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성경 본문: 눅 2:41-50
유대나라에서는 남아가 열두살이되면 성인이 되고 율법의 아들이라 호
칭 하며 또한 율법에 대하여 의무를 지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살
되더 A해에 처음으로 부모와 함께 유월절 절기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
을 방문 하였다. 7일동안 계속된 행사를 마치고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
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님이 동행중에 있는 줄 알고, 하룻길을 간 후
에야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
었다. 이 사실은 날마다 예수님을 잃고 사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종이기도 하다. 본문 말씀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보기로 한
다.
첫째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길 가면서도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
는줄로 생각하였다. 사실을 훨씬 전에 예수님을 잃었음에도 그들은 자
기들 곁에 있겠거니 하면서 가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내
집 대문에 교패가 붙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응당 내집에 있겠거니,내
가 교회의 직분을 맡고 있으니 틀림없이 내 곁에 계시겠거니 하고 타성
적 방심에 젖는 일이 있다. 이러한 안이한 생활은 믿음에 올무가 될 수
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무관심 때
문이다. 지금의 그리스도인 중에도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잃는
경우가 많다. 행사중심의 분위기에 휩싸여 예수님을 찾아보지도 않고귀
로에 오른 그 부모와 같이. 오늘의 신앙인은 사업중심 명예나 물질중심
의 자기욕구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바쁘고 번거로운 세상을 달리다
가도 우리는 자주 자문하여 봐야 한다. 나는 지금 예수님과 동행하고있
는가? 자신이 예수님을 잃어 버린줄도 깨닫지 못한체 교회출석 기도 봉
사하는 것만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착각하는 헛된 생활은 표류하는
배와 같다 자기의 믿음을 자주 자주 점검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그분과
의 동행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온전케하는 적절한 방법이
다. 가정에 있어서 불화가 잦을 때 또는 자녀들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
하였을 때 대인 관계 등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 더욱 자기의 신앙을 스
스 점검 해봐야 한다.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 (벧전 4:7) 하고 말
씀으로 무장하고 시험을 물리치며 (마4:4) 죽도록 충성 (계2:10) 하는
생활은 예수님을 잃지 않는 삶이 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을 찾아 헤매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잃어버린 예수님을 먼
저 동행중에 '친족'에게서 찾아 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예루살렘의 성
전에 남으셔서 선생들과 성경문답으로, 듣는 이들을 경탄케 하고 계시
는 예수님을, 이들에게서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재의 많은 사람
들은 성현이나 영웅에게서 진리를 묻고 길을 찾으려 한다. '모든 육체
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
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 (요3:6) 이다. 예수님의 신비는 이 세상
적인 혈과 육으로 풀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채널에 맞춰야 예수님의 영
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다음으로 찾아 본 것은 ' 아
는 자 중에'에서 이다.이 세상의 아는자인 철학 문학 과학속에서 예수
님을 찾을 수는 없다. 성경의 관점에서 철학이란 세상의 한낱 초등학문
(골2:8)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어디에서 언제 잃어버렸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명예나 부에서 구
원을 찾을 수는 더더구나 없다. 막스주의를 백년동안이나 성경처럼 신
봉해온 자들의 허망한 결말을 오늘의 소련이나 동구권의 국가들에게서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인간의 지혜로부터 얻어진 가치는 그것이최
선의 것이라 해도 결국은 비극적 귀결을 가져온다. 시편 49:20 은'존귀
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씀한다.
깨닫지 못하는 자는 요셉과 마리아와도 같이 친족과 아는자에게서 예수
님을 찾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깨닫는 일, 그것은예
수님과 동행하는 바른 믿음을 되찾는 일이다.
셋째 예수님을 다시 만났다.
본문 46:47은 이리 저리 헤매던 그들이 결국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을수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49절에서 예수
님은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알지 못하셨나이까'성전 곧 교회는 어떠한 곳인가? 하나
님이 계시는 곳이요 예배드리는 곳이요 말씀이 있는 곳, 주의 영이 역
사하는 곳, 성도가 교제하는 곳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다. 잃어버린 예
수님을 어디에서 만나야 하는가? 바로 이곳 예배드리는 교회에서 만나
야 한다. 설교를 듣는 가운데,찬송하는 중에 기도하다가 또는 내 허물
을 깨닫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은 그리
스도를 목마르게 기다리다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눅2:25-
28) 84세의 안나는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밤낮 기도하고 봉사
하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다 (눅 2:36-38)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톤은 격무 속에서도 주일을 성수하기에 빠짐
이 없었고, 영국의 윌리암경은 그를 찾는 손님이 그의 집에서 만날 수
없을 때 겨회로 가보면 어김없이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찌하여 나
를 찾으셨나이까' 헛수고를 지적하는 말씀이다. 있어야 할 곳은 있는분
을 찾지 않아야 할 곳에서 찾는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명료한 가르침이
그 안에 있다. 왜 그리스도 예수님을 찾아야 하는가? 그 분과 동행하기
위해서이다. 흠과 티가 없는 그 분의 피로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이다.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결단코 예수님을 찾아야 하고 함께 있어야 한다.
내가 찾는 예수님을 이웃에게도 전하여야 한다.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
에게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일은, 성도로서의 값진 충
성이다. 예수님은 나의 피곤한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힘을 내게 하실 것
이다. 날로 새로와지는 생활안에 우리 주 예수님과 실재로 동행하는 축
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성탄의 의의
성경 본문: 눅 2:8-14
[서 론]
오늘의 현대적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는 없고 축제만 남아 있습
니다.
그리고 이축제에는 예수님 보다 산타크로스가 더 많이 등장하는
성탄절을 맞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89년 금녀의 한해를 보면 정치적으로 뼈아픈 상처가 있음을 보았
으며 또한 숨가쁘게 변화하여 가는듯 하다가 허탈감만 남겨 주고
끝나버린 텅비어 버린 국민감정속에서 성탄으로 이 해를 마무리 짖
게 됨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2,000년전 이 세상에 탄생하신 그리스도께서도 그 당시의 민족적
수난과 경제적 고난, 자유 탈취, 인격 유린 빛보다는 어두움이 기
쁨보다는 슬픔이, 소망보다는 절망이 충만했던 시대에 그를 사모하
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 위로와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말구유
에 탄생 하셨던 것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한 말씀이 눅2장10-11절에서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
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
리스도 주시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살필때에
1) 두려운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했고
2) 오늘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께서 나셨다는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이란 바로 두려울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해결의
기쁜날인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오셨으므로 이
러한 기쁜날을 맞이 하면서 즐거워 할 수 있고 문제감 해결될 수
있는 날로서 각자가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주님을 영접해 드리는
날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구주가 되
십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각 정당간의 후보간에 누가 잘 하고
누가 잘못했다고 평가할 자격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리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분도 당선의 기쁨이 없고 낙선된 분들은
국민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국민 누구나가 이번 계기를
통하여 찢기고 상하고 실망으로 점철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말
을 못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만 기대하고 있을 뿐
입니다.
지역과 지역을 극한 상황으로 분열 시켰고 집권력 때문에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가장 파렴치한 적수로 등장하여 나의 목적을 성취하
기 위해 상대방을 인신 공격하기를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심히 국
민의 한 사람으로서 개탄해 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우리 국민의 온유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남에게 욕할 줄
모르고 남을 속일 줄 모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묵묵히 살아
가는 이 민족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이것
은 잎으로 어떤 정치도 정당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길이 되신
예수님께서만 이루어 놓으실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지역간에 담
을 쌓아 놓고 대화가 끊어졌으며, 정당과 정당간에 담을 쌓아 놓고
대화가 끊겼습니다. 국민의 기성세대와 젊은이들 사이에 높은 담장
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 하실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과 인간과의 원수가 되었을때 이 담을 허시려고 오신 분이 바로 길
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00년 전 말구유에 탄생하시
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민족 위에 임하실때
막힌 담을 허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길을 통하게 하시므로
이 어두운 상처가 아물어져서 고통이 사라지고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성탄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인간처럼 진실하지 못한 존재는 없습니다. 인간은 가장 거짓되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남겨 놓았습니다. 하나도 믿을 수 없는 거짓
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어 누구나 무엇이라 해도 그것도 거짓이려니
해버릴 정도로 만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 국민의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부정선거를 규탄하자고 외치는데 이 소리가 진
실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인정이 되겠으나 부정이라고 하는 그
사람은 부정이 없습니까? 물론 우리 국민이 이번 선거가 부정이 없
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런 처지이니
선거는 모두 그런것이려니 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성
도들은 그것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반영되지 않는
세상, 진실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이라도 잘해서 성공하면 그것
이 정의가 되어 버리는 이 시대의 사상을 개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회복할 것입니까? 양심정치 입니까? 도덕교육으
로 입니까? 사회정의로 실현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로지 진리
그 자신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이 사회를 불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소리를
해도 믿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까지 속아 왔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해결하실분은 2,000년전에 말구유에 탄생하
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진리 되시
는 예수에게만 있지 예수를 떠난 진리는 죄악에 오염된 부패된 진
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떠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합니다.
천사들이 "두려워 말라"했습니다. 이 두려움이란 왜 오는 것일까
요?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죄로 인해 부패된 인간에게서 보는 인간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죄악속에 태어난 인간 그 자신이 두려움이
요, 이러한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은 결구 두려움이 순간 순간마다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KAL기 폭파사고, 3,000여명이 화장, 수장된 여객선 충돌사건, 자
동차 사고, 정치테러, 폭력사태등을 볼때 이 세상 그 어느곳에 평
화가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
심속에 이 평화를 심어주시는 분이기에 그리스도안에서만 진정한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이세상 그 어느곳, 그 어
떤 존재속에도 이 평화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아무런 이유없이 서로가 갈라진 마음
속이 분열에서 화합으로, 증오하는 마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갈등속에서 평화를 이루는 성탄이 됩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42장1절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 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고 했는
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사42장6-7절에 "나 여호와가 의로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
아 너를 보호 하며 너를 세워 백성을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
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려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
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합니다.
메시야의 정의 실현, 불신과 공포를 배격하고 이 땅위에 평화를
이루리라는 약속입니다. 엡2장14-18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
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
문에 속한 계명이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하심이라"고 합니다.
평화를 이루시려고 주님은 오신것입니다.
3. 이 성탄에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의 성탄이 교회안에서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1) 가난한 이웃을 찾아야 합니다. 요10장10절에 "...내가 온 것
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
고 눅4장18-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자에
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
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
라"고 합니다.
이웃에게 질병에게, 가난에서, 불구에서 눌림에서 위로와 평화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2) 순결한 사랑을 찾읍시다. 희망을 심어주고, 예수 그리스도께
서 사랑하고 계심을 전해야 하며, 소망스러운 생활을 나누어 줍시
다.
3) 사랑으로 하나가 됩시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우리가 서로 갈
라진 마음들이 오신 주님을 영접하므로 사랑으로 하나되어 기쁨으
로 이 예수를 영접하는 성탄이 됩시다.
성탄의 목적
성경 본문: 눅 2:8-20
<서론>
1차 대전중 영국해협에서 스위스 국경에 이르는 기나긴 전선에서 크리스
마스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전쟁 중 독일군 참호 바로 위에 크
리스마스 츄리의 불빛이 만들어졌고 그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저들
밖에 한밤중에"를 부르자 영국군은 박수로 응하고 이어 영어로 "참 반가운
신도여"를 부르자 독일군은 박수로 응하며 라틴어로 받아 불렀습니다. 1시
간 가량 계속된 평화의 노래는 평화의 분위기를 만들어 서로 참호에서 기어
나와 크리스마스 축하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팔장을 끼고 사진을 찍
고, 축구시합, 선물교환, 즉석 오케스트라도 연주 되었습니다. 24시간 동안
국경없는 휴전상태였으며, 좀더 연장되기도 하였습니다. 전쟁터는 새들이
찾아와 지져귀며 평화의 노래에 화음을 넣는듯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참된 그리스도의 오심은 곧 평화를 만들었고, 비록 전쟁터이지만 모든 이
들에게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심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상황에서도 영접하기만 하면 기적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론>
1. 그리스도는 세계인류의 평화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의 오심은 어두움 가운데 비취인 빛이 되셨던 것입니다.
(1) 그리스도는 평화의 나라에서 평화의 주님으로 이 세상속에 오시었습
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전의 세상은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로 말미암아 깨
어진 평화로 어두움의 세상이 되었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어
두움 때문에 빛을 바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평화가 깨어
져서 어두움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상에 평화와 빛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이젠 주님의 빛으로 구원의 길을
찾게 되었고, 주님의 평안으로 고난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
던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므로 하나님께로 가
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러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2) 주님이 오시기 전의 모습을 본다면 무척이나 초라합니다. 이 어둠의
세계는 무척이나 춥습니다. 추워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추워서 평안히 잠들 수 없고, 쉴 수도 없고, 즐거워할 수도 없
습니다. 그러면 이 어둠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요. 어둠의 세계는 한대이
며, 소외된 곳을 말합니다. 권력에서 멀리 밀려난 이방지대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힘이 없고 배경도 없습니다. 고독하고 적막한 삶만이 있는 곳입
니다. 그러나 권력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즐거움이 있고 따뜻
함이 있습니다. 인생의 변두리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공포와 불안과 슬픔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 주님을 모시지 않
는 곳은 어디에나 있는 상황입니다. 한 겨울의 추위는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생스러운 때입니다. 마음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는 곳도 매우 추운 바람
이 부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이러한 어둠의 세계는 가난합니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평안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겐 세상이 캄캄할 뿐입니다. 살아간
다는 것이 막연할 뿐 평안을 지킬 수 없습니다. 가난은 어둠이요, 절망상태
입니다. 다만 이들에게는 악한 힘이 없기 때문에 거대한 불의의 힘 앞에서
너무나도 나약하기 때문에 가난하게 되어진 것 뿐입니다. 이들도 악하게
살면 굶주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풍족하다는 말을 듣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하고 배고프고 목말라 평안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뿐입니다.
(4) 이 어둠의 세계는 싸움이 있을 뿐입니다.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큰 악과 작은 악의 싸움이 그것입니다. 폭력과 전쟁과 파괴의 상태가 어둠
입니다. 진리와 정의가 없으니 거짓과 속임수의 경쟁뿐입니다. 불의한 싸
움터에는 승리하는 자가 정의로운 자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도덕과 법은
이긴자의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빛은 가리워졌고 미움과 저
주가 사랑과 축복을 대신합니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저주는 저주를 낳아
싸움은 끝없이 계속되어집니다. 참된 진리가 없이는, 바른 길을 제시해 주
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지 않으면 싸움은 끝이 없습니다.
선한 것은 선을 낳고 악한 것은 악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악은 악을 이길뿐
선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2. 그러기에 주님은 바로 이곳에 찾아 오셨습니다.
(1) 이런 어두움의 인생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빛을 주
셔서 밝게 하시고 따뜻하게 하시고 평안하게 해 주셨습니다. 새 힘과 새
희망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또 찾아올 수도 없는 곳에 주
님만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의 소식이요 빛의 사명인 것입
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은 하셨습니다. 폭력과 테러, 고문, 강
도, 억압, 착취, 독재, 전쟁, 핵무기, 공해 등. 뿌리깊은 미움과 갈등과 다
툼의 세계에 그리스도는 어둠속에 비치는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에베소
서 2:14절은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
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었습니다."
(2) 이런 빼앗긴 자들에게 주님은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평화
와 빛을 주섰습니다. 깨닫게 해 주시고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확신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는 악한 길에서 방황하며 살 수 밖에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
로 하여금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그 발자취를 이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바르게 정의를 위
해 싸울 수 있습니다. 용기와 희망 그것은 이 세상의 악이 아무리 강해도
주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3) 위기의 상황속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진리와 길과 생명으로 오셨습니
다. 그래서, 깨어지고 상처뿐인 세계에 치료하는 능력과 일치를 주셨습니
다. 용서와 화해로 사랑의 빛을 주셨고 평화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병들고
부자유한 사람들을 온전한 복음으로 고쳐 주러 오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어두운 가운데 비취인 영원한 빛이십니다."
3. 그리스도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자유의 몸으로 계시
던 하나님 나라에서 부자유한 인간의 세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영광과 존
귀를 한 몸에 받으셔야 하는 자리에서 낮고 천하여 멸시받고 고통당하고 퀘
퀘한 냄새가 풍기는 마굿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가시면류관 까지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2) 그것은 나 때문입니다. 나의 허물 때문입니다. 나의 죄악 때문입니
다. 지금도 반목과 질시와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나의 비겁한 모
습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입으로 죄를 범하고 있는
자신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허물어져
가는 나의 올바름이, 어두워져가는 나의 밝은 빛이 그리스도가 찾아오신 뜻
을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3) 이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바로 이곳에, 나의 이러한 마음
속에 찾아 오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어둡고 추운 곳에 주님이 찾
아 오셨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속에 빛을 주셔서 밝게 하시고 따뜻하
게 하시고 평안하게 하실 것입니다. 어둡고 가난한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
오셨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빛을 주셔서 정
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어둡고 싸움이 도사
리고 있는 마음속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속에 치료하는
능력을 통하여 아픈 상처를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사랑의
빛을 주실 것이며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다음과 같
은 신앙의 고백이 절로 나올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어두운 가
운데 비취인 영원한 빛이십니다."
깨어 기도합시다
성경 본문: 눅 22:39-45
자기 앞에 다가온 고통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
는 피방울이 되기까지 기도 하시고 위로도 받고 쉬기도 하실겸 제자들
에게 왔으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들고 있었
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
어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그러니 너희
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다시 부탁을 했습니다. 사랑하
는 성도어려분 오늘 우리는 이 주님이 부탁하신 말씀,시험에 들지 않
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은혜 받고자 합니다.
1.우리 인간의 육신은 연약성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신 주님은 8제자를 산아래 두시고 베드로 야
고보 요한 세제자를 데리고 겟세마네 깊은 곳으로 가실 때 심히 놀라
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막 14:32-34) 돌던질 만큼 더
나가사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돌아오니 저들이 자고 있을 때 제자들
에게 깨어 기도할 수 없더냐 내가 보니 마음에는 원하나 육신이 연약
하여 할 수 없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부탁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
게 깨어 기도하라고(눅 26:46)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육신이 연
약하여 할 수 없으니 깨어 기도하여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도록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마음같으면 기도도 할 수
있고 헌금도 할 수 있고 봉사도 전도도 할 수 있고 봉사도 전도도 어
떤 희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해야지 계명대로 살아야지 봉사하고 희생해야지 형제를 사랑하여
전도해야지 하면서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바로 마음에는 원
하나 육신이 연약하여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 주님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구나 라고
하신 것은 너희가 약하니 할 수 없다고 인정해 버린것이 아니라 그러
므로 더욱많이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이요 그러하니 더욱 정신차리고
깨어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2.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실때 두번이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눅 22:40절에 그곳에 이루러 저희에
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셨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
니 자고있을 때 제자들에게 또 이르시기를 눅 22:46에 어찌하여 자느
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주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깨어 기
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저들 앞에서 로마군인들에게 잡
혀가서 심문을 받을 것이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요 또 제자들은 겁을
먹고 흩어질 것이요 베드로는 예수님까지 모른다고 부인할 일이 앞에
닥쳐오고 있으니 너희가 그날에 그렇게 흩어지거나 부인하는 그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즉 그러한 시험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
니다.
3.악의 영을 이김 방법은 기도 밖에는 없습니다.
기도는 사탄을 무력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우리 사람이 아무리 힘
쓴다 해도 또 지혜롭다 해도 마귀 보다더 힘셀수도 지혜로울 수도 없
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피조된 영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
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기도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할 수 있게 합니다. 기도는 마귀의 궤
계를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즉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해도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 자체가 잘못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된 기도는,
(1) 의심하는 기도입니다. 약 1:6-8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2) 잘못 구하는 기도는 즉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약 4:3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탐욕적으로 구하는 기도나 더러운 음욕을 품
고 기도하면 듣지 않으십니다. 남을 미워하고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고
남을 억울케 하고 남을 비방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하는 기도는 하나
님이 듣지 아니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깨어 있
어 기도해야 합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성경 본문: 눅 22:39-46
우리가 자랄 때는 아버지는 가정에서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아버지가 한
마디 하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가정에서 아버지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의 가정 형편은 옛날에 비해 크게 달라졌
습니다. 서구의 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부모가 자식들 뜻을 살피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나도 아들 셋을 키우는데 아이들
눈치를 살피느라 신경을 곤두세어고 있는 실정입니다. 혹시 잘못 되어 가지
는 않나,야단을 맞고 크게 낙심하지는 않나,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에 대
해 우리 부부는 늘 살피고 있습니다. 아버지 명령이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던 과거에 비해 정말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을 옛날 아버지를 섬기는 태도 이상으로 하나님을 섬겨
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눈치를 더살피는 어리석은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니아다"(눅22:42)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쓰고 애써 기도를 하셨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을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없으며
영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파멸의 씨앗을 생애
속에 심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나는 성도가 하나님
의 뜻대로 하느냐에 관해 여러분에게 말씀해 드림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아담과 그 후손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오 만물을 지으시고 동방에 에덴을 창설하신 다음
그곳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이 동산을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낙원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
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만드신 후 인간으로 하여금 그 동산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첫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당신의 뜻을 분
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절대주권을 상징하는 선악을 알게 하
는 나무의 실과는 결코 먹지 말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시와 더불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간은 결코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아
담과 하와는 마귀의 꾐에 빠져 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마
귀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고 했을 때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
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
라 하셨느니라"(창3:3)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같이 되어 선
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고 말하며 하와를 충동질했습
니다. 그 말을 듣고 하와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실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그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에덴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고 말았으며
육체적으로는 병들고 부패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했고 환경적으로는 저주의
가시와 엉겅퀴로 인해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
다. 그뿐만 아니라 하와는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형벌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후손인 "에덴의 교훈"을 잊어 버리고 계속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은 노아시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한탄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당시 그때의 죄악이 얼마
나 심했던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
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
라"(창 6:7).
그러나 그후 인간은 또 하나님은 뜻을 거역하는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아브라함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이들 역시 무섭게 심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
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 의인
이 저희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
령을 상하니라"(벧후2:6-8).
소돔과 고모라는 음란의 성이었습니다. 그 성안에는 동성애가 성행했습니
다. 이는 하나님 질서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동성연애자
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후천성면역결핍증"입
니다. 이 병은 특별한 약도 없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병에 대한 면역
성을 상실해 무섭게 고통을 당하다가 죽습니다. 지금 이 병은 미국과 유럽
일대에서 인간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이와같은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짓밟음으로 명망을 자초했습니다. "야웨께서 하늘 곧 야웨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성들과 성에 거하는 모
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죄를 짓는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성경은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4)."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 열매를 거둡니다. 자기의 육체
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천천히 돌지만 빠뜨리지 않고 곡물을 부수
는 맷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
습니까? 그들은 430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 해방을 얻었으나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우상을
섬기는 등 계속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 뼈를 묻고
말았고, 가나안에 들어갔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그 후손들도 끝내 이방의 포
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람들은 그 누구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
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땅에서나 내세에 복된 삶
을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순종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전 생애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생애였
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
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40주 40야를 금식하시고
난 다음 주리셨을 때 마귀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네개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육신의 정욕을 시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도 좋지만 먼저 구복부터
채우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험에 바져 하나님의 일보다도 자신의 구복
보다 채우려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그러자 이번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
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
라"고 했습니다.
이는 안목의 정욕을 시험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라는 것입니
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
4:7)고 말씀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역초기부터 하나님의 뜻에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이후부터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전역을 다니시면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자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시고 죽을 자를 살리시고 절망
에 처한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녀가 선한 목적을 가진 부모의 뜻
에 따라 살때 부모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주신 예수님께서는 최후로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예
수님께서는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서는 인류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속죄물이 되신 것입니다. 죄 없으
신 분이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지셨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무엇
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지심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이 고통
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
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
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세상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셨습
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신 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 대신에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폭적인 순종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한없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가장 영화로운 보좌 우편에 앉히셨
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
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
구하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는 많은 종교도 있고 철학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고 구
원해 주고 영원한 소망을 주는 것은 기독교 신앙뿐입니다. 이러므로 기독교
는 이러므로 기독교는 종교 이상이요,철학 이상입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없음이니라"(행4: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전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복된 소식은 나사렛 예수께서 인류의
구주가 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
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행운아입니다. 인간이 이처럼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신 예수님의 순종이 있
었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우리들은 어떤 생활태도를 취해야 할까
요? 우리는 오직 내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첫번째로 하나님의 뜻과 육신의 정욕을 선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
러분,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뜻을 짓밟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의롭지 않은 물질을 취하면서 교회에서만 주
여, 주여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란하고 방탕하고 마약중독이 되어 하나님의 성전인 몬을
더럽히면서도 교회에서 거룩한 체 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회
개를 하고 이런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의롭
고 거룩하게 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고 거룩한 삶을 끊임없이 추구할
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번째로 하나님의 뜻과 안목의 정욕을 잘 선별해야 합니다.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인기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도 세상 사람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
협하는 사람은 모두 안목의 정욕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배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
다는 결의를 갖고 실행해야 합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뜻과 권력과의 타협을 잘 선별해야 합니다. 오늘날 권
력을 얻기 위해 양심을 짓밟는 성도, 권력의 신 앞에 절하고 정의를 버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굽히지 않았던 저
일재하의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주야로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시여 내 뜻대로 마옵
시고 주의 뜻대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
여줍니다. 그런가면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감동화하시고 은총의 길로 인도하
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읽고 묵상하여야 하며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게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성겨은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잠4: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
답해 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고 나약한 신앙
인, 형식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서 무
조건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
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활 속에 실천하지도 않고 세속적인 생활만 하다가 갑자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주여!"하고 나오는 사람은 유아기적 신앙을 가진 사람
입니다. 우리는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 주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고 그 뜻을 생활속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
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면적으로 거역한 이 세상은 바야흐로 인류종말을 향해 치
닫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는 처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의미없는 죽을허망한 존재가 아닙
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 우리는 영원한 천국으로 갈 영광
스러운 존재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말세지말에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
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 이땅에
서의 내세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라
성경 본문: 눅 24:13-35
부활 - 이 말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모든 것이 죽어 만가는
세상에서 다시 산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희망이 넘치는 이야기입니까? 과
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사람의 머리도 점점 더 깨이지만 그런 것들이 이
세계를 희망적인 세계로 만들지 못하고 점점 더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음을 볼 때 정치나 과학을 통해서 생명의 소식을 듣기는 틀린 것 같습
니다. 결국 이 세계는 기독교의 부활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디서
도 생명의 복음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절망의 깊은 밤이 오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
계를 향하여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라고 힘써 외쳐야 하겠습니다. 모든 인
간의 절망을 십자가를 통하여 극복하신 후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 곁에 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깊은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
들은 그분을 뵈옵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엠마오로 가는 두 제
자가 그들에게 다가오신 부활의 주님을 알아 뵈옵지 못한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이 세계가 안겨 준 절망으로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이 생명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뵈옵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왜 주님을 알아 뵈옵지 못했을까요? 그러던 그
들이 또 어떻게 주님을 뵈옵게 되었을까요?
눈이 가려진 제자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그의 말씀을 들었고, 그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으며,
그의 인격과 온후한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때 예수님을 통하여 희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가 보여주신 어떤 가
능성은 절망의 밤을 헤매던 제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큰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
수님이 배반당하시고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임을 당하시자 그
들은 전보다 더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
덤에 묻히시면서 그들의 희망도 함께 묻히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난 어느 날, 두 사람은 엠마오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간에 일어난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저희
와 함께 동행하셨으나 "저희의 눈이 가려져서" 주님이신줄 알아 뵈옵지 못
하였습니다. 저들의 눈이 무엇으로 가려졌기에 그렇게 가까이 모시던 주님
을 알아 뵈옵지 못했을까요?
첫째로, 그들의 마음이 절망과 좌절의 비통함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채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녔던 그렇게 부
풀었던 희망과 지금 맛보고 있는 쓰디쓴 좌절의 아픔 이외에 아무 것도 생
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까이 모시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
로 저들의 마음은 몹시도 비통했던 것 같습니다.
저들의 비통함은 예수님에게 잘못된 기대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귀중히 여기는 성경을 바로 보고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바로 깨달아 알
았어야 할텐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현실의 베일로 그들의 눈이
가려져 고난 당하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
다. 결국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구속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
리고 있었지, 고난 당하는 메시아란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
수님 자신만 수난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
의 메시아 기대를 제자들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만 보고 틀림없는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맥없이 돌아가시자 깊은
좌절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눈이 가려져 성경을 잘못 이
해하고 있었고,거기다가 절망에 의해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지므로 해서 더
욱 눈이 어두워졌던 것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가
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받아들이지도 않았
습니다. 예수님이 떡과 잔을 통하여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것을
상징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라는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잠시 후에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
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잘못된 기대에만 부풀어 있었던 것
입니다. 성경이 이미 예언했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셨음에도 불구하
고 저들이 깨닫지 못하므로 예수님의 죽음이 현실화되자 놀랐고 절망에 빠
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제자들은 사흘이 지나 일어난 여인들의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소
식을 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가능성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인들의 소식을 듣고 제자들 중 몇 사람이 가서 확인하고 온 사실에 대해
서 그들은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 저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시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고난 당하여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
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전혀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일에
대하여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이들의 눈이 가려진 것은 "미련하고 선
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은" 탓입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인간적인 욕심에 눈이 가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하게 되었고, 성경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분명하게 지적된 사실조차 믿지 못하였던 것
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뜨고도 부활의 주님을 뵈옵지 못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잘못된 욕망으로 그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님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비밀이 밝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는 밝혀질 것은 다 밝혀졌고, 드러날 것은 다 드러 났으며 전파될만큼
다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버리지 못한 욕망으로 인하여
눈이 멀었고, 저들의 욕망과는 달리 점점 더 깊은 멸망의 구덩이로 빠져들
어가는 세계를 보면서 받은 상처로 인하여 저들의 눈은 가려진 것입니다.
눈을 뜨게 하신 부활의 주님
이렇게 미련함과 절망으로 눈이 어두워진 제자들을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함께 걸으시면서 저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므로 저들의 눈을 밝혀
주셨습니다. 눈이 밝아진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의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
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저들의 눈을 밝혀 주셨을까요?
첫째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절망한 제자들에게 나
타나셔서 함께 동행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을 통해 모든 인간의 죄
를 대속하시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저들에게 나타나 저들과 함께
하시므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구원의 섭리가 사실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후 40일 동안의 머무심은
제자들에게 있어 놀라운 은총의 기간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
웠던 구원의 역설들이 한꺼번에 이해되고 믿을 수 있었던 은총의 기간이었
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는 영적으
로 우리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고난
과 부활의 사건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절망한 우
리 곁에 항상 계셔서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임을 우리
가 분명하게 깨달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주님은,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메시아는 영광 가운데 오셔서 신적인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갖고 있던 제자들에
게, 메시아가 고난을 받아야만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역설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미련한 것
으로 보거나, 아니면 고난은 제쳐놓고 축복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자기 안에서 관리하고 계신 분입
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물을 대표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물을 대표하
실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그 만물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
다. 그렇게 하므로 만물이 받아야 할 죽음의 벌을 대신 하셨습니다. 이
대속함 없이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
가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온 인류의 죽음입니다.
만물의 죽음입니다. 죄를 범한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고
난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상하게 이런 사실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역설적인 비밀을 처음으로 듣게 된 제자들은 귀가 번쩍 열렸을 것입니다.
'아, 이런 비밀이 있었구나' 라는 깨달음이 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
입니다. 이제까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비밀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 감상적으로만 바라보고 눈
물만 흘려서는 진정으로 그 십자가가 간직한 구속의 비밀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세계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온갖 죄악을 이미 그 십자가
가 소멸(消滅)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가려진 눈으로, 부활의 희망은 보지 못한 채 절망의 밤을 헤매어
다닐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고난의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구속의 은총임을 깨닫고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
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
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 하셨다고 하였습니
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의미,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세운 구리뱀
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사야서에 나타난 수난(受難)의 종이 누구
를 가리킴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을 것입니다.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
였지만 예수님이 설명해 주실 때 저들은 그 속에 간직된 놀라운 구속의 비
밀을 비로소 처음 깨달아 안 것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수 없이
보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들을 어느날 갑자기 깨달아 알게 되는 때
가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그 말씀을
들을 때 놀랍게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구원의 역사의 주인
공이신 예수님 자신이 말씀들을 들려주실 때, 그들의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깨달음의 감격이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
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빛에서 볼 때 비로소 모든 말
씀들이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신약 성경을 통해서 구약 성경을 볼 때 비로
소 그 모든 말씀의 비밀들이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끝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시고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았을
때 손님인 그가 갑자기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저들에게 나누어주실
때 저들의 눈이 밝아져 비로소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저들의 절망으로 냉각되었던 마음을 뜨겁게 불을 붙여 놓으신 후
떡을 떼어 주시므로 저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던 일들을 하나
하나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마지막 만찬의 자리가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라고 하셨던 얼마 전의 일이 생
생하게 기억나면서 그들은 비로소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
니다.
주님은 미련하고 우둔한 제자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저들의 어두웠
던 마음을 밝혀 주시고 저들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육신
의 눈이 어두웠던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마음의 눈이 멀어 있었던 것입니
다. 그러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므로 저들이 눈이 떠진 것입니다. 오늘
도 주님은 성찬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
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오늘 우리가 가진 절망
이 클수록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
여 절망한 때일 수록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향하여 마음의 눈을 뜰 수 있
는 때입니다. 오늘 이 절망적인 세계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부활
하신 주님뿐입니다. 냉각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실 분도 주님뿐입니
다. 이제 이 부활의 주님께 소리 높이 찬양을 드립시다. 그리고 이 부활
의 주님을 죽어 가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소리 높여 전파합시다. 이 부활
의 아침 주님을 영접하시므로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여러분의 눈이
밝아져 희망에 넘친 새로운 삶이 여러분 속에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납시다
성경 본문: 눅 24:13-35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예수님을 따르던 두 제자가 실망하고 예루살렘에서 25리쯤 되는 엠마오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무력한 사람에게 불과했다고 생각해서 실망하고 돌아가던 중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를 만납시다. 세상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 길이 형통케 되고, 평탄한 길로 인도될 수도 있고, 영원한 구렁텅이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누구를 제일 먼저 만납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부모님입니다. 여러분의 아버님이 김씨냐 박씨냐에 따라 모든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 또한 달라지는 것입니다. 학교에 갈때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또한 공부를 마치고 이제는 청년이 되어서 결혼 적령기가 되면 배필을 만나게 되는데,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행복해 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어느 교회에 가서 어떤 목사님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 신앙의 문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있고, 많은 목사님과 사모님이 있지만 어느 교회 어느 목사님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적 성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납시다]라는 제목은 평범하고 교회에서 많이 들었던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은 에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교회로 찾아왔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석가모니나 공자나 그런 유명한 사람을 만나기에 앞서서 내 인생을 새로운 인생으로 바꿔주는 역사적인 계기가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실망으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볼 때에 너나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불안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 말할 수 없는 그 실망 속에서 누구를 만납니까? 사람을 만나서 해결할 문제도 있지만 잘못 만나게 되면 결과는 오히려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주님에 대해서 한번 더 되새김질 하는 의미에서 생각해 봅시다. 먼저 주님의 이름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듯이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만난 자에게는 팔자를 고치는 놀라운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만난 자에게는 팔자를 고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스무살의 나이에 부상을 당하여 불구가 되었지만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과거에 불구라는 의식이 다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불구로 만들어서라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오늘날 주의 종으로 삼으셨다는데 오늘날 주의 종으로 삼으셨다는데 감사드릴 뿐입니다. 절망 속에 헤매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게 되어 지금 이렇게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는 것은 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을 만난 결과가 현실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여러분께 솔직히 고백합니다. 만약 이 시대에 이런 불구의 몸이 절망 속에서 술이나 먹고 담배나 피우고 불안과 초조 속에서 내 인생을 보냈다고 하면 나는 벌써 이 세상을 떠났을 사람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나, 누가 저 사람을 쓸 것인가 할 정도로 보잘것 없는 인생이지만 그러나 사람이 보는 것과는 상황이 정반대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우리가 젊었을 때 제일먼저 만나야 될 것은 배필입니다.
하지만 저의 배필이 되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누가 저런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하는 비관적인 상태였고,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의 문제는 주님이 하실 문제이지 내 자신이, 사람이 해야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겨론을 얻게 되고 주님께 다 맡기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좋은 배필을 허락해 주셔서 생각지도 않던 상대를 만나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누가를 만나느냐? 우리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배필을 허락해 주셔야지, 사람의 방법으로 배필을 만나게 되면 결혼생활이 길지 못한, 불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직장문제가 나옵니다. 어떤 직장에서 나같은 사람을 채용하겠습니까? 내가 만약 사장이라고 해도 채용하지 않을 것입니다.훨씬 더 건강하고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는데 왜 나같은 불구자를 채용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으로서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보건사회부에 취직할 기회가 저에게 왔습니다. 자유당 시절 많은 청탁들이 들어와서 많은 일류대학 출신들의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배후에 누가 있느냐가 따라서 결정되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세상적인 배경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뒤에 계시기에 전혀 불안하거나 포기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30명을 임시직원으로 뽑았는데 그 안에는 들어갔습니다.
3개월간 임시 근무를 하면서 그 근무성적에 따라서 반을 잘라 15명은 채용되고 15명은 탈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보건사회부에서 임시 근무를 한 지3개월이 다 되어 갔습니다. 배경도 없고 출신학교도 그리 명문대가 아닌지라 사람의 생각으로는 채용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담당 과장이 하루는 저에게 국회의원 명함이라도 하나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는 국회의원도 없고 안되도 좋으니까 원칙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작성한 명단에는 저의 이름이 빠졌습니다. 그 대신에 15명을 적은 다음에 맺 밑 줄에 '이 중한 사람이 공무원 직을 포기하면 하갑용을 대신 채용한다'라는 단서조항을 붙여서 결재를 올리니 국장 차관 장관의 결재가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결재가 난 후에 그 중 두 사람이 그 직을 포기했습니다.그들은 말단 공무원에 만족하지 않고 주시나 사무관을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제가 채용되어 공무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정식 공무원이 되고 보니 주일 성수문제가 제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일정 기간까지는 일요일에도 나와서 근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는 담당과정에게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저는 공무원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주일은 어길 수 없습니다."이렇게 말합니다. 과장님이 말하기를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게 공무원이 되었는데 몇 달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것쯤이야 목사님이 용서하지 않겠냐?"라고 하며 직장을 포기하지 말고 근무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단단히 만난 저로서는 직장 때문에 주일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직장은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주일을 지키기로 그 자리에서 맹세를 하고 과장님께 인사를 한 뒤에 "직장을 포기합니다."하고서는 돌아왔습니다. "주님을 만난 자의 역사가, 우리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는데,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직장을 포기하는 나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왔습니다.
그 이튿날 과장님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직장에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나가보니 과장님 말씀이 "당신의 말을 듣고 나서 집에 가서 잠을 자려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고 당신 얼굴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직장을 포기하더라도 나는 주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던 당신의 말씀이 자꾸 귀에 쟁쟁울렸습니다. 잠도 한숨 이루지못한 채 아침에 되어 식사도 하지 않고 출근하여 장관실에 올라가서 보건사회부장관님께 어제의 일을 보고 드리니 장관께서는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직장을 포기하는 크리스찬이 있다면 주일날에 그 사람에게는 특별히 휴무를 해서라도 하루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열심히 근무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장관의 허락을 맡고 당신에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과장님과 장관께서는 두 분다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까 불신자들의 마음도 움직이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닙니까? 누가 그렇게 역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배경으로 한 자에게는 어느 누구을 배경으로 한 자에게는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도록 하나님이 배후에 역사하십니다.이렇게 해서 약 20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나의 인생이 육십을 넘었을 때 마지막으로 할 일이 없겠는가 해서,낮에는 공직생활을, 밤에는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눈이 하나 밖에 없어서 책을 보려면 눈이 아파서 한 시간 이상을 보지 못합니
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상하게도 눈이 편안하고 또렷이 보입니다.
두 눈 가진 사람보다 눈이 더 건강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일어난 역사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만나면 건강해집니다. 우리는 절망할 때, 고독할 때, 어려움을 당할 때 일수록 주님을 떠나지 말고,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 형편을 아시고 모든 문제를 처리해 주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구인 제가 노후에 다른 사람에게 멸시천대를 받지 않도록 노후대책을 지혜롭게 해주셔서 지금 현재 상태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정부에서 죽을 때까지 연금도 계속 나오고, 자녀들 학자금도 대학까지 지급됩니다.
비록 불구의 몸인지라 비참해 보일지는 몰라도 모든 교통수단이 무료라서 저는 자가용이 필요없습니다. 모든 차들이 다 내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입니다. 저는 하나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로 저는 절망하거나 내 인생을 포기하거나 이로 인해 한탄하거나 불안 속에 살았던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감사할 뿐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 주님이 늘 인도해 주시니까 이 세상 누구보다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을 만난 덕택인줄로 믿습니다. 저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자꾸 눈물이 납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하면 오늘의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주님을 만나고 보니 이렇게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부족함이 없게 영육간에 채워주십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서, 이 땅위에서도 잘 살고 영적으로도 잘 사는, 즉 영육간에 잘 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는 허송세월 보내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인생이 금생뿐이라면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된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헛수고입니까? 부활이 있기에, 승리하신 우리 주님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 믿음이 결단코 헛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모조리 학살하려 했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에 변하여 신약시대의 대표적인 선교사로서 세계 만방에 다니면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주의 종이 아들과 사는 과부에게 채주가 찾아와서 남편이 진 빚을 갚지 못하면 두아들을 자기 종으로 삼겠다고 했을 때, 그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 여인은 주님을 만나러 간 것입니다. 찾아가서 이런 사정을 말했스빈다. 엘리사가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여인은 기름 한병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집에 있는 모든 빈 그릇을 많이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병 뿐인 기름을 그 그릇들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한병밖에 없는 기름을 빈그릇에 부어 보았자 한 병밖에 나오지 않을 걷인데, 주님을 만난 자에게 일어나는 주님의 역사는 초자연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상식을 초월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을 했더니 결과는 빈그릇에 부을 때마다 기름이 그릇에 가득차고 빈 그릇이 떨어지자 그 기름도 그쳤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다시 엘리사에게 찾아가서 "당신 말대로 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라고 했더니, 그러면 그것을 가져가서 팔아 가지고 빚을 갚고 그 나머지로 생활비를 하라고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다는 것을 그 여인이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체험을 하십니까? 여러분도 초자연적인 역사,주님을 만나는 현실 속에서 불가능이 없는 그러한 삶을 사시는 성도가 되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만납시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그곳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을 만나 여러분의 길을 형통케 하시고, 여러분이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주님을만난 자의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고난 후에
성경 본문: 눅 24: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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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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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은 흰자위와 검은 자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물체
를 보는 것은 흰자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검은자를 통해서 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눈의 검은 부분을 통해서 물체를 바라보며 식별하도록
만드셨을까요?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의 인생이 어두울지라도 너의 현실이 눈동자같이 캄캄하다고 할지
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 어두움을 통해서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느니라!"
우리들에게 참으로 인생의 깊은 지혜를 제공해주는 답변인줄 압니다. 인
생의 아름다움은 밋밋한 평안함에 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
려 인생은 괴로움의 사건 속에서 아픔의 상처 속에서 아름다운 인생의 멜
로디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울부짖는 사람을 보게
된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왜 나에게 이런 환난을 !"그러나 낙심하지 맙시
다. <기쁨의 여신>은 많은 말을 조잘거리고 떠나 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없습니다. 반면에 <환난의 여신>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떠나가게 되면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시
련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한 인격과 연단된 신앙을 얻게 되지만 그 많은 시
련 중에 주님 때문에 받는 시련은 더욱 값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 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옳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 질문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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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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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십자가는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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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예수에게 갑자기 덮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비극적인 죽음에 관해 되풀이하여 말씀하셨고 필요한 일로 여기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갔을 때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시몬이 그
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직면할 수 있는 자
세가 제자들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을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
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더라"(마16:21)
그후 삽자가가 다가와 예수님이 체포 당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낙심
하고 당황하였습니다. 이들은 위대하신 분이 자신을 죽음에 방치한다는 것
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몬은 칼을 꺼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
를 떨어뜨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시몬의 당황하고 절망한 마
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너는 지금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
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
라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마26"53-54).
주님은 마치 "내가 피하려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룰 수 없게 된다"고 말씀하
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독한 투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동안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길을 바라셨던 것 같습
니다.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피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실 수 없는 것일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7).
그러나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는 간청의 기도가 아니라 용납의 기도입
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이것은 마치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다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십자가를 필요한 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렇듯 미리 내다본
그 비극적인 죽음은 언제나 불가피한 것입니다.
2.십자가는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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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도 십자가가 필요한 것으로 여기셨듯이 예수님은 십
자가를 뒤돌아 보면서도 십자가를 필요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이 이 두 제자를 만나 함께 이야기하셨을 때에는 이미 십
자가 처형의 엄한 시련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에
는 이미 혹독한 고통은 하나의 기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겪고 부활을 경험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쓸데없는 일로
여기지 않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를 필요한 일이라고 확신하셨기 때문에 이 혹독한
경험 속에서 단순한 비극이 아닌 승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당
하는 비극을 뼈저리게 느끼는 정도는 비극이 나에게 꼭 필요한 일이냐 필요
없는 것이냐에 좌우됩니다.
(예화)// 다섯살 박이 아들과 함께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갔던 어떤 아버
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특별한 정을 쏟고
있었습니다. 이 날 우연히 아버지는 술 친구들을 만나 평소 보다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더 없이 유쾌하였습
니다. 그리하여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는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차
속도를 줄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그는 자제력을 잃어버린 그의 차는 뚝
아래로 곤두박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자신은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그의 어린 아들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아들을 잃은 것
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어
리석은 잘못으로 인하여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 슬픔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여기에 너무나 비통해 하는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삼하18:33).
다윗은 젊고 총명한 아들이 반역자의 무리 속에 끼어 죽음을 당했다는 소
식을 듣고 몹시 傷心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돌아 올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만일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찾아 나섰더라면 아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고 압살롬은 죽음으로 그 생애
를 마쳤다는 悲報를 듣게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는다는 것을 예상하
지 않았기 때문에 슬픔은 倍가 되어 다가 왔습니다. 비극이 가치가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할 때 그 뼈저림이 더해집니다. 반면 필요한 비극이라고 여
기게 될 때 그 뼈저림은 다소 완화됩니다.
(예화)// 몇 해 전의 일입니다. 아버지는 밭에서 밭갈이를 하고 있었고 그의 어린 두 아들은 그 가까이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일
을 하던 아버지가 일손을 멈추고 쳐다보다가 큰 개 한마리가 어린 아이들
에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곧 미친 개라는 것을 직감하였
습니다. 아이들에게 옆에 있는 창고로 숨으라고 소리치면서 다가오는 짐승
을 향해 달려 나가 덮쳤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무사했으나 아버지는 얼
굴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개의 물어 뜯기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미
친 개의 독을 완전히 입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너무 중
태였습니다. 臨終이 가까워 잠시 정신을 회복한 아버지는 그의 아내의 얼
굴을 보며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너무 상심하지 마
시오.아이들이 무사하지 않소. 이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 않았소?" 자
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어떤 다른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일을 우리
를 위하여 이루셨다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3.십자가가 그토록 필요한 일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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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류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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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유일한 구원의 희망입니다. 성
도들이 이 문제를 헤아려 보는 데에는 거의 영구한 세월이 걸리리라고 생
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의 결실을 거두기 위하여 십자가의 신비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할 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게 한 대하여 오히려 나
는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십자가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했다고 믿
습니다. 십자가가 성경말씀을 성취한 것이라는 점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
러나 십자가를 필요하게 만든 것이 성경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
경 말씀이 씌어지게 만든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이사야
53장의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가
져온 것은 이사야 53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 본문
이 불멸의 희망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
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2)주님은 약해서 죽으신 것도, 진노를 진정시키려고 죽으심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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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유대 지배자들과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이 예수님보다 막강한 힘
을 지녔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은 약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약했기 때문에 죽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그의 손에서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우리 주님은 인간의 범죄로 화가 나신 하나님
의 진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죽으셨던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신학은 하
나님에 대한 비방이요, 하나님을 계시하려 오셨던 아들에 대한 비방이기도
합니다.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반
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
지 못함이니다"(눅23:34) 이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의 확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
목하게 하셨음이라"(고후5:19)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
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보다 더 이 두 분이 완전하게
하나가 되신 적은 없었습니다.
4. 그렇다면 십자가는 왜 필요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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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간적인 면에서 먼저 살펴 봅시다.
예수님은 주님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사람들과 심한 믓모가 다가옴을 알
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담담하게 죽거나 타협을 받아들일 두 가지만이 있
었습니다. 주님은 적당히 타협하여 살아야겠다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
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는 양심
을 위하여 죽은 다른 영웅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고난과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주님의 죽음에는 남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부
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거기에는 바울과 더불어 우리로 하여
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골1:24)수 있게 하는 점도 있습니다.
2)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됨과 인간의 인간됨을 위해 필요하였습
니다.
우리 주님은 한 점 죄없으시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
하기에 죄악으로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사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신 위대한 말씀 곧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으리라"(요12:24)
는 말씀은 우리를 위한 진리인 만큼 그를 위한 진리이기도 하였습니다.
3)인간을 자신과 화해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인간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십자가가에서 우리는 우리
를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고
자 할 만큼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는 이를 가진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
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아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경험입니다.
5.우리가 이러한 고난을 각오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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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를 영접하여 자신과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자기를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자신의 삶을 바친다면 예
수님은 우리를 영접하여 자신과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비극적인 갈등은 끝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가지게 됨
에 따라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 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롬5:1) 될 것입니다.
2)하나님께 복종하여 화평을 이루게 되면 내적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되면 우리 자신과도 바른 관계를 갖게 됩
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이
48:22) "하나님의 나라는...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우리
내면에 평화가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
기신 유산, 곧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
라"(요14:27) 하신 유산을 물려 받을 수 있습니다.
3)사람들 간의 틈을 메워 줍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어 주신 이가 주님께 우리를 내어 주게 되면 우
리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내면적 평화를 갖게 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우리들
서로 간에도 평화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내
어 놓으면서까지 사랑하셨던 형제"라고 생각하는 때 우리는 남에게 무관심
하거나 남을 조소하거나 멸시하는 눈으로 대할 수가 없게 됩니다. 초대교회
의 성도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허물고
모든 갈라진 틈을 메워 나갔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 자신들이 화해
를 이루었기 때문에 화해의 역군이 되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들은 그리스도의 대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들은 세상을 변화
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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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맺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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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인디안의 용사들은 싸움에 나아갈 때 한 사람의 발자욱만 남겨
놓습니다. 선두에는 강한 추장이 큰 도끼와 활을 가지고 화려한 그림 물감
을 몸과 얼굴에 칠하고 머리에는 독수리 깃털을 달고 맨 앞에 나아갑니
다. 그는 길을 만듭니다. 그리고 용사들은 일렬로 한 사람 한 사람 정확하
게 추장의 발자취를 밟고 따라갑니다. 이는 마치 조난당한 한 병사의 발자
취와 같습니다. 이 발자취는 용사의 이동을 모르게 합니다. 이 용사들은 반
드시 승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갈바리아에 오르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승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후에 영광에 들어 가신 발자취를 따라
다가와서 힘들게 하고 있는 고난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승리의 삶이 되시
길 바랍니다.
이 성에 유하라
성경 본문: 눅 24:44-49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
건과 거기서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세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45절을 보면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습니
다. 구약성경 도처에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특히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기사도 여러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반신반의 하는가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45절을 보면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면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천사의 소리를
들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도 마음이 열려있지 않으면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튼튼하고 견고한 열쇠는 이스라엘,독일,미국 것들이라고 합니다. 아무나
함부로 열지 못하는 것이 견고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간단한 쇠
꼬챙이 하나로 모든 열쇠를 다 열수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 아파트, 사무
실, 심지어 금고까지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그 누구도 열지 못하는 자물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
간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쇠꼬챙이로도 열지 못하고 이스라엘 열쇠로도 열
리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이 문을 열고 들어올 만한 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
나 내가 나의 의지로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예수를 안믿고 지옥
가기로 작정하고 악을 행한다면 그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말합니다.
남녀관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마음이 열려야 만나는 것도 가능하고 대
화도 가능하고 결혼도 가능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외적 조건이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맞질 않으면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경직되고 굳게 닫힌 제자들의 마음을 먼저 열고 그후에
성경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성경도, 설교도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졸고 있는 사람 성경을 읽으며 하품만 연속하는 사람, 천날
만날 듣고 읽어도 감동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그 무엇인가로 막혀있는 사람
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나 설교를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 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을
모조리 차단해 버립니다. 마음 속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도 않고 깨달음이 없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죽지않고 영생을 얻으려면 빨리
숨겨놓은 죄,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둘째, 교만입니다.
교만은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 보다는 중학생이 더
아는 척합니다.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학생 보다는 대학생이 더 아는
척 합니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의 축적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성향도 비슷하빈다. 초신자 보다는 오래된 사람이 교
만합니다. 직분 안가진 사람 보다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더 교만합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 보다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성경을 배웠거나,
귀담아 들은 사람들이 훨씬 더 교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안다. 이미 알고 있다. 이미 들었다는 잘못된 경험 때문
에 마음의 문을 닫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큰 병입니다.
이 중병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가 "우리는 넉넉하다, 부족한 것이 없
다. 부유하다"면서 실상은 거지였던 것처럼 영적 가난뱅이가 될 것이기 때
문에 그 고질병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셋째, 잡념 때문입니다.
잡념이란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에 생각
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빈다. 몸은 교회에 앉아 있지만 그 마음은 동네방
네 동서남북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있는 사람, 찬송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
교를 들어도 예수는 떠오르지 않고 다른 것들만 오락가락 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잡념에 빠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앞에 두고, 공부하는 학생이 잡념에 사로잡히면 공부가 되질
않습니다. 공부가 안되면 그 사람은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잡념이 많으면 말씀은 제대로 듣질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강단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촛점이 흐려있기 마련입니다. 말
씀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그 영혼이 고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드립시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 드립시다.
본문을 보면 성경은 무엇이 죄이며 누가 죄인인 것을 가그쳐 줍니다. 마음
을 열고 성경을 깨닫고 회개하면 영원한 생명이 내 것이 되는 것이빈다. 지
금 마음의 문을 엽시다.
2.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49절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
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능력은 위로부터 임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힘은 땅에서 생겨납니다. 음식을 잘 먹고 영양식을 한다든지,보약
을 먹고 강장제를 먹는다면 육체의 힘은 생겨납니다. 그리고 운동으로 체력
을 단련하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영혼의 힘은 그런 것들로 생기는게 아닙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영혼의 힘이 솟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힘은 위에서
임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받
으면 힘이 솟구칩니다. 삶의 새로운 활력이 솟아납니다. 세상사는 재미가있
고 일하는 맛이 달라집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찬송소리가 달라지고 기
도시간이 달라지고, 교회나오는 발걸음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위로부
터 임하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그 능력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옷도 입지 않으면 내것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
도 먹지않으면 내것이 안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뜨겁고 강한 성령의 능력이 위로부터 임할 때 그 능력을
내가 입어야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입는다]는 말
과 [입힌다]는 말은 다릅니다. 입는 것은 내가 입히는 것을 말하고 [입힌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입혀 주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은 "위로부터 능력
을 입히울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가 입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입혀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는 것도,능력 입는 것도 내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능력을 입기위해 해야할 일이 있습니
다. 그것은,
3. 이 성에 유하라는 것입니다.
49절 끝을 보면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서 말하는 [이 성]은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대부분의 제자들은 거칠고 삭막한 수도 예
루살렘을 떠나 그들의 고향이었던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예루
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120명만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만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익숙하지 않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갈릴리지방 사람인 제자들로서는 예루살렘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벗하며 배의 노를 젓던 그들에게 딱딱한 돌집이며, 거리는 전혀 생
소한 곳입니다. 분위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제도, 법, 관행을 따지는 예
루살렘 보다는 바닷바람이 속시원하게 부는 갈릴리 바다가 훨씬 더 친근하
고 익숙합니다.
더구나 예수없는 예루살렘에는 한시간도 머물고 싶지 않은 것이 그들의 마
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준미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4을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벗하며 살다가 교회를 처음 나왓다든지, 교회를 옮긴 사람들은 모
든게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낯설고 생소한 것들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교회를 떠나거나,예수를 떠나면 안됩니다. 낯이 설고 익숙하지 않더라
도 이 성에 유해야 합니다.
둘째, 싫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등학생 1천명을 대상으로 물었습니다. 공부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가? 1
천명중 128명만 재미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제일 많은 대답은 거쳐야할 과정이니까, 대
학에 들어가야 하니까, 안하면 사람구실 못하니까 등 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경우도 그 진가를 알기전 까지는 멋도 맛도 모르기 마련입니
다. 그러나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은 주목해야 합니다.
싫더라도 안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부하는 것, 일하는
것 등입니다.
예수믿고 능력받아 힘있게 사는 것은 귀찮고, 힘겹고, 싫더라도 해야합니
다. 싫더라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싫더라도 이 성을 떠나면 안됩니다. 밥을 먹기 싫다고 해서 한달동안 밥을
먹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양실조로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싫더라도 교회 나오고, 저녁예배 나오고, 새벽에 나오고, 수요일에 나와야
그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에 유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의 의미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넓게는 예수의 품이
며,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지 말라 이 성에 유하라. 주님과 교회를 떠나지 맙시다.
그래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