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읽은 <내가 걸어서 여행하는 이유>를 언급하면서 이유 없는 행위가 어디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긴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닐 듯 싶습니다.
이렇듯 별생각 없이 볕은 말이나 글의 무게를 통감합니다만 차츰 날도 추워지고 썰렁한 게시판을 위해 헐렁한 글 몇 자 덧붙여봅니다.
사실 제가 장대톱 저의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이유는 삼국지의 명장 관우처럼 대의와 의리를 위한 것은 분명 아님을 눈치들 챘을 테고 (더구나 자루에 청룡을 세기지도 않았으며 반달모양의 칼날도 아닌 톱날을 가지고 꽤 거창하게 허풍을 떨었으니 관우와 청룡언월도와의 허구보다 더 황당한 허씨의 허풍임을 인지했을 테고) 지난번에 밝혔듯 팔운동이나 하려 했다면 다른 팔운동들도 많겠기에 딱히 합당한 이유라곤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느 분의 말씀처럼 공익사업이라거나 공공선을 위한 것은 더욱이 아닐 것이기에 저로서도 딱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
물론 길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들 좀 치우는 것도 남들에겐 좋은 일은 아니냐 싶겠지만 우선 저에게 좋고 그걸로 족하기에....
그저 폭설에 부러져 흉물처럼 걸려 있는 죽은 나뭇가지나 제거하고 왠지 저 말라 비틀어 죽은 가지만 잘라주면 나무가 훨씬 잘 자랄 것 같고 (인간인 저의 시각에선) 시원하게 깔끔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이유 외에는, 아울러 그런 자그마한 재미가 집앞 산책을 조금은 덜 지루하게 할 것 같고 쓱싹하며 나무들 이발을 등골에 땀 좀 흘리며 시키다보면 (아주 조금은 아드레날린 분출이었던 간에) 뒤숭숭한 시국에 잡생각도 덜 드는 등 그 외에는 좀체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겠기에 이유 없는 행위도 얼마든 있을 수 있겠다 뭐 그런 궤변입니다.
또 하나 더, 이제껏 등기분 등본상 혹은 식물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법적인 내 땅 한 평 가져본 적 없는 신세인지라 베란다에 있는 화분 한둘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이가 집 앞 드넓은 산책로를 다 내 것 같이 소중하게 여겨야 성이 찬다고 하면 말이 될런지....
아, 이 양반아, 한 해 내도록 화분에 물준 적 몇 번이었냐면 할 말 없음.
두 시간 이상 걸리는 두리마루 산책로에서 평일 짧은 산책에선 지니고 다니지 않다보니 이제껏 세 번 청룡언월도를 펼쳐들고 산책로를 돌아본 바에 의하면....
열심히 죽은 나뭇가지를 쓱싹 쓱싹 썰고 있는데, 뒤에서 다가온 60대 후반 아저씨 둘 하시는 말씀, 거 그런 것까지 민원해결하고 있습니까, 주말에 고생이 많다고 하시는 말에 졸지에 공무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뭐 무급 공무원이면 어떻고 누가 명예시민증을 추천할까 겁이 나지만 이런저런 오해 받기 딱 좋은 (죽은 자식 붕알 만지기가 아닌) 죽은 나무 가지치기인지라 이걸 계속해야 하나 마나 싶군요.
그래도 살며 남 눈치 조금은 덜 보며 살아온 터라 기회가 되는대로 조금씩 행할 생각입니다.
한마디 더.... 민원이라는 말,
올가을 극심한 벌레발생시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구청인지 동사무소에 전화를 했던지 (울 마눌님도 한번 구청에 전화하는 걸 똑똑히 목격했기에) 어느 하루는 동사무소 직원이 둘러보더군요.
그라 하여 딱히 벌레 무발생 해결책은 없었을 것 같은데, 저와 비슷한 무리의 동네 아저씨들이 (줌마님들께서 빗자루 든 경우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기에 더) 솔선해서 빗자루를 열심히 드는 것으로 이번 가을은 지나갔습니다.
마눌님 눈총이 두려워 민원이 능사가 아님을 미처 당시엔 강조할 수 없었다는 점은 실토합니다.
이거 참. 그러기에 제가 마당쇠 노릇마저 열심히 하고 있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열심히 쓸고 또 쓸어야죠.
이 양반아, 집안이나 열심히 쓸으세요, 라는 말이 귀청에 울리는 듯 하지만 요즘 같은 에이아이 시대에 그건 로봇 청소기가 있잖냐고 항변하고프며 자고로 바깥양반이 바깥일 하는 게 맞겠기에....
한편 조립식 청룡언월도를 집에서부턴 펼쳐들진 않고 그래도 남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꽤 한적한 지점에서나 펼치고 혹 행인들이 빈번한 산책로에서는 마눌님을 방패막이로 세워두기도 했는데, 대부분 그냥 지나가긴 하지만 혹 남들이 솔방울이나 솔잎을 채취하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 바로 그 촉새 입에서 “보기 싫지 않게 죽은 가지나 치는 거”라는 녹음 멘트가 흘러나오도록 유도교육도 해뒀으니...
하기사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자기 편이라 식구지간에 혼자 의심받기도 억울했던 터라 저를 옹호하는 그 모습이 어찌 반갑지 않으리...
또 하나, 쓱싹 행위의 장점 외 단점도 밝혀야 형편에 맞을 듯 싶군요.
3.5미터짜리 봉을 머리 위로 들고 쓰는지라 톱밥가루가 심심치 않게 날리다보니 가뜩이나 가는 눈에 실눈을 뜨고 톱질하는 모습이 뭐(?)했던지 마눌님께선 보호용 선그라스까지 챙겨주기도 하고 동행시에 혹시나 싶어 1회용 인공눈물까지 챙겨가지만 뭐 그런 것까지 필요하냐며 호기를 부리곤 했죠.
한데 현장에선 몇 번 눈을 깜밖이며 괜찮았던 게 집에 와 씻고 밤잠을 자는데 속눈꺼풀에 묻었던 간에 티끌들이 슬그머니 눈알을 간질이는 통에 동지섣달 독수공방도 아니었건만 홀로 눈물 흘려야 했다는 것.
한밤중에 마눌님 깨워 인공눈물로 눈알 좀 씻어 달라 했다간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진짜 생 눈물 흘릴 판이었을 터.
여하튼 청룡언월도를 펼쳐 들고 가면 소싯적 칼싸움할 때의 무사나 칼잡이 폼도 잡아보는 유치한 으슥함을 즐기면서 나무를 고사시키며 하늘로 치솟는 칡넝쿨은 악의 화신인 듯 제거해 가는데, 저 앞서 다가오던 강아지와 주인, 앞서 걷던 강아지 지레 겁을 먹고 깨갱거리며 조용히 지나가고 심지어 어느 한 아저씨도 산책로 저 멀리 떨어져 피하는 눈치로 지나가는 등....
그들에게 괜한 미안함마저 들긴 합니다. 그러기에 지레 겁먹을 필요까지야.....ㅎㅎ
한 날은 머리 위 저 높은 곳에서 딱딱 하는 딱따구리 소리가 들리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집앞 산책로에 약 두세 마리의 딱따구리가 거주하는데, 한두 번은 말벌집도 쪼긴 하지만 주로 죽은 나무를 쪼더군요.
근데 녀석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이거 괜히 내가 녀석들 생존구역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더군요. 죽은 나뭇가지가 많아야 벌레들을 많이 찾아 먹을 것이기에.....
하기사 죽은 가지 잘라주는 것에 반해 자연은 그대로 바람과 비, 눈에 맡겨 자연스럽게 보존하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그냥 내버려둬도 좋을 텐데 싶은 생각도 듭니다.
강풍과 폭우, 폭설에 맡겨두면 아주 자연스럽게 가지치기가 될 텐데 말이죠.
물론 제가 이 자그마한 두 시간 거리의 산책로 전 구간을 다 관할하고 있지도 않고 그럴 능력도 열의도 없으며 제가 하고픈 정도만 아주 조금 손을 대고 있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거주지 인근의 산책로라 인간이 지나다닐 수 있는 정도는 인위적으로 손을 봐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소 비약적인 일례지만 자연발화에 의한 산불도 그 규모나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순 있겠지만 그냥 두는 게 더 자연스럽다 하는 의견도 있을 테지만 우리 인간에게 피해가 갈 정도면 당연히 인위적인 손길이 닿아야 하리라 봅니다.
여하튼 저의 청룡언월도를 펼쳐들고 산책하다보니 숲을 조금은 더 관찰하게 되더군요.
나무 한 그루를 보더라도 가지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게 됩니다.
누구는 이렇게 잎을 떨군 요즘, 땅이 얼어붙기 전까지 땅속 나무뿌리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라더군요.
물속의 오리발처럼 저 또한 뭔가는 열심히 해야 할 텐데 그게 뭘까 고려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겨울이 지루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이렇듯 이제껏 공갈(?) 청룡언월도를 기껏 세 번 휘둘렀건만 허풍이 좀 심했던 건 아닌지 헷갈리며 앞으로 가지치기 열정이 얼마나 지속될지 장담하기도 할 수도 없겠으며 반백에 더해 반십 년 살아온 유치찬란한 밑바닥이 다 들어날 지경이라 그만 접어야겠습니다. 휘리릭...
첫댓글 제 직장에 어느 분
더 이상으로
함께 나누는 삶을
사시는 따뜻한 대장님이십니다.
입사시험 필요 없는 직장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ㅎㅎ 두리봉님과 더불어...
우선 투잡 뛰시다가 은퇴후 정식으로 입사하시기 바랍니다.
톱날 안부러질 정도로만 하세요~
사진으로만 본 대장님의 모습에 "청룡언월도"라 (3.5m 용) ~~~~
상상이 갑니다.
그래도 사회봉사인데~~~
수고하십니다.
ㅎㅎ 사회봉사라 여겨주시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