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엔 누구나 다 그랬듯이,
나역시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부모님을 만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 인척 중에 어느 한자리쯤 목에 힘주는 자리에 앉아서
면제는 아니더라도 하다 못해 동사무소 방위(?)라도 은근슬쩍 어떻게든
힘써줄만한 사람이 내 주위엔 눈을 씻고봐도 없었던 나로선,
요즘 말많은 고관대작 자식들처럼 군대 면제라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꾸는
처지였던지라, 입대 날짜가 다가오자 당연하다는 듯이 머리 빡빡 밀고...ㅜ
입영열차 타던 날 마중나온 녀석들과 손바닥 한번씩 부딪치고...
그렇다고 딱히 사귀는 여자도 없었기에 그녀의 눈물을 떠올리며 그녀의 사진을
손에 꼭 쥐고 가슴 짠할 일도 없었을 뿐더러 고무신 거꾸로 신을 일은 더더욱
없었기에 그저 무덤덤한 척 담담하게 논산 훈련소로 떠났다.
논산 훈련소!
혹은 다른말로 수용연대!
입대 영장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씩 거치는 그곳.
아! 누가 이곳을 군대라고 했는가...
지금이야 어떻는지 모르지만 그땐 그곳은 아오지 탄광의 강제 수용소 같았다.
맨처음 군복과 통일화(작업화)를 지급 받자마자 그 시점부터 난 노역자가 되었다.
계급도 이름도 없었다.
오로지 "얌마, 너 이리와." 가 전부였다.
말이 훈련소이지 훈련은 어느 곳에도 실시하는 곳이 없었다.
이리하여 신체 건강한 대한의 건아 오수일은 졸지에 노역병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저 상관들의 손가락하나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온갖 궂은 일을 다하였다.
멋진 군인이 되리라던 애시당초의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저 어떻게 하면
노역병 차출에서 요령껏 빠져나가 편하게 하루를 보낼까, 또는 어떻게든
잔재주를 부려 밥을 한번 더 타먹을까 하는게 그무렵 나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처음엔 이러는 내가 몹시 싫었고 수치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 배고픈데 장사있으랴!
인격이나 자존심 따위는 배고픔 앞에는 위선에 불과하고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비굴해 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참으로 수치스럽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다른 한명과 함께 음식찌꺼기를 모아둔 잔밥 통을 뒤진 적도 있었다.
누군가 나를 배불리 먹게 해준다면 그를 위해 무슨짓이든 할수도 있을것 같았다.
요즘 군대가는 젊은이들은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난 감히 말 할수 있다.
냉, 온방된 안락한 시설에 질 좋은 음식을 배 불리 먹을 수 있는것만 해도
그것은 축복이 아닌가..
매일 매일이 참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참으로 가혹하게도, 나와같이 입대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 모두 팔려 갔는데도
(그땐 보직을 받고 자대에 배치 되는걸 팔려간다라고 표현함) 어찌된 영문인지
입대후 한달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사역병 신세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어느날 힘든 사역을 마치고 모두 모여서 잠시 쉬고 있던 중 우리 앞에 입이 떠억
벌어질 정도로 삐까뻔쩍?한, 기가 막히게 멋있는 공수부대 중사가 한명 나타났다.
검은 베레모에 썬그라스를 끼고 칼날 같은 주름이 선 얼룩무늬의 정글복을 입었으며
독일군 장교들 신는것보다 더 길쭉한 번쩍번쩍한 장식을 메단 처음보는 군화를 신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처음 본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와!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멋있는 군인이 있었던가?
영화 ‘디어헌터’에 나오는 '로버트 드 니로' 보다도 더 멋있었다.
그를 만나는 순간 나의 운명의 끈은 후일 엄청난 수난과 고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때에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우리를 빙 둘러보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두 주목!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들어라."
우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일제히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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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첫댓글 올려주신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