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숙의 미학 에세이 (33)
갈라,
사랑은 내게 증명하네.
당신에 대한 기억이 없음을.
나는 당신을 기억하지 않기에
당신은 변하지 않고
내 기억을 뛰어넘는 존재
당신은 곧 내 생명이므로.
-달리의 <사랑과 기억>(1931) 중에서
<기억의 영속> 살바도르 달리 1931년 캔버스에 유채 24x33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초현실과 세속의 어지러운 이중주
영감의 원천
≪어느 천재의 일기(Journal d'un génie)≫, 초현실주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책 제목이다. 그는 “나는 천재다.”라고 떠벌리고 자신이야말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주장했다. 코믹한 콧수염을 달고 엽기적인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운 좋게도 세상은 그의 허풍에 관대하였다.
달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아내 갈라(Gala 1894-1982)였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그가 초현실주의자의 길을 가는 것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53년을 달리의 아내로 살았던 갈라에 대해 그는 “갈라는 나와 꼭 닮은 사람, 바로 나다.”라고 했다. 광기를 지닌 천재 달리는 경이로운 집중력으로 미술, 문학, 영화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작업량을 소화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항상 그의 뮤즈 갈라가 있었다.
갈라와의 만남, 결혼
본명이 엘레나 디미트리에브나 디아코노바(Elena Dimitrievna Diakonova)인 갈라는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갈라 엘뤼아르 달리의 첫 남편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였고, 두 번째 남편은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였다. 1929년 여름, 스스로를 ‘축제’라는 의미의 ‘갈라’로 부르는 35세의 러시아 여인을 만났을 때 달리는 10살 연하의 25살이었다.
그녀는 19살 때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스위스로 건너가 한 요양소에 머무르다가 엘뤼아르를 만났다.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장면을 연상케 하는 만남이었다. 부부가 화가 막스 에른스트를 만났을 때, 두 남자와 한 여자는 초현실주의자로서의 예술적 공감을 나누었다. 그들은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세 주인공처럼 살았으며 이 기묘한 동거는 5년간이나 지속됐다.
쉽지 않은 관계 속에서 그들이 서로에게 지쳐갈 무렵, 청년화가 달리의 초대로 갈라는 남편과 함께 스페인의 어촌을 찾게 되었다. 달리는 갈라를 처음 본 순간 이미 그녀에게 빠져 있었다. 그리 미모라고는 할 수 없는 이 러시아 여인은 달리가 어린 시절 꿈속에서 그리던 바로 그 이상적인 여인상이었다. 우연이라기엔 신기할 만큼 갈라의 체형은 달리가 그녀를 만나기 전 유화나 드로잉에서 그렸던 여인들의 모습과 똑같았다. 심지어 이름마저도 비슷했다. “갈라가 내게는 유년기의 ‘가짜 추억’에 등장하던 바로 그 소녀, 갈루추카로 보였다. 갈라는 나의 그라디바(‘우뚝 서 나아가는 여성’), 나의 승리의 여신, 나의 아내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가 나를 치유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치유했다.”
당시 달리는 가난한 화가에 불과했음에도 갈라는 파리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바닷가 오두막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택했다. 10년간의 결혼생활 중에 세실이라는 딸을 두었던 엘뤼아르는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전남편과의 관계는 그 후로도 간간히 이어졌으며 그 외에도 그녀의 일상적인 혼외정사를 달리는 묵인하였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성적 분방함과 방관적 태도가 용인되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갈라와 달리는 53년 동안 현실과 초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의 초현실주의를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갈라와 달리는 그들의 주변에서 수많은 결혼이 파탄으로 이르는 가운데 굳건히 결혼생활을 유지하였다.
달리에게 갈라는
갈라는 대체로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으며 자기자신 외의 주변 일에 무관심했다. 예측 불허의 행동과 궤변이 수시로 돌출하는 달리를 갈라는 대부분 무표정과 무반응으로 대했다. 그러한 그녀의 심드렁한 태도가 달리는 편했다. 달리는 자신이 아무리 괴이하게 굴어도 별 반응이나 동요가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안정감을 느꼈다. 달리의 비상식적이며 비정상적인 일탈을 유연하게 감싸는 너그러움과 냉정한 내면을 아울러 지닌 갈라, 그녀의 사려 깊은 동시에 무심한 이중성이 달리에게는 꼭 필요했다.
달리의 편집광적 유약함을 잘 간파했던 갈라는 그의 심리적 안정을 유도했다. 사람의 마음을 다룰 줄 아는 재능과 사태를 꿰뚫는 명민함으로 달리의 정신세계를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고양시켰다. 갈라는 예술적 천재성 뒤에 불안한 내면이 도사리고 있는 달리를 안정시키며 달리의 초현실주의적 천재와 현실세계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현실에 서투른 달리의 무모한 도전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던 그녀는 조련사로서 달리를 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기호에 부합하는 것에도 남달랐다. 그녀의 사업적 촉수는 정확했다. 달리가 하루 12~15시간 작업하도록 시간 관리를 했고, 달리를 알리기 위해 그림을 들고 갤러리를 찾아다녔다. 달리가 생산하고 갈라가 판매하는 시스템에서 히트 상품 제조에 탁월했다.
굳건한 파트너십이 달리에게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어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이끌었다. 덕분에 이 이기적인 여자는 맘껏 사치와 자유연애를 누렸다. 세기의 엔터테이너 커플로서 그들은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며 공존했다고 할 수 있다. 상식을 넘어선 저 이상한 부부의 모습은 초현실주의 예술이 '이성의 제어'를 넘어서는 것과 닮았다. 이들 부부에게 선악과 미추의 기준은 의미가 없다.
갈라는 그의 연인, 아내, 어머니였으며 조력자이자 보호자이며 수호천사였다. 갈라는 뮤즈이자 모델이었고, 그의 정신병을 치유하는 사람이며, 구원의 여인이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 매니저였다. 달리는 유아적인 모습으로 갈라에게 매달렸다.
그녀에 대한 달리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여신과도 같은 존재이자 구원자였다. 그의 수많은 작품에서 갈라는 성(聖)과 성(性)을 함께 갖춘 여자로서 비너스, 누드, 초상 등으로 끊임없이 등장하였다. 작고 섬세한 골격과 환상적인 몸매를 지닌 갈라는 특히 등이 아름다웠다. 달리는 앵그르가 그린 누드 여인의 뒷모습 <발팽송의 욕녀>에서 영향을 받은 듯이 갈라의 뒷모습을 공들여 그리곤 했다. 또한 프란체스카를 재해석한 <포르트 리가트의 마돈나>에서 갈라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달리처럼 자기 아내를 칭송한 예술가는 없을 것이다. “갈라는 내 삶에서 결여된 체계 즉 구조를 부여한다.”며 “갈라에 대한 내 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내 아내는 본질적인 내 존재의 사슬에서 잃어버린 고리다.”라고 했다. 달리는 1930년대 초부터 자기 그림에 ‘갈라-살바도르 달리’라고 서명했다. 과연 갈라가 없었다면 오늘날 달리의 명성이 가능했을는지.
달리의 작품세계와 갈라
초현실주의라고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그림은 단연코 올리브 나무 가지에 걸쳐져 흐늘거리는 시계의 이미지다. 어느 날 갑자기 천재적 영감이 번득인 순간, 달리는 벽시계와 녹아내리는 카망베르 치즈를 하나의 이미지로 혼합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기억의 영속The Persistence of Memory>(1931)에 대해 갈라는 단언했다. “이 그림을 한 번 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이다.” 이 작품은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350달러에 구입했다. 그리하여 달리는 단번에 유명해졌다.
흘러내리는 시계와 함께 특유의 치켜 올린 콧수염을 떠올리게 되는 살바도르 달리는 1904년 5월에 스페인 카탈루냐 동북부의 소도시 피게라스에서 태어났으며 평생의 동반자가 된 갈라를 만난 해인 1929년에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기억의 영속> 이후 대표적인 초현실주의의 화가로서 그는 무의식과 상상의 세계 속에서 녹아내리는 시계와 더불어 우주가 파멸한 듯한 황량한 풍경, 사막 가운데 화석으로 변해버린 기형의 육체들 등, 이전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독특하고 기발하고 괴상한 광경들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며 대중을 열광시켰다.
모든 도덕과 지상의 질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제멋대로였는데도 사람들은 그에게 비난 대신 호기심을 보였다. 독창성을 바탕으로 뻔뻔스러운 배짱, 파렴치한 솔직함으로 광기를 지닌 천재의 이미지를 얻은 후 그에게는 자유로운 예술가로서의 삶이 주어졌다.
1940년에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간 그는 현란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영화, 발레와 연극과 오페라의 무대장치, 의상과 보석 디자인 등 문화계의 다양한 방면에 진출했다. 달리의 사인이 들어간 것은 무엇이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다. 앙드레 브르통이 Salvador Dali의 철자를 재조합해 붙여준 별명이 아비다 달러(Avida Dollars 돈에 열광하는 자)이다. “유명세와 예금잔고, 내 그림과 사고의 영향력에 관한 한 나는 이 세계의 왕이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달러는 결코 줄지 않았다.”라던 그는 현대의 마이더스의 왕이었다. 갈라가 그 모든 것을 배후조정하며 지휘하였다. 환상의 작품세계를 한껏 이용하여 세속적인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이다.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의 은밀한 삶≫(1942)을 출간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권의 자서전과 일기를 출판하여 뛰어난 지성과 문장력을 과시했다. 비록 어릿광대 노릇과 쇼맨십이 넘치는 기괴한 행동과 파격적인 옷차림으로 시선을 모으기는 했지만 사실 달리는 명쾌하고 정확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달리의 수수께끼 같은 그림 속에는 온갖 지적 향유의 세계와 은유와 상징과 환상이 함께 어우러져 단순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1974년에는 그의 고향인 피게라스에서 오늘날의 관광명소가 된 <달리 극장 미술관>을 개관하였다. ‘고가의 벼룩시장’을 닮았다는 평을 듣는 미술관은 가히 ‘창조적 혼돈’이라고 부를 만한 현대 상상력의 신전으로 스펙터클과 환상이 넘친다.
외로운 말년
1982년 달리를 남겨두고 88세를 일기로 갈라가 세상을 떠났다. 달리는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 그녀에게 선물했던 스페인의 푸볼 성에 갈라를 안치시킨 달리는 자신도 그곳에 칩거하며 모든 창작활동을 멈추었다. 파킨슨병과 자살 기도, 침실 화재 등으로 점철된 매우 비참하고 외로운 말년을 보내며 폐렴과 심장병으로 응급실을 오가다 7년 뒤 85세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작품만큼이나 삶 자체가 기이하고 환상으로 가득했던 그의 시신은 자신의 미술관인 피게라스 <달리 극장 미술관>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