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와 이후 고려, 금의 위세>
첫번째는 진흥왕 시절의 신라의 황도인 서라벌이고
두번째는 네오 황제 시절의 로마 크기입니다.
오딘 님이 제시한 강역의 첫 번째는 전체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두, 세 번째는 일부 재야 쪽의 주장이지 사료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천년사직 고구려가 요동을 복속하며 패자로 군림하고 이후 광개토태왕의 후연 즉 요서 정벌이야 광개토태왕 비문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이후 후연은 망하고 고구려계 고운의 북연이 고구려 위성국으로 다스려지게 되고. 광개토 태왕 이후 장수태왕 문자 명태왕으로 이어지는 최선성기에 요서의 거란 등 북방 유목민족들은 고구려의 부용 세력으로 경제적 원조나 생존을 보장받고 고구려의 휘하 군사력으로 사용되면서 한 번씩 말 안 듣은 서토를 공격하는 최선봉에 섰으면 요서는 고구려의 직접 지배지는 아니라고 해도 영향력이 미치는 간접 지배지로 고구려 영역으로 말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물론 이후 선비족이 강성해지면 남하하여 북위를 세우긴 하지만 북위에 고구려계 세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고구려 세력이 북위 조정에 직접 관여하며 고구려인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수나라 이전까지 계속해서 미칩니다.
사실 백제가 좀 미스테리 하고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미스테리 하다는 것은 제일 약하던 신라에 의해-물론 남북국 시대에 오면 신라는 동북아 해상 무역을 장악-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런 과정에서 백제의 기록들이 승자의 논리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 정도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일찍이 해양 대국으로 요서부터 쭝궈의 동해안 지역 그리고 일본 왕실의 주 세력으로 가야 이후 백제계와 신라계가 경합하는데 겐지 세력이 다름 아닌 백제인을 말하죠.
이후 나라시대부터 헤이안 시대를 열게 되는 등 도리어 주변 지역에서 기록이나 흔적들이 제법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도 쪽이야 백제의 아스카 문명부터 무덤양식 그곳에 출토되는 관모나 유물, 철제, 토기, 이후 여러 사찰이나 신사, 저수지 등 뭐 상당하고 일본 전통 학계에서도 이 관련 백제의 왜왕 겸임에 대한 논문이나 연구도 제법 축적되어 있습니다.
쭝궈 측에서도 남북조 시대 백제와 유사한 유적 유물의 흔적들이 점차 드러나면서 상호 교류한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열도쪽은 백제의 흔적이나 기록이 상당하니 뭐 따로 말할 건 없고.
요서 일 때에도 일찍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백제가 남부여라는 국호도 사용하는 걸 보면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부터 부여계통의 국호가 만주일대와 한반도로 정치세력이 내려오면서 여기 저기 제법 세력들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죠. 물론 남북국 시대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남조정벌을 위해 수십만 대군으로 공격하는데 그것을 막은 군사력이 다름 아닌 백제임은 삼국사기나 자통감, 남서, 송서, 양서,청나라 시절 청황제 칙명으로 만들어진 만주원류고등 대륙 측 사서 기록등에도 두루 나오는 기록이긴 합니다.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남제서 권58 백제전
이해에 북위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북위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487년에 편찬된 <송서> 권97 이만열전(夷蠻列傳): "그 후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빼앗고 백제는 요서(遼西)를 빼앗았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晋平郡) 진평현이었다."(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629년에 편찬된 <양서> 권54 제이열전(諸夷列傳): "진나라(晋, 진시황의 진나라 아님)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자, 백제도 요서·진평 2군 땅을 소유하고는 직접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당나라 때 편찬된 <남사> 권79 이맥열전(夷貊列傳):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자, 백제도 요서·진평 2군을 소유하고는 직접 백제군을 두었다."(晉世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삼국사기> 권46 '최치원 열전'에도 나온다. 최치원이 신라 사신으로서 당나라 대사시중(大師侍中)에게 올린(上) 글(狀)인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백제는 4세기 근초고대왕 시절 이미 성장하는 고구려 이상의 국력을 과시했고 동성대왕 시절인 남북국시대에는 한족을 밀어내고 북조사를 연 북위 대군까지 격파 할 정도의 위세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바 당시의 정복 왕조 시절 힘의 우위가 영토나 세력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점을 감안하면 백제의 세력권 혹은 지배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고 보이네요.>
고려시대에 오면-고구려도 고려로도 불리고 사용- 개경을 중심으로 이미 로마 이상의 거대 도시이며 신라 천년사직의 중심지로 발전되어 있던 서라벌 동경(경주), 서경(평양),남경(서울)이라는 대도시 및 기타 중소도시를 두었습니다.
물론 발해는 문왕 시대 오면 로마 이상의 대도시를 5경 체계로 엄청난 크기의 황성과 도시 규모로 5개를 사방으로 두면서 중소도시를 거느린 제국임.
<고려의 개경은 로마제국의 로마보다 컸으며, 고려의 서경은 비잔티움제국의 콘스탄티노플보다 컸습니다. >
고려시대 놀라운 도시 인프라의 한 예를 들자면 경성이었던 개경의 한복판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으니 바로 광통보제사입니다.
이 사원은 얼마나 거대했는지 당사唐寺 혹은 대사大寺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워낙 많이 소개된 사찰이라 잘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보제사에는건물이 1천여채나 되었으며 절 안에는 세개의 연못과 아홉개의 우물이있었다고 전합니다.
무엇보다 유명했던 것은 5층 목탑으로서는 5손가락 안에 들어갈법한 높이라는연복사 5층 목탑이 있었는데, 높이가 무려 60미터에 이르렀습니다.
뭐 삼국시대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이야 이미 동아시아 최대 목탑으로 거의 8,90미터이니.
또한 송나라의 문신이었던 서긍은 이 보제사의 나한보전을 보고서 왕의 거처를 능가한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승당과 법당은 100명의 인원을 수용할만하다고 했으니 이 광통보제사가 얼마나 거대한 사찰이었는지를 손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인프라들이 한 두개가 아니였다는 거죠.
제일 첫번째는 고려와 당대에 있던 송나라의 수도가 있던 개봉의 도시 크기입니다.
두번째는 고려의 수도가 있던 개경의 도시 크기 입니다.
세번째는 영국의 수도가 있던 런던이며
네번째는 프랑스 파리의 중세 도시 크기입니다.
개경은 현종 이후 사찰이 성곽 바깥으로 건설됩니다.
고려 황궁 만월대의 복원모형은 노란 부분만이고 최근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부분이 녹색쪽 입니다.
고려는 이런 거대한 국제적 도시 기반과 찬란한 여러 문화(송을 능가하는 천하 제일의 고려청자부터 회화, 예악,의복,금속활자등 인쇄활자기술 , 뛰어난 천문학과 선진 조선술-이때 이미 조선 거북선의 원형 철갑선이 등장 및 세계최초로 전함에 포를 배치하여 전쟁에서 승리, 서민까지 이루어진 선진교육제도등- 뿐 아니라 수십만 대군을 보유한 군사력도 막강하여 10세기 초 등장한 북방의 패자 요나라는 송나라를 굴복시켜 조공관계를 맺었지만 고려와는 3차 대전에서 패하고 마지막 3차에서는 강감찬의 귀주대첩등 고구려 이후 구축한 중기병 개마무사대로 적과 벌판 전투에서 전투력 강한 북방 민족을 정식으로 발라버리면서 완전 몰살 시켜 버리죠.
이런 국제적 판도 이후 문종시기에 이미 압록강 넘어 동북방의 15주바깥 동 여진세력들이 고려 황실조성에 복속해서 군현으로 귀속되어 들어오고 서여진 일부에서도 편입되어 기미주의 간접지배나 군현으로 편입되면서 만주 일대를 경영하게 됩니다.
물론 이후 우리가 잘 아는 여진 세력의 힘이 강해지자 정벌 차원에서 출정한 윤관의 동북 9성도 두만강 북쪽 700리의 만주 일대임이 학계에서도 점차 힘을 얻고 있습니다.
도화견문지> 6권 고려국에는
" 왜국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也. 今則 臣屬高麗 也)
日本의 《백련초》에는 997 년 高麗가 日本이 계속적인 통상요구를 거절하자 3차 요구 이후에는 큐슈(九州)를 침공 했다고 하며, 5 백여 척을 앞세운 고려군高麗軍의 침공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합니다.
고려가 만주 일대를 경영할 때 복속된 여진세력이 점차 강해져 이후 금을 세우는데 오늘날 학계에서도 이 금에 대해서 점차 단순한 여진족 세력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금나라 황제가 신라인 이라는 것은 금이 송나라를 멸망시키면 끌고 간 두황제 송환을 위해 송나라 사람 홍호가 만주로 갔다가 억류되어 10여년 생활하면서 적은 <송막 기문>이라는 책에 분명히 신라인이 황제로 나오죠.
송막기문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혹은 송막기문 판본에 따라 女眞之主乃新羅人號完顔氏
여진 추장은 신라인이며 완안씨다
女眞酋長乃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女眞以其練事, 後隨以首領讓之. 兄弟三人, 一爲熟女眞酋長, 號萬戶. 其一適他國. 完顔年六十餘, 女眞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卽胡來也. 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侄阿骨打之弟謚曰文烈者爲子. 其後楊哥生子闥辣, 乃令文烈歸宗. -송막기문 원문중-
금이라는 국호도 그런 성씨에서 유래하며 영원히 바래지 않는 금을 상징함의 이야기도 나오고. 이 금나라 황제 관련 기록은 금사, 고려사등 여러 곳에서도 나옵니다.
그리고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란국으로 이름만 바꾸지 그 곳 지역을 도시 행정으로 일시 다스리거든요. 즉 이 말은 우리가 아는 그냥 유목적 여진족이 아니라 발해 시대 이후 발해가 구축한 5대 대도시와 중소 도시의 일반 발해인 즉 고구려인들이 여전히 상당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금나라의 황제는 신라인에 황비는 발해인(고구려인)이였고 금나라의 대국 행정은 고구려인들 좌지하고 도시문명이나 설계 역시 우리 고구려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문명입니다. <요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일시 동란국으로 지배하지만 고구려인들의 반요 저항운동과 수복운동으로 여러 왕조가 계속해서 삼국지 시대처럼 일어나고 멸하고 합니다. 그러다 한반도 일대의 고려왕조에 3차 대전을 치르면서 요가 박살나자 동만주 일대의 세력이 고려 조정으로 들어오고 이후 다시 이곳 일대에서 신라중심의 세력이 일어나 금을 세우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죠.>
금나라가 만주에서 북경의 수도를 옮기면서 중도라는 대도시를 건설하고 대수로를 만들고 지금도 남아 있는 황제의 정원이라는 북해공원등은 다 우리 고구려인이 직접 설계하고 만들어 이런 도시 기반위에 이후 몽골의 원부터 명의 수도로 지금의 쭝궈의 중심지로 이어졌습니다.
즉 금은 단순히 유목 여진족이 아니라 신라 중심의 황제와 발해의 도시 기반에 살고 있던 고구려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나라로 발해 신라의 남북국 시대의 연장이라고 해야 합니다. 물론 금나라는 만주를 넘어 북경의 북조사까지 지배한 북방의 패자이며 대국으로 100여간 북경을 지배합니다.
고려가 문종 시기에 이미 만주 경영에 대한 이야기는
http://blog.naver.com/knightblack?Redirect=Log&logNo=10089042378 를 참조.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고려의 이런 위세와 군사력 그리고 문명의 힘은 이후 조선으로 이어지고 조선왕조 실록을보면 임진 이전까지 조선에 오는 일본 사신들의 조공이나 조선을 상국으로 인식하는 말과 기록들은 상당히 많이 볼 수 있습니다.
15세기 세종대왕을 위시한 조선은 대조선의 시기로 여진 및 왜국, 그리고 동남아등에 조선 스스로의 국제적 질서와 외교를 구축하고 황제적 지위에서 다스렸습니다.
<동아시아 최대의 정궁을 가진 고구려의 안학궁>
안학궁의 복원도 북한(맨위), 남한(밑의 두 그림) 2개는 안학궁의 전체모습이지만 밑의 그림은 안학궁의 정전인 동명전의 그림입니다. 이 동명전의 지붕은 고구려의 건축방식인 우진각 지붕이고 동서길이가 무려 87m라고 합니다.
자료출처 : 다음카페 위대한유산 74434 문화유산사진방
<우리나라의 도성은 평상시에 평지에서 기거하는 황궁에 전쟁등 유사시와 도성 보호와 방어를 위해 산성이 셋트형으로 조합을 이루는게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고대성곽 문화입니다.>
고구려 5세기
<안학궁 남삼문(南三門) 중 남중문(南中門) 38m 앞면 7칸
안학궁 남궁 1궁전(정전) 62m 앞면 11칸
안학궁 중궁 1궁전(편전) 87m. 앞면 19칸 >
북경 14세기 자금성에서 가장 큰 태화전 정면 64m
<사실 남북국 시대 발해의 황성이나 도시 규모를 보면 고구려 때보다 더 크고 건물도 더욱 웅장합니다. 자금성 건물이나 크기보다 더.>
첫댓글 조선시대의 궁궐도 5대궁으로 나뉘어 있고 현재 주변에 현대식 건물들이 차면서 크기가 축소되어 있지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닙니다. 조선초기의 도시나 궁궐은 고려시대의 다층 누각형태를 이어받아 상당한 고층 건물들이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임진 왜란 이후 궁궐이 불타고 이후 일제에 의해 엄청난 수난을 당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단층화 그리고 많은 건물이 사라지고 크기가 축소되었습니다.
사무라이에 대해서는 일본 백제 왕실이 나라에서 교토로 서열도에서 동열도의 관동 일대로 점차 세력을 넓히면서 아이누족괴 비슷한 에조라는 세력의 반발에 더 이상 확장을 못하게 되면서 이후 영주처럼 왕실 휘하로 두게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사무라이가 뭐 섬기는 어쩌고 하긴 하는데 정확히 어떤 세력인지는 모르지만 워낙 섬나라가 중심 우리 도래계 왕실 세력외는 남방계 북방계가 섞여 있다보니.. 하여튼 사무라이라는 자체가 문화적 지성인 보다는 미개하고 호전적 기질을 가진 성향의 세력으로 점차 일본 백제계 왕실의 정치권에 등장하면서 이후 쇼군으로 득세하며 친한파인 백제계 왕실 힘이 약해지고 칼질만 하던 야만적 세력이
결집되면서 조선중기에 와서 임진 왜란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도쿠가와에 가서 에도 막부시대가 열리고 다시 조선 통신사를 통해 문 즉 관료를 통한 통제가 되면서 점차 사무라이들의 기반은 약해지지만 다시 메이지 유신 이후로 호전성을 드러내며 잊어진 일왕을 꼭두각시로 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만듭니다.뭐 지금도 여전히 전범들이 살아서 정,재계를 장악하고 있는게 일뽄이긴 하지만. 도리어 이런 제국적 성향에 함몰되어 21세기 디지털 패러다임를 따라가지 못하고 계속 기울고 있는 일뽄임.
그리고 학계에서도 1만년 신석기 혁명 때부터 빗살무늬토기나 우리의 선진적인 고조선 청동문화 이후 철기문화를 이루며 한족과 다른 문명권과 생활권을 이루어 이것을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열도를 아울려 <동방문명권>, 이나 <고구려문명권>이라고 부르는 것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실제 고구려가 광개토태왕 이후로 백제와 신라의 국호를 유지하면서 복속시켜 거의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여러 문명이 고구려에서 백제로 이어져 신라와 함께 하고 그 지류가 열도로 흘러 들어가기에 열도의 백제계 일본왕실도 큰 틀에서 보면 당시는 고구려 문명권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바다샘님/참고 할 만한 자료 올려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고려시대에 와서도 고구려는 고려로도 불리우고 사용되었다는 기록과...
도화견문지)6권 고려국에는..왜국은 일본국이다. 倭 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也. 今則 臣屬高麗 也) 라는 대목.
그리고 님 댓글 마지막 부분의 → 고구려의 여러 문명이 고구려에서 백제로 이어져 신라와 함께 하고 그 지류가 열도로 흘러 들어가기에
열도의 백제계 일본왕실도 큰 틀에서 보면 당시는 고구려 문명권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대목...공감됩니다.
사무라이.. 걍깡패아님? `;;;; 지금으로치면 ;;
네..요즘 말로 하면 걍 조폭이죠...조직폭력배..
교육계가 우리 중고등 학생들에게 근현대사는 잘 가르치면서 고대사는 비중있게 다루질 않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두 분 뭐하시는 분인지 ^^ 참으로 궁금하네요. 우리의 땅을 다시 찾을 그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깡패 조폭집단이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을날도 오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