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마을 소개 |
웅촌면(熊村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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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촌면(熊村面)은 진한(辰韓)의 우시산국(于尸山國)이었다. 우시산국(于尸山國)은 울뫼나라 로 그 성도(城都)는 검단(檢丹)과 은현(銀峴)의 두가지 설이 있다. 신라 탈해왕(脫解王)때의 거도(居道)가 마숙(馬叔)이란, 계락을 써서 쳐들어오니 이기지 못하고 동래(東萊)의 거칠산국(居柒山國)과 같이 멸망 하였다. 신라 초에는 이곳에 우화현(于火縣)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16년(757) 에 이름을 우풍현(虞風縣)이라고 고쳐 동안군(東安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太祖)때 하곡(河曲), 동진(東津)의 두 현 및 동안군(東安郡)과 같이 흥례부(興禮府)의 땅이 되어 현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조 중엽부터 인듯 고을의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면(西面)이라 하였다가 말엽에 와서 웅촌면(熊村面)이라 개칭하였다. 웅촌면(熊村面)이라 함은 이 면을 진압하고 지키는 진산(鎭山)인 운암산(雲岩山) 의 모양이 곰과 같이 닮았다하여 웅촌(熊村)이라 하였다고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곰을 신성시하는 원시신앙을 가졌던 예맥족(濊貊族)의 주처에는 곰터라 하여 웅자가 붙게 되므로 웅촌(熊村)은 고마족이 세운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왕읍(王邑)이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며, 고종(高宗)때 (高宗, 1년)에는 웅촌면, 동 31년의 邑誌에는 웅상·웅하 에 이르러 웅상(熊上)·웅하(熊下)의 두 면으로 갈라 웅하면(熊下面)이라 하였다. 면의 위치가 군치(郡治)와 가깝고 북쪽에 위치하니 웅상(熊上)이 될듯하나 아마 신라 소사(小祀)의 한산으로 받들어온 우불산(于弗山)이 저쪽에 있으니 웅하(熊下)라 하였으며. 1914년의 행정구역을 고칠 때 웅상면(熊上面)을 양산군(梁山郡)에 대양(大陽一大福里)의 일부를 삼남면(三南面)에, 신리(新里)를 청량면(靑良面)으로 넘겨 주었으며 면의 이름을 웅촌면(熊村面)이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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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천리(曲泉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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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천리(曲泉里)는 정조(正祖)때는 간곡리(肝谷里)라 하였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 간곡(肝谷)과 곡천(曲泉)으로 갈라졌으나 1911년에는 곡천(谷川)이라 하였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다시 곡천리(谷泉里)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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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리(檢丹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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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리(檢丹里)는 정조(正祖)때 검단리(檢丹里)라 하였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는 암곡동과 검단동으로 갈라졌으나 1941년의 행정구역개편 때 이를 합하여 검단리(檢丹里)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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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현리(銀峴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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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현리(銀峴里)는 정조(正祖)때에 덕현리(德峴里)와 새암리 로 갈라져 있었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는 덕현동(德峴洞)·은하동(銀下洞)·덕곡동(德谷洞)·운암동으로 다시 세분되었으며 1911년에는 덕현·덕하·덕곡·용산이라 하였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은현리(銀峴里)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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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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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리는 정조(正祖)때에 와지리(臥旨里), 갓동리, 지소리의 세 마을로 갈라져 있었다. 고종 31년(1894)에는 와지동, 연답동, 갓동, 고시동, 지소동으로 세분되었다가 1911년에는 지소동을 반계동으로 고쳐불렀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들 다섯마을을 합하여 고연리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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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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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리(大垈里)는 정조(正祖)때 대여리(大如里)라 하였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 상대(上垈), 중대(中垈), 하대(下垈), 중평(中坪)의 네 개동으로 분립하여 있었으나 1911년에는 상대(上大), 중대(中大), 하대(下大), 저리(楮里)의 4개동으로 되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대대리(大垈里)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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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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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천리(椒泉里)는 정조(正祖)때 초정리(椒井里)라 하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 초정동(椒井洞)과 내기동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초천리(椒泉里)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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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리(通川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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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리(通川里)는 정조(正祖)때 통천리(通川里)의 한마을이었으나, 고종(高宗) 31년(1894)에 통천동(通川洞)과 신리동(新里洞)이라 하였다가 1911년에 이르러 통천(通川), 자척(紫川), 신리(新里), 자암(紫岩)의 4개동으로 갈라졌으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통천리(通川里)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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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리(石川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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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리(石川里)는 정조(正祖)때 돌내리(乭川里)라 하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 석천동(石川洞)과 석계동(石溪洞)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석천리(石川里)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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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복리(大福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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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복리(大福里)는 정조(正祖)때 오복(五福)과 대양(大陽), 고종(高宗)31년(1894)에 오복동(五卜洞)과 대양동(大陽洞)으로 갈라져 있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대양동(大陽洞)의 대(大)와 오복동(五福洞)의 복(福)을 서로 따서 대복리(大福里)라 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