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내가 법률사무소에 출근한 것은
3학년 2학기 수업을 안하고도 미리 취업할 수 있었던 실습기간 이었으며
공부 잘하는 애들 대부분 취업해서 빠져 나가니
교실은 듬성 듬성 빈 자리가 있었고
남아 있는 애들은 공부 못해서 남은 것처럼 모양새가 이상해서
취업도 못했으면서 취업했다고 속이고 학교에 안나오는 애들도 있었다.
(남은 애들은 나중에 졸업앨범 사진을 보니 생소한 특별활동반의 주인공들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취업했다는 증명서를 회사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받아오면 되었으니
타자기로 인적사항 치고
회사명 쓰고 부서 쓰고...날짜 써 있고 도장 찍히면 되는.
그렇다고 학교에서 회사로 확인전화 걸거나 그러는 것 같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아무튼
내가 일하게된 법률사무소는 주산 부기 자격증보다 타자를 잘치고
한문을 많이 알면 되었으니까 내가 일하기엔 아주 적합한 곳이라 여겼는데
초보 여사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서울 시내의 등기소를 돌며 서류를 발급 받아 오는 단순업무였고
발급받아온 서류에서 살아있는 등기가 뭔지 볼줄 알면 되고
그 많은 한문을 읽어내면 되는 것이었다.
사무실에는 사법서사와 사무장님외에 나를 포함한 3명의여사원이 있었고
그중 제일 나이 많은 왕언니는 사무장이랑 가끔 반말로 맞먹는 서른은 되어
보였으며 그 선배는 타자는 엄청 잘쳤으나 한문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며
명동에서 맞춰 입었다는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다녔으며 다른 선배의 말에
의하면 그 선배는 사법서사 사무실에서 잔뼈가 굵어서 사무장을 찜 쪄먹을
실력을 가진 중졸이라고.
그 시절의 법원은 지금같지 않아서 전산화 된것도 아니고
서류를 일일이 찾아서 복사해서 스태플러로 찍어서 법원의 표식으로
서류에 구멍을 뚫어주는 방식이었으며 법원에서 복사하시는 분의 대부분이
팔에 토시를 끼고 계셨다.
어느 날
원고만 보고 타자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엄청난 스피드로 타자하는 왕언니가
등본을 발급 받아 오라고 주소와 500원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급행료”이니까 빨리해와~ (당시 등본 발급료가 한 통에 50원으로 기억함)
그래서 난 서소문 법원으로 갔고
서류를 신청하고 500원을 내고 기다렸는데도
한 참을 기다려도 신청한 서류가 나오지 않기에
접수 받은 아저씨(공무원)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급행료 까지 냈는데 왜 안나 오나요? ”....아주 큰~ 소리로 말이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나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본인이 일하는 쪽 그 쪽으로
들어오란다...그래서 들어갔더니
마구 화를 내신다.
어느 사무실에서 왔느냐하면서...
난 그때 까지도 그 아저씨가 화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더 기다렸어야 했나?....“급행료 내면 빨리 해준다 했는데요..빨리 안나와서...”
그 아저씨가 구체적으로 나를 뭐라고 나무랐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급행료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서야 느낌으로 알 수 있었으며
내 얼굴은 이미 빨개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아저씨는 또 얼마나 당황했을까?
아저씨 보기에도 고3 실습나온 애처럼 보이는 아이의 말에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난 그날로
법무사 사무실을 그만뒀다.
엄마는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고 월급도 많이 주고 하는데.." 하며 섭섭해 하셨지만
15일 근무한 월급 75,000원을 받고
서랍에 있는 옥편과 볼펜을 챙겨서 집으로 왔다.
다시 교복을 입고 학교로 돌아 간다는게 좀 창피하기도 했지만
거기서 계속 일하면서 때때로 급행료를 내면서 일하는 것은
아니지 싶어서 그만 두는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일시키는 왕언니가
그 급행료 라는게 그런용도라는 것 만 가르쳐 줬어도
그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일을 세세히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공무원이 급행료를 챙기면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온 사람의
서류를 먼저 발급해 준다는 것도 그 나이의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세상은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살아지는 곳이 아니었다.
그 짧은 기간 에도 내가 닮고 싶은 한 아주머니도 봤다
동대문 등기소에서 발급신청서를 작성하시는 50대 아주머니 셨는데
그 아주머니가 작성하신 신청서에 쓴 글씨가 어찌나 멋지던지
나도 저 나이쯤엔 저렇게 글씨를 멋지게 써야지 하는 마음을 가졌다.
지금 그래서 글씨를 잘 쓰느냐?
그 아주머니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의 글씨체나마 유지하고 있는것 같다.
가을 바람에 낙엽이 날아다니던 그 쓸쓸한 서소문 거리에서
보잘 것 없이 작고 초라한 갈래머리 여고3년생의
첫 세상 경험은 짧게 끝이 났지만
세상에서 받은 그 무서운 상처는 삼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저씨 얼굴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현재는 대법원인터넷 등기소 대법원 인터넷등기소 http://www.iros.go.kr/ 에서
인감증명서를 제외한 모든 서류가 등기소를 방문하지 않고도 발급되고 있음을
참고로 알려 드립니다.
그 다음 얘기는 시간 날 때 ....
20160622 옛날얘기에 재미 들려서 퇴근도 안하고 있는 반야.
다시 돌아간다면 뭘 할 수 있을까요?
늘 후회와 반성이 남습니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결혼식 하더이다
허기사
산에
쳐박혀 세상구경접어
물정 몰랐지요.
기쁘고 즐거운 주말을
저때 500원은 종이돈이였겠지요....
잘 기억나지 않아서
발행년도를 찾아보니 지폐였던 시절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