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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B Coil 및 테슬라코일 제작 스크랩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발전기2)
정안군 추천 0 조회 46 12.12.30 15: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람들은 니콜라 테슬라가 얼마나 뛰어난 천재였는지 잘 모르고 있지만, 현대의 위대한 발명품들의 대부분은 그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만 간 이 천재 과학자는 전기에 관련된 기술들을 무수히 발명해 냈다. 특히 교류 시스템(그때까지는 여러모로 불편한 직류 시스템만 사용되고 있었다.), 방사선에 대한 이론, 무선 제어 장치(리모컨), 교류발전기, 유도 전동기, 고주파 램프(네온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그리고 음극선관 텔레비전에 사용되는 테슬라 코일 등이 그의 대표적인 업석이다. 또 1893년에는 마르코니보다도 훨씬 일찍 헤르츠파를 이용한 무선 전신 장치를 시연해 보였으며, 1900년에는 파동 반향의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훗날 레이더가 개발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모두 900여 개에 달하는 특허를 출원했는데 그 대부분은 에디슨이 가로챘다고 한다.

이상주의자였던 테슬라는 자신이 개발한 기술들을 무상으로 대중에게 제공하기를 원했지만, 이는 오히려 당시 실업가들의 미움을 사는 이유가 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에펠 탑에서 강력한 전기장을 발출함으로써 온 파리 시민이 전기를 무료로 사용하게 되기를 꿈꾸었다. 1898년, 그는 규칙적인 진동을 일으킴으로써 건물 전체를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지진 발생기를 만들었다. 또 무선 원격 조종되는 어뢰 발사선들도 만들었는데 그중 한 척은 잠수함으로 발전 가능한 것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극도로 가난해진 그는 미국 공군을 위해 <죽음의 광선>을 개발한다. 또 우리가 공짜로 무한히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원인 <우주 에너지>도 개발하려 시도하지만, 이는 당시의 다른 과학자들이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1943년 1월 7일, 그가 사망하자 FBI는 그의 모든 연구 노트와 제작 모형들을 압수해 간다.

불쌍한 삶을 사 그의 명성은 많이 잊혔지만, 그의 이름은 자기력선속의 단위<테슬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 제 6권    신 5권에서 발췌

 

최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세 번째 해외 R&D센터가 옛 유고연방인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테이블PC, 필기인식소프트웨어 개발 등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첨단 프로젝트들이 진행 중에 있다. 이는 발칸반도 국가들의 인재들이 IT분야에 발군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R&D센터의 대표에게 발칸인들이 IT에 발군인 특별한 이유라도 있냐고 물었을 때 “니콜라 테슬라를 낳은 땅이라서 그런지 모르지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니콜라 테슬라(1856년-1943년)는 세르비아계 천재 과학자로 프라하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에디슨의 회사에 취직했다. 28세 때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신이 발명한 교류시스템으로 바꾸자고 주장했으며, 훗날 그의 주장대로 교류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3)

 

에디슨은 뛰어난 발명가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신의 발명품이나 혹은 타인의 발명품의 상업화에 더욱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사업가였다. 그렇기에 그의 수많은 발명품(공식적으로 1069개)들이 더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에디슨과 경쟁했던 니콜라 테슬라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었다. 따라서 에디슨의 직류시스템보다 훨씬 뛰어난 교류시스템을 개발하고도 그것의 상업화에 따른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쓸쓸한 천재과학자의 길을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과학 문명을 1백년 앞당긴 천재 과학자’와 ‘시대를 앞서간 몽상가’라는 너무나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테슬라는 1856년 크로아티아의 스밀리안(Smiljan)에서 목사 아버지의 2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고양이를 만지다가 느낀 정전기에서 처음 전기에 대해 인식했었다는 그는, 크로아티나의 카를슈타트(Karlstadt)에 있는 김나지움을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프라하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정도의 수재였다.4)

교류발전에 대한 관심은 김나지움 시절부터 가지기 시작했으며, 십여년 후 교류발전기를 개발하게 된다. 당시 미국 전력사업의 중심에는 에디슨이 위치해 있었는데, 에디슨은 불안정하고 위험한 교류시스템보다 안정적인 직류시스템을 이용한 전력사업 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류전기는 치명적인 결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송전할 수 있는 거리가 매우 짧아서 발전기에서 반마일 정도만 떨어져도 충분한 전력공급이 어려웠으며, 전력의 공급을 위해서는 전력선이 매우 두꺼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기선으로 이용되는 구리의 제한된 양을 고려할 때 이는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직류전기의 단점으로 인한 불편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뉴욕의 전차는 고장으로 절반이 운행을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본 브루클린 사람들은 ‘전차를 기피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트롤리 다저스(Trolley Dodgers)’라는 모임까지 결성했다. 이를 계기로 ‘브루클린 다저스’ 야구단이 생겨났고 이것이 지금의 ‘LA 다저스’가 되었다고 한다.5)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발전기2)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발전은 직류발전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었다. 조지 웨스팅하우스의 지원을 받은 테슬라는 교류발전시스템의 개발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에디슨은 공개적으로 교류의 위험성을 비난하게 되고, 직류시스템과 교류시스템은 차세대 전력사업의 기준이 되기 위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에디슨은 교류의 위험성을 선전하기 위해 사형수의 사형집행에까지 교류전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빛의 제국’을 향한 ‘전쟁’에서 결국 테슬러와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승리하게 된다. 이들이 승리를 확정지은 것은 1897 1월 나이아가라폭포 전력사업이 교류발전시스템을 이용해서 건설되었을 때이다. 1 12일에 있었던 축하파티에서 테슬라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남긴다.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얻는 즐거움과 그것에 의해 동료들에게 베풀지도 모르는 선을 위해, 또한 양심에 따라 그것을 하지만 어떤 물질적인 이득이나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정신”을 존중하라고 강조한다6). 이상주의자였던 테슬라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난 연설이었다.

 

테슬라는 교류전쟁의 화려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식사 전에 식기들을 수십 번도 더 닦아내야 할 정도로 세균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는 뉴욕에서 파리지앵으로 불릴 정도로 멋을 부리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던 시절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1943년에 무일푼의 신세로 뉴욕의 한 호텔에서 지켜보는 사람 없이 86세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불행했던 그의 삶도 후세에는 빛나게 된다. 미국 과학자의 상당수가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를 읽고 과학도의 길을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미국 엘리트 과학자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조국인 세르비아에서는 국가적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공식화폐인 100 세르비안디나르(Serbian Dinar)의 인물로 등장하고 있으며, 수도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공항도 그의 이름을 따서 니콜라 테슬라 공항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자기장의 세기를 표시하는 단위인 ‘테슬라’를 통해서도 그의 이름은 기억되고 있다.

 

   

 100 세르비아디나르 화폐에 있는 니콜라 테슬라와 발전기2)

 

생전에 그가 추진했었던 수많은 연구 중에서 일부분은 아직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지속되어지고 있다. 무선 에너지 전송기술, 테슬라 터빈, 테슬라 모터, 죽음의 광선 등은 현재까지도 유효한 연구 주제이며1), 그의 업적이 오랜 기간 지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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