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순 시인>>
<<지관순 시인의 양력>>
*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 2015년 <계간 시사맥> 등단.
* 제 32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우수상
* 제 15회 안산 전국여성 백일장 장원
* 제10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지관순 시인의 시>>
너무 시끄러운 고독*/지관순
열매가 절정에 가까워질 때
나무는 생각한다 나의 부서질 듯한 노동을 사람들은
왜 축복이라 부르는 거지
마음이란 들어갈 땐 도둑 빠져나올 땐 주인
하지만 뒤통수뿐이어서
들어오는 중인지 빠져나가는 중인지 알 수 없다
불을 지키려는 난로의 마음과
불길을 잡으려는 소방관의 마음이 합쳐져
하나의 도시가 완성된다
길을 찾는 사람들
길을 잃으려는 사람들
길 같은 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서로 찧고 뒹굴고 쥐어짜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식당과 공사장을 지나 쇼윈도에 어른거리는
집시의 얼굴과 마주치는
광장 한복판
올리브나무와 흡사하게
자신을 꽉 껴안은 사람들이 압착기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보후밀 흐라발
소낙비와 블루의 속도/지관순
여름의 이틀 전 푸른 기타가 있었다
잔물결 흐르는 플라스크 속 빗방울이었다가 비눗방울
여섯 개의 지그재그가 숨어있는
블루블루에서
블루를 투영하는
풀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블루를 응시한 채
미동 하나 없이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가고
여름이 돌아오지 않고
장난감 병정 불면증 감람나무와 성지순례단
소나기의 갈채를 따라
운지법을
다 써버린
사흘간
시차가 긴 여름이 퉁가퉁가 퉁과하고 있었다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지관순
고개 돌리면 한 발짝 물러서는 새 울음소리
창문에 대고 벽돌만큼 잘라낸 아침
미간에 접힌 전염성 뉴스와
충치 한 개 레몬 세 조각
논 숨 콸리스 에람*
엄마야 누나야
셋잇단음표
칠 주의
투시
잠
리본
목뿔뼈
두물머리
린넨 컵받침과
그림자로 남는 새
여인의 사랑과 생애
어젯밤 퇴고하다 만 시
이러다 정말 난쟁이가 되고 말겠군!
모래알들은 모래알보다 참을성이 많다는 얘기
* non sum qualis eram(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호라티우스.
썸머타임/지관순
우리의 티타임에서 고장난 여름 냄새가 난다
언제부턴가
광물성을 띠고 사방으로 퍼져가는
가볍고 날개가 달렸으며 성스러운 그것*
팔리지 않는 책의 소제목이
후숙(後熟)하는 열대과일의 낮잠 속에서 속살 익어가고 있다
여름의 정수리에서
여름의 가장자리로 수레바퀴를 굴리는 태양이
수레국화를 피운다
지울 수는 없으나 지저귀는 시간의 그림자들
개기일식이
길게
숭배자들의 행렬을 늘어뜨린다
무릎선으로 물을 가득 따르고
여름의 난간에 머리카락을 잘라낸 새벽
네 시 반
* <말하는 보르헤스> 중에서
나타나샤, 뻔뻔한 소녀/지관순
아저씨, 부르셨어요?
내가 가진 당당한 변명 중 하나는 이름
부르지 않았는데도 아무 때나 나타나서 나타나샤로 불린다
일기장 열어 놓고 잠든 사이 필통 속의 소녀가
옆구리에 분홍 풀밭을 끼고
서 있다
소녀는 입천장에 눌러 둔 구름을 한 장씩 떼어내
혀끝으로 불어 올린다
구름의 허리를 찌르니까 비가 내린다
넝쿨장미 손가락을 불끈 쥔 여자가 있었습니다
낭만이라고는 머리카락 한 개 흔들림 없이
비애에 흠뻑 젖어
망각의 마스카라 숯가루가 눈두덩에 번지고
속눈썹 파르르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죠, 비애는 비에 젖지 않으니까
비가 오지 않는데도
생각이 생각에 젖는다면 뻔뻔한 일이죠
눈물과 비는 한통속
생각을 질질 끌고 다닌다
필요하다 싶으면 필요하지 않은 곳까지 기웃거리고
신뢰는커녕 신발도 없이
혹시
신뢰 대신 신발이 필요해요 그렇게 말한다 해도
실례는 아니잖아요
닳아빠진 생각 아무렇게나 신고 다녀도
망신살은 아니잖아요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아무 데나 아무 때나 나타나샤!
크림치즈와 비둘기/지관순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먹고 난 후
내가 당신의 자기가 된 이유
설명하기 전혀 어려워요
난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고
시선을 번뜩이며
'도시형 비둘기 뒷다리의 검은 반점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으
니까
기자를 잘못 말씀하신 거겠죠 네네
크림치즈를 베이글 사이에 바르는 건
두 쪽 난 세상을
부드럽게 접착시켜 보려는 것인데
두툼한 유리는
비둘기와 카페 사이를 두 쪽 내놓고
저리도 맑게 웃고 있고
옆 테이블 키스하는 남녀는
아무리 봐도 두 쪽인 입술을
크림치즈 없이도 저렇게 잘 붙이고 있고
냅킨을 접는 참에 엄지와 검지에
끼워 동서남북 놀이를 해보는 거죠
이쪽 저쪽 요쪽 조쪽
네 쪽 난 세상보다 더 자세하고 정교한
여섯 쪽 난 세상도 알지만
그건 출생의 비밀 같은 거니까
유리 밖 비둘기가
저 쪽에서 이 쪽으로 날아올 때
두 쪽은 사라지기도 해서
어.어.어.
평화유리가 깨지는 순간
나는 왜 큰 소리로 외쳤을까요
자기 좀 봐!
아르페지오/지관순
창문을 열고 너를 덮은 기분이야,
나는 말했고 너는
바람이 골목과 헤어지는 기분이야, 말했다
타공을 통과하며
너와 나는 부드럽게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너와 나는 서로를 입어보고
바람과 골목은 서로 들춰보고 있다
내게 꼭 맞는 것 같아
넌 모서리가 아름답구나
도대체 언제까지 떨어지는 거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네가 울 때
나는 멈추기를 희망하면서
멈추는 것을 절망하기 시작한다
솜털 냄새가 난다
지난 계절에 돋은 물의 노래가
지느러미를 흔들며 체를 빠져나간다
얼마나 흔들려야 창문이 깊어질까
장미에서 밤까지
너에게서 나를 꺼냈다
봄비 오는 날엔 주머니에 손을 찔러도 봄비가 오고
몬드를 깨물지 않아도 봄비가 온다
바람에서 골목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오!수정/지관순
오!수정 너는 도착하지 않을 저녁처럼
걷는다
팔을 흔들며 걷는다 공기들이 겨드랑이 안으로 모여든다
오!수정은 기쁘다 이렇게나 많은 아이들
오!예쁜 기분들
아이들이 날뛰어서 오!수정이 활짝 핀다
이마에 물결을 담고
넌 언제 이곳에 왔던 거니
강으로 나간 적이 없고 오로지 물결, 이라 발음했을 뿐인데
난 그것을 옆구리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오!수정은 물결을 하나씩 벗기며 기뻐한다
너는 물고기였을지 모르는데 헤엄칠 줄 모른다
너는 전봇대였기 때문에 새를 죽였을지 모른다
오!수정 그런 네가 너는 무섭지 않니
저녁을 데려가도 괜찮을까
너는 입술을 오므린다 오두막, 오두막,
오두막
정말 괜찮겠니?
새들이 낱개의 물결을 물고 날아오른다
새가 죽었을 지도 모르는데
오두막이 저녁으로 걸어간다
미녀 안젤라/지관순
어제는 순댓국밥집 오프닝
오늘은 주민센터 매직페스티벌
늘 축제의 날을 보내는 그녀는
무소속 비정년트랙 공연보조사
수족처럼 달라붙은 긴장과 불면증,
갈아 끼울 수 있는 나사형 목덜미가 아름답죠
워, 워, 착하지 이리 온
무대 중앙에 치솟은 탁자가 사뿐 내려오고
환호하는 객석을 향해 그녀는
만국기의 표정으로 갈아 끼워요
가짜야!
난동을 부리는 꼬마의 손금엔
커다란 회오리 막대사탕이 제격
콧수염 끝이 휜 마이미스트로 바꿔요
가끔은 칼 꽂힌 갈비뼈 아래
경련을 일으키는 그녀의
길고 매끈한 다리를 끼워 넣어도 될까요?
완벽하게 속여도
절대 속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흰자위들이
동백꽃으로 덮여갈 때
여러분, 미녀 안젤라였습니다
키 작은 마술사가 외치고 그녀는
무대에 흘린 웃음을 주워서 퇴장해요
대기실 거울 앞에 앉아
집에 데려갈 얼굴을 골라요
어제의 얼굴이
사물함에서 덜그덕거려요
내가 아직 물푸레나무였을 때/지관순
난 문짝 하나 만들지 못하는 아이였다
목수국의 꽃송이를 부러워하다가
부들레야의 염료를 질투하다가
별이 뜨기 전 잠들곤 했다
읽기 좋아하는 식탁이
잎사귀를 넘기며 지나갈 때
회초리나 코뚜레는 되기 싫어서
바람의 발목에 식탁,
이라 장래희망을 적어넣었다
식탁은 송이에서 떨어져 나온
포도알의 방식을 알아서 좋았다
네 개의 다리가 마주보며
동전지갑의 기분으로 낡아가는 것도
전자렌지 안
벨칸토식 고음을 지르는
찬밥의 연주를 보는 것도 좋았다
내가 엄마보다 푸른 이유는
멍이 많은 기분의 색감 때문이었지만
서쪽에게 아름다운 문짝 하나 주고 싶었다
웃는 게 예쁜 화분 하나 놓고 싶었다
내가 아직 물푸레나무였을 때
컴퍼스/지관순
다리와 다리 사이에는 붉은 아코디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계가 살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묶어두는 방식은
우아한 쏠의 말랑말랑한 공기
건반에 웅크린 하얀 문조들이 외쳐요
이제 나를 연주해주세요
검정 토슈즈를 신고 천천히 돌면
크롬빛 파도가 몰려와요
몰토, 몰토 아첼레란도
잎사귀 구름이 날아올라요
물방울들이 데구르르 굴러가요
배꼽을 지우고
네모 뒤에 숨어 깔깔거리는 동그라미들
누구 앞에서도 구부리지 않아
쭉 뻗은 다리가 날마다 아름다워요
만난 적 없는 무릎은
어떤 음표로 살고 있을까요
켄타우로스 자리 남동쪽에 잠든
나의 뾰족 침대가
오늘 밤도
뿌리 돋는 꿈을 꾸어요
오브街 코스/지관순
초생달이 콕 찌르고 간 자리
장미가 태어났어요
그늘의 종자를 골라 눈을 가려주고 싶었지만
구름은 오래전부터 휴업 중
날개를 접은 돌멩이가
광대뼈를 휙휙 공전해도
이상할 건 없어요
상자를 높이 던져 놓고 피하지 못해
자신을 포장해버린 오후엔
유리자전거를 타고 현기증을 따라다녀요
앞바퀴는 뒷바퀴를 따돌리지 못해 늘 울상이죠
오늘의 심장이
충성을 맹세하며
내일에 망명하는 것 따위
너무 흔해 빠진 일
초면의 표정이 기분을 핥아서
돌기가 아름다워질 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이미 어제 겪었던 일로 판명되었을 때
이 길의 이름을 외쳐보세요
오브街 코스!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게 당연해지는 걸요
나비들이 머리카락을 들고 날아가서
물고기들이 귀 속에서 뻐끔거려서
이렇게나 경쾌해지는 걸요
오브街 코스!
페르마타/지관순
자네 왔나,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디 좀 앉지 그래
요즘 이 침대는 숨겨왔던 제 문양을 벽에 비추곤 한다네
동굴 속에 머리를 반듯하게 뉜 반원의 기호
아마 죽음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였을테지
죽음을 피하는 법을 막 알아낸 참인데 들어보겠나
그건 말이야 죽음 위에 잽싸게 올라타서는
고삐를 꽉 쥐고
같은 속도로 달리는 것일세
죽음과 한 통속이 되는 거지 하하
그런 얼굴은 하지 말게, 까짓 거 죽기 밖에 더 하겠나
알겠네, 알겠어
농담으로 하도 써먹어 자네한텐 통하지가 않네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아껴 쓰거나
아예 혹독하게 연습 해둘걸 그랬지 뭔가
우리가 연습하고 맞았던 것들이란 고작
운동회나 입학식 따위 아니었나
환호도 길면 하품이 나오고
갈채도 반복되면 지루해진다네 하지만
페르마타는
얼른 지나갔으면 하는 것들 위에서
이글이글 지루할 틈이 없었지
창 밖에 가슴 볼록한 굴뚝새 한 마리가
온몸을 들썩이며 울다갔다네
사람들은 신이 새에게
더 많은 노래를 가르쳐야 했다고 불평하지만
카덴자 딸린 조가는 좀 우습지 않은가?
나는 이제 새로운 창법을 익힌 새가 될 걸세
날숨에 붙여진 페르마타를 길게 끌며
불린 적 없는 무음의 아리아를 초연하는 것이지
성공할 자신은 없네만
다행히 이 연주에서 실패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네
이제 나는 나의 전설이 되는 걸세
테누토-너무 길게 귓불 늘어진 초저녁/지관순
1.
밍고!
밍고는 붕붕 날아가는 새
밍고는 삐뚤삐뚤
바람 빵빵한 풍선
눈보라 치는 날 밍고는 지붕 위로 올라간다
맘 놓고 키 클 수 있도록 지붕 뜯어고치는 밍고
는 착한 수리공
이렇게 사소한 톱질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빙산 하나
치마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가 새로운 빙하시대를 연다
2
딸꾹, 떼껄룩! 신종 고양이가 허리를 질끈
덧신 신지 않고도 사뿐
꿈속에
건너가 지문 하나 남기지 않는다
네, 네, 네 무표정하게 떼껄룩 take a look,
그런데
뭘 어떻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란 말인가,
괘씸한 숨구멍
3.
거칠거칠 달랑무는 뮤즈를 모르고 굴뚝같은 뮤즈란 원래
달랑무, 그것의 복수형인 달랑무즈에서
달랑
시작되었다
달랑무를 깨물어 먹을 때마다 까꾹까꾹
삼년 전에 멈춘 딸꾹질을 핑계로 아삭아삭 소원을
깨물어 먹을 거야
윽박지르려다가 서둘러 입 다물기 잘했지
콧김 센 뮤즈
콧바람을 막으려면 문고리가 두꺼워야 하고
기분 좋게 그림 그려놓은 구름사다리를 타고
구름밭에서 탱고 땡고 탱, 탱, 탱
땡고꽌도
4.
열한 번째 발바닥을 뒤집어야 해요
바닥의 진심
발바닥 드러낸 욕조 안에 파도를 일으켜본 적 있나요
어디에 가닿아도 진실만을 외면하는
차가운 심장
밍고는
훌라당 뒤집어진 방바닥에서 검은 굴뚝 꼭대기 이르기까지
시추봉을 박아야겠네 미개통 비밀통로를 따라
게으르지만
단번에 까꾹까꾹, 까까꾹! 귓불 길게 늘어뜨린 초저녁
휴일들1/지관순
카프카를 읽다가 스카프를 고쳐 매는 사람들
수신호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운명을 운전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다시는 보지 말자며 또 끓어오르는 사람들
농담과 냉담의 싱크로율
활공은 한 통 남은 두통약을
한꺼번에 삼켰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눈물 핑 도는 팽이에서 서핑하는 사람들
그림자를 접어 지갑에 넣는 사람들
애정행각은 뿔이 몇 개일까
화가도 아니면서 자주 화가 나는 사람들
카모족族은 양의 내장으로 비 오는 날을 점친다
달력을 넘기다 로마로 가면
달려가던 아이가 풍선을 놓친다
시간에 푹 빠진 사람들이 서둘러 시든다
풍선은 남고 아이는 높이 높이
물은 끓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월요일로 넘어선 토끼/지관순
망각을 파먹는 딱정벌레와
스물다섯 개의
금관악기
토요일의 토끼가 월요일에 태어나
목요일은
오후에 찢겨나간 백과사전
책갈피마다 펄럭이는 쉬폰 원피스
줄장미의 일요일이 입천장을 기어오를 때
눈먼 앵무새가
수요일의 알을 품는다
요일대로 사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니
금요일의 바람이
두 귀를 쓸어넘긴다
자루와 자두/지관순
자루에는 새가 들어 있고 자두에는 씨가 들어 있습니다
자루는 움직일 수 있고 자두는 굴러갈 수 있죠 자루는 자두를
의심하기 좋아하고 자두는 자루를 벗기기 좋아합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자루와 자두에 관한 내연의 질서
자루는 자두를 조용히 이끌 수 없을까요 새를 날려 보내면
자루는 꺼지고 자두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갑니다 자루와 자두는
함께 묶을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자루를 무시합니다 물에 뜬 자두를 툭 건집니다
자루를 건지는 일은 의욕이 필요하지만 자두를 모른 척하는 일은
식욕에 관계되는 일 자루 앞에 놓인 자두
자루를 자두에 담습니다 자두밖에 보이지 않는 자루 눈앞이
캄캄한 자루 배부른 자두 입이 무거워서 또박또박 눈물 흘리는 자두
자두에 갇힌 자루의 불안 자루에 눌린 자두의 자유
새는 어디서부터 지워야 합니까
부불리나 침대/지관순
오르탕스 부인보다는 부불리나, 그렇게 불러주세요
무슨 나팔 이름 같기도 하지만 이것은
내 허리에 감겼던 깃발을 기념하는 일이지요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며
새벽바다로 간 침대를 모른 척하기 좋은 이름이지요
조르바, 아아 나쁜 새끼
이건 앵무새가 그를 부르는 소리
그가 꼭 나빠서 그런 건 아니에요
과부들의 침대가 며칠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듯이
그도 이별하지 않고 떠날 권리가 있죠
살아간다는 것이 가벼운 먼지처럼 느껴지면
함께 낡아온 침대 귀퉁이를 쓰다듬으며 외쳐요
아가멤논호여. 이제 출정이다
바다로 간 침대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파선되기 직전에야 돌아올 수 있었지요 그러나
떠난다는 건 안전을 확인하러 가는 건 아니고
산다는 것 또한 별일 없이 살기 위한 건 아니니까요
밤이면 달은 선인장 같은 내 등과 한쪽만 따뜻한 침대를
저울에 올려 놓고 조롱했어요
외로움을 계량하는 바늘이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몰라요
창피했지만 이젠 그것도 옛일,
죽음의 입김이 나를 휘발시키려 하네요
시간은 더 매달려 있고 싶은 과일을 떨어뜨리고
합의 따위는 없어서 늘 소송에 휘말리지요
내 소원이 뭐냐구요
그건 별들이 차가운 발을 위로하러 이불 속에 들어왔다가
내 침대에 두 명이 산다는 것을 알고 놀라 캄캄해지는 일
조르바, 이 나쁘은.
쉿, 앵무새여 부디
육지가 보이네요
이제 조금 있으면 정박하겠군요 다행히 난 파선되지도 않았지요
그러나 이상해요
멀미가 막 시작됐거든요
새 울음 감별법/지관순
호로로공장이 가동되기 위하여
배추흰나비애벌레는 아침 일찍
꼬물거리는 허리와 솜털을 납품했다
살구나무 꽃은 눈이 닿을 때마다
옷을 한 겹씩 벗어 흥을 돋우었고
주파수 맞지 않는 라디오는
좁쌀을 굴리며 리듬 박스를 틀었다
굴뚝에선 연기가 꿀렁꿀렁 흘러나와
하늘로 전단지를 뿌렸다
한때 이 공장 연구실에선
신제품을 개발한답시고
노래와 울음을 분리시킨 적이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있다는 점에서,
전선줄이나 나뭇가지 가설무대에 올라갔다는 점에서
종일 노래만 부른 날 저녁엔
참기름 띄운 노른자를 호로록 넘겼다
온몸을 들썩거린다는 점에서
다 듣고 난 후 사람들이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울음만으로 출장 갔던 날 저녁엔
사라지지 않는 애조를 밤새도록 헹궈냈다
노래 사이에 낀 울음은 노래처럼 들리고
울음 사이에 낀 노래는
울음처럼 들리는 결함이 발견됐지만
입맛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만 믿고
시중에 내놓았다가 전량 리콜하기도 했다
한동안 앙코르의 환청에 시달렸다
누구는 구조의 문제라고 하고
누구는 기분의 문제라 했다
후일 연구일지 구석에서 낙서를 발견했다
울음인지 노래인지 감별하려는 바보들아
그건 간단하다
밥 먹기 전엔 울음, 밥 먹고 나면 노래!
연잎 치마/지관순
여름 내내 감침질한 항아리치마
줄기가 꺾어지자
치맛단 한 올 한 올 풀어 헤치며
물로 풍덩 뛰어드는데
치마 안에 시쳐둔 노을이 쏟아지는거라
알을 슬고 간 잠자리 체위가 미끄러지는거라
침 꼴깍 삼키고 있던
쇠물닭 발자국 흩어지는거라
멋도 모르고 물속이 두 폭 환해지는거라
물살이 비칠거리며
낡은 숨소리 부축하러 왔다가
개구리 울음소리로 꿰맨 솔기
쩡 갈라놓고 가는거라
물 밖에서 흔들리던 거미줄 하나
놀라서 끊어지는거라
대각선으로 버티며 졸던 바람도 툭 끊어져
만국기처럼 펄럭거리는거라
멀리서 날아가던 쇠목테갈매기
영문도 모르고 중심을 잃는거라
항아리치마 접시치마 되던 날에
감정 산책/지관순
산딸나무 꽃이 접히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양산을 펴지 않았고
파란 하늘이 묽어질까봐
수돗물을 세게 틀지 않았다
보도블록의 금을 밟으면 어젯밤 꿈이 출렁
중앙선을
툭툭 차며 걸었다
까치발을 해도 까치는 나를 모른 척해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에게 안녕?
내 목덜미가
햇빛 잘 드는 창이 될 수 있다며
개미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바람은 구름보다 늦게 출발했으나
내 입 속을 경유해도 되는 지 묻지 않았다
혀가 마를 시간이 필요했다
검정색 페인트 냄새가 시간을 불러모았다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어둠의 실금으로 몰려가 쭈뼛 서고
젤리로 만든 그늘은 자꾸 벽에서 흘러내렸다
물고기가 뜬 눈으로 뒤척이는 동안
나는 하나의 이름도 무거워
산딸나무 꽃 귀마개를 샀다
모든 감정을 침대에 넣고 잠갔다
거미줄에 걸린 잠을 잤다
뿔/지관순
뿌리야,
이름이 잘못 불릴 때 뿔은 발바닥이 간지럽다
양분을 먹고 산다는 점에서
늘 곤두서 있다는 점에서 같은 가문이지만
뿔은 물구나무 서 본 일이 없다
뿔은 감정의 기상청이어서
흐려질 때마다
뿌우뿌우 각적을 불어
눈물을 피신시키고
무릎이 턱을 당겨와 골몰하는 저녁
사다리를 내려
지붕의 느낌을 산책시켜 주곤 한다
구름과 밤늦게 어울려 다니다가
비의 기분도 한 권 읽어보다가
간혹 황소자리와 맞짱 뜨는 밤
기진맥진해지는 잠의 시간을 좋아한다
물론 잘못 불려진 이름을 꿈꾸는 밤도 있다
한 칸씩 밟고 올라오면 뿌리도 뿔이 될 수 있을까
한 칸씩 내려가면 나도 뿌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밤에도 접히지 못하는 뿔은
물구나무 선 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뿌리 닮은 뿔이 태어날 때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