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강 (외 2편)
홍일표
오래전에 죽은 사내가 떠내려가고 있다 어느 검은 지층에서 흘러나온 표정인지 마지막으로 본 희미한 빛을 물어뜯고 죽은 시커멓게 타 버린 노래들 검은 강물 위로 흘러간다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말이 되지 못한 돌멩이들만 바닥에 박혀 있다
언젠가부터 강가에는 목이 없는 새들이 숨어 산다
조각조각 깨져 강물 위에서 희뜩이는 목소리들 흑백영화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단칸방에서 홀로 숨을 거둔 그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흘러간다 술병들이 굴러가고 죽은 태양이 굴러가고 아무도 오지 않는 빈방이 굴러가고 환한 대낮인데 저녁은 아직 멀었는데 카페의 늙은 악사는 이곳에 없는 봄을 연주한다
저무는 해는 팔다리가 없는 고독을 증언하고 강물은 봄의 악보를 받아 적으며 중얼중얼 흘러간다
매일 걷던 길인데 중저음의 재즈처럼 낮고 천천히 흐르는 강물이 왜 검은빛이었는지 한쪽 눈을 가진 사람들이 왜 어둠뿐인 밤의 짧은 생을 수장시켰는지
외전(外傳)
눈을 감아 봐 빗소리를 데리고 비가 오잖아 비가 그치면 빗소리는 어디 가나
눈을 떠도 여기는 칼바위 오르는 길 조금 전의 심장 조금 전의 빗소리와 함께 북한산 어디쯤
산 아래 초등학교 앞에서 솜사탕으로 빚은 구름 한 송이 한 입 한 입 베어 먹는 아이들 와와, 훗날은 점점 부풀어 올라 달콤해지지 기어코 구름이 아이들을 삼키는 날이 오지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마 너는 밤마다 망명 중이라고 반딧불이처럼 어디론가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는 중이라고 몸의 불을 끄고 어둠도 몰라보는 어둠이 되는 순간 너는, 너의 미래는 반짝 눈을 뜨지 김수영이 끌고 가던 더럽고 냄새 나는 골목 어느 귀퉁이에서
크고 둥근 하늘이 타전하는 빗방울 문자들 사방으로 흩어져 방금 스쳐간 공중의 인기척처럼 빗소리와 더불어 총총히 사라지는
등대
기념비 하나 세워놓고 왔지 붉게 타는 서른 살이라고 불렀지
저만치 혼자 서서 바다의 바깥을 바라보았지 꿈꾸듯 아니 누군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으면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고독의 단단한 등뼈 곧추세우고 있는 너는 밤마다 환하게 불 켜는 심장
너의 눈빛에 홀려 다가오는 배 한 척 있었지
밤새 눈을 빛내며 설레던 너를 비켜 갔지만 흔들리지 않았지 너는 너의 어두운 중심은
꺼지지 않는 불기둥 모두 떠난 바다 끝머리에서 서른 살의 표정으로 오늘도 혼자 우뚝하지
빛의 긴 혀로 먼 곳을 핥으며 차가운 몸 하나 오래 불타고 있지
―시집 『조금 전의 심장』 2023. 4 ---------------------- 홍일표 /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청소년 시집 『우리는 어딨지』,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