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김삿갓(飄飄然亭에서의 회포)29
'표표연정에서의 회포'
김삿갓은 공허 스님과 작별하고 해금강으로 오면서도, 이별의 서글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세속적인 욕망을 일체 떨쳐 버리고 방랑의 길에 오른 지도 이러구러 3,4년!
인정 같은 것은 깨끗이 떨쳐 버렸노라고 자부해 왔던 그였건만, 정작 뜻에 맞는 사람과 헤어지고 보니 마음이 서글퍼 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은, 인정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김삿갓은 불현듯 백낙천의 시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다.
사람은 목석이 아니므로 누구나 정은 있으니
미인은 만나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
미인과 헤어지기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뜻에 맞는 사람과 헤어지기는 진정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삿갓은 이별의 서글픔에 시달리며 오랫동안 묵묵히 걸어오다가, 문득 하늘을 우러러 통쾌하게 웃으며 이렇게 씨부려대었다.
'하하하, 어리석은 김삿갓아! 천애의 방랑객인 네가, 오늘따라 왜 이다지도 지지리 못난 꼴이냐. 만나고 헤어짐은 인생의 항다반사가 아니었더냐!'
자기 자신을 그렇게 꾸짖고 나니 마음이 한결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해금강에 당도해 보니, 겨울 바다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저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솔섬.까치섬 등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기는 했으나,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하도 거칠어, 겨울의 바다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은 오직 만경 창파뿐인데, 하얀 모래밭에서는 갈매기들만이 무심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침 그때 어디선가 고깃배 한 척이 구성진 뱃노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갈매기들은 뱃노래에 놀란 듯 모두들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갈매기와 모래밭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문득 자기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갈매기도 희고 모래도 희고 모두가 희어
모래와 갈매기가 구별조차 어렵구나
어부의 노래 듣고 갈매기가 날아가니
그제야 모래와 갈매기가 제각기로다.
바닷가에는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어차피 정처없이 나선 길이니, 이왕이면 함경도로 발을 뻗어 보고 싶었다.
'관북 천리!'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안변 석왕사는 이태조의 건국 신화가 거려 있는 명소요, 길주.명천은 수많은 고관 대작들이 유배를 갔던 역사의 고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당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우선 오늘밤의 잠자리였다.
백운암에 유숙할 때에는 잠자리 걱정도 없었고, 끼니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공허 스님과 헤어진 오늘부터는 모든 것을 그날 그날의 운수에 맡길밖에 없었다.
(나는 한바탕 호화로운 꿈을 꾸다가, 오늘부터는 나 자신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구나!)
내일의 운명을 모르는 인간으로서는 오히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였다.
안변 땅을 향하여 얼마쯤 걸어오노라니, 깊은 산속에 오막살이 한 채가 나온다. 사립문조차 없는 단간 두옥이었다.
주인을 부르니, 파파할머니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지나가던 나그네올시다.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을까 합니다만...."
백발 노파는 방문을 활짝 열어 주면서,
"우리 집에는 먹을 것이 없어 어떡하지?"
"먹을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잠만 자고 가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서 들어와요."
무언중에 인정이 무르녹는 태도였다.
봉당에 삿갓을 벗어 놓고 방안으로 들어와 보니, 단간방이 비좁기 이를 데 없었다.
방안에는 화롯불을 피워 놓아서, 겻불 냄새가 코를 찌른다.
김삿갓은 초면 인사를 올리고 나서,
"할머니는 자제분이 한 분도 없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자식새끼가 없기는 왜 없을구. 있어도 자그마치 열 명이나 있는걸."
"네? 자제분이 열 명이나 있다구요? 자제분들은 모두들 어디로 가고 할머니 혼자만 사시는 겁니까?"
김삿갓은 적이 놀라며 다시 캐어물었다.
노파는 그런 이야기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지,
"더러는 중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잘 살아 보겠다고 도회처로 떠나 버리기도 하고, 더러는 제 애비를 찾아가기도 하고...."
하고 혼잣말처럼 신푸녕스럽게 씨부려대고 있었다.
"더러는 애비를 찾아가다뇨? 그러면 영감님은 아직 다른 곳에 생존해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아이들의 애비가 모두 네 명이야. 그러나 처음 셋은 모두 죽어 버렸고, 마지막 서방은 아직도 살아 있다우."
"그 영감님하고는 왜 딴살림을 하시는 겁니까?"
"그 사람은 석왕사에서 중 노릇을 하고 있다우. 제 애비를 찾아간 자식들은 모두가 중의 새끼들이야."
너무도 놀라운 대답에 김삿갓은 입을 딱 벌렸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복잡한 과거에 대해서는, 부끄러워서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노파는 추호의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해 주는 것을 보면, 눈앞의 노파야말로 생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삿갓은 웃으면서 다시 물어 본다.
"영감님이 네 분이나 계셨던 걸 보면, 할머니는 젊었을 때 무척 미인이셨던 모양이군요?"
"미인은 무슨 미인이야. 어찌어찌 살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인걸. 여자는 일부 종사 하는 것이 상팔자라지만, 나는 팔자가 기박해 그렇게 됐을 뿐인걸."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고, 뉘우치는 기색도 없었다.
아무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형편되는 대로 살아오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였다.
"많은 자식들과 헤어져 혼자 살아가시기가 외롭지 않으십니까?"
"외롭기는 뭐가 외로워. 이제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걸. 누구나 죽을 때에는 혼자 죽는 것이야."
생과 사를 완전히 초월한 말투였다.
노파는 만사에 달관한 듯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저녁을 대접해야 하겠는데, 우리 집에는 먹을 게 벤벤해야 말이지."
"저는 아무 거나 잘 먹습니다. 할머니가 자시는 대로만 주시면 됩니다."
"국수를 삶아 올 테니 잠시 기다려요."
노파가 부엌으로 나간 뒤에 방안을 둘러보니 천장에는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고, 화로에서는 겻불 냄새가 아직도 풍겨나고 있었다.
김삿갓은 천장의 거미집과 화로의 겻불 냄새를 맡고 있다가, 문득 다음과 같은 회시를 읊었다.
하늘은 높아 잡을 수 없고
꽃은 늙어 벌이 오지 않네.
천장거미줄
화로겻불내
천장의 거미줄과 호로의 겻불 냄새를 비슷한 한문 글자에 맞춰보니, 제법 그럴 듯한 시가 되었다.
그리하여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노라니까, 노파는 소반에 국수 한 사발과 간장 반 종지를 놓아 가지고 들어오더니,
"밥 대신에 국수뿐이니까, 국수를 덜어요."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국수와 간장 종지를 내려다보다가, 거기서 회시 한 수를 또 얻었다.
국화꽃이 쓸쓸한 모래밭에 피어
그림자가 연못에 절반쯤 비치네.
국수한사발
지영반종지
그것은 그것대로 제법 그럴 듯한 시가 되었다.
"어서 자시지 않고 왜 바라만 보고 있어?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그러우?"
"아니올시다. 저도 먹겠으니, 할머니도 같이 드십시다."
김삿갓은 생각조차 못 했던 시를 얻게 된 것이 만족스러워, 국수 한 사발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마침 그때 산너머 마을에 사는 김 부자 댁에서 회갑 잔치를 치렀다고 하면서, 돌림음식을 한 소쿠리 가지고 왔다.
"잔치 음식을 어렇게도 많이 돌려 주시니, 이런 고마운 일이 있나!"
노파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뇌까리며, 음식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
이윽고 주인 노파는 회갑집에서 가져 온 음식을 소반 위에 올려 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손님이 복이 많아서, 내가 이런 좋은 음식을 얻어먹게 되는구먼. 어서 들어요."
말만 들어도 주인 노파의 마음씨가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마음씨가 고우신 덕택에, 제가 이런 좋은 음식을 얻어먹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소반 위에 놓여 있는 음식을 바라보니, 그 음식은 회갑집 큰상물림인 듯 강정,빙사과,대추,복숭아 등 특별 음식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강정,빙사과,대추,복숭아......"
김삿갓은 눈에 보이는 대로 한 가지씩 음식 이름을 외어 보다가, 불현듯 거기서 또 한 수의 시를 얻었다.
가난한 선비가 정자 옆을 지나다가
술에 대취하여 소나무 아래 엎드렸소.
강정빙사과
대추복숭아
한문 글자를 맞춰 보니 그것은 그것대로 시가 되어, 김삿갓은 즐겁기 짝이 없었다.
둘이서 음식을 다 먹고, 떡 한 덩이만이 남자 노파는,
"우리 집에는 겨울이면 토끼 사냥을 하는 개가 한 마리 있다우.
이것은 개에게 줘야 하겠는걸!"
하구 문을 열더니.
"워리,워리! 이것은 네가 먹어라!"
하며 떡 한 덩이를 마당에 내던진다.
그러자 개가 달려와 떡을 주워먹는데, 개는 지금까지 뒷간에서 똥이라도 먹고 있었던지, 몸에서 구린내가 풍기고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떡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 개를 바라보다가, 회시를 또 한 수 생각해 내었다.
달이 옮겨 가니 산 그림자가 달라지고
사람은 장거리에 가서 돈을 벌어 오오.
월이사냥개
통시구린내
통시라는 말은 (뒷간)의 사투리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뭏든 그 모양으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시로 화해 버리니, 보고 느끼는 것이 그렇게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세상이란 본시 각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론에 치우치면 모가 생기고, 정에 약하면 흘러가 버리고, 고집이 세면 살기가 거북상스럽다.
그렇게도 살아가기 어려운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사람이 없는 무인 고도에서 혼자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살기 어려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시가 필요하고, 그림이 필요하고, 음악이 필요하다.
익살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천장에 거미줄이 슬고 화로에서 겻불 냄새가 풍기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가난한 살림이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비참한 현실을 시화하여 시로써 받아들이니, 거기에는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 덕분에 제가 오늘은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
김삿갓은 저녁상을 물리며 간곡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주인 노파는 손을 설레설레 내젓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손님 덕택에 배가 터지도록 먹은걸."
"회갑집에서 할머니를 위해 음식을 가져 왔는데, 그게 어째서 제 덕택이란 말씀입니까."
"그런 게 아니래도 그러네. 평소에는 먹어 볼 수 없던 음식을 손님이 오고 나서 가져 왔으니. 그게 손님 복이 아니고 뭐냐 말야."
노파의 사고 방식은 이기적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타적이다.
자비심이란 본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자 김삿갓은 불현듯 공허 스님의 말씀이 연상되었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사람은 천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언제나 가난에 시달리게 되는 법이랍니다.)
생각하면 어찌 공허 스님의 말씀뿐이랴. 노자도 (족한 줄을 아는 사람은 부자다)라고 말했고, (채근담)의 저자인 홍자성도 (물욕이 없으면 마음이 가을 하늘과 같고 맑은 바다와 같아진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김삿갓은 주인 노파의 가난한 생활을 시로써 미화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정작 노파 자신은 가난에 대해 손톱만큼도 구애되지 않았다. 그나 그뿐이랴. 조그만 공덕조차 남에게 돌리려 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심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려고 하자, 주인 노파는 전송을 하려고 따라 나오며 묻는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는 길인고?"
"글쎄올시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함경도 지방도 한바퀴 돌아 볼까 합니다."
"그러면 함흥이라는 곳에도 들리게 되겠구먼그래?"
"물론 함흥에도 들러 볼 생각입니다."
노파는 그 말을 듣고 나더니 별안간 얼굴에 서글픈 기색을 띠며,
"함흥에 가거든 내 딸년을 한 번 만나 보아 주면 고마우련만, 그년의 주소를 알아야 말이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의 따님이 함흥으로 출가를 했습니까?"
"출가는 무슨 출가야. 함흥에서 기생질을 하고 있다는걸."
"그렇다면 주소를 몰라도 찾아볼 수는 있을 겁니다. 이름을 뭐라고 합니까?"
"아명은 곱단이라고 불렀는데, 기생질을 하면서 이름을 뭐라고 바뀌었다고 하더라...."
노파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불현듯 생각이 난 듯,
"아 참, 이름을 가련 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 그 애가 함흥 사람한테 팔려 간 지 이십 년이 다 되니까, 그애도 이제는 삼십이 가까울 거야."
"알겠습니다. 함흥에 언제 들리게 될지 모르지만, 함흥에 가거든 꼭 찾아보겠습니다."
김삿갓은 노파와 작별하고 다시 나그네의 길에 올랐다.
안변은 관동과 고나북의 접경 지대다. 관동에서 관북 땅으로 접어드니, 산세가 더욱 험준하고 인가도 더욱 희소하였다.
진종일 걸어가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첩첩 태산만이 있을 뿐, 인가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김삿갓은 배가 고프면 솔잎을 따 먹기도 하였고, 때로는 칡뿌리를 캐어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치만은 어디를 가도 절경이어서, 눈요기는 그렇게도 진수 성찬일 수가 없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김삿갓은 좋은 경치를 만나면 밥을 굶어도 배가 불러 오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안변 고을을 향하여 깊은 산속으로 걸어오기를 사흘 만에 처음으로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하였다.
사흘 밤이나 토굴 신세를 져 오다가 인가를 처음 만나니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었다.
오막살이로 찾아가니, 주인은 김삿갓을 두말없이 재워 주겠다고 말한다.
감자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간다는 그 집은 가난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창호지는 몇천 년 전 여와씨 시대의 종이처럼 새까맣고, 방안에는 천황씨 때의 먼지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저녁밥을 특별히 대접한답시고 보리밥을 지어 왔는데, 보리가 몇십 년이나 묵은 쌀인지, 보리밥 빛깔이 새빨갛게 절어 있었다.
김삿갓은 하룻밤 신세를 지고 나서, 다음날 아침 그 집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계곡따라 종일 가도 사람 하나 못 보더니
겨우겨우 강가에서 초막 한 채를 찾았소
문에 바른 창호지는 여와 때의 종이요
비를 들어 방을 쓰니 천황 때의 먼지로다.
새까만 그릇들은 우나라 때 구운 건가
새빨간 보리밥은 한나라 때 곡식인가
떠날 때 주인에게 고맙다 말했지만
간밤 일 생각하면 암만해도 입맛 쓰네.
현실이 아무리 고달파도 그것을 익살스럽게 시로써 읊어 버리면, 그 나름대로 즐거웠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관북 땅으로 들어선 지 열흘 만에 (가학루)라는 유명한 정자에 도달하였다.
안변 고을의 진산은 학성산이다. 가학루는 학성산 동쪽 언덕 위에 동해 바다를 멀리 굽어보며 날아갈 듯이 솟아 있는 정자다.
다락의 팔작 추녀들이 모두 하늘을 향하여 치솟아 있어서, 멀리서 바라보니 금방 날아갈 것만 같은 정자였던 것이다.
김삿갓은 다락 위로 올라와,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가학루의 도리에는 시인 묵객들이 남겨 놓은 수많은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었다.
김삿갓은 고려조의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시에 유난히 시선이 끌렸다.
묻노니 이 다락을 누가 세웠던고
내 이제 다락에 올라 오래 머무노라
십 년 세월 헛되이 모든 일 잊었다가
옛 싸움터 바라보니 눈물이 절로 솟네.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인지라, 옛날의 싸움터만 보아도 나라의 장래가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 옆에는, 이조 개국 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시도 걸려 있는데, 그 시의 내용은 정몽주의 시와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영의정께서 가학루에 오르시어
보고 느낀 시 를 현판에 남기셨다
강산이 아무리 좋아도 내 땅은 아니니
세월만 덧없이 물따라 흘러가네.
정도전이 정몽주의 시를 읽어 보고 나서 그런 시를 지었는지, 그에 대한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영의정 이라는 칭호가 정몽주를 기리킨 말인지, 김삿갓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의 내용으로 보아 정몽주는 자나깨나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도전은 (강산이 아무리 좋아도 내 땅은 아니라)고 읊은 것을 보면, 그는 진작부터 새나라를 일으킬 야망을 품고 있은 것이 확실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똑같은 산수를 바라보더라도, 작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시의 내용이 제각기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학성산 서쪽에는 (표표연정)이라는 또 하나의 누각이 있다. 동쪽의 가학루와 쌍벽을 이루는 서쪽 누각인 것이다.
"가학루보다는 서쪽에 있는 표표연정이 더욱 좋으니, 그쪽에도 한번 가보시죠"
누가 그렇게 일러주기에 김삿갓은 서슴지 않고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과연 표표연정은 뛰어난 누각이었다. 삼방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고 흐르다가 여기서는 물결이 일렁거리는 용당 여울을 이루고 있는데, 표표연정은 학성산에서 장둑처럼 길게 뻗어 나온 반도의 코숭이에 날아갈 듯이 솟아 있었다. 따라서 푸른 여울물과 하얀 모래밭을 한꺼번에 굽어볼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김삿갓은 표표연정이라는 그 이름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도연명의 (귀거래사)라는 글에 나오는,
배는 흔들려 가볍게 드노이고
바람은 솔솔 옷자락에 불어오네.
라는 명구가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르면 모르되 표표연정의 출전은 거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정작 알고 보니, 표표연정의 풍치는 가학루 따위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뛰어난 누각이었다.
주위에는 고목이 울창하여 숲속에서는 꾀꼴새들이 영절스럽게 울고 있었고, 바다가 가까운 탓인지 남대천 물가에서는 갈매기들이 부산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다락 위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펴보자 시흥이 도도해왔다. 그와 동시에 술 생각이 불현듯 간절해 와서,
"혹시 이 근방에 술집이 있을까요?"
하고 다락 위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이 아닌가.
어쩔 수 없어 맨숭맨숭한 정신으로 표표연정에 대한 예찬의 시를 이렇게 읊었다.
안변 땅을 두루 돌다 표표연정에 올라와
술을 찾고 시를 쓰며 물갈래를 묻노라
고목은 정이 많아 꾀꼴새가 모여들고
강물은 걷힘이 없어 갈매기가 나네.
김삿갓은 시를 한 수 읊고 나자, 불현듯 가학루에 걸려 있었던 정몽주와 정도전의 시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들은 정치 색이 농후한 영웅 호걸들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시에서는 무언중에 풍운미가 풍겨 나고 있었다.
그러나 영웅 호걸이었던 그들이 모두 죽어 버린 지금에는, 세상은 태평 성대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또 한 수 읊었다.
영웅들 가고 나니 세상은 조용하여
길손은 다락 위에 한가롭게 앉았노라
관동 땅을 아직 두루 보지 못했으니
기러기를 따라서 장주에도 가보리.
김삿갓은 자신을 아무 야심도 없는 순수한 시인으로 자처하는 동시에, 세태 변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숨 가쁘게 살아온 정몽주와 정도전 같은 영웅들을 은연중에 비꼬아 준 것이었다.
"이 정자의 이름을 왜 표표연정이라고 짓게 되었는지, 손님은 그 유래를 아시나요?"
문득, 누군가가 김삿갓에게 표표연정의 유래를 묻는다.
김삿갓은 모른다고 사실대로 대답할밖에 없었다.
"나는 모릅니다. 표표연정이라는 이름에는 무슨 유래가 있는겁니까?"
김삿갓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아는 체하고 나온다.
"나는 들은 풍월이어서 잘 모르기는 하오마는, 먼 옛날에 신선이 여기서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간 일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곳에 정자를 세운 뒤에 (신선이 바람처럼 가볍게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는 뜻에서, 정자의 이름을 표표연정이라고 지었다는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전설이었다.
전설이란 덮어놓고 믿어 버려야 하는 것이지, 미주알고주알 따질 일은 아니다. 김삿갓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표표연정에 그런 전설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서 고맙소이다."
문득 깨닫고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어 서녘 하늘에는 놀이 붉게 물들었고, 산기슭에서는 저녁 연기가 아련히 감돌고 있었다.
김삿갓은 신선ㅇ디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광경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아서 다시금 시가 없을 수 없었다.
기나긴 방축 끝에 솟아 있는 표연정아
학은 가고 빈 다락에 잡새만 우는구나
십 리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풍경은 하나인데 물은 동서로 갈려 있네.
신선이 가신 자취 구름 속에 아득하여
나그네의 회포가 석양에 애달프다
가신 곳 어디던가 물어 볼 길 없으니
감감한 그 소식 꿈에선들 어이 알리.
표표연정에서 석왕사까지는 산길로 백여 리. 김삿갓은 표표연정을 떠난 지 닷새 만에야 석왕사에 당도했다.
장안사를 떠나올 때 공허 스님은 웃으면서 김삿갓에게,
"혹시 석왕사에 들르시게 되거든 반월 행자를 찾으십시오. 지능이 좀 모자라는 편이기는 하지만 인품만은 선량한 사람이니까, 선생을 정성껏 도와 드릴 것이옵니다."
하고 말한 일이 있었기에, 김삿갓은 석왕사에 도착하는 길로 반월 행자를 찾았다.,
나이가 삼십 가량 되어 보이는 반월 행자는 김삿갓을 만나자, 대뜸 이렇게 나오는 것이었다.
"삿갓 선생님이시죠?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을 통해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공허 스님께서 무슨 기별이 있었소이까?"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께서는 엊그제 특별 전갈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공허 큰스님의 전갈이 없었더라도, 삿갓 선생을 몰라 볼 정도로 무식한 저는 아니옵니다."
반월 행자가 얼마나 유식한지 김삿갓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만나는 댓바람에 유식을 장담하고 나오는 데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병에 물이 꽉차 있으면 물소리가 안나는 법이다. 그러나 반병밖에 안 들어 있는 물은 병을 조금만 흔들어도 소리가 요란한 법이 아니던가.)
김삿갓은 그런 생각을 해보며, 반월 행자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날 저녁 식사가 끝난 뒤였다.
반월 행자는 김삿갓과 마주 앉더니, 따지듯이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께서 삿갓 선생과 시짓기내기를 하셨다가 크게 참패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도무지 상식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시라는 것은 피차간에 주거니받거니 하는 데 즐거움이 있는 법인데, 거기에 무슨 (참패)가 있고,(승리)가 있단 말인가.
김삿갓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을밖에 없었다.
"귀공은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듣고 그런 말을 하시오. 공허 스님은 워낙 시를 좋아하셔서, 나더러 시로써 문답을 하자고 하시기에, 우리는 몇 마디 수작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거기에 참패가 어디 있고 승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도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께서 소승에게 전해 보내신 말씀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공허 스님이 어떤 말씀을 전해 보냈기에 그런 오해를 하오."
"오해가 아닙니다. 공허 큰스님께서 저에게 전해 보내신 말씀을 곧이곧대로 옮기면,(삿갓 선생은 이태백보다도 위대한 시인이어서 누구도 당해 낼 수 없는 어른이니까, 너는 행여 섣불리 덤비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공허 큰스님께서 저에게 그런 주의까지 주신 것을 보면, 공허 큰스님께서 삿갓 선생에게 시짓기에 참패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김삿갓은 소리를 내어 웃을밖에 없었다.
"귀공은 공허 스님이 나에게 참패하신 줄 알고, 무척 통분한 생각이 드는 모양이구료."
"아닌게 아니라,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께서 참패하신 것을 알고, 저는 울분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반월 행자는 말을 할 때마다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이라는 말을 반드시 전두사로 내세운다. 그러나 공허 스님 자신은 과연 반월 행자를 제자로 인정하고 있는지, 그 점은 크게 의심스러웠다.
그리하여 의식적으로 슬쩍 이렇게 비꼬아 보았다.
"스승을 위해 울분을 금치 못한다니, 그야말로 갸륵한 제자이구료. 공허 스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면 무척 만족스러워하실것이오."
그러나 반월 행자는 그 말이 조롱인 줄도 모르고 다시 이렇게 나왔다.
"사제지간에 그만한 의리도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께서 삿갓 선생한테 그처럼 참패를 당하셨다니, 솔직이 말해 나는 ㅡ제자의 도리로서 그냥 있을 수가 없사옵니다."
김삿갓은 웃을밖에 없었다.
"하하하, 그냥 있을 수 없다면, 스승을 위해 나에게 주먹다짐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오?"
반월 행자는 주먹다짐이라는 소리를 듣고 손을 설레설레 내젓는다.
"주먹다짐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불자는 본시 자비심이 많아서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쓰지 않는 법이옵니다."
"그러면 스승을 위해 가만있지 못하겠다는 말은 무슨 말이오?"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께서 시짓기내기로 선생한테 참패를 하셨다니까, 나는 글풀이내기로써 선생과 겨루어 볼 생각입니다. 선생은 물론 응해 주시겠지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또 한번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하, 스승이 참패했다니까 이번에는 제자가 스승을 대신하여 글풀이내기를 해보자는 말인가보구료. 그렇습지요?"
"맞습니다. 삿갓 선생은 나의 요구에 응해 주실 용기가 있으십니까?"
김삿갓은 미소를 지으며, 반월 행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어느 사회에나 얼간이 같은 인간이 한두 명쯤은 으례 있게 마련인 법이다. 반월 행자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얼간이가 아니고서야 공허 큰스님을 이겨 냈다는 사람한테 어찌 감히 글풀이내기를 도전해 올 수 있을 것인가.
김삿갓이 아무 대꾸도 안하니까, 반월 행자는 더욱 자신감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선생은 왜 대답을 못 하십니까. 나하고는 겨룰 용기가 없어서 대답을 못 하는 건 아니겠지요?"
김삿갓은 어쩔 수 없어 입을 열었다.
"글풀이내기는 주먹다짐과 달라서, 용기만 가지고 될 일은 아니오. 귀공이 스승의 참패를 보복하기 위해 글풀이내기를 하자고 덤비니까, 어쩐지 겁이 나서 못 견디겠구료."
김삿갓은 얼간이 같은 인물을 상대로 글풀이내기를 할 생각은 꿈에도 없어, 적당히 휘갑을 쳐버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반월 행자는 김삿갓이 겁에 질려 꽁무니를 빼는 줄 알았는지, 점점 큰소리를 치고 나온다.
"뭐 그렇게까지 겁을 내실 건 없습니다. 나의 스승이신 공허 스님을 꼼짝못하게 만드셨다는 걸 보면, 선생은 실력이 대단하신 분인 것만은 틀림이 없으시니까요."
반월 행자가 그토록 집요하게 나오니, 김삿갓은 형편상 물러설 수가 없게 되었다.
"귀공이 그렇게까지 소원이라면 내기를 한번 해봅시다그려."
반월 행자는 그제야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 만만 하게 말한다.
"삿갓 선생은 진실로 용기가 대단하시옵니다. 그러면 내가 문제를 낼 테니, 한번 풀어 보십시오."
그리고 반월 행자는 한문 두 구절을 써 놓더니,
"이것이 무슨 뜻인지 한번 풀어 보시지요."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반월 행자가 써놓은 한문 두 구절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글자는 모두가 열두 자뿐으로, 모를 글자는 한 자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는 전연 알 길이 없지 않은가.
"나는 이 글이 무엇을 뜻하는 글인지, 전연 알 길이 없구료. 도대체 이 글은 어느 책에 나오는 글이오?"
반월 행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느 책에서 나왔거나, 그런 것은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글이 무엇을 뜻하는 글인지, 그것만 풀이해 주시면 됩니다."
김삿갓은 어색한 얼굴을 지으며, 한문 글자를 억지로 직역을 해 보았다.
"미나리는 아재비는 있어도 조카가 없고,쥐는 며느리는 있어도 시어머니가 없다."
원문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그렇게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도 아닌 미나리라는 식물에 무슨 아재비와 조카가 있으며, 쥐에게 무슨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있단 말인가.
김삿갓은 생각다못해, 손을 들어 버리고 말았다.
"암만 생각해도 나는 모르겠구료.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요?"
반월 행자는 의기 양양한 얼굴이 되면서,
"결국 항복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따져 묻는 것이 아닌가.
"모르는 것을 어떡하오. 그러니까 항복할 수밖에 없지요."
"선생은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한테는 승리하셨지만, 그 어른의 제자인 나에게는 항복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상대방이 스승이거나 제자거나 간에,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이 항복하고 배울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오. 도대체 이 글이 무슨 소리요?"
반월 행자는 그제야 무슨 선심이나 쓰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이 모르신다니 내가 풀이를 해드리죠. 이 글이 무슨 뜻이냐 하면, 미나리 아재비라는 풀은 있어도 미나리 조카라는 풀은 없고, 쥐며느리라는 벌레는 있어도 쥐시어미라는 벌레는 없다는 뜻이랍니다. 아무리 박식하다는 삿갓 선생도 그것만은 모르셨던 모양이시죠? 하하하."
김삿갓은 반월 행자의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 글이 그런 뜻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아뭏든 귀공은 매우 유식하시오."
그것은 글풀이도 아무것도 아닌, 말 장난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기에, 김삿갓은 짐짓 유식하다는 말로 은근히 비꼬아 주었다.
그러나 반월 행자는 유식하나는 말에 신바람이 나는지,
"선생은 참패해서 무척 억울하신 모양이니, 내기를 한 번 더 해드리죠. (춘절추,주적야)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뜻인지 아시옵니까?"
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춘절추,주적야)
김삿갓은 반월 행자가 종이 위에 써보이는 글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 역시 알 수 없는 글월이었다.
반월 행자는 학문을 토론하는 것이 아니고 말 장난을 부리는 것이 분명하기에, 김삿갓은 그 요령에 따라서 풀어 볼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춘절추,주적야)라는 글을 우리말로 (봄에 가을을 걲고, 낮에 밤을 딴다)하고 두세 번 외어 보다가, 별안간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아! 무슨 뜻인지 알겠소이다. (춘절추, 주적야)란 (봄에 갈을 꺾고, 낮에 밤을 딴다)는 말이구료. 어떻소? 내 말이 맞지요?"
반월 행자는 그 말을 듣고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반문한다.
"선생은 이 문제를 본시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옵니까?"
"본시부터 알고 있은 게 아니라, 당신식으로 해석해 보니까 가을은 갈과 통하고 밤은 밤과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오?"
"맞습니다. 그렇게도 잘 알아맞히신다면 한 문제를 더 해보십시다."
반월 행자는 은근히 약이 오르는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다음과 같은 글을 또 써보인다.
"이 글이 무슨 뜻인지, 한번 풀어 보세요. 아무러한 삿갓 선생도 이 글만은 풀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김삿갓은 종이에 써놓은 글을 몇 번이고 외어 보았다. 글자는 모를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문장을 해석해 보아서는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글자대로 해석하면,
"새가 날아가니 나뭇가지가 이월이요, 바람이 불어오이 나뭇잎이 팔푼이다."
라고 해서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뜻이 통하지 않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것도 말 장난의 요령으로 풀어 볼밖에 없었다.
(나무에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 버리면 나뭇가지가 흔들흔들 흔들리게 될 것이고, 바람이 불어오면 나뭇잎은 나풀거릴 터인데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김삿갓은 거기까지 생각해 보다가 별안간 무릎을 치며,
"그것도 알 수 있는 소리요!"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엣? 그것도 아시겠다구요? 알고 계시거든 말씀을 해보세요."
김삿갓은 자신 있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새가 날아가니 나뭇가지가 한달한달 흔들려서 두 달이 된다.)는 소리요. 또
(바람이 불어오니까 나뭇잎이 너풀너풀 흔들려서 팔 푼이 된다)는 소리요. 어떻소? 내 말이 틀림이 없지요?"
"..........."
반월 행자는 대답을 못 하고 입만 딱 벌린다. 김삿갓의 해답이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쉽게 알아내는 것이 암만해도 사상쩍어 마침내 이렇게 중얼거렸다.
"선생은 옛날부터 이 문제를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반월 행자는 김삿갓의 실력을 좀처럼 인정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이라는 말 속에는 (네가 만약 그 문제를 옛날부터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토록 어려운 문제를 그렇게도 쉽게 풀지는 못했으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물론 반월 행자를 상대로 실력 승강이를 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기에 너털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전부터 알고 있었거나 어쨌거나 간에 해답만 옳게 했으면 그만 아니오?"
"실상인즉 저는 지금까지 유명한 학자님들과 이런 내기를 여러번 해보았지만, 제대로 알아맞힌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선생만은 척척 알아맞히니, 그것은 옛날부터 알고 계셨던 증거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렇다고 생각되거든 그렇게 믿고 있으면 될 게 아니오."
그러나 반월 행자는 암만해도 약이 올라 못 견디겠는지,
"그러면 한 문제만 더 해보실까요?"
하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웃을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하고 잠이나 잡시다. 이런 내기에 자꾸만 계속하다 보면 내가 밑천이 드러나겠소."
"이제 그만하고 잠이나 잡시다. 이런 내기를 자꾸만 계속하다 보면 내가 밑천이 드러나겠소."
"아닙니다. 한 번만 더 해보십시다. 내가 문제를 써놓을 테니, 풀어 보세요."
그리고 반월 행자는 종이에 이렇게 써놓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옵니까?"
반월 행자는 의기 양양하게 묻는다.
김삿갓은 그 글을 대뜸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김삿갓 자신도 옛날에 그와 비슷한 글 장난을 해본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 전의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김삿갓을 찾아와 부고문을 써달라고 하면서,
"사람은 살아 있을 때에는 몸이 버들버들한데, 죽고 나니까 몸이 꼿꼿해지데요."
하고 말하기에 김삿갓은 부고문을 장난삼아,
(버들버들 꼿꼿)
라고 써준 일이 있었던 것이다.
반월 행자가 제시한 문제는 바로 그와 비슷한 문제이기에 김삿갓은 대번에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아주 쉬운 문제요. 꽃나무는 꼿꼿하게 서 있고, 솔바람은 솔솔 부러온다는 소리요."
반월 행자는 그 대답을 듣고, 또 한번 입을 딱 벌린다.
"선생이 이 문제를 그렇게도 쉽게 아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그러면 한 문제만 더 해보십시다."
이에 김삿갓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진력이 나서 못 견디겠으니 이젠 그만합시다."
그러나 반월 행자의 고집은 황소 고집이었다.
"한 번만 더 해보고 다시는 안할 테니, 한번만 더 해주세요."
"좋소이다. 그러면 문제를 내보시오."
김삿갓은 어쩔 수 없어 또 응낙하였다.
반월 행자는 어떤 문제를 내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궁리에 잠겨 있더니,
"옳지! 이 문제라면 모르실 거야."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다음과 같은 글월을 써보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반월 행자가 보여 주는 문장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대뜸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건 너무도 쉬운 문제요. 이런 문제라면 누가 못 풀겠소?"
"엣? 이 문제가 쉬운 문제라구요? 선생한테는 그렇게도 쉬운 문제로 보이옵니까?"
"내가 아니기로, 글줄이나 배운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를 누가 못 풀겠소이까?"
그러나 반월 행자는 김삿갓의 말을 선뜻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도 자신이 있거든 어디 풀이를 해보시죠."
"내가 풀이를 할 테니 잘 들어 보시오.
집이 가난하면 친구가 적다는 소리요, 옷이 낡으면 이가 많아진다는 소리가 아니고 뭐겠소. 어떻소? 내 말이 틀림없지요?"
김삿갓이 큰소리를 치고 나오니, 반월 행자는 그제야 머리를 깊이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과연 삿갓 선생은 공자님보다도 더 훌륭하신 어른이심을 이제야 알아 모시겠습니다. 나의 스승이신 공허 큰스님께서 선생한테 시짓기내기에 참패하신 사실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선생은 그렇게도 어려운 문제를 어쩌면 그렇게 쉽게 알아내시옵니까?"
"학문 토론이 아닌, 단순한 글 장난을 가지고 무얼 그처럼 대견스럽게 생각하시오?"
"아니옵니다. 선생처럼 훌륭하신 어른은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반월 행자는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저는 오늘부터 삿갓 선생을 스승으로 받들어 모실 생각입니다.
스승께서는 어리석은 제자의 큰절을 받아 주시옵소서."
하고 말하며 김삿갓에게 큰절을 넓죽 하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내가 오늘은 생각조차 못했던 제자를 얻게 되었구료."
반월 행자가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겠다는 말은 (최대의 경의를 표한다.)는 말과 같은 뜻인 것 같기에, 김삿갓은 웃으면서 큰절을 받고 나서,
"내가 석왕사에 오래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지만, 있는 동안에 구경이나 잘 시켜 주시오."
하고 말했다.
"그 문제라면 염려 마시옵소서. 석왕사에 대해서는 제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뭐든지 물으시는 대로 제가 설명을 해올리겠습니다."
반월 행자는 좀 모자라는 데가 있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선량한 인간이었다.
다음편 -대왕의 天命- 계속
소설 김삿갓
지은이 정비석
옮긴이 주태백이
세상에 제 지식 자랑하는 자가 가장 어리석다고 하더니
공허 스님이 과연 반월 행자를 두고 한 말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