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시조 광봉조 18대종손으로 유일한의원 이규옥 원장님의 직계 선조이신 景자 華자 묘갈명이다. 광산김씨 하완 김충호 선생이 지으신 것인데
조선말 부패한 사회임에도 지방관으로서 주민을 정성껏 보살펴 지방관서를 떠날 때에는 주민들이 그 은혜를 기리고자 거사비 같은 송덕비를 세워줬다. 내가 국역을 하면서 선조의 훌륭한 치적을 현재의 정치사에 비추어 귀감이 될 것 같아 이글을 게재한다./이권행
통정대부 백인당 이공 묘갈명
관동지역의 산수는 우리나라 동방에서 가장 빼어났다. 양양은 그 가운데 한 곳으로 신령스런 정기와 맑은 기운이 깃든 고장이다.
옛날에 이 고장에서 세상에 이름을 낸 인물이 많은데 백인당 이공(李公) 역시 그중의 한사람이시다.
공(公)께서는 효종 1656년 병신(丙申) 10월 2일에 임천리에서 탄생하셨는데 풍채가 뛰어나고 재주가 있으시며 인륜의 도리를 능가하는 성품을 지니셨고 시와 문장에도 재능이 있으셨다. 숙종13년 1687년 정묘년(丁卯年) 32세에 문과급제(文科及第) 하시니(科榜: 式年試 丙科) 성균관 전적 세자시강원 필선 외에 결성, 횡성, 울진, 수안, 상원지방의 수령을 역임하시며 어린아이가 큰 질병이 있는 것 같이 주민을 보살펴 임기가 끝나 돌아간 후에는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고 그를 위해 지난날을 생각하며 비를 세워줬다. 황주 진관 병마절제사를 지내시고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 五衛將)을 마지막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영조 임자년 1732년 11월 17일 여생을 마치시니 향년 77세다.
묘지는 양양 강현면 용호리 뒷골 자좌(子座)에 부인 강릉최씨와 합봉 되었다. 공의 名은 경화(景華)이시며 판관공 희림의 12세손으로 덕행이 뛰어나고 허실보다 진실 됨을 사랑하셨고 백번을 참고 경계(警戒)한다는 뜻으로 字는 자실(子實)이요 호(號)는 백인당(百忍堂)이시다.
성은 이씨로서 본적은 함풍으로 고려충렬왕조에 정당문학 벼슬을 하신 함풍부원군 휘(諱) 광봉(光逢) 祖께서 시조가 되신다. 이 분의 아들 연은 예빈시사요 그 손자 안저는 밀직부사요 안상은 첨의찬성사다. 이 3세3위를 전남 함평 만흥리 영풍사에 같이 배향 드리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자자손손 고위관리가 끊임없이 나오셨으니 조선조 휘 춘령은 호가 초재이신데 문과에 등용 되어(중종29년 1534년 갑오년 式年試 乙科) 관직이 필선당(弼善當)으로 을사사화 때 의젓하면서도 격렬한 논리로 상소하여 항거한 일로 당시의 요직에 있는 이들에게 거슬림을 당해 양양부사로 전보되시었다. 이분께서는 산수(山水)를 좋아하시어 양양은 자손이 대대로 삶의 터전이 되었다. 초재 휘 춘령 어른은 양양문중의 입향조(入鄕祖: 처음으로 문중지역에 들어오신 분)가 되시는데 이분이 백인당에게는 5대조가 되신다.
고조 응망(應望)께서는 음첨중추부사(蔭僉中樞府事)로 묘지는 양양 서면 상평리 호부 유좌(酉座) 인봉 안산에 있으며 사람들에게 금계 포란형의 양양제일 명당자리라 일컬어진다. 증조 계선(繼先)께서는 증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요 조부 천규(天圭)께서는 수자호군 동중추(壽資護軍 同中樞)로 묘지는 장승리 무좌(戊座)다.
백인당의 부인이신 숙부인(淑夫人)은 강릉최씨로 최씨의 아버지는 주명(柱溟)이시다. 백인당과 강릉최씨 사이에 3남 3녀가 탄생하셨으니 장자는 휘진(彙晉:숙종34년 무자1708년 식년시 을과)으로 이조참의요. 차자 휘점(彙漸)은 통덕랑이요. 3자 휘상(彙祥)은 제주목사를 역임하시었다. 장녀는 평양조씨 진사 조선(趙璿)氏와 혼인하였고, 둘째여식은 동래정씨 정만헌(鄭萬櫶)氏와 혼인하였으며, 셋째여식은 평산신씨 신희(山申嬉)氏와 혼인하였다.
장손은 생원으로 형익(衡翼)이신데 생부는 휘점(彙漸)이시다. 이분은 덕행이 있고 절개 있는 뜻을 가져 수차례나 조정에 천거되시었다.
손자 형필은 차자 휘점의 둘째아들로 병조좌랑이요 손자 형철은 형필의 3남으로 진사이시다. 4남은 형중 이다. 이후 증손 현손 이하 자손이 번창 하였는데 그 기록을 다 하지 못했다.
안타깝다! 초재공 춘령은 을사사화의 명현(名賢)으로서 식음을 전폐한 보은으로 자손에게 발현되어 크고 작은 과거에 나가 등과하고 누대를 재상이 될 만한 지위로 올라 관동지방에 선망의 집안인 녹문명가(鹿門名家)로 칭하고 있었다. 백인당 휘 경화(景華)께서는 그 가운데 제일먼저 현달한 분이시다.
공께서는 벼슬을 그만둔 후에 귀향하여 서숙(서당) 백인당을 건립하고 후생을 가르치는데 즐거움을 삼았다.
일찍이 명암 이해조와 남악 조종저 와는 절친한 친우로서 율시에서는 공이 가장 뛰어났으며 시문을 주고받은 수창집(酬唱集)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상서 조관빈이 만장에 쓰기를 ‘덧없는 몸들이 지금 세상에 무수히 많으나 공의 가문의 부자가 지켜온 절개는 오늘날에도 쓰러지지 않는구나’ 하였다. 공의 사람됨이 옳게도 그것을 알만하도다.
애석하도다! 그 유익한 말과 아름다운 자취가 세상에 다 전해 내려오지 않는구나.
공이 돌아가신지 지금부터 280년 묘는 오히려 비석 하나 없음이 애석하여 그 모든 자손이 묘 토성의 잔디를 깨끗이 하고 장차 비석을 세우고자 규남씨 규옥씨 규룡씨와 그 방손인 가범씨가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기에 나는 재주도 없고 명확하게 발현될 문사(文辭)에도 능하지 못하여 받아드릴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내 묘갈명을 쓰게 되었는데 그 묘갈명에 먼저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가 휘 초재공임을 말하고 백인당께서는 사욕을 누르고 대대로 이어온 호반(무관)의 가문을 빛냈다고 썼다. 백인당께서는 관동지방의 군수로서 은혜를 베풀어 주민이 송덕비를 세워주고 아름다운 은덕으로 어진선비를 사귀고 눈물로 관복을 벗어던지고 사숙을 건립하여 충성스럽고 근실하게 교육한 덕으로 내실(內實) 있게 사업으로 자라게 되어 이 또한 성공하였으니 아! 저 뛰어난 군자가 하늘에 이르는 경지를 내가 요점을 추리고 한데로 모아 그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밝혀보이고자 이 묘갈명을 위와 같이 썼다.
대한광복 65년 경인 늦봄 하완 광산인 김충호 짓다.
2012년 월 일
함풍이씨 대종회 수석부회장 방손 이 권행 謹譯
原文
通政大夫百忍堂李公墓碣銘
關東之山水最秀於我東而襄陽居其中其英靈之精淸淑之氣昔已鐘生人物而名於世者多矣百忍堂李公亦其一也公以孝廟丙申十月二日生於林泉里第風姿秀偉才性超倫而巧於詩文肅廟丁卯登龍榜內爲成均館典籍世子侍講院弼善外倅結城橫城蔚珍遂安祥原諸郡縣保民如赤子大有患政及去後其士民思慕之爲之立去思碑旣而移黃州鎭管兵馬僉節制使陞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盡忠於邦國以壽七十七卒於英廟壬子十一月十七日墓在降峴坊龍湖里後洞枕子原公諱景華表德子實百忍堂其號也李之籍咸豊自高麗政堂文學咸豊府院君諱光逢始焉子曰延禮賓寺事孫曰安柢密直府事曰安相僉議贊成事是三世俱享永豊祠後簪組蟬聯至朝鮮朝有諱春齡號草齋文科官弼善當乙巳禍起抗疏峻論而見忤於當路出補襄陽府使愛其山水仍居焉是爲入鄕祖於公五代祖也曰應望蔭僉中樞墓稱金鷄抱卵形曰繼先贈司憲府執義曰天圭壽同中樞曰纘元僉中樞高曾若祖稱也齋淑夫人江陵崔氏父柱溟墓用魯禮有子女各三男長彙晉吏曹參議次彙漸通德郞次彙祥濟州牧使女適平壤趙進士璿東萊鄭萬櫶平山申嬉孫曰衡翼生員長房系子曰衡弼兵曹正郞曰衡喆進士次房出曰衡重三房出曾玄以下繁不盡錄嗚呼草齋公以乙史名賢其不食之報發於子姓龍虎榜生進科奕葉相望以爲關東之望族世稱鹿門名家而公其首顯者也公退仕後歸鄕築建溪書塾百忍堂以敎後生爲樂尤長於律詩嘗與鳴巖李海朝南岳趙宗著友善而有酬唱集其歿也尙書趙觀彬輓之曰幻身千億今世界公家父子節不虧於是乎公之爲人可以知之矣惜乎其嘉言美跡不盡傳於世也公之歿于今二百八十載墓尙無顯刻其諸子孫淨莎佳城而將竪碣奎南奎玉奎龍以其旁裔可範氏之介屬余以銘之余匪才不能闡發之辭之不獲乃系之以銘其銘曰
先有顯祖曰維草翁公克繩武門耀關東治郡施惠民立頌碑道交賢友麗澤洵丕解紱建塾諄諄育英德旣蓄內事業亦成吁彼龍岡君子眞宅我撮厥懿昭示來百
大韓光復六十五年庚寅暮春下浣光山金忠浩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