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읍성 마을 신당기행
제1편 제주읍성 삼도동 각시당
제주읍성 남문밖에 있었던 삼도동 각시당 옛날 옥황상제의 셋째 공주가 귀양와서 당신(堂神)이 되고 좌정하였는데 매우 영검이 있었다고 알려졌던 신당(神堂)으로 각시당은 제주도의 탐라입춘굿에도 등장하는 신당이 었으나 사람들로 부터 잊혀져 버렸고 바위에 의지해 자라는 신목인 팽나무는 시멘트로 바닥을 포장하여 뿌리까지를 덮어 버렸다.
본풀이에 의하면 옥황상제 말젯딸(셋째딸)이 부모 명령 거역호시와 궁녀 시녀(宮女 侍女)를 물밥을 아니 주어, 궁녀 시녀가 주려 죽으니, 상저(上帝)가 명녕호시와 인간으로) 나가라 호시니, 머리 가까 송낙 쓰고 장삼(長衫) 입고 벡팔염줄(百八念珠) 목에 걸고 인간에 노려와 삼내나목골(三徒里) 청대(靑竹) 고대왓듸) 좌정(坐定)호시고, 상단골(上丹骨)에 선몽(現夢)들여 불도(佛道) 점지 호시다가 부정(不淨)고 부정호니, 나는 막대동상) 만년(萬年) 폭낭 알(下)로 좌정(坐定)호겠다 호야 성몽(現夢) 호니, 상단골, 중단골, 하단골(下丹骨)이 불도(佛道)로 위호시는 한집이우다.
이 본풀이를 요즘 글로 정리하면 옥황상제 셋째딸이 부모의 명령을 거역하고 궁녀, 시녀들에게 물과 밥을 주지 않아 궁녀 시녀가 굶주려 죽습디다. 상제가 명령하여 딸을 인간 세상으로 쫓아내라 하시니, 셋째딸은 머리를 깎아 송낙을 쓰고 장삼을 입고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삼도동 남문골 푸른 대나무밭에 좌정하시고, 상단골에 현몽을 주어 불도신으로 모셔지다가, 이곳은 부정이 많으므로 나는 막대동산 만년 팽나무 아래로 좌정하겠다. 하여 현몽하니, 상단골 중단골 하단골이 막대동산에 모셔 불도로 위하는 신입니다.
(출처 : 현용준 제주도 무가본풀이 )
1628년 제주로 유배를 왔던 이건(李健)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 규창집에, 제주도민들은 매달 삭망에 여기에 제사를 지내면서 장래의 길흉을 점치는데, 그 사람이 재액이 없어서 당신이 그 제사를 잘 받으면 별다른 징조가 보이지 않지만, 만일 그 사람에게 장차 재액이 닥치려 하거나 제사를 잘 모시지 않아서 당신이 제사를 받지 않을 경우에는 보통의 쥐보다 크고 족제비보다 작은 샛노란 짐승 떼가 바위 사이에 나타나서 사람을 보아도 피하지 않고 제상에 진설한 제주(祭酒)와 과일을 함부로 먹으면서 오락가락한다고 한다. 이럴 때면 무당은 장차 무슨 재환(災患)이 일어날 징조로 알고 무구(巫具)를 던지며 길흉을 알렸는데 번번이 효험이 드러났다 한다.
제주시 삼도동은 탐라국시대에는 성주청이 조선시대에는 제주목관아가 일제강점기를 지나 2000년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모든 행정관청이 있었던 제주시의 중심지였으나 행정관청들이 이전에 따른 도심 공동화 현상 등으로 옛 영화를 사라지고 구도심으로 전락되었다. 남문로터리에서 남서쪽 아파트와 주택들이 밀집한 골목길 한 귀퉁이 바위를 의지해 고목이 된 한그루의 팽나무가 척박한 토양위에 자라고 있는 이 곳이 ‘삼도동 각시당 터’다.
각시당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이야기가가 전해오고 있는데 그 하나는 고대장본풀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본풀이는 무당이 굿을 할 때 '신이 된 근본을 풀어내는 이야기'로, 제주에는 마을마다 신당이 있고, 각각의 당에 좌정한 신들이 어떻게 신이 되었는지를 풀어내는 이야기다.
고대장본풀이'에 의하면. 고대장'은 제추시 삼도동에 살던, 천지(天地)의 일을 다 꿰뚫고 있던 유명한 심방이었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이형상 목사가 제주의 절 오백과 당 오백 곳에 신당들을 파괴하면서, 제주성 안에 있던 이곳 각시당에도 당을 알리는 깃발 표시가 있자 이 역시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자 심방 고대장이 나서 “이 당은 영험이 있는 신당이니 파괴하지 말아 달주십사” 하자, 이형상 목사는 “대나무에 메달린 깃발이 얼마나 영험한지는 모르겠으나 걸어서 관덕정까지 온다면 내가 인정해주마. 그리고 이 당은 부수지 않겠다”고 했다.
고대장이 7일만 정성을 드리게 해 달라 요청하여 7일간 굿을 했는데, 굿의 절정인 본향당신을 청하는 제차가 진행되자 갑자기 사방이 요동치고 깃발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흔들렸다. 이를 본 이형상 목사가 "이 정도면 됐다. 이 신당의 위력을 인정하마 또 각시당의 위력이 이렇게 크니 나머지 당들도 그대로 두겠다"고 해서 다른 당들도 함께 살아남게 되었다고 전해오며,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제주도에는 절도 오백, 당도 오백이나 있었다고 할 만큼 절도, 당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숙종때 이형상 목사가 제주목에 부임하여 절과 당들 파괴하였다는 내용이다. 이형상 목사는 당과 절마다 다니면서 영험함을 입증하라고 했다. 그리고 신령이 없는 당과 절들을 불을 지르고 파괴해버렸다. 그때 이곳 삼도동 각시당고 파괴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각시당을 찾아간 이형상 목사는 각시당을 관리하던 심방에게 신령이 있으면 영험을 보이라고 했다.
굿을 할 때 세우는 긴 대나무을 눕혀놓고 대가 저절로 일어서면 신령이 있을 것이고 대나무가 못 일어서면 신령이 없는 것으로 단정하겠다는 것이다. 심방을 이레동안 굿을 하면 신령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며 굿을 시작하였다. 꼼짝도 하지 않던 대나무가 이레째 되는 날 요란한 굿 소리와 함께 달달 떨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일어나다 스러지고 또 조금 일어나다 쓰러지곤 하면 반복하다가 끝내는 달달 떨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을 본 이형상목사가 봐라 신령이 없지 않으냐 하며 불을 붙여 파괴해버렸다고 전해온다.
이곳 삼도동 각시당 처럼 대부분이 마을 신당들은 신령이 모자라 큰 대나무가 쓰러지는 바람에 대부분이 당들은 파괴 되도 말았다.
이형상 목사가 제작한 탐라순력도 “건포배은 (巾浦拜恩) ‘ 편에 제주 곳곳이 절과 당들이 불에 타는 모습과 왕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제주 백성들이 절을 하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이 그림을 보면 제주목 남문 밖에 위치한 '각시당'도 불에 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주시의 신당 중 최고로 영험 하다고 알려진 대표적인 신당은 삼성혈 부근의 광양당'이었다고 한다.
광양당신은 한라산신의 아우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에 왕이 광양당에 좌정한 신에게 '광양왕'이라는 호칭을 내렸고,
오라동 한내 근처에 열 두 분의 무신도를 모셨던 ‘내왓당’을 비롯해서 연동 본향당인 ‘능당’과, 도남동의 백질할망과 백질하르방을 모시는 '백질당' 등도 당신들의 위세가 대단했던 대표적인 신당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 각시당 터에는 신당을 알리는 표지석도 하나 없고 고목이 된 팽나무 주위에 쓰레기들만이 나뒹굴고 있어 안타까움이 크다.
제주도는 원래 땅에서 솟아난 신은 있어도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은 없었다고 하지만, 이곳 각시당 처럼 옥황상제의 공주들이 내려와 신당에 좌정한 경우가 제주섬 곳곳에 좌정해 있다. 와산리(조천)의 불도당은 옥황상제의 막내딸인 '불도삼승또'가 하늘에서 내려와 신석으로 변해 좌정했고, 하도리 각시당과 삼신당도 마찬가지로 옥황상제의 셋째 딸이 좌정한 신당들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제주의 무속신앙도 유교와 불교 등과 융화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새마을운동과 미신타파 등에 현대 제주인 들로 부터 잊혀지고 있다.
첫댓글 자세한 해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