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은 논한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中 ~ 칠천량 해전에 대한 기술 - |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습니다.
이 참담한 소식을 들은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지만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전함 한 척도 남아있는 게 없는 상태에서 그는 이름만 제독이었죠.
하지만 이순신은 절망하거나 좌절해 있지 않고, 조선 수군의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10 바로 행동을 개시합니다.
7월 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 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
7월 21일 곤양을 지나 노량에 도착, 거제현령 안위 등 패잔병을 수습. 거제현 소속 배 위에서 숙박.
8월 3일 새벽에 복직교서가 도착11. 권관 등 10여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에서 이홍훈의 집을 출발하여 종일 움직인 끝에 구례에 도착
8월 13일 패전 직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났던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 본영의 군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침. (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을 입수하여 그나마 수군의 구색을 갖춤. - 난중일기 中 일부 발췌 - |
다행히 이순신이 이렇게 패잔병을 수습하고 군세를 정돈하는 동안(이 기간동안 군기를 잡았다는 기록만 몇 건 더 있다. =_=;;),
칠천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곧바로 밀려들 것만 같았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돌아와봐야 뭘 할수 있겠냐 이제 우리 세상이다.. 고 생각했는지 남해안 약탈 및 살육에만 신경쓰다가 8월에 철수합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셈이었죠.
이순신이 이때 올린 장계에 따르면 전선 13척12과 초탐선 32척만 있었으며,
이는 명량해전 당시에 전선만 최소 133척에 이르는 일본군에 비교하면 대단히 안습한 숫자였습니다.
실제 이순신의 거느린 수군이나 조정 내에서는 당장이라도,
일본 수군의 배는 수백척이며 이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왕이란 놈이 신하에게 하는 말.. 쉽게 번역하면 "도망쳐라!"
하지만 통제공은 이걸 쿨한 한마디로 잠재운다
이런 가운데 백업을 해줘야 할 조정에서도 백업은 커녕13 이순신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던 윤두수14를 중심으로 한 중신들이,
수군의 전력을 육군에 편입시키자(=수군 해체하고 바다 포기하고 육전에 올인하자),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
(=이순신 다시 통제사에 앉히기 싫으니 통합 지휘관 임명하지 말고 병력을 분산시켜 왜군에게 각개격파 당하자)
...등의 정신나간 주장을 했습니다.
이 정도로 당시 여론은 이 상황은 그 누구도 뒤집을 수 없다... 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내부의 적이 더 문제인 것 같다.. -_-;;)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中 일부 발췌 - |
하지만 이순신은 위와 같이 간지폭풍의 명대사인 속칭 '상유십이'의 장계를 올려서 동요하는 여론을 잠재웠습니다.
힘들더라도 제해권을 되찾아야만 반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는 이런 이순신의 뚝심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게 됩니다.
가까스로 수군과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8월 20일에 출항합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죠.
칠천량의 패배로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고,
겨우 긁어모은 장졸들은 대부분이 패잔병이나 노병이었고,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했다는 공포에 모두들 질려 있었고,
경상우수사 배설151617은 교서에 절하길 거부하는 등 조정에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전투 전에 달아나기도 하고...병사도 아닌 지휘관이
설상가상으로 이순신 자신도 고문의 휴우증인지 토사곽란18으로 사흘을 몸져누워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이순신의 함대는 이동을 계속하고,
어란진에서 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처형하는 등 통삼대감의 군율이 건재함을 보여주었습니다.(...)
8월 28일 왜군 정찰선 8척과 조우한 이순신의 함대는,
그때부터 9월 10일까지 맑은 날이면 계속해서 시비를 걸어대는 일본 수군 함대를 계속해서 상대합니다.
이 와중에 적군의 함대에 겁을 먹어 다른 배가 움직이지 않자,
이순신은 자신이 탄 대장선을 직접 선두에 나서서 직접 적선을 구축하는 등(무쌍X무?!),
적군을 막아섭니다.
당시 일본군에서 탈출한 포로 및 정찰선들의 보고를 들은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습니다.
어란진에 왜선들이 계속 집결하고 있으며 일본군은 단숨에 이순신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 한양을 직접 공략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말이죠.
즉 일본 수군에 있어서도 수많은 상륙병력을 실은 배들을 몰고가는 만큼 물러설 수 없고,
조선 수군에 있어서도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하는 만큼 물러설 수 없는 단두대 매치가 벌어지게 된 것이죠.
9월 15일 전투가 임박했음을 안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두릅니다.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아 담가 적신 뒤 12척의 배에 걸어 조총을 막는 방패로 사용했고,
장기전을 예상했는지 동아19를 배에 가득 실어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이도록 하고,
미리 어선 100여척을 징발해 병력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함선처럼 위장시키고,
적은 수의 병력으로 현재 위치에선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해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친 울돌목을 전장으로 사용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운명의 9월 16일 아침.
맑은 날씨에 초병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왜선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요격에 나서며,
명량 해전이 시작됩니다.
| 조선 수군 | 일본 수군 |
전선 | 판옥선 13척(1척은 건조중) | 세키부네, 아타케부네 등 133척 |
기타 함선 | 초탐선 32척, 어선 100척20 | 수송선 포함 기타 200척 |
동원병력 | 패잔병 및 노병을 포함 전투병력 약 900명 비전투원 약 1300명 | 전투병력 최소 3300명 비전투원 최소 4000명 수송병력 불명 |
사기 | 해전의 패배와 적군 규모로 인해 겁에 질림 | 칠천량 해전 승리 이후 최고의 자신감으로 무장 |
상부 | 조선 조정 : 배도 없는데 수군 없애고 육군이랑 합치죠?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는게 배아프다) | 일본 막부 : 조선 수군을 확실히 밟고 그대로 서해를 통해 한양으로 상륙해라! |
장군 |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 이번 기회에 이순신 및 조선을 확실히 잡는다! |
결과 | 함선 피해 0척 대장선 사망 2명, 부상 3명21 총 사상자 73명 추정 기타 피해 불명 | 함선 31척 격침 (추가 침몰 90척 추정) 사망자 2600~18466명 추정22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장수 도도 다카도라 부상 |
명량 해전 때의 양군의 전력 비교 표
명량 해전 모식도
전세가 어찌 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 못 장선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서 관망하며 나아가지 않고 배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 난중일기 中 일부 발췌 - |
이렇게 벌어진 전장에서 이순신이 탄 대장선과 그 함대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가 적선을 막아서고 화포와 화살을 난사하며 분전했으나,
바다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적 함선의 숫자와 거센 조류에 압도당한 다른 장수들은 이제 막 도망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민서가 쓴 <명량대첩비문>에는
'때마침 밀물이라 파도가 거세고 적들이 상류로부터 타고 덮쳐와서 그 기세가 산이 찍어누르는 듯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과학자들이 변하지 않는 바다 흐름을 연구하여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입니다.
즉, 수많은 위인전에 적혀있는 대로 이순신이 바다의 흐름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대장선 1척을 이끌고 홀로 울돌목의 미친 물살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압도적인 숫자의 적들을 무수히 폭침하고 있었던 것23입니다.
(바다에서 벌어지는 통제공무쌍?!)
(Power Overwhelming?!24)
일본 수군의 주력전술, 근접해서 조총이나 활로 갈긴 뒤 줄 같은걸로 배를 붙여 적선에 올라탄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 수군의 주 전술은 세키부네 등의 중소형 함선으로 빠르게 배를 갖다붙인 뒤,
조총 및 활의 사격으로 적의 저항을 제압하고 빠르게 적선에 옮겨타 일본도를 활용한 백병전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던 반면,
조선 수군은 주력으로 사용하는 지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로 무장한 대형 함선(=판옥선)에 무기를 가득 실고,
장사정 무기들로 인한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선 자체를 침몰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순신의 판옥선에는 조총 사격등에 대비해 사수 및 포수들이 몸을 숨길 판이 여럿 덧대여 있었고,
위에도 묘사한 물에 적신 솜이불, 동아 등의 추가장비 등도 아끼지 않고 장착25해서,
어지간히 운이 없지 않은 한 조총의 탄이 배를 뚫을 일은 없었죠.
하지만 적의 함선이 접근하면 아무리 여러 장비가 있다 해도 총탄이 뚫고 사람이 맞을 구멍은 있게 마련이고,
아무리 울돌목의 폭이 좁고 판옥선이 크다 해도 대장선 1척으론 수십척의 몰려오는 적을 다 막을 수 없습니다.
(실제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몇 겹으로 포위됐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런 급박한 위기의 상황에서 다른 장수들이 뒤에서 꽁무니를 빼는 것을 목격한 이순신은,
먼저 한 사람의 목을 베어 매달고, 호각을 불며 초요기를 걸어서 여러 전선들을 소집합니다.
이에 1리 밖에서 달아나려던 장수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거제현령 안위의 배를 향해 외칩니다.
"안위야, 싸우다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것 같으냐!"
- 난중일기 ~ 정유일기 9월 16일 中 -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진으로 돌입2627했고, 이어서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외칩니다.
중군장의 임무는 대장선의 호위와 전투 지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인데,
대장선을 호위해야 할 배가 후방에 물러나 있었으며 특별한 함대편제 직책이 없는 안위28보다도 늦게 도착한 걸로 봐서,
정말 대장선 외엔 다 도망치려고 하던 판이라는 걸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에 하늘을 찌를 정도로 분노한 이순신은 요즘 말로 적당히 바꿔..
"맘같아선 네놈들부터 지금 싹 다 죽여버리고 싶지만 상황이 급하니까 일단 킬수나 올려라!!"는
살벌한 말을 외쳐 김응함도 적진으로 돌입합니다.
이순신의 197.5cm의 장검에 적혀 있는 말
통제공의 패기를 엿볼 수 있다
이러자 명량 해전은 난전으로 바뀌었으며 안위의 배에 왜선 3척이 붙어서 백병전이 벌어져 위태로워지자,
이순신은 대장선을 이끌고 나아가 왜선 3척을 내리 부수며 안위를 구하는 등 활약을 펼칩니다.
마침내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를 필두로 다른 전선들도 합세하면서,
이순신 혼자 이끌어오던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했으며 이 시간쯤에 물살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 난전에서 일본군 측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대장선의 격파되고 구루지마는 사망한데다,
안골포에서 투항한 항왜29 준사가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일본군 장군의 시체를 알아봅니다.
이순신은 부하 김돌손을 시켜서 시체를 건져 그걸 토막내어 배에 겁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의 사기는 완전히 꺽였으며 수군을 총지휘하던 도도 다카토라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조선 수군의 멸망을 확인하라고 파견한 감독관인 모리 다카마사가 물에 빠지는 등,
일본군의 악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완전히 조수의 흐름이 조선군에 유리하게 바뀌자,
조선 수군은 공세로 전환합니다.
강한 물살과 조선군의 포격으로 전열이 무너진 일본 수군의 전함들은 11척이 추가로 격침되었고,
결국 오후 5시 경 일본 수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퇴각함에 따라 전투는 종료되며 명량 해전은 끝납니다.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 함대의 퇴각로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조선 수군은 보급 문제와 전력의 열세 등으로 지속적으로 후퇴하여 고군산도로 물러나고,
9월 27일에야 명량 해전의 승전을 알리는 장계를 써서 조정으로 올려보냅니다.
이에 따라 일본군도 서해로 북상하며 일부 왜장이 전북 부안(고군산도 근처)까지 다다랐음을 기록에 남기긴 했습니다.
즉, 일본군이 서해로 북상하는 걸 실패한 건 아니었죠.
하지만 이 전투 결과로 숨어있던 수군 장수들이 병력과 전선들을 이끌고 이순신과 합류하였고,
일본군은 목표인 조선 수군과 이순신을 잡지 못했으며,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수군은 서해안을 통해,
상륙하여 육군과 한양 공략이라는 작전을 아예 수행할 수 없었으며,
결국 9월 말부터 일본 수군은 월동을 핑계로 서해에서 퇴각합니다.
이 전투는 육전 전황조차도 바꿔 버립니다.
실제 이 시기의 조선 조정은 적군이 직산에 다다랐다는 소식을 접하곤,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고 한양의 주민들은 모조리 피난을 떠난 등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산까지 북상하던 일본군은 명량해전 직전에 남쪽 '항구'로 가서 보급을 받은 뒤 한양을 칠 계획이었는데,
단 하나의 기적적인 해전으로 인해 이 계획은 박살났으며,
결국 보급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수군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으면서 우주방어를 하기 시작합니다.
표면상으론 월동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이는 일본군이 바다에서 싸우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그 당시 얼마나 조선 수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들과 싸우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일본군이 명량해전에서 이순신과 조선수군을 끝장내고 충청도에 상륙했으면,
임진왜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실적으로 조선의 완전 점령이 불가능하다 해도, 최소한 명나라와의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처치하지도 못하고, 조선 수군을 격파하지도 못하고, 서해안에 진출하지도 못한 명량 해전은,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완벽한 일본군의 패배였던 것입니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 박문수, <영조실록> 1750년 7월 3일 - |
당시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길 수 있다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압도적인 화포와 난공불락의 판옥선을 대량으로 보유했음에도 패배한 칠천량 해전의 선례가 있었으며,
패잔병들로 이루어진 13척의 배와 도망가고 싶어 안달하는 중간 지휘관들,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함대,
모함을 당해 건강을 해치고 모친상까지 당했으며 임금에게는 노골적인 박대를 받는 총지휘관,
한 척의 배는 커녕 지원조차 해주지 않는 조정, 그리고 대승을 거둬 사기가 하늘을 찌르며 수백 척의 배를 이끌고 오는 적군까지..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 뒤집어서 승리를 거둔 것은 이순신이라는,
하나의 지휘관의 역량이 승패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막강한 판옥선의 화력도 제대로 된 지휘관을 만나서야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부족한 물자를 긁어모으면서 싸울 준비를 갖춘 것도, 울돌목을 싸움터로 정한 것도,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도, 겁먹은 부하들을 다그치면서 전선을 유지하며 싸운 것도,
모두 이순신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일입니다.
결국 승리의 요인은 이순신 그 자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좌) 영화 <명량>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
(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김명민이 연기한 이순신
※ 기타 사항
1) 명량 해협에 철쇄(쇠사슬)를 이용해 급류에 밀린 일본의 전선들이 대파되었다고 하는 가설이 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이순신 위인전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6)>에도 이게 나오고 있지만,
굉장히 무거운 사슬에 조류로 인해 가속도까지 붙은 수십척의 배의 무게를 버티는 쇠사슬을 만드는 건 현대 기술로도 불가능30하다.
이순신의 승전 장계, 선조실록, 난중일기, 징비록 그 어디에도 '철쇄'라는 글자도 없어서 지금은 그냥 가설 취급받고 있다.
2) 이 전투에서 거북선은 안 나온다.
이순신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조선 수군의 마스코트(?)인 거북선은 이전 전투인 칠천량 해전에서,
3척 있던 거북선 전부를 어떤 쓰레기 지휘관이 말아먹는 통에 나올래도 나올 수가 없었다.
3) 명량 해전이 있던 정유년 9월 16일의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쓴 모든 일기 중에서 가장 길고 상세하게 쓴 일기이다.
아마 이순신 장군 본인이 느끼기에도 이 하루가 평생중 가장 긴박하고, 가장 길었던 시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4) 명량 해전의 패배로 제대로 빡돈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훗날 이순신의 생가인 아산을 습격했다.
이때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은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으며, 이순신은 이를 상당히 애통해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참조)
[출처] 2014/08/01(金) - [YT]명량 해전에 대한 연구|작성자 레인시
첫댓글 참 소상하고 시원하게 해역하셨습니다 여기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첨부하겠습니다 그당시 충무공의 활약은
더 말할것도 없지만 神도 우릴 도와 주셨습니다 보통 배의 재질이 소나무인데 왜송(니키다) 과 우리 한송의 강약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거기에 그들은 이음 부위를 쇠못으로 처리했지만 우리는 한옥 짓는 형식인 아귀 맞춤으로 만들어 배끼리 부딧치면 왜선은 그냥 부서지고 말았답니다 어쨌던 다시 말씀 드려도 불멸의 성웅 이순신 장군이십니다 글 고맙습니다 ^^
이런 분이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예전의 광개토대왕의
강국으로 도약할텐데~
항상 그리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