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188 (5권 7. 김홍신. 펌글)
목이 말랐다.
계집애는 냉장고에서 차디찬 맥주를 꺼냈다.
단숨에 한 잔을 마셨다.
담배를 물려주고 턱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벼운 안마를 시작했다.
샤워기로 몸을 닦아 준 그녀는 물기를 없앤 뒤 돌아서서 옷을 입었다.
속옷 한 개와 차이나 스타일의 원피스, 딱 두개 뿐이었다.
나도 옷을 추스려 입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녀가 내민 명함에는 주소와 전화번호와 도로고후로의 명칭이 씌어져 있었고 구미코(久美子)란 이름을 볼펜으로 써넣었다.
전화 예약도 받는다는 말이 조그맣게 괄호 안에 씌어져 있었다.
계집애는 명함 뒤편을 가리켰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날짜가 명시되어 있었고 생리휴가 나흘은 붉은 볼펜으로 생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철저한 몸 관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여자들이 있지만 생리휴가 나흘을 빼면 일요일마저 없는 혹사를 당해야만 했다.
아마 여자에게 그놈의 생리마저 없으면 하루도 못 쉬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리기간 나흘을 일요일과 바꾸어 사는 여자들을 생각하면 일본이란 나라의 사람 값은 꽤 높은 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로고후로는 공창제도가 없다고 자랑하는 일본의 섹스 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일종의 변태 터키탕 종류인데 돈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 천황의 근엄한 시종장이 동경 한복판의 도고고후로에서 발가벗은 채 사망했다는 추적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공창제도보다 오히려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도로고후로는 일본의 국민성을 보여 주는 장소였다.
겉으로는 창녀가 전혀 없는 엄격한 사회인데 안으로는 섹스산업을 개방한 이중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곳이었다.
계집애는 내가 들어온 시간을 알려주고 나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시계를 가리키며 구십 분이 되었다는 얘기를 설명했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구십 분이란 시간은 매우 짧았다.
그렇게 쉽게 지나가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계집애는 담배 한 갑을 넣어 주고 앞장 섰다.
아까처럼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형님, 여기요."
병규가 대기실 커튼을 들고 말했다.
계집애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나는 등을 한번 토닥거려 주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기다리는 사내들이 여러 명 눈에 띄었다.
짧은 머리와 단정한 넥타이 차림새가 월급쟁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나가자."
"좋았습니까?"
"괜찮았어."
"나는 형님 때문에 쪽박 차고 나왔어요."
"못 생겨야 맛이 나는 법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카운터에 앉았던 여자가 문 밖까지 따라 나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뭐라는 거냐?"
"자주 오시랍니다."
"으흐흐흐흐...."
나는 음흉스럽게 웃었다.
바깥 바람은 시원했다.
주차장까지 걸으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무한 감정 때문이었다.
여자와 만나고 즐기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그놈의 힘 빠지는 관계라는 건 늘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때만 지나면 또다시 그 허망한 짓을 시도하곤 하는 게 사내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어쩐지 기분이 으스스하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벌써 새벽 두 시가 가까웠다.
"왜요?"
"나를 기다리는 애들이 많다."
"뭐요?"
"그대로 돌아보지 말고 그냥 지나쳐라. 차 안에 있으면 꼼짝없이 당한다."
병규는 야쿠자 밥을 먹은 녀석이어서 말귀를 빨리 알아들었다.
우리 차를 그냥 스쳐 지나서 엉뚱하게 울타리 구석에 있는 자동차 있는 데까지 걸었다.
"무기 가졌나요?"
병규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총신이 길다."
"어쩌죠?"
"내가 신호를 하면 자동차 문을 여는 것처럼 담을 뛰어넘어라."
"저쪽에도 좌악 깔렸을 텐데요."
"총 가진 놈은 두 놈뿐이다."
"그러면 야쿠자 애들이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골치 아프게 된 거냐?"
"여기서 날으죠."
"어디로?"
"도쿄로요."
"일 안 끝났다. 담을 뛰어넘으면 넌 곧장 지하도로 들어가라."
"거긴 더 위험해요. 차라리 저 위에 있을게요."
병규가 가리킨 곳은 높지 않은 건너편 빌딩이었다.
비상계단이 보였다.
"아무튼 그러자. 만약 서로 헤어지면 일단 호텔 앞에서 만나자. 아까 그 집엔 찾아갈 능력이 없으니까."
"아녜요. 제일 좋은 데가 하카다 역입니다. 그 안엔 사람도 많고.... 출구 오른쪽요."
"알았다."
우리는 마치 자동차를 탈 것 처럼 동작을 취했다.
"넘어라."
병규가 자동차 지붕을 타고 잽싸게 담을 뛰어넘었다.
나도 따라서 뛰어넘었다.
병규가 옆골목으로 뛰었다.
주차장 쪽에서 갑자기 시끄러워지며 이골목 저골목에서 애들이 튀어나왔다.
나는 골목 입구에 버티고 서서 병규가 무사히 빠져나갈 만큼 시간을 벌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담판이고 흥정이고가 필요없었다.
걸리면 갈기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쇠구슬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숨었다.
쇠꼬챙이 든 녀석이 기웃거렸다.
턱을 올려붙이자 기둥을 붙잡고 나뒹굴었다.
나는 쇠꼬챙이를 옆에 끼고 골목의 기둥에 붙었다.
두목인 듯싶은 사내가 큰소리로 외치며 뛰어왔다.
총을 든 두 녀석이 멀찍이 떨어져서 나를 겨냥했다.
기둥에 가려 있어서 더 접근하기 전엔 쏠 수 없다는 걸 알자 가깝게 다가왔다.
다른 애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목인 듯한 사내가 벽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주변에 무기를 든 애들이 열 명쯤 서 있었다.
애들은 이미 흩어져서 내 도주로를 막은 게 분명했다.
여기를 빠져나가려면 총 든 녀석을 먼저 없애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발짝 앞으로 나왔다.
두목인 듯한 사내가 뭐라고 소리 질렀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병규를 먼저 보낸 것이 아쉬웠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는 뜻을 그들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쇠꼬챙이를 버리고 걸어나갔다.
총 든 녀석과 무기 든 애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도 총성을 울리며 시끄럽게 하기보다는 곱게 나를 묶어가기를 원할 것 같았다.
총 든 녀석이 바싹 다가섰다.
거리는 이십여 미터였고 흩어졌던 애들이 모여드는 것으로 미루어 삼십여 명쯤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낀 쇠구슬을 손바닥에 굴렸다.
총 든 녀석과 두목인 듯한 사내와 일본도를 든 녀석을 먼저 갈기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쉭 쉭 쉭 쉭.
양쪽 손에서 거의 동시에 쇠구슬이 튀었다.
총 든 녀석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고 두목인 듯한 사내와 일본도를 든 사내는 한 발자국씩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쉭 쉭 쉭.
쇠구슬이 계속 날았다.
접근하는 녀석들이 뒤로 자빠졌다.
나는 재빨리 총 두 자루를 거머쥐었다.
벽에다 총을 세워놓고 이단옆차기로 걷어찼다.
총신이 동강나 버렸다.
쉭 쉭 쉭.
쇠구슬을 날려 덤비는 애들을 우선 제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숫자가 많아 잘못하면 당할 염려가 있었다.
그래도 애들은 흩어지기만 했지 도망가지는 않았다.
나는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끔하게 맛을 봐야 추적을 포기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골목 뒤로 돌아 주차장 옆으로 빠졌다.
애들은 내가 피신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우르르 몰려왔다.
주차장은 넓었다.
내 손에 쥐어진 몽둥이가 날렵한 춤을 추었다.
내 봉술은 무공 스님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무자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어떤 무기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한 방씩 갈기는 애들은 비명을 지르며 쭉쭉 뻗어 버렸다.
나머지 애들은 정신없이 도망가 버렸다.
두목인 듯한 사내의 멱살을 옭아쥐고 아스팔트 바닥에 메어꽂았다.
반쯤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뭐라고 악을 썼다.
처절한 짐승의 소리였다.
사람들이 눈치 채기 전에 녀석을 다잡아 앉히기는 어려웠다.
혈을 눌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한 나는 녀석을 트렁크에 실었다.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운전대가 오른쪽에 달려 있어서 낯설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운전은 할 수 있었다.
큰길로 나서자 라면 끓여 파는 포장마차가 보였다.
종이에 하카다역 이라고 써서 내밀자 도로표지판을 가리키며 곧장 가라고 일러 주었다.
일러 준 대로 표지판만 보고 달리자 큰 길가에 하카다 역이 보였다.
보수공사중인지 철재와 목재들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이 밤 늦은 시간인데도 꽤 복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