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를 기다리며
박래여
온종일 비가 온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단다. 서울 진이가 오기로 한 날이지만 비가 많이 온다고 하루 늦추기로 했다. 비는 온종일 오락가락 해도 새싹은 신바람 난 듯이 푸른 색깔을 드러낸다. 마당도 숲도 연둣빛이다. 숲의 갈색을 덮어가는 녹색은 하루가 다르다. 모과나무에도, 산수유나무에도 잎눈이 파릇파릇하다. 잔디밭에는 토끼풀이 먼저 파릇하다.
아침에 눈만 뜨면 화사한 벚꽃이 먼저 반긴다. 우리 집 밑에서 시작된 벚꽃 길은 등을 넘어간다. 사방 천지에 난 벚꽃 길을 보며 진해 군항제를 생각한다. 진해에서 소녀시절을 보낸 나는 벚꽃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군항제가 시작되기 한 달 전부터 진해는 축제 분위기였다. 행사일정에 따라 우리학교 전교생은 강강술래라는 민속놀이 춤을 배웠다. 한국 무용에 대한 기본조차 없었던 나는 친구들 따라 하기도 벅찼다. 그래도 춤은 재미있고 즐거웠다. 붉은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고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도는 춤 맛에 반해 열심히 하긴 했다.
그때 고전무용 기본기라도 제대로 익혔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무용보다 새치름한 문학소녀였고, 책벌레였다. 아는 이 없는 낯선 도시, 낯선 소녀들 사이에 섰을 때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었다. 맨 처음 사귄 친구가 진이다. 같은 반이었고, 진해 토박이였던 그녀와 단짝이 되었다. 그녀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썼다. 나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지만 그림보다 글쓰기를 택한 것은 이젤이나 수채화 물감, 이어 유화물감을 살만큼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친구 진이, 생활력 강하고 주판 잘 퉁기던 친구, 작은 체구에 비해 엄청 야무졌던 친구는 지금도 나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산다. 그녀가 온다는데 비 때문에 하루를 늦추었다. 비가 얄밉다. 여고 3년 동안 단짝으로 붙어 다녔던 친구, 지금도 단짝인 친구, 그녀는 미대를 갔고, 아이들에게 미술 과외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고 오랫동안 과외 선생으로 생계를 이어갔었다. 지금도 그림은 놓지 않고 있다. 그녀는 내게 귀한 친구다. 내일이면 만날 수 있다. 비야 이제 그만 그쳐다오. 내 친구 발목 묶지 말고.
비 오는 날이 좋은 점도 있다. 온종일 『혼불』에 빠져 지낼 수 있으니까. 이제 열 권 중 두 권만 남아있다. 책을 읽다가 밑줄을 긋고 싶거나 적어두고 싶은 문장을 만나곤 한다. 머릿속에 저장하려고 부지런히 저장버튼을 누르지만 예전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까지 애착이 갔던 부분을 다시 새겨봐야 할 것 같다. 『혼불』 한 질을 살까. 서재에 꽂아놓고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서가의 책도 버려야 할 시간을 산다. 누구였던가. 딸의 혼수품에 『혼불』 한 질을 사서 넣어주었다던가. ‘딸아, 너도 『혼불』 읽어봐라. 새길 점도 있고, 배울 점도 많다.’ 그러긴 했지만 내 딸이 청암부인처럼, 효원이처럼, 강실이처럼 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옛날이라면『혼불』에 나오는 양반가 여인의 법도를 몸에 익혀야 하겠지만 현대 여성이라면 그것은 족쇄다. 차라리 옹구네처럼 거치적거릴 것 없이 당당하게 제 몫을 챙기는 여자로 살기를 바란다. 내 딸은 관습이나 인습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길 바란다.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화사하게 핀 벚꽃은 고갯마루까지 하얗게 길을 냈다. 진이가 오면 벚꽃 나들이 가야지. 벌써부터 설렌다. 밤늦도록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보따리 풀 생각에 미소를 짓는다. 내 친구 진이.
첫댓글 저 역시 친구를 기다립니다.
손가락을 꼽아도 다섯 넘기기 어려운 귀한 친구지요.
기억력이 뛰어나고 입담이 좋아 모임에 빠지면 썰렁해지는 웃기는 동창입니다.
마음을 부담없이 나눌 수 있는 진이같은 친구는 평생 함께할 단짝이 되어 든든한 재산이 됩니다.
좋은 시간 나누십시오.
선생님, 최고^^ 요즘 저도 홈나들이만 하고 나가는데
글밭이 썰렁할 때면 글을 올릴까 말까 망설이게 됩니다.
여긴 김영중 선생님께서 잘 갈무리 하고 계시니
홈이 살아있어요.^^
제 친구는 왔다가 잘 놀고 갔어요.
우리 집 다녀간 후 삭막한 서울이 답답해 몸살을 앓는답니다. ㅎㅎ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