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장 회오리치는 음모(陰謀)의 장(章)
황산(黃山) 대혈겁(大血劫)!
한 달 전에 일어난 황산의 대참사는 이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때 죽은 인원의 수는 모두 구백칠십이 명, 상처 입지 않은 자는 전무(全無)! 전체 사상자
의 숫자는 추정불가였다.
그것은 엄청난 태풍을 몰고 오기에 족한 대사건이었다.
천제문(天帝門)!
암중에 숨어 있던 이 가공할 집단의 힘이 천하 무림인들의 뇌리를 강타하며 드러난 것이다.
천하무림은 그들의 잔인무도한 수단에 전율과 분노를 함께 느껴야 했다.
혈마소후(血魔簫后)와 제주(帝主)란 이름은 저주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시신봉의 절반을 폐허로 만든 공포의 여마(女魔), 그 혈마소후가 그 와중에도 천하가 공인하
는 환우제일미( 宇第一美)로 떠오른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천지회(天地會)!
지난 세월 동안, 존재하는지 마는지 움직임조차 미미하던 천지회는 황산에서의 단 한 차례
출현 이후 또다시 사라져 버렸건만 이 이름은 이미 천하인이 중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천지상인(天地上人).
무림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천지회의 회주,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무엇을 노리고 있
는가?
들끓는 무림의 여론 속에 혈마소후보다, 제주보다, 천제문보다, 천지회보다 더욱 뚜렷이 드
러난 인물 하나가 있었다.
신마금검뢰(神魔琴劍雷) 상관천(上官天)!
황산 대혈겁 이후, 그의 이름은 중천의 태양보다 더욱 뚜렷했다.
홀홀단신, 놀라운 기지(機智)로써 오백여 명의 군웅을 구출해낸 절대영웅(絶對英雄)!
그는 천하최강의 신비문인 뇌정검문(雷霆劍門)의 문주이다!
그의 신검(神劍)에 마후(魔后)가 피를 토하며 거꾸러지고, 그의 마금(魔琴)에 제주(帝主)가
꼬리를 말았다. 교활한 천지상인이 그의 위엄에 뒷걸음 치니...
오오! 천하를 진동하는 그 이름 신마금검뢰...
그의 행적은 무림 중에 이미 한편의 가사(歌詞)로 만들어져 회자되었다.
그것은 상관천이란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사해무림대회(四海武林大會)는 이제 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천제문도, 천지회도... 그리고 주천운의 모습도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태풍직
전의 고요인 양 그들의 종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종적이 강호상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천하무림까지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황산 대혈겁 이후, 무서운 피의 폭풍(暴風)이 숨쉴 사이도 없이 연달아 무림을 후려치고 있
는 것이다.
진주 언가(彦家)의 멸문지화, 뒤를 이어 태극문(太極門)과 용호방(龍虎 ), 광동무관(廣東武
館)...
개방의 금룡분타가 괴멸되더니 드디어는 구대문파의 하나인 점창파가 피로 씻겼다. 그럼에
도 그것이 누가 하는 짓인지 단서조차 남지 않았다.
흉수의 세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천사곡(天邪谷)이 피로 씻기고 봉곡(封谷)한데 이어 구대문파의 종남파(終南派)가 점창파에
이어 막대한 타격을 입고 봉산(封山)을 선포했다.
흉보(兇報)는 연일 꼬리를 물고 있었다.
무림은 공포로 떨고 분노로 떨었다.
구대문파에서 긴급동맹을 소집해 추적대를 만들었으나, 추적대가 동이면 혈겁은 서쪽에서
일어났다.
상황은 명백했다.
사해무림대회 이전에 무림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의 뇌리에는 은연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황산 대혈겁 이후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성한 억측만이 무림을
떠돌 뿐이었다.
* * *
죽음의 운무(雲霧)가 피어올라 천험(天險)의 절지로 불리는 곳이 있다. 그 깊숙한 곳에 거대
한 누각이 하나 솟아 있음을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제천각(帝天閣)은 그 절지의 중심이다.
호화의 극을 이룬 대청은 그 제천각의 중앙에 자리한다.
"남궁가와 구대문파가 주축이 되어 극비리에 결성한 멸마맹(滅魔盟)의 움직임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본문에 보고되고 있습니다."
기찰당주(機察堂主)로 불리는 냉혹한 성품의 노인은 머리를 조아렸다.
"상황의 진전은?"
착 가라앉은 음성, 기찰당주의 앞에 늠연히 앉아 있는 것은 바로 제주였다.
"오늘 이후 구대문파는 육대문파가 될 것입니다. 그 외 각지의 분타에서도 예정대로 움직이
고 있습니다."
"그자의 종적은 찾았느냐?"
"만리추종이 이미 단서를 잡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만리추종이 믿을 수 있는 자냐?"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뒤에는 언제나 감시가 붙어 있습니다."
기찰당주가 고개를 들었다.
"신마금검뢰의 신분은 마치 안개 속과 같습니다. 신의 졸견으로는 그는 일반 강호인이 아닙
니다."
제주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후단의 일을 망친 호국지존... 그자와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본인..."
"후후후... 과연 기찰당주답군! 본주의 생각도 그렇다. 그의 무공은 호국지존보다 고강하니
본인일 가능성은 희박하나 그 가공할 검술 등의 무공초식이 약간은 비슷하니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기찰당주가 머리를 조아렸다.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곤란?"
"예, 멸마맹에서 무림고수들이 각개 격파당한다는 판단 아래 사해무림대회까지 무림정예 고
수들을 멸마맹으로 모으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주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사해무림대회 전까지 무림의 힘을 반감시킨다는 우리의 계획이 어긋나게 된다는 거겠지?"
"그, 그렇... 습니다."
"후후후... 기찰당주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되었군!"
"예? 무슨..."
"되었다, 물러가라!"
제주의 음성이 싸늘해졌다.
기찰당주가 예를 갖추며 황망히 물러난 후, 제주는 의자에 깊숙이 파묻혔다.
"무림의 힘을 분산시킨다? 사해무림대회? 흐흐... 어리석은 소리, 본주가 정녕 상관천에게 당
해서 물러난 것인 줄 아는가?"
득의한 미소가 제주의 입가에 떠올랐다.
"앞으로 열흘 후면 문주와 천제구로가 극비리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때면 백팔 명의 금강마
인(金剛魔人)이 완성된다! 그들의 힘은 실혼마인을 몇 배 능가하는 것이지!"
그의 중얼거림은 실로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금강마인이라는 이름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능력이라는 점에서는 실혼마인과 금강마인은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실혼마인은 전신의 잠력을 한꺼번에 모조리 쏟아내기에, 한 번에 한 시
진 이상을 움직이지 못한다. 만약 한 시진 이상 계속해 움직이면 전신의 잠력이 다해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마인은 그런 제약이 없다. 거기다 실혼마인과는 달리, 금강마인의 신체는 도검불
침의 가공함을 자랑한다.
"비록 멸마맹에 고수를 모아도 그들은 강호 여기저기서 터지는 혈겁을 구경할 수는 없다...
동분서주하면서 남은 힘을 모으고 사해무림대회를 기다리면서 이를 갈겠지! 후후후... 그것
이 바로 내가 기다리는 것이다!"
파삭!
태사의의 단목으로 된 손잡이가 제주의 손아귀에서 가루가 되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해무림대회는 열리지 않는다. 열리기 열흘 전에 멸마맹은 본문의 주력
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오오-이 가공할 음모!
"쥐새끼 같은 천지상인, 그자는 어부지리를 노리며 눈치를 보다가 멸마맹이 멸망당하는 것
을 보고서야 황급히 뛰어나오겠지! 그때 그자는 수망대어(守網待魚)의 뜻을 알게 되리라! 으
하하하..."
제주의 웃음소리는 제천각을 뒤흔들었다.
수망대어(守網待魚)란 그물을 펴놓고 들어오는 고기를 기다린다는 뜻이 아닌가?
웃음을 멈춘 제주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날로 북경도 끝이다... 그때 국경에선 기다리고 있던 강병(强兵) 삼십만이 침공을 시작하
고 드디어 나는 군매와 더불어 황제가 된다! 천하의 주인인 야율극리(耶律克利)!'
* * *
그와 같은 시각, 청수한 모습의 노인 한 명이 늘어진 휘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명대로 알아 낼 수 있는 천제문의 모든 행동을 멸마맹에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공손히 말하는 노인은 놀랍게도 천지회의 회주인 천지상인(天地上人)이었다.
"그가 만약 호국지존, 오황야가 틀림없다면 결코 무림고수를 한데 모아 피해를 줄이자는 따
위의 졸략(拙略)은 쓰지 않을 것이다!"
휘장 안에서 아주 위엄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하오면?"
천지상인은 고개를 들었다.
"호국지존은 제주 따위가 상대할 인물이 아니다! 천제문주는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
휘장 안의 신비인은 말을 끊었다.
그러자 대번에 주위에 숨막힐 듯 무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기도는 정녕 놀라운
것이었다.
천지상인은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계획을 바꾼다! 천지회의 모든 힘을 발동한다!"
"모, 모든 힘이오니까?"
"그렇다! 모든 힘이다! 십구 명의 회주에 속한 십구 개 친위대(親衛隊)! 천지인(天地人)의 삼
군(三軍)! 천하의 이백사 개 분타, 그리고 본제(本帝)의 삼 개 친위군(親衛軍)까지도!"
"사, 삼 개 직속 친위군까지입니까?"
천지상인은 숨이 막히는 듯 입을 벌렸다.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세력인 것이다.
십구 명의 회주, 그들만 나서도 천하는 요동할 지경이거늘...
* * *
남궁세가(南宮世家).
장안(長安)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여산(驪山)에 위치한 유서 깊은 무림세가(武林世
家)가 바로 이곳이다.
당세의 천하제일가로 불리는 이곳은 황산 대혈겁 때 공격해 온 천제문을 격퇴하면서 그 명
성이 더욱 높아져, 지금은 멸마맹의 총단이 되어 있었다.
바로 천하무림의 최중지인 것이다.
남궁가의 그 방대한 건축의 후원, 깊숙한 곳에는 한 채의 고아한 누각이 서 있었다.
목조 이층의 그 누각의 주위에는 송백림이 무성하고 허락을 받기 전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창궁헌(蒼穹軒)이라 이름한 그 누각은 남궁가의 시조인 천애유신(天涯儒神)이 기거하던 곳
으로 당금에 이르러서는 가주만이 출입할 수 있는 금지(禁地)가 된 까닭이었다.
그 창궁헌의 밀실에는 휘황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놀랍게도 그 빛은 한 사람의 몸에서 발산되고 있는 것이었다.
장엄이라는 말 이외에 또 어떠한 형용사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의 전신에는 찬란
한 서기가 연꽃과 같이 피어나고 그의 어깨 위에는 달무리와 같은 후광이 은은히 빛나니,
마치 불타(佛陀)가 환생한 듯한 모습이 아닌가!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서기가 옅어지고 거기 앉아 있는 것이 흑의의 유생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서기는 마치 모래 속으로 물이 스며들 듯 흑의유생의 몸으로 스며들어갔다. 드러
난 그 모습은 주천운이었다.
그는 더없이 맑아진 두 눈을 천천히 떴다.
"쓰지 않아도 이르는 경지... 드디어 용화대수미선공이 십성에 이르렀다!"
주천운의 그 말은 용화대수미선공을 운기하지 않아도 그의 전신이 금강과 같아졌음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지난 한 달은 그가 입은 내상을 회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수습한 무공을 연마하는 시
간이기도 하였다.
* * *
무림제갈 남궁천!
대외적으로 멸마맹의 임시 맹주인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주천운의 앞에 앉아 있었다.
"이것이 본맹 내에 침투해 있는 첩자의 명단입니다."
그는 주천운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다.
"멸마맹의 수뇌급은 모두 오십 명 가량, 그 중 첩자가 열이 넘는군!"
두루마리를 훑어본 주천운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실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수뇌급 중에서 첩자가 열이 넘다니...
"이젠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로 인해 본맹의 모든 행동이 사전에 누설되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분노한 남궁천의 음성에 주천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는 없소... 멸마맹의 일은 조금씩이라도 밖으로 누설되어야만 하
오!"
두 사람의 어조는 변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궁천은 주천운이 바로 오황야인 호국지존임을 알게 된 데다 그의 끝없는 지혜에 완전히
심복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어느 정도의 피해가 나는지 아시면서도 그러십니까?"
"그래도 기다려야만 하오."
"사해군웅대회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멸마맹은 정말 망하고 맙니다. 궁여지책으로 고수들을
맹내(盟內)에 모았으나 밖에서 처자가 죽어 가는데 고수들이 어찌..."
"사해무림대회는 열리지 않소."
주천운은 잘라 말했다.
"...!"
남궁천은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쪽은 양동(陽動)이고 이쪽은 고육(苦肉)입니까?"
주천운은 담담히 미소했다.
"맹의 일로 너무 시달려 심기가 흐려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변함이 없소..."
남궁천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지존과 같이 있기 전에는 좀 많은 것을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단순해지는
것 같습니다."
빙그레 웃던 주천운이 정색을 했다.
"제주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오. 그는 절대로 공평한 입장에서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고 더
우기 사해무림대회 때까지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오!"
"그럼 이대로 적을 기다립니까?"
"멸마맹에 고수를 모으긴 했지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혈겁을 막으려고 추격대가 우왕좌왕하
고 아마도 제주는 그것을 매우 바라고 있을 것이오."
"바라는 대로 해준다. 허를 만들려고 하십니까?"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득의하게 하려면 우리쪽의 모든 것을 그가 안다고 믿도록 해주어야만 하오!"
잠시 말을 끊었던 주천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최소한 사해무림대회 보름 이전에 발동할 것이고, 우리는 그보다 더 빨라야만 하오!
해서 몽고에 사람을 보냈소."
"몽고에?"
"그렇소. 천제문 자체와 문주 및 천제구로 등은 몽고에 있음이 틀림없는데 그들이 제단의
힘에 가세하면 그들을 이기고라도 천지회를 상대할 힘이 없게 되오!"
"천지회... 천지상인이 그토록 무서운 자라고 보십니까?"
주천운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그는 천지회의 회주가 될 자격이 없소."
남궁천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회주가 따로 또 있단 말씀입니까?"
"천지상인의 기도(氣度)도 대단한 것이었으나 지금 그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그것은 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이런 정도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으려면 분명히 무명인일 수가 없
을 테니까."
"으음... 앞에는 늑대고 뒤에는 호랑이라니..."
문득 주천운이 물었다.
"근래에 들어 천제문에 대한 정보가 각지에서 수집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몇 군데 암암리에 추적해 본 결과, 수집되는 정보는 매우 정확합니다. 괴이한
생각이 들어 저 혼자만 알고 아직은 맹 내에 발설치 않았습니다."
"괴이할 것 없소. 천지회에서 우리의 행동을 떠보자는 것이니까, 그 정도 시간을 두었으니
되었소. 하라는 대로 천제문을 공격하시오."
"역시 그게 천지회가 흘리는 것이겠지요? 알겠습니다. 덕분에 본맹의 피해도 줄일 수가 있
겠습니다."
천지회에게조차 허를 만들어 둔다...
보이지 않는 심계(心計)의 싸움은 이토록 치열한 것이다.
"천지회조차 미처 준비하기 전에 제단을 쳐야 한다면 신속이 생명일 텐데, 아직 제단의 위
치를 모르지 않습니까?"
주천운의 눈에 비로소 고뇌의 빛이 어렸다.
"그것이 기다리는 이유요. 공령천수와 무영개신, 만리추종 이 세 사람이 전력을 다해 그 소
재지를 찾고 있소."
주천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천제문주와 천제구로는 머지않아 도착하게 되오. 그들을 저지하는 사람이 그들을 얼마나
지연시켜 줄지... 반드시 그들이 오기 전에 알아 내야만 할 텐데..."
주천운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남궁천은 주천운의 등에서 태산을 보았다.
그도 몸을 일으켰다.
"지존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천운은 그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가주도 이젠 아첨을 할 줄 알게 되었군. 그들은 어떻소?"
"무서울 정도로 대단합니다. 모두 그들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 인지라..."
남궁세가의 전장(前莊)은 멸마맹의 총단으로 되어 무려 천여 명이 기거하고 있었다.
무림의 정영(精英)이 모인 것인지라, 그 세력은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원에 주천운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남궁천 혼자뿐이었다. 거기다 그 후원 지하
에 무려 사백의 고수가 이를 갈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더 더욱 없었다. 멸마맹의 공봉으로
추대된 중원삼신(中原三神)까지도 그것은 알지 못했다.
그들 사백 명!
그 중 백 명은 연혼전에서 연혼되기 전에 구함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삼백 명은 황산
대혈겁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었다.
"정사양도가 섞여 있는데도 전혀 잡음이 없습니다. 지존의 능력이 아니라면 그들이 이토록
맹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궁천의 말에 주천운은 담담히 미소했다.
"정사양도 누구라도 이민족(異民族)이 자신의 나라를 침공하려는 데는 반감을 갖기 마련이
지. 하여튼, 그들은 가장 큰 몫을 해내게 될 것이오."
과연 주천운은 지난 한 달 간을 그냥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를 구할 안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그뿐이랴!
그때 주천운이 문쪽을 바라보았다.
"지, 지존!"
급박한 외침과 함께 문이 왈칵 열렸다.
나타난 것은 소신풍(小神風) 악비룡(岳飛龍)이었다.
그는 남궁가를 무상 출입하는 특권을 가지고 개방의 연락망과 주천운을 연결하고 있었다.
지난 한 달은 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행운의 한 달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듯 수선하냐?"
주천운의 꾸지람에 악비룡은 냉큼 절을 하더니 다급히 말했다.
"혈마소후(血魔簫后)가 나타나 무당파를 멸문시켰습니다!"
"뭣이?"
남궁천은 물론 주천운조차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혈마소후라니, 무당의 멸문이라니!
"정말 그녀가 나타났단 말이냐?"
주천운이 급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소음에 무당파는 대항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상청관(上淸觀)이 초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으으... 그녀가 불광멸겁뢰에 맞고도 벌써 회복을 했다는 말인가? 큰일이다!'
주천운이 신음할 때, 남궁천이 심각한 어조로 악비룡에게 물었다.
"무당파에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잘은 모르나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소음을 거두고 물러갔기에 몰사하지는 않은 듯하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회복 불능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멸절(滅絶)되지는 않았으니..."
남궁천은 신음을 흘려냈다.
주천운의 안색은 매우 심각했다.
'그녀가 내 예상보다 일찍 회복되었으니, 엄청난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소신풍의 보고는 계속되고 있었다.
"황하맹이 봉문하고 뒤따라 이맹의 하나인 녹림맹도 봉문... 어젯밤에 삼가의 하나인 왕가
(王家)가 봉문하면서 멸마맹에서 탈퇴했고 뒤를 이어 천화곡(天火谷)도..."
* * *
주천운은 무심하기조차 한 눈길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정을 하려는 때
의 습관과 같은 행동.
'그녀가 휘젓고 다니면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문득, 주천운의 눈빛이 기광을 발했다.
하늘[天象]의 움직임이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자미성이 흐려지고... 붉은 혈기(血氣)가 원(垣)을 뒤덮어 간다. 문창무곡(文昌武曲)이 그 혈
기에 빛이 약해졌다!'
그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변했다.
그것은 황실에 또다시 변고가 생김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과 강호가 겁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으으... 하늘의 뜻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신음하던 주천운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천우성(天祐星)이 빛을 발하고 그 빛이 문창무곡과 서서히 이어지고 있다. 기회가 있다! 아
니, 저것은?"
슈우-.
별빛보다 더욱 빛나는 한 가닥 광채가 야공(夜空)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코 별
빛이 아니었다.
"신호탄! 하늘이 천하를 버리지 않았구나!"
주천운의 떨리는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이미 그곳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바람에 그는 그 뒤에 일어난 천기의 변화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 또한 운명이리라.
* * *
"으윽...!"
만리추종 요불위는 피가 흘러내리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 신음했다.
기형도(奇形刀)를 든 복면인 셋은 만리추종 요불위를 포위한 채로 야수와 같은 눈길로 노려
보고 있었다.
'괴이한 일이다! 천제문의 감시는 이미 죽었는데 도대체 이 놈들은 누구기에?'
"너희들은 누구기에 노부를 가로막는단 말이냐?"
대답도 없었다.
만리추종이 막 묻는 순간에 소리도 없이 기형의 도가 그를 덮쳐 왔다. 말을 하는 순간을 노
린 그 기세는 악독하고 기쾌할 정도로 빨랐다.
"비천무영(飛天無影)!"
나직한 외침 한마디와 함께 만리추종의 신형이 번개같이 기형도를 피해 솟구쳐 날았다.
"윽!"
그러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다른 복면인의 기형도가 날아와 만리추종은 벼락같이 방
향을 꺾었다. 날아가던 기세를 죽이기는커녕, 방향을 그대로 틀어 버리는 놀라운 경공! 능히
포위망을 벗어나고도 남을 경공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또 하나의 기형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만리추종과 복면인은 갈라섰다.
허공을 휘돌아 내려서는 복면인의 가슴에는 반 자 가량의 상처가 나 선혈이 치솟고 있었다.
"지... 지독한 도법이군! 남을 해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다니..."
만리추종 요불위는 허리춤을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선혈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도... 독이 있었... 군?!"
신음하던 만리추종이 비틀거리는 것과 함께 세 명의 복면인이 무섭게 그를 덮쳤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데!"
만리추종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좌우를 돌보지 않고 앞쪽 복면인을 덮쳐갔다.
그 사나운 기세에 앞쪽 복면인이 흠칫하는 순간에 그 복면인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아났다.
동시에 만리추종은 어깨와 등에서 피를 뿜어 내며 십여 장 밖으로 내닫고 있었다.
좌우의 복면인들의 공세를 돌보지 않고 전신을 내던져 포위를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렇
게 입은 상처는 너무 깊었다.
"놓치면 큰일!"
발음이 괴이한 억양과 함께 복면인들이 번개같이 뒤따랐다.
그런데, 만리추종 요불위는 채 삼십 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토록 독이 지독하다니...!'
그가 쓰러지는 순간에 복면인들의 기형도가 사정없이 만리추종에게 덮쳐 갔다. 격식이고 뭐
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도법은 살기(殺氣)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개죽음이라니... 지존!"
눈앞이 흐려짐을 깨달은 만리추종이 비통히 부르짖는 순간에 종을 때리듯한 음성이 귀청을
때렸다.
"감히 왜놈들이 발호하다니!"
"캑!"
동시에 복면인 한 명이 피떡이 되어 날아가고 다른 한 명은 칼을 움켜쥔 손목이 박살나 나
뒹굴었다.
그리고 그 앞에 흑의서생이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
"지... 지존... 지존을 못 보게 되는 줄... 여기 우리 셋... 드디어 명...을 완... 수..."
만리추종은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더듬거렸다.
주천운은 번개같이 그의 대혈 몇 군데를 누르며 대답했다.
"죽을 수 없소! 그까짓 독에 만리추종이 죽는다면 나는 호국지존의 자격이 없게 되오."
그 순간, 대도(大刀)를 쥐던 손이 박살난 복면인이 다른 손으로 번개같이 허리춤에서 소도
(小刀)를 뽑아 주천운을 덮쳐 왔다.
그것을 본 주천운이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들었다.
그는 눈앞으로 덮쳐 온 복면인의 소도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서 그대로 움켜잡았다. 띵!
하는 맑은 음향과 함께 소도는 주천운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흐윽?!"
주천운이 예리무비한 소도를 간단히 잡는 것을 본 복면인은 혼비백산해 눈을 부릅떴다.
"지독한 독종들이군... 너는 누가 보냈느냐?"
주천운이 소도를 움켜쥔 채 물었다. 그의 손은 이미 현천백옥수를 완전히 연성해 신병이기
라도 다칠 수가 없는 것이다.
"으... 처... 천제!"
"감히 왜인 주제에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복면인은 주천운의 기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 천지회 육회주(六會主)..."
"육회주?"
"옥... 면신마(玉面神魔:중원사마의 하나)... 친위대에 속해 있소..."
복면인은 주천운의 기세에 위압되어 더듬거리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 기세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가 왜 그렇게 쉽게 입을 여는 것인지 상상치도 못하리라!
"대답한 대가로 너에게 영광스런 죽음을 내리겠다."
주천운은 소도를 놓아주며 말했다.
복면인은 일순 어리둥절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깨달은 듯 머리를 조아리더니 그 자
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맙소. 조심하시오. 천지회... 무섭소!"
다음 순간, 소도는 망설임없이 그의 배를 긋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깨끗한 할복(割腹)이었다.
동영무사가 가장 바라는 죽음 중의 하나였다.
* * *
"이 밤 내로 모든 배반자를 처단하라! 내일 멸마맹의 전힘을 소집하겠다!"
태풍의 제일성(第一聲)이었다.
천하는 드디어 멸마맹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이오?"
멸마맹의 십오대 장로 중 하나인 자면신후(慈面神侯)는 급한 호출에 경악한 빛으로 물었다.
그는 멸망한 점창파의 장로로서 자파의 복수를 하겠다고 이를 가는 사람이었다.
"우욱!"
하지만 문에 들어서던 자면신후는 쥐어짜는 신음과 함께 눈을 부릅떠야 했다. 그의 양 옆구
리에는 두 자루의 장검이 절반이나 꿰뚫고 들어가 있었다.
그 앞에서 등을 지고 있던 백의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림제갈 남궁천이었다.
"이... 이게 무... 슨 짓...?"
"제단 천기당의 구호영주와 점창파의 장로... 어느것이 너의 진정한 신분이냐?"
남궁천의 목소리는 얼음을 얼릴 듯 차가웠다.
"그... 그걸...?"
부릅뜬 자면신후의 눈에 죽음이 밀려왔다.
"누... 누구냐?"
소림 속가장로 철장나한(鐵掌羅漢)은 자신의 침상 앞에 누가 서 있음을 느끼고 대경실색 몸
을 일으켰다.
"쉿! 당주님의 긴급지령이오!"
침상 앞에 서 있던 왜소한 인영은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지령? 무슨...!"
의혹 어린 빛이던 철장나한은 문득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벼락같이 소림사의 대력금강장(大
力金剛掌)을 펼쳐 냈다.
펑!
"크-윽!"
철장나한은 양손이 박살이 나면서 자신의 장세를 뚫고 들어온 일격에 의해 그대로 가슴이
으스러져 즉사했다.
"후후... 지존께 전수받은 영구무적수(永久無敵手)란 말이다."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이며 장난스럽게 웃는 그는 소신풍 악비룡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렇듯 소리도 없이 극비리에 진행되는 이 작업을 발견한 눈이 있었다.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남궁가의 주방장인 남궁휴(南宮休)였다.
그의 이름은 남궁천이 작성한 첩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그는 소리도 없이 창고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비밀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특수 훈련된 비둘
기가 있었다.
"천지일회(天地一會)!"
그가 막 비둘기를 꺼내려는 순간에 나지막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 왔다.
"누구요?"
혼비백산한 남궁휴가 번개같이 돌아서니 그 뒤에는 음침한 안색의 노인이 서 있었다.
"제사회주님의 친위대장인 음산신마(陰山神魔)다. 너의 신분은?"
음산신마가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남궁휴는 상대가 엄청난 마두이자 급히 허리를 굽혔다.
"속하는 제구회주 휘하의 정탐향주...?"
대답하던 남궁휴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음산신마가 자신을 찾아왔다면 자신의 신분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순간, 우두둑 소리와 함께 남궁휴의 목은 닭모가지보다 더 간단하게 음산신마의 손에 의
해 꺾여지고 말았다.
"노부가 말을 잘못했다. 노부는 상관대협 휘하의 사 개 대(隊) 중 항마대(降魔隊)의 대주로
취직했다..."
음산신마는 자랑스럽게 웃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패도무적 정문수.
그는 근 한 달 만에 주천운의 앞에 있었다.
"금릉왕부의 동정은 여전합니다. 자운군주께서는 여전히 불공이시고..."
주천운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알겠소, 호국위는?"
"기대 이상입니다. 곧 출관하게 됩니다."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호국이로와 호국위를 호출하도록 하시오!"
정문수의 눈에 격동이 일었다.
"드디어 시작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소. 정대장은 이 길로 황궁으로 돌아가시오."
"황궁?"
주천운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진행됨에 따라 정문수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어쨌든 밤은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고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 *
태백산(太白山)은 진령(秦嶺)이라 불리는 종남산맥(終南山脈)의 주봉(主峰)이다. 산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험악한데다 숲의 깊음은 곳곳에 전인미답의 원시림을 펼쳐 놓고 있는 곳이다.
그에 따라 명승과 절경도 적지 않은 곳이 바로 이 태백산이었다.
태백산 깊은 곳에 이르면 대낮에도 음침한 운무가 어려 눈앞을 잘 분간할 수 없는 곳이 있
다.
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토박이 사냥꾼들도 알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주위에는 독물이 득실거리고 대낮에도 가까이 간 사람이 급살을
맞아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귀신의 장난이거나 장독( 毒) 때문이거나 상관할 필요 없이 그
곳은 금지(禁地)가 되어 그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수많은 세월 동안 쌓인 낙엽이 썩어, 늪을 이루어 산짐승들조차 피해 가는 그곳을 사람들
은 언제인가부터 귀무곡(鬼霧谷)이라 불렀다.
대낮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이 귀무곡.
한데 야반 삼경, 산새들마저 잠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귀무곡을 주시하는 눈들이 있었다.
가장 앞선 사람의 흑의는 어둠보다 더 검고, 그 눈동자는 별빛보다 더 맑았다.
주천운이었다.
그의 뒤에는 약 이십 명의 인원이 늘어서 있었다.
무림제갈 남궁천의 나이가 가장 어리고 그 외에는 제일 젊은 화산신검(華山神劍)이 칠십오
세였다. 그것은 그가 대동한 사람들이 무림의 전대고수들임을 의미했다.
드디어 주천운이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모두 도착했습니다."
무림제갈 남궁천이 뒤에서 나직이 말했다.
주천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느닷없이 나타난 주천운에 대해 어리둥절한 상태였
다.
여기 있는 이십 명 가량의 초고수급들 외에는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움직이는지도 모르는
정도였는데, 그것은 신속과 비밀의 유지에 중점을 둔 용병(用兵)이었다.
주선(酒仙) 공야월휘(公冶月輝).
남궁천의 반쪽 사부라 할 수 있는 이 노기인은 홀린 듯 주천운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
다.
'천하에 천아만한 인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명월과 반딧불 같다니! 저 모습에는 흉내 낼
수 없는 제왕지기(帝王之氣)가 어려 있어 남을 복종케 만든다...'
그는 어제 아침에 느닷없이 나타나 단숨에 군웅을 휘어잡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성질이 괄괄한 무산신모(巫山神 )가 남궁천이 자신을 속인 데 분노하여 주천운에게 대들다
가 완전히 압도당한 일, 그리곤 오늘 주천운의 뒤에 마치 시녀처럼 공손히 서 있는 무산신
모를 보는 주선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스쳐 갔다.
문득 뒤를 돌아보던 무산신모는 주선이 희쭉 웃고 있음을 보고 토끼눈이 되었다.
지난날 중원삼신이 무산신녀를 놓고 다툰 일을 누가 모르겠는가마는, 신녀(神女)가 신모(神
)로 변한 지금까지 그녀의 성미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공야늙은이, 웃는 이유가 뭐지요?"
주선이 무산신모의 전음에 아차 하는 순간에 주천운의 음성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지옥행을 면한 셈이었다.
"귀무곡의 형세로 판단컨데 밖으로 통하는 통로는 이곳 하나 뿐이지만 비밀통로를 만들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사에 따르면 제단의 모든 힘은 귀무곡 총단에 집중되어 있
는 것 같습니다."
총단(總壇)!
만리추종과 공령천수 등이 알아 낸 제단의 총단은 바로 이곳 귀무곡인 것이다.
"지금 난동을 부리고 있는 제단의 세력은 기실 눈가림이고, 그나마도 혈소마후가 등장함으
로 거의 제단에 모인 상태입니다. 이것을 부수면 천제문은 완전히 궤멸이 되는 셈입니다."
주천운의 어조는 나직했으나 중인들의 가슴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를 놓치게 되면 곤란하게 됩니다."
"그자가 비밀통로로 도망쳐 버리면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곤륜파의 장로인 운룡자(雲龍子)가 걱정했다.
멸마맹 십오 장로 중 구대문파의 고수는 모두 열 명이었고, 그 중 장문인이 세 명이나 되었
다.
"그는 갈 수 없습니다. 가려고 할 때는 이미 늦기 때문이지요."
남궁천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혹 단신으로 뛰어드시려는 것은 아니십니까?"
'설마 그럴 리가...'
모두가 그 말에 내심 고개를 흔들었지만 설마는 사실로 나타났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우리측의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내가 길을 트겠
습니다!"
"그... 그런 무모한 일이!"
멸마맹 장로들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하지만 음산신마 등 사 개 대의 대주들의 안색은 태연했다.
지난 한 달 간 그들은 주천운을 겪어 왔기에 그 무엇도 그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
들은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이 눈치라도 채면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저들
을 치고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주천운은 자르듯 말하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항마대와 쇄마대(碎魔隊)는 측면을 막고, 복마대는 외부동정을 감시, 탕마대(蕩魔隊)는 도망
치는 적을 막도록 하시오. 단..."
주천운은 음산신마와 구화일수 등 사 개 대의 대주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손에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되오. 가장 빠르게 적을 해치워야 하오."
"염려 마십시오. 말씀하지 않으셔도 피가 떨립니다."
흉악한 눈을 번뜩이는 것은 탕마대주인 패천혈신(覇天血神)이었다. 그는 연혼전에서 구출된
고수 백 명으로 이루어진 탕마대의 대주로 천제문이라면 이를 가는 금년 구십 세나 된 흑도
고수였다.
"그리고 멸마맹의 모든 배치는 계획한 대로 남궁가주가 지휘하여 내 뒤를 따라 약 일다경
후에 정면공격을 해주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소신풍, 너는 철방주와 계속 연락하면서 주위 감시를 게을리 하지말도록 해라."
주천운은 백여 장 가량 떨어진 곳에다 진기전음으로 말했다.
어둠에 묻힌 귀무곡에서는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희미하게 안개가 서린
귀무곡 앞은 약 이십여 장 가량의 암석이 널린 평지인지라 몸 숨길 곳이 없었고, 한치 앞도
안 보이도록 짙은 운무가 어린 귀무곡 입구의 넓이는 약 사오 장 정도인 것 같았다.
그러나 원시림이 일대에 발을 옮기기 힘들게 무성하니, 그 속에 어떤 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제아무리 안력이 좋은 사람도 알아볼 수 없었다.
주천운은 그 귀무곡 앞 평지를 쳐다보고 몸을 숨긴 상태였다.
그를 따르는 군웅들은 백여 장 밖에서 기척도 없었고...
'귀무곡 주변 십 리에 깔렸던 사십여 개소의 매복은 이미 완전 궤멸, 귀무곡은 고립무원이
다... 혹시라도 남은 초소가 있다면 낭패!'
주천운은 전공력을 기울여 천이통(天耳通)을 전개했다.
'양쪽 암벽 속에 두 명씩... 입구쪽에 다섯... 백 장 이내에 있는 자들은 모두 열하나!'
주천운의 손에 현천마금이 들려졌다.
소리도 없었다.
그냥 주천운의 손이 현천마금 위에서 한번 움직이기만 하면, 매복고수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심맥이 으스러져 죽고 마는 것이다.
귀무곡 입구에 하늘이 낮다고 치솟은 암벽의 속에 숨은 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의 주천운이 펼쳐 내는 현천마금의 천심전(穿心箭)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할 바 없이
무서운 살인무기였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으니 방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스-윽!
주천운의 몸이 그대로 이십여 장의 공지를 지나 귀무곡 입구에 들어서도 경보조차 울리지
않았다.
경보를 울릴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귀무... 여기에는 미향(迷香)이 섞여 있군!'
문득 주천운은 앞 부분의 지형이 기이함을 느꼈다.
'천살미혼진(天殺迷魂陣)... 구 개 방위와 십팔문 삼십육 개 매복이 혼합되어 사백여의 죽음
이 마련되는 진!'
잠시 살펴보던 주천운은 소리도 없이 천살미혼진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냥 통과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유령과 같이 스쳐가는 곳의 진은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스스슷!
그가 스쳐 가는 곳에는 작은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뱀과 독충 등의 독물(毒物)들이 다투어 주천운을 피해가기 때문이었
다. 그의 몸에는 피독지보인 피독주가 박힌 호국지존병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용화대수미선공이 십 성에 이른 그의 몸에는 독물이 침범할 수 없었
다.
그러나, 그 독물들은 도망조차 갈 수 없었다.
주천운이 뒤에 오는 군웅들을 위해 무형진기(無形眞氣)로써그것들을 으스러뜨려 버리기 때
문이다.
주천운의 신형은 은신과행술로써 소리도 없이 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과 그의 눈, 귀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절벽 위에서 밑에서 숨을 죽인 채 물샐틈없이 사방을 경비하고 있던 제단의 고수들은 무엇
에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는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귀무곡 입구 이십 장 길이에 설치된 매복과 함정은 천라지망이었고, 그 천라지망을 뚫을 수
있는 고수가 오면 경보를 울리도록까지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으나, 그 모두는 주천운에 의
해 단숨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현천마금에는 이토록 무서운 위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삼대천음은 세상을 떨어 울릴 수 있었다.
'지독히 천악(天惡)한 곳이다! 이런 곳을 용케도 찾았군!'
입구를 통과한 주천운은 눈앞에 드러난 경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콰르르-쏴악!
입구의 끝은 음습한 데다 칼날 같은 암석이 삐죽삐죽 튀어나왔고 그것을 가로지르며 급류가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그 형세는 심히 험악했고 쇠사슬로 이루어진 다리 하나가 거
기에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 길이는 약 오 장.
소용돌이치는 급류는 대단하여 물보라가 잇달아 일어나는데 아마도 곡의 운무는 이곳 때문
에 생겨나는 것 같았다.
'감시는 넷... 아니, 다섯이다. 하나의 공력은 대단하구나! 천심전 일음(一音)에 격살이 될지
모르겠다.'
주천운은 소리도 없이 용솟음치는 물보라에 닿을 듯 날았다.
쇠사슬 다리(鎖橋) 주위에는 두 명의 고수가 지키고 서 있고 그 바로 뒤에는 곡의 내부로
통하는 듯한 관문이 세워져 있는데 매우 견고해 보였다.
"저...!"
문득 날아오르는 주천운을 발견한 쇄교 앞을 지키던 고수가 그대로 심맥이 부서지고 뭔가
이상한 기척에 동료를 돌아보던 자는 돌아보다가 그대로 심맥이 끊어졌다.
그들이 쓰러지기도 전에 주천운은 번개같이 관문을 덮쳐 갔다.
"!"
관문을 지키고 있는 자들의 무공은 대단했다.
뭔가 이야기하고 있던 두 명의 고수는 대번에 주천운을 발견했다. 그 순간에 그들의 목숨은
이미 끊어지고 있었지만...
"윽!"
침중한 신음 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관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가슴 떨리도록 사납게 생긴 대한이 관문 안에서 막 의자에서 일어선 자세로 두 눈을 퉁방울
같이 부릅뜨고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가슴을 움켜쥔 그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에 앞서 두 명의 고수가 쓰러졌다.
"역시 대단한 공력이군! 천심전 일음을 견뎌 내다니..."
주천운은 현천마금 위에 다시 손을 얹었다.
"마금? 신마금검... 뢰...?"
대한은 경악과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뱉어내면서 손을 쳐들었다. 그 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천장에서 늘어진 줄 하나가 보였다.
디디이-이잉!
현천마금이 심혼(心魂)을 뽑아 낼 듯한 신음(呻吟)을 대한에게 쏟아 냈다. 사람을 죽이는 것
이 아니라, 신지(神志)를 제압하는 탈심혼이 전개된 것이다.
"으흐-윽...!"
괴로운 신음과 함께 대한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리며 이내 몽롱해졌다.
"대단히 심지가 굳은 자로군... 너의 신분이 무엇이냐?"
"귀문관주(鬼門關主) 아합마(阿合馬)..."
주천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몽고인이냐?"
"몽고용사... 한(汗:몽고 추장의 칭호)의 후예..."
"중요한 곳은 모두 몽고인이라... 지난날 원의 시절과 같이 철저하군! 이곳이 제단 입구의 끝
이냐?"
"그... 렇소. 이곳에서 출입하는 모든 기관을 총괄하고 있소..."
과연 아합마라는 자의 뒤에는 매우 복잡한 기관장치가 보이고 있었다.
"이곳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봐라!"
"여기는..."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