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를 시작으로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 3월, 4월호, 5월호, 6월호, 7월호, (8월호 쉼), 9월호, 10월호, 11월 12월호, 2024년 1월호 이번이 열일곱번째 연재기고이다. (편집자 주)
이청준과 '소리, 소리의 빛
-이청준문학관을 위하여(17)
1, 소리의 탐색가, 이청준
이청준은 혹 소리를 탐구하고 채집하는 소리의 작가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소리에 대하여 그가 따로 설명한 적은 없어도 그 소설 제목만 우선 보아도 여러 소리의 다양한 형태들이 제시되고 있다.
<꽃과 소리, 1969) 생화(生花)의 진실과 조화(造花)의 가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화에 얽힌 소리는 '가면, 가식'의 꾸밈 소리로 마치 '향수'와 같은 것일 뿐이다. 소름에 불과한 소리들이 많다.
<이상한 나팔수, 1969) 나팔수는 군영 바깥에 살고 있는 아내를 걱정하며 매일 등불을 켜듯이 나팔을 불어댄다. 이때의 나팔 소리는 기호이고 신호일 것이다.
<전쟁과 악기, 1970) 반음(音)을 없애거나 올 리는 문제는 세상을 온통 달라지게 할 수 있다.
세상은 늘 적확한 소리를 필요로 한다.
<소문의 벽,1971> '소문의 벽'은 '소리의 벽'일 수 있다. '소문'의 갑옷으로 위장하고 나타나는' 소리 소문에 시달린다.
<조율사, 1972> 소리를 결국 내지 못하는, 소리가 아닌 소리들이 있다. 공연과 연주를 하지 못 하는 상태에서 갑론을박 하면서 조율(調律)만을 거듭하는 허튼소리 공염불이 있다.
<새가 운들, 1976) 다시 들려오지 않는 소리가 있었다. "꽃이 핀들 아는가, 새가 운들 아는가. 꽃이 피고 새가 울어도 이제 그 귓가에 쟁쟁하던 노인의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서편제. 1976) '남도소리'가 있다. 남도지방에 정착한 계면조 가락의 판소리이다. 상대를 용서 하고 해원(解寃)을 하는 소리이다. 상대방 고수의 북소리와 영혼을 주고받듯 소통을 한다. '이청준서편제' 소리는 한(恨)의 마디를 앉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풀어내는 삶의 지혜로운 양식이라고 했다. 또한 그 득음(得音)경지가 한풀이 수단이 될 수는 없을 일. 득음은 득덕(得德)이어야 마땅하다. '이청준서편제'는 소리의 가락을 취하는 것이지 달리 소리의 사설(辭說)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소리의 빛. 1978> 왜 '소리의 빛'인가? 눈을 잃고 빛을 잃은 사람에게는 소리가 빛이 된다.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새로운 희망을 준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1> 맹인 목사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 그 '소리의 빛' 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다시 태어나는 말, 1981> "그래 그 용서라는 말은 운 좋게도 몇 번씩 다시 태어날 수가 있었겠지요." <언어사회학서설 연작>과 〈남도사람(서편제) 연작>의 결편이 되는 소설이다. 가수 송창식의 노래 '가나다라'가 등장한다.
<가위 밑그림 음화와 양화, 1984) 영원한 옛 음화의 기억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인화하고 싶지 않는 음화 필름이다. 그 무성(無聲)시대의 글 필름에 이명(耳鳴) 현상이 일어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반쪽 그림일 뿐이다.
<비화밀교. 1985> 드디어 '제왕산'에 오른 민중들 합창이 함성소리로 터졌다. 횃불로 활활 타오르는 소리가 보이고 들린다.
<해변아리랑, 1985> 그 소년이 체험했던 소리의 원초적 모습은 '뜨겁게 이글거리는 햇덩이'로 나타났다. '소리의 얼굴'이었다. 소리에 대한 소년의 기억은 '어떤 뜨거운 여름 햇덩이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그 소리의 기억이 '흩어져 죽은 가족'을 다시 연결하는 끈이 되었다. <돌아온 풍금 소리, 1993> 6.25 백정시대의 어두은 그늘을 아름답게 만들었던 젊은 여선생의 풍금소리의 추억이 다시 되돌아왔다.
<흰옷, 1993) 풍금과 함께 빨치산이 있는 산으로 들어간 후에 소식이 끊긴 교장선생과 여선생의 원혼을 장흥 버꾸놀이의 '소고'북소리 장단으로 위로를 한다.
2, 이청준에게 소리는 무슨 의미였는가?
작가 이청준은 여러 소리들을 제시하였다. 개 죽어가는 울음소리/ 나를 뒤쫓아오는 소리 / 고향에서 장거리 전화가 오는 소리 / 지하실. 밀실을 뒤지며 지나가는 소리 / 전지불이 더듬어오는 소리 / 소문으로 덮어오는 소리 소문/ 진실을 억압하는 소리/ 무심한 발자국 소리 / 잃어버린 종소리 등등. 이청준에게는 '말, 의식, 인식, 사유'가 '소리'로 표출된다. 가위눌림 속에선 좀처럼 '말'이 '소리'가 되어 나오기 힘들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되는 소리, 죽어가는 소리, 태어나는 소리, 노래 부르는 소리, 함성 소리가 있다. 또한 혼자 소리가 있고, 합쳐지는 소리가 있고, 전달되는 소리가 있고, 울림과 깊이가 있는 소리, 울림이 없는 소리가 있다. 꽃이 피는 소리, 샘물이 솟는 소리, 아내의 웃음소리가 있다. 가면 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도 있다. <눈길, 1977>에는 모자가 새벽 눈길을 밟는 소리가 있고, <살아있는 늪, 1979>에는 읍내장터로 가는 시골버스의 늪길에서 함께 허우적거리면서도 서로에게 너그러운 소리가 있었다.
한편 이청준은 큰형이 남긴 축음기 음반을 통하여 옛 유행가를 새겨들었다. 동요에도 즐거워했다. 여러 노래들이 <현장사정, 1972 / 귀향연습.1972>과 <꽃동네 합창, 1976 / 금지곡 시대, 1989) 등에 등장한다.
<덧붙임>
1. 소설 '이청준 서편제'의 등장을 계기로 이른바 동서편제 이분법이 다시 대두되었다. 동,서편제는 <조선창극사, 정노식, 1940>에서 시도된 분류법으로 섬진강을 경계로 그 동편과 서편을 구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청준서편제'는 남도소리 양식의 일반을 지칭한다. 최근에는 '동편제- 경상도 판소리 '서편제-전라도 판소리', '중고제-충청도 판소리'로 대충 구분하는 삼분법 마저 등 장하고 있다. 그러나 소리(음악)의 창법과 양식은 그 시대적 조건과 환경에 따라 신구(新舊) 양식으로 변천하는 것인 바, 먼저 있던 '구파, 중고(中古)제'를 거쳐 '신파'로 대체되고서 그 신파는 다시 '우조 위주의 동편제'와 '계면조 위주의 서편제'로 발전된 것이리라. 우리의 판소리는 조선후기와 개화기, 식민지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음악가락과 공연방식의 환경변화 등에 부응하여 '구제 (중고제)'에서 '신제(동, 서편제)'로 분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이청준은 남도지방에 보편적 가락으로 정착된 '서편제'를 '남도소리'로 이해하였던 것이리라. (이른바 '이청준서편제'의 성격에 대하여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일이겠다)
2, '이청준서편제' 연작에는 소리판의 '단가'들이 종종 소개되고 있다. <호남가, 사철가, 쑥대머리, 운담풍경> 등이다. <영화 서편제>에는 조상현의 '사철가'가 삽입되었다. 소설 속에서 막내누이가 "나 사는 게 항상 낙화유수"라 고 답하는 모습은 마치 남매간에 단가 문답을 하는 것 같다.
박형상 변호사(前서울중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