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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한국사상 스크랩 불교조각을 통해 본 고구려의 불교문화 / 국보이야기
내생애 추천 0 조회 85 15.12.24 01: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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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이야기

 

불교조각을 통해 본 고구려의 불교문화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우리나라 고대 문화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불교는 건축, 조각, 회화, 공예의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새로 창건된 사찰의 주요 의식공간인 금당(金堂)에 예배존상으로써 봉안되는 불상의 조성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조각은 한국조각을 대표하는 주제가 되었다.

불교가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 2년(372)이지만, 이미 그 이전에 요동지방을 통해서 중국 화북지방의 불교가 고구려에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식적인 최초의 전래는 오호십육국의 하나로 북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 357~385년 재위)이 승려 순도(順道)를 사신과 함께 파견하여 불상과 경전을 고구려로 보내온 것이다. 당시 전진에서는 부견의 열렬한 후원 아래 당대 최고의 승려였던 도안(道安)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가 미륵보살을 신앙하였으므로 고구려에 전해졌던 상이 미륵상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2년 후인 소수림왕 4년(374)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오고, 그 이듬해 초문사(肖[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순도와 아도를 각각 머물게 하였는데, 이 절들에 봉안된 불상은 서울 뚝섬(자양동)의 모래사장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좌상(사진 1)과 같은 중국 화북지역 불상에 가까운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불상은 5세기경의 작품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제작국은 확실하지 않다.

 

1. 금동여래좌상, 5세기 전반, 서울 뚝섬출토, 높이 4.9cm,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의 불상은 불교가 공인되고 나서 6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거의 150여 년간 한 구도 전해오는 것이 없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불상도 6세기 소형 금동불상 몇구에 불과하다.

 

비록 조각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가장 이른 고구려의 초기 불상형식을 보여주는 예는 장천 1호 분 예불도의 불좌상이다. 이 벽화에는 양쪽 어깨를 가리는 가리는 방법(通肩式)으로 가사를 입고 두 손을 마주 포개어 배에 대고 있는(초기 선정인) 불상(사진 2)이 사자가 좌우에 표현된 방형의 대좌 위에 앉아있는데, 서울 뚝섬 출토 금동여래좌상과 기본적으로 유사한 형식을 보인다.

 

 

2. 불좌상, 장천 1호묘 벽화예불도 부분, 고구려 5세기, 길림성 집

 

 

현존하는 고구려의 기년명 불상으로 가장 이른 예는 539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가 7년 기미명(延嘉七年己未銘) 금동여래입상(연가불)이다(사진 3).

이 상은 평양의 동사(東寺)에서 주조되어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던 천불 가운데 한 구이다. 얼굴이 갸름하고 좌우로 뻗치는 대의(大衣) 한 자락이 왼쪽 손목 위에 올려져 있으며, 시무외·여원인의 통인을 결한 왼손의 손가락 두 개를 안으로 접은 표현 등은 북위와 남제(南齊)·양(梁) 조각에서 5세기 말~6세기 초부터 나타나는 표현으로 대중교섭이 활발했던 고구려의 불교조각에 중국 남북조 불상양식이 반영된 것이다.

 

 

3. 연가 7년 기미명 금동여래입상, 고구려 539년경, 경남 의령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천불상의 예로는 연가불 외에도 평양 원오리(元五里)사지 출토 소조 불·보살상들(사진 4,5)이 전하며 이 상들은 평양 토성리(土城里)에서 출토한 도범(陶范)과 유사한 형태의 소조불상틀을 사용하여 흙으로 불상을 대량 제작하였던 것을 알려준다. 원오리사지 출토 소조불좌상은 연잎이 통통한 단판연화좌의 표현이 연가불의 대
좌 연판과 유사하고, 같은 평양지역의 불상이라는 점에서 재료는 다르지만 상호 연관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4. 소조불좌상, 고구려 6세기, 높이 19.5cm, 평남 평원군 원오리출토

 

 

5. 소조보살입상, 고구려 6세기, 높이 17cm, 평남 평원군 원오리사지출토

 

 

앞의 불상들보다 한층 발전된 단계를 보여주는 상으로 황해도 곡산에서 출토한 경4년 신묘명 금동삼존불상(571)을 꼽을 수 있다(사진 6).

이 불상은 고구려에서 유행하였던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 형식으로 3구의 화불(化佛)이 새겨진 커다란 배(舟) 모양의 광배 중앙에 본존여래상이, 좌우에는 협시 보살상 2구가 표현되어 있다. 일광삼존불의 예는 이 밖에도 계미명 금동삼존불상(563년 추정, 간송미술관)을 비롯해서 광배만 남아있는 평양 평천리출토 영강(永康) 7년명(551년경) 광배, 좌우 협시보살상이 남아있는 충북 중원군(現 충주시)에서 출토한 건흥 5년 병진명(丙辰銘) 금동광배(596년 추정) 등을 꼽을 수 있다.

 

6. 경4년 신묘명 금동삼존불입상, 고구려 571년경, 황해도 곡산출토,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일광삼존불상은 중국에서 북위 말~동위 대에 걸쳐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형식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남경 신가구(新街口)에서 출토한 양 대통 1년(527)명 금동일광삼존불상(사진 7)을 비롯한 몇 구의 금동
일광삼존불상의 예는 이러한 형식이 남조지역에서도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아울러 6세기 초에 남조 양의 수도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 부근의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에 주석하며 중국 삼론종을 확립했던 고구려 승려 승랑(僧朗)의 활약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도 당시 고구려와 남조의 긴밀한 불교문화교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7. 금동삼존불입상, 양 527년, 남경 신가구출토, 남경시박물관 소장

 

 

현존하는 불상조각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불교신앙을 살펴보면, 먼저 원오리사지 소조불보살상과 연가명 금동불입상의 명문을 통해서 당시 대승불교의 천불사상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강 7년명 광배(551년경)
에는 미륵존상을 조성하여 돌아가신 어머니가 미륵삼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기 바라는 발원이 새겨져 있다. 경4년 신묘명 삼존불상의 광배에는 비구와 여러 선지식(善知識)이 자신들의 스승과 부모를 위해 무량수상(아미타불상)을 조성하면서 다음 생에 함께 태어나서 미륵을 만나 불법을 듣기 바라는 내용의 발원이 담겨있
다. 한편, 고구려의 옛터에 건국된 발해 초기의 불상들 가운데 이불병좌상(二佛幷坐像)이 여러 구 출토한 것은 고구려의 법화사상이 계승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불상들로부터 천불사상, 미륵 및 아미타신앙, 법화사상 등의 대승적인 불교사상이 고구려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불교문화 역시 그 영향이 컸을 것으로 이해된다.

 

 

글˚최성은 (덕성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출처 :

Korea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Octob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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