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암사 花巖寺
움츠린 내 몸의 거추장스러우 것들을 바람에 씻기듯 털어내며 모처럼 걸음을 걷는다. 길은 잘 다듬여져 있고, 제법 호젓한 느낌이다, 걸음이 가볍다. 이런 길에서 말이란 공허한 것이다. 그냥 침묵할 뿐이다. 이 침묵을 깨는 소리 하나 들려온다. 이름 모를 새 한마리이다. 하지만 그 지저귐은 하나의 감동이다. 이 낯모를 새는 상상과 환영으로 흐르는 사색 속으로 나를 끌어간다.
화암사 창건 내력
694년 (신라 진성여왕 3)에 일교국사(一敎國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부분적인 중건과 중수를 거쳐 1425년(세종 7)에 해총(海聰)이 중창하였다. 불명산의 원시림이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이 곳에서 원효대사, 의상대사가 수도하였고, 설총(薛聰)이 공부하였다고 한다. 화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의 기록인 " 화암사중창비문 "에 의하면 신라시대인 7세기 경, 원효(元曉), 의상(義湘) 두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행하였다고 한다. 중창비에 전하는 창건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의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두 조사(祖師)가 중국에 유학을 갔다가 도(道)를 얻고 귀국하여 이곳에 주석하였다. 두 스님은 사찰을 짓고 머물렀는데, 절 법당의 주불인 수월자용(水月姿容)보살은 의상대사가 도솔산에 수행하러 갔다가 친견하였던 지용과 등신(等身)으로 조성한 원불(願佛)이었다. 절의 동쪽 고개에는 원효대(元曉臺)라는 법당이 있고, 절의 남쪽 고개에는 의상암(義湘庵)이라는 암자가 있으니 모두 두 스님이 수행하던 곳이다.
비문의 내용처럼 화암사는 당시 원효, 의상스님의 수행처로 알려져 있고, 사찰의 동쪽과 남쪽고개에 원효대와 의상암이라는 암자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의 연혁은 찾기 어려우나 고려시대의 문인 백문절(白文節)이 이곳에 들린 후 남긴 詩가 " 신동국여지승람 "에 전하여, 고려 말에도 화암사에 법등(法燈)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어지러운 산들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 소나무와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 백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밟기조차 어렵구나 / 말 버리고 걸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 길을 이어주는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더뎌 나오고 / 열발짝 못 걸어서 소나무 사립문 있는데 / 두드리자 산새들이 모두 날아가네 /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 10년 홍진(紅塵)에 일만가지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 어찌하면 이 몸도 얽메인 줄 끊어버리고 늙은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 볼까 / 산에 사는 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에 나올 기약이 없고 / 세속 선비는 다시 올 날 알지 못하니 /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하여 두리번거리는데 / 소나무 위에 지는 해는 세 장대 기울었도다
그 후 부분적인 중건, 중수를 거쳐서 이어 오다가 1425년(세종 7) 관찰사 성달생(成達生)의 뜻을 따라 주지 해총(海聰)이 중창하였다. 이때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임진왜란 때 극락전 등 몇 개의 당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1611년 (광해군 3) 성징(性澄)이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에도 중창하였다.
예전에 ' 곱게 늙은 절집 '이라는 책을 본적이 있다. 큰 절집이 아닌 암자나 작은 절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 책에서 첫 번째로 소개한 절집이 불명산(佛明山) 화암사(花巖寺)이다. 작가는 화암사를 소개하면서 부제목으로 ' 하늘이 천장이고 천장이 하늘이다 '라고 하였다. 대체 어떤 절집이기에 이런 표현을 했을까 궁금해 하였다.
그 절집은 전라북도 완주에 있다. 그날 이후로 화암사는 내 마음 속에서 꼭 가봐야 할 절집이 되었다. 그러나 절집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공간적(空間的) 거리도 있었지만 마음에 둔 거리도 있었다. 완주(完州)를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화암사는 정말 가고 싶을 때 마음속에 간직하고만 있었다. 사실 그 절집은 혼자 가고 싶었고 결국 혼자 갔다.
화암사의 보물들
임진왜란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국내 유일의 하앙식(下昻式) 건축 양식인 극락전(보물 제663호), 한국의 고대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우화루(雨花樓.. 보물 제662호)를 비롯하여 동종(銅鐘 .. 전북 유형문화재 40), 화암사 중창비(전북 유형문화재 94)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 앉아 / 곁눈질 한 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 세상한테 ?기어 산 속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시인 안도현이 화암사를 두고 읊은 詩 " 화암사가 있는 풍경 "의 일부분이다. ' 화암사중창비 '에 보면 " 바위 벼랑의 허리에 너비 한 자 정도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가면 이 절에 이른다. 골짜기는 가히 만 마리 말이 갈무리할 만큼 넓고, 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은 성(深廓)이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것이요, 땅이 감추어둔 도인(道人)의 복된 땅이다 "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렇듯 화암사는 입지가 매우 험난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고 은둔자마냥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그러던 화암사가 은둔자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사람들의 발길을 허용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이었다. 화암사 극락전이 오늘날 고건축 분야애서 해방 이후 최대의 발견이라는 " 하앙구조 (下昻構造) "를 지닌 건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花岩寺 가는 길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1078번지... 화암사로 가는 길은 입구가 흐릿하다.그래서 더욱 눈을 번쩍 뜨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17번 국도 고산~운주 간 용복마을을 지나 4.5km. 갈림길마다 안내판이 있지만 다음 안내판이 나와야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다.
구불구불 시멘트길이 밭머리 지나고 흙벽집 옆구리도 살피고, 시골처녀 같은 감나무, 대추나무 허리 휘감았다가 놓는다. 그렇게 길에 얹혀 오르다보면 자동차 10여 대 세워 둘 수 있는 주차장이 나온다. 화장실 한 칸 덩그라니 웅크리고 있는 공터이지만 목욕에 앞서 먼저 알몸이 되어야 하는 목욕탕 탈의실처럼, 이곳에서는 차도 버리고 핸드폰도 꺼야 하고, 시계도 풀어야 한다. 그렇게 화암사를 가야만 한다.
주차장으로부터 1km 남짓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화암사이다. 천년이 훨씬 넘은 절집이니 어림잡아도 1km에 1년이다. 천년을 오르는 길치고는 경사가 완만하다. 오르는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노폭이 좁은 듯하다. 일행이 있어도 혼자가 되는 길이다. 길가에 나무들이 명찰을 달고 있다. 고로쇠나무, 갈참나무, 느타나무, 떡갈나무, 편백나무 ... 키가 큰 나무가 명찰을 달고 있으니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그렇지만 내색은 못하고 낯선 방문객도 제 이름을 낮게 일러 주어야 할 것 같다. 이래서 친구가 된 셈이다.
도시의 길이 컴퓨터 워드 글씨라면 이곳의 길은 손으로 쓴 연필 글씨이다. 엎드려 침을 묻혀 쓴 연필 글씨가 구불구불 계곡을 타고 산기슭을 오른다. 침묵과 고요 사이 계곡물만 음표를 그렸다가 지웠다가 한다.
오르다 보면 계곡물과 오솔길이 몇 번 교차하게 되는데, 전봇대가 누워 다리가 되고, 건축공사장에서 쓰는 비계(飛階)용 철판이 다리가 되던 길이 말끔하게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하였다. 누워있는 전봇대를 뒤뚱뒤뚱 건너던 것보다 한결 편해졌는데도 왠지 모를 서운함은 무슨 심사일까? 바위 절벽에 다다르니 위압적인 철제 계단이 폭포 위로 벼랑을 감싸고 있다. 애써 철제 계단을 외면하고 바위 절벽 위쪽으로 옛길을 더듬더듬 찾아 간다. 조심조심 난간에 서니 시야가 갑자기 확 트인다.
지나온 길이 훤하게 보이고, 산의 능선과 협곡의 골짜기가 밀착해서 주고받는 곡선이 드러나고 있다. 이곳은 남들 눈에 잘 띄지 않아 사랑이 꽃피는 연인(戀人)들이라면 바위 위 단단한 입맞춤 새겨 두기 좋은 곳이다. " 화암사 (花岩寺) "라는 절 이름에 대한 전설이 바위 위의 꽃 이야기인 것을 상기해 보면 묘한 울림이 생긴다. 난간을 뒤로 하고 폭포소리를 지나친다. " 잘 늙은 절집 " 조용하게 앉아 있다. 대둔산 지맥인 불명산 시루봉 중턱에 자리한 금산사의 말사 화암사.
움츠린 내 몸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바람에 씻기듯 털어내며 모처럼 많은 걸음을 걷는다. 길은 잘 다듬어져 있고 제법 호젓한 느낌이다. 걸음이 가볍다. 이런 길에서 말이란 공허(空虛)한 것이다. 그냥 침묵할 뿐이다. 이 침묵을 깨는 소리 하나 들려온다. 이름 모를 새 한마리이다. 하지만 그 지저귐은 하나의 감동이다. 이 낯모를 새는 상상과 환영(幻影)으로 흐르는 사색 속으로 나를 끌어간다.
하여 지금 내가 보는 사물들과 내 기분은 하나가 된다. 눈은 맑아지고 하찮다고 여기던 것들이 소중함으로 다가선다. 그러기에 이 땅의 진정한 시인(詩人)은 이들 낯모를 새이다. 그런 걸음을 식히는 바람 몇자락이 스치고 간다. 그리고 길은 골짜기로 파고든다.
하늘을 질경거리며 곡절을 삭히며 사는 지친 발걸음들을 위해 만들어 놓았을 길을 말이다. 산길은 어둡고 골은 갈기 갈기 찢어져 폭포는 바위 깃을 세우고 그곳을 걷는 나는 스스로 부서지는 가슴이 된다. 골이 깊을수록 마음은 갈기를 찾아 가닥을 잡고 삽질을 한다. 아직도 자기중심적 욕심을 놓지못하고 사는 나를 ... 화암사 가는 길은 한 마디로 요새로 가는 길과 같다. 대낮에도 침침한 숲 터널을 지나고 음습한 계곡을 지나고 철계단을 몇번씩 지나야 한다. 화암사는 때 묻지 않는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절이다.
철제 계단 ... 遺感
불명산 화암사 오르는 길은 고요하다. 그 고요 속 선정에 든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들이 제 몸을 조금씩 숲 안쪽으로 들여앉혀 만들어 낸 사잇길을 걸어오르노라면 문득 한산시(寒山詩) 한 구절이 마음을 스쳐간다. 금일귀한산, 침류겸세이(今日歸寒山,枕流兼洗耳) ... 내 오늘에야 비로소 한산에 들어 개울을 베고 귀를 씻노라.... 귀를 씻는다는 것은 아마도 세심(洗心)을 의미할터, 나 또한 옛 사람 한산자(寒山子)를 흉내내어 맑은물 몇 줌 떠올려 귀를 씻고 마음의 티끌을 씻어낸다. 내 번뇌의 무게는 과연 얼마나 가벼워졌을까. 하여튼 계곡이 앞서는가 싶으면 어느 새 산길이 앞서고, 산길이 앞서는가 싶으면 계곡이 따라 잡는다. 산길이 점점 가팔라졌다. 크고 작은 폭포들이 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갑자기 눈 앞에 흉물스러운 붉은 철제 계단들이 출몰하고, 이 느닷없는 풍경의 반전 앞에서 나의 도도한 감흥은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1983년 폭포 위로 140여 개가 넘는 철제 계단이 놓임으로써 화암사를 찾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일주문이나 천왕문, 금강문이 따로 없는 화암사는 절에 이르는 험난한 진입로가 일종의 산문(山門)의 구실을 하였었는데, 이 계단이 생김으로써 절에 대한 접근성은 훨씬 용이해졌지만 그 대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경건함과 성스러움은 스러져 버렸다.
더구나 이 붉은 철제 계단 아래 감추어진 폭포들이야말로 화암사가 보여 줄 수 있는 최대의 절경이다. 이제 수십 길 폭포가 보여주는 장엄한 풍경은 철제 계단 아래로 숨어버려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옆 계곡을 거슬러 올라 벼랑 끝으로 나 있는 옛길을 따라 걸어 보았다. 그렇게 힘들다거나 별로 위태로운 길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철제계단을 놓은 것일까?
화암사 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숲으로 난 길이다. 시원한 물소리를 벗 삼아 터벅터벅 걷는다. 작은 계곡이지만 주변은 깊은 산속이다. 계곡을 따라 걸어가다 다리를 만나면 계곡을 건넌다. 길이라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이 없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다가서면 다시 길이 이어진다. 바위벼랑이 협곡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물이 닿지 않은 곳을 조심히 밟아 가면 길이 된다.
다리를 건너고 협곡을 지나가기를 몇 번 하면 커다란 철계단이 나온다. 계곡 위를 관통하는 철계단은 문명의 힘으로 자연을 제압하듯 당당하게 서 있다. 잠시 멈춰 생각에 잠긴다. 철계단은 최근에 만들었겠지만 예전에는 어디로 올랐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계곡 위로 녹슨 난간이 살짝 보인다. 그렇다고 옛길을 걷고 싶은 생각은 없다.
철계단 중간에는 마음에 담았던 시(詩)가 걸려 있다. 안도현 시인이 쓴 ' 내 사랑, 화암사 '이다. 철계단을 다 오르면 작은 폭포가 나름 웅장한 척하면서 반긴다. 폭포를 지나 고개를 들면 절집이 나타난다. 와 ! 이런 곳에 절집이 숨겨져 있다니 ... 하늘 아래 절집 지붕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다. 그런데 정말 수수하다. 절로 들어가는 일주문이 따로 없다.
통나무 몇 개 붙여 놓은 작은 다리를 건너면서 절집 영역으로 들어선다. 처음 만난 누각(樓閣)에는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라는 현판이 붙었다. 단청이 없는 말쑥한 누각, 그 옆에 돌계단이 있고 문(門)이 있다. 보통 누각이 있으면 그 아래를 통해 들어서는데, 화암사는 우화루 누각 아래를 일부러 막아버렸다고 한다. 절집으로 들어가는 문이 정말 소박하다. 집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대문에는 시주자 명단을 적었다. 문을 들어서니 한옥(韓屋) 같은 정겨운 느낌이 드는 절집이다.
시인(詩人) '안도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북 완주 불명산 화암사는 ' 잘 늙은 절 '이다. 안도현에게 화암사는 특별한 절이었나 보다. '화암사 내 사랑'과 ' 화암사, 깨끗한 개 두 마리 '라는 시(詩)와 ' 잘 늙은 절, 화암사 '라는 수필도 썼다. 자그마한 산골마을에 숨어 있는 화암사를 알리게 된 것도 사실 그의 시 때문이었다.
잘 늙은 절, 화암사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절치고 사실 잘 늙지않은 절이 없으니 무슨 수로 형용하겠는가.. 심지어 잘 늙지 않으면 절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심사도 무의식 한쪽에 풍경처럼 매달려 있는 까닭에 어쩔 수가 없다.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화암사가 그러하다. 어지간한 지도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기를 꺼리는, 그래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같은 절이다. 십여년 전쯤에 우연히 누군가 내게 귓속말로 일러 주었다. 화암사 한 번 가보라고, 숨어있는 절이라고, 가보면 틀림없이 반하게 될 것이라고....
당시만 해도 화암사를 찾아 가는 길은 반듯하지 않았다. 전주(全州)에서 대둔산(大芚山)으로 가는 국도를 타고 가다가 오나주군 경천면 소재지 근방에서 오른쪽으로 꺾는 길을 찾는 것도 몇차례 두리번거려야 가능한 일.. 그러고도 작은 마을과 논밭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놓치지 않아야 했다. 사람살이의 나지막한 풍경들을 다 살펴보고 난 뒤에 찾아 오라는 듯, 화암사는 그렇게 꼭꼭 숨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화암사 가는 길, 좁다란 숲길 한 쪽에 가도 얼레지꽃이 지천이었다. 바람난 처녀처럼 꽃잎을 까뒤집은 꽃, 그들도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절 구경하러 산을 올라가나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길이 뚝 끊기고 계곡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막혔다 싶으면 외나무다리가 길을 다시 이어주기도 한다.
마을을 지나 올 때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만큼 걷다가 보면 이 번에는 벼랑이 턱하니 발길을 가로 막는다. 벼랑에다 세운 철제다리를 타고 올라와야 화암사는 자기 자신을 보여 주겠다고 한다. 절을 만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니 ! 문득 화암사가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고 지은 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 입구에 있을 법한 일주문(一柱門)도, 사천왕상(四天王像)도 없이 경내로 들어 서려면 작은 門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 잊을 수 없다. 세월에 닳은 문턱을 처음 넘어 설 때, 나는 마치 어릴 적 외갓집 대문을 넘어 마당으로 발을 들여 놓았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ㅁ'자형 구조를 가진 경내로 들어가면 그 곳은 절이 아니라 여염집의 편안한 안마당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 때의 적막은 또 얼마나 큰 위안인가.
전에는 거기에 두마리의 흰둥이가 살았는데 지금도 그 아들이나 손자뻘되는 녀석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 녀석들은 뒷산 다람쥐가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훤히 다 듣는 듯 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는 쌩 하니 달려 갔다가 소득없이 터덜터덜 돌아오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린다.
불명산(佛明山) 깊은 곳에 숨어있는 화암사는 일주문도 없는 작은 절집이지만 속인(俗人)들에게 녹녹하게 경내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골짜기를 따라 개울을 여러 차례 건너고, 좁은 바위틈을 지나며 100여 미터 가까운 철계단을 오른 후에야 겨우 돌담 하나를 보여주는 고고함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詩人)이란 참 묘한 존재이다. 한량없이 천진스러운가 하면 때로는 능글맞고 뻔뻔하기 짝이 없다. 화암사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 않겠다는 다음의 시(詩)는 어떤가 ? 정녕 그럴 양이면 그에 대한 시를 발표하지 않거나 사람들이 관심도 갖지 못하게 메모하듯 몇 자 긁적거려놓으면 될 걸, 굳이 실제의 절보다 산보다 더 훤칠한 시를 만들어 세상천지에 퍼트리는 까닭이 무엇인가. 기품과 맛깔스러움을 다 갖춘 시를 보고도 찾아가지 않고 배기는지 보자. 그 반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의 詩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 앉아 /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 세상에서 ?기어 산 속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 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 잘 늙은 절 한 채. /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아 다니기만 하습니다. / 화암사, 내 사랑 /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화암사는 지나쳐 갈 수 있는 절이 아니다. 되돌아 나와야 하는 절이다. 화암사를 찾는 이는 천년이라는 묵은 시간과 자연의 일부인 화암사 풍경에 푹 빠졌다가 빨랫감이 마르듯이 천천히 2010년으로 되돌아 나온다. 화암사를 향하고 있던 마음이 이제는 세상을 향하게 된다. 이제 한동안 화암사는잊고 살게 되리라. 그것으로 화암사가 해야 할 몫은 끝이다. 화암사의 얼굴은 잘 꾸며지고 가꿔진 모습은 아니다. 누가 옆에 서도 어색하지 않은 민낯의 제 어미 얼굴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화암사를 찾고 찾으며 그 모습 변치 않기를 바라게 된다. 그곳이 화암사이다.
화암사, 깨끗한 개 두 마리 ... 안도현의 詩
화암사 안 마당에는 스님 모시고 노는 개 두 마리가 있습니다. 그 귀가 하도 맑고 깨끗해서 뒷산 다람쥐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훤히 다 듣습니다.
간혹 귀 쫑긋 세우고 쌩하니 달려갔다가는 소득없이 터덜터덜 돌아 올 때가 있는데 귓전에 닿은 소리가 덕지덕지 욕심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냥 한번 그래 본 것입니다.
바람이, 일 없이 풍경소리를 내는 물고기 꼬리를 그저 그냥 한번 툭 치고 가듯이
중창비 重創碑
화암사(花岩寺)의 중창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비(碑)로 1441년 (조선 세종 23)에 성달생 (成達生. 1376~1444)이 비문을 짓고, 1572년(선조 5)에 세운 것이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130cm, 넓이 52cm, 두께 11cm의 크기로 앞뒤 면에 모두 해서체로 된 894字가 쓰여 있는데, 상당부분의 글씨가 마멸되어 완전한 해독은 불가능하다.
화암사 뒤쪽 언덕 위에는 작은 비석 하나가 있는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94호, 화암사 중창비(重創碑)로 조선 세종 때 다시 세운 화암사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1572년(선조 5)에 세웠다.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
조선 초 관리로 있던 성달생이 1417년(조선 태종 17)에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던 성달생이 절을 세우고자 터를 찾던 중, 신라시대에 화암사가 자리했던 이 자리가 산 좋고 물이 맑아 적지(適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곳은 원효스님과 의상대사가 머물러 修道하였던 곳이며, 절터의 동쪽에는 원효스님이 도를 닦았다는 원암대(元庵臺)가, 남쪽에는 의상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의상암(義湘庵)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성달생은 이 같은 말을 듣고 세종 7년(1425) 이곳에 화암사를 다시 세웠다.
또한 화암사 앞에는 의상대사가 서역(西域 ..티베트)에서 가지고 온 전단향목(栓檀香木)의 씨를 심어 기른 전단목(栓檀木)이 있었는데, 이것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 옮겨가서 궁전 마당에 심게 되었다는 것에서 화암사의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화루 雨花樓 ... 보물 제662호
우화루의 우화(雨花)는 '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 '는 의미이다. 그 유래는 '법화경'으로 특히 석가모니부처의 설법과 관련이 있다. 법화경서품에 ' 이때에 하늘에서 만다라화(曼陀羅華), 마하만다라하(摩詞曼陀羅화), 만수사화(曼殊沙華), 마하만수사화(摩何曼殊沙華)가 부처님 좌상에 여러 대중 앞에서 비 오듯 우수수 쏟아졌다 '는 내용이 있다. 또 법화경에 나타난 사어로운 여섯 장면 즉 법화육서(法華六瑞) 중에 세 번째가 우화서(雨畵瑞)로 석가세존께서 법화경을 서하려고 삼매에 드셨을 때 하늘에서 4종의 꽃이 비 오듯 쏟아지는 장면을 말하다.
화암사에는 그 흔한 일주문도 없다. 우화루 옆 작은 대문이 경내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지방은 움푹 파인 달문이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금강역사나 사천왕은 보이지 않는다. 문을 넘어서면 우화루와 극락전이 남북(南北)으로, 불명당과 적묵당이 동ㅅ(東西)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입구(口)자형으로 배치되어 각 건물들은 지붕이 서로 연결되거나 거의 붙어 있어 아늑하기만 하다. 사찰이라기 보다는 살림집 분위기가 더욱 짙다. 외곽으로 극락전 왼쪽에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하라는 철영제가 있고, 적묵당 뒤편 바위 위에는 산신각 그리고 우화루 옆으로 명부전이 자리잡고 있다.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라는 뜻의 우화루(雨花樓)는 극락전의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문(樓門)형식인데, 정면만을 누문형식으로 하고, 뒷면은 단층의 건물로 조성한 반누각식(半樓閣式)의 건물이다. 일반적으로 서방정토의 입구로서의 누각들은 누하(樓下) 진입을 허용하지만, 화암사 우화루라는 누각은 아예 석축으로 쌓고 막아버려 진입을 원천봉쇄해 버렸다. 그러므로 부처가 계시는 불국토인 절집으로 들어가려면 우화루 옆 문간채에 난 작은 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문턱과 문미가 둥글게 휘어진 이 작은 대문의 아름다움은 밖에서 보다 안에서 밖으로 내다 볼 때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동그란 문턱이 턱을 괴고 있기 편해서일까. 이곳 화암사에 적을 두고 있는 견공 한 마리는 틈만 나면 문턱에 턱을괴고 앉아 있다. 시인 안도현은 그 견공의 귀가 하도 깨끗해서 뒷산 다람쥐가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다 듣는다고 표현하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견공도 산중 생활이 적적하고 무료하기 때문이 아닌 듯 싶다.
정면 지층(地層)의 기둥은 4칸이나, 2층에서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안과 밖이 모두 삼출목(三出目)형식의 다포양식이며, 공포 부재의 조각솜씨 등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양식이 가미된 느낌이다. 우화루 옆 작은 대문이 경내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지방은 움푹 파인 달문이다. 문을 넘어서면 적묵당과 우하루, 극락전, 불명당이 사각형 마당 귀퉁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법당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보니 절 같지않고 살림집에 온 느낌이다.
花岩寺의 유래
신라의 어느 왕에게 예쁘고 마음씨 또한 고운 딸 연화(蓮花)가 있었는데, 어느날 공주가 병에 걸려 점점 심해져만 갔다. 온갖 치료와 약이 효험이 없어, 공주의 얼굴은 야위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공주는 이윽고 한달이 다 되도록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왕은 딸의 회복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가까운 절에 들어가 정성스레 불공을 드렸다. 궁궐에 돌아 와 잠이 든 왕은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에 나타난 것은 왕이 다니던 절의 부처이었다. 얼굴에 연꽃같은 환한 웃음을 머금은 부처는자비로운 모습으로 왕에게 말했다. "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하여 공주의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알려 줄터이니 그리 알라 "
부처는 왕 앞에 조그마한 연꽃을 던져준 뒤 사라졌고, 왕은 조심스럽게 꽃을 받아 쥐고 기뻐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왕은 곧 신하들에게 명하여 연꽃을 찾도록 하였으나, 추운 겨울에 연꽃을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은 전국에 연꽃을 찾으라고 엄명하였는데, 이윽고 지금의 완주군 운주면 깊은 산봉우리 바위 위에 연꽃이 있다는 소식이 왕에게 보고되었다. 겨울에 연꽃도 신기하지만, 연못도 아닌 바위 위에 연못이라! 왕은 필시 부처가 내려주신 연꽃이라 믿으며 신하이게 조심스레 가져 올 것을 명하였다.힘겹게 산에 올라 잠시 바위 뒤에 숨어서 연꽃을 지켜 보았다. "아무래도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여기 숨어서 누가 연꽃을 키우는지 알아보자.."
한참이 지난 후 산 밑의 연못 속에서 갑자기 용 한마리가 솟아 오르더니, 입으로 연꽃에 물을 준 후 다시 연못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떨전 신하 중에 담력이 있는 신하 하나가 연꽃을 꺾어 왔고, 이를 먹은 공주는 씻은 듯이 병이 나아 여름 아침의 연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이에 왕은 부처의 은덕에 감사하며 연꽃이 있었던 바위 근처에 커다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바위 위에 꽃이 피었다고 하여 화암사(花岩寺)라고 하였다.
우화루 雨花樓
꽃비가 내리는 누각(樓閣)이라는 뜻의 우화루는 극락전의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문(樓門)형식인데, 벙면만을 누문형식으로 하고 뒷면은 단층건물로 조성한 반루각식(半樓閣式)의 건물이다.
정면 지층(地層)의 기둥은 4칸이나 2층에서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안과 밖이 모두 3출목형식(三出目形式)의 다포양식이며, 공포 부재의 조각솜씨 등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양식이 가미된 느낌이 들고 있다. 우화루의 내부는 남쪽 중앙에 고주(高柱) 2개를 세워 대들보를 그 위에 얹고 한쪽으로 이어진 퇴량(退梁)은 평주(平柱) 위 공포에 얹게 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대들보와 고주 위에서는 화반형식(花盤형식)의 포작(包作)을 짜서 동자기둥(童子柱)의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건물의 외부를 보았을 때의 樓上 남면에는 판벽을 막아 각 칸 사이 중앙에 판문을 달았으며, 양쪽을 판멱으로 막고 북쪽은 벽이 없이 통하여 극락전을 바라 볼 수 있게 하였다. 1981년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성달생(成達生)이 중창한 이래 1711년(숙종 37)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건축 양식에 있어서 극락전과 비슷한 점을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 보물 제6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화루 바닥의 높이는 안마당의 높이와 같다. 그리고 우화루 내부가 마당쪽으로 툭 트여 있다. 마당이 우화루 내부로 연장되어 있고, 그것은 마당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기도 하다. 안 그래도 사방건물로 둘러싸여 있고, 식물 한 그루 심지 않은 안마당이어서 건물의 내부인지, 외부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우화루가 이러한 현상을 크게 부추기고 있다. 우리 건출물 공간배치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선이지 우화루 내부는 오목조목 조화롭고 화려하기 보다는 뻥 뚫려 있는 훤칠함을 지니고 있다. 내부 천정이 외부 마당의 천정인 하늘의 뻥뚫림과 연장해 있다는 의식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부 고주(高柱)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평주는 퇴보로 연결되어 있다. 대들보와 중보와 마루도리의 간격이 크게 넓다. 장식하지 않은 대공으로 이들을 받들고 있다. 훤칠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는 이런데에서 나타난 것이다.
밖에서 보면 2층 누각이었던 우화루가 마당에 들어서면 단층 건물이다. 기둥에 눈이 툭 불거진 목어(木魚)가 내장을 비운 채 매달려 있다. 물고기 모양에 충실한 여느 사찰의 목어와 달리 머리 모양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 안쪽 기둥 옆구리에 크고 투박한 목탁이 운치를 더 하고 있다. 화암사 목어는 형태상으로 순천 선암사의 것과 약간 닮아 있는 것으로, 단청이 완전히 벗겨진 탓인지 소박하다 못해 약간 애처롭게 느껴지기까지 하고 있다.
우화(雨花)란 석가모니부처가 영축산에서 설법을 할 때 하늘에서 흰 연꽃, 붉은 연꽃 등의 꽃비가 내린 상서로운 현상을 말한다. 이에 연유하여 스님이 불경을 설하는 곳을 우화대(雨花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축산은 일명 영취산이라고도 하는데, 고대 인도의 왕사성의 동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산 정상에 독수리모양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는 그 산에 독수리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기사굴산, 영산이라고도 부른다.
누각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 형식의 집을 말한다. 누(樓)는 궁실 원림(園林) 속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사대부들이 야외에서 풍류와 휴식을 즐기는 장소로 일반화되어 풍광이 좋은 산야에 있던 누각이, 사찰의 구성 요소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이다.
보통 일주문과 중심 법당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사례가 많아 다락식인 경우 누각 밑을 통과하여 법당으로 진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찰의 누각은 만세(萬歲), 보제(普濟), 안양(安養), 침계(枕溪).. 등의 이름으로 불교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도교(道敎) 또는 유교적 정서가 강한 것이 많다. 하여튼 사찰의 누(樓)는 그곳에서 설법을 행한다는 점에서는 법당과 같은 성격을 지닌 당우이다. 이곳 우화루는 고승대덕이 그 위에 올라 설하는 심히 깊고 미묘한 부처님의 법을 듣고 중생들의 환희에 벅차 있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목탁 木鐸
목탁 (木鐸)의 유래
옛날 어느 도력이 깊은 스님이 몇 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다들 훌륭하였지만 그 중 한 제자는 제 마음대로 생활하며, 계율을 어기는 행동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그 업으로 죽은 뒤에는 물고기의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나무가 자라나서 여간 큰 고통이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자란 물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스승이 선정(禪政)에 들어 그 물고기의 前生을 살펴보니 병이 들어 일찍 죽은 그 제자인 줄 알았다. 생전의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물고기로 태어나 고통을 받는 것이었다. 가엽이 여긴 스승은 천도제(薦度齊)를 베풀어 물고기의 몸을 벗게 해 주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큰 은혜에 감사하며, 다음 생애에는 참으로 바르게 살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등에 있었던 나무를 베어 물고기모앵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바랬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江이나 바다의 물고기를 천도할 좋은 인연이 될 것이란 것이었다. 이렇게 물고기 등에서 자라난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목탁(木鐸)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목탁은 절에서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또는 식사시간을 알릴 때에 사용하며 일상의 여러 법회에 사용된다.
또 한편으로 물고기는 잠을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까닭에 수행자도 이처럼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물고기 모양의 목탁을 만들어 치게 하였다고도 한다. 목탁은 그 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나태와 무지를 깨우치는 기능이 있다.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목탁이란 말도 있지만...
가람의 배치
화암사는 극락전과 우화루가 북과 남으로 마주 보고, 적묵당과 불명당이 동과 서를 마주보고 있는 "ㅁ"자형으로 당우를 배치한 아담한 절집이다. 보물 제613호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이다. 잡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 볼 때 가운데 기둥의 높이가 제일 낮고 추녀 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귀솟음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건물 양쪽 어깨가 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지양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 목재의 부족으로 지붕을 많이 빼지 못하게 되자 건물 측면을 바람으로부터 막아주기 위하여 풍판(風板)이 생겨났는데, 조선시대에 다시 지어진 화암사 극락전에도 역시 지붕 양쪽 박공 밑에 역시 풍판을 대었다. 좁은 건축공간을 활용하다 보니 적묵당의 지붕 끝이 극락전의 풍판을 뚫고 들어오게 되었다.
우화루 맞은 편으로 극락전이 하늘을 이고 서 있다. 내부에는 범종과 관세음보살을 모신 닫집이 있다. 극락전은 처마를 길게 늘이기 위한 건축 기술 중 하나인 하앙구조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법당이라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본다. 극락전 지붕이 요사채와 적묵당 지붕까지 넉넉하게 덮어주고 있다. 그리고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기와선이 은은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뾰족하거나 화려하고 웅장한 일본이나 중국의 기와선과는 달리 우아한 한복의 線이 겹쳐지고 있다.
적묵당 마루에 걸터 앉아 화암사 마당에 떨어지는 햇살을 보면 한동안 해탈의 경지를 맛보게 된다. 국가적 보물과 문화재를 여럿 간직하고 있는 화암사를 하나하나 살펴 보는 일도 좋겠지만, 켜켜이 쌓인 천년이라는 시간과 그 사이 자연과 하나가 된 화암사 풍경에 들어 앉아 보는 일로도 족할 것이다. 누구나의 속사정.. 침묵으로 묻고 고요로 답하고 있는 화암사이다.
극락전 極樂殿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화암사 극락전은 1981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후 " 화암사중창기 "에 의하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생존하였던 무과출신의 성달생(成達生)이 1425년(세종 7) 이 사찰을 중창하여 개채(改彩 ... 불상에 채색을 다시 하는 것)하고 확장할 것을 기획하여 1429년에 마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극락전은 그 앞에 마당을 건너 남북축을 맞추어 마주보고 있는 우화루와 같이 세워져 있는데, 마당에서 75cm 높이의 잡석 기단 위에 자연석의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지름 약 60cm되는 기둥을 맡에서부터 민흘림으로 세웠다. 내부는 내고주(內高柱)가 없는 통간 대량(大梁)을 걸쳐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화암사의 중심 법당은 극락전이다.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집이다. 편액이 다른 절집과는 달리 한자씩 떨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절집이다. 마주보고 있는 우화루(雨花樓)와 아담한 안마당을 만들고 있다. 동서쪽에도 건물이 있어 마당은 포근하게 건물로 둘러 싸였다. 마당이 건물 내부인지 외부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극락전은 그리 높지 않은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아무렇게나 생긴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기둥이 굵직굵직하다. 3칸 중에서 중간칸은 조금 더 넓다. 좌우 협간이 문짝이 세 짝인데 반하여 어간은 문짝도 네 짝이다. 공포도 협간은 중간포가 하나씩 밖에 없는데, 어간은 중간포가 두 개씩이나 있다. 공포는 건물 밖으로 2짝, 건물 안으로 3짝인 외2출목 내3출목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외2출목이 아니라 3출목 같다. 2개의 외출목 위에 좀 떨어져 무엇이 하나 더 있다. 꼭대기는 용모양으로 장식까지 했다. 뒤편으로 도라가 보면 장식 없이 그냥 비스듬하게 뻗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하앙(下昻)구조이다.
단청은 내외부 모두 화려한 금모로단청(錦毛老丹靑 ... 부재의 양 끝에 주된 단청을 하고 중간에 여러가지 비단무늬를 그린 단청)을 하고 있으며, 가구는 다포계의 맞배집으로 창방은 전후면만 둘러져 있고, 측면에는 툇보와 같이 고주(高柱)에 연결되어 있다.
전면과 후면에는 평방 위에 포작(包作)을 배열하였는데, 외이출목 내삼출목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 포작 위에는 덧서까래와 같은, 이른바 하앙(下昻)이 내부에서부터 길게 뻗어나와 있다. 이러? ㅏ앙구조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로서는 단 하나뿐이다. 이 구조는 하앙부재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하여 외부 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써 온 것으로 알려졌고,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와 비슷한 구조의 실례가 많이 남아 있다.
극락전의 닫집
극락전의 내부는 화려하고 멋있다. 극락의 세계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이직 근엄함과 지조를 갖추려 했던 양반지주들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내출목 공포들이일정한 품격을 지니고 내부를장식하고 있다. 외부의 공포 장식도 적당하고 품격이 제법 있다.
극락전 천정은 복잡한 건축물 내부를 가리면서 반자를 맞추어 멋있게 장식하였다. 아미타부처 위에 걸린 닫집은그야말로 최고의 장식을 다 하였다. 복잡한구조를 지닌 지붕과 그 아래 다포식 공포를 빼곡이 짜 넣었다. 불교와 관련이 있는 온갖 상서로운 동물들이 날아 다닌다. 용이 입을 벌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극락조들은 즐거운 듯 하늘을 날고 있다. 비천상(飛天像)이 옷자락을 하늘거리며 절대 진리의 극락세상을 마음껏 누비고 있는 것이다. 연봉우리들이 나머지 여백을 메우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닫집으로 손색이 없다.
높은 기둥을 사용하지 않아 대들보가 아래로 처지고 크다. 세로로 서 있는 기둥과 가로로 걸친 대들보와 꽃처럼 피어오르는 공포들이 좁은 공간을 마구잡이로 장식하고 있다.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고 촐싹거리지 않는다. 반반한 면에는 온갖 모습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최고 수준의 단청인 모로단청이다. 단청은 1707년에 하였다고 묵서명에 기록되어 있다.
극락전의 내부는 화려하고 멋있다. 극락(極樂)의 세계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다. 아직 근엄함과 지조를 갖추려 하였던 양반 지주들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내출목 공포들이 일정한 품격을 지니고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외부의 공포 장식도 적당하고 품격이 제법 있다. 공포의 끝이 아래로 처지면서 위로 살짝 쳐들고 있다. 17세기 공포의 모습이다.
천정은 복잡한 건축물 내부를 가리면서 반자를 짜 맞추어 멋있게 장식하였다. 아미타부처님 위에 걸려 있는 닫집은 그야말로 최고의 장식을 다하였다.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지붕과 그 아래 다포식 공포를 빼곡히 짜 넣었다. 불교와 관련 있는 온갖 상서로운 동물들이 날아다닌다. 용(龍)이 입을 벌리고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극락조(極樂鳥)들은 즐거운 듯 하늘을 날고 있다. 비천상(飛天像)이 옷자락을 하늘거리며 절대진리(絶對眞理)의 극락 세상을 맘껏 누비고 있다. 연봉우리들이 나머지 여백을 메우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닫집으로 손색이 없다.
높은 기둥을 사용하지 않아 대들보가 아래로 처지고 있다. 세로로 서 있는 기둥과 가로로 걸친 대들보와 꽃처럼 피어오르는 공포들이 좁은 공간을 마구잡이로 장식하고 있다. 화려하나 가볍지 않고 촐싹거리지 않는다. 반반한 면에는 온갖 모습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최고 수준의 단청인 모로단청이다. 단청은 1707년에 했다고 묵서명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단청들 중에서 품격 높고 아름다우며 우아한 자연색(自然色)을 지니고 있다. 단청의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극락전의 부처님은 아미타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좌협시에 관세음보살, 우협시에 대세지보살을 모셨으며, 그 위에는 보궁형 닫집을 얹었다. 세 겹으로 된지붕의 서까래와 공포가 피밀하게 짜여져있으며 구름 속의 용두(龍頭)와 동자상(童子像)이 닫집 주위를 날고 있어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고 있다.
극락전의 닫집
" 닫 "은 옛말로 " 따로 "의 의미이다. 따라서 닫집은 집 속의 또 하나의 집..이다. 법당은 단순히 불상과 보살 그리고 신중(神衆 .. 신의 무리)들을 모셔놓고 예불을 올리기 위해 만든 기능적 공간만은 아니다. 부처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묘사해 놓은 상징적 공간이다. 법당 안에서 볼 수 있는 여러가지 장엄구(莊嚴具)에는 .. 보관(寶冠), 광배 등과 같이 부처의 몸을 장엄하는 신장엄구(身莊嚴具)가 있고, 부처의 몸 이외의 것을 장엄하는 수미단, 대좌, 후불탱화, 닫집 등의 부속 장엄구가 있다.
닫집은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보개(寶蓋 .. 또는 天蓋)로서의 상징이다. 보개는 부처의 머리 위에 설치한 일종의 장엄구로서, 그 원형은 일산(日傘)이며, 원류는 인도이다. 열대지방인 印度에서 부처가 설법할 때에는 햇볕을 가려주는 일산(日傘)을 사용하였는데, 이 것이 후일 부처를 비롯하여 성인의 권위와 존엄,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닫집이 부처의 머리 위 높는 곳에 있으면서 부처의 권위와 존엄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보개(寶蓋)와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닫집은 어디까지나 불국정토의 궁전 모습을 법당 안에 재현하는 것에 그 본래의 목적이 있다.
닫집의 종류 (운궁형 .. 雲宮形)
지붕을 천정 속으로 밀어 넣은 형태인데, 천정을 파고 들어간 공간의 사면에 목조건축에서 중요한 장식요소인 포작(包作)을 섬세하게 결구해 놓은 닫집이다. 운궁형 닫집은 그 예가 드물며,안동 봉정사 대웅전과 서산 개심사 대웅전의 닫집을 들 수 있다.
닫집의 종류 (보궁형 .. 寶宮形)
운궁형 닫집과는 달리 지붕을 천정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 지붕과 서까래를 만들어 천정에 걸어놓는 형태이다. 논산 쌍계사 대웅보전의 닫집은 정밀하면서도 품격높은 닫집으로 유명한데, 수미단 위에 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여래의 세 부처 머리 위 천정에 각각 보궁형 닫집이 매달려 있는데, 각각 처마 밑에 적멸궁(寂滅宮), 칠보궁(七寶宮),만월궁(滿月宮)이라고 쓴 편액이 붙어있다.
어떤 조형물에 성스러운 영감을 불어넣기 위하여 동원되는 보편적인 방법은 그 위치를 높여 하늘 가까이 하고, 황홀하고 삼세한 장식을 하는 것이다. 닫집에 다포계(多袍系)의 섬세한 포작기술을 총동원하고 용, 봉황, 극락조, 연꽃, 오색구름 등의 화려한 장식을 가하는 것은 신성하고 숭고한 천상세계, 다시 말하여 불국정토 개념에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방법이다.그 것을 장식미술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국정토를 장엄하고 환상적인 세계로 표현하려는 조형의지의 발로에 다름아니다.
천정 높은 곳에 위치한 닫집은 성인으로서의 부처가 뛰어난 지혜를 가진 거룩한 스승으로서 신비마자 간직한 것을 보여주며, 부처가 중생들과 다른 숭엄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닫집은 궁궐의 전각 형태로 되어 있음에도 집이라는 실용성을 초월한 고도의 상징성을 가진 장엄구로 존재한다.
극락전의 외부 벽화
다포계(多包系) 건축물에는 창방 위 주두 사이로 마치 사람이 앉아 있는 듯한 형태의 빈 공간이 있는데, 이른바 공포 벽화불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메우고 벽화를 그려 넣기 때문에 붙여진 영칭으로 건축 용어로는 불창(佛窓)이라고 부른다. 본래는 개방되어 있던 이 창을 막아 부처님을 그려넣는 불창의 변형된 형태인데 아직도 불창(佛窓)을 막지 않은 채 옛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부석사 안양루의 불창은 해가 지고 불이 켜지면 마치 여러 분의 부처님이 좌정하여 앉아 있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다포양식의 건물로, 1981년 수리할 당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606년(선조 39)에 건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묵서명과 우화루에서 발견된 상량문 등을 통해 볼 때 , 고려 후기에 중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6년에 중건한 뒤 1714년에 다시 중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은 잡석기단(雜石基壇)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외부는 앙서형(昻舌形)의 쇠서(牛舌)을 새기고, 내부는 연화초를 새겼다.공포는 하앙(下昻)을 경사로 얹어 외부에서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내부에서는 지붕의 하중을 눌러 주도록 하므로써 처마 하중이 공포에 주는 영향을 격감시켰다. 그리고 앞쪽의 하앙은 모두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하여 아름답게 꾸민 반면, 뒤쪽의 것은 꾸밈없이 뾰족하게 다듬어 놓았다.
이러한 하앙(下昻)식 구조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에까지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곳 화암사의 극락전이 유일한 사례이다. 백제계 공포의 흔적을 살필수 있어 목조건축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화암사는 상량문에 따르면 1605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 1597년에 화암사가 전소(全燒)되었다. 타버린 극락전을 10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지은 셈이다.임진왜란 이후 많은 절집이 다시 지어졌지만 화암사가 가장 빨리 재건축한 축에 속한다. 그만큼 화암사는 인근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누가 돈을 댔을까. 완주 지방의 유지가 돈을 댔을 가능성이 크다. 절간의 내외적인 전체적인 분위기가 17세기 절집의 짜임새와 분위기를 담고 있다.
화암사 극락전은 다포식 공포 구성에 맞배지붕을 갖추고 있다. 맞배지붕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는 주심포와 천장이 없어 서까래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 제격이다. 그러나 고려 말조선 초기에 들엇서 주심공포 사이에 중간포를 짜 맞추는 다포식이 개발되었다. 다포식 공포와 함께 내출목이 여러 개 걸리면서 내부가 복잡해지자 천장을 짜서 넣었다. 이 극락전은 백제계통의 하앙식(下昻式) 건물에 고려 후기의 다포식이 가미되었고, 천정을 짜 맞추는 양식에서 조선 후기의 양식이 또한 가미되었다.
극락전의 역사적 의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과 대비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 화암사의 극락전이다. 그러나 봉정사의 극락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물이면서, 통일신라의 건축 수법을 따르면서 고구려계통의 장식성이 나타나지만, 화암사의 극락전은 하앙(下昻)과 단청을 통해 백제의 잔영이 더욱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즉, 화암사의 극락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물이면서 백제 계통의 장식성, 고려의 맞배지붕, 조선의 다포계 양식이 혼합되어 한 건물에 여러 시대의 모습이 함께 투영되고 있다.
하앙 下昻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앙(下昻)구조이다. 일본은 한반도의 문물 전래를 부정하면서, 중국문화의 직접적인 흡수를 주장하여 왔다. 그 하나로 거론하는 사례가... 중국과 일본에서 흔히 나타나는 하앙구조가 한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5년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구조가 밝혀지면서 日本의 주장은 억지인 것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판명된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한반도를 통한 선진문물의 수입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한반도는 선진 문물의 전수자일뿐 독창적인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독창적인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 한국은 아니라고 여전히 억지를 부린다고 ... 하여튼 백제의 전통을 지키려는 장인의 억척스러운 정신이 한일교류사를 증명하는 극명한 자료로 활용되는 것이 바로 화암사 극락전인 것이다.
하여튼 화암사 극락전은 작지만 볼거리가 많은 전각이다. 첫번째로 위에 적은 "하앙"구조이며, 이는 국내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둘째, 하앙의 장식적 요소이다. 전각 앞면과 뒷면의 모습이 서로 다른데, 앞면은 용의 발톱까지 세세하게 투각되어 있는 반면, 뒷면은 본래의 기능에 충실할 뿐 장식적인 요소가 없다.
세 번째는 주심포와 다포계의 과도기적인 모습이다. 본래 주심포는 맞배지붕에서, 다포계는 팔작지붕에서 나타나는데, 이 곳의 극락전은 맞배지붕이면서 다포양식을 적용한 과도기적 모습이다. 그리고 공포의 모습인데, 공포는 조선 후기에 이를수록 섬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황암사 극락전의 공포는 짧지만 강건한 기운이 서려 있어 조선 전기 이전의 양식이 나타난다.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하앙(下昻)그조를 가진 건축물이다. 하앙이란 밖으로 돌출한 출목도리를 받을 수 있도록 서까래 방향으로 거는 부재(部材)의 일종으로서 처마를 길게 빼기 위한 공포의 형식이다. 밖으로 뻗어나온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어 건물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막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유난히 강우량이 많은 호남지역에 적합하였던 건축양식인 것이다.
즉 이 구조는 외부에서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내부에서는 지붕의 하중을 눌러주게 되어 있어 처마의 하중이 공포에 주는 영향을 격감시켜주며, 천장 내부에서부터 서까래와 같은방향으로 길게 뽑아 공포부분에서 지렛대와 같은 작용을 하여 밖으로 돌출된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빼는 역할을 한다. 전면의 하앙은 용머리 모양으로 투각한 화려한 장식인데, 후면의 하앙은 간결한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다듬어 놓아 절을 세우는 이의 절제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정면의 하앙구조
하앙(下昻)은 일종의 겹서까래로 기둥과 지붕 사이에 끼운 긴 목재인데, 처마와 나란히 경사지게 놓여 있다. 이것을 처마와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받친다. 극락전 앞쪽 하앙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였으나, 건물 뒤쪽 하앙은 꾸밈없이 뾰족하게 다듬었다. 하앙식 구조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많이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 건물뿐이므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후면의 하앙구조
각기 분리된 극락전의 현판이다. 강진 백련사의 대웅보전처럼 현판의 글씨가 각각 분리된 사례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이러한 배려를 통해 공포의 강건한 흐름이 끊기지 않고, 벽체 사이사이의 그림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마치 나무가 부족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면 크게 보이려고 일부러 나누어 놨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극락전 처마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그 유명한 하앙식 구조라고 한다. 극락전 하앙 사이에는 판으로 덮고 주악상을 그려 놓았다. 그림은 많이 탈락되었지만 아직도 생동감이 넘친다. 표정이 살아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아미타삼존불이 있고 닫집이 웅장하다, 용(龍) 두 마리가 힘차게 꿈틀거리고 비천상(飛天像)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극락세계가 이곳이 아닌가 싶다.
동종 銅鐘
자명종 自鳴鐘
밤이면 저절로 울려 스님과 신도들을 깨웠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지는 종이다. 이 동종은 예전에는 사람이 종을 치지 않아도 밤이면 저절로 울려 스님들과 불공을 드리러 온 신도들을 깨웠다고 한다. 그래서 자명종(自鳴鐘)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전쟁에 쓸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조선의 쇠붙이를 강탈하던 일본 헌병들이 이 곳 화암사로 몰려 올 때, 동종은 미리 스스로 울어 스님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은 이 동종을 땅 속에 묻어다가 해방이 된 뒤에 다시 꺼내어 오늘까지 무사히 보존하게 되었다.
범종에 새겨진 지장보살상
극락전 안에 있는 조선시대 동종으로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의 맨 윗부분에는 꽃을 세워 도드라지게 장식한 문양이 있으며, 어깨에는 간략화된 꽃무늬 띠를 두르고 있다. 어깨 아래로는 4개의 유곽(乳廓)이 있고 그 사이에 보살상을 새겼는데, 유곽은 길이 25cm, 폭이 25cm이며 덩굴무늬로 장식된 곽 안에는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유곽 밑에는 금철대시주(金鐵大施主), 동철대시주(銅鐵大施州), 보시(布施), 공양(供養) 등의 명문이 있으나, 조성연대는 기록되지 않았다. 크기는 전체 높이 140cm, 몸체 높이 85cm, 입지름 70cm이다.
절집으로 들어가는 문(門)이 정말 소박하다. 집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대문에는 시주자 명단을 적었다. 문을 들어서니 한옥(韓屋) 같은 저겨운 느낌이 드는 절집이다. 마당이 있고, 행랑채와 안채가 잘 어우러진 보통 민가(民家)와 같은 구조이다. 'ㅁ'자 구조로 극락전이 정면에 있고, 맞은편에 우화루(雨花樓), 양 옆으로 적묵당과 요사가 있다.
적묵당 마루가 앉았다 가라고 반긴다. 낮은 마루에 앉아서 올라오느라 힘든 몸을 쉰다. 불명산 자락과 하늘이 어울려 여유롭다. 잘 늙은 절집 기둥에 기댄 채 마음을 놓는다. 아늑하다. 좁은공간에 절집을 지으면서 답답하을 줄이려고 극락전, 적묵당, 우화루는 처마를 붙여서 지으면서 요사인 불명당은 규모가 작은 건물로 양 옆을 터놓았다.
산신각 山神閣
17세기 초에 지어진 산신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내부에는 1982년에 조성한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산신각에는 1835년(헌종 1)에 조성된 산신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그 탱화는 보이지 않는다.
산신(山神)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한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 독성(獨聖)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믿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山地)가 70%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불교각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산신각(山神閣)이 세워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 일반적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 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 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三神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삭발한스님이 "묘법연화경"과 같은 불경을 들고 있는불교식 산신도 흔하다. 이 경우 의상은 가사와 비슷하나 적녹색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사찰 내에 잇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山神은 지역의 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 보통으로 산 뿐만 아니라 산 주변의 지역을 관장하는 神으로 여겨졌다. 山은 한 지역공간의 중심이며, 산신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고 지켜주는 존재로 믿어졌던 것이다. 한편 산신각(山神閣)에 모셔지는 산신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그려지는 것을 보면, 산신신앙이 신선사상(神仙思想)과도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가 있다.
적묵당 寂默堂
조선 후기에 세워진 적묵당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팔작자붕건물로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정면 어칸에 적묵당(寂默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필치가 힘이 있다. 많은 전통 사찰에서 선방을 적묵당으로 부르며 묵언 수행을 하는 것을 보면 불교에서는 말하고 싶은 욕망을 참는 것도 중요한 수행의 하나로 보는 듯하다.
相生의 여유
이 적묵당의 양쪽 지붕 끝은 우화루의 풍판(風板)과 극락전의 풍판을 뚫고 들어가 기생하고 있는 모습이다. 넉넉하지 못한 공간이 건물 간의 상생(相生)을 유도한 것이다. 극락전과 우화루는 적묵당에게 자신의 풍판을 뚫고 들어 오도록 곁을 내주고 있다.
이렇듯 화암사의 당우들은 그 건축 자체로서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곁들여 사랑과 관용의 원리까지 보여주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닐 수 없다. 여름 한낮 적묵당 툇마루에 걸터 앉아 물끄러미 절 마당을 바라보라..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채 모든움직임을 그친 네모난 공간이 적막하기만 하다. 비어있는 것은 적막하다. 우리 시대에 적막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절집으로 들어가는 문(門)이 정말 소박하다. 집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대문에는 시주자 명단을 적었다. 문을 들어서니 한옥 같은 정겨운 느낌이 드는 절집이다. 마당이 있고, 행랑채와 안채가 잘 어우러진 보통 민가(民家)와 같은 구조이다. 'ㅁ'자 구조로 극락전이 정면에 있고, 맞은편에 우화루, 양 옆으로 적묵당과 요사가 있다.
적묵당(寂默堂) 마루가 앉았다 가라고 반긴다. 낮은 마루에 앉아서 올라오느라 힘든 몸을 쉰다. 불명산 자락과 하늘이 어울려 여유롭다. 잘 늙은 절집 기둥에 기댄 채 마음을 놓는다. 아늑하다. 좁은공간에 절집을 지으면서 답답함을 줄이려고 극락전, 적묵당, 우화루는 처마를 붙여서 지으면서 요사인 불명당은 규모가 작은 건물로 양 옆을 터놓았다. 우화루 지붕과 적묵당 지붕이 붙었다. 분명 아래서 봤을 때는 별도의 처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건너편에서 보면 한건물로 되어 있다. 좁은 절집에 사이좋게 처마를 대고 요령껏 지은 절집이다. 건축한 사람이 마술을 부린 것만 같다.
철영재 綴英齋
극락전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 꽃부리를 꿰맨다 "는 뜻으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을 삼가하라는 의미의 철영재(綴英齋)가 다소곳이 맞이한다. 잠시 매무새를 다듬고 다시 극락전 왼편으로 돌아가면 몸을 바짝 낮춘 굴뚝 두 개가 앙증맞게 서 있다. 참으로 소탈하다. 절집 뒷문으로 나와 적묵당 맞은편에 서면 화암사의 오종종한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 오는데, 모든 것이 단아하고 담백하다.
불명산(佛明山) ... 얼마나 아름다운 산 이름인가. 불교가 성한 우리나라이기에 산야(山野)의 이름이 불법을 밝히는 이름들로 가득하지마, 이렇게 석가모니부처의 가르침을 온통 밝히려는 깊은 산 속에 꽃바위 절(花巖寺)이라니... 절의 이름에서 풍기는 서방정토 장엄한 화엄세계 불국토가 그려지고 있다. 이곳 지명에서 풍기는 느낌에 무언가 전설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화암사 가는 길 2
화암사 오르는 산길은 숲의 터널이다. 열대의 밀림에라도 든 듯 공기도 습하다. 숲을 벗어났다 싶으면 골과 바위벽이 나타나는데 이때부터 길은 턱없이 좁아지며 미끄럽기도 하다. 바위벽을 돌고 골을 건너면 물소리 요란한 폭포를 마주하기도 하는데, 산길을 걷는 이는 시의 표현처럼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기만 하면 그만이다.
산과 고의 형세를 봐서는 도무지 근처 어디에도 절집이 있을 성 싶지않다. 특히 골의 끝자락에서 풍경ㅇㄹ 가리고 선 높다란 바위벽을 마주하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마저 드물었던 그 옛날, 역적모의는 커녕 나그네 등짐 뺏을 궁리조차 해본 적 없었을 스님네들이 무슨 깊은 생각을 하고 남들어서는 안 될 만씀을 나눈다고 이런 궁벽한 곳에 절집을 짓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히한한 생각까지 들지 않는 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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