국>․<막로국>․<고랍국>․<임소반국>․<신운신국>․<여래비리국>․<초산도비리국>․<일난국>․<구해국>․<불운국>․<불사분사국>․<원지국>․<건마국>․<초리국>, 등 무릇 오십여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 정도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 정도이다. 총 10여만 호 정도이다.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 '신지' 혹은 '가우'를, '신운견지'라 부르는데, 안정됨을 지키고, 정도에 벗어남을 멀리하고, 신하를 받들어 주는 것과, 아이에게 베푸는것이 사됨이 없어 비교할수 없다. '진지'는 겸손한 호칭이다. 그 관직은 위나라를 따라서,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이다.
마한 54국 소읍중에 신한 12국명 斯盧國이 나오는데 이를 보고 부용국 백제국의 부용국 하는 이유는 뭐냐고/ 그 자체가 부용국으로 소읍이라면서 또 무슨 夫餘 신한 夫餘 신라가 저 마한 54국명중 하나 사로국? 그리고 신한 12소읍 12국명중 斯盧國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야/ 이 개자식 유기견 유태기독교 改宗者 여호와 질엘염병 쪽발념신명에 坐便器파서 롯데 여신교냐? 좃단국가 건국 100주년 좃국 건국 하니:? 강북 좌변기파서 뭘하니? 똥돈에 케이에스 엘리트 좃단 좃나단 국가 건국하냐고?
대청곤여도 대명여지도 등등 중국 고지도의 지명으로 본 대륙지명에 대방 이 니오는 것도 아니고 滄海도 하북성 천진아래 지명으로 도시명으로 혹은 창해군으로 나오는데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뭔 유기견교 문맹자교육단이냐? 뭘 말하냐고??? 발해는 고리적부터 지명이라는데?? 몰라서 물어 보냐고??
마한 54국 // 海=발해로 황해와 발해가 만나는 곳 운장 雲장으로 등등 중국대륙에 황해 료해 해로 북해 발해 =澣海가 있지 어디 한반도에 남원시 아래 호수 1천리 400킬로미터가 흘러서 호남이냐고? 말이 되는 개소리 성병군자들이라 질질 질엘소리만 하냐고???
믈이 빠지고 우쩍솟아오른 곳 渤海로 빨/뻘 해로 澣海는? 산동성 대야택 즉 현재는 더 많이 빠져서 당시 모습과는 달라도 대강의 지역명으로는 충분하다 즉 "한반도"에 남대방군 대방군[북대방]의 아래 남쪽은 있을 수 없는 지명 帶方 띠대로 단단대산령 '태행산맥 동서의 띠 지역 帶方으로 추풍령은 남북이고 띠를 이룬 땅으로 그래도 산맥이 있어야 서로 잇기 革帶라도 하지. 이건 문맹자들이 무슨 유기견교라고 철밥통 동북아역사재단 연세귀신대학교에 고구려대학교 철학과냐???
신당서 신라로 부여 신한 부여는 이니고 마한내 신한 12국이 대륙신라로 "구당서 고구려 료서=섬서성과 료동 =산사성'강역으로 남북 2000리 동서 3100리 사방 6200여리에 남으로 해를 건너 백제고 해를 건너 동남으로 신라고 이 내용 강역중 海는 황하여야 그 다음 구.당서의 신라는?
신당서 동이전 신라(新唐書 東夷傳 新羅)
신라
#新唐書卷220-列傳第145-新羅-11/01
◉<新羅>, <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橫千里, 縱三千里, 東拒<長人>, 東南<日本>, 西<百濟>, 南瀕海, 北<高麗>. 而王居<金城>, 環八里所, 衛兵三千人. 謂城爲侵牟羅, 邑在內曰喙評, 外曰邑勒. 有喙評六, 邑勒五十二. 朝服尙白, 好祠山神. 八月望日, 大宴賚官吏, 射. 其建官, 以親屬爲上, 其族名第一骨․第二骨以自別. 兄弟女․姑․姨․從姊妹, 皆聘爲妻. 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女, 雖娶, 常爲妾媵. 官有宰相․侍中․司農卿․太府令, 凡十有七等, 第二骨得爲之. 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 宰相家不絶祿, 奴僮三千人, 甲兵牛馬猪稱之. 畜牧海中山, 須食乃射. 息穀米於人, 償不滿, 庸爲奴婢. 王姓<金>, 貴人姓<朴>, 民無氏有名. 食用柳杯若銅․瓦. 元日相慶, 是日拜日月神. 男子褐袴. 婦長襦, 見人必跪, 則以手据地爲恭. 不粉黛, 率美髮以繚首, 以珠綵飾之. 男子翦髮鬻, 冒以黑巾. 市皆婦女貿販. 冬則作竈堂中, 夏以食置冰上. 畜無羊, 少驢․ , 多馬. 馬雖高大, 不善行.
신라는 변한의 후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자리하여 가로가 1천리이고 세로가 3천리이며 동쪽은 장인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이며 서쪽은 백제고 남쪽은 바다에 연하며 북쪽은 고려이다.
대륙신라로 동서 1000리 남북 3000리로 산동성 재동과 강소성 안휘성이 아니고 동해바다 풍덩이냐고? 백제를 재서의 백제를 封하고 더한 백제 재서의 강역은 동서 900리에 남북 1800리 즉 대략 사방 2000리로 이 대륙신라+백제 더하기 못해요? 사방 5000리지 고구려 사방 6000리면 도합 사방 11,000리 계산 못해요? 그리고도 세울엘리트 기경량 박사학위자야? 미친 나라 교육 유기견교 수학 더하기도 못하는데 무슨 역사학자냐고?
"구당서 백제 패망전후"의 내용 동이전 백제전의 내용 지명이 한반도에요?? 아예 번역까지 해주어도 개소리하냐고? 정말 백제족이 한반도에 있었고 백제지명이 서울/경기 충청도에 전주 대륙신라 전주 구주오소경의 구주중 전주냐? 아니면 광서장족자치구내 黑齒응유 백제담로 백제향의 全州 1개 고을명이냐고 전주 목자씨 니네 나라로 다 껴져라 백제왜족이면 왜섬에 가서 살아라.
구당서 동이전 백제를 읽어보고 번역되어 있으니 뭘 걱정을 해? 안읽은 것인가? 한글도 못읽는 유기견교 엘을닮은 도올 야스페르츠 유태악마학자들이지?? 내용을 청주 해주 등등이 어째서 1개 고을이고 사방 4000리가 사방 1000로 부용국으로 지 멋대로 해석이냐고?? 일일일 주석을 달아야 알아? 아예 무시하면서?
첨부하니 읽어라도 보고 그리고 개새끼머리 유태무좀균 머리는 떼고 사람의 뇌라면 생각을 하면서 좀 읽어보고 말하라고. 그게 문자해독술을 하는 사람새끼지 누가 연세귀신대학 유태악마 야스페르츠하고 논데???
- 산
구당서 동이전 백제(舊唐書 東夷傳 百濟)
百濟國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1⊙<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所置內官曰內臣佐平, 掌宣納事; 內頭佐平, 掌庫藏事; 內法佐平, 掌禮儀事; 衛士佐平, 掌宿衛兵事; 朝廷佐平, 掌刑獄事; 兵官佐平, 掌在外兵馬事. 又外置六帶方, 管十郡. 其用法: 叛逆者死, 籍沒其家; 殺人者, 以奴婢三贖罪; 官人受財及盜者, 三倍追贓, 仍終身禁錮. 凡諸賦稅及風土所産, 多與<高麗>同. 其王服大袖紫袍, 靑錦袴, 烏羅冠, 金花爲飾, 素皮帶, 烏革履. 官人盡緋爲衣, 銀花飾冠. 庶人不得衣緋紫. 歲時伏臘, 同於中國. 其書籍有《五經》·子·史, 又表疏 依中華之法.백제국(百濟國)백제국(百濟國) 역시 본래 부여(夫餘)의 별종으로 일찍이 마한(馬韓)의 옛 땅에 있었으니 경사의 동쪽 5천2백 리에 있으며 큰 바다의 북쪽 그리고 작은 바다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북쪽으로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려(高麗)에 이른다. 그들의 왕이 거처하는 곳은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성이 있다.내직으로 두는 관직은 내신좌평(內臣佐平)이라 하여 조칙의 출납을 관장하며 내두좌평(內頭佐平)은 곳간의 일을 관장하며,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절과 의식에 관한 일을 간장하며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숙위(宿衛)를 서는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며,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벌과 옥사의 일을 관장하며 병관좌평(兵官佐平)은 대외적인 군대의 일을 관장한다. 또 밖으로 대방(帶方) 여섯을 두어 열 개의 군(郡)을 관리한다.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반역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은 관가에서 몰수하며 살인자는 세 배의 노비로서 속죄하게 하며 벼슬아치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적질을 한 자는 장물의 세 배를 추징하고 아울러 종신토록 금고형(禁錮刑)에 처한다.무릇 모든 부역과 조세 및 기후와 토질 및 산물은 고려와 대부분 같다. 왕의 복식은 큰 소매의 자줏빛 도포에 푸른 비단으로 된 바지와 까마귀빛 검은 비단의 관에 금꽃으로 장식을 하며 흰 가죽띠에 까마귀 빛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 벼슬아치들은 온통 붉은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한다. 서민들은 붉거나 자주빛으로 옷을 해입지 못한다.해마다의 절기 및 삼복과 납일 등은 중국과 같다. 서적으로 오경 및 자서와 사서가 있으며 또 표(表)와 소(疏) 등은 모두 중화의 법도에 의지하고 있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2⊙<武德>四年, 其王<扶餘璋>遣使來獻果下馬. 七年, 又遣大臣奉表朝貢. <高祖>嘉其誠款, 遣使就冊爲<帶方郡王>·<百濟王>. 自是歲遣朝貢, <高祖>撫勞甚厚. 因訟<高麗>閉其道路, 不許來通中國, 詔遣<朱子奢>往和之. 又相與<新羅>世爲 敵, 數相侵伐. <貞觀>元年, <太宗>賜其王璽書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徽猷, 甚以嘉慰. 朕自祗承寵命, 君臨區宇, 思弘王道, 愛育黎元. 舟車所通, 風雨所及, 期之遂性, 咸使乂安. <新羅王><金眞平>, 朕之藩臣, 王之 國, 每聞遣師, 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姪<信福>及<高麗>·<新羅>使人, 具 通和, 咸許輯睦. 王必須忘彼前怨, 識朕本懷, 共篤 情, 卽停兵革.] <璋>因遣使奉表陳謝, 雖外稱順命, 內實相仇如故. 十一年, 遣使來朝, 獻鐵甲雕斧. <太宗>優勞之, 賜綵帛三千段幷錦袍等.무덕(武德618~626)4년에 그들의 왕 부여장(夫餘璋)이 사신을 보내와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7년에 또 대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조공하였다. 고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사신을 파견하여 가서 대방군왕백제왕에 책봉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으며 고조는 그 노고를 위무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송사(訟事)로 인해 고려가 조공의 길을 폐쇄하고 중국과의 왕래를 허락치 않자 조서를 내리고 주자사(朱子奢)를 파견하여 가서 화해시켰다. 또 신라와 더불어 대대로 서로간에 원수로 삼으며 수 차례 서로 침략하고 정벌하였다.정관(貞觀627~649) 원년에 태종이 그 왕에게 새서(璽書)를 하사하여 이르기를[왕은 대대로 군장이 되어 동쪽의 울타리에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있었소 바다의 구석진 멀디 먼 곳으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어렵고도 험한 길을 충정과 정성으로 이르러 조공의 직분을 이으며 훌륭한 계책을 높이 여겨 유념하니 매우 가상하고도 위안이 되는구료. 짐은 삼가 영광스러운 명을 받들고 임금으로서 천하에 군림하였으니 왕도를 넓히고 백성을 사랑으로 기를 것이오 배와 수레가 교통하고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은 바라건대 천명에 순종하여 두루 빠짐없이 편안하게 다스려질 것이오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은 짐의 번신(藩臣)이요 왕의 이웃나라인데 매번 들리기로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는 일을 그치지 않으며 군사의 강함을 믿고 잔인한 짓을 하고만 있으니 기대하는 바에 매우 어그러지는 일이오 짐이 이미 왕의 조카 신복(信福) 및 고려와 신라의 사신에 대해서 칙서를 갖추고 왕래하며 화해하게 하였으니 모두 함께 화목해야 할 것이오 왕은 반드시 저들과의 예전 원한은 잊어버리고 짐의 본 마음을 깨달아 함께 이웃의 정을 돈독히 함으로써 곧 전쟁을 그치길 바라오]하였다. 장이 그리하여 사신을 보내고 표를 올려 사죄의 말을 늘어 놓으며 비록 겉으로는 명에 순종할 것을 일컬었으나 안으로는 실제 서로 원수로 지내기가 여전하였다.11년에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고 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쳤다. 태종이 노고를 특별히 대접하고 채색 비단 3천 단과 비단 도포 등을 하사하였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3⊙十五年, <璋>卒, 其子<義慈>遣使奉表告哀. <太宗>素服哭之, 贈光祿大夫, 賻物二百段, 遣使冊命<義慈>爲柱國, 封<帶方郡王>·<百濟王>. 十六年, <義慈>興兵伐<新羅>四十餘城, 又發兵以守之, 與<高麗>和親通好, 謀欲取< 項城>以絶<新羅>入朝之路. <新羅>遣使告急請救, <太宗>遣司農丞<相里玄奬>齎書告諭兩蕃, 示以禍福. 及<太宗>親征<高麗>, <百濟>懷二, 乘虛襲破<新羅>十城. 二十二年, 又破其十餘城. 數年之中, 朝貢遂絶.15년에 장(璋)이 죽자 그 아들 의자(義慈)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국상(國喪)을 고하였다. 태종이 소복으로 곡을 한 뒤 광록대부로 추증하였으며 물품 2백 단을 하사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의자를 주국(柱國)에 책명하고 대방군왕 백제왕에 봉하였다.16년에 의자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또 군사를 보내어 그곳을 지키며 고려와는 화친하여 좋게 왕래하였으며 당항성(黨項城)을 탈취하여 신라가 입조하는 길을 끊어버리고자 도모하였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급히 구원을 청함을 아뢰니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相里玄奬)을 파견하여 글을 지니고 두 오랑캐를 타일러 재앙되고 복록됨을 드러내 보이도록 하였다. 태종이 친히 고려를 정벌하기에 이르자 백제가 두 마음을 품고 허술함을 틈타 신라의 성 10개 성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22년 또 10개 남짓의 성을 격파하였다. 수 년 동안 조공이 마침내 끊어졌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4⊙<高宗>嗣位, <永徽>二年, 始又遣使朝貢. 使還, 降璽書與<義慈>曰:고종이 제위를 이으니 영휘(永徽650~655)2년에 비로소 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가자 새서를 내려 의자에게 이르기를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5-(詔1/1)⊙至如海東三國, 開基自久, 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俎, 尋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愍. 去歲王及<高麗>·<新羅>等使 來入朝/$[及]字各本原作[攻], 據《全唐文》卷一五改.$/, 朕命釋 怨, 更敦款穆. <新羅>使<金法敏>奏書: [<高麗>·<百濟>, 脣齒相依, 競擧兵戈, 侵逼交至. 大城重鎭, 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 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故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齊><桓>列土諸侯, 尙存亡國; 況朕萬國之主, 豈可不 危藩. 王所兼<新羅>之城, 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 虜, 亦遣還王. 然後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 , 耕織 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矣. 王若不從進止, 朕已依<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麗>, 不許遠相救恤. <高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蕃渡<遼澤>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바다 동쪽의 세나라는 터전을 연지 이미 오래로서 모두 강역의 경계가 열지어 있으니 땅의 형세가 참으로 개의 어금니와 같이 맞물려 있소. 근대 이래 마침내 서로의 미움으로 틈이 생기고 얽혀드니 전쟁이 엇갈려 일어나기에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소. 마침내 삼한의 백성들로 하여금 목숨은 도마 위 칼 끝에 걸려 있게 하며 창을 찾아들고 제멋대로 분풀이하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연이어지는구료.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사물을 다스림에 있어 심히 가엾게 여기오, 원수진 원한들을 풀고 다시 정성과 화목을 돈독히 하라 하였소. 신라의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아뢰는 글에서"고려와 백제는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며 다투어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침략하고 핍박하기에 이릅니다. 큰 성과 중요한 고을들은 모두 백제에 의해 병탄되었으니 강역은 날로 줄어들고 위세와 기력은 모두 시들어 버렸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리시어 침략한 성에서 돌아가도록 하여 주십시오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는다면 곧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쳐서 쟁취할 것입니다. 단지 예전에 땅을 얻고는 곧 서로간에 화해를 청할 것입니다."하였으니 짐은 그 말에 순리가 이씩에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소. 옛날 제 환공(桓公)은 열국(列國)의 제후로서 망해가는 나라를 받들어 보존하였으니 항차 짐은 만국의 주인으로서 어찌 위기에 빠진 번국(藩國)을 근심하지 않을수 있겠소? 왕이 병합한 신라의 성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으로 반환해야 할 것이며 신라에서 노획한 백제의 포로들 역시 왕에게 돌려보낼 것이오. 그러한 후에 근심을 풀고 분쟁을 해소하며 창을 넣어두고 갑옷과 투구를 가로누임으로서 백성들은 짐을 내려 어깨를 쉬게하는 소원을 얻게 되고 세 번국들은 전쟁의 노고가 없어질 것이오. 무릇 변방의 땅에 피가 흐르고 강토의 경계로는 주검이 쌓여 있으며 밭갈고 길쌈하는 것이 모두 폐지되어 남녀가 무료함에 견준다면 어찌 같은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오. 왕이 만약 진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法敏)의 소청대로 그에게 맡겨서 왕과 더불어 결전 할 것이며 역시 영을 내리고 고려와 약속하여 머리 서로간에 어려움을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고려가 만약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곧 거란(契丹) 등 여러 오랑캐로 하여금 요택(遼澤)을 넘어가 노략질하게 할 것이오 왕은 가히 짐의 마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고 훌륭한 계책을 살펴 도모하여 뒤에 후회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6⊙六年, <新羅王><金春秋>又表稱<百濟>與<高麗>·<靺鞨>侵其北界, 已沒三十餘城. <顯慶>五年, 命左衛大將軍<蘇定方>統兵討之, 大破其國. 虜<義慈>及太子<隆>·小王<孝演>·僞將五十八人等送於京師, 上責而宥之. 其國舊分爲五部, 統郡三十七, 城二百, 戶七十六萬. 至是乃以其地分置<熊津>·<馬韓>·<東明>等五都督府, 各統州縣, 立其酋渠爲都督·刺史及縣令. 命右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總兵以鎭之. <義慈>事親以孝行聞, 友于兄弟, 時人號[海東<曾>·<閔>]. 及至京, 數日而卒.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特許其舊臣赴哭. 送就<孫晧>·<陳叔寶>墓側葬之, 幷爲 碑.6년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또 표를 올려 백제 및 고려와 말갈(靺鞨) 등이 그들의 북쪽 경계를 침략하여 이미 30여 성을 함몰시켰다고 일컬었다.현경(縣慶656~661)5년에 좌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니 그 나라를 크게 격파하였다. 의자 및 태자 융(隆)과 소왕 효연(孝演) 그리고 위장(僞將) 59명을 포로하여 경사에 보내자 상께서 그들을 문책하고 용서하여 주었다. 그 나라는 예전에 5부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37군(郡)과 2백 성(城)을 거느리고 가구가 76만이었다. 이에 이르러 그 땅을 나누어 웅진(熊進)과 마한(馬韓) 그리고 동명(東明)등 다섯 도독부를 두고 각기 주(州)와 현(縣)을 통치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우두머리들을 세워 도독(都督)과 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으로 삼았다. 좌위랑장 왕문도(王文度)를 명하여 웅진도독으로 삼고 군사를 총괄하여 그곳을 진압하게 하였다.의자는 어버이를 섬김에 그 효행이 알려졌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으니 이때의 사람들이 부르기를 해동증삼, 또는 민자건이라고 하였다. 경사에 이르자 수일 만에 죽었다.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추증하고 그의 옛 신하들이 부복하여 곡하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였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淑寶)의 묘지 곁에 그를 장례 지내고 아울러 비석을 세워 주었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7⊙<文度>濟海而卒. <百濟>僧<道琛>·舊將<福信>率衆據<周留城>以叛. 遣使往<倭國>, 迎故王子<扶餘 >立爲王. 其西部·北部 城應之. 時郞將<劉仁願>留鎭於<百濟>府城, <道琛>等引兵圍之. <帶方州>刺史<劉仁軌>代<文度>統衆, 便道發<新羅>兵合契以救<仁願>, 轉鬪而前, 所向皆下. <道琛>等於<熊津江>口立兩柵以拒官軍, <仁軌>與<新羅>兵四面夾擊之, 賊衆退走入柵, 阻水橋狹, 墮水及戰死萬餘人. <道琛>等乃釋<仁願>之圍, 退保<任存城>. <新羅>兵士以糧盡引還, 時<龍朔>元年三月也. 於是<道琛>自稱領軍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誘叛亡, 其勢益張. 使告<仁軌>曰: [聞<大唐>與<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以國付<新羅>. 與其受死, 豈若戰亡, 所以聚結自固守耳!] <仁軌>作書, 具陳禍福, 遣使諭之. <道琛>等恃衆驕倨, 置<仁軌>之使於外館, 傳語謂曰: [使人官職小, 我是一國大將, 不合自參.] 不答書遣之. 尋而<福信>殺<道琛>, 倂其兵衆, <扶餘 >但主祭而已.문도(文度)는 바다를 건너다 죽었다. 백제의 승려 도침(道琛)과 옛 장수 복신(福信)이 군중을 거느리고 주류성(周留城)에 자리잡아 반란을 일으켰다. 사신을 보내 왜국(倭國)으로 가서 옛 왕자 부여풍(夫餘 )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그 곳의 서부와 북부에서 모두 배반하여 그에 호응하였다. 이때 낭장 유인원(劉仁願)이 백제부의 성에 남아 진영을 차리고 있었는데 도침 등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포위하였다. 대방주자사 유인궤(劉仁軌)가 문도를 대신하여 군중을 통솔하고 가는 길에 신라의 군사를 일으켜 서로 맹세하고는 유인원은 구원하고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며 세워 전진하니 향하는 곳은 모두 굴복하였다.도침등이 웅진강(熊進江)의 입구에서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관군에 저항하자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와 더불어 사면에서 협공하니 적의 무리들이 패주하여 목책으로 들어가다가 물로 막혀 있고 다기는 좁아서 물에 떨어지거나 싸우다 죽은 자가 1만 여명이었다. 도침 등이 이에 유인원의 포위망을 풀로 임존성(任存城)으로 퇴각하여 수비하였다. 신라의 군사가 식량이 다하였다 하여 돌아가니 이때가 용삭(龍朔661~663)원년 3월이다.그리하여 도침은 스스로 영동장군이라 칭하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창히며 반란하고 도망한 자들을 유혹하여 불러들이니 그 세력이 점차 강해졌다. 유인궤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기를[듣건대 대당이 신라와 더불어 약조하고 맹서하기를 백제인은 늙은이나 젊은이를 묻지 않고 모두 죽인 후 나라를 신라에 넘긴다고 하였소 그대로 앉아서 죽음을 받는 것이 어찌 싸우다 죽는 거소가 같을 것이오 그러한 까닭에 모여서 스스로 굳게 스스로 굳게 지킬 뿐이오]하였다 유인궤가 글을 써서 재앙됨과 복록됨을 갖추어 진술하고 사신을 보내 그들에게 깨닫도록 일러 주었다. 도침등이 군중을 믿고 교만하여 인궤의 사신을 바깥 관사에 놓아두고 말을 전하여 이르기를[사자의 관직은 작으나 나는 한 나라의 대장이니 만나서 스스로 섞일 수 없다]하며 글에 답하지 않고 그를 보냈다. 얼마 있지 않아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그의 군사와 무리를 아우르니 부여 풍은 단지 제사를 주재할 뿐이었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8⊙二年七月, <仁願>·<仁軌>等率留鎭之兵,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以<眞峴城>臨江高險, 又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引<新羅>之兵乘夜薄城, 四面攀堞而上, 比明而入據其城, 斬首八百級, 遂通<新羅>運糧之路. <仁願>乃奏請益兵, 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統衆浮海赴<熊津>, 以益<仁願>之衆. 時<福信>旣專其兵權, 與<扶餘 >漸相猜貳. <福信>稱疾, 臥於窟室, 將候<扶餘 >問疾, 謀襲殺之. <扶餘 >覺而率其親信掩殺<福信>, 又遣使往<高麗>及<倭國>請兵以拒官軍. <孫仁師>中路迎擊, 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兵勢大振. 於是<仁師>·<仁願>及<新羅王><金法敏>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杜]字各本原作[社], 據本書卷八四《劉仁軌傳》·《通鑑》卷二 一改.$/·<扶餘隆>率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以會陸軍, 同趨<周留城>. <仁軌>遇<扶餘 >之衆於<白江>之口, 四戰皆捷, 焚其舟四百 , 賊衆大潰, <扶餘 >脫身而走. 僞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 降, <百濟>諸城皆復歸順, <孫仁師>與<劉仁願>等振旅而還. 詔<劉仁軌>代<仁願>率兵鎭守. 乃授<扶餘隆><熊津>都督, 遣還本國, 共<新羅>和親, 以招輯其餘衆.2년 7월에 유인원과 유인궤 등이 진영에 남아있던 군사를 거느리고 복신의 나머지 무리들을 웅진의 동쪽에서 크게 격파하여 그들의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과 대산(大山) 그리고 사정(沙井)의 목책을 쳐서 빼앗으며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으며 이에 영을 내리고 군사를 나누어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고 높고 험하며 또한 길목의 요충지에 막아서는 곳이기에 군사를 보충하고 그곳을 수비하였다.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밤을 틈타 성에 가까이 접근하여 사면에서 치(雉)로 기어올라 날이 밝을 때쯤 그 성에 들어가 점거하고는 8백 급의 머리를 베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미 운송로를 통하게 하였다. 유인원이 이에 군사를 충원하여 줄 것을 주청하니 조서를 내려 치주(淄州) 청주(靑州) 내주(萊州) 해주(海州) 등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고 좌위위장군 손인사(孫仁師)를 파견하여 무리를 통솔하고 바다를 건너 웅진으로 향하게 하여 유인원의 무리를 도와주게 하였다.이때 복신이 이미 병권을 전횡하니 부여풍과는 점차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복신이 병이라 일컬으며 석굴에 들인 방에 누워서 장차 부여풍이 문병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불시에 살해할 계책을 세웠다. 부여풍이 이를 깨닫고 그가 가까이 하고 있는 신임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 또 사신을 고려와 왜국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여 관군에 저항하였다. 손인사가 중도에 공격을 받았으나 격파하고 마침내 유인원의 무리와 더불어 서로 합치니 군사의 세력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그리하여 손인사(孫仁師)와 유인원(劉仁願) 및 신라왕 김법민이 육군을 거느리고 전진하였으며 유인궤 및 별수 두상(杜爽)과 부여융(夫餘隆) 등은 수군과 군량선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같이 주류성으로 향하였다. 인궤가 부여풍의 무리를 백강의 입구에서 만나 네번 싸워 모두 승리하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적의 무리들이 크게 무너지고 부여풍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 위왕자 부여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남녀와 왜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항복하니 백제의 여러 성이 모두 다시 귀순하여 왔으며 손인사와 유인원 등은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조서를 내려 유인원을 대신하여 유인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여 l키게 하였다. 이에 부여에게 웅진 도독을 제수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신라와 함께 화친하며 그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모으게 하였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9⊙<麟德>二年八月, <隆>到<熊津城>, 與<新羅王><法敏>刑白馬而盟. 先祀神祇及川谷之神, 而後 血. 其盟文曰:인덕(麟德664~666)2년 8월에 융이 웅진성에 도착하여 신라왕 법민과 더불어 백마를 잡아 맹서하였다. 먼저 하늘과 땅의 신령 및 하천과 계곡의 신에게 제사를 지네고 나서 피를 들이 마셨다. 그 맹서하는 글에 이르기를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10-(盟1/1)⊙往者<百濟>先王, 迷於逆順, 不敦 好, 不睦親姻. 結託<高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破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無辜, 頻命行人, 遣其和好. 負險恃遠, 侮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 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然懷柔伐叛, 前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 冊. 故立前<百濟>太子司稼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恭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親臨勸諭, 具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 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弟兄. 祗奉綸言, 不敢失墜, 旣盟之後, 共保歲寒. 若有棄信不 ,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 , 明神鑒之, 百殃是降, 子孫不昌, 社稷無守, 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契,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或敢犯. 神之聽之, 是饗是福.[지난날 백제의 선대왕은 거역과 순종의 길에서 방황하고 이웃과의 호의를 돈독히 하지 않으며 친인척과 화목하지 못하였다. 고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며 함께 잔인하고 난폭하게 신라를 침략하고 빼앗아 고을을 파괴하고 도성을 도륙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천자께1서 하나의 물건일지라도 그 바른 자리를 잃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백성들의 무고함을 가련하게 생각하여 빈번히 명을 내려 사람을 보내어 화해하여 좋게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험난함에 의지하며 멀리 있음을 믿고 하늘의 도리를 업신여겼다. 황제께서 이에 노하여 엄속히 백성을 위로하고 반역자를 문죄하는 토벌을 행하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에는 한 차례의 싸움으로 크게 평정되었다. 진신로 궁궐과 저택을 파내어 웅덩이로 만들어 뒤에 오는 후손에게 훈계를 삼을 것이며 원인과 근본을 파헤쳐서 후세에 교훈으로 드리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순한 자를 감싸안고 반경을 정벌하는 것은 앞선 왕들의 법칙이요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앞선 현인들의 공통된 규범이다. 일을 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옛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은 옛 서책에도 전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예전의 백제 태자 사가정경 부여융을 세워 웅진도독을 삼가 그 제사를 지키게 하고 그 고향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신라에 의지하여 오래도록 동맹을 맺은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며 각기 묵은 원한을 없애 버려 화친으로 좋은 결실을 맺어야 할 것이다. 조서의 명을 삼가 받들어 영원히 번복의 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사자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파견하고 친히 임하게 하여 깨닫도록 권하고 화해의 교지를 자세히 펴는 것이니 혼인으로서 이를 약속하고 맹서로서 이를 아뢰는 것이다.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고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돈독히 해야 할 것이니 재난은 나누어 가지고 환난은 구휼하며 서로 은혜하기를 마치 형제처럼 해야 할 것이다. 조서를 공경하여 받들어 감히 실추시키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서한 후에는 함께 절개를 지켜 보전하여 나갈 것이다. 만약 믿음을 버리거나 영원하지 않은 채 그 덕이 변절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군중을 동원하여 변방을 침범한다면 신령께서 이를 살펴보고 있음에 1백가지 재앙을 내릴 것이요, 자손이 번창하지 않을 것이며 사직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며 정결히 하고 제사를 지낸들 그 정성은 닳아 없어질 것인즉 남겨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으로 글을 쓰고 쇠로 새겨 이를 종묘에 깊이 간직하니 자손만대 혹시라도 감히 침범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신께서 이를 들으실 것이니 이로서 누릴 복이 결정되리라]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11⊙<劉仁軌>之辭也. 訖, 埋幣帛於壇下之吉地, 藏其盟書於<新羅>之廟.유인궤의 글이다. 피를 마시는 예식이 끝나자 폐백을 단 아래의 상서로운 땅에 다 묻고 맹서의 글은 신라의 종묘에 깊이 간직하였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12⊙<仁願>·<仁軌>等旣還, <隆>懼<新羅>, 尋歸京師. <儀鳳>二年, 拜光祿大夫·太常員外卿兼<熊津>都督·<帶方郡王>, 令歸本蕃, 安輯餘衆. 時<百濟>本地荒毁, 漸爲<新羅>所據, <隆>竟不敢還舊國而卒. 其孫<敬>, <則天>朝襲封<帶方郡王>·授衛尉卿. 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 <百濟>之種遂絶.유인원과 유인궤가 이미 돌아가자 부여융이 신라를 두려워하여 얼마지 않아 경사로 돌아왔다. 의봉(儀鳳676~679) 2년에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의 관직을 수여하고 영을 내려 본래의 번국으로 돌아가 나머지 무리들을 편안하게 돌보도록 하였다. 이대 백제의 본토는 황폐하게 훼손되어 점차 신라에 의해 점거되니 부여융이 결국에는 감히 옛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 손자 경을 측천의 조정에서 대방군왕에 피봉된 것과 위위경에 제수한 것을 답습하게 하였다. 그 땅은 그때부터 신라(新羅)와 발해말갈(渤海靺鞨)에 의해 나뉘어 졌으니 백제의 혈통은 마침내 단절되었다.
[주의, 중국입잡이 일방적 황제와 번국으로 쓴 짱개 난필이나. 그 지명 위치가 한반도내에 이을 수 없는 것으로 40개성이 한번에 ? 격파당하면 경상도가 그리 넓냐고 한줌 흙덩이지. ㅉㅉ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