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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권
차례
1-1. 독자에게 -글의 주제- (1-48) 7. 제타이 족 틈에서 (377-440)
1-2. 독자에게 -어떤 글인가- (49-80) 8. 원수에게 (441-482)
2-1. 아내에게 -당신의 사랑으로- (81-124) 9. 감사 편지 (479-516)
2-2. 황제에게 탄원(125-158) 10. 토미스의 유배생활 (517-568)
3. 박쿠스 신에게(159-216) 11. 아내에 대한 모욕 (569-598)
4. 참 친구에게 (217-266) 12. 유배 중에 쓴 시 (599-666)
5-1. 아내의 생일 -축하-(267-292) 13. 소식 전해주어 (667-700)
5-2. 아내의 생일 -소망- (293-330) 14. 아내 자랑 (701-746)
6. 갸륵한 책임 (331-376)
1-1. 독자에게 -글의 주제- (1-48)
열성적인 독자들이여, 내가 이미 제타이의 해변에서
보낸 네 권의 책에다가 이 한 권을 더해주기 바란다.
이것 또한 글 쓴 자의 운명과 오십보백보의 신세라서
노래 어느 구석에도 달콤한 데라곤 찾기 어려우리라.
내 형편이 울울한데 내 노래인들 오죽하랴. 5
글이란 것은 주제와 어울리도록 돼있는 것.
아무도 건드리는 이가 없어서 즐거운 청춘과 행복을
구가하던 그때를 적은 글이 지금 와서는 후회막급이다.
나는 한번 추락한 뒤부터 불시추락의 예고자가 되어,
글을 쓰는 자 자신이 자기 글의 주제가 되고 말았다. 10
사람들은 나더러 카이스트로스* 강둑에서 구성지게 울며 *소아시아의 에페수스 근처에 하구를 둔 강 이름.
스스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백조 같은 꼬락서니라고 한다. 이 강은 백조가 많았는데 이 새는 죽을 때 구슬
그래서 멀리 사르마티아의 해변에 내던져진 프게 운다고 한다(☞ <일리아스> 제2권, 449).
나의 장레가 조용히 치러지지 않도록 힘써야겠다.
쿠피도(에로스, 사랑의 신)의 교육: 코레지오(1489-1535)
누구든 음탕한 시를 즐기려 하는 자가 있다면, 미리 경고한다. 15
이와 같은 글을 읽는다면 아무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갈루스*가 더 낫겠어. 아니야, 감미로운 프로페르티우스,* *이 셋은 시인들 ☞ 갈루스는 앞의 제2권 445, 프로페
매혹적 성품을 타고난 티불루스*라면 더 적당할지 몰라. 르티우스는 465, 그리고, 티불루스는 같은 곳 447.
제발 나는 그들과 한통속이 아니라고 여겨주기 바란다!
그런데 슬프다. 왜 나의 무사께서는 장난질만 쳤을까? 20
멋모르고 사랑의 신의 화살통을 갖고 놀다가 스키티아의
히스테르 땅에서 귀양살이 벌을 받는 건 나란 말이다.
나는 대중의 생각을 이제 얌전한 시로 돌리게 하고,
그 이름이나 잘 기억해 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내가 왜 슬픈 시를 많이 노래하느냐고 누군가가 25
묻는다. 슬픈 일을 많이 겪어서 그리 되었노라.
나는 영감이나 글재주로 그런 걸 쓰는 것이 아니다.
알맹이는 모두 내가 겪은 불행에서 나온 소재들이다.
내 노래 속에 이 불행의 부분이 얼마나 되느냐고?
그의 고난을 숫자로 셀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니라! 30
무사 여신들의 가르침을 제외하면, 숲 속의
나뭇잎처럼, 티베리스*의 노란 모래알처럼, *티베르 강.
마르스의 들*에 흐드러진 여린 풀잎처럼 많은 *마르스의 광장(캄푸스 마르티스)은 티베르 강 연안 서북방으로 펼쳐져
고초를 나는 치료약도 휴식도 없이 겪었다. 있다. 원래는 로마 외곽의 넓은 목초지였는데 군대 연병장과 정치집회
"나소야, 이 슬픈 노래는 언제 끝낼 셈이냐?" 묻는다면, 를 하는 곳이었다. 이 이름은 그곳에 있던 마르스의 제단 때문이었다.
이 불행이 끝나는 그때 똑같은 종말을 보게 될 것이다. 36
넘쳐나게 가득한 하소연의 샘물이 내 글을 먹여 살려.
언어는 내 것이 아니다. 언어는 내 운명의 소유물이야.
만일 내가 본국으로 되돌아가 사랑하는 아내를 보게 해준다면,
내 얼굴은 기쁨에 넘치고, 나는 옛날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40
불패의 카이사르께서 노여움을 푸시어 온화해지신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환희에 넘치는 시를 지어 바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시는 옛날처럼 음탕하지 않을 것이다.
내 재주가 한 번 놀아났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니라.
선고의 일부를 감형하시어, 못된 제타이와 야만족을 떠나 45
살 수 있다면 그 어른께서 인정하시는 노래를 부를 거다.
그때까지 내 책이 슬퍼하지 않고 어쩌겠어?
이게 내 초상 절차에 어울리는 피리소린 걸.
1-2. 독자에게 -어떤 글인가- (49-80)
독자는 말하겠지. "그러나 괴롭더라도 말없이 참고
지내며, 너의 너의 불행을 침묵 속에 감추어 두어라." 50
그럼, 찍 소리 없이 고문을 받아라, 이런 말인가?
깊은 상처를 입고 나서도 눈물을 참아라 이거야?
팔라리스*도 페릴루스를 청동 가마에 집어넣긴 했지만 *팔라리스는 시칠리아의 폭군, 페릴루스는
황소의 입으로 울며 신음소리는 내지르게 허락을 했다. 54 그의 장인(☞ 이 책 제3권 11-2의 41행).
프리아무스*가 울어도 아킬레스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트로이아의 왕. 아들 헥토르가 죽자 그의 시신을 회수하시 위해 아
그대는 원수 사이보다 모질게 내 눈물을 막을 셈인가? 킬레스에게 눈물로 호소했고, 아킬레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라토나*의 아이들이 니오베의 자식들을 모두 죽였지만 *테바이와의 왕비 니오베가 포에부스와 디아나의 어머니 라토나
니오베의 뺨을 눈물로 적시는 것까지 금한 일은 없다.* (라토)를 깔보는 데 격분, 남매를 시켜서 자식들을 몰살하고 니오
격심한 아픔을 말로써 완화해보려는 것은 일리가 있다. 베는 영원히 눈물을 흘리는 바위로 만들었다(☞ <변신> 6-2).
프로크네*와 알치오네+의 사연을 만든 것도 그거요, *아들을 죽이고 제비가 되었다(☞ <변신> 6-6). +원정 간 남편이
추운 동굴에서 고함을 질러 렘노스의 바위를 61 죽어 해변에 떠내려온 걸 보고 물총새가 됐다(☞ <변신> 11-8).
지치게 만든 필록테테스*도 그것 때문이었다. *트로이아 전쟁 중에 뱀에 물려서 쓸모가 없게 됐을
억눌린 슬픔은 사람의 숨통을 막고, 안으로 끓어올라 때, 오디세우스에 의해 렘노스 섬에 버려졌었다.
압력을 가하니, 그 힘이 자꾸만 강해질 수밖에 없다.
독자여, 만일 내게 도움을 주는 그것이 그대를 해치거든 65
나를 더 끔찍이 사랑하든가, 내 책을 모두 없애버려라.
그러나 그것이 아무도 해칠 리가 없다. 내 글이 그것을
쓴 장본인 말고는 아무에게도 해로운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형편없는 쓰레기야.’ 말은 맞다. 누가 이런 쓰레기
꼭 읽으래나? 속았다 싶으면 치워버리고 그만두면 될 걸. 70
내용을 바꿀 생각은 없다. 씌어진 대로 읽어주기 바란다.
그게 상스럽다고 하겠지만 이곳보다 더 상스럽지는 않아.
로마는 그곳의 시인과 나를 비교해선 안 되겠다.
나는 사르마티아 족 사이에서만 천재란 말이다.
자식들 한가운데에서 울부짖는 니오베: 아브라함 블뢰매르트(1561)
끝으로, 나는 영예나, 천재에게 공통으로 박차를 75
가해주는 명성을 탐하지 않는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끝없는 근심으로 정신이 해이해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것들은 끼어들지 말라는 곳에 끼어들어 나를 방해하거든.
왜 글을 쓰느냐고? 그 이유는 설명을 마쳤다. 왜 글을 보내주느냐고?
어떤 모습이든 독자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 방법은 아무러면 어떤가. 80
2-1. 아내에게 -당신의 사랑으로- (81-124)
폰투스에서 편지가 한 통씩 날아올 때마다 당신은
파랗게 질려서 걱정스런 손가락으로 개봉을 하오?
잘 있으니, 걱정 마오. 전에는 허약해서 아무 것도
참아내지 못하던 몸이었지만 지금은 고생이 많아서
그런지 여물어져서 잘도 견딘다오. 그렇지 않으면 85
부실함의 사치를 누릴 여가가 없다는 것이 옳을까?
그러나 마음은 병이 들어 세월이 가도 힘을 얻지 못하오.
그런데 정신은 옛날과 조금도 달라진 데 없이 그대로요.
적당한 때가 되면 아물 것으로 생각했던 상처는
처음 입었던 그때나 다름없이 나를 아프게 하오. 90
사실 작은 아픔은 세월 따라 가벼워져도,
큰 아픔일수록 세월 따라 더 커지나보오.
필록테테스*는 잔뜩 독이 오른 뱀에게 물려서 *필록테테스(☞ 위 1-2의 62)는 개전 초기에 얻은 상처를
생긴 고약한 상처를 십 년에 걸쳐서 더 키웠소. 안고 전쟁이 끝나는 10년 동안 섬에서 혼자 고생했었다.
텔레푸스*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손으로 구원하지 95 *텔레푸스는 ☞ 이 책 제1권 1-2의 100).
않았더라면 끝없는 병고에 시달려서 죽을 뻔했소.
내 상처 또한, 내가 죄를 지은 바가 없는 이상,
상처를 입힌 바로 그 어른이 다스려주실 것이오.
그러니 폐하께서는 결국 이 정도의 내 아픔에 만족하시고
찰찰 넘쳐나는 바다에서 소금물을 약간 걷어내주시겠지요. 100
폐하께서 많이 걷어내주신다 해도 많은 쓰라림이 남을 테니,
형의 일부부분이라 할지라도 전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오.
백사장의 조개처럼, 풍요로운 꽃밭의 장미꽃처럼,
잠을 오게 하는 양귀비에 달린 수많은 씨앗처럼,
숲 속의 짐승이나, 물에 헤엄치는 물고기, 105
잔잔한 공기를 두드리는 새들의 깃털처럼,
나는 슬픔의 짐을 잔뜩 메고 있소. 그 수를 헤아리려니
마치 이카루스 바다*에 떠있는 물거품을 세는 것 같소. *이카루스는 ☞ 제1권, 90.
길을 떠나는 위험, 바다에서 겪을 모진 위험,
나의 신변을 노리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110
넓은 세상에서도 가장 동떨어진 야만국, 잔인한
적들이 우글대는 이곳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소.
잘못은 했지만 피를 보지 않았으니, 당신이 사랑으로
도리를 다해준다면 나의 유배지가 변경될 수도 있소.
로마 권세의 중심에 서계시는 신님께서는 115
패전한 적에게도 인정을 베푸신 일이 더러 있소.
해롭지 않은 일에 왜 머뭇거리고 두려워하오? 가서 간청을
해보오. 이 큰 땅 위에 카이사르보다 다정하신 어른은 없소.
아, 가까운 지친들조차 나를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겠소?
당신까지도 멍에를 부숴버리고 목을 뽑아낼 셈이오? 120
난 어디로 가야 하오? 지겨운 인생 어디서 위안을 얻겠소?
이제는 어디에도 내 배를 잡아 묶어둘 닻은 찾을 길 없소.
해보오! 내가 미움을 사고는 있지만, 거룩한 제단에
의지해볼 참이오. 제단이 뿌리치는 손은 바이 없소.
2-2. 황제에게 탄원 (125-158)
인간으로서 감히 유피테르에게 말씀을 올려도 되는 거라면, 125
멀리 떠나 있는 자가 보이지 않는 신님께 상소를 드립니다.
제국의 판관이시며, 당신의 안녕을 통해 아우소니아의
만백성이 받들오 모시는 모든 신을 지켜주시는 분,
당신을 통해서 번영하는 이 나라의 영광이시며 상징이시여,
폐하의 통치 아래 있는 세계와 버금하는 주인공이시여, 130
땅 위에 살으시되 하늘이 폐하를 그리워하고
나중에 붕어하시어도 약속대로 별이 되실 분,
나를 살려 주십시오. 간청합니다. 그 번개막대*의 효능을 *유피테르는 들고 다니는 막대를 휘둘러 거기
아주 작게 줄여주십시오! 남은 형벌로도 충분하옵니다. 서 나오는 번갯불로써 악한 자를 벌하였다.
딴은 폐하께서 노하심이 온당하시어 내 목숨이 부지되었고, 135
시민으로서의 이름과 권리조차도 거둬지지 않았습니다.
재산도 남에게 빼앗긴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폐하의
선고문에 따라 ‘추방자’*란 말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로마에서 쫓겨날 때 공식명칭은 엑술
저는 사서 그런 짓을 했으므로 그 결과들이 두려웠지만, (추방자)이 아닌 렐레가토(좌천자)였다.
거기 비해 폐하의 노하심은 저의 잘못보다 가벼웠습니다. 140
폐하께서는 저에게 그저 '좌천자'로서 스키티아의 파도를 가르는
쾌속정을 타고 폰투스의 들 구경이나 하라고 하명하시었습니다.
저는 명에 따라 얼어붙은 극지 아래 볼품없는 해변을 가진
에욱시누스의 바닷가에 자리잡은 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제가 괴로운 것은 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날씨 같은 것, 145
언제나 하얀 서리로 꽁꽁 얼어붙어 있는 땅 때문이 아닙니다.
야만인이 라틴어의 음성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하고
희랍어가 제타이의 언어에 눌려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가 사방팔방으로 전쟁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적을
막아준다는 것이 겨우 볼품없는 담벼락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50
때때로 평화가 있긴 합니다만, 평화라는 것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니 이곳은 늘 공격을 당하고도, 또 한편 걱정을 해야 합니다.
딴 곳에 보내만 주신다면, 상클레의 카리브디스* 가 *시칠리아 북쪽, 상클레(현 메시나) 앞바다의 소용돌이.
소인을 집어삼켜서 물결에 실어 스틱스로 보내든지, 넵투누스의 딸. 하루에 바닷물을 세 번 삼켰다 토해낸다.
게걸스런 아이트나*의 화산 불길에 타버리든지, 155 *시칠리아 섬의 에트나 산.
심해에 던져서 레우카디아*의 신에게 바쳐도 그만. *이오니아해의 섬. 이곳 아폴로 신전에서 죄수를 물에 던져 죽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정말 고생은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였다. 그리스의 여류시인 사포가 자살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하옵건대 보다 안전한 곳에서 고생을 했으면 합니다.
3. 박쿠스 신에게 (159-216)
두 님프, 그리고 쿠피도와 함께 있는 박쿠스(디오니소스), : 체사르 판 에버딩겐(1616-78)
박쿠스여, 내가 날짜를 잘못 짚은 것이 아니라면,
오늘은 예로부터 시인들이 머리에 향그런 화환을 160
엮어 두르고 그대가 몸소 보내준 포도주를
음미해가면서 그대를 노래로써 찬미하는 날*이다. *박쿠스의 축제일은 3월 17일이었다.
지금사 생각이 난다. 나도 한창 잘나갈 때에는 종종
열심히 한몫을 했으니 그대를 화나게 한 일이 없다.
나는 지금 작은 곰 별자리의 영향 아래 놓여있어서, 165
사나운 제타이 족의 사르마티아 해변에 꽁꽁 갇혀있다.
무사이 여신들의 합창 속에 책이나 뒤적이며
일이라고는 모르고 편안하게 지내던 내가,
멀리 집을 떠나서 땅 넘고 바다 건너 고생고생 끝에
사방 어지러운 제타이 족의 창칼 소리에 에워싸였구나. 170
우연히 그리 되었든지, 신들의 화풀이 탓이든지,
시커먼 운명의 여신이 내 생일을 주관해서이든지,
적어도 그대만은 그대의 거룩한 담쟁이*를 공경하는 *담쟁이는 박쿠스의 신목. '당쟁이를 공경'함은 술을 즐기는 것.
사람을 신의 권능으로써 구해주었어야 옳은 일이다.
아니면 그 운명의 자매 여신*들이 정해놓은 것은 175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여신들은 세 자매이다.
이제 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게 됐단 말인가?
그대는 자신의 능력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었지만,
그건 아무나 큰 수고 없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대는 고향땅에 눌러앉아 있지를 못하고, 멀리
눈 덮인 스트리몬,* 마르스를 섬기는 제타이까지, 180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흐르는 강.
페르시아,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간제스 강, 그리고
검은 인도인들이 식수로 하는 모든 강까지 갔었다.
이것은 확실히 운명의 실을 잣는 파르카이*가 두 번 *운명의 여신.
태어난 그대*를 위해 두 번 정해준 운명 때문이었다. *박쿠스는 어머니 세멜레가 죽을 때 모태에서 꺼내져서
나도 또한, 신들을 본보기로 삼아도 괜찮다면, 185 아버지 유피테르의 허벅지에 심어졌다가 다시 태어났다.
쇳덩이같이 힘든 운명 때문에 구겨져버린 거다.
오기 때문에 유피테르의 벼락을 맞고 테바이의 성벽에서
꺼꾸러져 죽은 카파네우스* 못지않게 키대로 넘어진 나다. *☞ 제4-1권 242.
그리고 시인이 불벼락을 맞았다는 소문을 들었으면,
그대의 어머니인 세멜레를 기억에 떠올렸을지 몰라. 190
그리고는 신단 주위에 모인 시인들을 자세히 빙 둘러본 뒤에,
“나를 공경하던 한 시인이 안 보이네,” 하며 동정했을 것이다.
착한 리베르여, 날 도와다오. 그럼 느티나무엔 또 하나의
담쟁이넝쿨이 감기고, 포도에는 즙액이 가득 고일 것이다. 194
박카이*와 활달한 젊은 사티루스들이 여기 와서 *바카이는 박쿠스를 추종하는 여자 신도들. 사티루스는 염소의
신들린 듯한 고함소리로 떠들썩했으면 좋겠다. 귀, 꼬리 다리 등을 가진 반신으로서. 호색적인 것이 특징이다.
도끼를 메고 다니는 리쿠르구스*의 뼈가 으깨어지고, *박쿠스를 괄시했다가 미쳐서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뜯어
불경한 펜테우스+의 망령이 슬픔을 벗어나지 말기를!16) 먹혀 죽었다. +☞ 펜테우스는 아래 206행 끝.
아리아드네*의 관이 하늘에서 찬란히 빛을 더해가서, *미노스의 딸. 테세우스(☞ 제2권 8의 403행)에게 버림
이웃하는 별들보다 한층 더 반짝반짝 빛나길 바란다. 200 받아 외톨이가 된 그녀를 박쿠스가 구해주고 영롱한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신이여, 나도 그대의 추종자임을 관을 씌워 아리아드네 별자리로 만들었다.
기억하고 어서 이곳으로 달려와서 내 운명을 달래다오.
박쿠스여, 신들도 나름으로 왕래가 있을 터이니
그대의 힘으로 신과 같으신 카이사르를 움직여다오.
고결하게 나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시인들이여, 205
맑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똑같은 청원을 해다오.
그리고 나소의 이름을 들먹이는 그대 누군지 모르나
술잔에 눈물을 섞어 그 어른에게 축배를 올려라.
그런 다음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나를 기억하고 말을
해다오. “근자에 우리 합창단원이던 나소는 어디 갔어?” 210
나의 성실함으로써 그대의 인정을 얻었다면 이것만 해주게,
내가 벌을 받음으로써 지금껏 상처 입은 책이 없거든 말일세.
나는 옛 성현의 고매한 글을 존경하고 있기는 하지만,
요사이의 글 또한 그에 못지않게 값진 거라고 생각해.
그대가 아폴로의 힘을 빌어 노래를 만들도록 기도하겠네. 215
그러므로, 내 이름도 그대들 사이에 지켜주는 게 옳겠어.
*위 198행의 펜테우스. 테바이의 왕. 박쿠스의 신앙을 거부하고 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가
되레 자기 자신의 혈육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죽었다(☞ <변신> 제3권 6, 혈육들에게...).
4. 참 친구에게 (217-266)
나는 나소의 편지. 에욱시누스 해변에서 왔다.
바닷길을 오느라고 지쳤고, 육로에도 지쳤다.
그는 울며 내게 말하더라. “가서 로마 구경이나 실컷 해라.
너는 가도 괜찮아. 아, 그러니 나보다 얼마나 좋은 팔자냐! 220
그는 울먹이며 나를 기록한 뒤에, 나를 봉인한 보석을
들더니 먼저 입술이 아닌 눈물 젖은 뺨으로 가져갔다.
누구든 그가 슬퍼하는 원인을 알고 싶은 자는
태양이 그에게 똑바로 비치기를 요구하는 자이다.
그는 숲 속에서 나뭇잎을 보지 못하고, 드넓은 초원에서 225
연한 풀잎을, 콸콸 넘치는 강에서 물을 보지 못하고 있다.
헥토르*가 당했을 때 프리아무스가 슬퍼한 까닭이 무엇이며,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무스의 아들(☞ 제3권 5의 38행).
뱀에게 물린 필록테테스*가 왜 신음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전쟁 초기에 무인도로 쫓겨나 있었다(☞ 위 1-2의 62행).
제신은 그에게도 이런 기회를 내리시어
슬퍼할 원인이 될만한 일이 없게 하소서! 230
그래도 그는 당연한 듯 쓰린 아픔을 꾹 참고 있다.
길들지 않은 망아지처럼 재갈을 물리치려하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에 악의가 없었음을 알고 있으므로
신님의 진노하심도 영원하지 않으리란 생각이다. 234
그는 종종 신님께선 끝없이 자비로우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몸에
배어있으니, 자기 자신이 바로 그 본보기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가산도, 시민이라는 이름도, 그대로 보전하고 있으니,
요컨대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만도 신님의 은총이라는 것이지. 238
그러나 그대*를(오, 그분께 소중한 모든 일을 내게 터놓아요), *'소중한'을 '카리오르'로 표현한 것, 아래 39행의 울던 모
그는 항상 마음속 깊은 곳에 그대를 잡아두고 있단 말이오. 습으로 보아 이 친구는 이 책 제3권 4의 카루스로 보인다.
그는 그대를 파트로클루스, 필라데스의 친구 오레스테스, *여기 나열된 인물들을 모두 깊은 우정의 귀감들이다. 테세우스는
그대를 테세우스, 에우리말루스*라고 부르고 있다오.* ☞ 제1권 304; 388, 609; 오레스테스는 ☞ 389, 에우리알루스는 ☞ 그는 그의 나라, 그리고 나라에는 남아있어도 391.
그에게서 사라진 많은 것을 그대의 얼굴과 두
눈 못지않게 그리워하고 있소. 오, 아티카*의 벌들이 245 *그리스의 남부지방. 이곳의 꿀은 고대세계에서 명성이 높았다.
벌집에 차곡차곡 모아둔 꿀보다 더 달콤한 그대여!
그는 종종 그때를 슬퍼하며 기억에 떠올린다네.
슬픔이란 것은 죽음도 방해하지 못하는 법이지.
그가 돌연히 파멸해버리자, 그 사나운 불똥이 옮겨 튈까봐
다른 이들은 망한 집의 문지방에도 얼씬하기를 꺼려했지만, 250
의리를 그대로 지켜준 그대와 몇몇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둘이나 서넛을 몇몇이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오.
그는 황망한 가운데서도 그대가 그의 불행을 자신 못지않게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까지 모르는 것 없이 꿰뚫고 있었다오.
그는 종종 그대의 말, 얼굴, 울던 모습, 그대의 눈물에 255
젖어있던 자신의 가슴을 마음속에 되새겨보곤 한다오.
그대는 자신도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친구를 도왔으며, 무엇으로 위로해주었던가!
좋은 날을 보게 되든지, 흙 속에 묻혀버리든지 간에
그는 그때를 기억하고 의리를 지키기로 다짐하였소. 260
그리고는 자기의 목숨과, 자기의 목숨보다 결코 싸구려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 그대의 목숨을 걸고 맹세까지 한다오.
그대가 베풀어준 훌륭한 행적에 깊은 감사를 보내며,
그대의 소가 모래땅을 갈아도 가만 있지 못할 거라오.
귀양 간 인물이나, 계속 보호해주오. 그대의 친구가 265
부탁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대신 부탁하는 것이오.
5-1. 아내의 생일 -축하- (267-292)
해가 바뀌어 아내의 생일이 왔다. 옛날처럼 축하를 해주어야
하겠구나. 나의 손은 어서 가 정다운 사랑의 행사를 집행해라.
옛날 라에르테스의 영웅 아들*도 이 세상 끝자락에서 *울릭세스(오디세우스)를 말한다. '이 세상 끝자락'은 트로이아.
아마도 아내를 위해서 축하의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270
불행 같은 것은 싹 잊어버리고, 은혜로운 말을 하자.
(내 혀는 덕담을 하기도 전에 모든 걸 까먹어버렸나보다!)
그리고 나도 일 년에 한 번 입는 그 옷을 입자.
내 운명과는 딴판으로 눈에 띄게 하얀 색이다.
잔디 뗏장으로 초록색의 제단을 쌓고, 275
따뜻한 화로에다 화환을 엮어서 덮어라.
아이야,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향과 성화에
뿌리면 따닥따닥 소리 내는 포도주를 다오.
즐거운 생일의 영이여! 나 비록 멀리 와 있으나, 부탁이다.
나와는 영 딴 판으로 가장 밝은 모습을 하고 와야겠다. 280
와서, 내 여인을 괴롭히는 아픈 상처가 있거든,
나의 불행으로써 말끔히 지워버리게 해다오.
그리고 엊그제는 폭풍에 맥없이 흔들리던 배였지만
앞으로는 살아남아서 아무 탈 없이 항해하게 해다오.
아내는 가정과 딸과 고향땅에 재미를 붙이고 살게 하라. 285
나 하나만 이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족하니라.
여자로서 남편 복을 타고나지 못하였으니
여생에 어두운 구름이 없었으면 좋겠다.
억지로 생과부가 되어 외로 떨어져 살게 되었지만
남편을 사랑하며 오래 살아서 천수를 다하기 바란다. 290
내 목숨을 아내에게 보태주고 싶지만 내 운명이
혹시라도 아내의 목숨에 독이 되어 퍼질까 염려된다.
5-2. 아내의 생일 -소망- (293-330)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없다. 내가 제타이 족 틈에서
이런 의식을 행하리라고 누가 생각인들 했으랴?
그러나 바람이 제단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어떻게 295
이탈리아로, 행운의 땅으로 날려 보내는지 보아라.
그러므로 불이 내뿜는 향기 속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니,
향기가 폰투스의 하늘을 피하는 데에도 목적은 있는 것.
서로 죽고 죽인 두 형제*가 의도적으로 *테바이의 왕 오에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
제단 위에 공동의 제물을 바쳤다 치자. 300 클레스와 폴리니케스(☞ 제2권 319 이하).
서로 상극하는 잿더미가, 마치 형제의 명을 받은 듯이
시커멓게 따로따로 두 무더기로 쌓이게 되는 것이다.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예전에 내가 말한 기억이 난다.
칼리마쿠스*가 글러먹었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인 겸 학자(305-240 BC경).
지금 내가 이런 걸 믿는 까닭은 수증기가 교묘하게도 305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아이티아>란 시가 있다.
아르크토스*를 비껴서 아우소니아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곰자리. 아우소니아는 이탈리아. 이런 현상에 대해서 칼리
마쿠스가 언급한 것 같으나 어떤 내용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 동이 트지 않았으면
나 같이 못난 자에게 좋은날이 있을 턱이 없고말고.
이날이 에에티온과 이카리우스*를 아비로 둔 훌륭한 *에에티온은 안드로미케, 이카리우스는 페넬로페의 아버지.
여성들에 견줄만한 한 여자를 태어나게 했던 것이다. 안드로마케는 헥토르, 페넬로페는 울릭세스의 아내.
정절과 기개와 충성심은 이날 탄생했다. 311
그러나 기쁨은 이날 태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생과 근심, 그대의 인품에 어울리지 않는 운명이
태어나, 외로운 당신의 침상 곁에는 괴로움밖에 없구려.
정말이다. 가장 슬픈 시기에 역경 속에서 315
배운 미덕은 찬미할 값어치가 있다.
만일 울릭세스가 불운이라는 것을 겪지 못했더라면
페넬로페*는 행복했을지언정 유명해지지는 않았을 것. *울릭세스(오디세우스)의 아내. 20년 동안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인 카파네우스*가 테바이에 원정하여 개선했더라면 *테바이를 공략한 7장군 중 한 사람(☞ 제2권 7의 320, 그 ㈜).
아마 에바드네*는 자기 나라에서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 *남편 카파네우스가 전사하자 화장불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펠리아스에게는 딸이 많았는데, 어째서 유독 딸* 하나만 321 *알체(케)스티스. 남편 아드메투스
유명해졌을까? 불운한 아드메투스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대신 죽었다(☞ 제2권 403, 그 ㈜).
다른 장수가 트로이아의 모래를 먼저 만졌더라면
굳이 라오다미아*를 기억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프로테실라우스의 아내. 사흘 동안 저승
만일에 순풍이 불어서 나의 뱃길을 망쳤더라면, 325 에서 같이 지냈다(☞ 앞 제1권, 471).
당신이 소원한 대로 절개도 감추어졌을 것이오.
그러나 신들이여, 그리고 네스토르*에 버금하는 *펠로폰네수스 서부, 필로스의 왕. 오래 산 것으로 유명하다.
수명을 다하고 나서는 신님이 되실 카이사르여,
나야 의당 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라 고백합니다만,
슬퍼할 까닭도 없이 슬퍼하는 저 여자만은 살려주오. 330
6. 갸륵한 책임 (331-376)
한때 내 운명의 버팀돌이었고,
피난처였고, 나의 기항지였던
그대 역시 돌보던 친구 보살피기를 그만두고
의무라는 갸륵한 책임을 쉽게 벗어버리는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짐이다. 그러나 내가 어려운 시기에 335
놓아버릴 셈이었다면 애초부터 들어주지도 말았어야지.
팔리누루스*가 한바다에 나와서 배를 포기한 적이 있더냐? *아이네아스(트로이아의 유민. 로마의 시조)의
가선 안 되지. 충절이 기술보다 더 못하대서야 말이 되는가. 키잡이. 항해 중에 졸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아우토메돈*이 신의를 잃은 적이 있었던가? 싸움이 한창 *아킬레스의 마부. 아킬레스의 아들과 함께 전투에 임했다.
격심한 와중에 아킬레스의 군마를 버린 적이 있었던가? 340
포달리리우스*도 책무를 한 번 수락한 뒤에는 부상자가 *<일리아스> 2권, 11권에 등장하는 그리스 진영의 군의관. 포에아
생겼을 때 이왕에 약속한 구조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스의 아들 필록테테스(☞ 위 1-2의 61)를 치료했다는 설이 있다.
손님을 내칠 바이면 아예 받지 않느니만 못하니라.
내 손에 닿을 수 있는 제단은 내 손에 그대로 맡겨라.
처음에 그대는 내 편만 들어주었었다. 그러나 내게서 345
잘못이 새로 발견되지 않고 내 과실이 그대의 우정을
갑자기 바꿔놓지 않는 한, 지금은 나와
그대의 판단까지도 함께 지켜주어야 해.
스키티아의 하늘에서 어렵사리 들이키는 나의 호흡이,
내 잘못으로 인해 그대의 마음이 상처를 입기 전에, 350
내가 그대에게 시답잖은 인물로 보이기 전에,
내게서 떠나버리면 좋겠어. 이게 내 소망이야.
내가 턱도 아닌 운명으로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으니,
괴로움을 오래 동안 겪는다 해서 정신이 이상해지진 않아.
그러나 정신이 이상했다면, 아가멤논의 아들*이 얼마나 355 *오레스테스. 필라데스와 형제보다 더 가까
자주 필라데스에게 욕을 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운 사이였다(☞ 앞의 제1권, 389).
그가 친구를 때렸다고 해도 진실과 별로 멀지 않네만,
그래도 그의 친구는 여전히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으니,
이 하나가 비참한 자와 행복한 자에게 공통으로
존경심을 나누게 하는 것일세. 우리는 장님에게 360
길을 내주지만, 진홍색의 줄무늬 옷을 입은 자, 막대기를 *고급관리는 널따란 진홍색 줄무늬 토가를 입었다. 그리고 치안
들고 존경의 함성을 요구하는 자에게도 길을 내주고 있네.* 관 등이 지나갈 때 옛날 조선조처럼 하급관리가 소리를 질렀다.
나를 생각하기 싫거든 내 운명을 생각해 주게. 막대기'는 속간이라 해서 그 수효가 계급의 높낮이를 나타냈다.
그러면 나에 대한 분개심 같은 건 없어질 걸세.
속간(원어로는 파스체스): 눕힌 그림임
나의 아픔 가운데서 가장 적은 것, 가장 작은 것을 365
택해보게. 그것도 그대가 상상한 것보다는 클 걸세.
물이 질척이는 하천을 뒤덮은 갈대풀처럼,
꽃이 만발한 히블라*를 찾아가는 벌들처럼, *시칠리아 동부의 작은 고을. 향기로운 꿀이 유명하다.
보는 족족 작은 길을 따라 지하에 마련된
곡간으로 곡식 낟알을 날라 가는 개미처럼, 370
수많은 불행이 떼거리를 지어 나를 에워싸고 있네.
내 말 믿게. 내가 불평하는 것이 사실보단 적다니까.
그것에 불만을 가진 자는 누구든 백사장에 모래를,
들에다 곡식알을, 파도에 물을 더하려는 자일세.
그러니 부아가 치밀어도 진정하게. 그건 온당치 않아. 375
바다 한가운데까지 와서 우리 배를 버려서는 안 되지.
7. 제타이 족 틈에서 (377-440)
자네가 읽고 있는 편지는 넓은 히스테르 강이 바다에
물을 쏟아 붓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보내온 것이라네.
자네가 지금도 살아있고 향그런 건강을 누리고 있다면
내 운명의 한 부분도 밝은 일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야. 380
사랑하는 친구야, 자네는 내가 말을 않아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요새 어떻게 지내느냐고 자신에게 묻고 있음이 분명해.
난 참담하다. 이것이 나의 불행을 간단히 요약한 말이야.
누구든지 카이사르의 뜻을 거스르고 살면 이런 꼴이 되지.
토미스 근처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또, 나와 385
함께 사는 인간들의 생활습성이 어떤지 알고 싶을 테지?
이 해변에는 그리스인과 제타이인들이 섞여서 살긴 하지만.
그것은 겨우 문명화된 제타이인들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어.
많은 사르마티아 인과 제타이 인 떼거리가
말을 타고 좁은 길을 따라 왕래하고 있어. 390
활, 전동, 독사의 독을 묻힌 담황색 화살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그중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어.
거친 음성, 험상궂은 얼굴은 진짜 마르스* 신의 모습. *마르스는 군신.
턱수염과 머리는 덥수룩한데다가 사시장철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칼로 목표물에 상처를 395
입히는 굼뜨지 않은 손재주도 갖추었어.
슬픈 일이다! 친구야, 네 친구 시인이 그 틈바구니에 끼어 살면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음성을 듣고 사랑하는 이들을 잊어야 하다니!
차라리 그들 속에 살아 있지 않고 죽어버렸으면,
혼령이라도 지긋지긋한 이곳을 벗어날 수가 있지. 400
네 편지에는 내 노래가 무용과 함께 연출되고 있고,
내 시가 극장에서 많은 사람의 갈채를 받는다고?
나로서는 극장을 위해서는 글 한 줄도 써본 적이 없지만,* *다른 사람이 오비디우스의 글을 번안, 무대에 올렸다는 말.
너도 알다시피, 나의 무사 여신은 갈채 같은 건 별로라고.
아무튼 나를 잊혀지지 않게 하고 귀양살이 하는 자의 이름을 405
입에 담게 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고소원이나 불감청이라네.
때로는 나를 망쳐버린 시라는 것과
나의 무사여신을 저주하기도 하지만,
저주를 하고 나서도, 결국 이들 없이는 살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찾는 것은 내 상처의 피를 묻힌 무기와, 410
감히 카페레우스* 곶을 뚫고 달리려 하다가 *그리스 동부, 에우보에아 섬 남단의 곶. 그리스의 선단이
에우보에아의 물결에 망가진 그리스의 배야. 트로이아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곤경에 빠졌던 곳.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를
한 미래의 이름을 위해 밤샘을 해가면서 애 쓸 생각은 없어.
나는 정신없이 공부만 해. 그래야, 말로써 슬픔을 415
속이려고 애쓰는 사이, 근심도 속일 수 있으니까.
이 삭막한 물가에서 혼자 그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뭐겠어?
이 숫한 슬픔을 위해 무슨 다른 구원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바라보면 볼수록 이곳은 정나미 떨어지는 곳.
이 세상에서 이보다 지독한 곳은 없을 거야. 420
사람들 꼴을 보아도 그 이름과 썩 잘 어울린다.
그들에게는 늑대보다 더 잔인한 야만성이 있어.
그들은 법도 두렵지 않다. 정의는 폭력에 굴복한다.
그리고 권리는 무력의 공격을 받아서 뒤집히고 만다.
추위라는 재해는 가죽옷과 헐렁한 바지, 그리고 425
덥수룩한 얼굴을 가리는 긴 머리털로 막아낸다.
아직도 그리스어의 티를 내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이것조차도 제타이식의 발음이 섞여서 촌스러워.
아무리 쉬운 라틴어 몇 마디라도 지껄이는 자는
눈을 닦고 찾아봐도 전 인구 중에 한 사람도 없다. 430
오, 무사여신이여, 용서해주오. 나 로마의 시인이
대부분 일에 사르마티아의 언어를 쓸 수밖에 없소.
보게나.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오래 안 썼던 탓으로
지금은 라틴어가 머리속에서 자꾸 아물거리기만 해.
이 책에도 몇 군데 파격적인 곳이 있다는 거 435
의심치 않아. 이곳 탓이지 사람 탓이 아니야.
그래도 아우소니아 언어*의 용법을 잃어버릴까, *아우소니아는 이탈리아. 그 언어'는 라틴어.
혹시라도 모국어의 음성을 못 내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돼서, 잊혀져가는 어구를 혼자 주절대며
악운을 맞은 내 예술의 상징을 더듬거려 본다네. 440
무사 여신들과 아테나 여신: 한스 로텐하머(1564 - 1626)
8. 원수에게 (441-482)
내가 넘어지긴 했지만 아직 영 자빠진 것은 아닌데도,
세상 무엇보다도 못난 너라는 녀석 밑에 깔려 누웠다.
후안무치한 자. 나하고 무슨 철천지원수가 져서,
너도 당할지 모르는 불행을 보고 비웃기만 해?
들짐승들조차 눈물을 흘리게 만들 내 괴로움이 너를 445
용서하지도, 넘어진 자와 화해시켜주지도 않을 게다.
너는 비틀거리는 포르투나 여신*의 수레바퀴며, 여신이 *행운, 행운의 여신. 그녀는 둥근 수레의 주인인데
싫어하는 오만불손한 말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그수레가 도는 데 따라서 행운과 불행이 바뀐다는
왜 내 운명을 발로 마구 짓밟는 거야? 네메시스 여신은 숨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집념이 강해서 벌 받아 마땅한 사람에겐 꼭 벌을 주거든. 450 *인과응보, 무정한 연인을 벌하는 여신.
나는 파선을 우습게보다가 물에 빠져 죽는 녀석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말했지. "세상에 물결보다 올바른 것은 없단 말이야."
가난한 자에게 식은 밥 한 주먹을 거절한 자는
자신이 언젠가 비렁뱅이의 빵을 먹게 되지.
포르투나는 정처없는 발길이라 어디로 갈지 몰라. 455
확실하게 한 자리에 버티고 섰지도 못하는 거야.
행복을 갖다 주는가 하면 모진 얼굴을 내밀기도 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여신은 변덕스럽다는 거야.
나도 옛날 잘 나가는 때가 있었지만, 다 덧없는 것이었다.
내 불은 지푸라기에 붙인 건지, 금방 꺼지고 말더라. 460
그렇지만 잔인한 즐거움이 네 영혼을 꽉 움켜쥐지 않길 바란다.
내게 신님을 설득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거든.
내가 마음을 상하게는 해도 죄 진 일은 없다는 것, 내 잘못이,
부끄럽긴 하지만, 과히 비난받을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또,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넓은 세상 어디에도 465
세계의 주인이신 그분보다 더 자비로운 이는 없기 때문이야.
어떤 세력도 그분을 정복하지 못하지만, 그분은 두려움을
지닌 자에게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다는 게 사실 아니냐?
그러니 앞으로 그분과 함께하실 제신의 본보기에 따라
나의 선고를 반려하시고 다른 탄원도 받아주실 것이다. 470
한 해에 갠 날과 흐린 날의 수를 세어보아라.
밝은 날이 더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다시 회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나의 몰락을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기를 바란다.
생각해봐. 만약 폐하께서 자비를 보이시면, 로마 시 한가운데서 475
내 얼굴을 본 네가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 매는 수도 있을지 몰라.
그리고 나는 더 큰 죄를 짓고 쫓겨나는 너를 보게 될지도 모르지.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소망 다음으로 바라는 두 번째의 소원이니까.
9. 감사 편지 (479-516)
아, 너의 이름*을 내 시에 올려도 좋다고 했으면, *이 사람도 코타(☞ 이 책 제3권 6의 1)일 것이다.
얼마나 자주 내 글에서 그 이름을 불렀겠느냐! 480
나는 너의 도움을 기억하면서 너만을 노래해 왔을 거고,
네가 없었다면 내 책의 한 쪽도 완성되지 않았을 거야.
유배자인 내가 지금도 잃어버린 도시에서 읽혀지고 있다면,
내가 너에게 진 빚은 온 시내에 샅샅이 알려질 것이다.
지금도 너의 친절함을 알아줄 것이고, 485
장차도 내 작품들이 살아있기만 하다면,
그리고 현명한 독자들이 계속 너를 축복해 준다면,
한 시인을 살려낸 너의 영예는 없어지지 않을 게다.
내게 첫째 선물이 카이사르께서 숨을 쉬게 해주신 것이고,
위대한 제신 다음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바로 너야. 490
그분께선 목숨을 주셨지만, 너는 그의 선물을
지키고, 받은 선물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어.
내가 무너질 때 사람들 태반이 벌벌 떨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전부터 두리고 있었음을
드러내 보이려는 듯, 먼발치에서 불구경하듯 하면서, 495
거친 바다를 헤어나려는 자에게 손을 내밀지 않더라.
너만이 스틱스의 파도에 초죽음이 된 나를 끌어내주었어.
내가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역시 네 덕분이야.
카이사르와 제신이 영원토록 너의 벗이 되어주기를!
이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 500
네가 허락만 한다면 내 작품은 이 모든 것들을
설득력 있는 책에 담아 광명 속에 내놓고 싶어.
지금도 나의 무사는, 잠자코 있으라고 아무리 주문을 해도,
네 이름을 부르지 못해 안달. 너는 바라지도 않을 터인데.
놀라서 내빼는 사슴의 길을 냄새 맡고 짖어대지만 505
튼튼한 가죽끈에 묶여서 꼼짝을 못하는 사냥개처럼,
열리지 않는 출발선의 문짝을 발굽으로,
심지어 대가리로 떠밀어대는 경주마처럼,
너의 령으로 족쇄를 차고 꼼짝 못하는 나의 탈리아는
금지된 네 이름으로 영예를 추구하려고 안달이로구나. 510
그러나, 그렇다고 너를 기억하는 한 친구의 존경심 때문에
네가 상처받는 일은 없도록, 시키는 대로 할 테니 걱정 말아.
그러나 나를 고맙게 생각하지 않으면 나도 복종 않을 터이다.
나는 네 목소리가 금하지 않는 것, 그것이 될까 한다. 고마워.
생명의 빛이 보이는 한, - 오, 그 기간이 짧기를! - 515
내 영혼은 너를 돕는 일에 노예가 될 생각이다.
10. 토미스의 유배생활 (517-568)
내가 폰투스 해변에 온 뒤 추워서 히스테르가 세 번 얼었고,
에욱시누스 바다*가 꽁꽁 얼어붙은 것도 이번으로 세 번째다. *히스테르는 도나우, 폰투스(바다), 에욱시누스(인정
그런데도 다르다누스*의 트로이아가 그리스 군대와 싸운 스러운 바다)는 흑해. *트로이아의 시조.
십 년이나 되는 세월 만큼 고향을 떠나 있었던 느낌이다. 520
시간이 가만히 서버린 듯하다. 시간은 지극히 굼뜨지만,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한 해가 그 행로의 끝을 맺는다.
내게는 하지가 되어도 밤이 줄어들지 않고,
겨울이 돼도 낮이 조금도 짧아지지 않는다.
나에게는 자연이란 것이 새로 만들어진 것 같다. 525
그래서 만사가 나의 근심처럼 지겹게 되고 말았다.
아니라면 시간은 평소처럼 갈 길을 달리고 있는데,
내 인생을 위해서만 시간이 딱 멈췄는지 모르겠다.
나는 엉터리 이름을 붙인 에욱시누스* 해변과 *혹독한 흑해의 황경을 역설적으로 부른
진짜 못된 스키티아 바다의 해안에 갇혀 있다. 530 것이 인정스러운(에욱시누스) 바다이다.
약탈하지 않고 사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하는 건지
인근 수많은 부족들이 으르렁거리며 싸우려고 한다.
문밖에는 안전한 곳이 없다. 산에는 곧장 무너질 듯한
담으로 교묘하게 구획정리를 해서 방비가 되고 있다.
적은 전혀 예상하지 않을 때 새처럼 내리 덮쳤다가, 535
약탈한 물건을 챙겨 달아날 때에야 겨우 눈에 띈다.
성문이 버젓이 닫혀 있을 때도 성 안 길거리 한가운데
날아 들어온 화살을 줍는 것이 예삿일로 되어 있다.
그러니 감히 들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은 드물밖에.
한 손에는 쟁기를, 또 한 손에는 무기를 들어야 하니까. 540
양치기는 투구를 쓰고 송진으로 붙인 갈대피리를 분다.
양들을 섬뜩하게 만드는 것은 늑대가 아니라 전쟁이다.
사람도 성내에 있다고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그리스인과 섞여있는 야만족의 무리가 겁을 주는 것이다.
야만인들이 우리들과 한데 섞여 살지만 식별이 안 되는 것은 545
이 사람들이 거의 절반이 넘는 집을 차지하고 살기 때문이다.
설혹 그들이 두렵지 않다 하더라도, 양가죽 옷과 온몸울
내리덮은 긴 털은 보기만 해도 흉물스러울 밖에 없다.
그리스의 식민지 출신이 아닐까 생각되는 자들조차도
대대로 물려온 옷 대신에 페르시아의 바지*를 입는다. 550 *누비바지.
그들은 끼리끼리 통하는 말로써 얘기를 주고받으니,
나는 몸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형편이다.
내 라틴어를 들은 제타이인들이 바보처럼 이죽거리며 웃는다.
여기서는 아무에게도 말이 안 통하는 내가 되레 야만인이다.
그들은 내 면전에다 대고 심술궂은 소리를 마구 해댄다. 555
못 알아들으니 아무소리면 어때, 내 유배를 비웃나보다.
늘 그렇듯이 그들이 말을 하면 내가 머리를 끄덕이거나 맞다
아니다로만 응대하는 걸 보고는 뭔지 잘못됐다는 생각들이다.
여기에다 한 술 더 떠서 예리한 칼날이 부당하게 정의를
대신하고, 장바닥에서 사람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560
오, 모진 라케시스*는 이런 불운의 별을 타고난 나에게 *운명의 여신(파르카이, 또는 모이라이로 불리기도 한다)
어쩌자고 보다 짧은 생명의 실타래를 허락하지 않았나? 셋 중 하나. 그 셋의 이름은 각각 클로토(실을 잣는 자),
내 나라와 나의 친구들을 보지 못하는 것, 스키티아 라케시스(운명의 그림을 그리는 자), 아트로포스 (불가
부족들 틈바구니에서 사는 모습을 탄식한다는 것이 피한 것), 그러나 작가에 따라 이름과 직능에 차이가 있다.
둘 다 중한 벌이다. 아무리 로마에서 쫓겨남이 마땅하다지만, 565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할만한 짓은 아마도 하지 않았을 터이다.
미친 놈! 내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카이사르 신의 뜻을
거슬렀을 때, 목숨 자체를 잃었다 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을.
11. 아내에 대한 모욕 (569-598)
당신 편지를 봤더니 누군가가 당신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귀양살이 하는 사내의 여편네’라 해서 기분 잡쳤다 했소? 570
나도 기분이 상했소. 내 신세를 갖고 악의로 마구 씹어댄다고
그랬던 건 아니오. 이젠 고통을 참는 일이 몸에 배었으니까요.
내가 당신에게 수모의 원인이 된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거요.
우리 악운으로 당신이 창피를 당하는 건 절대 바라지 않소.
굳굳하게 참읍시다. 폐하의 진노로 내가 당신과 갈라섰던 575
그때만 해도 당신의 마음이 이보다 훨씬 더 아팠을 거요.
나는 다소 부드러운 선고로써 죄 값을 치르고 있으니
나를 ‘유배자’라고 부르는 자는 판단이 잘못 된 거요.
가장 큰 죄는 폐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오.
그 일이 있기 전에 죽어버렸더라면 좋을 걸 그랬소. 580
그렇지만 내 배가 난파는 되어도 물에 가라앉지 않았고,
항구는 빼앗겼지만 아직 물위에 떠있는 것만은 사실이오.
내 잘못으로 목숨, 재산, 공민권을 잃어 마땅한데도
폐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박탈하지 않으시었소.
그러나 내 죄에는 하등의 범죄행위가 없었으니 585
따뜻한 가정에서 떠나 있으라고만 명하신 거요.
다른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하신 것처럼
카이사르의 힘이 나에게도 자비로우셨소.
폐하께서는 추방이 아니고 좌천*이라는 말을 쓰셨소. *렐레가투스. 추방은 엑술.
폐하의 판단이 그러하니 나는 아무일도 없을 것이오. 590
그러므로 나의 시가 아무리 보잘것없다 해도
힘껏 카이사르의 찬미를 노래함은 당연한 것.
제신이 카이사르에게 하늘의 문을 으당 닫아걸도록,
그리고 이분이 그들과 별도의 신이 되시기를 빌겠소.
백성들도 그렇게 기원하고 있소. 강물이 한바다로 흘러들듯이, 595
보잘것없는 물을 가진 작은 실개천도 그리로 흘러가는 것이오.
나를 ‘추방자’라고 입에 담아 부르는 여러분들,
그 거짓 이름으로 내 운명에 짐을 지우지 마오!
12. 유배 중에 쓴 시 (599-666)
일을 함으로써 눈물겨운 시간을 밝게 지내라고 편지를 썼더군.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사고력이 없어지지 않을까 해서 그러겠지. 600
친구야, 넌 어려운 충고를 하고 있어. 노래라는 것은
기쁨의 산물이라, 편안한 마음이 필요한 거란 말이다.
내 운명은 해찰궂은 바람에 요동치고 있어.
이보다 어두운 운명은 아무데도 없을 거야. 604
그것은, 프리아무스*더러 죽은 아들을 앞에 놓고 춤을 추라, *트로이아의 왕. 그의 아들은 아킬레스에게 살해된 헥토르.
혼자 남은 니오베*더러 축제의 합창을 지휘하라는 것과 같아, *테바이의 왕비. 오만한 성품 떄문에 아들딸을 모두 잃었다.
혼자서 머나먼 제타이로 떠나도록 명을 받은 자가
마음속에 가진 것이 과연 슬픔이 아니고 시일까?
활기찬 정력으로 강화된 심장 한 개를 나에게 주어보아라. 609
아니투스*의 고발을 받았던 인물이 가졌다던 그것 말이야. *아테네의 군인 정치가(5-4세기 BC). 젊은이들을
그러나 이렇게 몽땅 망하면 지혜도 함께 무너진다네. 나쁜 길로 이끈다고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들
신의 진노하심은 인간보다 힘이 더 강하기 때문이지. 중 하나.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뒤 추방되었다.
아폴로가 슬기롭다고 단언했던 옛날 그 사람*이라 할지라도 *카이레폰(소크라테스의 친구)이 델포이의 아폴로
이런 상황에서 글 쓸 힘이 없기는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탁소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소크라테스보다
내가 내 나라를 잊고, 그대를 잊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슬기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는 답을 했다고 했다.
내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이 다 나를 떠난다 해도, 616
두려움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없단 말이다.
수없이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서 살고 있기 때문이야.
설상가상으로 오래 동안 써먹지 않았더니 창의력이
손상을 입어서 둔해졌는지 옛날보다 훨씬 못해졌어. 620
옥답도 계속 쟁기질을 해서 흙을 뒤집어주지 않으면
잡초와 가시나무 말고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게 돼.
마구간에 너무 오래 갇혀있던 말은 경주에 서투르니,
출발선에서 같이 달려 나온 말들 중에서 꼴찌가 제격.
배도 늘 떠있던 물 밖에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625
썩어서 약해지고 균열이 생겨 입을 쩍쩍 벌린다.
내게 희망을 갖지 말아라. 나는 본래 작은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되어달라면 한 번 더 되어 줄 수는 있어.
나쁜 일을 오래 겪다 보니 재주도 고갈되고
옛날의 어기찬 힘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630
그래도 지금처럼 서판을 꺼내들고 앉아서 단어를
적당한 운율에 맞게 짜 맞추어 넣고 싶기는 해도,
시란 것이 만들어지질 않아. 너도 보다시피 겨우
작가의 나이와 상황에 맞는 이런 것밖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명성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 마음에 적잖은 635
힘이 돼. 찬미 받고 싶어지면 창조적 정신력도 생기지.
옛날 내 배가 뒷바람을 담뿍 받고 앞으로 내달을 때에야,
나도 휘황찬란한 명성과 영예에 매혹을 느끼기도 했었다.
지금은 사정이 탐탁치 못해서 영광을 탐하긴 틀렸으니,
가능하다면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어. 640
그게 아니면, 혹시, 처음엔 내 시가 잘 나갔으니 그때의 성공을
이어가라는 뜻으로 억지 글이라도 쓰게 만들어 놓겠다 그 말이냐?
이런 말 해서 될지는 몰라도, 아홉 분 자매*여, *무사 여신들.
내가 귀양을 사는 것은 여신들의 탓이 큽니다.
청동 황소를 만들었바쳤던 자*가 당연한 죄값을 했듯이 645 *페릴루스. ☞ 앞의 제3권 651.
나도 내 예술의 죄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으니까요.
나는 시로써 할일이 더 남아있지를 않습니다.
파선을 당한 자로서 물은 마땅히 피해야지요.
그 섬뜩한 예술을 다시 시도한다면 난 미친 놈입니다.
이곳이 노래를 만들도록 나에게 여건을 만들어줄까요? 650
여긴 책도 없습니다. 내게 귀를 빌려줄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아듣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방이 무지함으로, 짐승 소리로, 꽉 들이찼습니다.
사방이 죽인다 살려달라는 무서운 음성들뿐입니다.
나만 해도 라틴어를 잊어먹고 어느샌가 655
제타이와 사르마티아 말을 터득했으니까요.
청동의 소를 만든 페릴라스가 맨먼저 그 안에 들어가고 있다(동판화): 피에르 외리오(1532-99)
그러나, 너에게만 사실대로 고백하지만, 나의 무사께선
도무지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모양이로구나.
그래서 난 글을 쓰고, 써놓은 책을 불에 태워버려.
내 노력의 결과라면 몇 무더기의 잿더미뿐이라구. 660
시를 쓸 수 없으면서도, 쓰기를 그만두고 싶진 않아.
그러니 내 노력은 불속에 던져지고 마는 것이지.
결국 너에게 가는 것은 어쩌다, 혹은 슬쩍 건져둔 놈,
그러니까 내 작품 중에서 겨우 몇 몇 단편에 불과해.
이렇게 될 줄 미처 몰랐던 작가를 폐가망신시킨 665
<기교>*가 잿더미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아! *오비디우스의 초년작 유배의 빌미가 된 <사랑의 기교>를 말한다.
13. 소식 전해주어 (667-700)
누구라도 자신에게 없는 물건을 보내는 재주가 있다면,
나소는 제타이 족의 땅에서 이 ‘건강’을 너에게 보낸다.
마음에 든 병이 몸으로 옮겨와 붙었는지
삭신이 구석구석 쑤시지 않는 데가 없다. 670
옆구리가 쑤시고 아픈 지도 여러 날이 되었다.
고르지 않은 겨울 추위가 내 몸을 해치나보다.
그러나, 내 파멸을 너의 두 어깨가 떠받혀주었으니,
네가 아무 탈 없이 있다면 나도 웬만큼은 건강하다.
그런데, 내게 큰 사랑의 증거를 보여준 적도 있었고, 675
나의 생명을 두루두루 여러 가지로 보호해 주면서도,
왜 편지 한 장 제대로 안 보내서, 실상은 의리를
지키면서도, 말을 아낌으로써 내게 죄를 짓는가?
그건 좀 변했으면 좋겠어! 그 하나만 고친다면
너의 완벽한 몸에 결점 하나 없을 것 같아. 680
편지는 보냈는데 아직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너를 더 호되게 질책하고 싶어진다구.
제신이여, 내 불평이 터무니없는 억지라고 인정하소서!
네가 나를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틀려먹었어.
내가 바라는 대로 될 거야. 분명해. 너의 한결같은 마음이 685
변할 수 있다고 믿다니, 내가 잘못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야.
네가 친구를 잊었다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그 먼저
가녀린 쓴쑥이 얼음골 폰투스에서 사라져 없어지거나, * *향쑥 속(屬)의 식물. 향이 짙은 초록색, 회색, 은백색 등이 있다.
트리나크리스*의 히블라+에 향그런 타임^이 없어지겠지. *시칠리아 섬. 트리나크리아(세모꼴의 땅)라고도 부른다.
내 운명의 실타래는 그것처럼 어둡지만은 않다. 690 +시칠리아의 동편, 지금의 멜릴리. 꿀로 유명한 소도시. ^타임은
혹시라도 본심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게나. 꿀풀과의 백리향속(白里香屬) 식물. 잎과 줄기가 향신료이다.
그래야 허물을 날조해서 비난하는 자를 반박이라도 해주지.
우리는 늘 대화를 나누면서 긴 시간을 보내곤 했지.
이야기 하느라고 날이 다 새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와 같이 지금 편지는 우리 목소리를 오며가며 전하니 695
편지지와 손이 세 치 혀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그 일을 한다고 내가 지나치게 불신해 보이지 않도록,
그리고 이 편지 속의 몇 글자가 너에게 그것을 일깨워주도록,
편지가 끝날 때마다 항상 끝에 달린 인사말을 받아주어.
너의 운명은 나와 다르기를 빌어마지 않네! ‘잘 있게나.’ 700
14. 아내 자랑 (701-746)
나에게 나의 몸보다 더 소중한 아내여, 당신을 위해
얼마나 큰 기념비를 내 책에 키워놓았는지 보시오.
포르투나는 글쓴이를 평가절하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변함없이 나의 예술로 영광을 누리리다.
내 글이 읽혀지는 한, 당신의 명성도 함께 읽혀질 것이니, 705
당신은 화장 불에 타더라도 영영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오.
남편의 기구한 운명 때문에 당신이 측은하게 보일지
몰라도, 당신을 닮고 싶어서 안달하고, 당신을 행복한
여자라 일컬으며, 우리가 불행을 함께 나누는 것을
질투까지 하는 이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이오. 710
당신에게 많은 재산을 주는 것이 많은 것을 배푸는 게 아니오.
많이 가지고 있어도 저승으로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없소.
나는 당신에게 영원불멸하는 명예라는 열매를 주었으니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거나 진배가 없는 게요.
거기에다 당신은 내 재산의 유일한 관리자. 715
그건 적지 않은 명예와 함께 얻는 부담이오.
당신에 관해 목소리를 죽이지 못하는 남편의 증언을
당신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오.
아무도 내 말을 허튼 소리로 여기지 않도록, 꿋꿋이 서서
나를 지켜주고, 마찬가지로 당신의 명예도 지켜주시오. 720
내가 아무 탈 없이 잘 있는동안 당신의 착한 심성은
비난을 받은 적도, 질책을 받은 적도 전혀 없었소.
이제 내가 망했으니 당신에겐 깨끗한 터전이 마련되었소.
모두 보란 듯이 그곳에다 덕성으로써 집을 쌓아 올려요.
방해물이 멀리 있을 때, 아내의 책무를 훼방하는 725
것이 없을 때는 선량해지기가 아주 쉬운 것이오.
신의 벼락이 떨어져도 구름을 피하지 않는 것,
그거야말로 진정한 절개, 혼인으로 맺어진 사랑이오.
포르투나*가 사라져도 당당히 버티고 서있는 덕성, *행운의 여신.
여신의 조종을 받지 않는 덕성은 참으로 드물지요. 730
그러나 덕성이 구하는 보답은 바로 덕성 그 자체이고,
행복하지 못할 때에는 어려움을 맞서는 것이 덕성이며,
몇 백 년이 지나도 무시되는 법이 없는 것이 덕성이라,
덕성은 지상에 길이 나있는 곳마다 찬미의 주제인 것이오. 734
오디세우스(울릭세스)와 페넬로페: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치오(1505 - 70)
페넬로페*의 절개가 요원한 시대를 통해서 어떻게 *울릭세스(오디세우스)의 아내. 남편이 전쟁에 나가고 없는
불멸하는 명성과 함께 찬미 받고 있는지, 그리고 20년 동안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꿋꿋이 절개를 지켰다.
아드메투스의 아내, 헥토르의 아내, 화장불 속으로 뛰어든
에바드네*가 어떻게 노래로 칭송되고 있는지도 알지요? *에바드네는 남편의 화장불에 들어가서
잽싼 발로 남 먼저 일리움의 땅을 밟았던 필라코스의 같이 죽었다(☞ 이 책 제3권 3-2의 64).
영웅을 남편으로 둔 여인*의 이름은 어떻게 살아있지요? 740 *필라코스의 영웅 프로테실라우스의 아내는 라오다미아.
죽어서는 도움이 안 되니, 살아서 사랑하고 성실해요. 3시간을 저승에서 남편과 함께 지냈다(☞ 제1권 6의 19,).
고생을 통해서 이름을 얻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어요.
당신의 무기력을 내가 훈계하고 있다 생각은 말아요.
이미 노질을 시작한 배에다가 돛을 얹어주는 격이니.
이미 진행 중에 있는 일을 하라고 일러주는 사람은 행동을 745
말로써는 칭찬을 하고, 재촉함으로써 인정을 해주는 것이오.
제5권 끝
*****비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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