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의상
영화에서 소품이 지니는 의미는 생각보다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유럽의 예술영화에서 헐리우드의 대중 오락영화에 이르기까지 공간구성과 배우들의 소품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며, 보다 정교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배우들의 소품은 그 자체로도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때가 많다. 스타들의 의상․반지․구두 등등.....특히나 배우와 관객의 간격이 좁아진 요즘들어 소품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것은 소위 '유행'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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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텔미썸딩> - 심은하
영화 <텔미썸딩>에서 심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엽기적인 연쇄 살인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는 여인 채수연역을 맡아 열연중이다. 영화 속 심은하의 캐릭터는 얌전한 면과 화려한 면의 이중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그녀의 소품 역시 이런 이중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미술감독 정구호씨는 심은하의 정숙하고도 세련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색의 대비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따라서 영화 속의 심은하는 검정색 스커트에 아이보리색 자켓이나 미색 스커트에 검정 자켓을 주로 입고 나온다.
조형사(한석규)의 눈에 정숙한 여인으로 비춰진 심은하의 모습 속에선 별다른 악세서리를 찾아볼 수 없다. 과거회상 장면의 고교․대학시절 모습도 젊은 분위기의 심플한 스웨터와 바지가 전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섹시한 이미지로 변해가면서 영화 중반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등장하고, 후반부엔 진주목걸이를 한 심은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혼자만의 공간에서 그녀의 모습은 화려하다.
극중 심은하의 집은 이런 면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며졌다고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총 12개의 세트중에 가장 고급스럽게 꾸며진 것이 심은하의 집이 라고 정구호씨는 설명했다. 집은 화백이었던 아버지의 유물로 가득찼고 유명 그림과 전문서적이 즐비하다.
영화 <텔미썸딩>에서 심은하가 입고 나오는 의상의 95% 이상을 직접 제작한 정구호씨는 "실제의 심은하씨 이미지와 영화 속 채수연의 이미지가 일치되는 면이 많아 의상제작이 비교적 쉬웠다"라고 밝힌다. 그는 이어 "연쇄살인의 범인은 옷을 통해서도 추리해 낼 수 있다"고 귀뜀했다. 주인공의 소품을 통해 사건흐름을 예측해 보는 것도 영화를 감상하는 데 색다른 즐거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소름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어김없이 관객들을 찾는 영화들이 있으니 다름 아닌 공포영화다. 공포영화는 귀신이 등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스타일부터 <스크림>처럼 피가 난무하는 슬래셔 무비, <엑소시스트>처럼 초자연적인 대상을 통해 공포를 주는 오컬트 무비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작년 여름 우리는 이런 공포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공포 영화 <소름>을 만날 수 있었다. <소름>에는 분명한 공포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지만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음산한 분위기로 관객들은 어떤 공포 영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소름>의 배경은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서울 변두리의 한 아파트. 화재가 났던 이 아파트의 504호로 택시 운전사 용현이 이사해 온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사오는 용현의 시선을 따르는 카메라에 잡힌 아파트의 모습은 그 분위기만으로도 관객들에게 충분히 공포를 전달하는데, 이런 분위기를 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영화에 사용된 '실사조명'이다. 아파트 내부의 어두운 공간을 '블루'와 '그린'을 혼합해서 형광등 불빛 아래에 있는 듯한 효과를 냈으며, 낮 씬의 경우에는 양쪽의 터진 복도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효과적으로 살려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런 조명은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했다.
이사온 용현은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과 접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그의 관심을 끄는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 멍한 눈빛에 늘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여자 선영. 선영은 폭력적인 남편, 잃어버린 아이 때문에 삶의 의지를 거세당한 인물로 영화는 용현과 선영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택시운전을 하는 평범한 남성 용현은 의상 역시 가장 평범하고, 서민적인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용현이 주로 입는 의상은 두꺼운 점퍼와 면바지 등으로 용현이 입는 옷들의 특징은 거의 모든 의상이 무채색이라는 것이다. 회색이나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용현의 의상은 영화의 조명과 시너지 효과를 이뤄 음산한 분위기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세상 누구에게서도 사랑 받지 못한 용현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선영은 서로에게 위안을 받으면서 가까워지는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처음으로 호감을 느끼는 장면에서 선영은 빨간색의 풀오버 니트와 역시 같은 계열의 치마로 강한 이미지를 냈다. 뒤에서도 나오지만 무채색이 주를 이루는 영화에서 이 빨간색은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역할을 한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던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는 선영이 자신의 남편을 살해 한 뒤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선영은 비오는 날 밤 남편을 살해하고, 용현을 찾는데, 이 때 선영이 입고 있는 회색의 면 티셔츠는 선명한 붉은 색의 핏방울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 주면서 관객들의 공포감을 자극한다.
용현은 선영의 남편을 암매장해 주고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된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사랑이 조금도 남아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던 선영도 용현과의 관계에서는 따뜻한 면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서 용현의 목에 걸어주는 장면에서는 회색의 롱코트와 짧은 스커트로 영화 속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복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의상은 선영의 여성성, 나아가서는 모성의 이미지까지 표현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의상에서 가장 특이할만한 점은 바로 선영이 거의 모든 장면에서 스커트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매일 밤 편의점에서 일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삶을 사는 선영, 무심한 눈동자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선영이 항상 스커트를 입는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주목할만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선영의 모성을 표현해 주기 위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잃어버린 것으로 알았던 선영의 아이는 사실 선영과 남편의 싸움을 피해서 벽장 안에 숨었다가 죽은 것으로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선영이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는 아이를 잃는 애끓는 모정이 숨어 있는 것을 스커트라는 여성적인 의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강렬한 붉은 색의 이미지는 선영의 아이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도구로도 사용되는데, 선영이 자신의 아이를 떠올리며 눈물짓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옆집 소설가의 아이는 붉은 색 니트를 입어 아이에 대한 선영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선영과 용현이 감정의 대립을 보이다가 결국 용현이 선영을 살해하게 되는 장면에서도 선영은 붉은 색의 의상을 입어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일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소름>은 기층민의 분노를 대변하는 용현의 의상, 그리고 거세된 삶에의 의지 뒤에 존재하는 모성을 표현한 선영의 의상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는데 일조하고 있다.
운명, 광기, 그리고 분노…. 이런 인간의 감정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포가 궁금한 영화팬이라면 <소름>과 함께 한 여름 공포를 잊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황윤실/ 방송작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
60Kg이 넘는 몸무게, 줄담배에 술고래, 여기에 수다스럽기까지 한 서른 두 살의 노처녀가 있다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끔찍한 여성이겠군" "참 안됐다~ 쯧쯧…". 하지만 보편적인 생각이 반드시 진리는 아닌 법, 이 모든 특징을 한 몸에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여성이 있으니 바로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주인공 '브리짓 존스'다.
헬렌 필딩의 동명 소설의 영화화한 이 영화에서 여배우 르제 젤웨거는 헐리웃의 호리호리한 미녀 배우에서 영국식 액센트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뚱뚱하고 평범한 노처녀로 완벽하게 변신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위트와 유머가 돋보이는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인 이 영화는 의상을 살펴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은데, 최신 유행이나 돋보이는 스타일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영화 속 의상이 각각의 캐릭터를 잘 부각시켜 줄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을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서른 두 살의 노처녀에게도 시간은 비껴가지 않고,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부모님 집에서 새해를 맞게 된 브리짓, 브리짓의 엄마는 이혼남인 인권 변호사 마크와 브리짓을 연결해 주려고 성화다. 브리짓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가 입은 검은색의 코트와 바지를 타박한 엄마가 골라준 옷은 바로 칼라(collar) 부분에 프릴이 달린 깜찍한 와인색의 블라우스에, 꽃무늬가 큼직하게 수놓아진 조끼와 스커트. 브리짓의 표현대로라면 '카페트' 같은 이 의상은 뚱뚱한 몸매의 브리짓을 아줌마처럼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쨌건 가장 여성스러운 패션으로 마크의 뒷모습과 마주하게 된 브리짓, 뒷모습만 봤을 때는 "오호~ 저 정도면 꽤 괜찮을 걸" 했지만, 마크가 앞으로 돌아서는 순간, 이게 웬일! 마크가 입고 있는 진초록 색의 풀오버 니트 중앙에는 엄청나게 큰 루돌프 무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뒤의 상황이야 안 봐도 비디오.
어쨌건 검은색의 옷으로 몸매를 감추기에 바쁘던 브리짓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것은 핑크색의 니트에 엄청나게 짧은 미니 스커트와 검은 카디건. 보는 사람이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 패션으로 출근한 날, 그 동안 브리짓이 혼자 마음에 두고 있던 직장상사 다니엘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당신의 치마는 아파서 결근한 모양입니다."
다니엘이 메신저를 통해 브리짓에게 이렇게 추파를 던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브리짓은 더욱 과감한 의상에 도전하는데. 블랙의 브라가 훤히 비치는 시 스루(see through : 1968년 이브 생 로랑이 발표한 가슴, 팔 등이 투명하게 비치는 시폰 드레스에서 비롯된 말) 상의에 더욱 짧은 검정색 스커트. 매우 섹시한 스타일의 옷이지만 브리짓이 입어 왠지 어색하고 어설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패션으로 브리짓은 다니엘과 사귀는데 성공한다. 결국 브리짓의 울트라 미니스커트는 다니엘과 그녀를 연결시켜 주는 사랑의 메신저가 된 셈~.
이 영화에서 의상은 이렇게 영화에 유머를 주는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 사람의 캐릭터를 한 눈에 드러내 주는 역할도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크와 다니엘이다. 마크는 루돌프 무늬 스웨터나 눈사람 무늬 넥타이처럼, 우스운 아이템도 어머니가 권하는 것이라면 아무 말 없이 하는, 착하고 모범적인 남성인데, 그것은 그대로 그의 의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언제나 단정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한 정장차림을 하는데, 변호사라는 그의 직업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반듯하고 정확하고 정도(正道)가 아니면 가지 않는 그의 고지식한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다니엘은 노타이에 와이셔츠는 언제나 맨 윗단추를 풀어헤치고, 깃을 세우고 다니는데, 섹시함을 강조하는 듯한 이런 차림은 그의 바람둥이 기질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두 사람의 대조가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은 강에서 보트를 타는 장면. 피크닉을 왔기 때문에 마크도 양복은 벗었지만 흰색 티셔츠에 푸른색 풀오버 니트를 겹쳐 입어 단정한 반면 다니엘은 푸른색 와이셔츠의 단추를 제멋대로 풀어놓고 있다.
맨 위 단추까지 꼭꼭 채우는 너무 모범적인 마크와 가슴을 풀어헤치는 선수 다니엘 사이에서 갈등을 계속하던 브리짓, 하지만 진실과 진심은 언제가 통하는 법, 조금 고루하고 답답하지만 마크의 진실함을 알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검은색의 코트에 회색의 머플러를 똑같이 입음으로 이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사람이 입은 패션과 스타일은 그 사람의 첫인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루돌프 무늬 스웨터나 눈사람 무늬 넥타이 뒤에 숨겨진 그 사람의 진심을 꿰뚫어 보는 것 그것이 아닐까 한다.
20020705 / 고경석
한국 영화의 제작비가 늘어났다는 사실은 단지 배우들의 개런티가 상승하고 특수효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늘어난 제작비는 세트, 컴퓨터 그래픽, 조명 등 각 분야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상 역시 마찬가지. 최근 한국 영화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면 영화 속 의상이 얼마나 다양해지고 꼼꼼해졌는지 알 수 있다. 올 상반기에 발표된 7작품을 중심으로 한국 영화 속에 나타난 독특한 의상들을 살펴본다.
울랄라씨스터즈
감독 ․ 박제현 | 출연 ․ 이미숙 김원희 김민 김현수 김보성 | 의상 ․ 김시진 | 의상 제작비 ․ 5,000만 원
의상의 컨셉을 결정하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특히 이 영화처럼 특수의상이 많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럴 경우 의상 컨셉을 결정하는 데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은 음악이다. <울랄라씨스터즈>에 삽입된 음악은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 디스코 그룹 쉭의 'Le Freak' 등 80년대 분위기의 곡이 많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80년대로의 회귀. 하지만 배경이 현재라는 설정은 단순히 복고풍 의상을 재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현대적인 느낌이 가미되어 있어야 했고 쇼 의상이기 때문에 화려함이 더해져야 했다. 주연배우 외에도 여러 조연배우, 백댄서들에게 입혀야 할 의상은 총 150여 벌. 3개월이라는 시간은 네 명의 팀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빠듯했다. 게다가 노래와 춤에 맞는 의상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 밤늦도록 춤 연습에 몰입해 있는 배우들을 따라다니며 지켜봐야 했다. 네 주연배우의 코디들과 시장을 순례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박제현 감독과 네 명의 주연배우 및 이들의 코디들과 의견을 종합한 김시진 팀장은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했다. 원단과 다시 손질해서 쓸 만한 옷을 찾아다녔다. 쇼 의상은 원단은 물론 디자인도 무척 까다로웠다. 색깔도 눈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하고 조명을 충분히 반사할 만한 장식도 필요했다. 자세히 의상을 하나하나 뜯어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잘 모르겠지만, 라라클럽의 네 언니들이 입은 무대 의상에는 작은 구슬과 비즈가 꼼꼼히 박혀 있다. 장식물을 옷에 부착하는 것은 기계로 할 수 없는 일. 수작업으로 지체된 시간들을 만회하기 위해 스태프들과 배우들, 심지어는 박제현 감독까지 구슬 다는 일을 거들었다. 인건비를 제외하고서도 한 벌에 100만 원이 넘는 제작비가 든 의상이 나올 정도였다. 조연들의 옷도 제작하기 쉽지 않았다. 김거만을 연기한 김보성의 의상은 그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 느끼하면서도 화려한 색상으로 디자인했다. 그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참고한 영화는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버드케이지>. 박제현 감독의 제안이었다. 현재 이 영화에 쓰였던 주요 의상들은 인터넷 경매 사이트를 통해 팔려 나간 상태다.
정글쥬스
감독 ․ 조민호 | 출연 ․ 장혁 이범수 손창민 전혜진 | 의상 ․ 유재덕 | 의상 제작비 ․ 미상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은 <정글쥬스>의 의상을 보고 '양아치 패션'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실제로 양아치 패션이란 것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유재덕 실장이 <정글쥬스>를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은 보헤미안과 빈티지 룩이었다. 빈티지 룩이란 일본이나 미국에서 유행하는 스타일로 낡은 듯한 느낌의 옛날 옷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손질해서 입는 것. 코믹한 느낌에 치중하기보다 등장인물들의 자유분방함과 독특한 개성을 강조했다. 이런 컨셉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의상과 헤어스타일, 소품 등을 종합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비주얼 마케터 유재덕 실장은 의상 디자인뿐만 아니라 세트 디자인, 분장, 뮤직비디오의 아트디렉터, 앨범 재킷 디자인까지 시각 디자인과 관련된 종합적인 분야에서 활동해 온 인물. 그가 <정글쥬스>의 의상을 구상하면서 참고한 것은 가이 리치의 <스내치>를 비롯한 여러 유럽 영화들이다. 손창민의 의상을 보면 대충 연결이 될 듯. 영화 속 손창민의 외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재덕 실장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기존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머리를 삭발하도록 요구했고, 노동자들의 그을린 얼굴처럼 피부를 태우도록 부탁했다. 양복도 요즘 일반적인 스타일과 달리 품을 많이 좁히고 통바지를 입게 했다. 손창민에게서 느껴지는 보헤미안식 의상은 장혁의 옷에서도 표현됐다.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처럼 보이지만 집시의 냄새가 느껴지도록 일부러 옷에 기름때를 묻힌다거나 소매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이범수의 옷은 바지를 찢어 입은 듯한 반바지와 몸에 달라붙는 트레이닝복 상의를 입혔다. 전혜진이나 부산 갈매기파의 의상도 자유분방한 느낌을 최대한 강조했다. 언뜻 보기에 촌스러울 수 있지만 어딘가 독특한 멋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의 옷은 <정글쥬스>의 컨셉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챔피언
감독 ․ 곽경택 | 출연 ․ 유오성 채민서 | 의상 ․ 이자영 | 의상 제작비 ․ 8,000만 원
<챔피언>은 80년대를 다룬 <해적, 디스코왕 되다>와 달리 시대적 고증에 중점을 둔 영화다. 김득구가 살았던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당시의 풍경을 가져오는 것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열쇠였다. 참고 자료로 이용된 것은 김득구가 살았던 시대에 촬영된 사진들이다. 신문이나 잡지의 사진들에서 필요한 의상들을 찾은 후 원단을 찾아 나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일론의 질감을 느낄 수 있는 트레이닝복이었다. 최대한 질감이 나쁘고 오래된 듯한 느낌의 원단이 필요했지만, 시장 원리상 이런 원단을 찾는 것은 수풀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여러 창고를 순례하며 이 잡듯 뒤진 끝에 가장 질감이 좋지 않은 원단을 찾아냈다. 이렇게 찾아낸 원단으로 만든 것이 체육관의 선수들이 입는 트레이닝복이다. 자세히 보면 트레이닝복 디자인이 요즘 것과 많이 다르다. 몸에 완전히 달라붙지는 않지만 약간 작다는 느낌을 줄 정도의 어색한 크기에 길이도 좀 짧은 편이다. 배우들도 의상을 착용한 후 어색했었는지 큰 사이즈를 달라고 웃으며 불평할 정도였다. 유오성이 입었던 평상복이나 양복도 철저히 시대 고증을 거친 의상들이다. 유오성이 채민서와의 데이트를 위해 몰래 빌려 입었던 리바이스 청재킷도 동대문 구제의류 가게를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 '희귀 골동품'이다. 의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오성이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후 고향에 돌아가면서 입었던 양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요즘 양복 상의보다 2인치 정도 더 넓은 칼라를 자랑하는 투 버튼 재킷의 뒷부분에는 트임이 두 갈래로 있어서 80년대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려 준다. 주름이 없는 바지도 마찬가지. 유오성의 가난을 대변해 주는 옷과 대비되는 채민서의 단아한 의상은 당시 중산층의 멋을 드러낸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체크무늬 치마에 단조로운 상의 스웨터는 80년대 초반의 가장 일반적인 유행을 단적으로 제시한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
감독 ․ 김동원 | 출연 이정진 양동근 임창정 한채영 이대근 김인문 | 의상 ․ 양민혜 | 의상 제작비 ․ 2,500만 원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시대극이 아니라 판타지 코미디다. 의상 역시 예전의 기록을 도장 찍어내듯 복사해 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상상력으로 재해석해야 했다. 의상을 담당했던 양민혜 팀장은 현실적이되 뭔가 독특한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영화의 배경은 80년대지만 의상팀이 컨셉으로 잡은 것은 70년대 말 분위기였다. 그래서 <시라소니> 같은 70년대 한국 영화와 <토요일밤의 열기> <그리스> 같은 외국 영화를 참고했다. 각 캐릭터에 맞게 컨셉을 잡는 것도 중요했다. 주인공 이정진은 나팔바지식 청바지를 제외한다면 지금 입어도 나쁘지 않을 만큼 평범한 의상을 택했다. 반면 양동근은 80년대 초 분위기를 한껏 강조하기 위해 실제로 당시에 만들어진 옷을 입히기로 했다. 양동근이 입었던 갈색 '골덴' 재킷과 야구점퍼는 의상팀의 발품이 일궈 낸 수확이다. 이런 의상은 대개 7~9만 원 정도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임창정의 의상에 든 비용은 이보다 훨씬 적다. 트레이닝복은 스태프 중 한 명이 직접 집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을 들고 온 것이고, 다른 체육복과 니트류는 모두 황학동 도깨비시장에서 2~3,000원에 산 것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춤 선생으로 등장하는 정은표가 입었던 옷들이다. 3만 5,000원을 주고 도깨비시장에서 산 여성용 빨간 가죽 재킷과 3,000원에 구입한 빨간색 내복을 제외하고는 전부 의상팀이 제작했다. 특히 디스코 경연대회 때 입은 흰색 바탕의 꽃무늬 상․하의는 커튼이나 이불보를 만드는 천으로 제작했다. 이 옷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던 정은표는 나중에 결혼식에 직접 입고 가겠다는 진심 어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단역으로 등장한 이혜영의 옷도 눈길을 끈다. 김인문의 병원행에 원인을 제공했던 이혜영의 미니스커트는 롱스커트를 잘라서 새롭게 만든 것이다. 빨간색 꽃무니 털 점퍼는 동대문 시장에서 힘겹게 찾아낸 옷이다. 의상팀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어쩌면 좀 더 칙칙하고 어두운 영화가 됐을지도 모른다.
예스터데이
감독 ․ 정윤수 | 출연 ․ 김승우 김윤진 최민수 김선아 | 의상 ․ 김은숙 | 의상 제작비 ․ 5,500만 원
SF에는 크게 두 가지 스타일이 있다. <스타워즈>처럼 전혀 비현실적인 배경을 만들어 내는 영화와 <블레이드 러너>처럼 현재의 풍경과 흡사한 근 미래를 다룬 영화가 그것이다. <예스터데이>는 후자에 가까운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의 의상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SF 영화에 시각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감독과 의상 디자이너가 몰랐을 리 없다. 의상팀은 2025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2002년의 패션과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유행의 재활용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2025년의 패션이 굳이 미래적일 필요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게토 지역의 인물들에게는 70년대 느낌의 옷을 입혔고, 인터시티 지역의 형사들을 위해서는 미니멀한 디자인에 모노 톤의 의상을 만들었다. 단순한 디자인 때문에 쉽게 확인이 가능하지는 않지만, 김승우의 옷은 특수한 여밈 방식과 비즈 장식이 미래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그의 캐릭터와도 잘 부합되는 의상이다. 금속 지퍼 장식을 제외하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김윤진의 수트는 기능성과 심미성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무술에 능란한 활동적인 특수경찰 김선아의 옷은 피부의 느낌과 비슷한 광택과 질감의 원단을 사용해 바디라인을 살림으로써 매이의 대담한 성격을 부각시켰다. 판초 스타일의 점퍼는 방탄 및 잠복의 용도로 쓰이는 특수복이다. 의상팀이 난항을 겪었던 것은 최민수가 연기한 골리앗의 의상이었다. 어두운 색상의 코트를 입히게 되면 누구나 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의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의상팀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민수의 의상은 원래대로 만들어졌다. 특이한 것은 최민수가 시나리오를 읽은 후 직접 시안을 그려 의상팀에 제시했다는 사실.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의상은 그의 의견이 70퍼센트 이상 반영된 것이다.피도 눈물도 없이
감독 ․ 류승완 | 출연 ․ 전도연 정재영 류승범 | 의상 ․ 조상경 김누리(전도연 코디) | 의상 제작비 ․ 1,500만 원
펄프 누아르라는 이 영화의 장르는 의상의 전체적인 컨셉을 대변한다. 조상경 팀장은 누아르 영화의 컨셉에 맞게 색깔과 질감을 선택했다. 의상을 준비하면서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조명이었다. 콘트라스트가 강한 밤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질감과 색깔을 선택하는 데 무척 신중해야 했다. 액션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활동이 편한 옷이어야 했고, 같은 옷도 여러 벌 준비해야 했다. 국내에 흔치 않은 누아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의상팀은 여러 영화들을 참고했다. 전도연의 의상은 <트루 로맨스>을 참고했고, 범죄와 관련된 여러 인물 군상을 그려내기 위해 <스내치> <록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같은 영화도 다시 살폈다. 조상경 팀장은 전도연의 캐릭터를 팜프 파탈 이미지로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전도연에게 순진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었다. 전도연이 영화 초반에 입었던 검은색 미니스커트와 호피무늬 상의는 이 같은 감독과 의상팀장의 절충을 통해 만들어진 옷이다. 정재영은 보스라는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세미캐주얼 양복을 준비했다. 밤 장면에도 충분히 질감을 살리기 위해 스트라이프를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발은 늘 뛰어다녀야 하는 설정 때문에 구두가 아닌 스니커즈를 신겼다. 전도연과 대비시키기 위해 이혜영에게는 밝은 색이 아닌 카키색, 황토색, 진회색 같은 어두운 색 옷을 입혔다. 생활력이 강한 캐릭터를 부각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인공들에 비해 류승범 일당과 백찬기 김영인 커플의 칠성파는 밝은 색 옷이 주종을 이룬다. 중후한 의상을 염두에 뒀던 칠성파 두 배우들은 양아치 같은 의상이라며 처음에 난색을 표했다고. 두 노장 배우가 화려한 무늬의 의상을 입고 촬영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류승완 감독의 끈질긴 설득 때문이었다.
취화선
감독 ․ 임권택 | 출연 ․ 최민식 유호정 안성기 김여진 손예진 | 의상 ․ 이혜란 | 의상 제작비 ․ 2억 원
MBC 미술센터에 소속되어 있는 의상 디자이너 이혜란에게 영화 데뷔작 <취화선>의 의상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허준> 등 드라마에서 이미 실력을 쌓아 온 의상 디자인의 베테랑이지만 구한말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취화선>은 브라운관의 몇 십 배에 이르는 스크린 크기만큼 그녀에게 큰 부담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신나는 도전이었다. 대본에 쫓겨서 욕심만큼 좋은 의상을 만들 수 없었던 드라마와 달리 영화 의상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원하는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전체적인 색감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암시하기 위해 베이지색 계열을 택했다. 역사극인 이유로 고증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지만, 굳이 고증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영화적 리얼리티는 따로 있다는 결론이 선 이후 <취화선>의 의상 제작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영화의 주인공인 장승업의 변화하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그녀는 나이대별로 의상의 색을 변화시켰다. 머슴으로 일하던 20대는 베이지색으로 선택해 일반 서민들과 큰 차별점을 두지 않았고, 고뇌의 시기인 30대는 푸른색으로 대신했다. 장승업의 예술적 깊이가 깊어 감에 따라 의상의 색도 짙어진다. 스스로를 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40대의 장승업은 주로 짙은 자줏빛을 입고, 말년의 50대에는 검은색에 가까운 의상을 입는다. 장승업의 여자들을 의상으로 구분시켜 주는 일도 무척 힘들었다. 장승업의 영원한 연인인 기생 매향의 의상은 양반 출신의 기품을 풍기기 위해 화려한 원색의 한복을 만들었고, 첫사랑 소운의 의상은 병약한 모습과 청순 가련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흰색 바탕에 자주색 고름이 있는 저고리를 제작했다. 기생 출신의 진홍은 서민다운 투박하고 직선적인 성격을 위해 무명을 소재로 탁한 색을 사용했다. 다양한 캐릭터들을 표현할 수 있는 디자인도 힘들었지만 일상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질감을 표현하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새로 만든 옷을 빨고, 사포질하고 다시 빨기를 몇 번. 영화 속의 자연스러운 풍경은 의상팀의 고생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글: 고경석 기자
자유논문 자료를 찾다가 얻은 자료예요, 이런 부분도 좋은 연구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이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 뿐 아니라 주인공의 의상까지 눈여겨 보게 될것 같지 않나요? ^ ^*
첫댓글 고마워
모두 열심이라서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