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의 ‘마통’ 통산 28번째
- 화이부동(和而不同)속의 초심과 굳은 심지, 끈기 -
2011년 12월의 ‘마통’(마중물 통신, 28번째)을 만나는 애틋하고 사랑하는 인제대 사회복지학과 졸업생 및 재학생, 대학원의 졸업생, 재학생 여러분, 그리고 저와 교류분석 이론을 통해 아울러 현재 소중한 인연을 맺고 있는 참 좋은 분들에게.
해마다 이 맘 때면 늘 떠올려 지는 학명선사의 말이 생각난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 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세월 감에 묻혀 살지 말고 늘 그 중심에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신묘년, 토끼의 해에는 정말 토끼처럼 빠르게 뛰어다녔다. 동화에서처럼 자만으로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주마등 처럼 많은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끝나지 않은 4월22일에 영면하신 아버지에 대한 애도 감정, 백두산 야생화 트래킹, 후지산 일출 산행, 올해 갔던 산들(부산 금정산, 장산, 승학산, 양산 정족산, 충주 고도원의 깊은 산속 옹달샘 명상센터, 양산 영축산, 밀양 재약산), 한국교류분석상담학회 창립 및 조직, 공저 ‘생활 속 교류분석 관계의 미학 TA’ 가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로 선정 된 일, 공저 ‘학교현장에서 교류분석의 적용’ 번역서 출간,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해시건강가정지원센터가 여성가족부 평가 전국 최우수 센터 선정 등의 일들이 그것들이다. 그중 무엇이 가장 보람되었나를 생각해보니 교육현장에서 교류분석의 적용 번역서 출간과 한국교류분석상담학회 창립이었다. 2011년 한해는 교류분석에 많은 애정과 정신에너지를 쏟았던 해였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러한 일들은 내 자신에 대한 부단한 반성과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 용기, 보람, 고마움과 감사로 점철된 시간들이다. 다시 한 번 겸허히 세상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과 또다시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에 있다. 같은 선상에 있는 점의 시간이다. 법정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처음의 마음(初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추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마무리는 또 하나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신묘년 12월 막바지, 한 해를 돌아보며 마무리해야 할 마지막 주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 삶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왔는가. 새해 첫날 가졌던 그 마음으로 살아 왔는가. 얼마나 내려놓고, 비우며 살아왔는가. 얼마나 남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왔는가.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나면,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정호성 시인은 ‘내 가슴에’ 라는 시집에서 한 해를 보내는 ‘송구영신’의 마음을 이렇게 말한다.
내 가슴에
손가락질하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내 가슴에 못질하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내 가슴에 비를 뿌리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한평생 그들을 미워하며 사는 일이 괴로웠으나
이제는 내 가슴에 똥을 누고 가는 저 새들이
그 얼마나 아름다우냐.
참으로 한 해를 정리하며 인간의 각성과 철듦에 와 닿는 말이다. 어린 시절엔 하루해가 여삼추(如三秋) 같았고, 서른에서 마흔까진 더딘 구석도 있더니만 눈 깜짝할 새 지천명(50)이 훌쩍 지났다. 또 다시 한해가 저문다. 새해에는 새로운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어려울 땐 위로가 되고 서로서로 힘이 되어 빛나는 희망과 감사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마무리와 시작은 우리 삶 속에 반복하며 윤회하고 지혜롭게 늙어 세상을 마무리 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한 시공 속에서 ‘나’ 라는 존재가 살아 숨 쉬며 조금 더 성숙한 인간으로서 어떠해야 하는가를 늘 생각한다. 나는 요즘 ‘부득불(不得不) 희락(喜樂),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화두를 잡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득불 희락은 정신병원에서 정신보건사회복지사 슈퍼바이저로 일할 때 너무 일이 많아 스트레스 받을 때 마음에 심은 화두로 ‘어쩔 수 없으면 기꺼이 즐겨라’ 라는 것이고 화이부동은 병원생활과 대학교 교수로서 인간관계를 해 나갈 때 가졌던 화두로 ‘어울리되 자신의 중심은 잃지 말고 지키는 것’ 이다. 그런데 살면서 이것이 제대로 되려면 그 속에 초심(시작할 때의 마음)을 끈기를 가지고 지켜내야 하는 인내와 굳은 심지가 필요하다.
한국교류분석상담학회의 창립 후 나는 학회장으로서 좋은 도반들과 학회의 틀을 만들고 발전을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고 있다. 화이부동의 자세가 참으로 필요하다. 함께 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부동(不動)의 마음이고 화이(和而)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며 화합, 통합하는 것이다.
사람은 많은 경우 크든 작든 인간조직 속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소속감이 인간의 여러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조직 생활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인간관계 방식에서 빗는 갈등과 부딪침 때문이다.
나 역시 이러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화이부동의 자세로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면 곧 오해는 누그러지고 상대와 감정의 다리가 끊어 졌다가 복원이 되는 것을 느낀다.
첫째는 이 사람이 나와 정보 처리 방식이 같을까? 이다.
흑장미를 보고 깊은 색깔에 매료되어 감탄을 질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미를 보는 순간 한 아름씩 싸서 선물로 주던 떠나간 옛 애인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 한 사람은 눈이나 코 같은 감각 기관에 의해 정보를 ‘파악’하고, 또 한 사람은 직관에 의해 정보를 ‘느끼기’ 때문이다. 즉, 정보를 모으고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은 없다. 다만 다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 앞의 완고한 벽이 스르르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때 나는 다시 한 번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충동마저 생긴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은 나와 같은 방향에서 사물을 보고 있을까? 이다.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보는 각도도 다르다. 나는 사물의 정면을 보고 있고, 이 사람은 사물을 아래서 위로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아이들이 처음 사람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할 때, 사람의 코를 두 개의 구멍으로 표시하는 것이나 다리를 길게 그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늘 어른을 아래에서 쳐다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보면 코는 늘 두 개의 구멍으로 보이고 다리는 몸보다 훨씬 길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갑자기 차이점이 웃음의 재료가 된다. 견해가 다르다고 싸울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견해를 취합함으로써 사물의 정면과 아래 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입체적 정보를 갖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누구와도 생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종종 조직에서 가정에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음의 벽, 대화의 벽, 수준의 벽을 느끼게 될 때, 가만히 이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 무릎을 구부리고 눈을 수평으로 마주치며 아이의 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가져 보려고 하는 것처럼.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곳을 서로 보여 줌으로써 우리는 동료가 된다. ‘동료 되어 보기’야 말로 우리가 함께 일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 봐야 하는 놀이임에 분명하다.
화이부동하며 초심을 지키는 핵심 요소 중 ‘굳은 심지’는 ‘나’ 로서 내가 갖는 가치,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굳게 지키며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 아는 사람의 중심된 마음이다. 이럴 경우 자신이 부동하고자 하는 가치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만의 가치로 고집하여 타인의 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화합, 융합하는 것이다.
나에게 죽마고우 이자 산행 도반이 있다. 아호가 요산이다. 인자요산(仁者樂山)에서 따 온 것으로 워낙 산을 좋아 하는 친구라서 내가 지어준 호이다. 고등학교 교사로서 산악회 총무를 하며 백두대간, 낙동정맥, 낙남정맥을 계속 잇고 있고 어지간한 산은 다 정복한 이 친구는 산도 좋아 할 뿐만 아니라 술도 무척 좋아하고 잘 마신다. 산에 갔다 오면 어김없이 하산주(下山酒)를 거나하게 마신다. 혈압이 높아 약을 먹고 있다는 친구의 건강이 걱정되어 가끔 나는 술을 좀 줄이라고 충고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나이 쉰이 되어서부터 자신이 결단한 약속을 나에게 부동의 자세로 보여주고 있다. 한해를 시작하는 1월1일부터 구정(음력 설)까지 술을 쉬는 이른바 ‘휴주월(休酒月; 일 년에 한 달을 술을 마시지 않고 몸을 보호 하는 달)’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은 산행을 함께 하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고 기꺼이 즐겁게 어울린다. 이것이 화이부동의 요체다. 지금도 이 친구는 50세 초입의 초심을 굳은 심지로 지켜나가고 있다.
이제 새로이 다가온 2012년에 나 자신이 신바람 나게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내려가 본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조용히 적은 것을 다시 읽으며 우선순위를 선택하고 선택한 일을 집중하여 할 수 있도록 시간도 구조화 해본다. 아울러 미래 일기도 써 본다. 2012년 12월 이즈음에 나는 지난 한해(임진년)를 어떻게 돌아보고 있을지를. 분명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 느껴지는 보람과 아늑한 평안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내가 2012년 임진년을 용띠의 특성인 건강하고 정력적이며 정직하고 용감하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신뢰감이 두터운 면들과 하나 되어 실천하는 결과일 것이다.
새해 임진년 흑룡의 해는 자신의 의지로 부단히 노력, 실천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병행하여 인간 세상의 이치를 넘어선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영역만 신께서 돌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역사적인 한 해가 되기를 겸허히 기도한다.
동시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러하기를 절절하게 축원드린다.
28-11.12월의 마통.화이부동(和而不同)속의 초.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