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작년 연말에 오랜 친분이 있는 형님 한 분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잔 적이 있습니다. 이름이 김호남입니다. 클 호(浩)자와 사내 남(男)자를 써서 부모님이 지어 주신 멋진 이름이고, 오십 년 넘게 사용해 온 이름인데 최근에 이름을 신우(信友)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무슨 그런 짓을 다 하느냐고 핀잔을 줬더니 사뭇 진지하게 지금까지 이름 때문에 불편함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듣는 사람마다 전라도 호남(湖南)을 떠올리고 연관을 짓기 때문에 사업하는데 이런 저런 불편이 있어서 바꿨다고 했습니다. 조영남씨는 이름 안 바꾸고도 온갖 활동 잘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름을 바꿨다고 하니 30년 동안 알아 왔던 사람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에 만족하십니까? 우리나라에서 지난 10년간 이름을 바꾸기 위해 개명신청을 한 사람이 85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대법원에서 개명허가를 받은 16만2246명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이름은 남자의 경우 ‘민준(552명)’, 여자는 ‘서연(1401명)’이었다고 합니다. 남자가 선호하는 이름으로는 ‘민준’ ‘지훈’ ‘현우’ ‘민성’ ‘동현’ 등이 꼽혔고, 여자는 ‘서연’ ‘지원’ ‘서영’ ‘수연’ ‘민서’ 등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촌스럽거나 어감이 나쁘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성명학적 이유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명을 신청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합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이나 여중생 성폭행 살해범 김길태처럼 흉악범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개명신청을 하는 사례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역사 속의 사법부(사법부 60년사)'에 따르면 선호하는 이름도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바뀌어왔습니다. 출생 신고한 이름을 기준으로 1948년 가장 인기 있었던 이름은 남자는 '영수', 여자는 '순자'였습니다. 1978년에는 '정훈'과 '지영'이었고, 1988년에는 '지훈'과 '지혜', 1998년에는 '동현'과 '유진'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지원’ ‘현서’와 같이 남녀 간의 성별 구분이 힘든 이름이 선호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 가장 듣고 싶은 이름, 가장 많이 부르고 싶은 이름은 어떤 이름입니까? 자신의 이름입니까, 남편이나 아내의 이름입니까, 자녀들의 이름입니까? 요즘 청소년들은 좋아하는 가수나 영화배우의 이름을 들으면 기절할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처럼 여러분에게도 듣기만 하면 즐겁고, 부르기만 하면 행복하고, 보석처럼 소중하고 간직하는 이름이 있습니까? 네, 우리는 오늘 그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142장 찬미를 펴 보십시오. 이 아름다운 찬미의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1. 그 이름 비길 데가 어디 있나,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귀하신 이름 놀라우신 이름, 참되신 이름 우리 주 예수
(후렴) 주 예수 이름 내가 생각할 때, 내 마음 속에 기쁨 넘치네
우리의 소망 구원되신 예수, 그 이름 비길 데 어디 있나
2. 비탄에 빠진 가련한 내 영혼, 슬픔의 안개 헤치고 나와
샘솟는 새생명을 다시 얻어, 쓰라릴 상처 아물었도다
3. 이 세상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 이름 오늘 더욱 빛나리
내일도 영원토록 증거되며, 찬란한 빛을 더욱 발하리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름,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은 온 우주에 비길 데가 없는 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오늘 이 안식일에 우리 주님의 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우리의 소망, 우리의 위로,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육체의 건강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이름이, 경제적 부요함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이름이,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이름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이름이 우리의 가장 큰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사야 9: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성경에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수많은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말씀만큼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과 힘과 위로를 주는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름들 중에 기묘자와 모사라는 두 이름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기묘자(奇妙者)가 무슨 뜻입니까? 기이할 기(奇)와 묘할 묘(妙)가 합쳐진 단어로서 한 마디로 놀라운 분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원더풀(Wonderful)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정말 신기할 것을 보았을 때 ‘원더풀’합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을 때도 ‘원더풀’합니다. 자신이 정말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할 때도 ‘원더풀’합니다. 너무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원더풀’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원더풀’합니다.
세상에는 기이하고 묘한 것이 많습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 많습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풍경들이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보다 더 기묘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그래서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원더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 맛있는 음식, 놀라운 묘기, 신비한 광경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원더풀’한 분입니다. 그래서 544장 찬미를 작사한 Fanny J. Crosby 여사는 ‘A wonderful Saviour is Jesus my Lord' 즉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라고 썼습니다. 참으로 우리 예수님은 놀라운 분이시며 기묘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기묘합니다. 수 백 수 천 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이 예언되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묘합니다. 성경의 예언을 낱낱이 성취하는 생애를 사셨을 뿐 아니라, 단 한 번도 죄에 굴복하지 않는 완전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은 기묘합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보여 주셨을 뿐 아니라 친히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봉사는 기묘합니다. 수많은 불치의 병자들에게 완전한 치유를 주셨을 뿐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기묘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든 죄인이 구원을 얻을 길을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기묘합니다.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셔서 우리의 두 눈으로 예수님을 뵙게 하심으로 기묘자의 사역을 마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묘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기묘한 사랑,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기묘자이신 예수님은 기묘한 사랑, 이해할 수 없는 사랑, 감당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이십니다. 이 엄청난 사랑, 이 놀라운 사랑에 감격한 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1.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2. 그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3.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후렴)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기묘자이신 우리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믿음의 생애를 살아가는 마포가족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모사(謀士)이십니다. 기묘자도 그렇지만 모사도 우리가 평소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낱말입니다. 모사를 국어사전에는 [꾀를 써서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 또난 [남을 도와 꾀를 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책사(策士)라고도 합니다. 우리말로 모사나 책사라고 하면 그 뜻 안에 약간 부정적인 어감이 느껴집니다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사와 책사는 그의 지혜와 경륜으로 적절한 도움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어성경에는 이 모사를 '카운셀러‘(counsellor), 즉 상담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이름을 바꾼 형 집에서 빌려와서 지난 몇 달 동안 화장실에 두고 읽은 책이 있는데 [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라는 책입니다. 강태공, 제갈공명을 비롯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책사들을 다루는 이 책은 어떤 책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는 것과, 유능한 책사를 두었다 하더라도 그를 믿지 못하면 낭패를 본다는 두 가지 교훈을 집중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관포지교의 주인공인 관중은 제환공의 책사가 되어 제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패자로 만든 책사 중의 책사입니다. 그가 늙어 죽기 직전에 제환공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신이 죽은뒤에 주공께서는 반드시 수조, 역아, 당무, 개방을 조정에서 추방해야 하옵니다.” 수조는 제환공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환관이었고, 역아는 제환공의 요리사였으며, 당무는 제환공의 주치의, 그리고 위나라 사람 개방은 제환공의 명을 받아 조정의 사무를 맡고 있는, 제환공의 총애가 각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환관 수조는 제환공의 후궁들이 많아서 대궐에서 음란한 일이 자주 일어나자 제환공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여 환관이 된 사람이었고, 요리사 역아는 제환공이 농담으로 아직까지 사람 고기를 먹어본 일이 없다고 하자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 요리를 해서 제환공에게 바친 인물이었습니다. 위나라 사람 개방은 조정 사무에 능통하여 그가 없이는 사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환공은 관중의 유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환공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 이유를 묻자 관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수조는 주공의 총애를 받기 위해 자신의 남성을 거세한 인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몸을 소중히 여기는데 제 몸조차 사랑하지 않는 인물이 어찌 주공을 사랑하여 충성을 바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제환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요리사 역아는 왜 추방해야 하는지를 물었고 관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요리사 역아는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 요리를 만든 인물입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주공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자신의 아들조차 사랑하지 않는 인물이 어찌 주공을 사랑하여 충성을 바치겠습니까?” 그러자 제환공이 말했습니다. “공의 지혜는 하늘의 해와 같이 밝소. 내 반드시 공이 죽은 후에 수조를 추방하겠소. 그러면 조정 사무를 보는 위나라 공자 개방을 추방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오? 그는 모든 것이 모범적인 사람 아니오?” 이 말에 관중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공자 개방은 위나라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공을 모신 뒤로 그는 한 번도 자신의 고향을 방문하여 부모를 찾아뵙지 않았습니다. 부모를 찾아뵙지 않는 자가 군사부일체라고 하는 주공을 사랑할 까닭이 없습니다.” 관중의 충언에 제환공은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중이 죽었고, 제환공은 약속대로 환관 수조, 요리사 역아, 주치의 당무, 위나라 사람 개방을 모두 국외로 추방했습니다.
네 사람이 추방된 후에도 제나라 조정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환공은 모든 일에 재미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환관 수조가 없으니 궁녀들이 음난한 짓을 저질렀고, 요리사 역아가 없으니 음식이 도무지 맛이 없었습니다. 주치의 당무가 없으니 몸이 점점 무거워 지는 것 같았고, 위나라 사람 개방이 없으니 조정 사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입안의 혀와 같았던 그들이 그리워진 제환공은 관중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들을 다시 불러 들였습니다. 그러자 음식은 맛있었고, 대궐의 궁녀들은 음란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의원 당무는 예전처럼 자신의 몸을 잘 돌보아 주었고, 조정의 사무도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환공은 관중의 유언을 공연한 염려로 생각하면서 즐거운 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는 동안 관중과 함께 제나라를 이끌던 충신들이 하나 둘 늙어 죽게 되자 제나라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제환공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암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제환공이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주치의인 당무는 병을 치료할 자신이 없자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환관 수조, 요리사 역아, 위나라 사람 개방과 모의하여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병에 걸린 제환공을 대궐에 연금한 뒤에 높은 벽을 쌓고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제환공은 관중의 유언을 따르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습니다. 그는 결국 하루 종일 사람을 볼 수 없는 방에 갇혀 있다가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제환공은 관중이라는 탁월한 책사의 도움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첫 번째 패자가 되었지만, 끝까지 그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모사가 곁에 있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불행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고,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듯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책사의 조언도 듣고 써야 가치가 있습니다.
다시 이사야 9:6절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예수님은 우리의 모사, 상담자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담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의 사정 이야기를 들어 주고, 필요한 조언을 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상담자가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 주시며,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시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위대한 상담자이십니다. 정로의 계단에 기록된 다음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다소라도 우리의 평강에 관계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그가 주목하지 않으시는 것은 없다. 우리의 경험 중에 어떠한 사건이 너무나 흉악하다고 하여 그것을 보시지 않으시는 것이 없고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그가 풀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없다. 당신의 자녀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어떤 재난이나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어떤 근심이나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기쁨이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어떠한 진정한 기도라도 우리의 천부께서 그것들을 못 본체 하시거나 거기에 직접으로 관심을 두시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정로, 100)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상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대한 상담자이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십시오.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의지해야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위대한 상담자 되시는 예수님께 내 사정을 아뢰는 것입니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위대한 상담자이신 예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왜 증언의 말씀을 살펴야 합니까? 더욱 상세하고 친절한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모사이신 예수님, 상담자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묻고, 예수님의 조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시 한 주일을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기묘자이신 예수님을 매일 매 순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되게 합시다. 또한 우리의 모사이신 예수님께 매일 매 순간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뢰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생활합시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이 되게 합시다. 기묘자이며 모사이신 예수님과 함께 승리하는 한 주일을 살고, 다음 안식일에 기쁨으로 만나는 마포가족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박 상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