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또 ◇
각 도에 파견된 문무관리를 이르는 말로 원래 사도(使道)라고 불렀다. 이것이 나중에 변하여 '사또'가 되었다
'입 속의 뒤쪽 맨 구석에 나는 작은 어금니'를 말한다.
사랑니는 대개 다른 어금니가 다 난 뒤, 성년기에 새로 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사람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때며, 특히 새로 어금니가 날 때 마치 첫사랑을 앓듯이 몹시 아프다고 하여 '사랑니'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매우 추운 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사명대사라고 하는 사명당은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승려로, 임진왜란 당시 사명당의 활약을 과장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져 온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사명당이 일본과 강화를 하기 위해 일본에게 건너갔는데, 그 때 왜왕이 사명당을 태워 죽이려고 구리로 집을 지어 그 속에 가두고 사면에서 불을 피웠다. 그러나 사명당은 사벽(四壁)에 서리 상(霜)자를 써 붙이고 방석 빝에 얼음 빙(氷)자를 써 놓은 다음 팔만대장경을 외우니 방이 타기는커녕 방안에 얼음이 얼어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몹시 추운 방을 가리켜 '사명당 사첫방'이라고 하게 되었다. 사첫방의 '사처'는 '하처(下處)'가 변해서 된 말로, 점잖은 손님이 객지에서 묵는 집을 가리킨다.
같은 유래에서 나온 말로 '사명당이 월참(越站)하겠다'는 속담이 있다. 사명당이 길을 가다가 쉬지도 않고 지나쳐 버릴 정도로 방이 매우 춥고 차다는 뜻이다.
'일을 그르치게 하다'는 뜻이다.
길이 10cm 가량의 향목(香木)이나 금속 혹은 대나무를 에어 괘(卦)를 새긴 것을 산가지 또는 산대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산대를 넣는 통을 산통이라고 한다.
점을 칠 때 산통을 대여섯 번 흔든 다음 산통을 거꾸로 들면 그 구멍으로 산가지가 나온다. 이 산가지의 괘로 점을 치는 것을 산통점이라고 한다. 이 때 산가지를 집어 넣는 산통을 깨 버린다는 것이므로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틀어 버린다는 뜻으로 쓰게 되었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원래 불교용어인 산림(山林)에서 나왔다. (産林이라고도 쓰기도 한다.)
산림은 절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말하는데, 이 말이 절의 재산관리만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의 재산을 관리하고 생활을 하는 일까지를 가리키게 되었다.
'매우 힘들고 험난한 곳으로 가거나 어려운 지경에 이르다'라는 뜻이다.
삼수는 함경남도 북서쪽에 있는 고장으로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국내에서 가장 추운 지대에 속한다. 겨울에는 평균 영하 16~18도에 이르고 눈이 수척의 높이로 쌓인다고 한다. 또한 교통이 불펀하여 옛날에는 유배지로 유명했다.
갑산은 함경남도 북동쪽에 있는 고장으로 삼수와 마찬가지로 매우 춥고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다. 두 지역 모두 지형이 험한 데다 유배지로 이름이 나서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 하는 곳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삼수갑산을 가다'고 하면 아주 멀고 험한 곳으로 가거나 아니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는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달아나는 것이 상책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제서>의 「왕경즉전」에 나오는 '王敬則曰 檀公三十六策 走爲上計', 즉 '단공이 말한 36가지의 책략 중에 (상대방이 너무 강해서 대적하기 힘들 때에는) 달아나는 것이 가장 나은 계책이다'라는 말이 줄어서 '삼십육계'가 되었다.
비겁하게 달아난다는 뜻을 담아서 많이 쓰고 있으나 원래는 힘이 약할 때는 일단 피했다가 힘을 기른 다음에 다시 싸우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무조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병법의 하나로서 뒷날을 기약하며 일단 후퇴전술을 쓸 수도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할 때의 '줄행랑'은 '주행(走行)'이 변해서 된 말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이야기가 곁길로 빠지거나 어떤 일을 하는 도중에 엉뚱하게 그르치는 경우'에 쓰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첫째, 옛날에 어떤 장사꾼이 장사가 잘 되는 진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장사가 안 되는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둘째, 진해에 해군기지가 생긴 이래 해군들에 의해 나온 말이다. 진해에서 서울로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하는 도중에 삼량진에서 진해 가는 기차를 갈아타지 않고 잘못하여 삼천포 가는 것을 갈아 타는 바람에 귀대 시간을 어겨 혼이 나는 병사들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는 것이다.
셋째, 부산을 출발하여 진주로 가는 기차에는 삼천포로 가는 손님과 진주로 가는 손님이 함께 탄다. 기차가 계양역에 닿게 되면 진주행과 삼천포행의 객차로 분리하여 운행한다. 이 때는 반드시 방송을 통해 진주행 손님과 삼천포행 손님은 각각 몇호차로 옮겨 탈 것을 알려 준다. 그러나 진주를 가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잠들거나 하여 엉뚱하게 진주가 아닌 삼천포로 빠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여 생긴 말이다.
위 세 가지 유래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지금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별 볼일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된 말이다.
노름판에서 세 끗과 여덟 끗을 합하면 열한 끗이 되는데, 여기서 10단위를 떼면 한 끗이 된다. 한 끗을 따라지라고 부르며, 매우 낮은 끗수에 해당되어 별 볼 일 없는 패를 잡은 셈이 된다.
해방 직후 북쪽에서 토지개혁이나 종교 문제 등으로 남쪽으로 삼팔선을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빈털털이거나 의지할 데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삼팔선을 넘어온 이들의 신세를 노름판에서 말하는 가장 낮은 끗수인 따라지에 빗대어 '삼팔 따라지'라고 하게 되었다.
흔히 키와 몸이 작아 보잘 것 없는 사람이나 따분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따라지라고 하며, 남에게 매여 자유없이 사는 목숨을 '따라지 목숨'이라고도 한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말다툼을 할 때 주먹, 손가락, 막대기 따위로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내지르는 짓'을 말한다.
삿대는 상앗대의 준말이며 상앗대는 물가에서 배를 떼거나, 또는 물이 얕은 곳에서 밀어 갈 때에 쓰는 장대를 말한다. 따라서 삿대질은 원래 상앗대로 배질을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말다툼을 할 때에 주먹이나 손가락 또는 막대 등을 상대편의 얼굴 쪽으로 내지르는 짓이 마치 상앗대로 배질을 하는 것과 같다 하여 생긴 말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샅은 두 다리의 사이나 두 물건 사이의 틈을 가리킨다. "샅샅이"는 조금이라도 틈이 있는 모든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석구석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매우 얌전하며,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샌님은 원래 '생원(生員)님'이 줄어서 된 말이다. 생원은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을 볼 때 소과 종장(終場)의 경의(經義)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며, 뒤에 흔히 나이 많은 선비를 대접하느라 그 성 밑에 붙여서 부르곤 했다.
따라서 생원이라고 하면 대개 공부도 많이 하고 행실도 점잖은 선비에 속했다. 이로부터 선비처럼 얌전한 사람을 일컬어 '생원님', 즉 '샌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여자처럼 숫기가 없고 활발하지 못한 성격의 남자를 비아냥대는 말로 쓰인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뒷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개성이나 황해도 지방에서는 뒷간을 '서각'이라고 한다. 옛날 이성계가 무력으로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웠을 때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살던 사람들이 이성계를 증오하여 뒷간을 서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각은 이성계의 왕좌가 있던 곳의 서쪽에 있던 누각이다.
'음력 12월'을 가리킨다.
섣달이란 설이 드는 달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은 설이 음력 1월에 해당하지만 수천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는 동안 한 해의 출발을 어떤 달로 삼았는가 하는 것은 여러 번 바뀌었다.
그 중에는 음력 동지달, 즉 11월을 첫달로 잡은 적도 있다. 동지 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하는 말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도 그런 생활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12월 1일을 설로 쇤 적도 있는데 사람들은 이 달을 설이 드는 달이라고 하여 '섣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설달'이 '섣달'로 된 것은 '술가락'이 '숟가락'으로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은 1월 1일로 설이 바뀌었지만 섣달이라는 말은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설날'의 '설'은 '새로운'의 뜻이다. '설날'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하는 날'의 의미가 될 것이며,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도 '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설'은 모음교체가 되어 나이를 나타내는 '살'로 쓰인다. 즉, '설'이 되면 한 '살' 더 먹는 것이다.
소의 머리·내장·족·무릎도가니…… 따위가 폭 고아진 국물에다 그 고깃조각들이 섞인 국밥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모든 간판이 한글로 되면서 눈에 안 띄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雪濃湯"이라 쓴 간판하며 차림표가 걸려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雪濃湯"이라니 무슨 뜻인가 생각했다가 그 국물이 뽀얗게 짙어서 그럴싸한 한자 맞춤자였구나고 뒤늦게 깨닫기도 한 설렁탕이었다. 지난날에야 "雪濃湯"·"雪農湯"이었건 "선롱탕"·"설농탕"·"설롱탕"이었건, 지금의 표준말로는 "설렁탕"이다.
서울 용두동쪽 서울대학교 사범 대학 터에 선농단(先農壇)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있지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後織氏)를 제사 지냈던 곳이었으니 농경민(農耕民)다운 습속을 이어받은 때문이었다고 할 일이다. 해마다 절기가 봄으로 접어들 때, 즉 경칩(驚蟄)이 지난 돼지날(亥日)을 가려 지낸 이 제사에서는, 적전지례(積田之禮:임금이 친히 밭을 가는 의례)을 행했으며, 비가 안 오면서 가물어대는 해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던 조선 왕조 성종(成宗) 6년(1475) 정월에, 임금께서 이곳에 납시었다. 종친 월산 대군(月山大君)에 재상 신숙주(申叔舟)도 끼었으며, 거기에 서민이 합세하여 밭을 갈았다. 그러고서 백성을 위로하여 국말이밥과 술을 내렸는데, 이때 선농단(先農壇)에서 먹게 된 국밥 을 "선농탕"(先農湯)이라 이름지어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된 "설렁탕"이라는 말로 된다는 것이 "설렁탕"에 대한 일반적인 어원론으로 되고 있다.
"곤난"(困難)이 "곤란→골란"으로 발음됨은, 이른바 닿소리의 이어바꿈(子音接變) 현상이다. 우리말은, "ㄴ"과 "ㄴ"이 이어질 때 "ㄹ+ㄹ"로 발음되는 것이어서, "한남동"이 "할람동", "논난(論難)"이 "놀란"으로 된다. 그런 발음 현상 따라 "선농탕"을 "설롱탕"이라 말하는 동안, 그 한자인 "先"자를 "雪"자로 갈아 끼워 봤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때, "雪"과 "濃"의 두 한자에서 말의 뜻을 찾으려함은 애당초 잘못이었다고 하겠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와서 말이지만, 오늘날의 "설렁탕"과 "先農壇"과는 아예 관련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굳이 말밑을 캐다 보니, 그쪽으로 기울어 해석하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先農壇"의 "先農"과, 여항에서 말하는 "설롱탕" 혹은 "설렁탕"의 "설렁"이 비슷한 음이어서 갖다붙여 본 것일 수도 있지 않겠냐 함인데, 어쨌거나 "설렁탕"의 유래를 "先農壇"에 갖다댄 것은, 농경민이었던 우리네 조상의 냄새를 그대로 풍겨 준다는 뜻에서도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다. 학자 가운데는 몽골말 sil (n)-실루(실룬)에서 차용한 말이라는 설을 내세우는 이도 있다. 그렇게 말한다면 고깃국물을 뜻하는 만주어(滿洲語)인 sile(실레)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설사 뿌리가 거기였다 해도 너무 멀리만 느껴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출처:<박갑천의 재미있는 어원이야기>
우리가 늘 사용하는 단어 중에 '성가시다'는 말이 있지요. '귀찮다, 괴롭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파리하다, 초췌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성가시다'(현대 철자법으로 고쳤습니다)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면 모든 것이 귀찮아지겠지요.
*출처 : 홍윤표
불을 켜는데 썼던 `성냥`은 마치 고유어인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한자어였습니다. 즉 `셕뉴황`이 음운변화를 겪어서 `성냥`이 된 것입니다.
*출처 : <우리말 어원>
'혼잡한 곳에서 남의 물건을 슬쩍 훔치는 사람'이다
옛날 사람들이 입고 다니던 두루마기 따위 웃옷의 좌우에 있는 옷소매는 품이 크고 넓어서 흔히 그 안에 돈이나 다른 귀중한 물건들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 옷소매 안에 있는 돈이나 물건을 훔친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알코올류인 소주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후기로서 원나라에서 처음 수입되었다. 알코올의 증류법은 원래 아랍의 명의인 아비케나가 발명했는데 원나라에서는 이 증류법을 이용하여 소주를 만들었다.
소주라는 말은 고려 공민왕 때의 <최영 장군전>에 그 이름이 처음 보인다. 조선에 들어서는 1393년 12월에 태조의 맏아들 방우가 소주를 매일 마셔 병들어 죽었다고 적혀 있다.
*출처:<우리말의 나이를 아십니까>
'손을 타지 않는 길일(吉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사를 하거나 무슨 큰 행사가 있을 때, 어른들이 '손 없는 날'을 골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손'은 날수(日數)에 따라 4방위로 돌아다니며 사람의 활동을 방해한다는 귀신을 일컫는 말이다.
손은 음력으로 1이나 2가 들어가는 날은 동쪽에 있고, 3이나 4가 들어 가는 날은 서쪽에 있다. 그리고 5나 6이 들어가는 날은 남쪽에 있고, 7이나 8이 들어가는 날은 북쪽에 있다. 9와 10이 들어가는 날은 하늘로 올라가 있으므로 귀신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아무 손도 타지 않는다는 9일과 10일이 길일이 되는 것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단오 명절'을 달리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다.
음력 5월 5일, 즉 단오를 나타내는 우리말인 수릿날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쑥으로 수레 모양의 떡을 해서 먹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 날은 전통적으로 수리치로 떡을 해 먹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날은 해가 머리 정수리에 오는 날이라는 뜻을 나타낸 말이다. 단오는 단양(端陽) 또는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하며, 이 말 자체가 정수리 바로 위에 있는 태양을 뜻하는 것임에서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농경생활을 해 오는 동안 열매를 맺게 하는 원동력인 태양을 중히 여기고 기리는 마음에서 여름 햇살이 정수리에 내리 쬐이는 낭릉 명절로 삼게 된 것이다. 수릿날 정오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다든지, 쑥을 머리 위에 꽂던 풍속이 다 이런 까닭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수리치로 떡을 해 먹지만 옛날에는 쑥으로 떡을 해 먹었다. 옛날에는 구설초 또는 술의초라 하여 수리치와 구별하지 않고 같은 이름으로 사용했다. 단오니 단양이니 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붙인 이름이니 지금이라도 수릿날이라는 우리 이름을 되살려서 써 봄직하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숫자, 샛강, 젓가락 등은 모두 사이시옷이 들어간 것이지만, `숟가락`은 `술+가락`이 `숟가락`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숫가락으로 쓰지 않습니다.
<한글맞춤법 제 29항>
: 끝소리가 `ㄹ`인 말과 딴 말이 어울릴 적에 `ㄹ` 소리가 나는 것은 `ㄷ`으로 적는다.
보기>
반짇고리(바느질~) 사흗날(사흘~) 삼짇날(삼질~) 섣달(설~) 숟가락(술~) 이튿날(이틀~)
잗주름(잘~) 푿소(풀~) 섣부르다(설~) 잗다듬다(잘~) 잗다랗다(잘~)
`숟가락`의 어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숟'은 `쇠(鐵)`의 옛말인 '솓'이 '술'로 모음이 바뀐 뒤에 `가락`과 붙으면서 숟이 된 것입니다.'가락'은 `손(手)`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숟가락은 `쇠로 된 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의 숟가락은 청동기시대(서기전 1000년쯤)의 유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당시의 숟가락은 뼈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반면 젓가락은 우리 나라에서는 공주 무녕왕릉에서 출토되었고,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서기전 403년~221년)에 비로소 기록이 나오므로 숟가락에 비해 늦게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수저를 함께 쓰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였으며 중국, 일본에서도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함께 써왔습니다. 그러다가 중국, 일본에서는 점차 숟가락의 쓰임이 줄어들고 젓가락이 중심이 되었지만,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쓰는 관습은 우리 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식생활(국 문화)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숟가락과 달리 젖가락은 `저+ㅅ+가락`의 구조이고 이때 `ㅅ`은 사이시옷입니다. 우리말은 한 글자의 한자말을 피하는 경우가 있어서 `저`에 `가락`을 붙여서 `숟가락`과 같은 짜임새-뒤에 `가락`을 붙여서 늘 함께 쓰이는 식기를 하나로 묶음-로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는 숟가락 문화가 발달해서 숟가락을 중심으로 젓가락이 파생된 것 같습니다.
*출처:<우리말 배움터>
'술래잡기' 놀이에서 숨은 아이를 찾아내는 차례를 당한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 시대에 도둑이나 화재 등을 경계하기 위해 밤에 궁중과 서울 둘레를 순시하던 군인을 순라(巡邏), 또는 순라군이라고 했다. 순라가 변해 술래가 되었으며, 찾으러 다닌다는 행위의 유사성으로 인해 지금과 같은 뜻을 지니게 되었다.
"숨바꼭질"은 표준말이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숨바꿈질"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소꿉놀이"를 "바꿈살이"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숨바꼭질"을 "숨는 놀이하는 바꿈살이"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숨바꼭질"은, "순바꿈질"에서 바뀌어간 말이라 봄이 옳을 것 같다. 즉 순(巡)을 바꾸어 나가는 놀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놀이는 달리 또 "술래잡기"라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술래"라는 숨은 아이를 찾아내는 역을 맡은 아이가 있는 것에서 살펴 "술래"와도 관계가 지어진다.
순(巡)을 바꾸어 나간다는 "순"과 "술래"와도 관계가 있다. 술래는 "순라"(巡邏)에서 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순라"가 글자로는 "순라"지만, 말하고 읽기로는 "술라"로 되는 것이고 그 "순라"가 다시 "술래"로 되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지난날의 순라꾼과 관계되게 되는 숨바꼭질이며 술래잡기이다. "순라잡기"가 "술라잡기→술래잡기"로 되어 간 것이다("질"이라는 뒷가지는 이름씨 아래 붙어서 "노릇"이나 "짓"이라는 뜻을 가지고 쓰이고 "손질"·"발질"·"서방질" 같은 그 "질"이다).
봄·여름에는 오후 여덟 시, 가을·겨울에는 오후 일곱 시에 종로의 보신각(普信閣)에서 종을 치게 되고, 그를 신호 삼아 사대문(四大門)을 닫으면서 통행 금지가 시작되던 조선 왕조 사회였다. 이는 오전 0시 직후에 다시 종을 쳐서 통금을 해제했던 것인데, 밤 종소리가 나면서부터 치안을 맡은 좌우포청(左右捕廳)의 엄중한 경계는 시작되었다.
포교(捕校)와 나졸(邏卒)들이 장안을 샅샅이 순회했는데, 이 순회를 "순라"라 하고 이 순라하는 사람들을 "순라꾼"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술래잡기나 숨바꼭질은, 이러한 순라꾼이 도둑 잡는 일에 빗대어진 것으로서 "순라"가 "술라 →술래"로 된 내력을 알 만해진다.
*출처:<박갑천의 재미있는 어원 이야기>
'스승'의 어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무격'이란 한자어가 있지요. '무'는 '여자 무당'을, '격'은 '남자 무당'을 말합니다. 그런데 옛 문헌을 보면 '무'를 '스승 무' '격'을 '화랑이 격'이라 되어 있습니다. 결국 '스승'이란 '여자 무당'을 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무당'은 고대 사회의 모계 사회에서 대단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인디안 영화나 아프리카 영화를 보면 추장보다도 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추장은 제사장에게 모든 것을 상의하지요. 결국 '스승'은 임금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의 선생님을 한자어로는 '사부'라고 하는데, '사'자도 '스승 사', '부' 자도 '스승 부'입니다. 결코 '선생 사, 선생 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자 무당'이 '임금의 선생님'으로 그 의미가 변화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일반화되어 '스승'이 되었습니다.
덧붙여, 남자 무당인 '화랑이 격'에서는 '화냥년'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출처:<우리말 어원>
요즘은 잘 쓰이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속담이 있다.
(1) 시앗 싸움에 요강 장수: 두 사람의 싸움에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는 말.
(2)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 부처같이 어진 부인도 시앗을 보면 마음이 변하여 시기하고 증오한다는 말.
(3) 시앗이 시앗 꼴을 못 본다. : 시앗이 제 시앗을 더 못 본다는 말.
(4) 시앗 죽은 눈물만큼: 몹시 적다는 말.
이들 속담 속의 핵심 단어는 ‘시앗’이다. `시앗`은 `첩(妾)`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어서, 앞의 속담 속의 ‘시앗’을 ‘첩’이라는 한자어로 대체해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 ‘시앗’이라는 고유어는 한자어 ‘첩’에 밀려서 잘 쓰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 ‘시앗’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말 친족 어휘에 빈번히 결합되어 나타나는 ‘시’의 어원을 풀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시앗`은 16세기의 "순천김씨묘출토간찰"에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는 ‘시앗’이 아니라 ‘싀앗’으로 나온다. `싀앗`의 `싀`는 `싀집>시집`, `싀아비>시아비`, `싀어미>시어미’ 등에 보이는 선행 요소 ‘싀’와 성격이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반면, `앗`의 경우는 별 어려움 없이 그 의미를 추정할 수 있다. `처(妻)`을 뜻하는 `갓`이라는 단어가 `싀`의 `ㅣ`에 영향을 받아 변형된 어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시앗`은 16세기의 `싀앗`으로, 16세기의 `싀앗`은 그 이전의 `*싀갓`으로 소급한다고 볼 수 있다. `*싀갓`에서 `싀앗`으로, 또 `싀앗`에서 `시앗`으로 변하는 과정은 음운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배고개`가 `배오개`가 되듯이 선행하는 `ㅣ` 모음 뒤에서 `ㄱ`이 `ㅇ`으로 교체되거나, `믭다`가 `밉다`로 변하듯이 `ㅢ`가 `ㅣ`로 변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음운 현상이었다. `시앗`이 `*싀갓`으로 소급되고 `갓`이 `처`를 뜻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싀`의 정체만 밝혀지면 `시앗`의 어원은 쉽게 드러난다.
`싀갓`이 `본처(本妻)`와 대립되고 `갓`이 `처`와 일치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싀`는 `본(本)`과 대립함을 알 수 있다. `본`과 대립하는 의미는 `부차적, 간접적, 소원한` 등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싀`는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관계가 소원한` 정도로 해석된다. 이에 따르면 `*싀갓`은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처`가 된다. `본처`와 비교해 보았을 때 `첩`은 `본처`보다는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고 또 부차적인 처이기에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출처:조항범, 충북대학교
'여자가 혼인을 하다'
시집은 시댁(媤宅), 즉 결혼한 남자의 집을 말한다. 결혼을 하면 여자가 남자의 집에 들어가 산다고 하여 여자가 혼인하는 것을 '시집 간다'고 표현하게 되었다.
시집은 여자가 새로운 어른들을 섬기며 사는 새로운 가문을 뜻하는 '새로운 집'을 의미하며, '새집(아래 아)→싀집→시집'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시집을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여인이 늘 마음을 써 섬겨야 한다는 뜻을 살려 '시(媤)'자를 만들어서 시댁(媤宅)이라고 쓰게 되었다. '媤'자는 원래 중국에서부터 있었던 한자가 아니고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 낸 국산 한자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알고도 짐짓 모르는 체하다.'의 뜻이다.
백제시대부터 시작된 매 사냥이 고려조 충렬왕 때인 1275년에는 궁중 안에 응방(鷹坊)이란 기구를 두고, 그 후 응방도감이라는 높은 벼슬아치를 둘 정도로 적극 장려함으로써 매우 성행했다.
당시에 웬만한 벼슬아치나 한량이라면 거개가 매 사냥을 즐겼다. 그러다 사냥을 시키기 위해 길들인 매를 다른 사람들이 탐을 내는 일이 생기게 되었고, 매가 마치 요즈음의 사냥개 이상으로 귀하게 대접을 받았다. 이에 따라 매를 도둑맞거나 서로 뒤바뀌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매의 주인을 밝히기 위한 특별한 표지가 필요했다.
이런 표지로 매의 꼬리 위의 털 속에다 소뿔로 얇게 만든 명패를 매달았는데, 이것을 '시치미'라고 한다. 따라서 시치미를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지금과 같은 뜻이 생겨났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딱 잡아 뗄 거야?"라고 할 때의 '잡아 떼다'라는 말도 원래는 '시치미를 잡아 떼다'는 말에서 '시치미'가 생략된 형태의 말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신을 깁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개 떠돌이 장사치나 기술자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와 직업을 알리기 위해 특이한 발음이나 억양을 사용하여 소리를 외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소리만 듣고는 언뜻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신기료 장수도 신을 기우겠냐는 뜻으로, "신 기리오?"하고 외치고 다니던 데서 온 말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옳으니 그르니 하며 남을 못 견디게 구는 짓'을 가리킨다.
과거 시험을 보고 나서 합격자가 발표되면 예복을 갖춰 입고 증서를 타러 가야 한다. 이 때 부르는 구령인 '신래(新來)위'에서 온 말이다.
흔히 '신래 불리다'라고 하는 이 절차를 밟을 때 선배들이 짓궂은 장난을 했다. 희묵(戱墨)이라고 하여 얼굴에다 먹으로 앙괭이를 그리고 옷가지를 찢으며 '이리워, 저리워'하며 앞뒤로 오랬다 가랬다 하면서 몹시 놀려댔던 것이다. 기강을 세운답시고 신임례를 거창하게 치르던 데서 비롯한 말이다.
#앙괭이 : 정월 초하룻날 밤에 하늘에서 내려와 자는 아이의 신발 중에서 제 발에 맞는 신을 신고 간다는 귀신. 신을 잃어 버리면 그 해의 운수가 불길하다는 속설이 있었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일의 사건의 첫머리, 단서'를 뜻하는 말이다.
실마리는 실의 첫머리를 말한다. 감았거나 엉클어진 실뭉치를 풀 때 실의 첫부분을 찾으면 그 뒤부터 쉽게 풀어 나갈 수 있다는 뜻에서 어떤 일이나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뜻하게 되었다.
'예사롭지 아니하다'. 「심상하지 않다」가 줄어 하나의 형용사로 굳어진 말이다. 따라서「심상하다」는「예사롭다」의 뜻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심상하다」를 활용해 쓴 글은 보기 어렵고 대부분「심상찮다」의 꼴로만 쓰인다. 그렇다면「심상하다」는 왜 「예사롭다」는 뜻이 되었을까.
「심상하다」의 어근인「심상(尋常)」은 원래 길이의 단위였다.「尋(심)」은 8척(尺),「常(상)」은 16척이므로, 지금 단위로 환산하면 242~484cm쯤 되는 셈이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은 쟁패(爭覇)에 혈안이 된 나머지 이 한 평 남짓 되는 땅, 즉「심상의 땅」을 빼앗기 위해 싸웠다 해서 훗날 「미미하고 보잘 것 없음」을 가리킬 때 「심상」이라 했다고 한다.
*출처:<이젠 국어 사전을 버려라> -장진한-편저
'몹시 놀라거나 위태로운 일을 겪었을 때' 쓰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유성기가 들어 왔을 당시의 일이다. 고종 황제가 일본에 와 있던 빅터 회사의 기사인 코란을 초청하여 어전에서 원통식 녹음기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명창이던 박춘재가 뽑혀 나와, 나팔통에 입을 대고 원시적인 녹음을 했다. 나중에 원통식 납관에서 박춘재의 판소리가 다시 흘러 나오자 고종은 깜짝 놀라며 "춘재야, 네 수명이 십 년은 감했겠구나"라고 했다. 박춘재의 정기가 녹음기에 빼앗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로부터 십년감수라는 말이 생겼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십팔번"이라는 말은 그 사람이 가진 레퍼터리 중의 으뜸을 가리키면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사실은 일본말인 "주하치반"(十八番)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면, 도도해진 기분이 깨질 만큼 야릇한 마음이 안들런지?
일본의 에도(江戶) 전기의 "가부키"(歌舞伎) 배우에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郞) 1세라는 사람이 있었다. 무대 위에서 원한 품은 한 자객(刺客)의 칼에 맞아 죽은, 하여간 그 당시의 대표적 배우였다. 이치카와 9세까지 내려오는 동안 그 집안에 전해져 오는 열여덟 가지의 내로라 하는 교겐(狂言 : 서민의 일상 생활에서 제재를 딴 얘기로서의 희극)을 일러 "주하치반"이라 했다(2세에서 대부분 완성). 여기서 일본 사람들이 "가장 장기로 하는 예(藝)"를 이르게 된 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심어져, "가장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나 일"(「국어대사전」)의 뜻으로 되었다.
*출처:<박갑천의 재미있는 어원이야기>
겨울이 되면 썰매를 타고 놀곤 하던 생각이 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지금은 시골의 깊은 산촌에나 가야 어쩌다 발견하는 것이어서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이 "썰매"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꽤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텔레비전에서 국민학교 학생에게 "인두"를 보이며 이것이 무엇에 썼던 것인 것 같으냐고 물으니까, 한참 들여다 보다가 "화살촉"이 아니냐고 되묻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어린이들에게 "썰매"를 보이면, "나무깔판"이 아니냐고 되물을 것 같습니다.
"썰매"는 엉뚱하게도 한자어입니다. 즉 "설마"(雪馬)의 음이 변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위에서 달리는 말"이란 뜻이지요. 어떻습니까? 그럴 듯하게 이름을 붙였지요? 이렇게 우리 선조들은 슬기롭게 이름을 붙였었습니다.
*출처:<우리말 이야기>
'느닷없는 일을 당했을 때' 쓰는 말이다.
옛날 여자들은 남편을 잃은 뒤에도 새로 시집 가는 것을 금지당했다. 남자들은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리는 축첩 제도를 인정하면서도 여자에게만 유독 정절을 강조했던 것이 유교사회의 대표적인 모순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여자들의 개가가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부터였다. 따라서 남편을 잃고 오랜 세월 동안 본능을 참아가며 수절을 하는 여자들은 더러 밤중에 누가 몰래 업어가길 바라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인습 속에서 남자의 성기를 홍두깨에 빗대어 나타낸 말이다. 성기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을 꺼리는 사회적 금기가 홍두깨라는 비유적 표현을 쓰게 하였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박일환-
'질서가 없이 어지러운 곳이나 그러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아사리는 토박이말 '앗다(奪)'의 어근 '앗'에 조사 '을'이 붙고, 그 아래 '이'가 붙어 '앗을이'가 되고, 이 말에서 '아사리'로 바뀐 말이다. 곧 빼앗을 사람이 많으니 빼앗을 사람과 빼앗길 사람이 한 데 어울려 무법천지가 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또 한편 덕망이 높은 스님을 아사리라고 하는데 이 아사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사리가 많으면 다양하고 깊은 의견들이 개진되고, 토론하는 시간도 많이 걸릴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러한 모습을 피상적으로 보면 서로 자신들의 주장만을 앞세우기 때문에 매우 무질서하고 소란스럽게 비칠 수도 있다. 이런 연유로 무질서한 현장을 뜻하는 말로 잘못 사용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박일환-
'싸움 따위로 혼잡하고 어지러운 상태에 빠진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교 용어로 아수라는 화를 잘 내고 성질이 포악해서 좋은 일이 있으면 훼방 놓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아수라는 욕심많고 화 잘 내는 사람이 죽어서 환생한 축생이라고 한다. 따라서 아수라들이 모여서 놀고 있는 모습은 엉망진창이고 시끄럽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아수라는 줄여서 흔히 수라라고 하며 아수라장 역시 수라장이라고도 한다.
이는 원래 '아얌을 떨다'에서 나온 말이다. 아얌은 여자 들이 겨우 나들이 할 때 추위를 막으려고 머리에 쓰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떨면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된다. 그래서 귀여 운 행동이나 말로 시선을 끄는 행위를 말하게 되었다.
경기도(京畿道)의 안성(安城) 고을은, 옛날부터 유기(鍮器)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삿갓이나 종이로 안 알려진 바는 아니로되, 특히 유기로 알려져 왔고, 그것을 맞춤으로 할 때는 참으로 일품이었으므로 거기에서 생겨난 말이 "안성맞춤"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다른 말이 그러하듯, "안성맞춤"이라는 말에다가 안성이라는 고을 이름을 갖다붙인 민간 어원론이라 함이 더 옳을 것이다. 가령, 전라도(全羅道)에 담양(潭陽)이라는 고을이 있고, 그 곳은 예로부터 죽물(竹物)로 유명한 터이지만, 그렇대서 "담양맞춤"이라는 말은 없지 않으냐 해서 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낙 군수"라는 말이 안악(安岳)이라는 황해도(黃海道) 고을 이름에 빗대어지고, "행주치마"라는 말이 행주산성(幸州山城)의 싸움과 관련된 듯이 말하여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땅이름과는 관련이 없는 말이다.
옛날에 안악군으로 새 군수가 부임해 갔는데, 이 친구가 시쳇말로 공처가인가 아내 무섬쟁인가 돼서, 대비(大妃)의 수렴청정마냥 주렴 건너에 앉아 지시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공사를 처결했다. 거기 연유하여 늘 안방에만 박혀 있는 사내나 아내한테 쥐어 사는 형편에 있는 사내를 "아낙 군수"라 한다는 것이다. "아낙"이나 "안악"이나 소리나기는 "아낙" 쪽이어서의 얘기이지, 안악 고을과 관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낙"도 따져본다면 "안"에 "뜰악→뜨락"과 같은 뒷가지 "악"이 붙은 형태라 할 것이다. 그 "아낙"은 부녀자가 거처하는 곳을 이르는데 거기에서 출발한 "아낙네"는 부녀자 일반을 가리키면서 쓰인다.
그렇다 해서 "안악군"과 쉽게 관련지어 버릴 수 없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말버릇을 살펴볼 때 더욱 그러하다. "아낙" 아래 "군수"가 붙었기 때문에 "안악"과 "군수"를 연관지었으나, 반드시 "아낙 군수"뿐 아니라 관직명(官職名) 같은 것을 끝에 붙여서 어떠어떠한 사람임을 나타내었던 우리말은 한둘이 아니다.
이런 말들에서처럼 안성맞춤을 안성땅과 관련시키는 것은 어학적으로는 무근한 것이다.
*출처:<박갑천의 재미있는 어원 이야기>
조선조 세종때 경상북도 청송에 ‘안탁갑’ 이라는 노처녀가 있었습니다. 임금님에게만 시집을 가겠노라 고집을 부리던 '안탁갑' 은 드디어 세종의 빈이 되었는데, 그는 세종의 한글 창제와 김종서 장군의 육진 개척에 크나큰 공을 세웠습니다. 너무도 안탁갑이에게 빠져 있는 임금을 걱정한 신하들은 그를 청파동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행차 소식을 들은 '안탁갑'이는 행차의 길목에서 정성스레 만들어 온 미음을 올렸습니다. 세종은 이 미음을 단숨에 마셨는데 그 때 두 사람의 괴로움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몹시 괴로운 일을 나타낼 때 '세종과 안탁갑이의 사이 같다' 란 표현을 쓰는데, 이 애절한 사연에서 '안타깝다' 란 말이 생겼습니다. 슬픈 사랑이야기지요. 세종 임금과 안탁갑이의 이야기에서 '안타깝다' 의 어원을 찾은 것은 민간 어원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다' 의 어원을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이는 귀양지인 영월까지 단종을 모셨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청령포의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자기의 심회를 읊은 시조입니다. 이 시조에 나오는 '안' 은 '마음' 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안' 이 '마음' 의 뜻으로 쓰이는 말에 '애가 타고 마음이 갑갑하다' 란 '안쓰럽다' 가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사전에는 '안슬프다' 로 실리기도 했는데, 현 「표준어 규정」에서는 '안쓰럽다' 를 표준어로 정하였습니다. 이는 '안슬프다' 의 '안' 을 '아니' 로 생각하여, 뜻도 그 정반대인 '아니 슬프다' 로 여기기 쉽기 때문이었습니다. '안타깝다' 의 '안' 역시 '마음' 이란 뜻으로, 이 말은 '안'에 '답답하다' 의 옛말인 '답깝다' 가 붙은 '안답깝다' 가 변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서로 놀리는 말이다.
'알나리'는 나이가 어리고 키가 작은 사람이 벼슬을 했을 때 농담삼아 '아이 나리'라는 뜻으로 이르던 말이며, '깔나리'는 알나리와 더불어 운율을 맞추기 위해 별다른 뜻없이 덧붙인 말이다.
'얼레리꼴레리'나 '얼레꼴레리' 같은 말은 다 '알나리깔나리'가 변해서 된 말들이다.
'낟알 가루나 밤으로 묽게 쑨 죽'을 가리키는 말이다.
암죽은 '밤죽'이 변한 말이다. 밤죽의 '밤'이 '밤→밤(순경음 ㅂ)→왐→암'의 변화 과정을 거쳐 지금의 암죽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밤으로 쑨 죽을 암죽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쌀이나 다른 낟알을 가지고 쑤는 것까지 두루 일컫는 말이 되었다.
산모가 젖이 부족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기에게 젖을 먹일 형편이 되지 않을 때 주로 암죽을 먹여 키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박일환-
한강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는 압구정동(狎鷗亭洞)은 바로 그 강변에 있었던 세조(世祖) 때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장자 이름이 그대로 동명이 된 것이다.
두 임금을 받들어 세움으로써 네 개의 공신(功臣)을 겸하고, 두 임금의 장인이었으며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을 수삼년 동안 거치므로서 도합 73년간이나 벼슬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한명회(韓明澮)는 벼슬밭에 뜻이 없었다는 세평을 듣고 싶어 짐 짓 이곳에 정자를 짓고 갈매기와 친하다(狎)는 뜻으로 압구정이라 이름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심(民心)은 그의 위선에 우둔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 정자의 벽에 낙서(落書)가 끊이질 않았다. [정자는 있으나 그곳에 돌아가 쉬는 자 없으니 누구라 갓 쓴 원승이라 일러 예이지 않으리요] 하는 낙서며, 정자 현판 아래 친할 [압(狎)]자를 억누를 [압(押)]자로 바꿔 압구정(押鷗亭)이라 쓴 낙서며.... 우리 나라 낙서는 이같이 비판적인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출처: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애매하다'는 벌은 받았으나 실은 죄없음을 뜻하는 말로, '애꿎다', '억울하다'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런데 일본말에 한자어로 '애매'가 있는데, 이 말은 우리가 쓰는 한자어인 '모호'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식 한자투에 익숙한 일부 지식층이 두 말을 잘못 결합하여 쓰던 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불분명하다'는 뜻을 나타내고자 할 때 '애매하다' 또는 '애매모호'라는 말은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그냥 '모호하다'라고 해야 용법에 맞는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여러 사람이 한 데 모여서 서로 다투고 떠들고 하는 시끄러운 판'을 뜻하는 말이다.
'법석(法席)'은 원래 불교 용어로 '법회석중(法會席中)'이 줄어서 된 말이다. 대사의 설법을 듣는 법회에 회중(會衆)이 둘러 앉아서 불경을 읽는 법연을 일컫는 말로서 매우 엄숙한 자리를 뜻하던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엄숙한 자리에서 무슨 괴이한 일의 단서(端緖)가 야기(惹起)되어 매우 소란한 형국이 되었다는 의미로 '야단 법석'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화가 나다'의 뜻이다.
원래 고추, 담배 등의 자극성 약초가 잘 성숙하여 독특한 자극성 성분이 생기는 것을 '약이 오르다'고 하던 것이 점차 그 뜻이 확대되어 사람의 성질을 나타내게끔 되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독한 기운이 뻗친다는 면에서는 서로 통하는 표현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박일환-
여러분이 신고 다니는 `양말`이 한자에서 온 말이라고 하면 깜짝 놀라시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자어입니다. 원래 버선을 한자로 `말`이라고 했습니다. `버선 말`자이지요. 그런데 서양에서 이 버선과 비슷한 것이 들어오니까 버선을 뜻하는 `말`에 `양` 자를 붙여서 `양말`이라고 했습니다. 버선하고 양말이 이렇게 해서 달라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서양에서 들어 왔다고 해서 `양` 자를 붙이거나 `서양`을 붙여 만든 단어들이 꽤나 있습니다. 그 예가 무척 많음에 놀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뜻도 잘 모르게 변한 것들도 많습니다. 몇 가지를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양철`(또는 `생철`)
양철도 `철`에 `양` 자가 붙어서 된 말입니다. 쇠는 쇠인데, 원래 우리가 쓰던 쇠와는 다른 것이 들어 오니까 `철`에 `양`자만 붙인 것이지요.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철`에 `서양`이 붙어서 `서양철`이 되고, 이것이 다시 변화되어서 오늘날에는 그냥 `생철`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2. 양동이
국어에 `동이`라고 하는 것은 물긷는 데 쓰이는 질그릇의 하나인데, 서양에서 비슷한 것이 들어 오니까 여기에 `양`자를 붙여 `양동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입니다.
3. 양순대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인데, 서양에서 `소시지`가 들어 오니까 `순대`에다가 `양`자를 붙여 `양순대`라고 했는데, 이것을 쓰지 않고 `소시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되살려 쓰고 싶은 단어입니다. 중국의 우리 동포는 이 `소시지`를 `고기순대`라고 하더군요. 너무 잘 지은 이름이 아닌가요?
4. 양은
양은은 `구리, 아연, 니켈을 합금하여 만든 쇠`인데, 그 색깔이 `은`과 유사하니까 `은`에 `양`자를 붙여 `양은`이라고 한 것입니다.
5. 양재기
`양재기`는 원래 `서양 도자기`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에 `양`자가 붙어서 `양자기`가 된 것인데, 여기에 `아비`를 `애비`라고 하듯 `이` 모음 역행동화가 이루어져 `양재기`가 된 것입니다.
6. 양회
이 말도 앞의 `양순대`와 같이 거의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세멘트`를 `양회`라고 했습니다. `회`는 회인데 서양에서 들여 온 회라는 뜻이지요. 이 말도 다시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7. 양행
이 말도 오늘날에는 쓰이지 않는 말이지요. 서양에 다닌다는 뜻으로 `다닐 행`자를 붙인 것인데, 이것이 무역회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한양행`이라는 회사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지요.
이 이외에 `양`자가 붙어서 만든 단어들을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양복, 양장, 양궁, 양단, 양담배, 양란, 양배추, 양버들, 양식, 양옥, 양장, 양잿물, 양주, 양초, 양코, 양파, 양화점 등.
*출처:<우리말 어원>
'빨래에 쓰는 수산화나트륨'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잿물이란 서양에서 넘어 온 잿물이란 말이다. 잿물은 콩깍지, 짚 등을 완전히 태운 뒤 그 재를 시루에 안치고 물을 부어 우려 낸 물로 '재의 물'이 줄어서 잿물이 된 것이다. 이 물이 기름기와 때를 잘 빨아 내서, 이불잇, 욧잇 따위 무명 빨래에 쓰였다. 양잿물은 수산화나트륨으로 하얀 고체로 되어 있다.
여러분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양치질`을 하시지요? 이`양치질`의 어원을 아시나요? 언뜻 보아서 한자어인 줄은 짐작하시겠지요? 그러나 혹시 `양치질`의 `양치`를 `양치`(養齒)나 `양치`(良齒)로 알고 계시지는 않은지요?(간혹 `양치질`의 `치`를 `齒`로 써 놓은 사전도 보입니다만, 이 사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양치질`의 `양치`는 엉뚱하게도 `양지질` 즉 `양지`(버드나무 가지)에 접미사인 `질`이 붙어서 이루어진 단어라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렇습니다. 고려 시대의 문헌(예컨대 {계림유사})에도 `양지`(楊枝)로 나타나고 그 이후의 한글 문헌에서도 `양지질`로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양지` 즉 `버드나무 가지`로 `이`를 청소하는 것이 옛날에 `이`를 청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 `이쑤시개`를 쓰듯이, 소독이 된다고 하는 버드나무 가지를 잘게 잘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청소하는 것을 `양지질`이라고 했던 것인데, 이에 대한 어원의식이 점차로 희박해져 가면서 이것을 `이`의 한자인 `치`에 연결시켜 서 `양치`로 해석하여 `양치질`로 변한 것입니다. 19세기에 와서 이러 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 `양지`는 일본으로 넘어가서 일본음인 `요지`로 변했습니다. `이 쑤시개`를 일본어로 `요지`라고 하지 않던가요? 아직도 우리 나라 사람들 중 `이쑤시개`를 `요지`라고 하는 분들이 있지 않던가요? `양지질`이 비록 `이쑤시개`와 같은 의미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양 지질`과 `이쑤시개`는 원래 다른 뜻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두 단어 모두가 오늘날의 뜻과 동일한 것이지요. `양지질`에 쓰는 치약으로 는 보통 `소금`이나 `초`를 사용하여 왔습니다. 이렇게 `양지질`이 `양치질`로 변화하는 현상을 언어학에서는 보통 `민간어원설`이라고 합니다. 즉 민간에서 어원을 마음대로 해석해서 원래의 단어를 해석하거나, 그 해석된 대로 그 단어를 고쳐 나가곤 합니다. 이렇게 민간에서 잘못 해석한 단어는 무척 많습니다. 여러 분들이 잘 아시는 `행주치마`가 그렇지요. 원래 `행주`는 `삼` 등으로 된 것으로서 물기를 잘 빨아 들이는 천을 일컫는 단어인데, 이것을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대첩과 연관시켜서,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 을 날랐기 때문에 그 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한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은 민간에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부엌에서 그릇 을 닦는 데 사용하는 걸레인 `행주`는 어떻게 해석할까요? 걸레의 하나인 `행주`와 `행주치마`의 `행주`는 같은 단어입니다.
*출처:<우리말 어원>
'어떤 일을 할 때 끼어 들어서 참견을 하거나 훼방을 놓다'는 뜻이다.
부엌이나 광의 문처럼 비교적 곱상하게 다루기 힘든 곳은 판자를 연결해서 널쪽문을 해 단다. 그 중에서도 튼튼하게 문짝에 가로 홈을 파고 띠를 끼워서 띠와 널을 못 박아 붙이는데 자칫 일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각선으로 붙이는 띠목을 어깃장이라고 한다.
어깃장을 대각선으로 붙이는 모양에 빗대어 어떤 일을 어긋나게 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어른`, `어린이`라고 해서 `어른`을 `성인`으로 이해하고 있지요? 그런데, 본디 `어른`은 `얼운`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얼우다`의 어간 `얼우-`에 명사형 접미사가 붙은 말로 `얼우다`는 `성교하다`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따라서 `얼운`은 `혼인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현대국어의 `어른`은 `혼인한 사람`만을 뜻하는 것입니다.
*출처:<우리말 어원>
'간한 굴에 고춧가루를 섞어 얼간으로 삭힌 굴젓'을 가리킨다.
충남 서산군 부석면 간월도에서 채취되는 굴은 지형적으로 간만의 차가 심해서 늘 바닷속에만 잠겨 있지 않고 하루 4~7시간은 개펄 속에 묻혀 햇볕을 받고 자란다. 이 때문에 양식한 굴은 1년이면 엄지손가락만하게 크지만 간월도 굴은 3년 정도 큰 뒤 캘 때에도 2~3cm밖에 안 되고 거무스름한 빛깔을 띤다.
굴은 햇볕을 쬐면 생장이 중단되기 때문이며, 이런 굴을 두고 보통 '강굴'이라고 한다. 이러한 간월도 강굴은 적당한 기온과 염도가 유지되는 환경에서 자란 다른 지방의 굴보다 훨씬 고소하며, 물날개(굴에 나 있는 명털)가 잔잔하고 그 수가 많아 고춧가루 등 양념 배합률을 높여주기 때문에 독특한 맛을 낸다.
어리굴젓은 이렇게 자란 굴을 이물질이나 땟국물을 빼내기 위해 깨끗한 바닷물로 씻은 뒤 7% 정도의 소금으로 희석시켜 섭씨 15~20도 정도의 발효실에 보름간 넣어둔다.
고춧가루로 주로 양념을 해서 '얼얼하다', '얼큰하다'는 맛의 표현이 어형 변화를 가져와 '어리굴젓'이 되었으며, 조선조 때 무학대사가 이태조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600년 이상 된 식품으로 추정된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어린이'라는 말은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처음 만든 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이미 옛 문헌에 '어린이와 늙은이'라고 많이 등장합니다. 단지 '어린이'라는 잡지를 처음 만들어 널리 알렸을 뿐이지요. '어린이'는 '어린 사람' 즉,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었습니다. 훈민정음에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 - -'라고 쓰이고 있지요.
*출처:홍윤표
오늘날 '얼'을 '넋'이나 '정신의 줏대'라는 뜻의 명사로 쓰고 있으나, 중세국어에서는 '얼'이 단독으로 쓰인 적이 없다. '얼'은 의미상으로 중세국어의 '어리석다(愚)'라는 뜻의 '어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현대국어의 '다부지지 못하고 어리숙해 보이다'라는 뜻의 '얼뜨다'나 '사람됨이 좀 모자라다'라는 뜻의 북한어 '얼되다'도 현대국어의 '얼'이 중세국어의 '어리-'와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이 밖에도 '얼겁', '얼김에', '얼결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렇게 중세국어에서 '愚, 迷, 痴'의 의미를 가지던 '어리(>얼)'가 현대국어에서 '넋'이나 '정신의 줏대'란 의미로 바뀌게 된 것은 아마도 '얼빠지다'를 '넋빠지다'에 유추하여 잘못 해석한 데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해석은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38)에 처음 보인다. 요컨대 '얼'은 단독으로 쓰이지 못하고 '얼빠지다'와 같은 한정된 문맥에 쓰이면서 '얼'의 의미를 '넋'으로 잘못 추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본다.
'됨됨이가 똑똑지 못하고 모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금에 조금 절이는 것을 '얼간'이라고 한다. 제대로 절이지 못하고 대충 간을 맞춘 것처럼 다소 모자란 듯하다는 뜻으로 만든 말이다.
'이 말 저 말을 뒤섞어서 어름어름 분명하지 않게 하다'는 뜻이다.
'얼'은 명사나 동사 앞에 붙어서 '덜 된', '여러 가지가 뒤섞여'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원래 '얼버무리다'고 하면 여러 가지를 대충 섞어 버무린다는 뜻이었다가, 사람이 말을 흐리멍덩하게 한다는 뜻으로 쓰게 되었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상점 앞에서 지나가는 손님을 끌어 들여 물건을 사게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조선 시대에 육주비전의 상인들은 아들에게 문서를 다룰 줄 아는 정도의 글자와 상인들끼리만 통용되는 변말을 배우게 한 다음 15세 무렵에 다른 가게의 심부름꾼으로 내보냈다. 일종의 상인 수업을 받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스무 살 남짓되어 장사에 대한 요령을 터득하고 훌륭한 상인이 될 재질이 보이면 따로 가게를 내어 독립시켰다. 그러나 나이가 들도록 독립을 하지 못하면 '열립(列立)'으로 나서야 했다.
열립은 상가 앞에 늘어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가게로 불러 들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여리꾼은 열립이 '여리'로 변하고 거기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꾼'이 덧붙은 것이다. 그리고 여리꾼이 가게 안으로 손님을 끌어 들이는 것을 '여립켜다'라고 한다.
요즘 샌드위치 맨이라고 하여 상가나 술집 앞에서 요란한 복장을 하고 앞뒤로 점포 이름을 알리는 글을 써 붙이고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들이는 사람을 볼 수가 있다. 이들이 바로 현대판 여리꾼인 것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여보'의 어원은 '여기(此處)'의 '여'에 '보다(視)'의 어간 '보-'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보세요'는 이 '여보'에 '-세요(해요체)'가 덧붙여진 말입니다.
'일이 뜻대로 안 풀려 혼자 투덜대거나 남을 심하게 나무랄 때 쓰는 욕'이다.
염병은 장티푸스와 같이 높은 열이 나는 전염병을 가리키는 말이다. 염병, 즉 장티푸스에나 걸리라는 뜻을 담은 욕설로 쓰인다. 지금은 장티푸스 같은 병이 큰 위협이 되지 못하지만 옛날에는 고치기 힘든 전염병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염병에 걸리면 서로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 전염을 막는 유일한 길이었다. 상대가 염병에 걸려서 가까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상대방에게 모욕적으로 이르는 상스러운 말'이다.
엿은 남사당패의 은어로, 여성의 성기(性器)를 가리킨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쓰는 욕설 중에 성기와 관련된 말이 많듯이, 이 말도 남사당패의 은어를 빌려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늙은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옛날에는 정3품과 종2품의 벼슬아치를 영감이라고 일컬었으며, 그 이상의 벼슬아치를 대감이라고 했다.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 및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나랏님이 은전으로 베풀어 준 벼슬인 수직이라는 것이 있다. 실제 맡은 일이 있던 직책은 아니고, 그냥 노인을 우대해서 이름만 내려 준 ㅂ ㅕ슬에 불과했다.
수직이라는 벼슬을 받은 노인들도 영감이라고 부르다가 차차 나이 든 어른을 높여서 모두 영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도 군수 영감, 판사 영감 하듯이 관료사회에서는 자신들끼리 서로 높여 부르는 말로 쓰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쉽게 책과 접할 수 있어서 많은 동화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연세가 좀 드신 분들은 어린 시절에 그런 동화책 대신 우리의 전래 동화나 신화 전설 민담을 할아버지 할머니께 듣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나 할어버지의 옛날 이야기는 으례 이렇게 시작되곤 하였지요.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 '옛날 옛적 고리짝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도 아마 `옛날 옛적 고리짝에`의 `고리짝`의 뜻을 알고 말씀하신 분은 거의 없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냥 입에서 귀로 전래되어 와서 그냥 말씀하신 것일 뿐이지요.
`고리짝`이 `고려 적`(고려 때)이 오랜 동안 구전되어 오면서 그 뜻을 잃어버린 단어임을 아셨더라면, `옛날 옛적 고려 적에`로 말씀하셨겠지요. 옛날 이야기는 먼저, 지난 시기에 일어난 이야기임을 듣는 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조선 시대에는 그 이전의 시대, 즉 `고려 시대`를 언급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남아 있는 많은 고소설의 대부분이 `조선 숙종대왕 즉위 초에` 등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옛날 옛적 고려 적에`로 시작된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옛날 옛적 고리짝에`로 변화된 것이지요.
*출처:<우리말 어원>
미워하는 대상이나 못마땅한 일에 대해 불평하여 내뱉는 욕. '넨장칠(난장을 칠)'과 '육시랄' 등과 함께 형벌에서 온 우리 고유의 욕 중 하나다. '오라'는 옛날 죄인들을 묶던 붉은 줄을 말하고, '질'은 '지다(負)'의 관형형이므로 '오라질'은 '오라로 묶일','오라에 묶여 잡혀갈'이란 뜻이다. '우라질'로 쓰기도 한다. *출처:<이젠 국어사전을 버려라> -장진한-
원래는 두만강 이북에 살던 여진족 가운데 한 부족인 '올량합(兀良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이 점차 어의가 확대되어 여진족 전체를 얕잡아 부르는 말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야만스런 종족' 또는 '침략자'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말로 정착되었다. '되놈'은 이들에게 하는 욕설이다. '오랑캐'란 말은 올량합의 시조가 개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다음과 같은 설화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재상이 얇은 껍질로 된 북을 만들고 그 북을 찢지 않고 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 딸을 주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성공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북소리가 나서 가 보았더니 개가 꼬리로 북을 치고 있었다. 재상은 하는 수 없이 약속대로 딸을 개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 개는 밤마다 딸을 할퀴고 물어 뜯었다. 참지 못한 딸은 개의 네 발과 입에 주머니를 씌우고 살다 후손을 퍼뜨린 것이 올량합이고, '오랑캐'란 다섯 개의 주머니란 뜻의 '오낭(五囊)을 낀 개'가 변해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다음 오잿물을 입히어 다시 구운 질그릇'이다.
오지그릇은 원래 '오+질그릇'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오질그릇'에서 'ㄹ'이 탈락된 말이다. 여기서 '오'는 '까마귀(烏)'를 나타낸다. 즉 진흙으로 빚어서 구어낸 질그릇의 빛깔이 마치 까마귀처럼 검붉은 윤이 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자로 '오자기'라고도 한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이래저래 드는 비용, 사소한 것까지 캐거나 따지고 드는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옴니는 어금니가 변해서 된 말이고, 암니는 앞니가 변해서 된 말이다. 그리고 옴니의 '옴'은 어미를 뜻하는 '엄'이 변한 말이다. 이(齒)는 다 같은 이인데 구태여 어금니니 앞니니 하며 따질 필요가 있느냐는 뜻으로 만든 말이다.
처음에는 미주알고주알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것저것 캐고 드는 모양을 일컫던 것이 지금은 어떤 일을 할 때 이래저래 드는 비용까지도 뜻하게 되었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하나밖에 없는 딸을 귀엽게 이르는 말'이다.
윷놀이에서 한 동만으로 가는 말을 외동무니라고 하며, 줄여서 그냥 외동이라고도 한다. 외동무니처럼 하나만 있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며, 같은 이치로 외동아들이라는 표현도 쓴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외상을 하다'의 뜻이다.
외상을 할 때 흔히 '긋는다'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은 1900년대 초 서울의 선술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는 길가에 술잔을 올려 놓는 긴 나무, 즉 목로를 걸쳐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잔술을 파는 선술집이 유행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술집에 자주 드나드는 단골손님들은 흔히 외상 술을 마시곤 했는데 이러한 풍습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선술집의 주모는 대개 일자무식인지라 외상 장부를 따로 만들어서 기록하지 않고 벽에다가 마신 술 잔수만큼 작대기를그어서 표시를 했다. 코가 큰 사람은 코를 그려놓고, 얼굴에 사미귀가 있는 사람은 점을 찍어 놓은 다음에 그 밑에 줄을 그어서 외상 장부를 대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반찬 가게나 푸줏간에서 외상 거래를 할 때 물건 값을 표시하는 길고 짧은 금을 새긴 막대기가 있었는데 이것을 엄대라고 한다. 엄대에다 들여놓은 물건의 분량만큼 금을 그어놓고 나서 나중에 몰아서 계산을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외상으로 술을 마시거나 물건을 사는 것을 긋는다라고 하게 되었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지금은 `우두머리`라는 단어가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마치 `두목`이란 한자어처럼 `도둑의 괴수`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지요. 그러나 옛날에는 `우두머리`란 단어는 비칭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칭은 아니었습니다. `우두머리`는 한자어인 `위두`(爲頭)에 고유어인 `머리`가 합쳐진 합성명사입니다. `위두`는 보통 `위두하다`라는 형용사로 쓰이어서 가장 위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두머리`의 `위`가 단모음화되어 `우`가 됨으로써, 오늘날 `우두머리`가 된 것입니다.
*출처:우리말 어원
‘육개장’이라는 단어는 일단 ‘육’과 ‘개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육’은 한자 ‘肉’이다. ‘개장’은 다시 ‘개[狗]’와 ‘장(醬)’으로 나뉘는데 ‘개고기를 끓인 국’을 뜻한다. 그렇다면, ‘육개장’이라는 단어의 표면적 의미는 아주 이상해진다. 그리고 개고기를 끓인 ‘개장’에 ‘육’을 붙였으니 굳이 ‘육’을 왜 붙였으며, 그 ‘육’이 무슨 고기인지 궁금하다. 이러한 궁금증은 ‘육개장’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풀릴 것이다.
‘육개장’의 ‘개장’을 ‘개장국’이라고도 한다. ‘개장’에 ‘국’이 덧붙은 것이다. ‘개장국’은 ‘개장’이 ‘탕’임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새롭게 만든 단어로 간주된다. ‘개장’ 또는 ‘개장국’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먹던 음식이다. 특히 삼복 때에는 몸을 보신하기 위하여 이 ‘개장’을 특별히 즐겼다고 하는데 그 습속은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다. 어느 짐승의 고기보다도 개고기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에 그 개고기를 이용한 탕을 많이 먹었을 것이며, 그러다 보니 ‘개장’의 ‘개’보다는 ‘장’ 즉 ‘탕’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개장’이 ‘탕’의 대명사처럼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결과 ‘개장’에 ‘탕’이라는 일반적 의미가 덤으로 부여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요즘에 그저 ‘보신탕’을 ‘탕’이라고 불러도 의미가 통하듯이, 예전에는 ‘탕’하면 ‘개장’을 뜻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장’이 ‘탕’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띠게 되자, ‘개고기를 끓인 탕’을 뜻하기 위해 ‘보신탕’이나 ‘사철탕’ 등과 같은 또 다른 명칭이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다른 ‘육탕’의 명칭이 ‘개장’이라는 단어를 근거로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육개장’, ‘닭개장’이 바로 새롭게 만들어진 명칭이다. ‘육개장’이 ‘개고기’가 아닌 ‘소고기’를 이용하여 끓인 ‘육탕’임을 보이기 위해 새롭게 나타난 단어라면, ‘닭개장’은 ‘개고기’가 아닌 ‘닭고기’를 이용하여 끓인 ‘육탕’임을 보이기 위해 새롭게 나타난 단어이다. 원칙적으로 ‘육개장’은 ‘소탕(-湯)’이나 ‘우탕(牛湯)’, ‘닭개장’은 ‘닭탕(-湯)’이나 ‘계탕(鷄湯)’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하나, 그렇다고 ‘개장’을 이용하여 새롭게 만든 ‘육개장’이나 ‘닭개장’이라는 단어를 버릴 수는 없다.
다만, ‘육개장’을 ‘육게장’이나 ‘육계장’으로, ‘닭개장’을 ‘닭계장’으로 잘못 쓰는 실수는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개장’, ‘육개장’, ‘닭개장’을 정확히 구별하여 써야 한다. ‘개장’은 ‘개고기를 끓인 탕’, ‘육개장’은 ‘소고기를 끓인 탕’, ‘닭개장’은 ‘닭고기를 끓인 탕’이다.
‘개고기를 끓인 탕’에 대해 ‘개장’이라는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면, 후에 나타난 ‘보신탕’, ‘사철탕’ 등과 같은 사이비 명칭들은 자연히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출처:조항범, 충북대학교
일이 뜻대로 안 풀려 혼자 투덜대거나 남을 심하게 나무랄 때 쓰는 욕이다.
'육시를 할'이 줄어서 된 말로, 육시라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말이다. '육시'는 옛날의 형벌 방법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에 다시 참형(斬刑)을 가하는 육시(戮屍)와 사지를 말에 묶어 각기 달리게 하여 머리, 몸통, 사지의 여섯 토막이 되게 하는 육시(六屍, 六弑)가 있었다. 본래의 뜻을 살펴볼 때 매우 끔직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욕설임을 알 수 있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을사보호조약(1905)으로부터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하고 흐린 것을 '을사년스럽다'고 하던 것이 변하여 '을씨년스럽다'가 된 것입니다.
'쥐노래미과에 딸린 바닷물고기' 이름이다.
이면수는 찬물에 사는 어종으로 우리나라 동해와 일본 북동부에 분포한다. 관북지방(마천령북쪽, 즉 함경 북도 지방)에 사는 임연수(林延壽)라는 사람이 이 물고기를 잘 낚았다는 데서 지금과 같은 이름이 비롯했다. 옛날 강원도 동해안에 사는 부자가 비싼 이면수로 쌈만 먹다가 망했다고 하여 '이면수 쌈 먹다가 찬석꾼이 망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맛이 좋고 비쌌다고 한다
*출처:우리말 유래 사전
원래 이바지는 잔치한다는 뜻입니다. 결혼이라는 커다란 잔치를 치런 사람이 가져온 떡을 이바지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라에 공헌한 사람이 많으면 나라에서 잔치를 벌여야겠죠? 그래서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는 걸 이바지한다고 하는 것이랍니다.
*출처:<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대요>
'이판사판'은 한자어 입니다.
유래를 살펴보면 불가에서 쓰는 '이판중'과 '사판중'을 한꺼번에 이르는 말로서, 본래 '이판중'은 불경 연구와 참선에만 열중하는 중을 가리키는 말이고, '사판중'은 절의 운영 및 경리나 행정을 맡아보는 중을 가리키는 말인데, 뒤에 이 경계가 없어지게 됨으로써 뜻이 변하여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