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진묵震黙과 석두石頭
1) 전주를 중심으로 두유逗留한 진묵대사
진묵대사(1563 명종18 - 1633 인조11)는 김제 만경 불개(火浦)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가계와 씨족은 명확히 알 수가 없고 그의 어머니 조의調意씨1)의 이름만 남아 있다.
일설에 의하면, 불개의 부부가 불심이 매우 깊은 서방산 봉서사의 신도들이었는데 40이 넘도록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열심히 생남 기도를 하였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조의가 태몽을 꾸었다. 영롱한 구슬이 잠자는 베개 옆으로 떨어져서는 차차 변하더니 마침내 금빛 찬란한 부처의 모습이 되었다. 조의씨는 뭇 스님들과 함께 이 부처님 앞에 무수히 절을 하다가 깨어났는데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열달만에 생남하였다. 아이가 태어나는 날 자시 무렵에 그 집에 밝은 빛이 오래도록 머물러 먼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새 아기의 탄생을 축도하였다. 아버지는 천신께서 내려주신 하나의 구슬이라 하여 아기 이름을 ‘一玉’이라 지었다2).
≪진묵조사 유적고≫를 보면 진묵이 태어난 곳은 ‘만경현 불거촌佛居村’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은 현재 만경면 화포리火浦里이다. 화포는 한자화한 지명으로 본디 우리말은 ‘불개’이다. 불개는 뻘로 된 개[浦]라는 말이고 그것이 ‘화포’로 기록된 것이다. 화포리는 만경강 하구에 있는 마을로서 서해와 접한 뻘로 된 개이므로 뻘개→불개→火浦란 이름으로 변하였다.
지명 중 예전에 ‘火夫里’ ‘佛伐’ 등으로 기록된 곳은 거의 본시 우리말 ‘블’을 한자 새김으로 빌거나 음을 베껴 그렇게 기록한 것이데, 그 ‘블’은 벌, 벌판, 뻘, 펄(개펼) 등의 말이다. ‘벌’이나 ‘벌판’은 들이나 수목이 없는 넓은 곳의 뜻이고, ‘뻘, 펄(개펄)’은 조수가 드나드는 곳의 넓은 진흙땅을 뜻하지만 본래 어원은 같은 말이다. 불[火]의 옛말은 ‘블’이고 불[弗]의 고음도 ‘블’이다. 그런데 우리 말의 입술 소리 ‘ㅁ,ㅂ,ㅍ’이 첫소리가 된 ‘ㅡ’모음의 말은 후대로 오면 거의 ‘ㅜ’모음이나 ‘ㅓ’ 모음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본시는 ‘블개’였으므로 한자 말 ‘火浦’로 썼지만 ‘블’이라는 말이 후대에는 ‘벌, 뻘’이 되었으니 ‘벌개, 뻘개’는 곧 벌판 또는 뻘로 된 개[浦]라는 말이고 그것을 ‘벌, 뻘’의 전기어 시대에 ‘화포’로 기록한 것이다. 화포리는 만경강 하구 옆으로 서해와 접한 뻘로 된 개이므로 그런 이름이 합당하다3).
진묵이 태어날 무렵 근처의 초목이 3년 동안이아 시들어 죽어, 사람들은 영웅 호걸들이 태어날 기운(間氣)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진묵은 어려서부터 냄새나는 채소나 비린내 나는 음식을 싫어하여 마을 사람들은 우리 동네에 부처님이 나셨다고 덕담을 하곤 하였다.
진묵이 7세 때 단 하나 뿐이 동기간이 누나가 완주군 춘포면 쌍정리로 시집을 가고4) 불심이 장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봉서사에 출가하였다. 봉서사 鳳棲寺는 시집간 누나네 집과 가까운(20리길) 완주군 소양면 서방산에 있는 절이다.
진묵이 발심한 것은 누나 집에 놀러가서였다. 만경면 불개에서 춘포면 쌍정리까지는 50리 길이다. 하루는 모내기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농부들이 별 까닭도 없이 개구리를 보면 잡아서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진묵은 바들바들 떨면서 죽는 개구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진묵은 보통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 흥미를 잃고 문득 중들이 살생을 금하는 일을 생각하고 그속에 가서 살 것을 결심하였다.
진묵은 효심이 장하였다. 자신은 중이 되었어도 노모 봉양을 그치지 않았다. 진묵이 전주부성 밖 아중리 일출암에 있을 때 절 아래 마을에 어머니를 모셨고 유난히 모기를 타는 노모를 위하여 신통을 부려 쫓기도 하였다.
노모가 죽자 진묵은 고향 만경면 불개에 등 너머 아득히 만경강 하구 개펄이 보이는 명당에 묘를 써 자손이 없어도 천년을 제사 지낼 수 있도록 신통을 부렸다.
진묵이 모친의 묘를 잡은 주행산舟行山은 불개(火浦里)에서 2.5km 떨어진
야트막한 야산이다5). 풍수가 손석우는 이 자리를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이라고 하는데 산 이름과 묘하게 일치한다.
자그마한 이 야산에는 최근에 조앙사와 성모암과 조사전이 건리되었다. 조앙사는 1915년 3월 15일 강생술 보살이 진묵조사를 추앙하여 15평 대웅전을 건립한 데서 시작된다. 뒤를 이어 7층 석탑(1928)과 종각(1958) 등을 건립하였다. 조앙사는 유문수 스님에 이어 현재 공원성불 보살이 관리하고 있다.
성모암聖母庵은 진묵의 모친 묘소 옆에 있는 절이다. 1917년 5월, 이순덕화가 계룡산 신도안에서 기도를 하고 고향 임실로 돌아가다가 화포 근방의 마을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영몽을 꾸게 되었다. 서쪽 하늘로부터 흰가마가 내려오더니 한 스님이 나와서 가마를 타라고 하였다. 그 가마 안에 들어앉으니 공중을 날아 어느 묘소 앞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스님을 그녀에게 쉬어 가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이순덕화가 깨어 일어나 집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곳에 진묵대사의 어머님의 산소가 영험하니 참배하고 소원을 빌어보라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묘소를 찾아가니 허물어져 알아보기 힘든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순덕화는 바로 묘소에 사초를 하고 10여 성상을 시묘살이를 하면서 지방 유지들과 힘을 함하여 봉향계奉香契를 조직하고 1928년에는 진묵전을 창건하였다. 1929년 4월에는 진묵대사의 약력을 새긴 기념비와 고인이 된 이순덕화의 공덕비를 세우고 묘 아래 제각을 건립하니 이것이 바로 성모암이 되었다.
조사전을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성모암과 조앙사의 등 너머에 있는 영정각이다. 진묵대사와 모친 조의씨 그리고 누님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바로 지척의 거리에는 마경강 하구 펄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진묵은 일생을 거의 전주를 중심으로 크지 않은 조그마한 절에서 살았다. 동, 남방쪽으로는 완주군 용진명의 봉서사와 상운암上雲庵, 원등암, 만덕산의 미륵사, 정수사, 일출암, 서쪽으로는 모악산 대원사와 변산 월명암, 김제 망해암 등이다.
봉서사는 전라북도 용진면 간중리 서방산에 있는 절이다. 신라 성덕왕 35년 해철선사가 창건하였고, 진묵대사와 신이神異한 일화와 진묵의 부도로 인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진묵대사 부도가 전북 무형문화재 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에서 가장 가까운 절은 일출암이다. 현 전주상고 교정인 마당재를 넘어서면 아중저수지가 나오가 이 저수지를 끼고 돌아가면 왜막실이다. 왜막실에는 일출암이란 작은 고찰이 있는데 이 절은 진묵대사가 창건한 것이다.
진묵이 일출암에 있을 때 어머니가 왜막촌에 살았는데 여름이면 모기 때문에 고생하였다. 그래서 효심 장한 진묵이 산신령에게 부탁하여 모기를 쫓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곳에는 모기가 없다고 한다.
일출암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근래에 중건되었다.
우아동 왜막실은 왜병들이 막을 짓고 살았대서 붙은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곳에 주둔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다소의 왜군들이 군복을 벗고 이곳에 취락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통칭 왜막실이라 불렀다. 이곳에 정착한 왜군 잔류민들은 한인으로 귀화하고 김씨 성을 썼는데 이글은 ‘왜막실 김씨’ 또는 ‘전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6)
완주군 상관면 마치리에 소재하는 정수사淨水寺는 신리에서 만덕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절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 진성여왕 2년(889)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 뒤 고려시대에 중건되었다가 다시 조선조에 들어와 선조 때 진묵대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단암사丹岩寺는 소양면 죽절리에 있는 절이다. 조선 성종 원년(1470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1929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진묵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 절 모습은 1955년에 중건한 것이다.
원등암遠燈庵은 소양면 해월리에 있는 절이다. 진묵대사가 5백 나한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던 것을 8.15 행방 뒤에 재건하였고, 6.25 동란 때 참선당만 남고 전소되었다. 현 법당은 1956년에 중건하였다.
대원사大院寺는 모악산 동쪽 산중턱에 전주 쪽으로 향하여 있는 절이다.
1917년 대원사에서 몇 달 독공한 적이 있는 정산은 진묵대사의 이야기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내가 그 절에 묵고 있을 때 어린 상좌가 ‘이 절 가난이 앞으로 5년은 남았다‘면서 그 내역을 이야기 하더라”
진묵의 일화는 대강 다음과 같다.
진묵이 대원사에 와 얼마동안 있을 때, 절 인심이 각박하여 제 때 밥 얻어먹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배가 고픈 차에 마침 절을 중수하는 일꾼들에게 주기 위해 불목하니가 곡차(술)을 거르고 있으므로 한잔 얻어먹을 양으로 “거 무얼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술을 거릅니다.”
진묵이 다시 물었다.
“거 무얼하고 있느냐”
“술을 거릅니다.”
이렇게 세 차례를 물을 때마다 한 대답이므로 종내 곡차를 대접받지 못하고 남은 술지게미라도 얻어먹으려는데 그마저도 재 거름 속에 묻어버렸다.
다음날, 다시 술 거를 때도 역시 세 번째까지 불목하니는 “술을 거릅니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므로
“그 참 고얀 놈이로고”
진묵이 화가 나 말하자 불목하니의 턱이 떨어져 붙지 아니하였다.(일설에는 금강역사가 불목하니를 철봉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였다 한다)
“내 여기 머물를 데가 못 되는구나”하고 진묵이 대원사를 떠나오자 허공에서 큰소리가 울렸다.
“이후 300년 대원사는 빈천보를 면치 못하리니, 애도롭다!”
이후 대원사에는 불공도 아니 들어오고 농사도 잘못 되어, 정산이 대원사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 옹색함은 마찬가지였다. 대원사 어린 상좌의 이야기대로(정산이 대원사 머문 때) 그로부터 5년 뒤 새 주지가 들어오면서부터 절 형편이 아주 좋아졌다고 한다.7)
진묵의 곡차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근래에 전국 도처에 민속주개발이 한창 붐을 이루고 있는 판에, 대원사 위에 있는 수왕사의 한 스님이 그곳에서 전래해 오는 토속주를 개발하여 ‘진묵대사가 담궈 즐겨 마신 술’이라 하여 경향 각지의 매스콤의 각광을 받은 적이 있다.
1) 전북향토문화연구회에서 낸 ≪김제인의 유적≫에 보면 ‘調意’라는 이름은 불교적인 이름으로 진묵의 어머니의 성은 고씨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근거는 화포리 주민들의 전래에 근거하며 또 ‘고시레 전설’에서 찾고 있다. 화포리 조앙산 진묵의 어머니 묘가 천하 명당으로 無子孫千年香火之地로 유명한데 이 전래 설화는 ‘고시레 전설’과 유사하다.
2) ①봉서사 진묵전 벽화 참조. ② 손석우 ≪터≫ 下 <진묵대사와 무자손향화자자> 305쪽
3) 전북향토문화연구회, ≪김제인의 유적≫ 360쪽 1994.9
4) 진묵의 누나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로 시집 갔다는 이야기는 이 고장 주민들 사이의 전래 설화이다.
5) 진묵의 모친 무덤이 있는 현지 안내문이나 ≪김제 군지≫ ≪김제인의 유적≫에 보면 모두 ‘維仰山’ ‘祖仰山’ 등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나 국립지리원 ≪지형도≫를 보면 ‘舟行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주행산에 소재한 진묵祖師를 기념하여 건립한 祖仰司가 와전되면서 발생한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6) 전주시청, ≪우리 고장 전주≫ 419쪽 1982.12
7) 이상의 이야기는 정사종법사 재세시 시자로 있었던 박정훈교무로부터 취재한 것임
* 진묵과 석두는 양이 많아 1,2편으로 나누어 올려 드립니다.
다음 편은 진묵대사의 많은 이적이 중심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