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장 나타난 천지회(天地會)
금릉성 밖 교외에 위치한 종산(鍾山)은 산상에 자기(紫氣)가 어린다 하여 자금산(紫金山)이
라 불리던 곳이다.
모산의 일맥인 종산은 그 전체가 하나의 명승(名勝)이었고, 곳곳에 널린 것이 고적(古蹟)이
었다. 산의 기복이 심한 것이 호랑이가 웅크린 것 같고, 웅위장려한 산세는 질펀한 평야를
굽어보니 푸른 들과 녹수(綠水)의 그림자는 시야에서 사라질 줄 모른다.
성밖 서쪽을 흐르는 진회하의 그 질탕한 풍정(風情)과는 대조적으로 종산은 조용하고 엄숙
했다.
영곡사(靈谷寺)는 종산에 위치한 유서 깊은 대찰(大刹)이다.
그 영곡사의 객방에는 시인묵객이 묵기도 하지만 과거에 응시하려는 유생들이 대부분의 객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새 밤은 깊어 달빛[月光]이 사위를 휘젓고 있다.
흑의유생 한 사람이 땅위에 제멋대로 흐드러진 달빛을 밟으며 천천히 객방으로 향하고 있었
다.
"아미타불... 이제 오십니까?"
고희에 접어든 듯한 노승 한 사람이 흑의유생에게 합장했다.
"좀 늦었습니다."
흑의유생은 마주 합장해 보이고 나서 자신의 객방으로 들어섰다.
흑의유생이 방에 들어가 돌아서서 문을 닫는 순간, 탁! 하는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방안이 밝아졌다.
누군가가 등뒤에서 불을 켠 것이다.
그러나 흑의유생, 주천운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이 태연히 몸을 돌렸다.
객방은 그다지 넓지 않았고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벽에 붙은 침상 하나와 가운데 놓인 탁
자와 의자 하나가 기물의 전부였다.
지금 그 탁자에는 촛불이 살아나는 중이고, 그 뒤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오륙십 세 가량의
화자(化子:거지)가 서 있었다.
"감법장령을 발동하신 분이 공자이시오?"
화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을 빛내며 침중하게 물었다.
"그렇소."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새까맣게 빛나는 죽패가 쥐여져 있었다.
"개방 제삼십칠대 제자인 금릉분타주 장이신개(長耳神 ) 우신웅(尤信雄)이 감법장령을 배견
합니다!"
죽패를 보자 화자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시오."
주천운이 감법장령을 거두며 말했다.
"신마금검뢰 상관대협이십니까?"
몸을 일으킨 장이신개 우신웅의 말소리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주천운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고소가 스쳐 갔다.
신마금검뢰(神魔琴劍雷)는 이미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거대한 위명(威名)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그렇소."
"영광입니다. 총타(總陀)로부터 전력을 다해 도움을 드리라는 연락은 이미 받았습니다... 가
장 큰일은 두 가지입니다. "
개방 금릉분타는 개방 강북 지역 정보의 총타이므로 그 정보망은 대단히 신속했다.
"두 가지라니?"
"그렇습니다. 하나는 공령천수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상관대협에 관한 것입니다."
"나?"
주천운은 어리둥절한 빛이 되었다.
"예, 바로 대협에 관한 것입니다."
신마금검뢰(神魔琴劍雷)!
느닷없이 나타난 그의 이름은 갑자기 강호를 진동했다.
그것은 기이할 정도의 속도로 강호상에 퍼졌는데, 거기에 또 한 가지가 덧붙여 퍼지기 시작
했으니 그것은 바로 이러했다.
-신마금검뢰가 지녔다는 소형금은 바로 신비의 무림삼대천음의 하나인 현천고금(玄天古琴)
이다!
"그 소문은 누가 퍼뜨린 것이오?"
주천운의 미간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번거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시피 합니다."
"그 소문의 확산 속도는 어느 정도였소?"
주천운의 물음에 멈칫하던 장이신개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그리고 보니 좀 이상은 합니다. 마치 대협의 대명이 퍼질 때 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건지..."
주천운의 이름이 세상을 진동시킨 것은 무림제갈과 개방의 공작이 작용한 바가 컸다. 그런
데 그러한 작용보다 더 빠르게 소문이 퍼진다면 이 또한 인위적인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이다. 누가 현천마금을 안단 말인가? 순리적으로 보
자면 내게 마금을 건네 준 철담대협을 쫓던 자들이다. 그 목적은?'
주천운은 장이신개를 바라보았다.
"그 소문에 관한 반응은 어떻소?"
"대단합니다. 공령천수가 가지고 있는 장보도 때문에 들떠 있는데다 그 소문이 나자, 천하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그걸 노렸군! 천제문은 아니다. 제삼의... 삼...!'
주천운의 뇌리에 문득 칠황야가 죽으면서 남긴 '삼(三)'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중원 각파는 물론, 은거했던 기인고수들까지 대협을 찾아 몰려들고 있
습니다."
장이신개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고맙소. 그리고 공령천수에 관한 것은?"
주천운은 담담히 대꾸하고 다시 물었다.
"그게 묘하게 되어 군웅들이 한데 몰려들고 있는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공령천수 왕가달의 종적이 맨 처음에 발견된 곳은 개봉(開封) 방면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군웅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 다음에 발견된 곳은 개봉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대별산(大別山) 입구였는데, 그 이후는 잇달아 숨막히는 추격전이 계속되고 그를 쫓는 인원
이 많아져서 지금은 금릉에서 오백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황산(黃山)에 잠적하고 있었다.
"공령천수의 경공이 아무리 대단해도 천하군웅의 추격을 벗어날 수는 없지요. 고수들이 황
산을 이 잡듯 뒤지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얼마나 모여들었는지 알 수 있겠소?"
"그건 좀 시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만 봐도 일장의 대성회(大盛會)인 셈입
니다. 구대문파에서도 참가했고 이맹과 남궁가를 제외한 이가... 그리고 흑령곡을 제외한 삼
곡도 모습이 보이고 흑도의 세력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사람이 자꾸 불
어나고 있습니다."
잠깐 말을 멈춘 장이신개는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금릉쪽으로도 인원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 말뜻은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고소를 머금던 주천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낭패로군! 한 가지 부탁을 해야 되겠소."
주천운의 음성은 가라앉고 있었다.
미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도와 드리겠습니다."
장이신개의 대답을 뒤로 하고 주천운은 탁자에 있던 지필묵을 들어 번개같이 일필휘지하여
한 통의 봉서를 작성했다.
"이것을 최대한 빠른 방법으로 남궁가주에게 보내 주시오."
"남궁가주께, 알겠습니다!"
봉서를 받아든 장이신개는 뭔가 급박함을 느낀 듯 급히 공수하고 나서다 멈칫했다.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일?"
"예, 서역쪽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인데... 그 소식을 보낸 사람이 실종되어 무
슨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몽고쪽이 아니고 서역이라고?"
주천운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렸다.
"그렇습니다."
"그 소문의 진위와 어떤 움직임인지 확실히 알아 내주시오."
"알겠습니다."
주천운은 장이신개를 보내고 조용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하늘이 맑고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주천운은 눈을 감고 조용히 달빛 속을 거닐기 시작했다.
지난날이라면 그는 이백의 시구를 읊조리며 이 밤의 달빛을 감상했으리라. 하지만 지금 그
의 심중에는 그러한 여유가 없었다.
'시간은 모자라는데 오히려 번거로운 일만 생기고 있다. 내일이면 금릉을 떠나야 한다!'
갑자기 주천운은 발걸음을 멈추며 눈을 떴다.
"나 때문에 밤이슬을 맞으며 더 이상 고생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난데없는 그의 중얼거림에 모든 것이 갑자기 월광 속으로 빨려들 듯 적막 속에 잠겨드는 듯
했다.
풀벌레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굳이 내가 모셔 내야 하겠는가?"
주천운의 눈길이 처마의 그림자에 가려진 바위로 향했다.
팍-
한 인영이 바위 뒤에서 야조(夜鳥)와 같이 솟아올랐다. 그 속도는 비길 바 없이 빨랐다.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간다? 세상에 그렇게 쉬운일이 어디 있을까?"
주천운은 그것을 보고 픽 웃었다.
한편, 장이신개는 큰일을 맡았다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일
은 시간 단축이 최선임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금릉주변은 눈을 감고도 환한 그인지라 지름길로 번개같이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이신개는 갑자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누가 따라온다!'
장이신개란 소문에 밝은 것만 아니고 천성적으로 귀가 밝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연히 남
보다 잘 들을 수 있었다.
'나보다 고수다!'
암중에 귀를 기울여본 장이신개는 갑자기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가 유성간월(流星刊月)의 신
법을 전력을 다해 전개하는 순간에 그의 앞에 한 인영이 유령과 같이 나타났다.
장이신개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이미 수십 년을 강호에서 눈치로 살아온 그인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미리 준비한 타구봉을 규화타구(叫化打狗)의 초식으로 휘둘러 나타난 인영을
덮쳤다.
인영이 막거나 피하면 그대로 도망칠 셈인 것이다.
"흐흐-사람을 잘못 골랐다!"
인영은 그의 공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이런 경우는 미쳤거나
확실한 자신이 있을 때뿐이다.
'잘못되었다!'
장이신개가 속으로 외치는 순간, 그는 자신의 타구봉이 격렬하게 진동함을 느꼈다.
인영이 유령처럼 덮쳐 오고 있었다.
그의 손이 타구봉을 쳤는데, 놀랍게도 그 일격에 장이신개는 기혈이 진동됨을 느끼면서 잇
달아 물러나야 했다.
"거지치곤 제법이군..."
인영은 장이신개가 타구봉을 놓치지 않는 것이 의외인 듯 음랭히 외치곤 물러나는 장이신개
에게 유령처럼 덮쳐왔다.
장이신개는 타구봉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상대의 일격은 너무도 신속해 이미 기회가 없었
다.
단 한 수에 장이신개의 목숨은 경각에 놓인 것이다.
"손을 치워라!"
바로 그 순간에 침중한 호통이 들려 왔다.
동시에, 강력무비한 도세(刀勢)가 폭우와 같이 인영에게 쏟아져내렸다. 인영은 도세가 너무
강해 도저히 맨손으로 막아 낼 수 없음을 경각하고 번개같이 몸을 굴려 물러났다.
대저,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몸을 굴린 다음에 다시 일어난다면 일어서 있는 것보다 응변
이 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경우라는 것은 절대적인
위기일 때뿐일 것이다.
삼 장 밖에서 번개처럼 일어나는 그의 손에는 이미 월아도(月牙刀)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과연 하수가 아니었다.
"그까짓 쇠막대기를 든다고 결과가 틀려진다더냐?"
차가운 웃음소리와 함께 가공할 도세가 그대로 인영에게 덮쳐갔다.
'한번만 막아내면 기회가 있다!'
인영은 전력을 다해 월아도를 쳐올리며 몸을 뒤로 빼내려 했다. 그는 처음부터 장이신개를
얕보고 행동했으므로 이 돌변한 상황하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와 도가 맞부딪쳤다.
쨍그렁!
"으악!"
찰나, 피분수가 솟아나며 인영이 두 쪽이 되어 쓰러졌다.
인영이 날아오는 도를 자신의 월아도로 막기는 막았는데 그 도세가 너무 강력해 그의 월아
도가 부러져 나가고 만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가 막으려 했던 것은 패도(覇刀)라 불리던 것이었기에.
"어서 가시오. 일을 끝낼 때까지는 보호해 주겠소!"
죽음에서 장이신개를 구해낸 복면인은 패도를 거두며 위엄 있게 말했다. 그의 기도는 일파
종사(宗師)의 것이었다.
"누, 누구시오?"
반쯤 혼이 나간 장이신개가 얼떨떨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분을 모시는 사람이오. 서두르시오."
복면인은 손짓해 보이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분명히 방주님보다도 강해 보인다... 모시는 사람? 도대체 상관대협은 어떤 사람이기에?'
장이신개는 멍청한 빛이 되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전력을 다해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으헉?!"
바위 뒤에서 몸을 날리던 인영은 경악한 외침과 함께 급급히 몸을 세우고 말았다.
그의 앞, 채 이 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천운이 흑의를 펄럭이며 태산과 같이 서 있지
않는가?
'이토록 빠를 수가?'
인영은 혼비백산해 번개같이 땅을 박차고 몸을 뒤집어 다시 돌아가려 했다.
"서라!"
주천운이 그를 쏘아보며 침중히 외쳤다.
그 음성에 실린 절대(絶大)한 기도를 어찌 설명하겠는가.
"으...!"
인영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날리려던 신형을 태산에 짓눌린 듯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청의복면인이었다. 체구는 왜소한 편이었으나 신형은 매우 날렵해 보여 경공에 특출해 보였
다.
"너는 누구의 명을 받고 나를 감시하는 것이냐?"
"가, 감시라니... 나, 나는 그냥 종산에 누구를 찾..."
"나를 기만할 셈이냐?"
주천운의 음성이 종을 때리듯 울렸다.
그 음성은 크지 않았으나, 청의복면인에게는 유독 벼락을 치는 것 같았다. 그는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압력을 느꼈다.
"으으... 이런 일이...!"
그는 입술이 말라오고 진땀이 솟아나 복면이 젖어오자 정신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주천운의 기도는 하루하루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속한 곳이 어디냐?"
주천운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으으... 처... 천지회(天地會)... 으으악!"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열던 청의복면인은 갑자기 악을 쓰면서 쌍수로 주천운의 가슴을 쑤셔
왔다. 그들의 거리는 지척인데다가 그 일격은 제아무리 일류고수라도 피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주천운은 그것은 보지도 못한 듯 중얼거렸다.
"천지회?"
천지회(天地會)는 일회이맹삼가사곡 중 바로 일회를 지칭한다. 신흥 십대세력 중 가장 신비
한 곳이다.
그들이 강호에서 활동한 것은 이미 이십 년이나 되지만 아무런 뚜렷한 움직임을 보인 적도
없고, 천지회주가 누군지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조차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기
이하게 천지회는 십대세력의 수위(首位)에 있었다.
우직!
"으-악!"
청의복면인이 참담한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크으으... 그, 금강불괴라니?"
청의복면인은 으스러진 자신의 두 손을 보고 온몸을 떨었다. 지독한 고통이 치를 떨게 전신
으로 엄습해왔다.
"태산에서부터 너희들은 나를 따랐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 항거할 수가 없다아...'
청의복면인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모, 모르오. 그냥 감시하라는 명령만 받았..."
"금릉 일대에 나를 감시하기 위해 깔린 인원이 몇이냐?"
청의복면인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그, 그것까지! 감시하는 상황을 다 알고 있었구나!'
"비, 비령당의 영주 셋과 향주 열둘이..."
"제이령주! 너의 간담은 실로 대단하구나!"
청의복면인이 완전히 주천운의 기세에 억압되어 신나게(?) 대답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사방에 메아리 치며 들려왔다.
"헉!"
청의복면인의 눈에 공포의 빛이 드러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그는 짤막한 신음과 함께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독을 삼켰다!'
주천운의 눈빛이 굳어졌다.
청의복면인은 일류고수였고 그는 유사시 조금도 주저없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도록 훈련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주천운의 기세에 미처 자결할 생각도 못한 상태였다.
자결이나,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청의복면인이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주천운에게서 형성되기 시작하는 일종의 기세
때문이었다.
'나의 심령공제(心靈空制)에서 대번에 벗어나도록 만든 것을 보면 평소 어느 정도의 훈련을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겠다.'
주천운은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칠 수 있어도 현신(現身)할 용기는 없는 졸장부였던가?"
그의 눈은 백여 장 떨어진 영곡사 석등(石燈)을 향하고 있었다.
"으하하..."
뒤를 이어 한소리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한 가닥 청영(靑影)이 번개 같은 속도로 석등 뒤에서 날아올랐다.
"허락도 없이 갈 수는 없다!"
주천운은 청영의 의도를 짐작하고 코웃음 쳤다.
순간, 그의 신형은 벼락같이 야공(夜空)을 가르고 있었다.
와르-릉!
일진광풍이 밤의 고요를 깨뜨리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 회오리치며 일어날 때, 주천운은 이
미 수십 장을 날아 청영에게 비스듬히 일 장을 갈겨내고 있었다.
그 장세는 매우 기이하며 춘풍(春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대반야장(大般若掌)?"
청영의 입에서 경악한 음성이 터졌다.
놀람의 외침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다음 순간에 청영의 전신에서 회색빛이 일어나며 주천운
의 대반야장을 막아갔다.
설명은 그러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거리는 아직도 근 오륙 장에 달하고 있으니 그 장세
들이 얼마나 가공스러운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독공(毒功)이군!"
주천운이 침중히 외쳤다.
꽈꽝!
벼락치는 음향과 함께 무서운 경풍이 소용돌이치며 일어났다.
곁에 있던 석등(石燈)이 그 경풍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날아갔다.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던
석등이었다.
"윽!"
청영이 묵직한 신음과 함께 허공에서 재주를 넘었다.
"으흐흐... 과연 신마금검뢰의 위명은 명불허전이로군! 다음에 다시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
다!"
청영의 입에서 음랭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에 청영의 몸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장세의 반동으로 화살과 같이 날아가고 있
었다.
'회회천독공(灰灰千毒功)! 이것은 구대독공 중 실전된 사대독공 중의 하나인데?'
주천운은 번개같이 생각을 스쳐 보내며 냉소했다.
"뢰(雷)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뇌정군림!"
꽈르-릉!
일진 굉음이 터져 나오며 그 자리에서 태풍이 일어났다.
우당탕! 휙! 휙!
영곡사 객방의 기와가 날아오르고 십오 장 밖의 불탑이 휘청거릴 때,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백 장을 날고 있었다.
"뭐... 뭐야?"
"지, 지진이야? 태풍이야?"
스님과 유생들이 혼비백산해 덜덜 떨면서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으아! 이건 사람의 속도가 아니다!'
백십여 장이나 떨어졌던 주천운이 단숨에 삼사십여 장 거리로 추격해오자 청영은 머리 끝이
공포로 곤두섰다. 그 또한 천하고수로 자부하는데 저런 신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지 않
는가? 무슨 놈의 신법이 저렇게 요란하단 말인가.
그때, 그의 눈앞 십여 장 앞에 종산에서도 가장 울창하다는 담림이 나타났다.
'살았다!'
청영은 거세게 진기를 들여마시며 생애 최고의 신법을 전개했다.
"게 서라!"
주천운이 담림 삼십 장 밖에서 그걸 보고 호통 쳤다.
쏴아-앙!
한 무더기 광채가 벼락 같은 기세로 주천운의 손에서 폭사되어 청영을 덮쳐갔다.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이다!"
혼비백산한 음성이 터지는 순간, 청영의 모습은 담림 속으로 사라지고 광채는 번개같이 그
곳을 휩쓸었다. 광채는 허공을 선회하며 담림 앞에 내려서는 주천운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호국지존병이었다.
비록 빛은 잃고 있으나 그 예리함은 여전했다.
우지끈! 퉁탕...!
그 순간, 호국지존병이 스쳐간 곳의 십 장 가량 내의 모든 수목이 반 동강이 되어 넘어졌다.
하늘을 가릴 듯 일어나는 흙먼지... 엄청난 위세였다.
"대단한 자로군..."
주천운은 쓴 표정이 되어 쓰러지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청영은 아슬아슬하게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막 포기하려던 주천운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핏자국?"
주천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담림 속으로 쏘아져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이미 천안통을 시전하여 어둠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있었다. 이즈음 주천운은 달마
역근경주해(達磨易筋經註解)를 거의 다 터득한 상태였다. 주천운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內
家), 특히 권장(拳掌) 방면에서는 소림절학이 독보(獨步)임을 깨닫고 있었다.
청영은 상처를 입은 듯 십여 장 간격으로 핏자국이 나 있었다.
"대단히 교활하군!"
빠르게 전진하던 주천운이 신형을 멈추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부터 핏자국이 사방으로 뿌려져 있고 그리고는 완전히 흔적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백여 장 주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안다..."
주천운은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눈을 감고 이번에는 천이통(天耳通)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스스스...
모든 소리가 엄청나게 확대되어 오기 시작했다.
바람소리와 같은 음향이 백 장 정도 밖에서 들려 왔다.
그것은 단숨에 수십 장을 미끄러지는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뜻밖에 참을성이 없군?"
주천운의 입가에 의미 모를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르릉!
일진광풍이 일어나는 순간에 그의 신형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졌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휘청
거리던 나뭇가지들이 안정을 되찾을 때, 주천운이 있던 곳에서 사십 장쯤 떨어진 곳에서 먼
지를 흠뻑 뒤집어쓴 인영이 나타났다.
그것은 뜻밖에도 바로 주천운이 쫓던 청영이었다.
"무... 무서운 놈! 무당의 전대장교(前代掌敎)인 표운자(飄雲子)도 저놈과 같은 이기어검술은
전개하지 못했었는데..."
그는 온통 피로 물든 어깻죽지를 움켜잡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역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놈이다! 계획을 수정해야 된다..."
그는 이를 악물더니 번개 같은 신법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는 꿈에도 몰랐다.
그의 뒤를 뒤따르기 시작하는 그림자가 있음을, 그는 황궁제일고수라 불렸고 지금은 지존위
의 대장인 정문수라 불리는 초강고수였다.
'대단한데?'
주천운은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가 쫓는 청영의 신법이 자신의 속도에 별로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갈 수 없다! 게 서라!"
꽈르-릉!
일진 굉음이 주위를 진동하는 순간, 주천운의 신형은 섬전과 같이 이십여 장 밖의 청영을
덮치고 있었다.
"감히!"
엄청난 광풍이 몰아쳐 오자 청영은 경악하여 몸을 틀어 미끄러져 소매를 휘저었다.
파팟!
한성(寒星)이 폭발하듯 소매 속에서 쏟아져 주천운을 덮쳤다.
하지만 뇌정군림신법(雷霆君臨身法)은 신법 이전에 하나의 신공이 아니던가? 일단 신법을
전개하면 몸 주위에 강풍( 風)이 일어나 금성철벽(金城鐵壁)과 같은 보호막이 형성되어 그
어떠한 공격이라도 그를 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의 몸은 용화대수미선공으로 거의 금강불괴지신이 되어 가는 중인 것이다.
피피핑!
예리무비한 암기들은 주천운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강풍에 휩쓸려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튕겨져 나갔다.
찌-이익!
"아악!"
비단폭 찢어지는 음향과 함께 그에 못지않은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가 잘못되었다!'
그대로 덮쳐 가려던 주천운은 괴이한 감촉에 문득 몸을 세우고 말았다.
그 쾌속한 주천운의 십이금룡수(十二擒龍手)를 청영은 놀라운 신법으로 벗어났지만 아슬아
슬한 차이로 가슴팍 옷이 잡혀 그대로 쫙 찢겨 나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터진 금속성의 비명과 손끝에 느껴지는 뭉클한 감촉은 대체 뭘 말하는
것인가.
휘청거리며 몸을 세우고 있는 청영의 체구는 뜻밖에 왜소했고 배까지 찢겨진 청의 사이로는
뿌연 여인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숲속의 어둠이 제아무리 깊다 해도 그 속에서 드러난 여인의 가슴은 처절하리만큼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낭패로군!'
주천운은 급히 외면을 했다.
청의여인이 황급히 가슴을 가리며 매섭게 소리쳤다.
"신마금검뢰가 천하의 기남자(奇男子)라 하더니, 이따위 파렴치한일 줄이야!"
뭐라고 할말이 있을 리 없었다.
펑!
말도 채 끝나지 않아서 청의여인이 옥장을 휘둘러 주천운의 가슴을 쳤다.
"윽...!"
짧은 신음과 함께 주천운은 비틀 한걸음 물러났다.
그의 가슴을 치고는 은은히 팔이 저림을 느낀 청의여인의 복면 속의 봉목(鳳目)이 경악으로
커졌다.
'내 파옥신장(破玉神掌)을 피하지 않고 맨몸으로 받아내다니...?'
"미안하오. 사람을 잘못 보았소."
주천운은 약간 당혹한 음성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감히 그녀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
다.
하지만 그는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호신강기가 흩어질 뻔했다. 도대체 이 여인이 누구이기에 이런 능력을...'
주천운은 몸을 돌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은 틀림없으나... 소저는 어떻게 나를 아시오?"
차라리 얻어맞되, 감히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것을 본 청의여인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
다.
'이 사람은 무림인이 아니라 도학군자(道學君子) 같구나?'
그의 태도는 너무도 뜻밖인지라 노기충천했던 청의여인은 묘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밤바람이 돌연 서늘하게 불어왔다.
찢겨진 옷자락이 휘날렸다.
가슴이 서늘했다.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든 청의여인은 옷자락을 부여잡아 가슴을 가린 채
입을 열었다.
"어찌 모를 리가 있겠어요? 바로 당신을 찾아왔는데!"
그녀의 말에 주천운은 의아한 빛을 떠올렸다.
"나를?"
"그래요. 신마금검뢰가 무림사신(武林四神)보다 빠르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정말인가 보러
왔어요!"
여인의 목소리는 은방울보다 더 낭랑했다.
"무림사신?"
주천운이 의아한 빛으로 문득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여인의 신형은 이미 십여 장을 밖으로
쏘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이대로 가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쉽지 않을 거예요!"
여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왔다.
가슴을 드러내놓고서야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운해비영(雲海飛影)?"
그녀의 날렵한 신법을 본 주천운의 뇌리에 문득 네 글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운해비영이라는 이름은 중원사신 중에서 내력이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신비인(神秘人)을 일
컫는다.
운해비영의 운해유영비(雲海遊影飛)는 강호칠대신법에서도 손꼽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정말 운해비영일까.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